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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썼다. 작년 우진청년작가회가 주최한 토론회 전북미술 이대로 좋은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화 기생충에서 위기에 몰린 가족의 딸이 계획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그때 아버지는 계획이 없는게 계획이라고 답한다. 계획이 있으면 그것을 수행해 내야 하는데 그것이 처음부터 어렵기 때문에 무계획이 더 낫다는 것이다.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위기만 넘기면 되는 셈이다. 전북미술의 현 상황을 볼 때,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막막함이 기생충의 가족 상황과 닮아있다. 예술가들의 창작 의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출구가 막혀 있다. 이것은 단지 예술가들에 대한 지원 정책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매년 문화재단을 통해 분배되는 지원은 꾸준하다. 그러나 그것이 화단의 활력을 불어넣는 동력이 될 수는 없다. 마치 항아리 속처럼 꽉 막혀 그 안에서 서열이나 다지면서 살 수 밖에 없는 구조가 현재의 상황이다. 예를 들어 광주광역시의 경우 20년이 넘은 광주비엔날레가 있어서 국제적인 교류가 이뤄지며 광주시립미술관도 북경에 창작센터를 만들어 매년 작가 5명 정도를 1년 단위로 보낸다. 거기에 아시아문화전당 역시 국제적인 문화 교류와 전시, 공연, 학술 행사를 벌인다. 광주비엔날레 창설 이후 광주의 화단은 자연스럽게 현대적으로 변모해 있다. 인근의 제주도만 해도 각종의 특징 있는 미술관들이 설립되어 관광객들을 즐겁게 한다. 국제적 규모의 콜렉션을 자랑하는 아라리오미술관, 아르누보 유리공예를 자랑하는 유민미술관, 이중섭의 피난시절 거주지에 이중섭미술관, 도립 현대미술관의 김흥수 상설관, 인근에 세워진 김창렬미술관 그리고 건축과 함께 독특한 미술관으로 떠오르는 이타미 준의 수풍석(水風石)박물관과 두손미술관. 가히 전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여건들이다. 아시아 문화 심장터를 만들겠다는 전주시는 아직 시립미술관도 없다. 전북은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를 치르고 있지만 대외적 파급 효과가 미미하다. 문화 정책의 부재로 인지된다. 전방위적으로 다가오는 위축감을 문화 예술 분야에서 돌파구를 찾을 만 한데, 그런 시도 자체가 없다. 문화 예술이 갖는 진정한 힘을 인지하지 못해, 이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으로 전북인의 자존심을 세우고 미래적 비전을 만들어 갈지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문화 예술이 굳건히 자리 잡지 않고서는 정치가 바로 설 수 없다. 겨우 정치적 후광으로 이용할 생각이나 하는 정치인은 사퇴해야 한다. 옥석을 가리지 못해 골고루 배분이나 하려는 정책은 정책도 아니다. 무엇이든 정치화하려는 세태에 대하여 침을 뱉어야 한다.
지역에서 화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서커스에서 외줄타기가 어렵다지만, 그보다 어려운 것이 대책 없이 예술가로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반면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것보다 더 크게 만족스러운 일도 없다. 예술가는 꿈을 꾸는 사람이고, 늘 꿈을 꿀 수 있는 사람은 현실이 어려울수록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현실이 각박할수록 예술가는 출구를 열어주는 메신저가 된다. 화가 이종만은 오랫동안 재직하던 교직을 버리고 전업화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2013년 이태리 베르가모 초대전에 응하면서부터인데, 당시 그는 개성 있는 비둘기 그림을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살림집 옥상에서 여러 마리의 비둘기들이 노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은 그는 비둘기를 묘사하는데 필요한 색채를 미리 12개 정도의 그릇에 만들어 놓고 넓고 큰 붓으로 듬뿍, 시원스럽고 빠르게 필치를 구사하여 독특한 화면을 조성해 갔다. 재현에 근거를 두면서도 재현을 탈피해가는 신선한 화면이 만들어졌다. 비둘기의 동작이 필치의 중복 와중에 느껴졌다. 이종만 다운 회화성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태리에서 호평을 받은 이종만은 그 이듬해 비둘기와 화조도를 들고 다시 이태리 로메오갤러리에 도전하여 찬사를 받는다. 이때에는 보다 한국적인 것을 표현하고 싶어서 오방색에 민화풍이 가미된 화조도 시리이즈를 추가하게 된다. 이 두 가지 창의적 축은 최근에 이르기까지 이종만의 중요한 작업 노선이 되었다. 학창시절 그는 선배의 화실을 방문했던 이남규 교수가 당신의 그림이 자연재현적인 것인가, 창의적인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말을 곁에서 듣고 자연재현적인 것을 벗어난 창의적인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해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비둘기 그림은 자연재현적이면서 동시에 추상적이다. 그는 대상을 묘사하지 않는다. 시원스럽게 그어지는 필획을 통해서 비둘기의 모습과 동작 그리고 본질이 느껴지도록 한다. 얼마 전 기린미술관 개인전에서 그는 농익은 회화적 기량을 뽐내고 있었다. 붓을 몇 자루 움켜쥔 채 정면을 바라보는 자화상도 그렇고, 벽에 걸어 둔 꽃을 그린 마른 꽃 맨드라미 같은 경우에도 두텁게 느껴지는 마티에르와 더불어 회화적인, 더욱 회화적인 느낌을 끌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동료 화가들 외에는 보러 오는 사람조차 별로 없다는 것이다. 예술가도 먹어야 살기 때문에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몇 개월 후에 있을 서울에서의 초대전에 기대를 걸고 있다.
