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양행견일기(沔陽行遣日記)
<면양행견일기(沔陽行遣日記)>는 온건개화파(穩健開化派)로도 불리는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이 충청도 면천(沔川)에 유배하면서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전해 들은 내용을 일일이 기록한 일기책이다. 김윤식이 저술한 <속음청사(續陰晴史)> 권7에서 안쪽 제목으로 「면양행견일기(沔陽行遣日記)」라고 되어 있는 부분에 동학농민혁명 관련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김윤식의 자(字)는 순경(洵卿), 호(號)는 운양(雲養)이며 숙부인 김익정(金益鼎)의 집이 있는 경기도 양근(楊根)에서 성장하였으며 유신환(兪莘煥), 박규수(朴珪壽)의 문인이었다. 1865년 음관(蔭官)으로 출사하였고 1874년 문과에 급제한 다음 홍문관 부응교, 부교리, 승정원 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876년 개항 이후 민씨척족 정권의 개화정책에 따라 1881년 영선사(領選使)로 청년 관리를 인솔하여 청국에 갔다가 1882년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 체결에 간여하였다. 그러다가 같은 해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문의관(問議官) 어윤중(魚允中)과 상의하여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개화파는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로 분기하고 김윤식은 온건개화파의 일원으로서 친청(親淸)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귀국 이후 개화 정책의 일환으로 설치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서 협판(協辦) 등을 역임했다. 1884년 10월 급진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에는 참가하지 않았고, 정변 이후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가 되어 조선의 대외관계를 담당하는 수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친청적인 태도는 조선 국왕 고종의 노여움을 사기에 이르렀고, 1887년 5월 부산첨사 김완수(金完洙)가 일본의 사채업자에게 통리교섭통사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약정서를 발급한 사건의 책임을 지고 충청도 沔川에 유배되어 5년 6개월을 지내게 되었다. <면양행견일기(沔陽行遣日記)>는 바로 이 때 기록한 일기다.
김윤식은 면천에 유배를 가 있을 동안 <면양행견일기>를 통하여 1893년 2월 23일에 있었던 동학당의 복합 상소를 소개하고 다음날 프랑스 공관에 교당의 개설금지를 위반했으므로 빨리 돌아가라는 내용의 괘서(掛書)를 붙인 사실, 완영(完營), 즉 전주 감영에 보낸 일본 배척(排斥)의 글 등을 기록했다. 또한 3월 하순에 벌어진 보은집회의 시말에 대해서 상세히 서술하고, ‘척양척왜(斥倭斥洋)’와 ‘보국안민(輔國安民)’ 등 동학당의 주장과 주도자들 및 해산 경위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한편 동시에 개최된 전라도 금구(金溝) 원평(院坪) 집회를 소개했다. 보은과 금구의 동학 집회를 해산하는 어윤중(魚允中)과 주고받은 편지도 전하고 있다.
다음 해인 1894년 4월부터는 동학농민혁명의 시말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6월 24일 일본의 내정개혁안을 기록해 둔 말미에, 5월 순변사(巡邊使) 이원회(李元會)에게 전라도 유생들이 보낸 원정서(願情書) 14개 조항 및 추가된 24개 조항을 열거해 놓고 있다. 그리고 6월 16일 교정청의 폐정개혁 실시안을 기록해 둔 것으로 보아 세 가지 입장에서 제기된 조선 사회의 폐단을 시정하려는 개혁안을 비교해 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94년 6월 12일 이루어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친일 개화파 정권이 성립하자 6월 26일에 김윤식은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올라왔고, 7월 4일 외부독판(外部督辦)을 거쳐 이후 외무아문(外務衙門) 대신을 역임하였다. 두 번째로 지낸 외교 부문의 수장이었다. 그러나 김윤식을 비롯한 친일 개화파 정권은 국왕 고종 및 왕비 민씨와 끊임없이 대립하였고, 결국 1895년 8월 일본군 및 일본 낭인들이 주도하고 조선군 일부가 가담한 을미사변에 연루되어 1896년 2월 아관파천 이후 제주목으로 종신 유배되었다. 1901년에는 지도(智島)로 이배되었다가 러일전쟁이 종료한 후 1907년 풀려났다.
이후 1910년 일본의 한국 병합과 함께 작위를 받기도 했는데,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대일본장서(對日本長書)」를 제출하여 그 작위를 박탈당하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1922년 그가 죽은 후 그에 대한 사회장(社會葬) 문제가 대두되기도 하였다.
