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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봉우 815 후 분단 현실을 황토(荒土)로 보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전위적 시 활동을 했던 박봉우, 가난 때문에 포장마차를 꾸리던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떴을 때에 그는 정신 병원에 있었다. 출상일에야 집에 들를 수 있었던 그는 아내의 영전에서 아름다운 꿈을 꾸어라, 아름다운 꿈을 꾸어라하고 혼자 말을 했다. 그리고 슬픔에 젖어있는 세 자녀에게는 병원에서 썼다는 시 한편을 남겨주고 다시 의사를 따라 병원으로 떠났다. 그는 1975년 전주시립도서관에 촉탁사원으로 자리를 얻어 내려와 1990년 타계할 때까지 살았다. 그가 쓴 시 <뿌리치고 온 서울>은 이렇다. 모두들 가거라/ 詩人은 빚뿐이다/ 미친 놈의 세상/ 나는 정신병원에나 가 있겠다/ 모든 것/ 물리치고 싶은 서울/ 누가 찾아오는가/ 담배가 아쉬운 밤에/ 먹고 빈 약종이에/ 울긋불긋한 詩를 쓰면 된다/ 모두들 가거라/ 지금의 서울엔/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다. 전주에서 그는 고독을 느꼈다. 시 전주에 와서에서 그 심경을 이렇게 노래한다. 고독할 뿐이다/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고독할 뿐이다/ 오늘은/ 완산칠봉/ 내일은 풍남문 근처에서/ 아직/ 전주를 알기는 이르다/ 당분간/ 시가 되지 않은/ 이 밤/ 울고만/ 울고만 싶어라. 분단의 비극적 상황을 노래하던 시인은 전주에 와서 <딸의 손을 잡고>라는 시집을 펴내며 사랑을 이야기 한다. / 혁명도 자유도 독립도/ 사랑이거나 눈물도/ 내 딸의/ 손목잡고/ 잠시 잊는 시간/ .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휴전선이 당선되어 이후 약 2년간 전남일보 서울 주재 기자로 재직하면서 명동거리의 은성, 돌체 등을 누비며 천상병, 김관식, 신동문, 신동엽 등 문인들과 교유하며 많은 일화를 남겼던 박봉우. 그의 시 휴전선 한 대목은 이렇다.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번은 천동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 아내를 잃고 내색을 안 하며 견디던 그는 시 <그림자>에서 누구도 모를/ 나만이 아는/ 사랑.//언제나/ 나를 따르는/ 그림자.라고 사랑을 노래한다. 아프게 죽었지만, 그래서 자나 깨나 지워지지 않는 사랑을 알고 표현한다.
2014년 10월 군산 창작문화공간 여인숙에서의 하반영 마지막 개인전 당시 나는 전북도립미술관 관장이었고, 오랜 기억 때문에 전시장을 방문했다. 97세의 고령으로 하반영 화백은 휠체어를 타고 나타났다. 당시는 이미 더 이상 화필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쇠약했지만 나를 알아보았고 얼마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 미술반원으로 경기전에 수채화를 그리러 나가곤 했는데, 하 화백은 김용봉 선생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막걸리를 드시며 늘 유쾌한 표정으로 후배들을 귀여워 해주셨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현 경원동우체국 근처에 있던 정읍집은 예술가들이 모여 주담을 나누던 명소였다. 둥그런 철 테이블 주변에 서서 노란색 막걸리 주전자와 사발 잔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그림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주고 받었다. 하반영, 김용봉, 박민평, 유휴열 그리고 20대 초반의 내가 어울려 술을 마시던 기억이 난다. 안주도 특별히 없었지만, 좌중을 리드하는 하반영의 유쾌하고 정감 넘치는 언변은 언제나 빛나고 있었다. 1931년 선전에서 최고상을 받았고, 1979년 프랑스 꽁파르죵 공모전 금장 수상, 2006년 일본 이과전 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는 그는 평생 낭만적 삶을 살았다. 제도권 밖의 야인으로 맴돌면서도 사람들에게 한국의 피카소로 불리기도 했던 그는 대중들이 좋아하는 사실화에서부터 앙포르멜을 연상시키는 추상, 백자 항아리에 개미가 그려진 초현실적 회화까지 다양한 성향을 보였다. 말년에는 손가락으로 획을 그은 작품도 있다. 그의 방랑벽은 유별난 것이어서 집안 식구가 곽란을 일으켜 약을 사러 나갔다가 3년 만에 돌아왔다는 일화도 있다. 부산 피난시절에는 이중섭이 담배 은박지 그림을 그리는 동안 화선지에 갈대밭의 기러기를 그려 미군들에게 팔기도 했다. 한때 영화판에 뛰어들어 아리랑에서 허장강과 함께 인민군 역을 맡기도 했다. 정이 많고 재능이 많았던 그는 가는 곳마다 드라마 같은 사연들을 만들어냈다. 그의 사후 발견된 잡기장에 이런 시가 적혀 있었다. 나는 신작로에 서있다. 양반이 지나간다 상놈이 지나간다 백정도 지나간다 창녀가 지나간다 달구지가 지나간다 모두 다 지나간다. 양반 상놈 생각하기가 어렵다. 그는 아마도 저승에서도 그림을 그리면서 유쾌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면서 술을 마시고 있으리라.
