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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길상 시인 - 로맹 가리 소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는 천의 얼굴을 가졌다. 콩쿠르 상을 두 번 수상한 작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투기 조종사, 영화감독, 배우 진 세버그의 남편, 유능한 외교관, 야생동물 보호주의자이며 모든 속박과 권위를 거부한 사회 개혁가이기도 했다.

전쟁과 불평등과 인간소외가 여전한 세상을 향하여 독설을 날리는 냉소주의자였고 반전주의자였고 반문명주의자였던 로맹 가리… 읽다 보면 가슴이 아리고 섬뜩하고 어딘가 씁쓸한 이야기들이 그의 삶만큼이나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 소설도 수수께끼 같은 인물들의 대화와 수많은 의문으로 가득 차 있다. 페루 해변에 카페를 차린 사내의 정체는 뭘까. 그 여자는 왜 이곳으로 죽으러 온 걸까. 새들은 왜 하필 페루에 가서 죽는 걸까. 다 읽고 나서도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왜 페루일까. 시베리아, 사할린, 아우슈비츠, 페루는 세상의 끝으로 통했다. 나치나 지배세력의 탄압으로부터 피신한 소수자나 약자들이 그 척박한 땅에서 정체성의 혼란과 전쟁의 후유증으로 죽어갔던 것이다. 그 누구보다 전쟁의 고통을 통감했던 주인공은 그런 기억을 떠올리며 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추동해온 제국주의자들의 근대적 이성과 합리주의에 독설을 내뱉는다.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프랑스에서, 스페인과 쿠바에서 큰 전투를 치른 후 ‘페루 해변’으로 몸을 피한 그는 전쟁과 지배권력에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 모든 것이 역겨웠다. 물질과 타락한 권력에 종속된 세상,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만행을 알면서도 죄의식 하나 없이 사람들은 시를 썼으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고” 식사를 했다. 그들은 도덕적 위기를 사치와 이기적 동기로 해결했던 것이다.

세상의 “위대한 사랑”을 비아냥거리며, 속물적인 그녀를 도와주면서 싹튼 사랑의 감정도 “고독의 아홉 번째 바다”일 뿐이라고 단정한다. 값싼 희망과 타협하려는 순간 그 죄의식이 그를 옥죄었던 것일까. 그곳은 죄의식으로 고뇌하는 그의 내면의 바닷가였던 셈이다. 자신을 박해하는 자와 동일시하던 그는 “이 새들이 모두 이렇게 죽어 있는 데에는”이라고 말을 잇다가 한숨을 내쉰다.

그 ‘새들’은 씁쓸한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 ‘조국’이라는, ‘정의’라는 이름의 폭력… 우리는 지금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일까. 로맹 가리는 결국 권총 자살이라는 실존적 선택을 했다. 이제 아우슈비츠, 시베리아, 사할린, 페루라는 집단적 죄악의 현장은 우리 몫으로 남겨져 있다.

 

이길상 시인은...

2001년 전북일보와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으며, 시창작과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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