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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주보기] HAI 시대, 지역사회 감응에도 주목

출판을 앞두고 작업 중인 시집에 추천서를 써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시인이 아닐뿐더러 그 작가를 알지도 못하는 나더러 왜 쓰라고 하는지 물었다. 이 책은 시인이 시를 쓰고, 시 하나하나마다 AI가 평론을 하는 독특한 방식인데 내가 적합할 것으로 생각되어 부탁한다는 것이다. 당황스러움을 싸맨 채 며칠간 생각을 쥐어짜고 있다. 요즘 시간개념으로는 꽤 오래 된 8년전, 나는 ‘4차산업과 소셜디자인 문화전략’에서 인간지능과 인공지능이 결합된 형태(HAI)가 어떻게 진화할 지를 3단계로 설명한바 있다. 대략 양적인 확장 -> 인간활동 대체 -> 위임과 같은 외부화로 진화할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지금 이 시집은 바로 HAI 합작품으로 구성됐고, 마지막 단계인 AI에 위임해 외부화된 평론이 당당하게 함께 자리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 우리는 매우 ‘숙련’되고 ‘보편화’된 AI를 끼고 산다. 많은 일들을 AI에 맡기고 있다. 컴퓨터가 두뇌를, 로봇이 몸 대신 위임받은 일을 잘 해준다. 이처럼 누구나 편히 쓰는 범용인공지능(AGI) 시대를 누리려면 인간의 창의성과 통합해서 수행하도록 세심히 관리해야 한다. 인간지능(HI)과 인공지능(AI)이 결합한 ‘HAI의 공진화’로 나아가는 지능사회를 위해 투명하고 책임 있는 시스템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일상생활의 인지보조, 스마트홈, 웨어러블에서 HAI 통합이 이뤄질수록 신뢰는 더욱 절실해진다. 지속발전을 위해 디지털 플랫폼을 기반으로 하는 협업시스템 구축이 중요하다. 특히 지역사회에서라면 이런 사회적 관계망의 중심에서 공동 대응을 할 협력구조가 핵심 아닐까? 특히 분산형 협력의 기술적 토대인 디지털 플랫폼은 지리・언어・문화적 경계를 넘어 다양한 주체가 지식・자원・기술을 공유 협력하는 새로운 사회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 뒤에 원격 협업 시스템, 온라인 공동창작, 오픈소스 기반 프로젝트가 급속 확대됐다. 시간・공간・인간에 구애받지 않는 ‘협력공진화’ 모델이 현실적으로 가능함을 잘 봤다. 지금 이 같은 AI전환의 시대에 지속가능한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혁신과 신뢰의 균형이다. 신뢰를 위한 활동 주체들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이처럼 우리는 인간과 기술이 서로의 숨결을 감지하는 시대에 산다. 앞에서 말한 HAI와는 다른 HAI(Human–AI Integration)가 요구된다. 그저 말장난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단순한 기술융합을 넘어, 인간 사회 전체의 감응체계가 다시 짜여지는 조용한 혁명을 맞고 있다는 말이다. 앞에서 말한 1, 2단계에서의 AI는 효율과 예측의 도구로 여겼다. 이제 그 역할은 훨씬 더 섬세하고 관계적이며, 사회적 감정의 층위까지 비추는 ‘조감 장치’가 되어가고 있다. 기술이 인간의 감각을 대신하는 시대가 아니라, 인간의 감응을 확장시키는 시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감응성’에도 주목해야 한다. 특히 지역사회적 감응이라면, 한 지역사회가 변화의 흐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감정으로 해석하며, 어떤 방식으로 공동의 행동을 선택하는가를 뜻한다. 이는 경제나 제도의 문제를 넘어, 사회의 결을 이루는 정서적 지능이다. ‘휘몰이 충격’의 구조적 변화는 모두 감정의 파동을 동반한다. 그러니 감응을 읽지 못하는 지역사회는 변화를 관리할 수 없고, 감응을 외면한 정책은 설득력을 잃는다. 이제 시대는 숫자보다 정동을, 통계보다 감응을 보라고 말한다. 언제까지 소멸 타령이나 하고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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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2.02 19:03

[문화마주보기] 전북 문화기업의 성공조건: 인내자본과 문화액셀러레이터

우리가 평소에 접하는 물건들은 저마다 ‘가격표’를 달고 있다. 편의점에서 사는 생수 한병, 서점의 베스트셀러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단순히 가격표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를 품고 있다, 낡은 고택, 명창의 판소리 공연, 혹은 방탄소년단(BTS)의 뮤직비디오가 그렇다.세계적인 문화경제학자 데이비드 트로스비는 문화가 가진 이 특별한 비밀을 두 개의 가치라는 틀로 명쾌하게 설명했다. 바로 가격표 뒤에 숨겨진 또 다른 가치를 설명한 것이다. 트로스비는 문화상품에는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문화적 가치’가 하나 더 있다고 말했다. 이는 크게 다섯가지 요소로 나뉜다. 미적가치는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아름다움이며, 영적 가치는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고 정신적인 풍요를 주는 힘이다. 사회적 가치는 공동체에 소속감을 주고 서로를 연결한다. 역사적 가치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정체성의 뿌리 역할을 한다. 상징적 가치는 특정 시대나 정신을 대표하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트로스비 이론의 또 다른 핵심은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이다. 보통 자본은 은행의 예금, 공장의 기계를 떠올리지만, 문화 역시 자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문화적 가치가 꾸준히 쌓이면 하나의 커다란 ’자산‘이 된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전통유산이 오늘날 K-콘텐츠의 뿌리가 되어 거대한 경제적 이득을 창출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즉, 지금 우리가 문화를 보존하고 향유하는 행위는 단순히 돈을 쓰는 소비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 저축하는 투자인 셈이다. 전북은 자타가 공인하는 문화적 인프라가 뛰어난 지역이지만, 정작, 지역을 대표할 만한 ’문화 유니콘 기업‘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지역 내 문화 자산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경제적 자본으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죽음의 계곡‘을 건너게 해줄 통합적 지원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다. 문화적 가치는 아카이빙과 진정성을 통해 서서히 문화자본이 되지만, 시장이 요구하는 경제적 가치는 즉각적인 매출과 지표로 증명되어야 한다. 문화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는 시간차가 있다. 이 시간의 간극을 견디지 못할 때, 잠재력 있는 문화기업들은 스케일업의 문턱에서 좌절하게 된다. 전주에서 무형문화재의 서사를 현대적 콘텐츠로 기록하면서 창업과 초기 투자유치도 성공했던 한 문화기업은 이후 매출 등의 지표를 중요하게 여기는 후기 투자로 넘어가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이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통을 기반으로 하는 문화기업은 브랜드의 깊이를 만드는데 시간이 걸리지만, 일반적인 벤처캐피탈, 액셀러레이터들은 단기적 회수율을 더 요구한다. 결국, 문화적 자본이 경제적 자산으로 완전히 만개하기 전, 투자의 시계가 멈춰버리는 셈이다. 전북에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단순히 창업지원금을 주는 것이 아니다. 문화적 가치의 중요성을 깊이 이해하며, 경제적 가치가 궤도에 올라올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는 ’문화 특화 액셀러레이터‘와 ’인내자본‘인 것이다. 진정한 문화수도가 되기 위해서는 문화기업이 가진 이중적 가치를 품어주는 통합 지원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 가치를 알아주는 ’인내하는 파트너‘가 많아질 때 전북의 문화는 비로소 지역의 부(富)로 피어 날 것이다. 이수영 본부장은 전북창조경제혁신센터 미래전략본부장, 전북창조경제혁신센터 투자육성팀장, 전주 동문예술거리추진단 기획팀장, 삼천문화의집 관장, 이수영 음치클리닉 원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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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1.26 18:44

[문화마주보기]사랑의 도시, 예술의 도시, 남원

오늘날의 도시들은 하나같이 풍요와 속도를 말한다. 더 높은 빌딩, 더 많은 인구와 자동차, 더 빠른 기술과 산업. 경쟁과 효율, 첨단이라는 단어가 도시의 가치를 대신한다. 그러나 모든 도시가 같은 방향으로 달려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어떤 도시는 그 흐름에서 한 발 비켜 있을 때, 가장 그 도시다운 얼굴을 드러내며 그것이 곧 경쟁력이 된다. 남원은 바로 그런 도시다. 남원을 ‘사랑의 도시, 예술의 도시’로 부르고 싶다. 이는 새로 만들어낸 슬로건이 아니라 오랫동안 이 땅에 축적되어 온 정체성이다. 성춘향과 이도령의 사랑 이야기는 단순한 연애담이 아니다. 그 안에는 절개와 신의, 권력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인간의 존엄이 담겨 있다. 남원은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품은 도시이며,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사랑의 서사를 일상의 공기로 간직한 곳이다. 남원이 지향해야 할 미래는 첨단기술산업도시의 모방이 아니다. 속도를 늦추는 용기, 느림을 선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빠르게 통과하는 도시가 아니라 천천히 걸을 수 있는 도시, 소비하며 스쳐 가는 공간이 아니라 머물며 사유하는 공간. 남원은 산책의 도시가 되어야 한다. 걷는 동안 자연과 역사, 그리고 자기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도시 말이다. 또한 남원은 판소리가 살아 숨 쉬는 예술의 도시다. 동편제 판소리의 본향으로서 남원은 소리와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희로애락을 전승해왔다. 판소리는 전통 예술을 넘어 시간을 견뎌온 삶의 방식이자 공동체의 기억이다. 이 예술이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울려 퍼질 때, 남원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와 미래를 잇는 문화도시로 성장할 수 있다. 이런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반 또한 남원은 갖추고 있다. KTX를 통해 수도권과 남해안 권역을 잇고, 동서를 연결하는 88고속도로와 남북을 관통하는 순천–완주 고속도로는 남원의 접근성을 높인다. 한옥을 개조한 현대식 숙박시설, 지리산 자락과 섬진강 유역의 식재료로 완성되는 한정식과 추어탕은 자연의 섭리를 체감하게 하는 남원의 뿌리깊은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준다. 광한루와 만인의총 같은 전통 유산, 국립민속국악원과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 같은 현대 문화시설도 공존하며, 지금 조성되고 있는 함파우 예술특화지구에는 소리체험관과 천문관이 있고, 옷칠공예와 도자체험 시설도 더해진다.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에 지난 해 18만 명이 다녀갔다는 사실은 남원의 문화적 잠재력을 분명히 보여준다. 인구 7만이라는 수치는 한계가 아니다. 세계에는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문화 정체성으로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아온 도시들이 많다. 성 프란치스코의 도시로 알려진 인구 2만의 이탈리아 아시시(Assisi)와 바그너의 도시로 유명한 인구 7만의 독일 바이로이트(Bayreuth)처럼, 남원 역시 사랑의 서사와 예술의 전통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으로 세계와 만날 수 있다. 작지만 세계적인 문화도시로 성장할 충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남원은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사랑의 서사, 예술의 유산, 느린 산책이 허락되는 자연풍경. 이를 정성껏 가꾸고 계승한다면, 남원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도시가 될 것이다. 사랑이 전통이 되고, 느림이 경쟁력이 되며, 예술이 일상이 되는 도시. 남원은 그렇게 자신의 길을 가면 된다. 그것이 가장 남원다운 길이다. 허정선 관장은 영남대학교 미술사학 박사를 받았다. 울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를 역임했고 동국대학교 경주 캠퍼스 겸임교수를 지내고 경북대학교, 영남대학교 등서 13년간 강의를 진행했다. 영남대학교 미학 및 미술사학 박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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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1.19 18:20

