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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 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양영두 소충·사선문화제전 위원장
양영두 소충·사선문화제전 위원장

1980년 5월, 나는 죽은 목숨이었다.

필자를 전국에 지명수배한 계엄사 합수부 수사단은 친·인척 지인들에게 “양영두 인생은 끝났다, 나타나거나 전화 오면 즉시 신고하라”며 던진 말이었다.

1979년 10·26사태로 독재정권이 끝나고 민주주의 봄이 왔다고 민주화를 타는 목마름으로 갈망했던 국민들은 기뻐했고 3김으로 대표되는 (김대중·김영삼·김종필) 지도자들은 경쟁을 통해 새로운 시대상을 열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 희망과 바램은 80년 5월에 무참히도 무너지고 짓밟혔다.

신군부의 준비되고 기획한 의도대로 헌법은 유린 되고 권력욕에 가득 찬 군부 실세들의 입맛대로 굴러가는 가운데 계엄에 맞서 민주! 자유를 외치던 광주를! 무참히도 살육하고 공포 분위기를 연출하며 권력을 쟁탈하였다.

광주시민, 전남도민은 주권자인 국민이 아니고 적이었다. 그 환란 속에 필자는 당시 10대 국회에 비서관으로 재직하며 신민당 정책위원이었다.

광주의 참혹한 진상은 보도관제로 세상의 눈에서 덮어져 있었고, 그 진실에 다가서기가 어려웠다. 세계의 언론들 한국 주재 특파원들이 추방되고 철저히 봉쇄되었다. 전국에 계엄이 확대하고 광주사태 발발 며칠 후 김대중 선생이 강제연행구금 이후 권노갑 비서실장, 유훈근 비서, 문화방송 PD 최성근 필자는 비밀 회합을 하고 미·일 대사관 관계자들과 연락을 취해 광주에 내려가 진상을 파악하기로 결의하고 결행 직전, 긴급수배되어 도피케 되고 나와 외교관들이 광주에 잠입게 되었고 광주시민군 관계자, 전남대 송기숙 교수, 인권변호사 홍남순 선생 가족, 계림동 거주 정운본(순창) 씨 등을 만나 참혹한 진상을 파악, 기록케 되었고 그 참상이 일본과 미국. 유럽 언론에 보도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직후 서울 거주 가족은 자택 연금되는 등 고초를 겪었고 가까운 전주 형제자매와 친인척·지인 친구들은 미행과 도청 계엄 당국에 연행되는 시달림을 당했다. 결국 전국에 지명수배 끝에 체포된 후 보안사 서울 남산 합수단 조사과정에서(잠 안 재우기. 각목 구타. 살점이 피가 터지는 고문을 받아 대·소변이 막혀 수경사 군의관의 긴급 의료조치를 받는 만신창이가 되는 1개월여의 모진 시간을 보냈다. 심하게 고문을 당한 것은 수배 중 도피처와 도와준 사람을 대라는 것에 끝까지 침묵하고 저항한 것이 원인이었다.

태어나서 그때까지 일생을 쓰라는 강요도 있었다.

얼마 전 김대중 대통령 장남 김홍일의원이 10년여의 고문 후유 투병을 마감하고 생을 마감했다. 나의 수배 사유 중 하나가 “김대중 자식과 비서와 함께 일본에 망명정부를 세우려는 혐의”가 있었고 그 이유로 나는 거물급으로(?) 취급되었고 당했다.

김 의원의 명복을 빌며 그때를 회상하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진보와 보수로 갈라져 국가의 이익에 반하는 진영논리로 나라가 온통 시끄럽다. 피와 눈물과 땀으로 지켜온 민주주의 가치가 훼손되고 있다.

공산적화통일은 반대지만 평화통일은 준비되고 실현되도록 전쟁 없는 세상을 일궈내야 하지 않겠는가 !

동학에서 3·1만세운동. 임정 수립. 4·19학생의거혁명 5·18민주화운동…

백의민족, 피를 먹고 지켜온 민주주의!! 5·18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양영두 소충·사선문화제전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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