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는 조선 왕조의 발상지답게 이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경기전이라든지 조경단이 그렇고 이목대와 오목대가 그러하다. 그 중 이목대(梨木臺)는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이안사, 오목대(梧木臺)는 태조 본인의 발자취가 스민 곳이다. 두 곳이 어떻게 해서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지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다. 또 이 일대에 배나무나 오동나무가 많이 있어 그리 불린 것 같지도 않다. 예전에 미목대(眉目臺) 또는 어목대(於穆臺)로 불린 것으로 보아, 혹여 일제시대를 거치며 그리 되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이목대는 목조가 태어나 전주를 떠나기까지 살았던 곳으로 발산(鉢山)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발산은 승암산(중바위)에서 뻗어 나와 이목대 오목대 등으로 이어진 산이다. 중바위에서 탁발하러 내려오는 스님의 바리때 형상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게딱지 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지만, 이씨 왕조가 일어난 산이라 하여 발리산(發李山)으로 부르기도 한다. 목조는 발산 아래 자만동(滋滿洞 현재의 교동 일부) 출신이다. 이 곳은 명당 중 하나로 조선초 직제학을 지낸 최담이 후학을 가르치고, 명필인 이삼만, 역모로 뜻을 펴지 못한 정여립도 태어난 곳이다. 이곳에는 목조와 관련된 장군수(將軍樹)와 호운석(虎隕石)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목대와 기린로 위 다리를 건너 마주하고 있는 오목대는 이성계가 황산대첩을 치르고 개경으로 가는 도중 들린 곳이다. 당시 왜구의 노략질이 잦자 고려조정은 이성계를 충청·전라·경상 도순찰사에 임명해 왜구 토벌작전을 벌였다. 이성계는 출중한 활솜씨와 지략으로 대승을 거두고 1600여 필의 말을 노획했다. 귀경길에 선조들이 살았던 이곳에 들러 친인척들을 모아 잔치를 베푼 것이다. 이 자리에서 승리감에 취한 이성계는 한고조 유방이 자신의 고향인 풍현 패촌에서 불렀다는 대풍가(大風歌)를 불러 왕조창업의 뜻을 밝혔다고 한다.
이 두 곳은 지방기념물 16호로, 1900년 고종이 각각 친필로 쓴 비문을 내려, 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조선총독부가 1931년 전주-남원간 전라선을 개통하면서 절단나 버렸다. 이것을 전주시가 인근 한옥마을과 연결, 길을 지하로 뚫고 옛모습대로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옛 정취를 느낄 수 있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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