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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탐방” ⑪ 백제와 실크로드] 페르시아에서 일본까지…백제, 실크로드를 누비다

실크로드 하면 떠오르는 사막을 가르는 낙타의 행렬. 동서양이 서로 만나 새로운 문명을 꽃피웠던 길, 실크로드. 수많은 사람들이 바다 건넜다는 뜻의 백가제해(百家濟海) 네 글자를 나라 이름으로 쓴 백제. 백제는 실크로드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실크로드 곳곳에서 우리의 선조 백제인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연재를 마치며 페르시아에서 일본까지 실크로드 선상에 남아 있는 백제의 자취를 정리한다.△페르시아에서 만나는 백제1500년 동안 베일에 싸였던 백제사의 블랙박스를 연 대발견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백제 대외관계의 비밀을 밝혀주는 열쇠다. 무령왕릉에서는 특이한 모양의 짐승이 발견되었다. 바로 진묘수(鎭墓獸)다. 진묘수는 문자 그대로 무덤을 지키는 짐승이라는 뜻이다. 진묘수는 사자의 몸에 새 머리를 한 서아시아 상상의 동물 그리핀(griffin)과 관련이 있다. 무령왕릉 진묘수는 서아시아와 지중해 일대에서 형성된 수호신으로서의 그리핀 도상이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백제 묘장 문화에까지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연주문(連珠文)은 서아시아에 기원을 둔 페르시아 공예품의 전형적인 문양이다. 작은 원을 둥근 고리 모양으로 촘촘하게 배열한 연주문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백제에 전해졌으며, 부여 외리사지 백제 와당과 미륵사지 사리장엄함에서 볼 수 있다. 백제 연주문 장식 문양은 백제가 실크로드 동서 문명 교류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한국을 넘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는 전주비빔밥도 실크로드 문명 교류와 관련이 있다. 전주비빔밥의 주재료인 쌀, 마늘, 당근, 오이, 시금치, 고추 등은 모두 실크로드를 통해 전래된 식재료들이다. 한국 전통음식과 실크로드의 연관성은 우리 주변의 호(胡) 자가 들어간 음식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예전에 마늘은 호산(胡蒜), 오이는 호과(胡瓜), 참깨는 호마(胡麻), 양파는 호총(胡蔥), 당근은 호나복, 후추는 호초(胡椒)라 하여 모두 호(胡) 자로 표기했었다. 여기서 호(胡) 자는 수입 외래종이나 외래문화를 뜻하는 글자이다.△인도와 관음신앙 그리고 판소리힌두교의 나라이면서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 불교의 사천왕은 원래 힌두교의 신이었으며, 불교의 여러 보살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은 이란의 수신(水神) 아나히타(Anahita)와 힌두 여신 사라스바티(Sarasvati)에 원류를 두고 있다. 페르시아와 인도에 기원을 둔 관음 신앙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해졌으며, 다시 백제를 통해 일본에 전래되었다.우리나라 최고의 전통 예술 판소리. 서사적 이야기를 장단에 맞추어 창과 아니리를 섞어 부르는 판소리식 공연은 실크로드 여러 지역에도 있다. 특히 인도의 판다바니(Pandavani)는 전형적인 판소리형 공연이다. 고대 인도 3대 서사시인 마하바라타(Mahabharata)만큼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판다바니의 판(pan) 은 노래를 의미한다. 판소리형 공연은 실크로드 여러 지역에서 지금도 불리고 있다.△중국에서 발견된 백제인옛날 백제인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고대 백제인을 그린 그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양직공도(梁職貢圖)다. 양직공도 속 백제 사신은 그림 맨 앞의 양나라 황제 바로 뒤 페르시아 사신 다음에 그려져 있다. 이는 당시 백제가 페르시아와 함께 6세기 동아시아 양나라의 핵심 교역국이었음을 보여준다.광활한 중국의 서쪽 끝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 돈황. 돈황은 1,500년 전 서역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최근 돈황 벽화에서 고대 한국인 그림이 대거 발견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가운데는 백제인 모습도 보인다. 돈확 벽화를 통해 새롭게 발견된 사실은 고대 백제인은 고구려와 신라처럼 조우관을 쓰기도 했지만 턱 끈이 없는 오늘날 야구 모자와 비슷한 무후책을 쓰기도 했다. 백제인이 돈황 벽화에 대거 등장한 연유는, 백제 유민(遺民)이 돈황으로 이주해서 살았거나 불교 포교를 위해 각국의 다양한 인물상을 벽화에 집어넣는 과정에서 백제인 인물상도 들어갔던 것으로 추정된다.△백제가 제작한 서역계 일본 보물일본 고대사는 백제와 가장 연관이 깊다. 2001년 12월 일본 사회를 발칵 뒤집는 사건이 있었다. 아키히토 일왕이 생일날 회견에서 자신이 백제 무령왕의 후손임을 고백한 것이다. 실제로 고대 일본 지배층의 무덤에서는 백제와 깊은 관련이 유물이 대량 출토되고 있다.쇼소인은 일본이 세계 제일의 보물 창고라고 자랑하는 곳이다. 쇼소인에는 코발트 빛을 내뿜는 한눈에도 서역 페르시아 계통임이 느껴지는 유물이 있다. 최근 이 유리잔이 백제에서 가공된 것임이 밝혀졌다. 그 증거는 유리잔 받침에 새겨진 무늬가 미륵사지 금동제사리외함에 새겨진 것과 쌍둥이처럼 닮았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한편 호류지(法隆寺)에는 백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불상 세 점이 있다. 그것은 금당벽화 속 관음보살과 백제관음 그리고 몽전(夢殿)의 구세관음이다. 금당벽화는 인도 아잔타(Ajanta) 석굴 벽화가 그 원류이며, 호류지 별관에 전시된 일본 국보 백제관음은 인도 양식을 포용하고 있다. 또 백제 작품이 입증된 구세관음의 보관에는 조로아스터교를 기반으로 하는 페르시아 사산왕조의 상징인 일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는 구세관음을 제작한 백제가 페르시아와도 긴밀히 교류했었음을 말해준다.△백제, 개방적 다문화 국가문화는 본시 상호 교류를 통해 발전하는 법이다. 교류가 빈번했던 곳일수록 문명이 발전했고 경제가 성장했음을 실크로드는 입증하고 있다. 백제는 굳게 닫혀진 나라가 아니었다. 실크로드 곳곳에 남아 있는 백제의 자취는 백제가 바다 건너 세계 문명과 교류한 문화적 개방성을 띤 글로벌 국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는 동아시아를 넘어 서아시아 문화까지 포용하는 다문화 왕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백제가 열망한 꿈이요 힘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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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30 23:02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탐방” ⑩ 전북에서 만나는 중국문화 흔적] 전주 속 중국마을 '차이나타운'·삼국지 관우 모신 사당도

