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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등 굽은 소나무

박순희 수필가
박순희 수필가

몇 달 전 여름이 가기 전, 남덕유산을 다녀왔다. 신 기슭의 야생화와 눈 맞추며 사진도 찍고 쉬엄쉬엄 세월아 가거라 해찰하며 오감을 즐겼다. 비단결 같은 햇살이 내려앉은 능선위로 여린 초목의 숨소리가 가빠진다. 갈맷빛 치마 주름의 능선에는 얇은 사(絲) 하얀 구름이 바람결 따라 가렸다 들쳤다 유혹하는 풍광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전망이 탁 트인 넓은 시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하늘에 맞닿은 높은 봉우리와 깊숙이 내려앉은 계곡에 여기는 햇살이, 저 골짝엔 수묵화 한 점 덩그러니 내건 오솔길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아련한 마을들이 정겹게 엎드려있다.

인생길과도 같은 산길! 산길을 걸으면 비단길만 있는 게 아니다. 오르락 내리락 하다 보면 바위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난코스도 자주 만난다. 산봉우리에서 산봉우리로 바로 가는 길은 없다. 누구나 바닥에서부터 오르는 법이다. 때로는 돌 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깊은 수풀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처음에는 어느 골짜기나 다 낯설다. 아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세월의 켜가 온몸에 화인처럼 남아있다. 마디마디 삭풍과 타는 가뭄을 견딘 상흔으로 점철된 몸피가 애달프다.

길을 가던 나는 오한에 떨고 있는 노송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까맣게 옹이 뽑힌 그 아득한 시간의 틈새로 새떼들이 보이고 바람 부는 날이면 낡은 관악기 소리가 들리는 곳에 둥지를 틀고 있는 노송, 저문 날 꽃들의 유배가 하늘 길에 닿아있는 천년 서린 한에 검버섯 슬은 노송 앞에서 나는 문득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속담이 생각났다. 쭉쭉 벋은 소나무는 대들보 감으로 이미 뽑혀 갔지만 등이 굽은 나무는 땔감으로밖에 쓸모가 없어 아직도 남아있는 노송을 보며 조용히 귓속말을 전했다.

세계적인 명품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우스도 로키산맥의 3천 미터 수목한계선에서 자란나무로 만든단다. 모진 설한풍에 굽은 허리를 펼 날 없이 상처투성이로 박힌 옹이가 천상의 공명으로 맑은소리를 낸단다. 그때까지는 이 산을 지키며 기다려라.

사물의 정의는 생활과 문화의 트렌드에 따라 다르게 해석 된다. 먹고살기 급급했던 시대에는 꽃이나 분재에 눈 돌릴 새가 없었지만 삶의 질이 향상되어 집집마다 정원을 가꾸고 아파트마다 화분 몇 개씩은 들여 놓을 수 있는 살림이 되었다. 따라서 굽은 나무의 가치와 위상이 역전됐다. 이제 굽은 나무는 정원을 아름답게 꾸며주는 터줏대감이 되었고 굽은 나무분재는 칙사 대접을 받는다. 굽은 나무에 대한 가치와 인식을 백팔십도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굽은 나무의 옹이에서 인생의 간난신고를 읽는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은퇴를 한 후 전원생활을 꿈꾼다. 꿈을 실현하기 전원주택을 짓고 농지를 매입하고 제2의 인생을 구가한다. 등 굽은 소나무로 비유되는 터줏대감들은 귀농 귀촌인의 친절한 멘토까지 자임한다. 진정으로 고향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저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등 굽은 소나무의 주가는 상승일로에 있고 등 굽은 소나무가 있는 한 고향은 언제나 포근하고 청청하다.

산을 내려갈 때에는 뻣뻣하게 세우고 내려갈 수는 없다. 언제나 허리를 낮추어야 한다. 고개도 숙여야 한다. 허리를 낮추고 고개를 숙이고 산길에서 배운 진리를 되새기며 귀가를 했다.

* 박순희 수필가는 <한국문인> 으로 등단하였으며 행촌수필 문학상 수상을 수상했다. 현재 행촌수필 문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으며 수필집 <꽃으로 말한다> , <대체로 맑음>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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