현대도예가 한봉림은 그 특이한 영원한 운동으로 1979년 공간대상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조명을 받았다. 이 무렵 원광대에 도예과가 만들어지면서 교수로 내려왔다. 그는 한국 최고의 도예과를 만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제자들의 힘이 어느 정도 길러지자 1992년부터는 매년 국제도자캠프를 열어 국제 교류와 함께 제자들이 국제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한봉림 개인 부담으로 시작된 이 일은 1996년 일본 오사카에서 끝을 맺을 때까지 5회 지속되었다. 1991년 소양에 작업실 겸 집을 짓고 있던 그는 넓은 대지를 활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머물면서 작업도 하고 토론도 하면서 공동생활을 통해 교감이 되는 작업들이 나오도록 도왔다. 영원한 운동이라는 전통을 탈피하여 현대 조형 개념의 새로운 도예의 세계를 펼쳤던 그의 도예 개념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것은 천 자락이 거꾸로 걸린 듯한 운동감을 보이는 조형성 위에 불과 유약이 빚어내는 빛깔로 탁월한 예술성을 드러낸다. 그의 실험 의식은 멈추지 않는다. 2015년 아시아현대미술전에 참가했던 그는 토막토막 잘린 형태가 쌓이면서 구축되는 토템 도예를 만들었는가 하면, 2017년 전북의 원로작가전에서는 120x240 cm 크기에 판넬 10개에 단청 물감을 순간적으로 뿌려 만든 드로잉을 출품했다. 젊은이들보다 더 실험적인 일들을 벌인다. 2017년 12월 16일에는 많은 후배들이 서울에서부터 내려와 술판을 벌였는데, 새벽 그들끼리 자리를 하다가 싸움이 벌어져 그 중 한명이 의자를 집어 창문 쪽으로 던졌는데, 유리창이 깨졌다. 그것으로 자리가 파하고 후배들을 모두 뿔뿔이 흩어졌는데, 아침에 그 자리를 보고 한봉림은 영감을 받았다. 복층 유리창인지라 안쪽 유리만 깨어진 것을 알고, 안쪽 깨지고 남은 흔적에 그는 검은 물감을 칠했다. 그리하여 전혀 다른 창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우연한 사고를 섭리로 받아들여 그 어느 곳에도 있을 수 없는 창을 갖게 되었다. 얼마 후 유리창을 깬 후배가 사과를 하면서 변상을 하겠다고 하자, 그는 오히려 예술 작품을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예술은 전시장에 혹은 예술 관련 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예술은 우리들 삶 속에 있다. 그것을 발견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예술가이다.