△나암수록(羅巖隨錄)
<나암수록(羅巖隨錄)>은 경상도 예천(醴泉)에 기거하고 있던 박주대(朴周大, 1836~1912)가 고종 즉위 이후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벌어진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수록(隨錄)’인데, 저자의 호(號)를 앞에 덧붙여 <나암수록(羅巖隨錄)>이라고 한다. 원래는 분권(分卷)되지 않은 4책으로 저자의 수고본 그대로 현손 박정로(朴庭魯)가 소장해오던 것을 1980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재정리, 한국사료총서 제27호로 간행하였다. 이때 수고본 4책을 1책으로 합본하고, 난서(亂書)를 신활자로 새로 조판하였다.
이 책의 저자인 박주대의 자(字)는 계우(啓宇)이고 호가 나암(羅巖)이다. 그는 계유년(1873) 향시(鄕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끝내 관직에 진출하지 않고 은거하면서 고종대의 정황을 연차적으로 들은대로 기록하고 때로는 장계(狀啓), 소장(疏狀) 등을 전재하기도 하였다. 이 책은 모두 4책으로 되어 있는데 1893년에 해당하는 계사년조는 3책의 말미에, 그리고 1894년에 해당하는 갑오년조는 4책의 앞머리에 수록되었다.
<나암수록>에는 1893년 동학당(東學黨)이 완백(完伯), 즉 전라감사에게 보낸 상서문(上書文), 2월 교조(敎祖)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冤)을 요청하는 동학당의 상소가 실려 있고, 이에 대응하여 이단(異端)의 학(學)을 비판하는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 전승지(前承旨) 이남규(李南珪)의 소초(疏草), 영남유소(嶺南儒疏) 등이 실려 있다. 특히 보은집회 당시 동학교도들이 어윤중(魚允中)에게 보낸 글, 동학통문(東學通文) 등이 실려 있어서 이 시기 동학교도들의 요구를 살펴볼 수 있다. 이때 “왜양(倭洋)을 공격하는 자를 사특한 부류로 여기면, 어찌 개나 양과 같은 왜양과 강화(講和)하려는 자를 지극한 도리로 여깁니까?”라고 하여 강력한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의지를 드러냈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무장 동학도 포고문, 즉 「무장동도포고문(茂長東徒布告文)」의 전문이다. 1894년 3월 20일 전봉준과 손화중을 중심으로 한 4000여 명의 무리들이 전라도 무장에 모여서 포고문을 발포하고 봉기를 일으켰는데 이를 무장기포(茂長起包)라고 한다. 동학농민혁명 제1차 봉기의 시작이다. 여기에서 전봉준 등은 “우리들이 비록 초야의 유민(遺民)이나 임금의 흙을 갈아먹고 살고, 임금의 옷을 입으니, 국가의 위망을 좌시할 수가 없도다. 8도 전국이 마음을 같이하고 억조창생이 의리에 순절(殉節)하여 지금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輔國安民)으로 생사의 맹세를 삼는다.”라고 하여 강력한 보국안민의 의지를 나타냈다.
박주대는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 영남, 관동, 경기 등 전국에 걸쳐 동학농민군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는데, 특히 동학농민군의 남원취회(南原聚會)라던가 강원도 강릉(江陵), 경상도 영해(寧海), 의흥(義興), 경기도 안성(安城) 지방에서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활동을 수록하고, 그 자신이 살았던 예천 지방에서 벌어진 사건을 기록하였다.
이를테면 1894년 8월 10일 예천읍 사람들이 동학도 11인을 죽인 기록, 영남 동학 38접이 용궁(龍宮)의 군기를 탈취하여 예천읍을 공격하려고 도모한 정황, 이들이 8월 28일 예천으로 진격하여 전투를 벌이고 패배하여 여럿 살상당한 상황을 기재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경상우도의 동학도가 사방에서 구름같이 모여 상주(尙州), 선산(善山), 개령(開寧) 세 고을을 함락시켰으나 9월 28일 일본군이 이들을 공격하여 해산시킨 정황을 수록하였다. 여기에 박주대는 “동학도가 일어나는 초기에는 의리를 천명하고 왜국을 배척하였으나 초기 이후에는 이를 행하지 않고, 한갓 재물만을 탐내어 가는 곳마다 패배를 당함이 이처럼 심하였으니 애처롭다”는 감상을 남겼다.
<나암수록>은 1893년과 1894년에 걸친 지방 유생의 기록으로서, 청일전쟁 및 갑오개혁에 대한 소식은 물론 각 지방의 전문(傳聞)을 포함하여 동학농민군의 포고문(布告文), 통문(通文), 정부의 대책에 관한 자료가 같이 수록되어 있어서 동학농민혁명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소중한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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