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해서 세운 진나라의 역사는 기원전 221~206년이니 불과 15년이라는 짧은 역사에 불과하다.
그런데 견훤이 900년 완산주(전주)에 입성하여 도읍을 정하고 세운 후백제 왕도는 36년의 역사를 간직한 도시다.
이는 진나라에 비하면 오랜 기간이다. 올해가 꼭 1117년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 전주를 천년고도라 부른다.
견훤왕이 전주에 백제를 세우며, ‘나는 감히 도읍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백제의 원한을 풀러 온 것뿐이다.’라고 건국 이유를 밝혔다고 한다.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떳떳하게 선포한 것도 백제의 맥을 잇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런 ‘백제’가 후세 역사가들이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서 ‘후백제’라 이름 지어 불리고 있으나 백제의 영혼은 지울 수가 없다.
조선 영조 때 쓴 《동서강목》에서는 후백제를 백제의 옛 땅을 남김없이 차지해 신라와 고려보다도 강력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미국 켄서스 대학의 허스트 3세 교수의 〈고려왕조 창건 속 인물들〉이란 논문에서 ‘견훤은 상당한 군사적, 도덕적 힘을 가지고 있었던 백제인으로 운명의 뒤틀림이 없었다면 10세기 한국은 견훤에 의해 통일됐을지도 모른다.’고 할 정도로 막강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편이라고 했던가. 오늘날 왜곡된 역사로 인해 견훤왕이 폄하되고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 우리 전주사람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후백제는 후삼국 시대 이후 유일하게 왕궁터를 찾지 못하고 있는 나라다. 개발을 계속하고 있지만 지금도 확실치 않다. 학자마다 설이 분분하다. 동고산성이라고도 하고, 물왕멀 일대라고도 한다.
또, 중노송동 인봉리와 문화촌 일대라고도 한다. 그런데 최근 전주국립박물관에서는 이제까지의 모든 자료를 종합 검토하여 노송동 지역을 궁성 일대로 상정하고 도성의 형태나 방어체계를 새롭게 설정하여 발표했다. 다소 늦은 감이 있다. 돌아가는 사정을 알 리 없는 시민은 안타깝고 답답하기만 하다. 천 년이 지났는데도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으니 말이다. 궁성의 위치를 정확히 모르면 어떤가?
전주시내 어느 곳일 텐데…. 궁성 터를 찾는 일에 발목이 잡혀 다른 사업을 미룬다면 그것도 옳은 방향이 아니지 싶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에서는 견훤왕의 사당과 후백제 사당 위패를 소중하게 모시고 있으며, 충남 논산시 연무읍에서는 견훤왕의 묘를 자랑하고 있다. 후백제 왕도로서 위상을 되살리고 시민들의 자긍심을 돋우기 위해서 후백제 역사 문화 복원에 박차를 가하기 바란다. 시민들도 ‘백제대로’나 ‘견훤로’ 같은 도로명 주소를 적극 활용하는 것도 협조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어느 누가 나를 보고 “어디 사세요?”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후백제 왕도였던 “전주에 삽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김상권 수필가는 《대한문학》 수필 부문 신인상, 《한국산문(구 에세이플러스)》 수필 부문 신인상을 받았다. 수필집 〈다들 어디로 갔을까〉, 〈뻐꾸기 소리로 아침을 열다〉를 출간했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