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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은행 본점 로비의 그림

어느 날 예술회관 앞을 지나다가 무심코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그림을 둘러보다 나는 한 장의 작은 그림 앞에 섰다. 꽉 짜인 구도와 색채, 그림 속에 쏟아진 빛들의 부딪침이 풍기는 긴장과 화해가 일으킨 묘한 조화가 나를 그림 앞에 오래 머물게 했다. 고민을 가다듬은 작가의 욕심 없는 붓질과 붓 길이 텅 비운 맑은 영혼처럼 투명해보였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도록을 주며 이 그림들 속에서 내가 사고 싶은 그림이 있으니. 내일 아침까지 찾아보라고 했다. 출근 전에 아내가 도록을 가지고 와서 두 장의 그림을 가리켰다. 내가 하나만 고르라고 말했다. 아내는 망설이더니 내가 고른 그림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우리는 그 화가의 전시가 끝날 때까지 날마다 전시장을 찾아가 그 그림에 대한 확신을 키웠다. 그 그림이 내 집으로 들어 올 것이므로, 그 그림은 우리 식구가 되어 평생을 함께 해야 하는 중차대한 일이므로, 첫 며느리를 맞이하듯 신중에 신중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그림을 지금까지 걸지 못하고 있다. 우리 집 아파트 어느 공간에 그 그림을 걸어도 어울리지 않았다. 아내는 그 그림을 걸려면 그 그림에 맞는 집을 새로 지어야겠다고 푸념을 한다.

 

 

나는 그림 속의 낙관과 사인을 중요하게 본다. 요즘 작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사인을 하거나 글귀를 써 넣은 것을 보면 그림과 글씨가 조화를 이루지 못해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고만 경우들이 너무 많다. 사인도 그림의 일부분이지만 그림의 '집'인 액자야 말로 그림을 완성시킨다. 사인이나 액자와 함께 중요한 것은 '전시'다. 한 폭의 그림을 어디다가 거느냐에 따라 그림이 완성되느냐 버려지느냐를 결정한다. 물론 세계적인 명화들은 어디다 걸어두어도 그 그림이 걸려 있는 부근의 공간을 압도하며 자기 자리를 확보할 것이다. 그러나 말이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우리 시골 집 벽에 걸면 그 그림과 집과 우리 마을 공간에 새로운 세계가 나타날까. 천경자의 '길례 언니'라면 모를까. 어느 사무실이나, 어느 집에 갔을 때 그림이 어디에 걸려 있는가를 보고 그 집안에 사는 식구들의 예술에 대한 교양이나 미적 감각을 짐작한다. 그러나 나는 집이든 사무실이든 로비든 텅 비워둔 공간이 어디에 있느냐를 더 중요하게 본다. 자칫 잘못 전시하면 그림이 걸린 주위의 벽과 공간을 죽이고 그림을 죽인다. 정확하게 자로 잰 정중앙에 걸린 그림은 양쪽 공간이 답답해서 숨을 고를 수가 없다. 그림의 높이와 벽의 넓이, 남은 공간을 고려해야 그림이 숨을 쉬며 산다. 벽 색깔과 공간에 대해 더 고민을 해 보아야겠지만 전북은행본점 로비에 걸린 민경갑 선생의 그림과 나상목 선생의 그림은 공간운용을 잘 한 셈이다. 그림을 전시함으로 의미 없는 벽의 의미가 살아나는 그런 공간 앞에 들어서면 숲속에 든 것처럼 숨소리가 고르게 골라진다. 몸과 마음에게 평화를 주는 공간의 구성만이 숨을 들이쉬고 내 쉴 생명력이 유지된다.

 

 

전주MBC 로비의 송수남 선생의 꽃 그림이 지금도 그 자리에 걸려 있는지 몰라도 그 그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왼쪽에 찻집이 생긴 바람에 고민이 가닥을 잡지 못하게 로비가 헝클어졌다. 엠비시 사장도 바뀐다 하니, 이참에 로비 그림에 대해 고민해 보면 어떨까? 전북대, 우석대, 전주대, 도청, 새로 지은 KBS. 도교육청 로비는 도대체 주인이 없는 썰렁한 공간이다. 아내의 따스한 손길이 떠나버린 밥상 앞에 앉은 남정네만큼이나 애정결핍증으로 초라하고 처량하다 못해 불쌍하다. 그 곳에 근무하는 사람들 모두 공간에 대한 아무런 애정도 개념도 없는 무관심의 증거다. 안착된 그림 한 장이 그 공간과 그 건물과 그 집에 사는 사람들과 세상을 동시에 안정시키고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예술은 죽어가는 것들을 살려내는 일이다.

 

/본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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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용 kimwy@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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