[문화 마주보기] 한 관찰사의 믿음이 전해준 선물

1846년 병오년의 일이다. 전라도 관찰사 이시재는 덕진연못에 승금정과 취소정을 짓고 낙성연을 열어 도내 수령과 시인, 가객을 불러 모았다. 참석자들은 신분과 지위를 내려놓고 모두 시 한 수씩을 지었다. 1990년대에 공개돼 관심을 모았던 <승금정시회화첩>이 만들어진 배경이다. 이날 시회의 모습을 그린 그림과 참석자들의 시를 담고, 이시재가 서문을 쓴 <승금정시회화첩>은 잠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화제가 되었지만, 곧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러던 <승금정시회화첩>이 다시 모습을 보인 것은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이건희 기증품을 공개하면서다. 국립전주박물관은 2024년 이 작품을 전시하고, 전주문화원과 함께 <승금정시회화첩>에 대한 후속 연구를 진행했다. 지난해 말 국립전주박물관과 전주문화원이 공동으로 발간한 학술총서 <승금정시회화첩>이 그 성과물이다. 소장품을 조사하고 학술적 의미와 가치를 밝히는 일은 박물관의 중요한 역할이다. <승금정시회화첩> 연구는 작품 자체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련 자료를 연계해 분석하는 일을 더했다. 승금정 시회와 화첩 제작의 배경, 그리고 그 의미를 통해 당시 전주 지역의 문화사를 밝히고자 했다. 주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 <승금정시회화첩> 이면에 숨어 있던 조력자, 오상수와 이삼만의 발견이다. 오상수는 전주 출신으로 <풍요삼선>에 작품을 올린 시인이다. 그의 문집 <유사집>에 실린 <승금정화첩서>를 보면, 이시재가 시회를 기념하는 화첩을 만들면서 오상수에게 서문을 지으라 했다는 내용이 있다. 흥미롭게도 <승금정화첩서>에 실린 오상수의 서문은 <승금정시회화첩>에 실린 이시재의 서문과 다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최종적으로는 이시재의 서문이 수록된 것이다. 장황 또한 제목에 쓰인 ‘화첩’이 아니라 화권(두루마리)으로 바뀌었는데, <승금정시회화첩>의 글씨는 오상수의 필치에 가까워 화첩의 제작 과정에서 그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방증한다. 또 하나 주목할 문헌은 2020년 공개된 『풍패집록』이다. 이 자료는 전주 사람 채경묵이 19세기 말에 간행한 것이다. 승금정 시회에서 지어진 시의 현판과 승금정·취소정의 상량문 등 <승금정시회화첩>과 관련된 글들이 포함돼 있다. 승금정 상량문은 이시재가 짓고 이삼만이 글씨를 썼다는 것, 취소정 상량문을 이만용이 지었다는 기록 등은 승금정 시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나중에 덧붙여진 기록이지만, 이만용이 지은 취소정 상량문이 사실은 오상수의 대작이라는 내용은 흥미롭다. 정확한 사실은 앞으로 더해질 새로운 자료와 후속 연구로 밝혀지겠지만, 관찰사가 추진한 문예 사업에 오상수와 서예가 이삼만 등 당시 전주 지역에서 추앙받던 문사들이 큰 역할을 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승금정 시회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었다. 관찰사 이시재는 이를 발전시켜 문예 공간이라 할 수 있는 후향시사를 결성했다. 여기에 자금을 출연하고 시사의 운영을 지역 문사들에게 맡겼다. 그는 <승금정>이라는 건물은 사라지더라도, 그곳에서 이룬 문예적 성과는 남아 그 아름다움과 풍류가 후세에 전해질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 <승금정시회화첩>은 한 관찰사의 믿음이 이뤄낸 귀한 결실이다.다시 병오년을 맞았다. 새해의 시작점에서, 우리 박물관은 무엇으로, 또 어떻게 지역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 생각이 깊어진다. 장진아 학예연구실장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2000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등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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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1.12 18:44

[문화마주보기] 지역문화정책, 물타기와 물갈이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변화’를 이야기한다. 대개 외침과 설계를 함께 담는다. ‘휘몰이 충격’에 대응하려니 새해에는 프로그램이나 예산 욕심 정도에 그칠 수 없겠다. 지역 문화정책이라면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하는 철학을 말해야할 것이다. 지역은 아직도 철학 부재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무기력한 지역사회에 변화가 절실하다. 문화로 활기찬 사회만들기를 다짐하는 선언문이라도 새삼 필요하지않을까. 그동안 화려한 문화정책들이 반복되었다. 문화 거점 리모델링, 주민 참여, 연례 행사 축제는 수치로 그 성과를 자랑했다. 덕분에 문화소비는 늘었다지만, 공동체 활기는 좀처럼 재생(revolution)되지 않았다. 마을들은 시간이 멈춘 듯 하고, 공간은 텅 비어 있으며, 인간들은 여전히 관람객 수준이다. 이 3간의 불협화음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절감하며, ‘물타기’라는 말을 골라내 쓴다. 문화를 덧댄 때때옷 정책으로 삶의 온도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이제는 창발적이어야 한다. 진화(evolution)라는 말 등에 올라타고, 반기를 흔들며 시작해야한다. 위에서 설계해 내려보내 준 정답을 지역이 베껴쓰는 방식은 이제 아니다. 아래에서 시작된 질문들이 얽히고설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문화정책에 창발성이 필요하다는 말은, 행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행정이 창발을 가능하게 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문화정책이 지녀야 할 정책철학이다. 이제는 콘텐츠를 직접 공급하는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 소비자 스스로 문화를 충분히 실험 가능한 조건을 조성하도록 정책좌표를 옮겨야 한다. 예산은 ‘사업비’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다룰 수 있는 ‘블록’이 되어야 한다. 공간은 기능을 가득 채우는 창고가 아니라 정책의도를 설계할 수 있는 ’여백’이어야 한다. 정책은 완벽한 사용설명서가 아니라, 실패해도 괜찮은 조립식 플랫폼으로 존재해야 한다. 무엇보다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꿔야 한다. ‘지원 대상자’를 골라 베풀기보다, ‘역할‘을 만들어 줘야 한다. 기획자보다 조율자, 숙련된 행정가보다 조건설계자, 소셜 디자이너이자, 공동체의 문화생태 엔지니어 역할이다. 활력을 이끌어 낼 패실리테이터로 시스템을 설계해야한다. 누구나 아는것 처럼 쉽게 말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것이 거버넌스다. 선형 구조에서 루프 구조로 바꿔야 한다. 참여→집행→평가의 ‘직선’구조는 허수아비 막대기다. 질문→사회실험→전문평가→공유→조정의 ‘순환’ 구조로 바꿔야 한다. 공공은 개입을 늘리기보다 거버넌스 참여의 전제조건을 확실하게 설계해야 한다. ‘협치’가 아닌 ‘협창’(협동적 창조)에 몸을 던질 수 있게 신뢰거버넌스를 보장해야 한다. 소멸 위기와 휘몰이 충격으로 거북이 등딱지가 된 지역 문화정책. 이제 ‘문화 물타기’는 낭비다. ‘물갈이’로 물꼬를 터야 한다. 문화흐름(文流)을 가로막지 말고, 조용히 틈을 내주는 정책. HAI중심 열린 지능정보시대 문화정책은 지시하는 주체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고 함께 답을 찾아야 한다. 이 정책묶음을 공진화(coevolution)전략이라 부르자. 이를 품지 못하면, 우리는 한번 쓴 같은 물을 또다시 되돌려 쓰게 될 것이다. 새해 문화정책은 창발적 공진화 설계의 철학을 자문하며 시작하자. 이흥재 교수는 추계예술대학교 교수 , 전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장, 한국지역문화학회장, 한국문화경제학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로컬리티와 지역문화전략', ‘문화정책론’, ‘문화예술경제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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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1.05 17:47