석도(石島:산동성의 섬)에서 닭이 울면 군산 앞바다에서 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까운 이웃 중국. 대중 교역의 전초 기조로 새만금에 한중경협단지를 조성 중인 전북은 예로부터 중국과 경제문화 교류가 활발했다. 특히 올해는 한중 수교 25주년이 되는 해이다. 최근 사드 배치 문제로 한중 간에 불협화음이 야기되고 있지만, 소중한 이웃 중국과의 유대감 강화와 한중 문명교류의 역동성을 확인하기 위해 전라북도 곳곳에 남아있는 중국문화의 흔적을 찾아간다.△객사와 풍남문에서 만나는 차이나전주의 상징물이자 대한민국의 보물인 객사(客舍). 객사에 걸려 있는 현판 풍패지관(豊沛之館)은 중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초서체로 휘갈겨 쓴 풍패지관은 중국의 친한파 서예가 주지번(朱之蕃)이 쓴 것이다. 풍패 또는 풍패지향(豊沛之鄕)이란 말은 황제의 고향을 말한다. 예전에 전주를 흔히 풍패지향이라 했는데, 이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고향 전주를 한나라 황제 유방(劉邦)의 고향 풍패와 연계시킨 것이다. 풍남문(豊南門)의 풍은 지금의 강소성 서주(徐州) 인근의 풍읍(豊邑)을 가리킨다. 현재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은 서문은 예전에 패서문(沛西門)이라 했는데, 여기서 패는 강소성 패현(沛縣)을 의미한다. 주지번이 쓴 현판은 익산 왕궁면 망모당(望母堂)에도 걸려 있으며, 남원과 강릉 등 전국 여러 곳에 남아 있다.△전주 차이나타운과 사합원(四合院)전주 차이나타운은 전북 속 중국을 대표하는 곳이다. 현재 전주 차이나타운은 거리가 다소 한산하지만, 과거 화교(華僑)들이 가장 많을 때는 1000명이 넘었고, 화교 상인이 운영하는 중화요리집이 120곳이나 되었다. 전주 시내 곳곳에 화교들이 중화요리집을 열었고, 심지어 전주 중화요리 조합장을 화교가 한 적도 있었다. 현재 전북에는 화교가 300여 명 거주하고 있으며, 국내 유일의 화교 전통가옥인 사합원(四合院)이 남아 있다. 요즘 전주하면 한옥마을을 떠올리지만, 전주에는 중국 마을도 있는 셈이다.△삼국지의 영웅 관우와 관왕묘전주 남고산성에는 삼국지의 영웅 관우(關羽)를 모시는 관성묘(關聖廟)가 있다. 관우는 흔히 무성(武聖)이라 하는데, 무성에게 제례를 올리는 곳이 바로 관왕묘다. 관성묘가 우리나라에 건립된 것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였다. 당시 지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사들이 왜구와의 전쟁에서 관우 장군의 도움을 얻고자 했고,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고자 왕의 명을 받들어 전국적으로 건립해 수호 신당으로 섬기게 되었다. 국악의 성지 남원에도 관왕묘가 있으며, 예전 전북에는 김제와 태안 등 여러 곳에 관왕묘가 있었으나 현재는 전주와 남원 두 곳에만 남아 있다.△학문의 성인 공자와 향교(鄕校)중국에는 무술의 성인 관우 외에 또 하나의 성인이 있다. 바로 문장과 학문의 성인 공자(孔子)이다. 공자는 문성(文聖)이라 하며, 중국 곳곳에 있는 문묘(文廟)는 공자를 섬기는 곳이다. 한국에도 문묘에 해당하는 장소가 전국 방방곡곡에 있으니 향교가 바로 그곳이다. 전주 한옥마을에 위치한 향교는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향교로 65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대성전 안에는 공자상이 정 중앙에 모셔져 있고, 공자의 제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 그리고 우리나라 열여덟 명의 현자 위패가 함께 놓여 있다.△부안에서 만나는 차이나부안의 채석강(彩石江)과 적벽강(赤壁江)은 중국인이 매우 친근감을 느끼는 장소다. 채석강은 중국에도 있는데, 강소성 마안산시(馬鞍山市)에 있는 채석풍경구(采石磯風景區)가 바로 그곳이다. 채석강은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이백(李白)과 깊은 관련이 있다. 중국의 시성(詩聖:시의 성인) 이태백이 뱃놀이를 하며 강물에 비친 달그림자를 잡으려다 물에 빠져 숨졌다는 곳이 바로 채석강이다. 부안의 적벽강 역시 중국 강 이름이다. 중국 송나라 때의 대문호 소동파(蘇東坡)가 우리나라 산수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접하고 직접 우리나라를 찾아왔다가 이곳의 절경을 보고 마치 중국의 적벽강을 옮겨놓은 듯하다 하여 적벽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완주에서 만나는 차이나완주군 불명산에 있는 화암사(花巖寺)의 극락전은 중국 사찰의 전형적인 건축 기법인 하앙식(下昻式)으로 지어진 국내 유일의 목조 건축이다. 하앙식 구조란 서까래와 지붕 사이를 긴 목재로 받쳐 처마의 하중을 줄인 형태를 말하며, 중국에서 발전해 백제를 거쳐 일본에 전해졌다. 완주군 봉동에는 임진왜란 당시 다섯 아들과 함께 조선에 와서 왜군을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명나라 장수 추수경(秋水鏡) 장군의 묘역이 있다. 추수경 장군처럼 임진왜란 때 큰 전공을 세운 후 귀화한 사람이 또 있으니 바로 천만리 장군이다. 남원 환봉서원은 명나라 원병으로 조선에 와서 영양(穎陽) 천씨(千氏)의 중시조가 된 천만리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정읍 무성서원(武城書院)의 하우전(夏禹傳)정읍(井邑)의 무성서원은 최치원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최치원은 중국에서도 높이 존경받아 당송 100대 시인의 반열에 오른 대문장가로 고려 현종 때 문창(文昌)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중국 강소성 양주(揚州)에는 최치원기념관과 함께 시내 한복판에 최치원의 시호를 뜻하는 문창각(文昌閣)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무성서원 강수재에 기둥에는 대단히 특이한 글씨체의 주련이 걸려 있다. 소위 하나라 우임금의 글씨체인 하우전(夏禹傳)이다. 하우전은 장수 심원정에도 남아 있다.△한중 관계,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신뢰 회복해야!2016년 한국은 중국 수입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차지했으며, 중화권 국가를 제외하면 대중국 직접투자액이 가장 많은 나라이다. 최근 한중 관계는 사드 문제로 이상 기류가 흐르고 있지만, 양국의 오랜 관계를 보여주는 문화유적에 대한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대외 교류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잠재우거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전북 속에 남아있는 중국 문화유적을 찾아 나선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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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16 23:02

⑨ 양직공도와 실크로드 - 양직공도(양나라에 조공 온 외국 사신 그린 그림), 6세기 백제 국제적 위상 고스란히 담아

옛날 백제인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고대 백제인을 그린 그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양직공도(梁職貢圖)다. 양직공도는 6세기 동아시아 최강국 양(梁)나라에 조공 온 외국 사신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최근 돈황 벽화에서 백제인 그림이 발견되기 전까지 양직공도는 백제인을 그린 거의 유일한 그림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양직공도에서 사라졌던 제기(題記:각 나라에 대한 간략한 기록)가 발견되어 백제의 국제적 위상에 대한 흥미 있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백제사 연구의 1급 사료인 양직공도와 새로 발견된 제기를 통해 당시 백제의 대외 교류가 어떠했는지를 탐색한다.△양직공도(梁職貢圖)란?양직공도에서 양(梁)은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를 가리키고, 직공(職貢)은 직방공물(職方貢物) 네 글자를 줄인 말로 직방은 중국 관직, 공물은 조공품을 가리킨다. 중국 왕조에서는 관직에 임명된 인물은 요즘 증명사진 찍듯 그림으로 남겼는데, 이러한 관례가 외국 사신에게도 적용되어 양직공도가 탄생하였다. 양직공도는 양나라의 세자이자 화가였던 소역(蕭繹)이 당시 동북아 최강국인 양나라에 조공하러 왔던 각국 사신을 그린 것인데, 현재 원본은 사라지고 없으며 모사본만 세 종류가 있다.양직공도 중 가장 사료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는 남경박물관 소장본에는 원래 25개국 이상의 사신이 그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12개국 사신 그림만이 남아 있다. 12개국 사신의 국가명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활국(滑國:아프가니스탄), 파사국(波斯國:페르시아), 백제(百濟), 구자국(龜玆國:중국 신강성 주변 국가), 왜국(倭國:일본), 탕창국(宕昌國:감숙성 주변 국가), 낭아수국(狼牙修國:말레이반도 국가), 등지국(鄧至國:감숙성 주변 국가), 주고가국(周古柯國:아프가니스탄 주변 국가), 가발단국(呵跋檀國:아프가니스탄 주변 국가), 호밀단국(胡密丹國:아프가니스탄 주변 국가), 백제국(白題國: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 중간 국가), 말국(末國:서역 36국 중 하나).△양직공도로 본 백제의 대외 교류양직공도 속 백제 사신은 무령왕 때 파견된 사신으로 추정된다. 무령왕은 6세기 동아시아 최강국 양나라에 두 차례 사신을 파견한 바 있고, 무령왕릉은 양나라 왕실 무덤인 아치형 전축분을 본 따 조성한 벽돌무덤이다. 실제로 무령왕릉에서는 梁官瓦爲師矣(양나라 관청 벽돌을 모범으로 삼았다)라는 글자를 새긴 벽돌이 발견되었고, 양나라 왕실 무덤에서만 발견되는 유물도 다량 출토되어 양나라와 백제의 긴밀한 관계를 입증하고 있다.양직공도 속 백제 사신은 아프가니스탄 사신과 페르시아 사신 다음에 등장한다. 12개국 사신 중 세 번째에 그려져 있는 것이다. 특이한 점은 12개국 사신을 보면, 백제와 일본을 제외하면 모두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주변 국가들이다.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는 지금과는 달리 과거 실크로드 문명을 꽃피운 찬란한 고대 강국이었고, 동아시아 최강국 양나라는 이들 나라와 활발히 교류했었다. 백제 역시 양나라를 통해 중앙아시아페르시아와 교류하면서 최첨단 물품을 백제로 유입하였다.흥미 있는 사실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백제가 일본과 신라보다 위상이 높았음을 양직공도가 증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양직공도 속 왜국 사신은 천으로 대충 감싼 남루한 옷차림에 맨발을 하고 있어 세련되고 품격있는 백제 사신과는 너무나도 차이가 난다. 또 왜국 사신은 백제 사신 뒤에 그려져 있다. 신라와 고구려 사신 역시 백제 사신 뒤에 보인다. 특히 백제 사신은 그림 맨 앞의 양나라 황제 바로 뒤 페르시아 사신 다음에 그려져 있다. 이는 당시 백제가 페르시아와 함께 6세기 동아시아 양나라의 핵심 교역국이었음을 보여준다.△양직공도 신라 제기(題記)의 발견몇 해 전 획기적 발견이 있었다. 양직공도에서 영영 사라졌다고 여겼던 신라 제기(題記)가 발견된 것이다. 세상을 놀라게 하며 나타난 신라 제기는 청대 문집 애일음노서화소록(愛日吟廬書畵續錄) 제5권에 청장경제번직공도권(淸張庚諸番職貢圖卷)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청장경제번직공도권은 그림에 조예가 깊은 청나라 장경이 친구 이탁에게서 양직공도를 빌려와 18개국 사신도와 함께 나라별 제기를 베낀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신 그림은 사라지고 각국 제기만 남아 있다.새롭게 발견된 신라 제기에서 시선을 끄는 내용은 신라가 양무제 2년(521)에 신라왕 모태(募泰:법흥왕)가 처음으로 백제 사신 편에 붙어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리고 특산품을 받쳤다. 그 나라에서는 성(城)을 건년(健年)이라 부르며 그 습속은 고려(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어 나무를 새겨 표시로 삼는다. 말은 백제를 거쳐야만 통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 부분과 신라는 한(韓:마한)에 속하기도 하고 더러 왜에 속하기도 했다. 그 나라 국왕은 스스로 사신을 보내 조공할 수는 없다는 기술이다.△신라 제기(題記)로 본 백제양직공도가 탄생했던 6세기는 무령왕(武寧王)이 백제의 해상강국 재건의 꿈을 이룬 시기였다. 신라 제기에 쓰여 있듯이 당시 신라는 스스로 중국 왕실과 교역할 수 없는 처지였고, 백제 사신 편에 붙어서 양나라와 교역해야 했다. 또 신라에서는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어 백제의 통역을 빌려야만 했다. 또 신라가 한(韓:마한)에 속하기도 하고 더러 왜에 속하기도 했다.는 부분은 많은 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문구지만 당시 신라의 국제적 위상에 대해 중국 왕조가 어떠한 시각을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6세기 해상강국 백제양직공도 속 백제인은 무령왕이 쇠락하던 백제의 국력을 회복시킨 후 당시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양나라에 파견한 사신의 모습이다. 당시 무령왕은 고구려를 군사적으로 압도하면서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알리고자 양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양직공도와 새롭게 발견된 신라 제기는 6세기 백제의 국제적 위상이 대단히 높았고, 당시 백제가 동아시아 국제 교역을 다시금 주도하는 실크로드 해상강국으로 재도약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소중한 사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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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26 23:02

