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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총리들, 8.15 야스쿠니 참배 어떻게 해왔나

'사적 참배'서 나카소네 정권때 '공식 참배' 첫 단행

일본의 역대 총리 가운데 패전일인 8월15일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이는 1978년 태평양전쟁 A급 전범 14명이 비밀리에  합사되기 전인 1975년 미키 다케오(三木武夫) 총리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미키 총리는 자신의 참배가 '사적 참배'라며 공용차를 쓰지 않고 신사참배할 때 등에 봉납하는 공물료(다마구시 <玉串> 료)도 사비로 냈다.

 

총리가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에 위배된다는 위헌 논쟁과개인으로는 신교의 자유가 허용된다는 점을 절묘하게 감안해서다.

 

그후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총리 등이 이같은 참배 형식을 빌려 8.15  참배를 단행했다.

 

일본 총리가 8월15일 야스쿠니 '공식 참배'를 단행한 것은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가 처음이다.

 

 그는 패전 40주년인 1985년 8월15일 두 명을 제외한각료 전원을 대동하고 야스쿠니 신사를 총리 자격으로 당당히 참배했다.

 

나카소네 총리는 당시 관방 장관의 사적 기관인 '각료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관한 간담회'를 설치, 신도 형식을 취하지 않는 공식 참배라는 '묘수'를  찾아내 참배 반대론을 물리쳤다.

 

신도 참배 형식인 '2배(排) 2박수 1배'를 피하고 1례(禮)만 하는 대신에 그전의역대 총리가 사비로 충당해 왔던 공물료는 공비로 내는 방법을 썼다.

 

하지만 당시 나카소네 정권의 공식 참배는 한 번으로 끝났다.

 

 야스쿠니 신사에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사실이 알려진 이후 처음으로  강행된 일본 총리의 공식 참배에 항의해 한국, 중국이 격렬하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그 후 1992년 11월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총리 등이 야스쿠니를 참배했다.

 

그러나 미야자와 총리는 당시 참의원 선거 과정에서 자민당이 내건 '참배 공약'을둘러싼 '일본유족회'의 압력에 밀려 일정 등도 사전에 알리지 않은 채 '조용히'  참배를 마쳤다.

 

'나카소네 참배 파문'이후 잠잠했던 야스쿠니 참배 문제가 다시 외교 문제로 부상했던 것은 1996년 7월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총리때다.

 

 하지만 하시모토총리는 자신의 생일을 기해 야스쿠니를 참배한 후 "(야스쿠니에 합사돼 있는) 사촌때문에 왔다"고 개인적인 참배임을 강조했다.

 

일본유족회 회장과 '다함께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회장을 역임했던 하시모토 총리는 당시 신도 참배 형식을 취했으나 공물료는 내지 않았다.

 

하시모토 총리 역시 한국과 중국이 강하게 반발하자 그 후로는 참배를 단념했다.아시아 피해국의 반발로 수면하로 들어갔던 야스쿠니 참배는 2001년 고이즈미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정권이 출범하면서 다시 부활됐다.

 

'반드시 야스쿠니를 참배한다'고 약속, 일본유족회의 지지를 받아 집권한  고이즈미 총리는 5년5개월의 재임기간 매년 야스쿠니를 참배하다가 집권 마지막 해인 2006년 한차례 8.15 참배를 단행했다.

 

2006년 9월 1차 집권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2007년 4월 야스쿠니 춘계예대제때 신사 제단에 바치는 화분 형태의 제구인  '마사카키'(眞신<木+神>)공물을 봉납하는 것으로 참배를 대신했다.

 

작년말 다시 집권한 아베 총리는 1차 집권때 야스쿠니를 참배하지 못한 데 대해스스로 통한의 심정을 토로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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