[문화마주보기] 씁쓸하지만 따뜻한 올해의 영화

연말이 되면 시상식 결과가 공개되고 한 해를 정리하는 ‘올해의 영화’ 목록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권위를 자랑하는 기관이나 전통있는 매체가 선택한 영화들은 한번 더 주목 받을 수 있고, 제작진은 제작 과정과 집객에 어려움이 있었다할지라도 영화의 진가를 인정받았다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시민들이 자신만의 최고의 영화 목록을 공개하기에 이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한 시기이다. 필자도 12월 마지막 지면이라는 좋은 기회로 사람과 사람을 이을 수 있었던 올해의 영화를 소개한다. 2025년 한국 저예산 영화 부문에서 반짝인 제목들 중 전문가와 관객 모두에게 거론된 영화는 단연 <세계의 주인>이다. 활발한 고등학생 주인이가 어느날 학교 친구의 요청을 거절하며 벌어지는 상황을 그린 작품으로 윤가은 감독은 인간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해야한다는 리얼리즘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폭력과 사랑이 뒤섞인 우리의 세계를 성찰할 수 있는 영화적 방법을 찾았다. 18만명이 넘는 관객이 찾았지만 아직 더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영화다. <3학년 2학기>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중소기업에서 현장실습을 하게 된 창우의 삶을 보여준다. 이란희 감독은 사람을 갈아 사회가 돌아가는 구조를 직시하는 동시에 빛나는 재능이 없어도 밥값과 쓸모를 고민하며 미약하게 성장하는 한 인간의 기쁨을 담담하게 그린다. 변화가 쉽지 않은 현실에 대한 착찹함과 각자의 처지에 대한 공감이 공존하는 감독의 세계를 완성하는 지점에 유이하 배우의 연기가 자리하고 있다. <3670>은 동성애자인 탈북청년 철준의 남한 적응기를 진심어리고 쾌할하게 보여준다. 미지의 미래에 굴복하지 않고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은 솔직한 마음이 지금의 희망을 만들어내는 젊은 에너지가 생생한 영화이다. 겨울 외국 영화하면 <나 홀로 집에> 같은 정답도 있지만 이 곳에서는 씁쓸하고 따끔하지만 가족에 대해 다른 시각을 제시하는 개봉 영화를 소개한다. 먼저, 마이클 리 감독의 <내 말 좀 들어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분노와 극단적 분리를 한 가족을 통해 드러내는 진단서이다. 불평을 입에 달고 사는 성격 파탄 주인공과 어떤 반항도 못하고 방관하는 가족을 통해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는 순간 공동체 전체가 망가질 수 밖에 없음을 증명한다. 알랭 기로디의 미스터리 코믹극 <미세리코르디아>와 라두 주데의 신랄한 풍자극 <콘티넨탈’ 25>는 한 공동체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통해 인간 사회를 지속하는 힘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위 세편은 거짓 희망으로 현실 문제에 눈가리개를 하고 한 해를 정리하기 보다 우리 사회를 냉정하게 응시하되 지속해서 서로를 살리는 방법을 질문하는 영화들이다. 그럼에도 수북하게 쌓인 흰 눈처럼 따뜻한 최신 겨울 영화를 원한다면 <바튼 아카데미>를 찾아보시라. 남들 눈에는 실패자로 보이는 상처입은 영혼들이 서로의 뾰족함을 보듬으며 마음 속 빙하를 녹아내는 순간을 맛볼 수 있다. 한 편의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도 없고 한 사람을 구원할 수도 없다. 다만, 미약하게나마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에 길을 터주는 영화들이 있다. 완벽하지 않는 인간의 취약함을 드러냄으로서 오히려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영화들을 보며 2026년을 시작할 수 있는 힘과 포용력을 충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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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29 17:03

[문화마주보기] 생활인구 시대, 관광보다 문화예술교육이다

인구정책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이제는 주민등록 관점에서 벗어나, 누가 얼마나 자주 어떤 이유로 어느 지역에 머무는가를 분석 및 측정하는 ‘생활인구’가 정책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이는 인구감소지역에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을 열어주는 의미로, 단순한 주소 이전이 아니라 반복적인 체류와 라포(Rapport) 형성이 지역의 지속적인 활력을 결정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부안군은 2025년 2분기 행정안전부 생활인구 산정 결과에서 전북권 내 인구감소지역 시.군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변산마실길과 부안마실축제 등 체류형 관광 전략과 천혜의 자연환경을 잘 보존한 부분이 성과로 나타났다고 본다. 하지만 관광과 축제는 생활인구를 빠르게 늘릴 수 있지만, 계절성과 일회성이라는 한계점을 갖고 있다. 반면 문화예술교육은 일정 기간 머무를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고, 반복성과 관계성을 동반한다. 특히 음악교육을 위한 유학, 음악캠프와 같은 학습은 체류 시간과 인적 교류를 동시에 확대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새만금 농생명단지 내 글로벌 청소년리더센터를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소속 49개 꿈의오케스트라와 전국 관악단체의 합숙형 교육 거점으로 활용한다면, 학생과 강사, 스태프, 가족까지 동반한 체류인구가 단기간에 형성될 것이다. 이는 관광과 달리 계획적이고 예측 가능한 체류 모델로, 유휴 공간을 문화예술을 통해 소멸 위기의 지역을 다시 생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실제 2026 꿈의오케스트라 자립 거점기관 기획사업으로 부안, 무주, 홍성, 장수 등 인구감소지역 단원들이 연합 오케스트라를 구성해 소멸이 아닌 상생의 주제를 가지고 음악캠프를 진행 할 예정이다. 두 번째 대안은 전국 관악경연대회에서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는 부안초등학교를 음악 분야 특성화 학교로 조성하여, 전국에서 관악에 꿈을 가진 아이들이 유학 형태로 찾아올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현재 부안초 관악부 출신으로 구성된 청소년오케스트라의 유럽 진출을 위해 지역 단체장이 직접 해외 기관에 정성이 담긴 서한을 보내고, 해외 공연 예산을 편성하는 등 지방의회와 지자체가 함께 아이들의 글로벌 역량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가 정식 해외 초청으로 이어진다면, 부안초등학교는 전국의 관악 유망주들이 주목하는 교육 거점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움직임과 더불어 광역 차원에서도 확산되고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산업과는 전북특별자치도의회와 함께 인구감소지역 꿈의오케스트라 단체(고창, 장수, 무주, 부안)에 전국 최초로 예산 지원을 확정했다. 이는 인구감소 대응을 문화예술교육과 결합하려는 정책적 신호이며, 타 광역에도 모범을 보이는 사례일 것이다. 생활인구 시대의 인구정책은 이제 숫자가 아니라 이유를 묻는다. 인구소멸지역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 머물 이유를 만드는 교육 인프라다. 문화예술교육은 그 질문에 가장 현실적인 답이 되고 있고 우리 전북특별자치도는 지금처럼 한목소리로 그 답을 위해 뛰어야 한다. /김수일 전북도립국악원 공연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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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22 18:29

[문화마주보기] ‘읽는 도서관’에서 ‘찾고 보고 즐기는 도서관’으로

이재 황윤석은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로 불린다. 고창 출신 그가 남긴 이재난고(頤齋亂藁)는 무려 53년 동안 그가 듣고 보고 배우고 생각한 것들을 담은 일기체 기록이다. 18세기 조선의 생활상과 지식 생태계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백과사전’, ‘타임캡슐’로 평가받는다. 12월 3일 고창에서는 이재 선생의 이름을 딴 의미심장 도서관 개관식이 있었다. 2019년 생활형SOC복합화사업에 선정되면서 시작해 햇수로 7년여 민관이 힘을 합쳐 준비해온 지역 거점도서관이 단장을 마치고 문을 연 것이다. <고창황윤석도서관>이라는 이름을 달고 자랑스레 첫선을 보였다. 군단위 도서관으로는 이례적이다. 200억을 웃도는 거대 예산에, 지하 1층에 지상 2층 총 3층 높이 3미터 이상 높다란 천정 목구조며, 100여 미터에 달하는 길이 외형은 ‘이례적’이라는 말 그대로다. 설계진과 고창군은 ‘커다란 나무 그늘에서 맘껏 책을 읽는’ 특별한 독서의 근본 경험을 건축의 틀로 반영했다고 한다. 지하 1층은 지역문화활동 중심공간이다. 다목적 강당과 동아리실, 배움실은 공동체 독서와 문화 모임을 담는 곳으로 마주침 공간은 작은 전시와 창작 발표가 이뤄진다. 마침 개관기념 팝업북 전시를 열고 있다. 도서관 핵심기능을 담은 지상 1층은 일반자료실·어린이자료실에, 도서관 상징 공간 북마운틴(Book Mountain)이 자리하고 있다. 이재 선생의 실학정신을 담은 다양한 기록관련 자료도 압축해 수서하고 있다. 차분한 독서와 감각적 체험이 가능한 지상 2층은 두 개 일반자료실과 책마루 테라스, 작은 카페와 미디어아트 갤러리, 오디오북 체험공간을 두루 갖췄다. 바야흐로 도서관 전성시대다. 책을 읽는 공간, 지식의 보급처로서 도서관은, ‘도서관이 생기면 집값이 오른다’는 생활중심형에서, 이제 지역의 거점 관광 인프라로서 기능을 확장하는 시대이다. 이웃 일본의 경우만 해도, 북콜로세움이라는 별명이 붙은 가나자와시 이시카와협립도서관이 ‘관광형 도서관’으로 주가를 올리며 ‘핫플레이스’에 등극했다. 마치 고대 로마 콜로세움처럼 4층 높이 서가가 원형으로 웅장하게 펼쳐져 도서관에 들어서는 순간 압도적인 시각적 경험을 주며 지역 주민보다 외부 관광객의 발길을 더 잡아끌고 있어 지역경제를 움직이는 중요한 축이 되고 있다. 이 추세는 ‘읽는 도서관’에서 ‘찾고 보고 즐기는 도서관’으로 변화상을 반영한 것이다. 국내에서도 최근 개관한 경기도서관이 독특한 외관과 나선형 서가로 도서관 전체가 하나의 서가로 이어진 형태로 건축미를 강조해 호평을 받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전주시는 다양한 형태, 테마를 가진 특별한 도서관 도시로 거듭나고 있고, 전북특별자치도는 2027년 완공을 목표로 축구장 4개 넓이, 20만 권 넘는 장서에 야외 정원까지 담는 전북대표도서관을 계획하고 있다. 도서관이 관광 거점으로 역할을 하고 있는 마당에, 지역의 인문테마공간을 찾고 연계해 다양한 책과 문화를 잇는 새로운 문화관광벨트로 확장하기를 바란다. ‘문화로 지역창생’하는 바탕을 다지는 일이다. 도서관을 비롯한 지역의 대표 책 공간을 연결해 조용하지만, 마음 양식을 든든하게 채우는 인문여행의 수요를 확보할 것이다. 물론 인문정신의 확산이라는 도서관의 본래 취지를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얼마 전 광주광역시 대표도서관 공사현장에서 매몰되어 세상을 떠난 일꾼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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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15 18:29