2018년 3월, 나는 NIPAF18 행사에 초청되어 일본에 갔다. NIPAF는 일본의 퍼포먼스 작가 세이지 시모다가 주도해서 이끌어온 국제 퍼포먼스 아트 페스티벌로서 벌써 23회째를 맞고 있었다. 특히 이번 행사는 재정적 어려움 때문인지 마지막 NIPAF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다. 9개국 30여명의 작가가 참여하는 이 행사는 도쿄, 교토, 오사카, 나가노 등으로 이동하면서 10일간 계속 되었다. 나에게는 다섯 차례의 퍼포먼스와 1번의 세미나, 2번의 아티스트 톡이 주어져 있었다. 나는 다섯 차례의 행위에 일관된 주제로 I LOVE YOU, I HATE YOU!라는 주제를 붙이고 다섯 번 모두 내용이 다른 퍼포먼스를 구상하고 있었다. 주제의 의미는 사랑과 미움이라는 상반된 감정이 삶을 드라마틱하게 밀고 가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는 설정이었다. 첫 행위에서 나는 준비해 둔 나의 목소리, 노끈, 페이스 칼라 등을 사용했다. 현장에서 섭외한 두 남녀를 끈으로 고정하고 녹음기에서는 I LOVE YOU, I HATE YOU!를 되뇌이는 목소리. 주술처럼, 운명처럼 처음 본 남녀는 그렇게 얽히고 굳어지고 있었다. 미얀마에서 온 작가 타미지는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자신의 목에 걸린 끈을 잡고 강제로 무대 밖으로 끌고 나가는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다. 그것은 가부장적 여성 학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기꺼이 그 행위에 동참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차례에서 나는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것은 그녀가 반라로 서서 등을 대고 스페인 남자와 함께 묶이는 것이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선선히 응했다. 나는 아름다운 보석 줄과 거친 노끈을 섞어 키 큰 스페인 남자와 그녀를 묶었다. 벽 쪽에서는 몇 사람이 I LOVE YOU 혹은 I HATE YOU 슬로건을 든채 함께 묶이고 있었다. 그 다음 쿄토 카페 바자르에서의 행위 때 나는 그녀에게 전라로 동참해주기를 요청했다. 그것은 그녀가 관중 앞에서 천천히 옷을 벗고 전라가 되어 관객을 2-3분 동안 응시하다가 뒤 돌아 서면 그 등 뒤에 내가 글을 쓰는 것이었다. 글은 I LOVE YOU 혹은 I HATE YOU가 될 예정이었다. 그녀는 5분여의 망설임 끝에 수락했다. 그래서 카페 바자르에서의 명장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말하기를 생애 처음으로 나체 퍼포먼스를 참여하게 되어 망설였지만, 미얀마에 돌아가면 정부의 독재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정부 청사 앞 광장을 나체로 걷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행위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기억 속에 깊이 남아 있다.
전위예술가로서 행위미술 이벤트 영역을 개척해 내고, 여러 가지 형태의 신체 드로잉으로 활약해온 이건용이 군산을 떠났다. 그가 군산에 살기 시작한 것은 군산대 미술학과에 교수로 재직(1981~)하면서부터이다. 1973년 파리비엔날레에 출품했던 입체 작품 신체항은 나무 둥우리를 뿌리 채(뿌리 부분을 대략 1m 입방체의 흙과 함께) 파내어 전시장에 옮겨 놓은 작품으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세계를 사건으로 보고 그 사건의 전개를 논리적으로 지칭하는 행위미술 이벤트를 개척한 그는 바닥에 원을 그려 놓고 그 앞에 서서 원의 중심을 가리키며 거기, 그 원 안에 들어가서 바닥을 가리키며 여기, 원 밖을 나가서는 뒤로 가리키며 저기라고 말했던 그는 그 행위를 장소의 논리라고 불렀다. 그의 행위성에는 항상 논리성을 동반하면서 그 틀을 깨는 변칙이 동반된다. 그가 1979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보였던 달팽이 걸음은 매끄러운 전시장 바닥에 쭈그려 앉아 백묵으로 발가락 앞에 촘촘히 가로획을 그리면서 발바닥으로 지우면서 나아가는 행위였다. 맨발로 쭈그린 자세로 무수히 그려지는 백묵 선을 지우면서 달팽이처럼 나아가는 그 자세로 그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의 작품이 팔리기 시작한 것은 근래의 일이다.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느 날 그는 교회를 세우는 선교를 하겠다고 기도를 했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부터 그의 작업은 돈이 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동남아시아를 비롯해 여러 국가에 50개의 교회를 세울 예정이다. 이미 20개가 넘는 교회를 세웠다. 기도 때문이었을까? 창고에 쌓아두었던 그의 작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그리고 그는 군산시 교외에 근거했던 작업실을 치우고 군산을 떠났다. 그가 형편이 좋아져 지역을 떠난 것은 좋은 일이지만, 전북의 화단 입장에서는 큰 지주 하나를 잃은 셈이다. 그는 떠났고 이제 우리에겐 그에 대한 기억만 남았다. 2015년 아시아현대미술전의 국제퍼포먼스 행사 때 전주 고사동 영화의 거리 길목에 바이올린을 켜는 젊은 여성 연주자의 상의 등 쪽을 가위로 길게 잘라 다른 사람과 연결 짓던, 장난기 많고 흥미롭던 그의 모습을 쉽게 접하기 어렵게 되었다. 누구를 만나든 자신의 작업 세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던 그는 이제 편안하고 넉넉한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까?
미술관을 떠나 야인 신분이 되어 나는 주어진 일상의 시간을 어떻게 지낼까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곤 했다. 일상의 삶 자체가 인생이며, 나에게는 직업에 종속되지 않은 황금 같은 시간이 열려져 있었다. 이것을 평범한 방식으로 소모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자유롭게 가고싶은 곳을 가고, 적절히 즐기면서 사는 게 싫은 것은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휴가라는 것이고, 이를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을 추구하고 누리고 싶다는 욕구였다. 우선 내가 잘 할 수 있는 현대미술에 관한 개인 강좌를 열었고, 벌써 3학기 째 하고 있다. 그리고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면서 발표를 하는 것이다. 그동안 개인전 2번과 아트 페어 1번, 국제 행위미술 행사 1번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실험적 성격을 갖춘 작가들을 추려 그룹 운동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북화단이 전반적으로 포퓰리즘에 젖어 있고 상업주의적 관행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대한 반성이었다. 그래서 모두 9명의 작가들이 모여 AX 그룹을 만들게 되었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대 사회적 개입을 포함하여 외연을 넓히면서 각자가 자유로운 시대정신을 펼치려는 것이다. 6월 창립전을 앞두고 구체화한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삶의 길과 예술이 일치한다고 믿으며 예술이 사회적 문제에 개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예술적 혁신이 곧 정신적 혁신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예술이 상품화되는 것에 반감을 느끼며 또한 제도적 틀에 안주하는 것을 거부한다. 예술은 날마다 새로워야 하며 그 어떤 강령도 일방적으로 적용되는 것을 반대한다.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술가의 창의성은 가장 궁극적인 인간의 가치이며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어야 한다. AX는 그러한 뜻을 공동으로 발현코자 한다. 선언문은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이것을 실현하는 것은 전혀 참여작가들의 몫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로 그 실천 방안을 토의해왔다. 결국 작가들은 작품으로 말하는 것이고 AX와 결부된 작품의 의도를 두고 논의를 하게 되는 것이다. 작품이란 작가 개인의 것이지만, 예술이라는 열린 공론의 장에서 첨예하게 논의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우리는 AX의 방향성을 결정했다.
