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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에서] 어느 배달소년의 추억

김병종(화가, 서울대 교수)

전북일보가 60주년을 맞았다. 사람으로 치면 환갑인 셈이다. 실로 위업이라 할 만하다.

 

전북일보 60년의 기사를 보면서 낡은 흑백사진처럼 옛날의 기억들이 살아나왔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고향에서 처음으로 신문배달을 시작하였다. 전북일보는 아니었지만 같은 지방지였는데 석간이었다. 왜 그랬는지 그때는 석간을 밤에 돌리곤 했다. 내게 주어진 부수가 40매쯤 되었던 것 같다.

 

이른 저녁을 먹고 지국에서 신문을 받아 골목을 걷거나 뛰다보면 두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1967년 무렵이었는데 그때 최희준의 '종점'이라는 노래가 유행이었다. 신문을 돌리다보면 담을 넘어 '너를 사랑할 땐 한없이 즐거웠고...'라는 가사의 노래가 유난히 많이 들려왔다. 이 노래가 좋아 가끔은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 끝날 때까지 듣곤 했다. 어느 집 모퉁이를 돌면 '종점'이 들리고 어느 집 문 앞을 지나칠 때면 그 시간에 시작하는 연속극 주제가가 들려오곤 했다.

 

그런데 내가 신문을 돌려야 하는 곳 중엔 보선사무소라는 데가 있었다. 역에 딸린 부속사무실이었는데 훗날 생각해보니 아마 선로를 관리하는 곳이었던 것 같다. 이 곳은 명포 밭을 지나 한참을 가야했는데 사무소 입구에 희미한 불빛 하나뿐 주위는 늘 깜깜했다.

 

밤마다 이 외딴 보선사무소까지 가기가 아주 죽을 맛이었다. 한없이 이어진 키 큰 명포 밭을 지나갈 때면 머리끝이 쭈삣거릴 만큼 무서웠다. 달이라도 휘영청 뜬 날 밤이면 그나마 나았지만 깜깜할 때면 일부러 최희준의 '종점'을 크게 부르며 그곳까지 가곤했다.

 

어느 날 밤인가는 역시 '종점'을 부르며 가고 있는데 명포 밭에서 남학생과 여학생 하나가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한해 선배로 소문난 불량학생이었다. "이놈아 노래 좀 작게 부르고 다녀." 그는 나를 지나치며 그렇게 말했는데 슬쩍 보니 곁에선 여학생 모습이 참 예뻤다. 그 후 가끔씩 학교에서 껄렁한 모습의 그를 볼 때면 이쁜 여학생의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

 

신문을 돌리는 것은 특별히 어려울 것이 없었지만 보선사무소까지 가는 것이 너무 싫어 슬쩍슬쩍 빼먹기도 했다. 어느 날 지국에서 신문을 봤는데 총무가 배달소년들에게 화를 냈다. "보선사무소 어떤 놈이야. 제대로 돌리지 않으면 잘라 버릴거야." 으름장에도 불구하고 한달 너댓 번씩은 보선사무소에 신문을 넣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자청하여 배달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 후 대학생이 되어 내려가 보니 고향집에서 전북일보지국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은 어수선했고 배달소년들은 들락거렸지만 마음의 고향에 돌아온 듯 신문냄새도 상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도 나는 나의 배달소년 시절의 추억을 꼭꼭 숨겨놓은 연애편지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때의 어두운 밤길을 터벅터벅 걸으며 날마다 동심의 키가 한 뼘 정도씩은 자랐던 것 같다. 조숙한 문학소년 때여서 밤길의 작은 풀벌레소리 하나에도 감성의 촉수들이 예민하게 일어서곤 했다. 배달에서 돌아오면 이런 경험들을 글로 적곤 했다. 수필인지 소설인지 정체가 애매한 글을 한도 없이 썼고 때로는 그림까지 곁들여 보관하곤 했던 것이다.

 

폭풍처럼 휘몰아친 아버지의 죽음과 집안의 몰락 같은 사건들 속에서 그나마 나만의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라는 시간이 친구도 되었고 위로도 되었던 것 같다. 한차례 자꾸만 흘러내리는 신문을 껴안고 터벅터벅 걸으며 어린 나는 자신과 참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듯 하다. 그뿐인가 지국에서 한달 월급을 받으면 친구와 자장면 몇 그릇을 사먹고 남는 돈으로는 화구며 책을 살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돌아보면 내 배달소년 시기야말로 내 생애의 몇 손가락에 꼽을 만치 소중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 김병종(화가,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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