[문화마주보기] 누렁이와 빼빼

어떤 독서 모임에서 내 시편을 해설해 달라는 강의 요청이 왔다. 고마웠다. 세간에 알려진 유명한 시가 아니라 야인의 숨소리 같다는 내 시를 해설해 달라니. 작품을 몇 편 추리는데 문득 누렁이와 빼빼가 떠올랐다. 누렁이가 새끼를 열두 마리나 낳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틀 뒤 빼빼가 새끼 아홉 마리를 또 낳았다. 신통방통한 일이었다. 똥개가 새끼를 이렇게나 많이 낳다니.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 실제로 생기자 우리 가족은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스물넷이던 그해 봄, 개가 잘 되면 집안이 일어선다고 치성드리던 어머니 치맛자락에 치렁치렁 새벽빛이 매달려 있었다. 누렁이와 빼빼는 새끼를 혀로 핥아서 키웠다. 눈도 못 뜨고 낑낑대는 어린 목숨들의 요모조모를 짬짬이 혀로 핥았고 새끼가 구물구물해도 배곯은 놈에게 먼저 젖을 물렸다. 마릿수는 줄었지만 누렁이와 빼빼는 그 뒤로도 새끼 여러 배를 낳았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마당 화덕에 걸린 큰솥에 미역을 넣고 녀석들 밥을 펄펄 끓였다. 배란기가 오면 대문에 동네 수컷들이 모여들어 주둥이를 킁킁댔다. 어머니는 망설임 없이 덩치 큰 수컷만을 마당에 끌어들였는데 녀석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씨알 굵은 새끼들을 잘도 낳았다. 밤하늘을 빠개 먹듯 번갯불이 내리꽂히며 장대비가 좍좍 쏟아지던 밤, 녀석들 집을 살핀 적이 있는데 내가 다가서니 되레 내 손등을 살갑게 핥았다. 새끼를 낳았을 때마다 제 쌀강아지들을 장에다 몽땅 팔아버린 내가 밉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누렁이와 빼빼의 정은 한결같았다. 낯선 이가 대문께 얼쩡거리면 컹컹 짖어 빈집이 아님을 알렸고, 한 번도 내게서 등을 돌리지 않았다. 시 몇 편을 추리는데 까맣게 잊어먹은 누렁이와 빼빼가 왜 떠올랐는지…. 야인의 숨소리 같다는 내 시를 읽은 사람은 드물다. 시집을 네 권씩이나 냈어도 내 시를 평(評)한 사람은 더 드물다. 남들 시보다 빼어나지 못한 데다 언어의 쓰임새도 문명적 색감을 물고 광휘를 내뿜는 날렵한 섬광과 거리가 멀기 때문일 것이다. 농경문화 속에 버무려진 삶의 모양새 일부를 전북의 토박이말과 막말이 섞인 입똥내 튀는 말씨로 끌어낸 게 내 시의 주된 밑그림이므로. 하지만 소통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언어에 선행하는 사람다움의 행위를 돋을볕처럼 붓끝에 벼리고자 골을 뺐을지언정 현대성을 앞세워 시행 앞뒤의 맥락을 고의로 훼손하지 않았으니. 그러자 누렁이와 빼빼가 또 떠오른다. 뭔가가 못마땅한 눈치다. 까불지 말라는 것 같다. 남들 일할 때 나도 일하고 남들 쉴 때 나도 쉬는 세상- 이 꿈에 등을 보이지 않았다면, 젊은 시인들 시가 왜 앞뒤 내용을 고의로 왜곡하고 몽환적 관념에 빠진 것도 모자라 돌연 유령까지 출현시키는지 고민해봤냐는 항의로 읽힌다. 이쯤 되면 누렁이와 빼빼는 똥개가 아니라 내 시의 또 다른 현실이자 도반(道伴)이 아닐까. 그렇다면 녀석들은 문득 떠오른 게 아니라 나를 일부러 찾아온 게 틀림없다. 내 주변을 오래 맴돌았음이 분명하다. 아아, 까맣게 잊어먹은 옛정이 시의 정혈에 눈도 못 뜨고 낑낑대는 내 목숨의 요모조모를 혀로 핥아대다니. 난해하다고 자폐적이라고 비판받을망정 서정시의 오랜 질서를 거절하는 젊은 순정을 시의 문법으로 모시라고 나를 말똥말똥 바라보는 누렁이와 빼빼라니! 독서 모임에 가져갈 시편을 추리다 말고 나는 코가 시리다. 순정 한 잔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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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08 18:10

[문화마주보기] 전주의 헤리티지, 영화

콘텐츠 업계에 시간의 개념이 달라지고 있다. 대중음악계에서는 ‘차트 역주행’이라는 표현이 흔해질 정도로 과거의 노래가 신곡이 아님에도 인기를 끌며 재조명 받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최근 영화관도 신작보다 고전영화의 집객 결과가 높을 때가 많다. 이를 반영하듯 수입배급사들은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명작이나, 유명한 영화의 복원판을 구해 재개봉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수치로만 봐서는 음악이든 영화든 신작이 줄어 생긴 현상은 아니다. 음악 소개 사이트를 보면 하루에 수십곡이 발표될 정도로 많은 창작물이 쏟아진다. 한 명의 인간이 내용을 소화하고 즐기고 애착을 느낄 시간에 비해 과도한 선택지가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예전처럼 2주 안에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창작자들에겐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긍정적 측면은 창작물이 온라인 공간 속 어딘가 존재만 한다면 절적한 시기에 향유자를 만날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고, 부정적 측면은 창작자들은 이제 시대를 초월해 역사 속 모든 창작물과 경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창작물이 있어도 제대로 된 관리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며칠전 대만 감독 허우 샤오시엔의 <비정성시>(1989)가 한국에서 특별 상영을 했는데 표를 못구한 사람들의 개봉 요청이 소셜미디어에 빗발쳤다. 이정도 호응이면 수입사들이 움직일법도 한데 저작권과 관련된 복잡한 사정으로 이 영화는 이벤트 상영으로 그치게 됐다. 80년대 후반 영화가 2025년에 여전히 현재의 영화로 관객들에게 다가갈 수 있음이 증명되었지만, 저작권에 대한 세밀한 관리가 한 곳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확장성이 제한된다는 것을 깨우친 사례이다. 인터넷이 불러온 디지털 환경은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정보를 찾아서 즐길 수 있게 했다. 오프라인에만 존재하던 과거의 기록을 온라인 공간에 아카이빙 하기 시작한 여러 기관과 개인의 참여로 이제 우리는 대부분의 정보를 온라인에서 접할 수 있게 됐다. 영화분야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한국영상자료원이 만든 자체 사이트 KMDb VOD를 들 수 있다. ‘한국고전영화’ 라는 이름으로 방대한 한국영화와 관련 영상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고 현재는 유투브와 네이버TV에서도 상영중이다. 이는 국내외 시네필, 영화관련 종사자와 학자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한국 영화 아카이브 중 하나이다. 전주라는 도시가 영화로 알려지게 된 것에는 전주국제영화제의 활약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 영화제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영화제가 영화를 제작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초기 ‘디지털삼인삼색’이라는 이름으로 42편의 단편영화를 제작했고 일부를 제외하고는 저작권도 영화제가 확보하고 있다. 이후 장편 영화 투자 프로그램 ‘전주시네마프로젝트’의 경우 약 40편이 만들어졌고 저작권의 일부 권리를 가지고 있는 형태이다. 지금까지는 영화관, 미술관 등과 협업을 통해 특별 상영 형식으로 스페인, 독일, 멕시코 등에서 상영을 해왔지만 콘텐츠 업계의 변화된 시간 개념을 고려한다면 전주국제영화제가 저작권을 보유한 창작물을 아카이빙을 하고 한국영상자료원의 예와 같이 전세계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온라인의 공간이 마련되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제작한 영화들은 수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문화 유산으로서 관리될 수 있는 행정, 제도적 절차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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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01 18:42