최근 간송미술관은 보물로 지정된 불상 두 점을 경매에 내놨으나 유찰이 되었다. 2013년 무렵부터 공익적인 성격을 강화하고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나가기 위해 대중적인 전시와 문화 사업들을 병행하면서 재정적인 압박이 커져 소장품을 내놓게 되었다고 한다. 설립자 전형필 선생이 일제강점기에 자행되던 문화재 유출을 막기 위해 사재를 털어 수집을 시작한 것이 그 모태가 되었다. 조선의 혼을 지키고자 독립운동을 하는 마음으로 유물들을 챙겼다. 이충렬이 쓴 간송 전형필을 보면 후일 국보가 된 금동 계미명 삼존불을 당시 기와집 80채 값을 주고 사는 장면이 나온다. 희귀한 고구려 불상이었고, 자칫 일본으로의 반출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1934년에는 일본에 가서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30점이 담긴 화첩을 흥정하여 구입해온다. 그 덕에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혜원의 월하정인, 상춘야흥 같은 명장면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번 경매에 나온 금동여래입상과 금동보살입상은 각 15억 원에 나왔으나, 그간 국립중앙박물관이 박물관회의 후원으로 구입 의사를 밝힌 탓인지 유찰되었고, 한편으로는 간송 전형필이 일제강점기의 열악한 상황에서도 모으고 지켜온 유물을 경매에 내놓았다는 데에 참담하고 안타깝다는 반응과 함께 충격이 가시지 않는 상황이다. 문화 예술은 당대의 정신적 영혼과 같은 것이다. 요즈음 같이 미술품을 장식적 상품 정도로 여기는 추세는 현대인의 영혼이 그만큼 저열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고뇌하는 작가가 있기 마련이고, 그 가치를 크게 평가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문화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의 마음속에서만 꽃피우기 마련이다. 시대가 변화해도 과거의 찬란했던 정신성을 반영하는 유물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 속에서 진정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불상의 한국적 조형성이 완성되던 삼국시대, 통일 신라의 모습은 바로 1500여 년 전의 우리들 모습이었고, 지금 우리는 또 다른 형태로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중이다. 아무튼 간송 전형필이 구축해 낸 간송미술관이 더 이상의 손실 없이 설립자의 뜻을 받들어 지켜 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두 점의 유물을 내놓은 것은 사실 간송 선생의 뜻을 크게 해치는 충격이 되어 안타깝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이슬과 함께 하늘로 돌아가리라.시 귀천을 쓴 시인 천상병은 희대의 기인으로 알려진 중광스님을 봤을 때의 인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비록 누더기 옷을 걸치고 가슴에 고장난 시계, 머리에 쓴 모자에 울긋불긋 달린 장식들, 그 모습이 우습다고 보이지만 어느 곳이든 어느 하늘 아래를 활보한들 떳떳한 그 모습, 그 웃음 앞에는 누가 말할 자 있을까? 스님과 나는 언제나 서로가 형님과 도사가 엇갈리는 대화가 있을망정 마음 속으로 보살님이니 우린 언제나 만나면 반가운 것이다. 반대로 중광은 천상병 사후 낸 책에서 그를 이렇게 기리고 있다. 천상병 시인은 자식도 하나 없고/ 이렇다 할 재산도 없어도/ 맥주값 500원이면 이 세상을 넉넉하게 살다 가신 도인이었다. 내가 아는 중광은 세상을 걸림 없이 통 크고 멋지게 살다 가신 도인, 예술가였다. 미국의 불교학자 랭커스터 교수가 그를 발견하고 미친 중이라는 책을 펴내 그의 선 사상과 예술을 소개하자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종로의 감로암 그의 거처는 벽과 천정까지 낙서 투성이였는데 술이 취해 귀가를 하려 대문을 나서자 나를 불러 세우더니 바로 달마도 한 점을 달빛에 비추며 깔깔 웃던 모습이 생각난다. 머리에 성기를 달고 있는 달마였는데 전남대 발전 기금으로 내놓았던 작품이다. 이제 중광 스님도 가신지 18년이 된다. 그가 생전에 썼던 시 <허튼 소리3>을 보면, 우리집 개는 불교를 믿고/ 우리집 고양이는 예수교를 믿고/ 우리집 향나무는 유교를 믿고/ 우리집 우물은 무당을 믿고/ 나도 가갸거겨 또 가갸거겨/ 너도 가갸거겨 또 가갸거겨가 있다. 말도 안되는 소리 같지만 가장 통렬하게 열린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글만 쓰지 말라고 물감을 상자에 가득 담아 주시고 전시회 때는 싱글싱글 웃으며 품평을 해주시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천당과 극락을/ 오른쪽 호주머니에/ 가지고 다닌다/ 양심은/ 하늘에 걸어두고/ 이슬처럼 따먹는다고 노래 했던 그는 임종에 앞서 나 죽거든 절대 장례식 하지 마라. 가마니에 둘둘 말아 새와 들짐승이 먹게 하라고 말했지만 그는 그렇게 떠나지 못했다.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는 인생이다.
2019년 나는 미술 에세이집을 출판하기 위하여 전북문화재단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출판비 1000만원을 신청했으나 정작 지원은 300만원 뿐 이었다. 그래서 반납 여부를 고민하던 중 후배 한 사람이 전주의 신아출판사를 찾아가 보라고 권하였다. 결국 신아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사장님 면담을 요청하여 찾아가게 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즐비하게 꽂힌 책들을 보고 놀라웠다. 또 사장님의 첫 인상이 넉넉하고 기품이 있어서 예상과 사뭇 다른 느낌을 받았다. 지원금이 적어 고민 중이라는 말씀을 드리자 곧, 미술 비평 서적은 귀한 것인데 출판 비 걱정 말고 칼라로 찍자고 답하시는 게 아닌가. 그래서 현대미술에 관한 현장적 에세이집 아름다운 착가은 빛을 보게 되었다. 책이 나온 후 감사의 표시로 몇 차례 식사 미팅을 요청했는데, 성사되지 못하다가 신아출판사에서 출간하는 수필과 비평지에 연재를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신아출판사는 그 연원이 50년이 넘고, 정기간행물만 10여종이 되며, 한해 100여종의 책을 출간하고 있었다. 머리가 성성한 백발의 서정환 대표는 시인이자 수필가였다. 전주에 이러한 출판사가 있다는 게 의외였고 자랑스러웠다. 서정환 대표는 전주의 완판본 역사를 되살려 누구나 읽고 즐길 수 있는 인문학을 부활시키고 싶어 했다. 자본주의와 인터넷 문화에 눌려 위축되고 있는 출판과 인문학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낄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양반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책이 완판본을 통해 서민들에게 유포될 수 있었던 반전이 없이 서민들의 세상에 대한 자각이 깨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AI가 지배적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미래에는 인문학의 중요성이 더욱 공고해진다. 인간과 AI의 차이는 결국 삶의 문제에 대한 인문학적, 예술적 창의성으로 구별되어지는 것이 아닐까? 전주의 자존심이 느껴지는 서정환 대표와 바둑 한판을 두면서 여기서 무너지지 않고 떳떳하게 가야지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바둑 한판에도 고뇌가 담기듯 인생에는 순간순간 여러 가지 갈림길의 고뇌가 깃든다. 삶과 예술의 모든 중요한 문제들은 그 순간순간에 담겨 있다. 새로운 전주 완판본은 인문학을 중시하는 출판 사업에서 생산된다. 전주에서 모든 사람들이 읽고 참여할 수 있는 인문학 사업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흐뭇하다.
