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醫員)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 '시인수첩'(2011년 가을호)"지난해 소출이 형편 없었어요. 시인으로 한 30년 살면서 그렇게 게으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게을러질 대로 게을러진 사람한테 현역 시인과 평론가들이 아프게 꿀밤 한 대 먹여준 것 같습니다. 정신이 번쩍 드네요."
도서출판'작가'가 지난해 발표된 신작시 가운데 문인들의 추천을 받아 '2011 오늘의 시'에 안도현 시인(52·우석대 교수)의 '일기'를 꼽았다. 박성우 시인(41·우석대 조교수)은 지난달 무주의 깊은 골짜기에서 은거(隱居)했던 안 시인의 소감을 대신 들려주었다.
'일기'에 나오는 문장들은 오래 전 시인의 머릿속에서 맴돌던 것들. 일필휘지를 싫어하던 시인이 지난해 우석대 문창과 제자들과 하루에 한 편씩 시쓰기 제안을 했다가 숙제하듯 부랴부랴 썼던 작품이다. "이렇게 짧은 시를 쓴 건 처음이었다"는 시인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묘사로 그의 '글마당집' 고요한 풍광을 스냅 사진처럼 잡아냈다. 과장된 감정분출이 없이 작고 소박한 삶의 한 정경을 그대로 그려 보였다. 삶의 적막을 제 집으로 삼고 다스리는 태도에서 '호젓함의 서정'이 읽힌다.
문단 안팎으로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열 일 제쳐두고 달려가곤 하는 시인은 정작 "느리게, 한가하게, 작게 사는 것"을 참 간절히 원했다. "시 쓰는 일을 뒤로 밀쳐두고 시의 바깥을 기웃거리는 일이 많았다"는 시인은 지난달 '산토끼가 나란히 발맞춰 걸을' 법한 이곳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유배시켰다.
'시인은 어떻게 단련되는가'라는 질문에 '시만 읽고, 시만 생각하고, 시만 쓴' 지난 열흘 간의 은거는 답변이 됐다. 현재 시인은 4년 만에 열 번째 시집 원고를 마감 중이다.
"(이곳에서) 잠자다 깨어 폭설 때문에 소나무 가지 부러지는 소리를 즐겼다"는 시인은 원래 지녔던 서정의 감각으로 귀환한 듯 했다. 비록 도시 아파트에 살아도 자연에서 깨우침을 얻고 삶을 에워싸는 심원한 지평을 들여다보려는 시적 공력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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