[문화마주보기]중앙의 문화정책, 이젠 속도보단 방향이다

최근 문화예술정책자문위원회(위원장 은희경)와 대중문화교류위원회(공동대표 최휘영장관, 박진영)가 잇따라 출범했다. 문학, 연극, 뮤지컬, 음악, 국악, 무용, 미술 등 9개 분야에서 현장 이해도와 통찰력, 전문성, 경험을 갖춘 위원 90명으로 구성된 정책자문위원회는 창작 기반과 예술정책 자문을 집중 담당하고, 대중문화교류위원회는 글로벌 진출과 산업 교류 역할을 실행하고자 설립되었다. 창작과 산업, 그리고 해외확장이라는 한국 문화정책의 두 축이 마련된 셈이다. 문화예술 현장을 담아 문화산업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문화계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온 염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두 위원회의 구성과 역할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가지 결정적인 헛점이 보인다. 바로 지역문화의 비전과 과제를 논의할 분과가 없다는 점이다. 위원 명단에 지역 인사가 일부 포함되었다고 해서 지역문화정책이 자동으로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문화예술교육, 순수예술지원, 중소공연장 활성화, 예술단체의 존속성 같은 과제는 중앙보다 지방이 훨씬 절실할것이다. 지역의 생각과 전략을 다룰 제도적 기구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최근 대통령직속 지방시대위원회와 국립중앙박물관이 국가균형성장과 지역문화 활성화를 위해 처음으로 공식 협약을 체결한 것은 지역입장에서는 고무적이다. 전국 13개 국립박물관을 지역문화의 중심기관으로 육성하고, 지역 간 문화격차를 해소하며, 각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반영한 콘텐츠를 공동 개발하겠다는 것은 분명 중요한 진전이다. 지방시대위원회가‘문화가 함께할 때 국가균형 성장이 완성 된다’고 피력 한 것은 지역문화의 중요성이 국가 전략으로 필요불가결(必要不可缺)한 요소임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런 외침만으로는 구조적인 변화에 한계점이 있다. 지역의 현실과 니즈를 수시로 분석하고 지원할 지역 단위의 정책기구가 없다면 정책은 여전히 중앙 중심의 흐름 속에서 머무르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해외 사례를 살펴보면 우리는 더 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다. 프랑스는 중앙 문화부와 함께 지역 단위의 지방문화청(DRAC)을 운영하면서 순수예술 지원과 지역문화 생태계 조성 관리를 통해 직접 지원 한다. 영국 아츠카운슬(Arts Council)은 런던 본부 아래 지역별 사무소를 두어 지역 예술단체 지원, 투어링 공연 배분, 창작 레지던시 운영을 자율적으로 결정한다. 독일은 연방과 주(州)가 문화정책을 이원화하여 지역의 문화기관이 독립적으로 예술인을 지원하고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게 도와준다. 해외에서는 이미 ‘중앙–지역’이 병렬적으로 움직이는 구조가 기본이 된 지 오래다. 이제 우리도 지역문화위원회(Local Arts Council)를 출범해야 한다. 단순한 자문기구가 아니라 지역문화를 직접 설계하고 집행할 권한을 주기 위해 전폭적인 예산지원도 필요할 것이다. 위원회가 성공하기 위한 제언을 하자면, 첫째, 지역의 예술인, 공연장, 예술단체를 연결하는 창작 생태계의 조정자 역할이 필요하다. 중앙 공모사업 중심 구조로는 지역 간 격차를 좁히는 건 한계가 있기에 전문 컨설턴트를 지방에 파견하는 사업(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문예회관 공연예술 기획, 제작 컨설팅)을 대폭 확장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는, 지역의 문화 자산을 기반으로 한 브랜드 공연, 축제, 창작 콘텐츠를 발굴하는 중장기 전략을 배양시켜, 문화로 자생할 자양분을 만들어줘야 할 것이다. 셋째, 청년 예술인 지원을 생활 기반, 창작 공간, 멘토링, 네트워크 구축과 같은 지역 기반 체계로 전환시켜야 한다. 무엇보다 지역문화위원회는 중앙 위원회와 동반성장 할 수 있는 양방향 소통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지역의 주요 어젠다와 의견이 위원회를 통해 중앙에 전달되고, 중앙 정책이 지역에 맞게 조정을 통해 지원되는 구조가 마련될 때 비로소 우리 문화정책은 지속 가능한 생태계 형태를 갖추게 된다. 지금처럼 중앙이 정책을 설계하면 지역이‘실행’만 하는 방식으로는 지역문화의 다양성과 자율성을 온전히 구현해내지 못한다. 정책자문위원회가 순수예술 창작정책을, 대중문화교류위원회가 문화산업, 교류 정책을 맡았다면, 이제 남은 미션은 ‘지역문화 정책’을 책임질 위원회다. K-컬처를 세계속으로 더욱더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중앙의 성과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역에서 피어나는 문화의 다양성과 창작 역량이 함께 성장할 때 비로소 한국 문화는 지속 가능한 구조를 갖게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위원회가 아니라, 더 촘촘한 문화생태계다. 그 시작은 지역문화위원회 설치에서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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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24 18:29

[문화마주보기]로컬, 영화제, 영화, 그림책, 사람이 만난다

들녘은 가을걷이가 마무리되어 간다. 가을 내내 이어진 축제들도 사람들 이목을 끄느라 요란시끌을 가라앉히고 차분해지고 있다. 그 가을 행사 가운데 색다른 영화제에 주목한다. 지난 11월 14~15일 순창에서 열린 제2회 순창어린이청소년영화제다. ‘지구를 쉬게 해주세요’라는 주제로 열린 영화제는 순창지역 여섯 개 초등학교에서 지구와 인류의 모습을 생각하며 만든 영화가 상영되었다. ‘내 친구가 타임머신을 타고 사라진 날(유등초)’, ‘이상한 나라의 숨바꼭질(풍산초)’. ‘케이팝 지구 어벤저스(옥천초)’, ‘내 친구 플라스틱 좀비(동산초)’ 여섯 개의 영화는, 친구들이 앞으로 살아갈 지구와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 고민을, 스스로에게 이웃 어른들에게 슬쩍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제는 ‘우리영화만들자협동조합(우영자)’이 지역 안팎 영화 친구들과 함께 품 모아 여는 작은 영화제이다. 2019년 순창으로 이주한 여균동 감독과 김영연 대표가 중심이 되어 지역 어린이 청소년들과 차근차근 영화를 만들어 온 과정의 매듭이기도 하다. 이번 영화제 폐막작으로는 올해 순창청소년영화캠프를 통해 만들어진 작품 <같이 걷는 중>이 상영되었고, 마지막 일정은 <초등학교 영화캠프 현실과 대안>이라는 주제로 열린 시네포럼이었다. 여균동 감독이 순창으로 내려와 이듬해 책마을해리와 만났다. 어린이청소년들과 2012년부터 출판캠프를 통해 책을 만들어오던 책마을해리는, 우리 지역에서 영화로 함께하려는 시도가 반갑고 고마웠다. 몇 년 사이 그의 <우영자>와 책마을해리는 보름 동안 영화학교를 열어, 청소년 영화 <그해 여름>을 함께 만들기도 했다. 청소년영화캠프를 통해 청소년들이 영화와 스스럼없이 어울린 과정을 담은 단행본 《씨네틴즈, 영화로 이야기해요》도 품 보태 출간했다. 오디션부터 상영회까지 영화캠프의 모든 과정을 담고, 친구들의 고민이 잔뜩 담긴 시나리오도 몇 편, 시나리오 작가부터 촬영, 음향, 조명, 편집 감독 들의 인터뷰도 담았다. 영화제작자로서 역할을 하려면 어떤 준비를 하면 되는지, 청소년들에게 진로 길잡이 역할도 하는 책으로다. 재작년부터는 책마을해리와 그림책 출간 프로젝트를 함께 이어오고 있다. ‘시나리오 그림책’ 시리즈로 영화와 그림책을 사랑하는 독자와 만나고 있다. 시나리오 작업이 어려운 초중등 친구들에게, 등장인물은 많고, 지문은 적고 대사는 많은 장면 장면을 영화의 장면으로 확장할 수 있게 안내하는 그림책이다. 이제까지 《비밀의 정원》, 《초록눈 호랑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에 이어, 최근 《그녀의 꿈은 밀라노에 가는 거였다》가 출간되었다. 여균동 감독이 누군가와 그려내고 싶은 영화, 어린이와 청소년에서 실버 세대로, 경계에 선 이주민들로, 청년으로, 삶의 한 구비를 건너가는 중년 세대로 확장하고 있다. 시나리오 그림책도 그 확장을 차근차근 담아내고 있다. 영화를 마치고 올해 가을걷이 끝낸 헛헛한 마음의 여균동 감독이 이 시나리오 그림책을 가지고 지역의 독자와 만난다. 영화와 견줘 이야기 나누는 그림책이니, 영화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도 반가운 일이다. 오래전부터 밀라노 여행을 꿈꾸며 설레는 주인공의 일상을 나누며 우리를 설레게 하는 어떤 존재를 잃은, 꿈을 잃은 우리에게 그 사그라든 불씨를 다시 피워내게 하는 자리가 되어줄 것이다. 11월 29일 토요일 늦은 2시, 일곱 책방이 나란나란 자리한 고창서점마을에서다. 이대건 고창 책마을 해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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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17 18:43