남천 송수남은 1980년대에 일어난 수묵화운동의 주역으로서 현대 한국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과 본질적 문제의식을 두고 고민하면서 작업을 하고 그 뜻을 펼쳐 오늘의 한국화가 형성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든 작가로 평가할 수 있다. 먹에 대한 해석에서부터 전통적 기반이 강한 장르에서 어떻게 국제적인 무대에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 그리고 그 실현을 위한 몸부림이 그가 남긴 글과 작품 속에 묻어 있다. 그가 쓴 1980년대 한국화의 새로운 방향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한국 현대수묵전>을 시작으로 하여 <오늘의 전통회화 81전>, <82 전통회화전>, <83 한국화, 오늘의 상황전>, <84 한국화 단면전>, <85 한국화 동향전> 등을 열어 왔다. 또 한편으로 <82 오늘의 수묵화전>, <83 수묵의 현상전>, <84 한국 현대수묵전> 등의 젊은 세대가 주축이 된 수묵전이 개최되어 왔다. 이렇게 시작된 몸부림이 이제는 어느덧 하나의 물결을 이루면서 1980년대를 도도히 흘러내리고 있음을 직시하게 된다. 그동안 무책임했던 작가들의 역사의식 속에서 진정한 전통정신을 잃었던 때가 있었다. 상업주의와 안일한 권위의식 속에서 창작의 순결을 잃었던 순간들이었다. 이것이 우리를 빈곤하게 만들었고 한국화의 존재가치마저 의심하도록 한 것이다. 1980년대 한국화 수묵운동을 일으켰던 화가 송수남 그러나 우리는 확연히 깨닫고 있다. 종이와 먹- 그 자체가 이미 더할 나위 없는 우리의 소중한 전통정신이며, 우리 삶의 진정한 모습- 그 자체를 애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며, 우리 시대의 왕성한 활력- 그것을 형성해 가는 것이 우리의 표현이며, 우리 자연과의 끊임없는 대화- 그것이 우리의 심성이며, 우리 정신의 현대적 전개- 그것이 미래를 예견하는 우리의 역사의식이며, 더 이상 누구도 우리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시대 한국화의 또 하나의 자존심인 것을 우리는 깨닫고 있다. (송수남, 한국화의 길, 미진사) 전주에 화실을 짓고 만년을 지내려던 그의 뜻은 갑작스러운 타계로 좌절됐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글과 작품 속에서 그의 뜻이 현대 한국화 속에서 승계됨을 느낄 수 있다. 전통적 소재나 형식에 구애되기 쉬운 장르를 현대적으로 탈바꿈하는데 크게 기여한 그는 오래 기억될 것이다. 우리는 변해야 살 수 있는 것이고, 문제는 어떻게 변해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변화를 위한 변화가 아니라 우리의 혼과 정신을 지키고 빛낼 수 있는 방향으로 매일 변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가 경허 스님이다. 그는 스승없이 홀로 깨달았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아홉 살 때 출가했고, 동학사 만화 스님 밑에서 뛰어난 강백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경전에 근거한 식자에 불과했다. 어느 날 전염병이 떠도는 곳을 지나는 중 주검의 두려움에 떠는 자신을 발견하고 생사를 초월한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화두를 잡고 공부를 하다가 잠이 오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던 그는 한 처사가 소가 되어도 콧구멍을 뚫을 곳이 없다고 하는 말을 듣고 깨우쳤다. 죽어서 소가 되어도 콧구멍을 뚫을 곳이 없다는 그 말은 단번에 경허를 개안시켰다. 깨닫고 쓴 시에는 이런 것이 있다. 항상 고개를 숙이고 잠을 자네. 잠을 자는 것 외에 일이 없구나. 잠 외에 일이 없어서, 항상 고개를 숙이고 잠을 자네. 홀연히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인 걸 알았네. 6월 연산암산 아래 길목에서, 일없는 사람 태평가를 부르네. 경허 밑에서 침운, 혜월, 만공, 한암 등 걸출한 제자들이 나와 한국 불교계를 이끌었다. 오늘날 한국 불교계의 선풍이 살아 있는 것은 경허 덕분이다. 한암이 쓴 경허 행장에는 이렇게 스승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신장은 크고 고인의 풍모를 갖추었으며, 뜻과 기운은 과감하고 음성은 큰 종소리 같았으며, 무애변재를 갖추었으며, 세상의 일체 비방과 칭찬에 동요되지 않음이 산과 같아서 자신이 하고 싶으면 하고,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어 남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았다. 그래서 술과 고기도 마음대로 마시고 먹었으며, 여색에도 구애되지 않은 채 아무런 걸림 없이 유희하여 사람들의 비방을 초래했다. 경허는 속명이 송동욱이고 전주 자동리에서 태어났다. 분만한 뒤 사흘 동안 울지 않다가 목욕시킬 때에 비로소 울음을 터트리니, 사람들이 모두 신이한 일이라고 했다 한다. 경허의 세계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전주 사람들이 큰 기개를 갖고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전주 태생 경허 스님을 떠올리며 커다란 마음의 세계를 기려본다.