시인 이광웅, 1989년 창작과 비평사 발간 이광웅 시집 목숨을 걸고에 실린 사진. 이광웅의 시 주시 망상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를 들여다보지 마시오/ 비를 머금은 구름이 흐르고/ 가치 있는 일거리나 혹은 애정의 행각 같은 것/ 아무것도 없었소./ 속속들이 내 마음 조각들을 읽어 알아서 무엇하겠소./ 내 몰골을 들여다보지 마시오./ 이광웅은 익산 출신으로 1967년 유치환과 1974년 신석정의 추천으로 시인이 되었다. 1976년 군산 제일고 재직 중 1982년 오송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7년을 선고 받고 복역 중 1987년 사면 조치로 풀려났으나 고문 후유증과 병환으로 1992년 12월 22일 사망했다. 오송회 사건은 월북 시인의 시집 병든 서울을 읽었다는 혐의로 군산 제일중학교?고등학교 교사들을 연행하여 대공 분실과 여인숙 등에 10-23일씩 불법 감금하고 고문과 가혹 행위로 허위 자백을 받아 실형을 받았으나 2007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이 사건을 군사정권기 국가 보안법을 남용해 조작한 사건으로 결정, 2008년 11월 25일 광주 고등 법원 재심에서 무죄를 입증 받았다. 내가 기억하는 시인 이광웅은 해맑고 순수하며 다정다감한 예술인, 불의를 보면 분노할 줄 알고 타협하지 않는 강한 면모를 갖고 있었다. 70년대 중 후반 우리는 익산 이광웅 시인 집에서 만나 전위적 행위미술과 시적 예술 정신을 두고 많은 토론을 벌였다. 유신 독재 말미에 황폐해진 정신성에 대한 반항, 더욱 강렬해지는 전위성이 드러날 때였다. 내가 1981년 제3세계 연극제의 일환으로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생명의 이벤트를 할 때에 관중이 둘러 앉은 객석의 벽면을 향해 사과를 던졌던 것은 이광웅 선생의 얘기를 듣고 발상한 것이었다. 한 미친 사람이 오포 소리에 놀라 가게의 사과들을 오포 소리 방향으로 던졌다는. 이광웅을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하던 아내 김문자는 정읍 집에 은거하면서 술로 세월을 보내었다. 거실 식탁 아래에는 1.5l 소주 페트병들이 뒹굴고 있었고, 안방의 벽면에는 흑백으로 된 두 사람의 사진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고 한다. 나를 들여다보지 마시오 /내 몰골을 들여다보지 마시오로 서두를 뗀 시 주시 망상은 내 가난한 노우트를 제발 들여다보지 마시오.로 끝난다. 옥중 시집으로 알려진 대밭에 실린 시 한편 주시 망상. 가치 있는 일거리나 혹은 애정의 행각 같은 것/ 아무것도 없었소.라는 대목에서 미친 놈 처럼 사과라도 무더기로 그놈들을 향해 던져줄까?
전주 출신 화가 노은님은 가난 때문에 23세이던 1970년, 간호보조원으로 독일에 갔다. 그 이듬해 스위스 취리히미술관에서 루치오 폰타나의 작품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었다. 전주를 떠나기 전 어머니의 초상을 그려 볼까하다가 실패하고 가져간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다가 간호장의 눈에 띄어 전시를 하게 되고 우연히 함부르크 폴 클레의 제자였던 한스 티먼 교수의 인정을 받아 함부르크 국립미술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라는 말을 듣고 나뭇잎도 그리고 새도 그렸다. 다른 학생들은 멋진 추상화를 그리는데 본인의 것은 유치원생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창피해서 모두 쓰레기통에 버리고 갔다. 그런데 다음 날 와보니 티만 교수가 그녀의 그림들을 칠판에 붙여놓고 이게 진짜 그림이라고 칭찬을 했다고 한다. 화가 노은님. 1990년 그녀는 함부르크 국립미술대학의 교수가 된다. 같은 해 프랑스 FIAC에 참여 했는데, 이때 출품했던 붉은 배경에 다리가 셋 달린 이상한 동물은 프랑스 중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린다. 2004년 발간한 에세이집에서 그녀는 나는 그림을 파는 것이 아니라 동물을 파는 사람이라고 썼는데, 그녀가 그리는 동물들의 원천은 어릴 적 전주 교동에서 살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애들 기르고 동물 기르는 재미로 사셨던 아버지는, 개집에 신문지 깔고 들어앉은 그녀를 위해 전등을 달아주고 커튼을 쳐주었다. 그 안에서 개 한 마리와 비둘기를 데리고 살았죠. 물고기를 잡아 우물에 넣은 후 겁 없이 우물 벽을 타고 내려가 밥을 주고 오면, 어머니는 물고기가 어떻게 물을 따라 여기까지 왔을까, 의아해 했어요. 1980년대 초 공간화랑에서 한국에서의 첫 전시를 했을 때 필자는 리뷰를 쓰면서 그녀를 만났다. 당시에도 원초성이 개성 있게 드러나는 회화성이 주목받고 있었다. 얼마 후 전주를 방문했던 그녀는 남노송동 집에 걸린 내 드로잉을 보고 요셉 보이스가 연상된다고 말했다. 얼마간 절에 머물고 싶어 하는 그녀를 위해 선운사까지 버스로 동행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조용한 절에서 노스님이 파리채로 파리를 때려잡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하면서 웃었다. 독일 함부르크와 미헬슈타트의 천년 고성을 오가며 작업을 하는 그녀는 최근 미헬슈타트 시립미술관에 영구 전시관을 개관하였다. 미헬슈타트의 고성 옆 삼백년 된 극장에서 사는 그녀는 가끔 파티를 연다. 그 파티엔 공주도 시장도 사장도 오고 동내 약사, 골프장 캐셔, 이주노동자도 온다. 앞마당에는 오리와 뒷산의 여우, 사슴과 멧돼지가 노닌다.