[⑧ 효녀 심청과 실크로드] 효녀 심청, 한·중 해로를 건너다

장님 아버지를 위해 공양미 300석에 인당수에 몸을 던진 후 연꽃에 실려 세상으로 되돌아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했다는 효녀 심청 이야기는 실크로드와 관련이 있다. 효녀 심청과 실크로드,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을까?심청 설화가 탄생했던 시기는 백제가 이웃 진(晉)나라와 교류하던 때로 심청이 공양미 300석을 받고 간 곳은 인당수 속 용궁이 아니라 중국의 대표적인 관음성지이자 해양 실크로드의 중심지인 절강성 보타산(普陀山) 부근 심가문(沈家門)이었다. 현재 중국 절강성 심가문에는 심청을 기리는 사당인 심원(沈院)이 세워져 있다. 효녀 심청과 관음 그리고 실크로드에 관한 이야기를 탐색한다.곡성 관음사 연기설화심청전의 원형 설화 가운데 국문학계에서 가장 널리 인정받고 있는 것은 〈관음사 연기설화 원홍장 이야기〉이다. 심청의 원래 이름인 효녀 원홍장(元洪莊)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옛날 장님인 원봉사가 일찍이 부인과 사별하고 홍장이라는 어린 딸과 가난하게 살았다. 어느 날 원봉사는 길에서 성공(性空)이라는 스님을 만났다. 성공은 원봉사에게 절을 하면서 전날 밤 꿈에 부처님께서 내일 아침에 길에서 만나는 장님이 너를 위해 큰 불사를 해줄 것이다하였다고 하자, 원봉사는 집에는 곡식 한 톨 없지만 어린 딸 하나가 있으니 사찰을 짓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바치겠다고 하였다. 그때 홍장의 나이 열여섯이었다.홍장은 애통해하며 아버지께 하직하고 성공 스님을 따라나섰다. 성공 스님은 길을 가다 바다를 바라보고 쉬던 중, 중국 진나라 사신을 만나 공양미 300석을 받고 원홍장을 사신에게 인계하였다. 원홍장은 사신을 따라가 진나라에 가 황후가 되었다. 황후는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황후 홍장은 고향과 장님 아버지를 잊을 수 없어 관음보살상을 만들어 고국에 보내며 말하길, 이 관음상을 실은 배가 표류하거든 멈추는 곳에 모시도록 하여라라고 지시하였다.홍장이 보낸 관음상을 실은 배가 표류하다 멈춘 곳은 낙안포 바닷가였다. 이튿날 성덕이라는 아가씨가 낙안포 바닷가에서 한 척의 배를 발견하고 다가와 멈추었다. 성덕은 배 위에 금빛 관음상이 있는 것을 보고 몸을 굽혀 예배한 다음 등에 업으니 새털처럼 가벼웠다. 성덕은 열하루를 걸어 지금의 곡성 관음사 부근에 이르니 새털처럼 가벼웠던 관음상이 태산처럼 무거워져 한 걸음도 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관음상을 봉안하고 절을 지어 성덕산 관음사라 부르게 되었다.성덕산 관음사 설화는 세 가지 중요한 점을 담고 있다. 첫째, 심청의 본명은 원홍장이었다. 둘째, 심청은 중국 사신에게 공양미 300석을 받고 팔려가 진나라로 가 황후가 되었다. 셋째, 고국에 관음상을 보내 백제 최초의 사찰이자 한국 최초의 관음 도량인 관음사가 세워졌다. 그런데 성덕산 관음사 설화는 다음 몇 가지 점을 의문으로 남겨두고 있다. 첫째, 효녀 원홍장은 어떻게 심청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는가? 둘째, 심청은 한국을 떠나 중국 진나라 어디에 도착해 살았는가? 셋째, 심청은 왜 장님 아버지를 위해 관음상을 보냈는가? 이 세 가지 수수께끼는 중국 절강성 보타산 부근에 있는 심청 사당 심원(沈院) 이야기를 통해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보타산 심가문(沈家門) 설화심청 사당 심원(沈院)은 중국의 대표적인 관음성지인 보타산(普陀山) 부근 심가문(沈家門)에 있다. 심가문은 성이 심씨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 오늘날도 많은 심씨가 이곳에 살고 있다. 심원은 심청을 기리는 심덕정사(沈德精舍)와 효녀관, 심청의 배우자였던 심국공(沈國公)의 거처인 국공청(國公廳), 작은 호수 옆 정자인 박아청(博雅廳)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심청 사당을 건립할 정도로 효녀 심청에 대해 칭찬이 자자했던 심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심청 이야기는 이렇다.백제의 원홍장이란 어린 효녀는 장님 아버지의 길러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성공 스님의 사찰에 시주되었다. 성공 스님은 백제와 무역 거래를 하고 있던 절강성 보타섬의 부자 상인인 심국공에게 공양미 300석을 받고 팔았다. 심국공은 홍장을 자신의 고향인 심가문으로 데리고 간 후 심청으로 이름을 고쳤다. 심청은 중국에서 행복하게 살았지만, 고국의 장님 아버지를 잊을 수 없었다. 심청은 부친을 위해 중국 관음성지 보타산의 관음상을 한국으로 보냈고, 그 공덕으로 장님 아버지는 눈을 떴다. 한국에 보낸 관음상을 모신 사찰이 바로 곡성 관음사다.한중 심청 설화 속 역사적 사실흔히 소설은 삼실허칠(三實七虛)이라 한다. 즉 소설은 역사적 사실은 30%, 나머지 70%는 허구로 되어 있다는 말이다. 한국과 중국에 전해 내려오는 심청 이야기는 전설인 탓에 차이가 있지만, 다음 몇 가지 점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첫째, 심청의 원래 이름은 원홍장이었고, 중국 심씨 집성촌에 시집을 가 심청으로 개명하였다.둘째, 심가문은 현재 절강성 주산(舟山)시의 한 동네 이름으로, 평창동이나 성북동에 비길만한 부촌이다. 공양미 300석은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약 1억 원이 되는데, 심청이 시집간 심국공 집안은 이 정도를 지급할만한 부잣집이었다.셋째, 심청이 배를 타고 백제에서 중국으로 간 곳은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 항구 도시인 영파(寧波)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 명주(明州)로 불렸던 영파는 현재도 시내 중심가에 고대 한국 상인들이 머물렀던 고려관이 남아 있고, 보타산에는 장보고 기념비가 세워져 있을 만큼 한중 해로의 주요 항구였다.넷째, 심가문은 중국 절강성 북쪽 바다에 위치한 중국 불교 4대 명산 보타산 옆에 있다. 인도 전설에 의하면, 관음보살이 사는 곳은 남인도의 포탈라카(potalaka)인데 이를 한자로 음역하면 보타락가(普陀洛迦)가 된다. 관음보살의 중국 거주지를 뜻하는 보타산은 바로 보타락가에서 온 말이다. 관음성지 보타산 부근에 살았던 심청은 관세음보살상을 자주 찾았고, 한국에 장님 아버지를 위해 관음상을 보냈던 것이다.관음을 모시는 사찰은 인도와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 모두 해안가에 있다. 내륙에 위치한 곡성 관음사의 심청 이야기는 백제 시절 한중 해로의 구체적인 항로를 알려주는 한편 심청이 백제 최초의 사찰이자 한국 최초의 관음도량을 세운 해상 실크로드의 개척자 역할을 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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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05 23:02