전주시 경원동 웨딩거리 족으로 세계바둑황제 이창호의 생가 이시계점이 있다. 여기서 그는 1975년 태어났고, 조부로부터 바둑을 배웠다. 그의 바둑의 기초를 닦아준 사람은 전주의 아마추어 강자인 이정옥 5단이었는데, 수년간 이창호를 가르치며 1천판에 달하는 실전과 복기를 거듭한다. 10세(84년) 때 조훈현 9단의 내제자로 들어가 90년도부터는 스승의 국수전 타이틀을 쟁취하기 시작하면서 국내 타이틀을 석권하고 1992년 일본에서 열린 동양증권배 타이틀을 획득, 최연소 세계 타이틀 홀더가 된 이후 1994년 국내 16개 기전 사이클링 히트 달성, 2003년 춘란배 우승으로 세계 타이틀 그랜드 슬램 달성 등 신화적 인물이 되었다. 그의 스승 조훈현 또한 원조 바둑황제로 불리는데, 그 이유는 1989년 바둑올림픽으로 불리는 응씨배에서 우승했기 때문이었다. 최초의 매머드급 세계대회로서 우승상금 40만 달러, 4년마다 올림픽이 열리는 해에 개최, 16강 초청에 일본 5, 중국 4, 대만 3, 호주 1, 미국 1, 한국 1장의 티켓으로 혈혈단신으로 분투, 우승으로 변방의 한국바둑을 세계 최강으로 올려놓은 사건이었다. 스승 조훈현이 있었기에 이창호가 있었다. 조훈현의 바둑이 전광석화처럼 빠르고 화려하다면, 이창호의 바둑은 느리고 치밀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신중하고 진득했다. 입문 당시 스승은 이창호의 재주를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이창호에게는 보이지 않는 천재성이 있었다. 수를 잘보고 전투를 잘 하면서도 반집이라도 확실히 이기는 길을 가는 계산 바둑, 어린 나이에도 노회한 수를 두는 어린 강태공이 그것이었다. 이정옥의 인물평을 보면 이렇다. 말이 없고 겸손했다. 온종일 바둑을 두어도 싫다고 하지 않았다. 수를 신기할 정도로 빨리 봤으나 여간해서 수를 내지 않았다. 흔히 창호를 노력형이라 부르곤 하지만 그건 잘못된 표현이다. 그의 심성이 천재의 빛을 감추고 있을 뿐 창호 같은 승부의 천재가 또 어디 있겠는가? 조훈현이 일세를 풍미하는 바둑 천재였다면, 이창호는 스승을 딛고 그보다 훨씬 큰 빛을 발했다. 스승이 낸 사활문제를 풀고 저녁에는 홀로 기보를 놓고 공부했다는 그. 조훈현의 부인이 새벽에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2층에서 나는 돌 소리에 놀랐다는 이야기가 새삼스럽지 않다. 천재도 갈고 닦아야 보물이 된다. 이창호처럼 겸손하고 재기를 감춘 큰 그릇은 더 그렇다. 드라마에서 소개된 상하이 대첩(2005, 농심 신라면배), 혼자 나가서 5명의 중국일본의 강자들을 차례대로 거꾸러뜨려 우승을 차지했던 신화, 그 이창호가 그립다.
영화 작가미상에는 뒤셀도르프 아카데미 교수 요셉 보이스가 강의 중에 양대 정당의 선거 포스터를 두고 불로 태우는 장면이 있다. 정치에 표를 던지지 말고 예술에 표를 던지라고 말한다. 독일의 유명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를 주인공으로 다룬 이 영화는 예술이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 예술은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인가? 등의 질문을 진진하게 떠올리게 한다. 당시는 동, 서독으로 나뉜 상태였고 리히터는 동독을 탈출하여 뒤셀도르프에서 현대미술에 전념하고 있었다. 동독에서는 공산주의 선전 벽화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자유와 진실을 찾아서 애인 에르나와 함께 탈출한다. 우리도 총선을 맞아 본격적인 운동을 벌이고 있다. 출근 시간에 맞추어 길모퉁이에 서서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손을 흔드는 후보자들, 국회의원으로 행세할 때에는 얼굴 한번 보기 어렵고 분주하게 당리당략에 따라 움직이지만 지금은 유권자만 보이는 모양새다. 페이스 북에 글을 하나 올렸다. 다른거 다 필요없다. 뻔뻔한 놈들만 심판하면 된다. 사실 유권자 입장에서는 투표로서만 권리 행사를 할 수 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돌고 도는 정치권 놀음에 장단을 맞출 필요는 없다. 정치인들의 정치판 놀음도 갈수록 교묘해져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옳은지도 구분이 안 될 때가 많다. 우리 지역 정치인들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판에 유난히 뻔뻔스러운 자들이 많다는 것은 국민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이런 자들부터 퇴출시키는 것이 국민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나도 요셉 보이스의 말처럼 정치보다는 예술에 표를 던지고 싶다. 그런 입장에서 정치 판의 놀음보다는 예술 판의 입장에서 보면 절박해 보이던 그것도 웬걸 유치해 보이기까지 하다. 정치적 운명이 걸려 있다고 하소연 하지만, 왜 대의를 위해 목숨을 버릴 줄 모르는가? 자신의 정치적 목숨 줄이 별 것인가? 자신을 죽일 줄 모르는 정치인도 뻔뻔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사실 그렇게 거룩한 정치인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정직하면 좋고, 틀린 건 틀렸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면 된다. 그런데 그런 사람조차 구경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것부터 되지 않으면 나머지는 모두 거짓이다. 말끝마다 민주주의를 팔아먹는 위선자들, 이들부터 심판하자.
연간 천만의 관광객이 든다는 한옥마을에는 독보적인 콘텐츠 하나가 있다. 바로 현존하는 유일한 태조어진이 그것이다. 태조는 조선의 개국 시조로서 왕실의 영구한 존속을 도모하는 의미에서 국초부터 어진을 봉안했는데, 전주 경기전 외에도 서울, 영흥, 평양, 개성, 경주 등에 봉안 되었지만, 남은 것은 경기전 어진이 유일하다. 이 어진도 1872년 당시 경기전에서 받들던 어진이 오래되어 낡고 해짐에 따라 영희전에서 받들던 태조어진을 범본으로 하여 화사 박기준, 조중묵, 백은배 등이 모사한 이모본이라고 한다. 이모본이라 하지만 원본에 충실하여 이성계의 위풍당당한 군주의 위엄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익선관과 곤룡포를 착용한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곤룡포의 윤곽선은 각지게 묘사되었고, 용상에는 용문양이 새겨져 있고, 채전(채색 양탄자)은 높이 올라가 안정감을 준다. 한옥마을 입장에서 보면 태조어진은 곧 한옥마을의 혼과 같다. 그래서 단순 관광지가 아닌, 풍패지관으로서의 풍취를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 눈에 익숙한 한옥마을 풍경은 한복을 빌려 입은 젊은 남녀들이 사진 찍는 모습, 전동킥보드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 카페 와 식당 그리고 선물가게 등 일반적인 모습이지만 중요한 콘텐츠는 지루해지기 쉬운 풍경을 의미 있게 바꾼다. 콘텐츠는 새롭게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다. 경기전, 향교, 전동성당, 풍남문 등 이미 알려지고 고정된 것은 한번 보고나면 더 흥미를 끌지 못한다. 예를 들어 조선후기 창암 이삼만의 진본 서예를 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면 관람객의 시선은 한옥마을에서 조선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깊이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창암은 조선의 동국진체를 완성한, 조선후기 3대 명필로 꼽히고 전주가 자랑할 만한 예술가이다. 관람객의 영혼을 울리는 콘텐츠 없이 단순히 한옥마을이 명소로 지속하기를 바라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제대로 된 콘텐츠를 만들어야 산다. 이것이 한옥마을 관광 브랜드를 두텁게, 매력 있게 만든다.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즐기는 것과 정신적인 것이 공존해야 힘을 받는다. 관광객을 우습게보지 말라. 그들은 단순히 소비하러 온 고객이 아니다. 관광 산업이 탄력을 받기를 기대하면서도 제대로 된 콘텐츠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바보 행정이 된다. 이제 껍데기를 벗어나 정신적 기대를 충족시키는 정도까지 가야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단계가 되었다.
