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렬 소리 모범 삼아 판소리 세계 구축…신재효 사설 많이 차용
김연수의 판소리 학습과 관련해서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김연수 자신이 정정렬을 가장 따르고자 했던 스승이라고 말했다는 점이다. 김연수가 정정렬을 만나 판소리를 배운 것은 1936년이다. 상경 직후인 1935년에는 송만갑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다고 하였다. 그런데 정정렬로부터 판소리를 배울 때는 충청북도에 있는 현암사와 내금강 표훈사 등 구체적인 장소까지 말했다. 현암사에서는 <적벽가> 를 배우고, 표훈사에서는 <춘향가> 를 배웠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스승을 모시고 절에서 집중적으로 공부를 한 것이다. 1차로 <적벽가> 를 배우고 나서 다시 <춘향가> 를 또 배웠던 것을 보면, 김연수가 정정렬의 소리를 매우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김연수는 1938년 스승인 정정렬이 별세한 후, 정정렬 선생이 5년만 더 살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면서 무척 아쉬워했다고 한다. 실제 김연수는 정정렬의 판소리를 모범으로 삼고 자신의 판소리 세계를 구축하려 했다. 춘향가> 적벽가> 춘향가> 적벽가>
김연수는 다른 소리꾼과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다. 보통의 소리꾼들은 스승으로부터 배운 판소리를 약간씩 바꿈으로써 자신의 판소리 세계를 구축한다. 그런데 김연수는 배운 것을 약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거의 전면적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래서 김연수의 판소리는 현재 전승되고 있는 판소리와는 아주 다른 판소리가 되어 버렸다. 김연수 자신이 배웠다고 말한 판소리와 현재 전승되고 있는 김연수 바디 판소리는 완전히 달라서, 전승계보를 통해서는 김연수 판소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김연수의 판소리는 동편제니 서편제니 하는 과거의 틀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러면 김연수의 판소리는 어떤 것을 토대로 해서 만들어졌는가? 음악적 특성 면에서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정정렬의 소리를 모범으로 삼았다. 사설에서는 신재효의 사설과 일제강점기 당시 인기를 끌었던 판소리계 신소설을 대거 차용했다. 특히 김연수는 신재효의 사설을 많이 차용했다. 그런데 김연수는 신재효로부터는 사설만 차용한 것이 아니라, 신재효가 판소리 사설에서 추구했던 이른바 합리성까지 그대로 따르려고 했다. 물론 신재효가 추구한 합리성과 김연수가 추구한 합리성은 다르다. 신재효는 유교적 합리성이라고 할만한 내용을 추구했지만, 김연수는 근대적 합리성이라고 부를 만한 내용을 추구했다. 예를 들자면, 신재효는 <심청가> 에서 심봉사가 자신의 눈을 뜨기 위해 딸을 팔아먹었다는 오해를 살까봐, 공양미 삼백 석을 몽은사로 바치겠다는 약속을 심봉사가 아니라 심청이 하는 것으로 하였다. 김연수는 <적벽가> 의 '장승타령'에서 조조와 장승이 말을 주고받는 것이 어색하다고 생각하여, 나무가 어떻게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천하가 말세 되어 시절이 분분하면 사람과 귀신이 뒤섞여 목신도 능히 말을 할 수 있다는 설명을 굳이 덧붙였다. 적벽가> 심청가>
겉으로 볼 때 김연수 판소리가 다른 판소리와 가장 다른 점은 김연수 판소리의 사설이 마치 연극의 대본같이 생겼다는 점이다. 김연수는 자신의 판소리 사설을 출판했는데, 그 사설집은 대사로 볼 수 있는 부분은 등장 인물에 따라 배역을 표시하였고, 해설 부분은 도창이라고 해서 대사와 구분을 하였다. 사설 곁에 장단을 표시하기도 했다. 내용 또한 보다 극에 가깝게 수정하였다. 판소리를 부를 때도 극적인 표현을 특히 강조하였다. 요컨대 김연수는 판소리를 극으로 보았던 것이다. 김연수는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극에 대한 이해가 있었던 데다가, 데뷔 때부터 창극에 관여하여 한 평생을 창극을 하며 살았던 데 원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최동현(군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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