[⑦ 연주문과 실크로드] 백제 연주문, 페르시아 문명을 말하다

연주문(連珠文)은 작은 원을 둥근 고리 모양으로 촘촘하게 배열한 문양을 말한다. 연주문은 페르시아 사산(Sassanian)조 시기에 크게 유행했는데, 이 무늬가 중요한 이유는 실크로드 문명 교류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에 기원을 둔 연주문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과 한국에 들어왔으며 다시 일본에 전해졌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연주문은 부여 외리사지 백제 벽돌에서 발견되며,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연주문이 새겨진 백제 유물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연주문을 통해 백제와 실크로드의 관계를 탐색한다.△페르시아, 연주문의 기원연주문은 이란 루리스탄(Luristan)에서 출토된 청동 주전자(BC 1000~500)와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석회암 벽돌(BC 550~330) 장식 무늬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사산조(AD 37세기) 시대에 이르러 금속공예품, 건축, 직물 등의 장식에 크게 유행했다. 페르시아에서 연주문은 왕권신수(王權神授) 즉, 왕의 권력은 신이 준 것임을 상징한다. 제왕 서임식을 묘사한 이란 타그에보스탄(Taq-e Bostan) 석굴의 기마상 안장에 새겨진 연주문은 왕관에 새겨진 일월문(日月紋)과 함께 사산 왕조의 왕권을 나타낸다.또 연주문의 작은 원은 흐바르나(Khvarenah)라는 진주를 표현한 것인데, 진주는 세계 최초의 종교로 알려져 있는 이란 조로아스터교의 영광과 위엄을 상징한다.연주문이 실크로드 각지에서 크게 성행한 연유는 이 문양이 영생과 왕권신수의 개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페르시아 연주문이 불교를 만난 것은 인도와 중앙아시아에서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조각품인 산치 스투파와 아잔타 석굴 그리고 간다라 지역 유물에서 확인되는 연주문은 페르시아 문화가 불교문화와 접목하면서 불상과 사원 벽화 등의 장식에 영향을 미치면서 생겨났다.△중국 북제, 백제와 실크로드의 교량중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연주문은 북제(北齊, AD 550-577) 시기 고분에 보인다. 우리에게 낯선 북제라는 중국 왕조는 서역의 소그드와 활발히 교류한 탓에 호다우민(胡多于民) 즉, 외국인이 중국인보다 많았던 이국적인 나라였다.페르시아 연주문은 바로 북제 무안왕 서현수(徐顯秀, 502-571) 묘에 보인다. 중국 고고학 10대 발굴에 속하는 서현수 묘에는 당시 생활상을 생생하게 묘사한 벽화가 남아있는데, 말안장과 시중을 드는 여인 복식에 수많은 연주문이 새겨져 있다.북제는 불과 27년간 존속했던 단명 국가였지만 백제는 세 차례나 사신을 파견했고, 북제 화폐인 상평오주전(常平五銖錢)이 부여 왕흥사지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이러한 점들은 백제가 북제와 대단히 가까웠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백제는 북제와 교류하면서 서역 계통의 문물을 받아들였고, 이 시기에 연주문도 백제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부여 외리 벽돌, 한반도 연주문의 시원우리나라에서 연주문이 가장 유행한 시기는 불교가 흥성했던 통일신라 때였다. 이 당시의 불교공예품, 불상, 도자기, 수막새 등 장식 문양에는 수많은 연주문이 새겨져 있다. 예컨대 경주박물관 안압지관 앞뜰의 입수쌍조문(立樹雙鳥紋, 나무를 가운데에 두고 공작새 두 마리가 있는 문양)이 새겨져 있는 연주문 석조물과 괘릉의 서역인상은 통일신라 사회와 페르시아 문명 간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준다.한반도에서 연주문은 통일신라 때 가장 성행했지만, 그 시원은 백제 벽돌에서 찾아진다. 백제는 한성 시기부터 사비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건축물에 다양한 무늬로 장식한 벽돌을 사용했다. 6세기 초에 조성된 무령왕릉 벽돌은 백제 미술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부여 규암면 외리의 옛 절터에서 출토된 8무늬 벽돌은 한반도에서 발견된 연주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벽돌은 통일 신라 이전인 6세기 말 혹은 7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부여 외리 8무늬 벽돌 중 연주문 벽돌은 4개인데, 연주문 안에 용, 봉황, 연꽃, 연꽃 구름이 새겨져 있다. 연주문 안에 상서로운 동물인 용과 봉황을 묘사한 것은 페르시아 연주문 장식물에 새겨 넣은 신령스러운 짐승과 흡사하다. 또 연주문 안에 환생과 재생을 상징하는 연꽃을 그려 넣은 것도 페르시아 도상을 매우 닮았다.△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속 연주문백제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에도 연주문이 보인다. 사리장엄에는 연주문이 당나라(唐) 풀무늬(草紋)란 뜻인 당초문(唐草紋), 생선 알 문양의 어자문(魚子紋)과 함께 새겨져 있는데 모두 서아시아에 기원을 둔 페르시아계 문양이다. 당초문은 서아시아 팔메트에서 유래한 인동(忍冬) 당초문과 지중해에서 시작된 포도(葡萄) 당초문 두 가지가 대표적인데, 사리장엄에는 인동당초문이 묘사돼 있다. 또 사리공에서 발견된 진주 구슬 역시 페르시아나 동남아시아 베트남과의 교류를 통해서 들어온 것이다.△백제 연주문, 동서 문명교류의 산물연주문은 서아시아에 기원을 둔 페르시아 공예품의 전형적인 문양이다. 연주문은 진주를 상징하는 작은 원을 구슬처럼 꿰맨 듯 연결해 만든 무늬인데, 원래 진주는 광명과 선(善)을 상징해 왕관, 건축, 의복의 장신구로 많이 사용되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시기 연주문인 부여 외리 8무늬 벽돌과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에 새겨진 띠모양 연주문은 실크로드 동서 문명 교류가 백제까지 이어져 백제 장식 문양에 뿌리를 내렸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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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4.21 23:02

