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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은 '동철서염'의 큰 무대

▲ 곽장근 군산대학교 박물관장
인류의 역사 발전에서 공헌도가 가장 높은 것이 소금과 철이다.

 

중국 한나라 무제가 제정하여 시행한 소금과 철의 전매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 ‘염철론’으로 전북은 ‘염철론’의 큰 무대였다. 도내 동부지역에서 철, 새만금에서 소금이 각각 생산됐는데, 이에 근거를 두고 전북을 ‘동철서염’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선사시대부터 줄곧 전북에서 생산된 소금과 철이 많은 세력집단들이 도내에 기반을 두고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이다. 무엇보다 백제 무왕, 후백제 견훤왕은 ‘동철서염’의 생산과 유통을 국가시스템으로 완성, 당시 전북의 위상을 최고로 높였다.

 

우리나라에서 패총의 밀집도가 가장 높은 곳이 새만금이다. 마한의 지배자 무덤으로 밝혀진 말무덤의 경우도 20여 개소로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많다.

 

전북 서해안에서 해양문화가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소금의 생산과 유통이 큰 역할을 담당했던 것 같다. 아마도 제나라 전횡의 망명과 고조선 준왕의 남천이 전북의 해양문화융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점쳐진다.새만금 일대에 기반을 둔 마한의 소국들은 대체로 소금을 생산하던 해양세력이거나 해상교역을 주도했던 정치집단으로 판단된다. 삼국시대 때도 마한의 해양문화와 그 역동성이 그대로 이어지는 발전과정을 보였다.

 

최근에 전북 동부지역에서 100여 개소의 제철유적이 그 존재를 드러냈다.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운봉고원과 진안고원이 여기에 해당된다. 고고학자들의 열정과 도전으로 운봉고원에서 30여 개소, 장수군에서 70여 개소의 제철유적이 각각 발견되어 학계의 커다란 관심을 모으고 있다. 동시에 장수가야와 운봉가야는 근초고왕의 남정 이후 가야문화를 받아들여 가야계 소국으로까지 발전했다는 점에서 서로 공통성을 보였다.

 

이제까지 학계에 보고된 가야계 대형무덤은 운봉고원에서 100여 기와 장수군에서 200여 기에 달한다. 더욱이 장수가야는 가야계 소국들 중 유일하게 백두대간 서쪽에 위치하여 가야의 영역을 금강유역으로까지 넓혔다는 점에서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고대국가를 출현시켰고, 대가야가 후기 가야의 맹주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도 철의 힘이다. 전북의 가야와 백제의 문물교류도 철의 생산과 유통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운봉고원과 진안고원에서 가야와 백제, 신라가 국운을 걸고 제철유적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각축전을 펼쳐 삼국의 유적과 유물이 공존한다. 백두대간 동쪽 운봉고원에 큰 관심을 두었던 근초고왕과 무령왕, 무왕은 당시에 백제를 중흥으로 이끌었다. 특히 무왕 때 익산이 백제의 거점지역으로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은 대규모 철산지인 운봉고원의 탈환이 주된 배경으로 작용했다.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은 운봉고원이 철의 생산부터 주조기술까지 응축된 당시 철의 테크노벨리였음을 웅변해 줬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실상사 조계암지 편운화상 부도탑에 후백제 ‘정개’ 연호가 전해진다. 전북 동부지역 제철유적을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키려는 전라북도와 남원시, 장수군의 미래전략에 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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