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원호 / 그림 권휘원
“소덕, 이또의 성(城)이 그중 가장 낫네.”
앞에 앉은 이루카가 입을 열었다. 이루카를 따라온 조정의 관료 대여섯명이 계백을 향해 벌려 앉았다. 이제는 이루카와 계백을 중심으로 회의가 열린 셈이다. 이루카가 말을 이었다.
“성이 넓고 성벽 높이가 20자(6m)가 넘어. 그곳을 거성으로 하면 3개 영지를 다스리는데 부족하지 않을 거야.”
이루카는 37세였으니 계백보다 7살 연상이다. 경륜도 많은데다 뛰어난 무장(武將)이기도 하다. 계백이 머리를 숙여 답례를 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병력은 얼마나 데려갈 텐가?”
“제가 백제에서 데려온 3백 기마군중 2백기만 데리고 갈 것입니다.”
“3개 영지의 소출이 16만석이니 50석당 병사를 모으면 3천2백이 되네.”
이루카가 웃음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전시(戰時)에는 5천도 모을 수 있지. 소덕은 이제 왜국의 영주이고 신하가 되네.”
“명심하겠습니다.”
이루카는 그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 같다. 자리에서 일어선 이루카가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아리타, 마사시, 이또의 가족과 가신의 처분은 모두 그대에세 맡기네. 그것이 왜국의 법도일세.”
청을 나온 계백의 옆으로 화청과 윤건, 백용문이 다가왔다. 하도리도 그들의 뒤를 따른다.
“은솔, 나오시지 않아서 걱정했소.”
화청이 투덜거렸다.
“원래 음모를 많이 꾸미는 인간들이라 왕자 전하께서도 나오시지 않아서요.”
“섭정하고 이야기하느라고 늦었어.”
말에 오른 계백이 그들을 둘러보았다.
영지로 데려갈 부하들이다.
“그대들도 나하고 왜국 영주 노릇을 좀 해야 할 것 같다.”
“은솔과 함께라면 지옥에라도 가지요.”
화청이 대번에 대답했고 윤건이 따랐다.
“이곳도 백제땅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상관없습니다.”
백용문도 머리를 끄덕였고 하도리는 웃기만 했다. 그렇지만 하도리가 가장 좋은 것이다. 백제 조정에서 11품 대덕 벼슬까지 승급했지만 하도리는 본래 왜인이다. 이름이 핫도리였다가 계백을 주인으로 모신 후에는 하도리(下道理)로 이름을 만든 것이다. 그날밤, 백제방의 청 안에서 풍과 계백이 술상을 놓고 마주보며 앉아있다. 술잔을 든 풍이 정색한 얼굴로 계백을 보았다.
“은솔, 지금까지 백제방은 영지를 소유하지 않았어. 왕실처럼 영지를 소유하지 않고 본국에서 데려온 병사로 질서를 잡았더니 한계가 있었다.”
한모금 술을 삼킨 풍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이번에 김부성이 난을 일으킨 것이 전화위복으로 되었구나. 이제는 백제방이 자력으로 무력을 갖추게 되었다.”
“백제방과 왕실의 친위대 역할이 되겠습니다.”
“신라가 걱정이다.”
어깨를 치켰다가 내린 풍이 길게 숨을 뱉었다.
“당의 속국이 되겠다면서 당의 관복을 자진해서 입고 새 여왕에게 당왕을 칭송하는 시를 비단에다 자수를 놓게 하다니.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이 어디있단 말이냐?”
김춘추의 소행이다. 새로 즉위한 여왕 승만에게 그렇게 시켰다고 한다. 당을 업어야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사대(事大)쯤은 안중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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