[⑥ 관음보살과 실크로드] 백제 관음상, 인도·이란 문명을 포용하다

관음보살(觀音菩薩)은 불교의 여러 보살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보살이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 즉 중생이 관음보살을 부르면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고 믿기에 불교가 번성한 지역이면 어느 곳에나 관음상이 있다. 그런데 관음보살은 이란의 수신(水神) 아나히타(Anahita)와 힌두 여신 사라스바티(Sarasvati)에 원류를 두고 있다. 무슨 소리일까? 관음보살은 페르시아와 인도의 신이 간다라 지역에서 불교화된 후 중국과 한국에 전해졌으며, 백제를 통해 일본에 건너가 크게 유행하였다. 실크로드를 따라 전파된 관음 신앙과 그 속에 남아 있는 백제의 흔적을 탐색한다.△페르시아인도 물의 여신과 관음보살관음보살은 구원을 요청하는 중생을 구제해주는 구도자다. 관음은 소리(音)를 본다(觀)는 의미인데,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악보를 보기만 해도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끼듯 중생을 구제하는 탁월한 능력을 관음 두 글자로 표현한 것이다. 보살은 지혜를 가진 자, 구도자를 뜻한다.원래 관음보살은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의 성스러운 물의 여신 아나히타에서 기원했다. 관음보살이 머리 위에 화불(化佛)을 얹고 있거나 천관(天冠)을 쓴 것이 아나히타상의 특징과 유사하며, 손에 물병을 들고 있는 것 또한 관음보살상의 그것과 같다. 또 관음보살상 오른손에 들려 있는 버들가지 역시 아나히타상 장식 문양과 비슷하다.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관음성지가 모두 해안에 위치해 있고 한결같이 흐르는 물병을 들고 있는 것도 물의 여신 아나히타와 관련이 있다.한편 아나히타는 힌두교에서 창조의 신 브라흐마의 아내이며 물과 풍요의 여신인 사라스바티와 기원이 같다. 아나히타는 하라흐바티(Harahvat)로도 불리는데 이는 사라스바티를 페르시아어로 발음한 것이다. 또 관음은 산스크리트어 아바로키테슈와라(Avalokitevara)를 한자로 표현한 것인데, 아바로키테슈와라는 브라만교에서 비슈누와 시바 신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되었다.간단히 정리하면, 이란의 수신 아나히타가 간다라에 들어와 불교의 관음보살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힌두교의 신들도 수용된 것이다.△아잔타석굴, 호류지 금당벽화의 원류관음보살과 인도페르시아의 특별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호류지(法隆寺)다. 호류지는 백제 승려 혜총에게 불교를 배워 일본 불교 발전에 절대적 공헌을 한 쇼토쿠태자(聖德太子)가 607년에 세운 나라(奈良)현의 사찰이다. 호류지에는 한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관음보살 세 점이 있다. 그것은 금당벽화 속 관음보살과 백제관음 그리고 몽전(夢殿)의 구세관음이다.먼저 금당벽화는 인도 아잔타(Ajanta) 석굴 벽화가 그 원류이다. 이는 금당벽화 6호벽 아미타정토도와 아잔타석굴 제1굴 보살상이 쌍둥이처럼 닮은 것에서 확인된다. 힌두 문화를 꽃피운 굽타 왕조 때 건축된 아잔타 석굴의 벽화와 불상들은 인도 고유의 특색이 두드러진다. 아잔타석굴 제1굴 벽화에는 자타카(Jataka) 즉 붓다의 전생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이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은 연꽃을 손에 쥐고 있는 보디사트바 파드마파니(Bodhisattva Padmapani)로 일명 연화수보살(蓮花手菩薩)이라고 불린다. 보관, 목걸이, 팔찌 등으로 장식하고 기품 있게 미소 짓고 있는 이 그림은 금당벽화 아미타정토도 우측에 화려한 장식과 가냘픈 허리, 손가락 굽히는 모양, 응시하는 눈매 등으로 그려진 관음보살상을 매우 닮았다. 이는 아잔타석굴 양식이 돈황을 거쳐 한반도로 유입된 후 일본에 전해졌음을 보여주는 놀랍고 흥미로운 사례다.△호류지 관음상의 인도이란 특색호류지 별관에 전시되어 있는 일본 국보 백제관음은 키가 209.4㎝의 장신 불상으로 7세기 초중엽에 제작된 것이다. 백제관음상의 특이한 광배, 8등신의 호리호리한 몸매, 부드러운 어깨와 허리 곡선을 보고 있으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무엇보다 우아한 미소를 띤 얼굴은 일본 불상에서 볼 수 없는 전형적인 백제인의 모습이다.백제관음은 인도 양식을 포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보살의 형상은 인도 귀족의 모습을 띠고 있어 머리에 보관을 쓰고 천의(天衣)를 걸쳤으며 아래에는 치마와 같은 군의(裙衣)를 걸치고 있다. 또 귀걸이, 목걸이, 팔찌, 영락 등으로 몸을 장식한다. 인도 귀족의 모습이 토착화된 백제관음은 인도 미술 양식이 실크로드를 따라 백제를 거쳐 일본에 전래되었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예이다.호류지에는 백제인이 만든 관음상이 하나 더 있으니 키 180㎝의 구세관음(救世觀音)이 그것이다. 일본에서는 구세관음을 쇼토쿠태자를 본 뜬 불상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백제 불상이다. 이를 입증하는 증거들은 많다. 우선 호류지의 고문서 성예초(聖譽抄)와 헤이안(平安)시대 역사서인 부상략기(扶桑略記)에는 백제 위덕왕이 서거한 부왕을 그리워해 구세관음을 제작한 사실이 기술되어 있다. 또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 마애삼존석불의 우측 보살입상은 머리에 높은 보관을 쓰고 있고, 천의는 양팔에 걸쳐져 U자형으로 길게 늘어져 있으며 두 손에 보주를 들고 있는 것이 구세관음과 매우 닮았다. 구세관음이 백제 작품임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좌인 것이다.그런데 구세관음의 보관에는 조로아스터교를 기반으로 하는 페르시아 사산왕조의 심볼인 일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란 왕의 상징인 일월 문양이 왜 새겨져 있을까? 이는 구세관음을 제작한 백제가 페르시아와도 긴밀히 교류했었음을 말해준다.△관음보살, 실크로드 문명 교류의 소산관음신앙은 페르시아와 인도에 기원을 두며,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해졌고 다시 백제를 통해 일본에 전래되었다. 일본 호류지에 남아 있는 관음보살상은 실크로드 문명 교류의 소산으로 백제가 인도와 페르시아 문명과도 교류한 해양실크로드의 주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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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4.07 23:02

[⑤ 일본 보물창고 쇼소인(正倉院)과 백제] 日 왕가 '1급 보물' 곳곳에…'백제의 혼' 살아 숨 쉬다

일본 나라(奈良)현 도다이지(東大寺) 경내에 있는 쇼소인(正倉院)은 고대 일본 왕실의 보물창고다. 이곳에는 일본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중국, 인도, 서역 등지에서 수입한 각종 미술품, 공예품, 문서가 보관돼 있다. 특히 백제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이 바로 이곳에 있다. 일본 국보급 문화재의 일대 보고인 쇼소인에 있는 백제 보물은 어떤 것이 있고, 어떻게 이곳에 왔을까?△사슴 천국 나라현의 실크로드 보물들과거 일본의 수도였던 나라현은 불교문화가 꽃피운 곳으로 도시 어디에서나 사슴을 볼 수 있는 매우 특이한 도시다. 우리 나라에 백제의 도읍지인 부여와 공주가 있고 신라에 경주가 있었다면, 일본에는 바로 나라현이 있다.나라현을 대표하는 사찰 도다이지(東大寺) 후원에는 일본 왕실 보물창고인 쇼소인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는 일본 유물 외에 중국 당나라나 서역, 페르시아 등에서 유입된 희귀한 보물 약 9000여점이 소장되어 있다. 쇼소인 보물은 매년 10월 수십 점만 공개하고 공개 후 십년 동안은 전시를 제한할 만큼 소중히 여기는 국보급 유물들이다.△백제에서 제작한 서역풍 유리잔쇼소인에는 코발트빛을 내뿜는 높이 12cm의 특이한 유리잔이 있다. 한눈에도 서역 페르시아 계통임이 느껴지는 유물이다. 그동안 일본 학계에서는 이 유리잔이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지를 놓고 설왕설래했었다. 그런데 최근 이 의문이 풀렸다. 이 유리잔이 백제에서 가공된 것임이 밝혀진 것이다. 증거는 유리잔 받침에 새겨진 무늬에 있다. 유리잔 받침에는 역동적 소용돌이 모양의 애초문(唐草文)과 작은 생선알 모양의 어자문(魚子紋)이 새겨져 있는데, 미륵사지 금동제 사리외함에 새겨진 것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또 유리 표면에 동그란 무늬를 덧붙인 장식기법은 경북 칠곡 송림사 전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 그릇과 유사해 한반도와 깊은 관련이 있는 유물임이 확인되었다. 일본 나라국립박물관 학예부장인 나이토 사카에는 백제와 일본 왕실의 밀접한 친분 관계로 장인들이 세공한 다수의 공예품을 일본에 선물로 보냈었고, 백제 멸망 뒤 다수 장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점 등으로 미뤄 이 유리잔은 백제에서 가공돼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백제인 미마지(味摩之), 일본에 기악을 전하다.미마지는 백제인으로 AD 612년 기악을 일본에 전수한 인물이다. 기악은 한국의 산대가면극, 일본 고대 가면극 노(能)의 원류로 여겨지는 탈춤 형식의 음악 공연이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인 미마지가 오에서 기악무를 배우고 일본에 와 사쿠라이(나라현 북부의 도시)에서 소년을 모아 기악을 가르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백제인 미마지가 기악을 배운 중국 오나라는 어디이며, 기악은 구체적으로 어떤 공연이었을까? 오늘날 위치로 추적하면, 미마지가 기악을 배웠던 오나라는 백제와 교류가 빈번했던 양자강 연안 중국 남부 지역을, 기악 공연은 가면극 형식의 공연이었다. 쇼소인에는 당시에 사용되었던 기악탈이 남아 있어 기악 공연이 어떠했는지 유추할 수 있다. 당시 기악 공연은 높은 괴물같은 탈을 쓴 배우가 선두에 서고, 피리와 북 등 악기 연주단이 뒤따르며 승려 일행이 같이 행진하였다. 또 사자춤이 연행되었고 중국 강남의 미녀 오녀(吳女, 용을 잡아 먹고 산다는 인도 신화 속의 큰 새 가루다, 술취한 주정뱅이 서역왕 취호왕 등으로 분장한 가면 배우들이 무언극 형식으로 연기하였다. 쇼소인 기악 가면들은 페르시아, 인도, 중국 그리고 백제에서 공연되던 가면 악무가 백제인 미마지에 의해 일본에 전수되었음을 보여준다.△의자왕이 보낸 천하 명품 바둑알과 바둑판쇼소인에는 오늘날 기술로도 세계 최고 수준임을 보여주는 바둑 용품이 보관되어 있다. 쇼소인 헌납목록인 국가진보장에 따르면, 백제 의자왕이 당시 일본의 최고 실력자였던 내대신(內大臣) 후지와라 가마타리(藤原鎌足)에게 적색옻칠장을 선물했다. 그리고 그 안에 코끼리 상아를 염색한 후 표면을 아름답게 조각해 만든 홍아발루기자(紅牙撥鏤碁子)와 감아발루기자(紺牙撥鏤碁子)라고 불리는 바둑돌 두 벌, 상아로 은빛 코끼리 문양을 정교하게 새긴 바둑돌통인 은평탈합자(銀平脫合子)와 금은귀갑감(金銀龜甲龕)을 넣었다. 옻칠장 속 바둑 용품은 백제 장인의 화려하고 정밀했던 세공 기술을 보여주는 1급 보물이다. 한편 일본 왕실에 보낸 바둑 용품 선물 목록에 빠진 바둑판이 쇼소인에 소장되어 있는데, 목화자단기국(木畵紫檀碁局)이 그것이다. 스리랑카산 자단에 상아로 줄을 긋고 낙타, 공작 등을 새긴 이 바둑판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바둑판이다. 그동안 이 바둑판이 도대체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으나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임을 다음 몇 가지 점이 증명하고 있다. 첫째, 바둑판의 화점이 우리 나라 순장 바둑에서만 볼 수 있는 17개이다. 바둑판의 화점 수는 중국은 5개, 일본은 9개, 티베트 바둑은 12개인데, 우리 나라는 일제 때까지 17개였다. 둘째, 바둑판에 쓰인 목재가 한국산 소나무인 육송이다. 이는 목화자단기국이 백제 유물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다. 셋째, 적색옻칠장 안에 들어 있던 바둑알에 새겨진 새 무늬가 안압지에서 출토된 상아 유물에서도 발견된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목화자단기국 바둑판은 백제가 일본 왕실에 보낸 것임이 분명하다.△해양강국 백제, 바다 실크로드를 개척하다백제 보물은 일본이 세계 제일의 보물 창고라고 자랑하는 쇼소인 외에도 나라현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호류지(法隆寺)에도 있다. 동양의 비너스상으로 불려지는 세계적인 문화재 백제관음과 구세관음상이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나라현 곳곳에 남아 있는 백제 보물들은 백제가 일본과 긴밀히 교류했을 뿐 아니라 서역 국가들과도 활발히 교섭했었음을 말해준다. 백제는 바다 실크로드를 개척한 해양강국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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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24 23:02

