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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에서] 고향 나들이

김병종(화가·서울대 교수)

 

고향 가는 길은 늘 설렌다. 비록 이제는 버선발로 뛰어나오시며 깜짝 반가워하시던 어머니는 안 계시지만 일가 친척들이며 옛 친구들이 있어 반갑다. 고속버스가 오리정 길목으로 슬며시 머리를 틀 때부터 소년처럼 가슴이 설레는 것이다. 고향에만 오면 세월을 건너뛰어 예나 이제나 어린 아이가 되어 버리는 것처름 느껴지곤 한다.

 

지난 11월 초에도 고향 나들이를 했다. 남원시청의 초청강연 때문이었다. 시청 강당에서의 행사가 끝나고 저녁에는 옛 친구들과의 식사모임이 예정되어 있었다. 시청에는 중학생 시절 아주 가까이 지내던 두 친구가 재직하고 있어서 그 친구들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모든 면에서 나보다 성숙하고 의젓하던 친구들이었다. 건방을 떨고 다니던 문학소년이었던 나를 두 친구는 잘 챙겨주었는데 오랜만에 시청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옛날 심성들로 미루어 보건대 공무원으로도 성실할 게 분명한 친구들이었다. 밤에 만난 옛 친구들은 제각기 하는 일들이 달랐지만 열심히 살고 있는 것 만은 분명했다. 든든하게 고향을 지키고 있는 그들이 새삼 미덥고 고마웠다.

 

친구들과 헤어져 여장을 춘향가(家)라는 새로 들어선 듯 보이는 숙소에서 풀었다. 한실로 꾸민 방들이 그렇게 정갈할 수가 없었다. 간혹 일본을 여행하다가 전통 료칸(여관)에 묵곤 하던 생각이 났다. 사실 고향은 좋아도 내려가면 잠자리가 여간 문제가 아니었다. 연세 드신 누님댁에 연락을 드리면 부산을 떨게 해드리는 것 같아 적절히 묵을 곳을 찾아도 환경이 마땅한 곳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보료 깔린 숙소에서 어디선가 은은히 들려오는 국악소리를 들으며 오랜만에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옛집을 혼자 둘러보았다. 대문 너머로 보니 마당엔 잡초만 우거져있다. 어머니가 밤낮으로 가꾸시던 그 채마밭은 돌보는 이 없어 폐허처럼 바뀌어 버리고 장독대에는 낙엽이 수북하다. 당장이라도 어머니께서 "거 뉘?" 하시고 문으로 다가오실 것만 같다. 내가 빌려온 문학책을 밤새워 읽어대던 길가로 난 골방도 옛모습 그대로였지만 이제는 퇴락해 손만대도 파삭 내려앉을 것 만 같다.

 

가끔 다니러 올 때면 인사를 드리던 골목안 노인들도 이제는 모두 저세상으로 떠나시고 안계셔서 적막하기 그지없다. 그 중에는 나만 보면 불러세우시고 근심섞인 목소리로 아직도 고시가 안됐느냐고 물으시던 분이 계셨다. 제가 하는 일은 그런 일이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드린다 해도 이해 못하실 어른이셨다.

 

옛날 내가 멱감고 물놀이 하던 요천변으로 나갔다.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렸지만 백사장이 있어 천렵을 하던 곳이었다. 쌀이 귀하던 시절, 집에서 쌀을 한 움큼씩 가져와 하얀 쌀밥을 지어 갓 잡은 피라미 매운탕에 먹으면 정신이 핑 돌만큼 맛있었다.

 

천변을 따라 길게 걸으면 내가 좋아했던 여고생 누나가 살던 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그 집에는 풍금이 있었고 간혹 담 너머로 그 누나가 치는 풍금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교복을 단정히 입고 우리집 골목으로 오가는 누나를 보기위해 일부러 물가에서 서성대곤 했었다.

 

옛 생각에 잠기며 골목을 걷고나니 해가 설핏하다. 돌아보면 거기 변함없이 내 유년시절이 있는 곳. 가난했지만 저녁밥상머리 오순도순 둘러앉아 식구들과 함께 화기애애하던 그 곳. 철 모르고 들로 산으로 뛰어놀며 꿈을 꾸던 그 곳. 언제라도 한 나절 버스에 몸을 싣고 가면 만날 수 있는 그 고향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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