이정직의 괴석도(31x141cm), 화면을 꽉 채운 구도로 각진 외모를 꼿꼿히 세운 모습이다. 구한말과 개화기의 격변기에 지역의 선비로서 살아가는 의지를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 그려진 안견의 몽유도원도에는 기이하고 비현실적인 형태인 기암괴석의 산수가 압권이다. 안평대군이 꿈에서 봤던 정경을 듣고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그 너머에 욕심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이상향이 있을까? 옛 사람들이 괴석을 즐겨 그렸던 것은 기이한 돌의 형태 속에서 천지의 뼈라고 부를 만한 자연의 정수를 읽고 그 불멸성, 신비함을 느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조선 말, 전주권의 유학자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은 문인화가로도 이름을 남겼는데, 특히 그의 괴석도는 주목을 끌고 있다. 돌을 소산수(小山水)로 보고, 흉중에 산수를 갖추고 크게 구상한 뒤 돌을 그리면 모양과 기세를 얻어 구속되지 않으며, 고문에 엶과 닫음, 조응과 문단속이 있듯이 바위를 그림에도 이 묘를 추구하여 누습이 없는 진석(眞石)을 그릴 것을 주장했다는 그는 스스로의 아호에도 돌 석자를 넣으며 왜 그리 돌을 사랑했던 것일까? 이정직은 구한말 개화기의 격변기를 살았고, 정통 유학과 양명학, 신학문, 천문, 지리, 의학, 수학, 기계, 어학, 시문, 서화 등에 두루 뛰어난 지식인이며 전북 문인화를 개창한 인물로 평가 받는다. 놀랍게도 그러한 성취가 특별한 스승 없이 홀로 학문과 서화에 매진하여 얻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서화는 당대를 대표하는 세련미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지역의 선비가 깨어나 격을 갖추고 뜻을 펴는 모습을 그에게서 볼 수 있다. 그와 교유하면서 동시대를 겪었던 선비 매천(梅泉) 황현(黃玹), 해학(海鶴) 이기(李沂) 역시 치열한 삶을 살았다. 매천은 한일합방 직후 자결하였다. 사실 석정이 그린 괴석은 단순히 돌 자체가 아니다. 그것이 갖고 있는 영원성, 불변, 의연함, 신묘함을 상징하며, 나라가 망해가던 시점의 소용돌이에서 정신적으로 극복하려는 의지으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스스로 소치 허련의 남화나 오원 장승업의 그림을 임모하며 뜻을 키우던 그는 괴석도를 통하여 이 세상의 현실이 아닌, 불변의 세계, 선비답게 살 수 있는 세계를 열었다. 지역성은 한계가 있지만,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지역성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꼿꼿이 자기 세계를 열어 나간 석정의 길이 더 빛나 보이는 이유이다.
1964년 뉴욕에서 앤디 워홀의 작품 흰 브릴로 상자들이 발표되었다. 외관상 이 작품은 슈퍼마켓의 브릴로 상자와 다를 바 없었다. 작품을 쌓아올려 전시한 모습도 마켓의 진열 방식과 똑 같다. 목수를 시켜 만든 나무상자 표면에 색을 칠한 후 실크스크린으로 상품 로고를 찍어 만든 작품, 슈퍼마켓에 진열된 상품을 똑 같이 복제해 만든 작품, 이것은 미술의 개념에 중대한 차이를 만들었다. 앤디 워홀(1928-1987). 미술평론가이자 현대 미학자인 아서 단토는 이 장면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이로부터 나온 이론이 예술의 종말이다. 이는 모더니즘의 역사에서 예술가에게 부여되던 시대적 사명은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명령은 역사로부터 나오며, 예술가는 현재로서는 자신의 야망을 내던지고 케케묵은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는 다음에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족쇄에 사로잡혀 있다고 주장했던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주장은 무력하게 되었다. 이제 예술가는 역사의 족쇄로부터 벗어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대를 맞았다. 그것이 아서 단토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이다. 즉, 모더니즘이 관류하던 동안 예술가를 구속해오던 강령- 시대적으로 새롭고 순수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자신의 야망을 버리고 역사적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기조가 무너졌다는 것을 뜻한다. 동어반복적이고 자기증명적인 모더니즘의 예술을 위한 예술은 종말을 고했다. 이제 예술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예술가는 이 자유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예술의 종말이라는 상황은 곧 예술의 모더니즘 체계가 무너졌다는 것을 뜻하고, 서구 유럽으로부터 지구 변방까지 영향을 미치던 중심축이 사라졌다는 것이며, 예술이 취해야 할 역사적 방향 같은 것은 없으며, 미래의 역사적 관점에서 봤을 때에 어떠한 방향도 나머지 다른 방향들과 동등하게 좋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제 우리는 완전한 예술적 다원주의의 시대에 들어 서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가는 시대의 예언자가 될 수 있다. 젊은 앤디 워홀이 슈퍼마켓의 브릴로 상자와 똑 같은 것을 만들어서 미술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듯, 아무 것도 정의해주지 않는 예술의 광야에서 온몸으로 자신의 소명을 느끼며 이것이 예술이라고 외쳐야 한다. 새로운 도전은 새로운 예술의정의를 만들어낸다. 워홀이 만들었던 브릴로 상자 한 개는 2010년 뉴욕 경매에서 300만 달러에 팔렸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일찍이 득도하여 전북지역에 선풍(禪風)을 일으켰던 해안(海眼) 스님의 경우를 보자. 1901년 부안 격포에서 태어난 그는 18세 되던 해 백양사에서 학인 신분으로 7일간의 용맹정진에 들어가게 된다. 조실의 학명 스님으로부터 은산철벽(銀山鐵壁) 화두를 받았는데, 그 뜻은, 사람이 여행 중에 갑자기 뒤에서 맹수가 나를 잡아먹으려 달려오므로 피신을 하는데 왼편도 오른 편도 새파란 강이고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으며 앞에는 은산철벽이 가로 막고 있어서 뚫고 나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아침마다 조실 스님을 만나 문답을 하는데, 화두를 뚫지 못해 진땀을 흘렸다. 나흘째 되던 날 역시 조실 스님으로부터 은산철벽을 뚫었느냐?는 질문을 받았고, 대답을 못해 하염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으니, 조실 스님이 저 방에 가서 걸레를 가져오라.고 하여 숨통이 트이는 듯 얼른 걸레를 가져다 드리자, 묵묵히 계시더니 곧 걸레를 도로 갖다 두라.고 하신다. 그제야 무슨 일인가 생각하며 걸레를 갖다 두고 막 앉는 찰나, 벽력같은 큰 소리로 나가! 