[④ 한국음식과 실크로드] 전주비빔밥, 세계문명과 소통하다

다문화 시대의 대한민국. 이젠 어디에서도 외국인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국내 거주 외국인 수는 200만 명을 넘어섰으며 전북은 다문화 혼인 비중이 전국 최고다. 오늘날 우리가 주변에서 체감하는 세계화의 문화적 다양성은 동서 문명을 연결해준 실크로드에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도시 전주는 문명의 루트 실크로드와 깊은 연관이 있다. 세계에 우리 한식의 위대함을 알린 전주비빔밥과 한국 전통먹거리가 실크로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탐색한다.△문명 교류의 고속도로, 실크로드실크로드는 문자 그대로 비단길이다. 비단길은 중국의 명품 비단이 서역에서 인기를 끌자 중앙아시아를 거쳐 로마까지 운송되면서 생겨난 이름이다. 실크로드를 통해 동양에서 서양으로 건너간 것은 비단만이 아니다. 도자기, 칠기, 구리, 차, 약재, 대황 등이 사막을 건너 서양으로 전해졌고, 서양의 유리, 상아, 사자, 불교, 경교, 이슬람교 등이 동방으로 건너왔다. 또한 향신료를 비롯한 수많은 식재료 역시 실크로드를 통해 동과 서를 오갔다.△세계 식재료를 비빈 전주비빔밥한국을 넘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는 전주비빔밥은 실크로드 문명 교류를 통해 탄생한 다문화 음식이다. 전주비빔밥의 주재료인 쌀, 마늘, 당근, 오이, 시금치, 고추 등은 모두 실크로드를 통해 전래된 식재료들이다.먼저 우리 국민들의 수천 년 주식 곡물인 쌀은 실크로드를 통해 확산된 대표적인 농작물이다. 벼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와 중국 운남에서 재배되어 한반도로 전래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무병장수의 탁월한 효능을 가졌다는 마늘은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가 원산지다. 2000년 전 알렉산더 대왕은 전투에 임하기 전 병사들에게 마늘을 먹였다고 하며, 만리장성을 쌓는 인부들 또한 마늘을 먹으며 40도를 넘는 무더위를 견디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당근은 아프가니스탄이 2000년 이상의 재배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 나라에는 당(唐)나라에서 도입되었기 때문에 당근이라 하고, 빨간 당나라 무라는 뜻에서 홍당무라고도 불렀다.시금치는 채소의 왕으로 불린다. 미국 인기 애니메이션 뽀빠이를 통해 친숙해진 시금치는 페르시아에서 아라비아와 지중해 연안을 거쳐 유럽으로 퍼졌고 우리 나라에는 15세기 무렵 중국에서 들어왔다. 토양 수분이 많아야 잘 자라는 오이는 인도와 남아시아가 원산지다. 1494년 콜롬버스에 의해 신대륙에 전해졌으며, 우리 나라에는 1500년 전에 들어왔다.양파는 이집트와 페르시아에서 재배하기 시작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양파를 먹으면 힘이 생기고 양파에 영원한 생명이 들어 있다고 믿었다. 기원전 14세기 투탕카멘 왕과 기원전 12세기 람세스 4세의 무덤에서 양파 화석이 발견되었으며, 피라미드 내부도 양파 그림으로 장식했다. 벗겨도 벗겨도 계속 나오는 양파 껍질 속에 영원한 생명의 힘이 담겨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매운 맛을 내는 대표 식재료인 고추의 원산지는 멕시코와 남미다. 고추는 고초(苦草)에서 유래된 말로 일본에서는 도우가라시(唐辛子), 중국에서는 애초(唐椒)라 불리운다. 고추는 우리 나라에서 왜초(倭椒)라 했는데 1614년에 (광해군 6년) 일본에서 처음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고추가 우리 나라에 유입된 후 한국 음식문화는 크게 변화했다. 백김치가 붉은색 김치로 바뀌고, 육개장 등 고춧가루를 이용한 국물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호박은 열대 및 아열대 기후인 미국 남서부 지역과 멕시코 북부가 원산지이다. 호박은 병자호란 이후 중국에서 환국하는 사신에 의해 우리 나라에 유입되었다.솔솔 고소한 냄새 풍기는 참기름을 만드는 참깨는 호마(胡麻)라 불렸는데, 페르시아 상인을 통해 중국에 전파된 후 다시 한반도로 유입되었다.△ 호(胡)는 페르시아풍 새 트렌드한국 전통음식과 실크로드의 연관성은 우리 주변의 호(胡) 자가 들어간 음식 이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한민국 대표 간식 호두과자, 호떡, 호빵에는 우리가 흔히 오랑캐라고 부르는 호 자가 붙어 있다. 또한 한국음식 식재료 중 한자 표기에 호(胡) 자가 들어가는 것이 상당수다. 마늘은 호산(胡蒜), 오이는 호과(胡瓜), 참깨는 호마(胡麻), 양파는 호총(胡蔥), 당근은 호나복, 후추는 호초(胡椒)라 하여 모두 호(胡) 자로 표기했었다. 여기서 호(胡) 자는 수입 외래종이나 외래문화를 뜻하는 글자이다.호 자를 좀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선 동서 문명 교류를 꽃피웠던 중국 당(唐)나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에는 외국인이 넘쳐났는데, 이들을 호인(胡人)이라 불렀다. 호인은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이나 페르시아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외국 음악을 호악(胡樂), 외국 의상을 호복(胡服), 외국 음식을 호식(胡食), 외국 무용을 호무(胡舞), 외국 음악에 맞춰 춤추는 여인을 호희(胡姬)라 할 정도로 외국문화 선호 열풍이 불었고 이를 호풍(胡風)이라 하였다. 여기서 호 자는 페르시아풍의 새로운 유행과 트렌드를 대신하는 상징이었다.△전주의 역동성, 다양한 문화 간 공존문화는 원래 상대적이며 상호 교류를 통해 발전한다. 실크로드가 그를 입증한다. 예로부터 동서양은 실크로드를 통해 서로의 문화를 접하며 발전을 이를 수 있었다. 교류가 빈번한 곳일수록 문화가 발전하고 경제가 성장했다. 한(韓)바탕 전주 세계를 비빈다는 전주의 도시 슬로건은 다양한 문화 간의 공존을 강한 역동성으로 표현한 것이다. 세계와 소통하는 음식 전주비빔밥과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온 전통 먹거리를 다문화시대에 제대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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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03 23:02