현대미술의 관점에서 풀어내는 시대적 예술성과 삶의 의미를 묻는 인문학적 서술. 미술은 삶의 아름다움을 포착해 표현하지만 때로는 부조리한 현실을 날카롭게 파헤치기도 한다. 매주 화요일, 전남대 교수와 전북도립미술관장을 지낸 장석원 작가가 국내외 작가들과 그 작품세계에 담긴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편집자 주 모든 사람이 예술가이다.라고 말하면 너도, 나도 그리고 우리 모두가 예술가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은 너무 순진하고 맞지 않는 말이다. 독일의 요셉 보이스가 이렇게 말했을 때에 그 뜻은, 창의력이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 국한되지 않으며 창작은 회화나 조각 또는 심포니, 소설 등을 넘어 사회적으로 연관되는, 물질을 형상화하는 능력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는 노동자, 주부, 농민, 의사, 철학자, 매니저 등의 일을 물질을 구성하는 능력의 관점에서 봤을 때에 고갈되지 않는 창의적 능력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어렵게 말했지만, 창의력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에 노동자, 주부의 그것이 예술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모든 사람이 예술가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예술가이다라는 말의 뜻은 너도 나도 평등하게 예술가라는 뜻이 아니고, 네가 가진 창의력이나 내가 가진 창의력이 모두 중요하고 가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각자가 가진 창의력을 두드러지게 발휘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각자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 1982년 독일 카셀 도큐멘타에서 시작된 요셉 보이스의 7000그루의 떡갈나무 프로젝트 현장. 프리드리시아눔 미술관 앞에 현무암이 무더기로 쌓여 있다. 과거를 상징하는 돌 기둥 하나와 미래의 생명을 상징하는 떡갈나무 한 그루가 짝을 지어 도처에 심겨지는 프로젝트로서 예술의 사회적 조각 개념을 잘 나타낸다. 1982년 제 7회 카셀 도큐멘타에 7000개의 현무암 돌기둥을 쌓아놓고 떡갈나무 한 그루와 돌기둥 하나씩을 짝을 지어 심도록한 프로젝트는 그가 예술의 개념을 얼마만큼 확장된 형태로 보고 있는지를 명징하게 알려준다. 개막식 날 그는 첫 식수를 하였고 이후 나머지 6999개의 돌기둥들은 하나씩 떡갈나무와 짝을 지어 도처에 심겨진다. 1987년 8회 카셀 도큐멘타 개막일에 요셉 보이스의 부인과 아들이 마지막 7000번째 식수를 함으로서 종결된다. 요셉 보이스는 1986년 1월 고인이 되었다. 백남준이 자신이 맞은 일생일대의 행운은 요셉 보이스와 존 케이지를 무명 시절에 서로 알게 되었던 것이라고 말했던 그 요셉 보이스는 현대미술의 영역을 활짝 열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예술가이다. 함께 한국에서 퍼포먼스를 하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요셉 보이스가 타계하자, 백남준 홀로 인사동에서 요셉 보이스를 추모하는 굿판을 벌인다. 2차대전 중 공군으로 참전했다가 타타르 지역에서 추락하여 의식을 잃고 있을 때에 몽골 샤먼의 치유를 받아 회생되었던 요셉 보이스 역시 샤먼적 요소를 작품에 도입하고 있었다. 얼굴에 꿀과 금분을 바르고 죽은 토끼를 안고 웅얼거리던 그의 퍼포먼스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회화를 설명할 것인가?는 합리적 또는 반개념적 서구의 전위적 사슬을 끊고 신비적이면서 샤먼적인 능력을 키우고 있었다. 육백만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전후 독일인의 죄의식을 그러한 능력으로 치유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 장석원 작가는 홍익대 회화과,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전남대 미술학과 교수, 광주비엔날레 전시기획실장예술감독, 국제아트비전 ASIA PANIC 총감독, 전북도립미술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미술에세이 <아름다운 착각>, 미술평론집 <소통의 비밀> 등이 있다.
전주국제영화제–신세계면세점, 업무협약 체결
다름으로 이어온 36년의 동행 ‘삼인전’
“힘들었지만 즐거웠다”…1948편 접수된 전북일보 신춘문예 본심
[결산! 전북문화 2025] ➅이별과 전환의 한 해, 종교와 여성의 자리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진숙 수필가-하기정 ‘건너가는 마음’
역사 추리 다큐멘터리, JTV 창사특집 다큐 ‘평장리 청동거울의 비밀’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2025년 서예교육 전문인력 양성기관' 지정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빚어낸 박만식 동시집 ‘코끼리 잠수함’
김명자 시인 첫 시집 ‘광야를 사랑하는 법’ 북토크 성료
종이·천·양말로 빚는 예술⋯인형 창작 40년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