[문화마주보기]첫눈

첫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남녀합반인 우리 교실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첫눈은 시시하게 내리다가 말다 그치고마는 것인데 그해 첫눈은 유리창을 가득 메우며 쏟아졌다.고1이었던 우리. 나는 옥이를 바래다주기 위해서 나섰다. 가시내는 벽골제와 명금산이 가깝게 보이는 동네에 살았다. 손목에 차는 노란 고무줄로 참새 꽁지같이 묶은 뒷머리에 눈송이가 붙들렸다가 떨어지곤 했다. 우산이 없어 스케치북으로 머리를 가려주었다. 그래도 눈송이가 달려들어 옥이의 흰 목덜미를 빨아먹었다. 쌓인 눈 위에 다시 펑펑 눈송이가 쏟아지는, 스케치북이 감당을 못하는 함박눈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냥 눈 맞음서 걷자.” 옥이는 내 어깨에 묻은 눈을 털어주며 입술을 빛냈다. 눈썹이며 볼이며 턱선의 맺음새가 붓으로 그린 것처럼 고왔다. 교문에서 나와 화호 초등학교 담장을 끼고 걸으면 정자동으로 넘어가는 낮은 언덕이 있고 거기를 지나면 방앗간을 낀 작은 삼거리가 나왔다. 우리는 김제 쪽으로 가지 않고 느티나무들이 서 있는 정자 앞 농로, 명금산으로 가는 지름길에 들어섰다. 눈발은 그칠 낌새를 지운 듯 펑펑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신발이 푹푹 빠졌다. 옥이의 자주색 책가방을 내가 들고 얼마나 걸었을까. 눅눅해진 스케치북으로 머리를 가렸고 내게 바짝 붙었지만 감청색 코트를 눈발에 맡기다시피 한 옥이가 턱을 떨고 있었다. 곧 꽁꽁 언 눈사람이 될 것 같았다. 안 되겠다, 무슨 수를 내야겠다. 주위를 둘러보니 초가집 같은 짚벼눌 두 동이 있었다. 그 앞으로 다가섰다. 짚다발을 빼내려고 용을 썼다. 한 개만 빠지면 여러 개가 쉽게 빠질 터, 그러면 우리는 짚벼눌 속 안방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 짚다발은 빠지지 않았다. 어른들이 짚다발끼리 밀착시켜 얼마나 아금박스럽게 쌓아 올렸는지 고1짜리에게 짚다발은 숫제 악다구니를 썼다. 엊그제 친구들은 잘도 빼내던데 도대체 왜 이러냐, 기를 쓰며 실갱이를 벌였지만 짚다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발은 함박눈으로 바뀌는 중이었다. 그때 옥이가 옆의 짚벼눌을 가리켰다. 짚다발을 빼간 흔적이 눈에 덮이고 있었다. 그 앞에 가서 짚벼눌 어개지지 않게 짚다발 여남은 개를 뺐다. 우리는 짚벼눌 속 안방에 들었다. 서로 눈을 털어주며 손을 맞잡기도 하며 앞니 드러내고 맘껏 웃었다. 붓으로 그린 듯한 옥이 얼굴이 발갛게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짚벼눌 바깥을 죄다 지워버린 함박눈이 펑펑 짚벼눌 안방을 덥히고 있었다. 키도 작고 못생긴 데다 손이 야물기는커녕 짚다발로 못 빼는 순 엉터리를 아끼는 옥이. 얼굴에 눈송이 녹은 물이 빛났다. 이마며 콧등, 희디흰 목덜미에 맺힌 물기를 나는 손수건으로 찍어냈다. 좁아터진 짚벼눌 안방에서 옥이가 내 팔을 꼬옥 끼고 가만가만 숨길을 열어주었다. “이 길을 걸어 집에 갈 때먼 꼭 니가 따라오는 것 같었어야… 뒤돌아보면 너는 없고, 몇 걸음 띠다가 뒤돌아보면 너는 또 없고… 그래서 아예 뒤로 걸었어야… 하늘엔 초저녁 별이 드문드문 떠 있고. 맞어, 그때보톰 너는 내 별이었어야. 오늘은 첫눈이고…” 새끼염소의 혀처럼 말랑거리는 옥이 목소리가 내 심장에 또록또록 박히고 있었던가. 나를 바라보는 가시내 눈망울 속에 뭔가가 일렁였던가. 집에 가기 싫은, 이 짚벼눌 속 안방에 오래오래 갇히고만 싶은 우리를 응원하듯 함박눈이 펑펑펑 쏟아졌다. 옥이 목선이 더 가늘어졌다. 이병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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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10 18:31

[문화마주보기]인공과 지능의 영화

세상에 없던 것이 나타나면 우리는 이름과 의미를 부여하기 마련이다. 사진이 발명되었을 때 사람들이 느낀 감정은 신기함이었다. 영화의 탄생도 마찬가지였다. 인공지능(이하 AI)의 출현 또한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다. 유흥, 지식 전달, 심리 치료까지 다방면에서 “효율성”을 내세우고 있다. 사진은 ‘시간 속의 인간 역사 경험’과 같은 유일무한 장치로 자리매김 했지만 AI가 무엇이 될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AI영화가 제작비 0원으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동으로” 영화를 만들어낸다고 언론에서 주목한다. 이 말에는 몇가지 모순이 있다. 하나, AI영화는 자동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아이디어, 지시 언어, 이를 구현할 프로그램이라는 토대가 있어야 한다. 기반 조건을 갖추기 위해선 이미지 데이터 확보를 위한 시간, 비용, 인간 노동이 들어간다. 둘, 영화는 창작의 영역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픈 인간의 표현욕구에 의해 시작되는 활동이다. 즉, AI(타율)와 영화(자율)는 주체성의 차이가 명확해 등가관계가 아님에도 상반된 단어를 붙여쓴다. 상용되는 ‘AI영화’는 인공지능을 소재로 한 영화이거나,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하여 제작된 영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현재의 단계에서는 AI활용영화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든 영화와 AI영화는 무엇이 다른가? 현재 AI영화가 하는 것은 ‘창작’이 아니라 ‘조립’이다. 인간이 창조하고 만들어둔 다양한 이미지를 보유하고 있다 요청이 들어오면 그에 맞게 재조립하는 거다. 창작은 인간의 고민이라는 정신을 물성화시킨 결과이고, AI(활용)영화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조립하는 것이다. 전자는 과정에서 추출되는 무언가가 결과물이 되는 것이고, 후자는 결과물 간의 재조립이다. AI는 인공성의 시대를 열고 있다. 숏폼에는 조잡한 인공 이미지가 대중화됐고 영상의 완성도보다는 이야기 전개에 집착하며 배속보기가 유행하기도 한다. 몇가지 의문이 든다. 아름답지 않은 이미지도 예술이 될 수 있나? 이야기 자체가 영화를 뜻하진 않는데, 이야기만 남은 영상은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인간 경험이 실종된 창작물은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AI영화가 진정한 혁신이자 창조라면 왜 기존 영화 문법을 복제하는가. 근본적인 논의도 필요하다. AI 영상의 차이점은 실재와 가공의 ‘이미지’에 있다. 촬영 원본이 없는 인공적인 이미지로만 구성되었을 때, 그것은 애니메이션에 가깝지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영화는 실재 움직임의 이미지를 구성한 것이고, 애니메이션은 정지된 이미지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단계에선 AI는 영화 제작 기간과 비용을 줄여주는 효용성 높은 "도구"이지, 그 자체를 영화라고는 부를 수 없다. 그것이 영화가 되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구체성을 가지고 실재적 이미지와의 어떻게 연결되어 구현될지를 증명해야 한다. 우리는 기술이 촉발한 경제적 속도에 취해 이미지의 사용 윤리와 미학에 대한 연구를 경시하고 있다. 많은 것을 누리지만 어떤 과정이 응축되어 있는지 드러나지 않는 상태다. 물론, 모든 것이 의미를 지닐 필요도 없다. 혼란 속에서 예술의 존재는 더 빛이 날 것이다. 다만, 타인의 고유 저작물을 공정하게 쓸 수 있는, 새로운 제작방식에 필요한 용어와 정책에 대한 논의는 인간의 지능과 기준으로 필요하다. 문성경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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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3 17:59

[문화마주보기]“영화로 생동하는 지역, 로케이션이 만드는 경제 패러다임”

김수일 전북도립국악원 공연기획실장 ​​​​​​ 한 편의 영화가 지역을 기억하게 하고, 그 기억이 지역경제를 살릴 수 있는 굴뚝 없는 고부가가치 산업이 될 수 있다. ‘로마의 휴일’의 이탈리아 스페인광장과 ‘반지의 제왕’의 뉴질랜드는 영화촬영지 하나로 도시의 정체성을 변화시키고, 그 여운들이 지역경제를 움직이고 있다. 영상산업 자체가 지역의 풍경을 문화로 전환하고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2007년 부안군에서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정우성, 송강호, 이병헌 주연) 촬영이 8개월간 진행되었을 때 제작사 ‘바른손이앤에이’(기생충 제작사)가 집계한 지역 사용 예산만 18억가량 되었다. 숙박, 식음료, 운송, 소품 등을 대부분 현지에서 쓰이며 부안지역 소상공인들의 즐거운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 영화 한편이 지역경제에 미친 파급력을 보여준 사례다. 전북특별자치도에서는 이 흐름을 캐치하여 영상산업을 전략적으로 키워왔었다. 2001년 설립한 (사)전주영상위원회는 전국 최초의 지역 영상위원회로 최근 4년(2021~2024)간 촬영유치 374편, 영상물 제작지원 120여 편, 전문인력 양성 87명이라는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전북을 주제로 한 로케이션 관광 활성화 영상 6편을 제작하여 ‘영화에서 관광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면서 전북지역이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이 되고 있다. 그러나 용인, 문경, 대전 등에서 대규모 첨단 세트장들을 잇달아 세우며, ‘촬영하기 좋은 도시’에서 ‘제작하기 좋은 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반면 전북의 세트장들은 여전히 비가 오면 소음으로 인한 녹음이 쉽지 않고, 공간과 건물이 노후화되어 제작 여건이 뒤처지고 있다. 대전의 스튜디오 큐브처럼 완벽한 방음과 배수 시설을 갖춘 곳, 문경의 버추얼 스튜디오처럼 LED월과 인카메라 VFX기술로 현실과 가상을 자유롭게 오가는 환경이 부럽게 느껴질 때가 많다. 최근 박보검, 김남길 주연의 <몽유도원도>가 크랭크인하면서, 제작진은 붉은 노을 장면을 담기 위해 여러 차례 부안을 찾았다. 석양이 바다 위로 떨어지는 순간의 빛과 색을 담기 위해 날짜와 시간 등을 고려한 촬영 포인트를 물색 중이다. 그만큼 부안의 해안 풍경은 한국 영화가 표현하려는 서정미를 가장 잘 담아 낼 수 있는 배경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흐름 속에 전북 부안군의 변화는 매우 고무적이다. 영상제작자 지원을 위한 조례 제정을 추진할 계획이며, 제작비 보조와 촬영 인센티브 제도를 현실화 시킬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는 단순한 행정적 조치가 아닌 로컬이 직접 문화산업의 주체로 나서려는 신호로 보인다. 이제 전북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촬영지의 양적 확장과 디지털화보단 기존 인프라의 질적 개선이 우선이다. 세트장을 리모델링하고, 경상북도 문경시처럼 지역민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보조출연자 아카데미나 영상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확대 운영하여 고용과 산업을 함께 성장시켜야 할 것이다. 나아가 전북특별자치도만의 자연과 아날로그 감성을 살린 스토리텔링으로 AI와 첨단화 중심의 수도권과는 차별화된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영화는 기술이 입혀진 예술이자 굴뚝 없는 산업이다. 스크린은 닫혀도 이야기는 남고, 그 이야기가 피어나는 곳이 새로운 문화경제의 출발점이다. 한 장면의 여운이 한 지역의 경제를 움직이고, 한편의 스토리가 공장 몇 개의 역할을 대신하며, 새로운 일자리를 만든다. 그것이 바로 전북이 지향해야 할 지속 가능한 제작 생태계다. 촬영(지역경제 활성화) → 관광(소비) → 고용(일자리)으로 이어지는 문화예술경제의 선순환 구조, 그것이 전북이 만들어야 할 영화의 다음 장면이다. 김수일 전북도립국악원 공연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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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27 17:28