[③ 무령왕릉과 실크로드] 고대 한·중·일 관계 '보물창고'…백제는 '하이테크 강국'이었다

1500년 동안 베일에 싸였던 백제사의 블랙박스를 연 대발견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백제 대외관계의 수수께끼를 풀어주는 단초를 제공한다.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 양나라의 무덤 양식과 비슷하다. 무령왕릉이 중국 남조문화를 수용한 것은 어떤 의미일까?일본 왕가 고분에서는 무령왕릉 부장품과 비슷한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백제와 일본은 얼마나 가까운 관계였을까? 무령왕릉은 백제가 실크로드를 통해 교역한 범위가 서아시아까지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문명 교류가 백제까지 이어진 구체적인 물증은 무엇일까?△중국 남조의 최첨단 기술을 수용한 백제양자강에 연해 있는 해상 실크로드의 중추 도시 남경(南京). 남쪽의 수도라는 의미를 가진 남경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기 전까지 중국 남방에서 가장 번성했던 도시 중 하나였다. 중국 전통 한족 왕조 중 가장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남조의 수도 역시 남경이었다. 남경은 당시 건강(建康)이라고 불렸다.무령왕은 6세기 동아시아 최강국 남조 양나라에 두 차례 사신을 파견한 바 있다. 당시 백제 선단이 황해를 비스듬히 가로질러 조류를 타고 도착한 곳은 바로 건강 즉 현재의 남경이었다. 무령왕 때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린 양직공도(梁職貢圖) 속에 보이는 백제 사신은 이 무렵에 그려진 것이다.무엇보다 특이한 점은, 무령왕릉이 양나라 왕실 무덤인 연꽃무늬 벽돌로 쌓은 아치형 전축분을 본 따 조성한 벽돌무덤이라는 것이다. 무령왕릉의 벽돌에 새겨진 여섯 글자 梁官瓦爲師矣(양나라 관청 벽돌을 모범으로 삼았다.)가 이를 입증한다. 뿐만 아니다. 무령왕릉에서는 청자육이호, 초두, 금동 허리띠와 같은 남조 시대의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중국에서도 청자나 금제 장식품은 대단히 귀한 물품이어서 황제나 귀족 무덤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최첨단 물품이 그대로 백제에 유입된 것이다.무령왕릉이 중국 전통 한족 왕조 중 가장 화려하고 찬란한 문화를 일구었던 남조문화를 수용한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쇠락하던 국력을 회복시킨 백제가 당시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선진 문화를 이룩했던 남조로부터 최첨단 기술을 받아들여 하이테크 고대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였다.△일본 고분에서 무령왕릉 부장품과 비슷한 유물 대거 출토무령왕은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일본 규슈(九州) 인근 섬인 가카라시마(加唐島)에는 전북 익산의 화강암을 가져다 만든 백제무령왕의 탄생지(百濟武寧王生の誕地)라고 새긴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2001년 12월 일본 사회를 발칵 뒤집는 사건이 있었다. 아키히토 일왕이 생일날 회견에서 자신이 백제 무령왕의 후손임을 고백한 것이다. 실제로 고대 일본 왕가의 무덤에서는 백제와 깊은 관련이 유물이 대량 출토되고 있다. 후쿠오카(福岡)에서 구마모토(熊本)로 가는 길목에 있는 에다후나야마(江船田山) 고분. 일본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전방후원분이다. 이 고분에서 나온 금동 신발, 금귀고리, 청동 거울 등은 무령왕릉 부장품 그대로다. 금동관은 익산 입점리 고분에서 나온 유물과 크기만 다를 뿐 똑같다. 세계 최대의 무덤이자 일본 최대의 전방후원분인 오사카 인덕천황릉(仁德天皇陵). 여기서 나온 청동 거울과 환두대도는 무령왕릉에서 나온 것과 판박이처럼 같다. 무령왕릉 부장품과 일본 왕가 무덤의 유물이 유사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부인할 수 없는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이 있다. 첫째, 일본 고대사는 백제와 가장 연관이 깊다는 점이다. 무령왕은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뒤에 백제에 와서 왕이 되었고, 일본 왕가와 지배층 무덤에는 백제계 도래인과 관계된 유물과 기록이 수두룩하다. 둘째, 백제가 중국 남조와 교역하던 무령왕 시대에는 아직 항해술이 고도로 발달하지 않아 중국과 일본이 직접 교역하기 어려웠다. 일본으로서는 한반도를 거쳐 중국과 교역하는 것이 필요했고, 백제가 그 가교 역할을 한 것이다.△서아시아 그리핀과 무령왕릉 진묘수무령왕릉 입구에 놓여 있는 진묘수(鎭墓獸). 진묘수는 문자 그대로 무덤을 지키는 짐승이라는 뜻이다. 그 모습은 참으로 특이해 어떤 동물인지 알 길이 없다. 앞에서 보면 돼지 같으나 돼지가 아니다. 개 같기도 하고, 해태를 닮은 것도 같다. 머리 중앙 부분에는 닭벼슬 같은 철제 장식이 달려 있다.진묘수는 중국 한대 이래로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뜻으로 무덤 내부 앞에 세워두는 풍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 고분에서 수많은 진묘수가 출토된 바 있다. 그런데 최근 중국 남북조 시대의 동서문화 교류와 무령왕릉의 관계를 연구한 민병훈 박사가 진묘수의 기원을 서아시아 상상의 동물 그리핀(griffin)과 연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주목을 받고 있다.그리핀은 사자의 몸에 새 머리를 한 상상의 동물이다. 몸에는 날개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머리는 주로 독수리가 많다. 그리핀은 BC 2000년경 옛 시리아 레반트(Levant) 지방에서 처음 생겨나 서아시아 신전이나 무덤의 장식에 즐겨 사용되었다.서아시아 그리핀과 무령왕릉 진묘수, 어떻게 해석함이 좋을까? 무령왕릉 진묘수는 서아시아와 지중해 일대에서 형성된 수호신으로서의 그리핀 도상이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백제 묘장 문화에까지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한반도를 넘어 끊임없이 해외 진출을 도모한 백제백제는 한반도를 넘어 동아시아 문화를 포용하는 개방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백제의 힘이었다. 백제는 중국 남조와 밀접한 교류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아시아를 넘어 서아시아 문화까지 포용하는 다문화 왕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것은 백제가 열망한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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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17 23:02

[② 돈황 벽화 속 백제인] 턱끈 없는 야구모자 비슷한 '무후책' 쓰고 불교 전파

동서양으로 통하는 거대한 길 실크로드. 실크로드의 여러 도시 가운데 실크로드 교역의 오아시스, 문명 교류의 요지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바로 돈황이다. 그런데 최근 돈황 벽화에서 고대 한국인 그림이 대거 발견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가운데는 백제인 모습도 보인다. 사막 한 가운데 있는 도시 돈황에 왜 고대 한국인의 족적이 남아 있는 것일까? 벽화 속 백제인은 어떤 모습일까?△돈황 막고굴, 사막 위에 건립된 위대한 미술관돈황은 광활한 중국 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로 1500년 전 서역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돈황이 세계적인 관광지로 각광받고, 전 세계의 수많은 학자들을 돈황학에 빠져들게 한 것은 실크로드가 낳은 최고의 금자탑인 막고굴(莫高窟) 때문이다. 수천 개의 불상이 있다 하여 일명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불리는 막고굴은 세계적인 불교유적지요 사막 위에 건립된 위대한 미술관이다.△돈황은 한국과 밀접한 관계돈황은 한국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막고굴 제17굴에서 신라의 구도승(求道僧) 혜초(慧超)가 지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과 원효 스님이 저술한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필사본이 발굴되어 고대 한국과의 연관성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최근 막고굴 벽화에서 고대 한국인의 복식과 생활상을 보여주는 그림들이 무더기로 발견했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돈황연구원의 중국학자 리리신(李立新) 연구원이다. 그는 둔황 지역의 석굴을 10여년 동안 조사한 결과 막고굴 38개, 유림굴과 서천불동 각 1개에서 고구려백제신라고려인이 그려진 그림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의 주장은 향후 진위여부에 대한 정확한 검증을 요한다. 다만 돈황 벽화 중 한국 관련 그림을 10여년간 직접 조사한 유일한 연구자인 만큼 그의 주장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돈황 벽화 속 고구려인이번에 공개된 40여 점의 인물상은 고구려인이 가장 많은데, 대부분 새 깃털을 꽂아 만든 모자인 조우관을 쓰고 있다. 일찍이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Afrosiab) 궁전 벽화에서 조우관을 쓴 고구려 사신 그림이 발견된 바 있는데, 돈황 벽화 속 고구려 인물상도 비슷한 조우관을 착용하고 있다.그런데 리 연구원이 공개한 조우관 인물상은 이제까지 알려졌던 통상적인 모습과는 매우 다르다. 이제까지 발견된 조우관 인물상은 보통 두 개의 새 깃털을 모자에 꽂았지만 이번에 발견된 인물상에서는 세 개 또는 네 개의 깃털을 꽂은 경우도 있었다. 또 새의 깃털이 아니라 꼬리를 꽂은 조미관(鳥尾冠), 흰색 비단으로 만든 백라관(白羅冠), 청색 비단으로 만든 청라관(靑羅冠), 자주색 가죽으로 만든 자라관(紫羅冠) 등 매우 다양했다.△돈황 벽화 속 신라인과 고려인막고굴 제61굴의 오대산도(五臺山圖)는 돈황 석굴 가운데 가장 큰 벽화 중 하나인데, 특이하게도 시대가 다른 신라인과 고려인이 함께 묘사되어 있다. 그 이유는 중국 오대(五代907~960) 말기에 제작된 오대산도는 밑그림이 만들어진 시기가 신라와 고려가 공존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오대산도의 오른쪽 아랫부분에 있는 신라송공사(新羅送供使신라에서 보낸 공양 사신)라는 그림에는 통역원, 사신, 두 명의 관원, 마부 등 신라 사신 일행 5명이 그려져 있고 오른편에는 이들을 맞고 있는 두 명의 중국인 관리가 보인다. 또 이 그림 왼쪽 아래에 있는 고려왕사(高麗王使)라는 그림에는 연락관, 사신, 짐꾼 등 3명의 고려 사신 일행과 이들을 안내하는 여관 주인이 그려져 있다.△돈황 벽화 속 백제인, 무후책을 쓰다이번에 발견된 돈황 벽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백제인 인물상이다. 현재까지 회화를 통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백제인 인물상은 중국 양(梁)나라 시대에 그려진 사신도인 양직공도(梁職貢圖)였다. 양직공도 이후 또다시 백제인 인물상이 나타난 것이다. 돈황 벽화 속 백제인은 두 가지 형태의 모습을 보인다.먼저 막고굴 제335굴 벽화에는 문수보살과 유마거사가 나누는 대화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조우관을 쓴 사람이 두 명 보인다. 깃이 둥글고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새 깃털 두 개가 꽂힌 푸른색 모자를 쓰고 있는 이들은 서로 마주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리 연구원은 북풍을 막는 옷깃을 한 사람은 추운 지방에서 온 고구려인이고, 열린 옷깃을 한 사람은 따뜻한 남쪽에서 온 백제인으로 봤다.그는 고대 백제인은 고구려와 신라처럼 조우관을 쓰기도 했지만 턱끈이 없는 오늘날 야구 모자와 비슷한 무후책(無後 )을 쓰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막고굴 제237굴 벽화에는 곱슬머리 외국 사신 위의 인물이 무후책을 쓰고 있다. 이 사람이 바로 백제인이다. 막고굴 제115굴 벽화는 부처님이 열반했을 때 각국에서 조문단을 파견해 눈물을 흘리며 애도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림 속에 조우관을 쓴 인물과 무후책을 쓴 두 인물이 보인다. 조우관을 쓴 사람이 신라 혹은 고구려인이고, 무후책을 쓴 사람이 백제인이다.그러면 백제인이 돈황 벽화에 대거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리 연구원은 그 연유를 불교를 널리 전파하기 위해 각국의 다양한 인물상을 대거 벽화에 집어 넣으면서 자연스레 백제인 인물상도 들어갔고, 한편으로는 백제 유민(遺民)이 돈황으로 이주해서 살았기 때문으로 추정했다.△백제, 세계 문명과 교류한 글로벌 국가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돈황 벽화에 등장한 백제인. 백제는 굳게 닫혀진 나라가 아니었다. 백제는 바다 건너 세계 문명과 교류한 문화적 개방성을 띤 글로벌 국가였다. 실크로드에서 만나는 백제 이야기는 중국을 지나 인도양을 넘어 그리스까지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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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03 23:02