하시는 게 아닌가. 혼비백산하여 나가서 멍하니 서있으려니 방안에서 다시 봉수야!(해안 스님 속명)하는 다정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고맙고 반가워 문고리를 잡아당기는데 이미 방문은 꼭 잠겨 있었다. 부끄럽고 분한 생각이 치밀어 한없이 서서 울다가 선방에 돌아가 용맹정진 끝에 드디어 화두를 뚫게 된다. 그때의 오도송이 이렇게 전한다. 목탁소리 종소리 죽비소리에/ 봉새가 은산철벽 밖으로 날았네/ 사람들이 나에게 기쁜 소식을 묻는다면/ 회승당 안에 만발 공양이라 하리라(鐸鳴鐘落又竹篦 鳳飛銀山鐵壁外 若人問我喜消息 會僧堂裡滿鉢供). 1974년 열반을 앞두고 세상과의 인연을 마무리 짓고자 제자들을 만났다. 특히 청산거사에게 당부하기를, 죽은 뒤 사리는 찾지도 말고 비 같은 것은 세울 생각을 말아라.고 하였다. 이에 제자들의 도리도 있으니 비는 세워질 것이라고 하자 굳이 세우려거든 범부해안지비(凡夫海眼之碑)라고 쓰고, 뒷면에는 생사어시 시무생사(生死於是 是無生死)라고만 써라.고 하였다. 제자 일지가 복받치는 울음을 터뜨리자 울지 마라. 모두가 이렇게 가고 이렇게 오는 것이다.고 했다 한다. 깨달음은 착각이라고 여겨질지 모르지만, 허무하기 짝이 없는 삶을 위대하게, 태양처럼 빛나게 하는 힘을 준다. 생사를 넘어 은산철벽을 넘을 수 있는 힘이 거기 있다.
전위적 그룹 운동을 펼치기 위하여 서학동사진관 김지연 관장을 만나 동참을 권유했을 때 돌아온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이제 나이가 70이 넘어 사진계도 은퇴할 생각인데, 새삼스럽게 미술 운동에 동참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 설득하였다. 이제 예술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나이이고, 그렇게 터득된 예술성으로 사회적으로 할 일이 있는데 포기할 수 있느냐?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함께 해보자. 그래서 김지연 관장은 작가로서 그룹 AX의 일원이 되었다. 사진작가 김지연은 나이 50이 되어서야 사진을 시작했고 그녀의 첫 작업은 폐쇄될 것으로 예고된 남광주역을 1999년부터 2000년까지 두해에 걸쳐 현장을 기록한 사진들이었다. 새벽부터 벌교, 보성, 고흥, 장흥 등에서 나물과 수산물을 가지고 남광주역에서 내려 도깨비시장을 벌이던 사람들, 그녀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착을 카메라에 담았다. 2002년 첫 개인전 정미소, 이후 나는 이발소에 간다(2005), 묏동(2007), 근대화상회(2010), 낡은 방(2012), 자영업자(2019) 등은 모두 소외된 지역의 사라져 가는 풍경 또는 힘들게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 들이 도큐멘터리 형식으로 담겨 있다. 그 기록들은 살롱 사진처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잊기 쉬운 현실적 고통의 뒤안길을 담담히 담아낸, 어쩌면 그보다 더 힘든 상황이 될 때 오히려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장면들이다. 사람들이 떠나고 남은 빈집들을 다니며 삶의 흔적들을 담을 때, 그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들 모두 외줄타기 같은 삶을 살다가 그와 비슷한 흔적을 남기는 게 아닐까? 그녀는 말한다. 우리는 소멸을 향해 가고 있으며 그 길에서 녹슬어 간다. 그리고 세상 무엇도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없다. 함께 흘러갈 뿐. 그 무엇도 가질 수 없고 그 누구도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가 아프게 다가온다. 그녀는 2001년부터 100여개의 사라져 가는 전북지역 정미소를 촬영한바 있고, 진안의 계남정미소를 공동체 박물관(2006)으로 탈바꿈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2013년부터는 전주 한옥마을 근처에 서학동사진관을 개관하여 사진 전문 갤러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운영난 때문에 위기를 겪고 있으며, 그녀가 지향하는 공동체적 가치가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알 수 없다. 그 또한 함께 흘러 갈 뿐일까?
김충순, 그는 자칭 독립군이었다. 전주라는 작은 미술인 사회에서도 그는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는 전주를 벗어나 파리 같은 곳에서 살기를 원했다. 낭만적이고 자유로운 공기를 흡입하며 살기를 원했다. 죽기 얼마 전, 파리에 마련해 둔 작업실에서 3개월여 머물다 왔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는 염원하던 파리에서의 작가 생활을 더 이상 지속하지 못했다. 김충순 사후, 그의 32번째 전시가 열렸다. 과슈로 얼굴과 사람을 그린 작품들로 꽉 채웠지만 정작 주인공인 그가 없었다. 어릴 적 바이올린을 배우고 고등학교 때에는 첼로를 배웠지만 정작 대학은 미술로 방향을 선회했던 그의 운명은 그때부터 불안정한 삶의 파고를 예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사람들을 좋아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게 좋아서 그림을 그리면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그러면서도 작품의 손길을 멈추지 않던 그는 아직도 예술적 낭만에 도취하여 떠돌고 있으리라. 2009년에는 전주영화제 무대미술도 했던 그는 그룹전 보다는 개인전을 좋아했고, 화랑의 초대전이나 기획전에 거부감을 느끼면서 갤러리 공간을 스스로 대관해서 마음대로 전시하는 것을 좋아했다. 자신의 예술 행위에 대하여 제약받고 구속되는 것을 싫어하는 그였지만 그는 작업하나로 평생 생활을 영위하면서 지냈다. 그는 사람의 얼굴을 캔버스에 꽉 차도록 많이 그렸지만, 특정인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그렇게 그렸다. 그게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의식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여자의 얼굴로 생각했다. 2005년 전라도 닷컴 인터뷰에서 그를 이렇게 묘사하는 대목이 있다. 이 사회에서 용케 길들여지지 않고 스스로를 버텨낸 그. 그 길이 순탄하지는 않았을 터. 살면서 가장 많이들은 말은 미쳤다이고 그 다음은 싸가지 없다라나. 독립군답다. 불의를 향해 돌격하는 돈키호테처럼 엉뚱하고도 열정이 넘치는 그인 것이다. 예술가가 죽을 때까지 손을 놓지 않고 작업을 하는 것이 중요할까? 그는 2년여의 암 투병 중에도 작업의 손길을 놓지 못했다. 햇볕이 잘 드는 시집같은 카페에 가서 하루 종일 드로잉을 하기도 했다. 예술을 하는 예술가의 삶은 행복할까? 인간의 삶은 행복의 추구 이상의 의미를 가질 때가 종종 있다. 인간은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때에 생각한 것 이상의 밝은 빛을 내기 시작한다. 자신이 원하는 길을 고집해서 굽히지 않고 나아 갈 수 있었던 돈키호테, 미치광이로 불리었던 아웃사이더는 어떤 미소를 띠고 있을까?
