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나는 30년 차이다. 자식의 장래에 대한 부모님의 배려 덕택에 도시로 유학을 했던 나는 방학 때면 시골 고향에 계신 부모님 댁으로 귀향을 했었다. 말 그대로 정겨운 귀향이다. 애타게 기다리던 부모들은 금쪽같은 자식이 오니 반가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반가움에 아무것도 가릴 것이 없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옛 속담은 값어치가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마음의 체온까지 더해주는 힘이 있다. 그 따뜻함은 항상 아름다운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거칠고 투박한 말 속에 더 깊은 애정이 숨어 있기도 했다. 방학을 해 고향에 가면 따스한 품에 폭 안긴 마음으로 늦잠을 자는 것이 일상이다.
갑자기 “야 이놈아! 뭘 꾸물대!”하는 엄마의 우렁찬 호출도 있어 남이 들으면 ‘헉’ 하고 눈살을 찌푸릴지 모른다. 하지만 내 귀에는 “사랑하는 아들아! 어서 일어나 밥 먹어라.”는 정겨운 소리였다. 즉 우리 집만의 기상나팔이요, 애정의 암호였다.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라는 말처럼 우리의 언어는 관계의 깊이만큼 확장되고, 그 관계 속에서만 해독되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말이 실감난다. 친구와 카톡할 때도 비슷하다.
내가 가끔 엉뚱한 소리를 하면 바로 날아오는 답장. ‘ㅋㅋㅋ, 진짜 지랄하네! 너 왜 이렇게 웃겨?’하는 그 말끝의 웃음과 ‘이모티콘’이다. 즉 비난이 아니라, 감탄이다. 밀어내기가 아니라 더 가까이 당기는 표현이다. 그 말이 없으면 오히려 허전하다. “어라, 오늘은 내 개그가 맛을 덜했나?” 싶을 정도의 서운함까지 느낀다.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말은 사물의 그림자다”라 했듯이, 투박한 말은 그 자체보다 더 큰 의미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오랜 시간 쌓아온 우리 사이의 깊은 정으로 맺어진 신뢰와 유대감이다. 인근 벽촌 시골에 계시는 외할머니 댁에 가면 그 애정표현이 더 지극해진다.
내가 조금이라도 수척해 보이면 버선발로 뛰어나오시며, “아이고 내 새끼! 어디가 아픈겨? 아이고 호랑이가 물어가도 모를 놈!” 하신다. ‘호랑이가 물어가도 모를 놈’이란 말 속에는 걱정이, 잔소리 껍질 속에는 사랑이 듬뿍 들어 있다. 호랑이를 내쫓는 주문이 아니라, 제 안위를 부적처럼 감싸는 할머니식 사랑의 언어다. 시인 김춘수는 그의 시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말했듯, 할머니의 거친 듯한 말투는 나에게 사랑의 꽃으로 피어난다.
할머니의 그 말씀들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나를 온전히 이해하고 아껴주는 마음의 표현이다. 어릴 적 에피소드지만 내 뇌리에는 아직까지 너무 생생하게 남아 있다. 30년이 지난 후 직장에 있을 때, 성격이 칼날 같지만, 애정 어린 상사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내 사업소 구역에 왔다. 여러 가지 준비하느라 조금 늦었는데, 표현할 수 없을 정도 의욕이 날아드는 것이다. 인격을 갖추어야 할 고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진짜 몰랐다. 죽도록 준비했는데 그렇게 핀잔을 받으니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그런 내색은 하지 못하고 시무룩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수행원이 내 옆에 와서 조용히 말해준다.
“회장님, 축하합니다.” 나는 화가 나서 “염장 지르냐?”고 했더니, 슬며시 나에게 다가와 귀에 대고 하는 말. ‘상대를 신임한다’는 사장님의 말투란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속으로 웃었는지 모른다. 사전은 말의 골격과 뜻을 가르쳐주지만, 상호 간의 말은 관계의 체온을 정한다.
다시 말하면, “사랑해”라는 말이 언제나 가장 따뜻한 건 아니다. 어떤 때는 “아유, 진짜 썩을 놈! 얼른 와!”라는 말투에 더 진한 유대감이 배어 있다. 그 말이 나에게 다가오는 동안 장난의 리본을 두르고, 정이라는 옷을 껴입었음을 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 ‘욕인 듯 욕 아닌’ 말들을 들으며 조용히 되뇌어 본다. 아, 나는 사랑받고 있구나!
Δ신백식 수필가는 전북대학교 겸임교수(공학박사) 한국전력 전북지사장 역임했다. 현재 은빛수필회원 전북애향본부 이사와 전북노인회 부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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