[① 백제와 실크로드] 찬란했던 동서 문물교류…그 중심에 '백제'가 있었다

한중 수교 25주년을 맞아 전북일보는 우석대 공자아카데미와 함께 백제 시대부터 실크로드에 남긴 우리 선조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탐방을 기획, 격주로 연재한다.전통문화의 향기가 가득한 전주에는 특이한 곳이 있다. 바로 전주 인후동의 이슬람 성원이다. 이곳은 호남 유일의 이슬람 예배당으로 매주 금요일 시리아인 이맘(이슬람교의 예배인도자)의 주재 하에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인도네시아 등 실크로드 도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올린다. 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주에서 만나는 대단히 이국적인 풍경이다. 한국 전통문화가 살아 숨쉬는 전주는 실제로 예전부터 이슬람문화 그리고 실크로드와 관계가 있었을까. 있다면 얼마나 있었을까.한국과 실크로드하면 대부분은 신라 경주를 떠올린다. 신라 금관, 괘릉 등 실크로드와 관련된 수많은 유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백제는 실크로드와 관련이 없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깊은 연관이 있다.백제는 백가제해(百家濟海)의 준말이다. 백가제해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건넜다는 뜻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건넜으면 나라 이름을 백제라 했을까. 오늘부터 시작하는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탐방의 향후 연재할 주요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실크로드 육로에서 만난 백제인광활한 중국이 끝나고 서역이 시작되는 곳 돈황. 이곳에는 세계에서 현존한 가장 규모가 크고, 동양의 루브르라 불리는 세계 최대의 불교 석굴사원 막고굴(莫高窟)이 있다. 최근에 이곳 벽화에서 한국의 삼국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의 고대 한국인 복식과 의관, 생활 모습이 담긴 인물상이 다량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 가운데 백제인 초상화도 있다. 백제인이 실크로드 육로를 따라 동서 문물이 오가던 교류의 장에 확연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특이한 점은 조우관을 쓴 신라인과 달리 백제인은 무후책을 쓰고 있는 점이다.실크로드의 동쪽 종착점 일본 나라(奈良)에 있는 쇼소인(正倉院). 이곳은 실크로드 희귀 유물과 문서가 가득한 일본 왕가의 보물 창고다. 여기에도 백제와 깊은 연관이 있는 유물들이 있다. 코발트빛을 내뿜는 1300여년 전 유리잔. 서역풍이 물씬한 이 유리잔의 다리받침에 새겨진 당초문(唐草紋)과 어자문(魚子紋)은 익산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금동제사리호의 문양을 빼닮았다. 일본 학자 나이토(內藤)는 백제가 서역 페르시아 계통의 유리잔을 수입해 다리받침을 가공해 일본에 전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공주 무녕왕릉. 고대 백제사의 블랙박스를 연 대발견이었다.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도 실크로드와 관련된 것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진묘수(鎭墓獸)다. 진묘수는 글자 그대로 무덤을 지키는 짐승이다. 이 진묘수는 수호신으로서의 상상의 동물 페르시아 그리핀(Griffin)에서 유래한 것이다.△해상실크로드의 주역전남 신안군 증도 앞바다. 이곳에서 1323년 중국 절강성 닝보(寧波)에서 출발해 일본 하카다(博多)로 가다 좌초된 무역선이 발견되었다. 당시 경원(慶元)이라 불렸던 닝보는 한국과 일본이 서아시아나 아라비아 상인들과 교역하던 해상실크로드의 본거지였다. 현재 닝보 시내 중심가에는 당시 고려 사신들이 머물렀던 고려사행관(高麗使行館)이 복원되어 있는데 바다 실크로드를 개척한 우리 선조의 뚜렷한 자취이다.중국 산동성 펑라이(蓬萊). 펑라이는 중국 북방무역의 대표 항구로 한반도 서해 연안에서 출발한 무역선이 가장 많이 정박한 곳이었다. 2005년 펑라이 해안에서는 부안과 강진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자기를 실은 고려 상선이 발굴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완도에는 청해진 유적지가 있다. 당시 동아시아의 지중해 역할을 했던 서해를 누비며 해상왕, 무역왕이라 불렸던 장보고는 바다를 개척한 세계인이었다. 산동성 석도(石島)에는 해상왕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이 있고, 그 옆에는 장보고 기념관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1200여 년 전 바다를 개척해 동북아시아의 해상권과 무역권을 장악한 장보고는 해상실크로드의 주역이었다.△실크로드와 전주비빔밥 그리고 판소리전주의 대표음식 전주비빔밥. 전주비빔밥은 세계와 소통하는 음식이다. 재료가 그를 입증한다. 전주비빔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료인 마늘, 오이, 양파, 당근 등은 모두 페르시아 지역에서 온 것이다. 대한민국 대표간식 호떡, 호빵, 호두과자. 이 또한 실크로드와 깊은 관련이 있다. 호떡, 호빵, 호두과자의 호(胡) 자는 페르시아를 의미한다.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새로운 음식이라는 뜻이다.호남 지역에서 발원한 우리의 전통 음악 판소리. 소리꾼이 고수(鼓手)의 북장단에 맞추어 창(唱)과 아니리를 엇섞어 공연하는 판소리는 우리 나라에만 있을까. 다른 나라에는 판소리가 없을까. 만약 있다면, 우리 나라 판소리와 관련이 있을까.판소리와 유사한 장르는 불교 발원지 고대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매우 다양한 고대 인도의 전통예술 속에서 판소리형 공연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인도의 판다바니(Pandavani)다. 판다바니(Pandavani)는 라마야나와 더불어 인도 2대 산스크리트 서사시로 알려진 마하바라타를 이야기로 풀어내는 판소리형 공연이다. 이웃 중국에는 판소리를 설창(說唱)이라 하는데 백 가지가 넘는다. 중동, 인도, 중앙아시아를 거쳐 일본에 이르기까지 소리길을 따라가면 다양한 형태의 판소리를 만날 수 있다.실크로드하면 떠오르는 황량한 사막. 이제는 관광지에서나 볼 수 있는 사막 위의 낙타 대상(隊商) 카라반. 실크로드는 정녕 사라진 길일까. 그렇지 않다. 실크로드는 모래 바람에 묻혀버린 잊혀진 길이 아니다. 실크로드는 백제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살아 숨쉬는 현재의 길이다. 실크로드에 남긴 우리 선조의 흔적을 찾아나서는 긴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다.△전홍철 우석대 공자아카데미 원장=돈황학 전문가로 실크로드와 중국문화에 대한 글쓰기과 영상 제작을 하고 있으며, 세계 최초로 돈황변문집을 완역 출간한 바 있다. 주요 저서와 역서로 〈돈황 강창문학의 이해〉(소명), 〈돈황 민간문학 담론〉(소명), 〈돈황과 동아시아문학〉(차이나하우스), 〈돈황변문집교주〉(1-6권, 소명), 〈당대 변문(唐代 變文)〉(소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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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1.13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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