막걸리를 좋아하며 교직에서 과학을 가르치고 미술계를 좋아해서 전시 오프닝에 단골손님처럼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진기를 구입하여 전주 태조로 일대를 찍고 다니더니 개인전도 했다. 그는 10여년 미술 전시를 쫓아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서울, 광주, 울산, 대전 등 관심 있는 전시는 전국적으로 다니고 있다. 그는 사진도, 예술도 거의 독학으로 공부를 해서 터득했다. 그러나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과 같겠는가. 하지만 나름대로 연륜이 쌓이면 일가를 이루는 법이다. 얼마 전 교동미술관의 한은주 개인전 뒤풀이 자리에서 그는 몇 병의 막걸리를 비우며 해박한 지식을 떠들어댄다. 기실 미술계와 동떨어진 얘기가 많아 잘 섞일 순 없지만 개의치 않는다. 머리가 하얗게 세서 감히 누구도 말을 막지 않는다. 정년을 몇 년 앞두고 있지만 그의 관심은 온통 미술뿐이다. 김영구라는 이름을 가진 괴물이다. 그가 술자리에서 미술이란 것을 처음 느낀 장면을 이야기 할 때가 있었다. 학생들과 함께 부안의 금구원조각미술공원에 갔을 때에 김오성 작가를 만나 덕담을 요청했다. 그때 김오성으로부터 아름다움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아름다움은 특별히 공부하지 않아도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 것은 평범한 구석에 두어도 감출 수 없는 것이라는 내용의 요지를 감명 깊게 들었다. 김영구가 사진기를 구입해 전주 한옥마을 일대를 다니면서 눈길을 끄는 장면들을 찍어 태조로라는 타이틀로 개인전을 열었던 것도 그런 계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찍은 사진은 아름다운 장면이라기보다는 스쳐 지나가는 길목에서 발견된 틈, 삶의 단편이나 역사성의 파편이 감지될 만한 것들이다. 그는 프레임 없이 벽과 바닥에 그것들을 전시했다. 마치 지나가는 길목처럼 연출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는 아직 공부 중이라고 하지만, 미술인보다 더 미술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가 끼인 술자리는 언제나 시끄럽다. 사실 사람이 할 말이 많다는 것은 공부가 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는 아직도 할 말이 많다. 그는 예술에 배고픈 사람이다. 그 뜨거운 가슴 때문에 예술인들과 소통이 된다. 예술계 역시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소통하며 풍부해진다. 예술의 나라에는 국경이 없다. 우리는 수많은 김영구가 필요하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서예가로 추사와 더불어 전주의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을 꼽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추사에 비해 창암은 너무 알려져 있지 못하다. 창암의 글씨는 유수체로 불리운다.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고 생동감이 넘친다는 뜻이다. 그는 서울의 명문가 출신인 추사와 사뭇 다르게 정읍에서 태어나 10세쯤 원교 이광사의 서첩을 보고 감동을 받아 글씨를 익혔으며, 글씨에만 전념하였다. 이광사는 조선의 대표적인 동국진체의 서예가로 꼽히는데, 이는 중국풍을 벗어나 조선조 풍의 서예를 구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추사를 중심으로 한 국제적인 성향과 원교의 동국진체가 마주치는 모습이다. 추사가 보기에 동국진체는 지역성을 대변하는, 촌스러운, 정통성을 벗어나는 것으로 볼 수 있었고,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는 길에 대흥사에 걸린 원교의 글씨를 떼도록 했다는 고사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폄하되었다. 그러나 9년 간의 유배를 마치고 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러 떼어놓은 편액을 다시 걸도록 했다고 한다. 추사가 창암을 만나는 장면도 있다. 1840년 가을, 추사 55세, 창암 71세, 귀양 길의 추사는 전주 한벽루에서 창암과 마주한다. 창암에 대한 소문을 들은 추사가 정중히 하필을 청하니, 붓을 잡은지 30년이 되었으나 자획을 알지 못한다고 겸손하게 사양했으나 다시 간곡히 청해오자, 강물이 푸르니 새 더욱 희고/ 산이 푸르니 꽃은 더욱 붉어라/ 이 봄 또 객지에서 보내니/ 어느 날에나 고향에 돌아가리(江碧鳥逾白/ 山靑花欲然/ 今春看又過/ 何日是歸年)이라고 썼다. 이에 추사는 명불허전이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9년 뒤 추사가 다시 전주에 왔을 때에는 이미 창암은 고인이 되었다. 이에 추사는 명필 창암 완산이공지묘라는 묘비문을 썼다고 한다. 창암은 원교가 제기한 동국진체를 완성한 서예가이다. 가장 정교하게, 자연스럽고 생동감 넘치는 예술성을 창암의 글씨에서 맛볼 수 있다. 촌스럽다고 폄훼되기 쉬운 지역성을 예술성의 극치까지 끌고 갈 수 있었던 그의 서예는 중국의 전통성에 근거를 둔 맥락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창의성을 선사한다. 창암을 다시 들여다봐야 지역 문화가 산다. 창암은 지역성이 어떻게 최고로 승화될 수 있는지 몸소 보여준다. 조선과 현대를 통 털어서 전주에 창암 만한 예술가가 있는지 반문하고 싶다. 유홍준 같은 이가 고구마 인장을 섰다고 폄하하지만, 창암은 그에 개의치 않았다. 벼루 3개가 구멍이 날 정도로 연마했던 그의 필력은 형식성을 초월할 정도로 극에 달해 있었다.
전주국제영화제–신세계면세점, 업무협약 체결
다름으로 이어온 36년의 동행 ‘삼인전’
“힘들었지만 즐거웠다”…1948편 접수된 전북일보 신춘문예 본심
[결산! 전북문화 2025] ➅이별과 전환의 한 해, 종교와 여성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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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천·양말로 빚는 예술⋯인형 창작 40년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