[문화마주보기]문화 거점을 이어 지역 융성 바탕이 되는, 세 빛깔 책 공간의 실험

올해 광복 80주년, 여러모로 우리에게 남다르다. 새 정부에 거는 기대가 큰 것만큼 우리 사회 곳곳 특히 문화판에서 불어올 새 바람에 대한 바램도 은근하다. ‘우리가 어느새 백범 선생이 이야기한 진정한 문화 강국이 되리라’ 하는 소리소리들이 피어나기도 한다. 대한민국 대표 문화거점 가운데 하나, 책마을해리에게도 이번 광복절은 남달랐다. 몇 중국 방문객 때문이다. 이 걸음은, 백범 김구 선생의 중국 유랑생활을 기록한 《위대한 유랑(처음책방)》의 번역 출판과 이어져 있다. 그 책의 중국인 저자 샤녠셩(夏輦生) 선생 집안은 김구 선생의 항일무장독립투쟁 당시, 경호원으로 주치의로 깊은 관계였다. 그 자신도, 백범 선생 아드님 김신 장군과 인연으로 오랜 준비 끝에 이 책을 출판했다. 그 30년 뒤 한국어판 출간에 맞춰 국회 출판기념회와 북토크에 참가하기 위해 제자들과 방한한 것이다. 일행은 수도권 일정 뒤 책마을해리를 찾았다. 샤 선생은 이번 일정에서 우리 전북 지역이 품고 있는 역사, 생태, 문화의 다양한 가치에 감탄했다. 특히 책마을해리의 어린이, 청소년, 청년, 지역민들 특히 연로한 선배들의 기록을 통해 서로 배우는 ‘선한 지혜의 순환’에 깊이 공감했다. 한-중, 중-한 인적 교류를 비롯해 그림책 출판을 통한 ‘서로배움’을 실천하자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와의 며칠 우리는 고창의 책 공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대산면 <고창서점마을>, 신림면 <책이 있는 풍경>, 해리면 <책마을해리>까지 이 책의 거점을 잇는 문화의 삼각형이 말이다. 그 한 거점, 책마을해리는 2006년 초부터 터를 닦아, 문화관광부로부터 대한민국 대표 책마을로 선정되기도 한다. ‘누구나책’을 기치로 14년 동안 이어 5천여 명이 작은 책들을 통해 저자로 다시 태어났다.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상업출판은 지역의 인적, 생태, 역사, 문화 자원을 가다듬어 250여 종을 출판했다. 연간 1500여명이 방문하고 있다. 다른 한 축, <책이 있는 풍경>은 2012년 5월 개인 문학관 작은도서관 성격의 건물을 지어 시작되었다고 한다. 여러차례 증축을 통해 문학관, 어린이도서관, 시인의방 같은 책 공간이 즐비하다. 400여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활발한 인문학강좌 등 배움학교들이 열리고 있다. 2013년 가을부터는 매년 문학과 다양한 예술장르가 결합한 융합인문학콘서드를 열어오고 있다. 마지막 축은 지난 10월 11일 문을 연 <고창서점마을>이다. 문화평론가 이윤호 촌장이 오랜 준비 끝에 여섯 개의 책방과 한 개의 공동운영 헌책방을 마련하고 ‘서점들의 마을’로 긴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이 세 축의 문화실험은 올 시월 각자의 색을 도드라지게 펼쳐낸 축제로 책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책마을해리가 9일부터 13일, 10년 가까이 이어온 <책영화제>에 <전국동네책방 가을운동회>를, 고창서점마을은 첫 책축제 <페이지>를 10월 11일에, <책이있는풍경>은 10월 18일 가을인문학콘서트를 성대히 열었다. 한해 한해 이 책의 이야기는 인문학으로 지역을 어떻게 융성하게 할 것인가, 끊임없는 고민하고 여러 빛깔로 펼쳐낼 것이다. 다른 나라 인문학자의 부러움을 사는 이 실험과 시도에, 도민 모두 더불어 응원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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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20 18:33

[문화마주보기] 별이 빛나는 밤에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하다. 맑고 차게 빛나는 별들을 헤치면 어릴 적 꿈들이 소도록 소도록 쌓여 빛날 것 같다. 진안고원의 안천면 구롓말, 친구 황의관네 질뚝배미 나락을 다 베고 집에 돌아와 저녁밥 먹은 뒤 마당에서 올려다봤던 밤하늘. 별들이 정말 무수히 반짝였다. 은빛을 뿜어내는 별들의 그물에 풍덩 뛰어들어 나는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싶었다. 그 별들이 그리워 만경 강변에 귀또리가 끊임없이 울어댈까. 별들이 달을 감춘 채 전하는 시간 바깥의 소식을 귀또리가 깨물어 먹는 건 아닐까. 별빛을 구슬구슬 매단 그 소식은 선사의 햅쌀 냄새가 묻어있으리라. 승용차 불빛이 휘익 지나가면서 눈앞을 막는다. 순간 하늘은 깜깜해졌지만 이내 총총해진다. 굳이 자정을 넘겨 마실 나온 저들도 어딘가에 차를 세우고 별을 헤며 둘만의 가을밤을 즐기리라. 불빛이 또 오는 기척이 있어 아예 눈을 감는다. 그런데 낌새가 없어 뒤를 돌아보니 삼례 쪽 비비정(飛飛亭)의 윤곽이 검게 보인다. 괜히 뒤를 돌아봤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정자 앞에는 ‘비비낙안(飛飛落雁)’이라고 적힌, 선인들의 묵향을 시늉하는 표지석이 있을 것이다. 비비정 오른쪽 경치를 KTX 철교가 잘라먹어서 반쪽 풍광이 되었고 백사장에 깃들던 기러기들의 날갯짓이 꺾였다는 말을 쏙 빼놓고. 여기만 이러랴. 경기전을 낀 풍남동과 한옥들이 여유롭고 고즈넉하던 교동은 말할 것도 없는 데다, 한벽당 옆에 육중한 콘크리트 다리를 놔서 정취를 망가뜨리고서도 한벽청연(寒碧晴煙)을 앞세워 전주 8경 중 한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니. 별이 빛나는 밤에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눈에 익은 산천 곳곳을 무덤 속같이 파헤쳐놓고 오죽잖은 콘크리트 건물이나 지어대면서 많은 이의 기억을 점방 구석에 처박힌 북어 꼴로 만들기 일쑤인 개발. 근본 까먹는 장삿속에 불과할- 일반인에게 자괴감과 소외감을 선물한 자본의 탐욕을 만날 때마다, 개발은 훼손을 넘어 자연생태계를 파괴하는 내란으로 이해되었다. 사람은 대자연의 공동체적 삶을 물려받는 존재이며, 이런 ‘너나들이’의 생활 태도가 인류의 희망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을 터이다. 온갖 생명체들이 가꾼 생존의 터를 까뭉개는 야만의 경제와 사람다움을 간직한 삶의 온기가 동거하는 이 기괴한 현재가 우리네 정체성일 리도 없다. 그러므로 편리함에 익숙해진, 어쩌면 길들여졌는지도 모를 생활의 변화는 자본과 문명에 복종하라는 금빛 독배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이런 점에서 엄경희가 “위장된 편리함과 편안함에 자신을 내어준 자가 치러야 할 대가는 자유의 박탈이다.”(『시인동네』, 2018년 9월호)라고 지적한 구절은 현재형이다. 진안고원의 구롓말 밤하늘에도 쌀티밥을 뿌려놓은 양 별들이 반짝이리라. 올가을에는 질뚝배미 나락을 누구랑 벨까. 황의관에게 전화를 걸려다 그만둔다. 그도 자신의 어릴 적 꿈들이 어느 별에서 소도록 소도록 빛날지 생각하리라. 강변에 바람이 소슬하다. 시간 바깥의 소식은 모두의 일상 속에 있다고, 점점 잃어가는 너나들이의 생활 태도를 회복하자는 것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또 있겠냐고 별들이 반짝인다. 제 잇속 채우려고 산천을 까뭉개든 4차 산업이 당도했든 말든, 오천 년 역사가 내장된 자연의 생명력을 자본과 문명이 내미는 엿과 바꿔 먹지 않겠다는 듯- 만경강 하늘에 별들이 총총하게 빛나는 밤이다. 이병초 시인·전북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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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13 18:15

