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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04)의암 주논개는 기녀였을까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조선의 재담꾼 유몽인이 『어우야담』에 논개를 소개한 첫 구절이다. 이 때문인지 논개는 왜장을 유혹하여 끌어안고는 물속으로 몸을 던져 함께 죽은 ‘의로운 기생’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논개는 장수 주촌마을의 선비인 신안 주씨 주달문과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양반가의 자손이며 의병장이자 장수현감을 지낸 최경회의 부인이다.

의암 주논개 표준영정.
의암 주논개 표준영정.

주논개(朱論介, 1574-1593)란 특이한 이름은 개해인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인 ‘4갑술생’으로 태어난 사주에 따라 개해에 낳은 개 ‘놓은 개’란 뜻으로 부친이 지어준 이름이다. 아들을 잃고 얻은 외동딸의 특이한 사주에 고민하다가 귀한 자식일수록 이름을 함부로 짓게 되면 귀신이 샘을 내지 않아 오래 산다는 속설에 따라 지어진 이름으로 전해진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논개는 당시 훈장을 하던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다가 부친이 일찍 세상을 뜨자 모친과 함께 숙부 집에서 기거하게 된다. 그러다 숙부가 장수의 부호 집에 민며느리로 팔아넘기려 하자 논개의 모친 고향인 경상도 함양으로 도주하여 지냈지만, 곧 발각되어 장수현감인 최경회(1532-1593)에게 불려가 횡령죄로 재판을 받으며 훗날 지아비가 될 그를 처음 만나게 된다.

논개사당과 의암호의 가을 /사진 제공 = 장수군청
논개사당과 의암호의 가을 /사진 제공 = 장수군청

논개 모녀의 억울한 사정을 접한 최경회는 무죄를 내리고는 오갈 곳이 없는 그들을 자신의 관저에서 일하며 기거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이후, 부인과 사별한 뒤 담양부사로 재직할 당시 논개를 부인으로 맞아들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부부의 연을 맺은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해주최씨의 족보(1975년 개정판)에 김씨와 민씨 두 정경부인과 더불어 최경회의 ‘부실 의암부인 신안주씨’로 논개 일화가 함께 올라가 있으며, 최경회의 일대기를 엮은 문헌에도 그 내용이 실려 있다.

화순 출신인 최경회는 1567년 문과에 급제하여 옥구, 장수, 무장현감과 영암군수와 담양부사 등 주요 관직을 거치다 임진왜란이 나자 사직을 하고 고향으로 간다. 그러다 1592년 임진왜란 나자 상중임에도 의병을 모집하고 훈련시켜 의병활동하고, 고경명이 금산에서 순절한 이후 의병장으로 추대된다. 금산과 무주에서 남원과 전주 그리고 진주로 향하는 왜군을 격파한 뒤, 그 공을 인정받아 1593년 4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면서 진주로 부임한다. 하지만, 2차 진주성 전투인 6월 29일 진주성이 왜적에 함락되자 최경회는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한다.

이 소식을 접한 논개는 나라와 남편의 원수를 갚겠다는 결심을 한다. 기회를 엿보던 논개는 왜군의 승전 기념 연회에 관아 소속의 기녀들만 연회장인 촉석루에 출입이 가능하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런 까닭에 기녀로 가장한 논개는 왜장인 게야무라 로쿠스케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남강의 바위 쪽으로 유인했다. 그리고는 열손가락에 가락지를 낀 양손으로 왜장을 풀리지 않게 껴안고는 남강에 몸을 던져 스무 살의 나이로 순절했다고 전해진다.

논개의 충절 이야기가 널리 구전되다가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620년경이다. 유몽인을 필두로 정약용 등이 논개에 관한 문장을 남겼고, 투신한 바위를 논개와 동일시하여 의로운 바위 ‘의암(義巖)’의 글자를 1722년 정대융이 새기고 충절을 기린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논개를 추모하는 백성들의 정서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시기의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관기로 알려진 논개는 실리지 못한 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생장향수명비와 천연기념물 장수 장수리 의암송. /사진 제공 = 장수군청
생장향수명비와 천연기념물 장수 장수리 의암송. /사진 제공 = 장수군청

1739년에 이르러서야 진주 촉석루 곁에 사당인 ‘의기사(義妓祠)’를 건립하였고, 1846년에는 장수현감 정주석이 논개가 장수 태생임을 기리고 충절을 선양하기 위하여 논개 <생장향수명비(生長鄕竪名碑)> 를 장수에 세웠다. 장수에는 비가 세워진 곳을 기준으로 가운데를 준비(중비)마을, 비석 위쪽을 상비마을 아래쪽은 하비마을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 때 그 존재를 접한 일본인 순사부장이 비석을 깨버리라는 것을 장수 청년들이 비석을 밭에 몰래 묻어 보존한 뒤 광복이 되자, “논개 비를 캐러 가자!”며 달려가 비석을 캐내 바로 세운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교체된 김은호가 그린 논개 초상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단아정 현판 글씨.
교체된 김은호가 그린 논개 초상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단아정 현판 글씨.

1954년 장수군민의 성금으로 논개 초상화를 모시고 사당을 창건하여 1974년 현 위치로 논개사당을 옮겨 <생장향수명비> 도 함께 조성했다. 논개 초상화도 친일 행적 논란이 있는 김은호의 그림을 윤여환의 그림으로 교체하여 표준영정으로 지정했으며, 저수지에 수몰된 것으로 추정된 생가터를 기리며 저수지 이름을 ‘의암호’라 개칭하고 주변에 논개 생가를 조성해 놓았다. 생가 정자의 ‘단아정’이라는 한자현판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필이었으나 지금은 철거하고 한글현판으로 교체했다.

하지만, 일본에는 논개에게 죽임을 당한 왜장을 영웅시한 일본인이 장수와 진주의 흙을 가져다 논개를 일본으로 따라간 첩으로 둔갑시켜 가묘를 만든 곳도 있다. 천인공노할 만행의 흔적이 기막히지만, 최경회와 논개의 묘는 진주에서 장수로 시신을 옮기던 중 십이령 고개를 넘지 못한 채 장수를 지척에 둔 함양에 자리하여 전해지고 있다.

옛 관아 터인 장수군청 앞에는 천연기념물인 우람하고 아름다운 소나무 <장수 장수리 의암송> 이 있다. 400여 년을 넘게 온갖 풍상을 함께 겪은 노거수를 주민들은 ‘의암송’이라 하고는 정성껏 보살피고 때론 나무가 건네는 힘을 받으며 논개를 기리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기녀로 기억되며 올곧게 평가 받지 못하는 의암 주논개의 위상 정립이 아쉽다. 돌아오는 10월 8일(음력 9월 3일)은 논개 추모제가 열리는 날이다. 가을빛이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논개사당을 찾아 가을 단풍보다도 붉은 그 충절의 흔적을 새기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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