[문화마주보기] 예술의 영역에서 성공이란 무엇인가

부산국제영화제가 30회를 맞았다. 개막식에서 이병헌 배우는 자신의 경력과 비슷한 시기에 영화제가 시작됐음을 언급하며 한국 영화의 흐름 속에서 일해온 기쁨을 표현했다. 한국 영화는 1987년 민주주의가 제도로 안착하던 시기에 변화가 일어났다. 영화학교가 설립되어 전문가들이 배출됐고, 95년부터는 영화잡지가 출간됐다. 96년부터 창설된 국제영화제들은 세계의 다양한 영화를 소개했다. 비디오 대여점의 호황과 대기업의 멀티플렉스 진출은 영화 관람을 일상의 문화 활동으로 자리잡게 하고 시장의 성장을 촉진했다. 국민의 상당수가 영화를 보고 토론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시기에 ‘코리안 뉴웨이브’의 감독으로 장선우, 박광수, 정지영 등이 이름을 알렸고 임순례, 홍상수, 이창동,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 등이 뒤를 이었다. 이들은 평단과 대중의 사랑을 받은 경우가 대다수였고, 개별 차이는 있으나 현재까지 활동하는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들이다. 그런데 그 당시 재기 발랄하게 떠올랐던 독립영화 감독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현재 영화산업의 양태를 보면 투자자와 제작사가 분리된 구조에서 ‘데이터로 검증된 성공 요소’가 아니면 투자를 받기 힘들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감독 외에는 지속적으로 영화를 만들기가 요원하다. 산업이 활발히 돌아가고 이른바 돈이 돌 때에는 독립영화 지원과 실험도 가능하지만, 수익이 하양 평준화 된 상황에서 새로운 시도는 투자자에게 손실과 같은 뜻이다. 수익이 보장되지 않아 새로움에 투자하지 않고, 투자하지 않으니 비슷한 영화만 개봉해 관객들이 극장을 외면하는 현상은 자학적 순환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이쯤 되니 영화라는 영역에서 성공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위대한 천재 감독 오슨 웰스는 영화 제작을 위해 부족한 돈을 구하러 다니느라 늘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 그는 영화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감독 중 하나로 손꼽히며 <시민 케인>(1941)을 빼놓고 영화 역사를 말할 수 없다. 샹탈 아커만의 영화는 단 한 편도 금전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2022년 영국영화연구소(BFI)가 시행한 국제영화전문가 투표에서 역대 최고 영화 1위에 아커만의 <잔느 딜망>(1975)이 선정됐다. 지난 30년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영화를 우리는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후대에 기억되는 감독과 영화는 상업적 성공이 아닌 예술적 성공이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예술의 영역에서 성공은 무엇인가. 독창성에 그 비밀이 있다. 그 감독이 아니라면 창작할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작가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현존하는 가장 독창적인 예술가로 손꼽히는 차이밍량, 페드로 코스타, 클리어 드니, 알랭 기로디 등의 영화를 개봉하면 단 10명이 그들의 영화를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10명의 관객이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영화 <24시간 파티하는 사람들>(2002)에는 1976년 록밴드 섹스피스톨즈가 라이브 공연을 하는데 극소수의 관객이 온 사연이 나온다. 그러나 그 장소에 관객으로 왔던 대부분이 조이 디비전과 같은 이후 음악계를 흔든 인물이 되었다. 어쩌면 예술에 있어 진정한 성공이란 영원성과 독창성을 내포한 창작일 것이다. 시대를 초월해 작품이 기억되고 다른 창작자에게 영감을 주어 예술의 확장에 기여하는 독보적 자리를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성공 아닐까. 문성경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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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29 17:30

[문화마주보기] K팝 데몬 헌터스가 쏘아올린 공 –하이브리드의 힘

왼쪽엔 ‘밥’, 오른쪽에는 ‘국’, 소파는 앉는게 아닌 기대는 가구, 2025년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애니메이션 K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는 이제 단순한 흥행을 넘어 전 세계인들이 한국으로 몰려와 먹거리부터 우리의 전통문화을 체험하고 스크린 속 세계를 현실로 재현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팬들은 케데헌 속 주인공이 오르던 계단을 따라 걷고, 남산타워 아래에서 인증샷을 남긴다. 요즘 미국과 유럽 학교 교실은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 포스터로 가득하고, 초등학생들은 OST 가사를 칠판에 적으며 한국어 발음을 따라한다. 교실, 도서관, 심지어 학교 복도까지 ‘케데헌 월드’로 변해 가는 지금, 한국 문화는 더 이상 수출품이 아니라 전 세계 아이들의 성장 과정 속에 스며드는 생활문화가 되어, 학교와 교육부 차원에서 K팝과 한국 문화가 가져올 영향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논의할 정도다. 이들이 두려워 하는것은 영화 한 편의 성공보다, 특정 나라의 문화가 자국 청소년들의 문화적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케데헌의 성공 배경이 된 핵심 요소가 무엇일까? 그것은 문화다양성을 적극 활용한 하이브리드(Hybrid) 전략이다. 주인공은 악령과 인간의 혼종으로, 조선시대 사인검과 무속 신칼을 사용하며, 레이저검으로 탄생시켰다. 사자보이즈는 갓을 쓰면서 전통복식과 함께 소다팝을 부르고, 까치와 호랑이는 민화 호작도의 상징성을 보여주면서, 전 세계 어린이들이 좋아할만한 캐릭터로 귀엽게 변모시켰다. 또한 OST 중 GOLDEN은 후렴부분에서 3옥타브가 넘나드는 고음으로 시원한 전율(Chills)을 보여주는 반면 사자보이즈는 저음으로 긴 여운(Reverberations)과 힘있는 군무를 남기며 감정을 교차시켰다. 그리고 관객들은 전통과 현대, 빛과 어둠, 선과 악을 통해 세상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을 마주하면서, 현실의 모순과 희망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입이 성공요소로 판단된다. 하지만 남자주인공 진우가 연주한 악기는 한국 고유의 향비파(5현)가 아닌 당비파(4현)였다. 이는 단순한 자료 오류로 인한 착오와 문화 다양성을 의도한 상징일 수도 있겠지만, 한국 전통을 대표하는 장면에서 향비파를 보여주지 못한 점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향비파로 교체가 되어 시즌2에 등장한다면 단순한 오류 수정을 넘어 우리의 전통문화를 다시 살리는 의미 있는 시도가 될 것이다. 케데헌이 쏘아올린 메시지는 공연예술계에서도 적극 반영해야한다. 특히 우리전통은 이제 단순 복원을 넘어서 영상과 사운드등 첨단 무대기술을 적극 활용 및 결합하고, 판소리로 다양한 노래를 재해석해보는 시도 역시 필요할 것이다. 또한, 관객이 전율과 여운을 함께 느끼도록 감정 곡선을 재설계하고, 합창과 온라인 챌린지로 참여를 이끌어, 전주한옥마을과 부안영상테마파크가 전통문화 콘텐츠의 거점으로 성장할 수 있게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 전북특별자치도가 그 다음 공을 쏘아 올려, K-컬처의 미래를 확장시키는 새로운 장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김수일 전북특별자치도립국악원 공연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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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22 18:46

[문화마주보기] 전북 사람 천 명이 치르는 ‘전북 담은 도서전’을 꿈꾸며

뺨을 어루만지는 바람결이 사뭇 다르다. 몇 차례 비 끝 폭염의 기세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 흔들림 사이를 단단하게 붙잡는 도서전, 책의 시절이 왔다. 지난 8월 30~31일 작년 이어 두 번째 만에 1만여 명 가까운 입장객으로 이른바 ‘대박’을 터뜨렸다는 ‘군산북페어’가 열렸다. 책과 문화를 연결한 독특한 감성여행으로 자리매김하며 성황을 이뤘다는 평가다. 이어 9월 5~7일 주말에는 ‘전주독서대전’이 폭염과 큰비를 무릅쓰고도 무사히 진행을 마쳤다. 도내 큰 책 축제가 연달아 열리며 새 계절 가을을 열고, 책의 호시절을 부르고 있다. 마음의 양식을 맘껏 누리며 한편 떠오르는 아쉬운 마음, 이 두 큰 축제에 도내 동네 책방, 우리 지역 출판사, 우리 문화, 예술, 역사, 생태, 사람과 이야기의 살림과 살이를 담은 책의 모습이 도드라지지 않은 것이다. 조금 색다른 도서전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엊그제 9월 12~14일 청주에서 열린 ‘제9회 한국지역도서전’이다.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는 서울 수도권, 문화로든 산업으로든 <책>의 집중도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출판의 거의 모두가 파주출판도시를 포함한 서울 수도권에 몰려있다. 그 밖은? 서울 수도권 말고도 사람이 사는 것처럼, 출판도 수도권 바깥에서 어울려 잘 살고 있다. 그 지역출판사들이 일년에 한번은 서로 모여, 한 일년 또 어떻게 버텨왔는지 생사 확인하는 자리로, 도서전을 열고 있다. ‘지역도서전’은 지역출판사들이 모여 그동안 펴낸 책들 모아서 사람 안부, 책 안부를 나누는 지역출판 축제 마당이다. 지역도서전은 2017년 제주에서 첫걸음을 떼었다. 지역마다 사라져가는 이야기들을 그러모아 어렵사리 지어낸 책들을 모아 전시도 하고 그 책을 편집한 편집자, 저자들의 이야기도 듣고 하는 자리로다. 해외 지역도서전의 사례며, 우리 지역 책들의 탄생 비화에, 지역출판 활성화를 위한 정책제안의 자리도 챙긴다. 지역도서전의 중심축은 <천인독자상> 수여에 있다. 한사람이 1만 원씩 천명의 독자가 상금을 모아, 온 나라 지역 곳곳에서 펴낸 책들 가운데 뜻 좋고 생각 좋고 맵시 좋은 책들 뽑아 격려하는 뜻깊은 상이다. 첫해 천인독자상 공로상에 책마을해리(도서출판기역)가 펴낸 그림책 <돌그물>이 선정되기도 했다. 이 지역도서전은 다음 해 수원에 이어 고창, 대구수성, 춘천, 광주동구, 부산수영, 대전유성을 거쳐 올해 청주에 이르렀다. 중간에 낯익은 지명, 세 번째 지역도서전은 고창이었다. 고창 책마을해리 공간과 마을 고샅, 갯벌에 책 공간을 펼쳐 보였다. 사람이 숨을 이어 살아가듯 책도 우리 가까이에서 숨을 멈추지 않고 살고 있다는 의미로 ‘지역 산다, 책 산다’를 주제로 삼았다. 올해 열린 청주도서전은 지역 행정과 문화예술 중간지원조직의 도움 없이 오롯 출판단체와 청주지역 시민이 힘을 모아 준비한 도서전이다. 청주에서 책을 사랑하는 민간의 힘으로 치러낸 온 나라 지역책들의 향연을 지켜보면서 우리 지역에서 지역 사람들 천 명의 뜻과 힘과 참여로 치르는 작지만 의미심장 책의 잔치를 꿈꿔본다. 도내 곳곳 동네 책방들이 저마다 독특한 큐레이션으로 어우러지고, 어렵게 명맥을 이어가는 소소한 지역출판사들의 책이 적어도 우리 도민들에게 꼬박꼬박 선을 보이는, 우리 ‘전북을 담은 책의 향연’을 말이다. 이대건 고창 책마을해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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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15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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