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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41. 추석의 맛, 송편과 신도주

가을 저녁, 추석(秋夕)을 글자대로 풀이한 말이다. 가을 달 밝은 저녁을 뜻하는 낭만적인 뜻을 가진다. 음력 팔월의 한가운데 날이기도 한 추석은 가배(嘉俳), 한가위, 중추절(仲秋節)로 불리며 설날과 함께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이다. 또한, 대보름과 더불어 보름달을 상징으로 삼는 큰 명절로, 햇과일과 햅쌀로 빚은 음식을 만들어 한해 농사의 결실을 축하하며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속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옥토의 평야 지대에서 풍요로운 추석 명절을 지내는 우리 고장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추석의 유래에 대한 명확한 문헌 자료는 없지만, 고대로부터 있었던 달에 대한 신앙에서 그 뿌리를 추측할 수 있다. 낮의 태양만큼은 아니지만 환한 달빛은 적과 짐승으로부터 두려운 어두움을 걷어내는 더없이 특별한 존재였다. 그중 가장 큰 만월을 이루는 8월 15일인 추석이 큰 명절로 여겨진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추석이 우리 선조들의 대표 명절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으로는 신라인의 풍습을 기록한 중국 『수서(隨書)』의 「동이전(東夷傳)」에 제사 지내기를 좋아하며 8월 15일이면 왕이 풍류를 베풀고 관리들을 시켜 활을 쏘게 하여 잘 쏜 자에게는 상으로 말이나 포목을 준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 문헌에는 『삼국사기』에 8월 보름에 이르러 그 공(功)의 다소를 살펴, 지는 편은 음식을 장만해 이긴 편에 사례하고 모두 노래와 춤과 온갖 놀이를 하였으니 이를 가배라 한다.는 추석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있다. 추석을 대표하는 음식으로는 송편(松片)이 있다. 추석의 가을 맛은 송편에서 오고 송편 맛은 솔내에서 온다는 말도 있는데, 송편의 이름은 솔잎으로 찌기 때문에 붙여졌다. 십장생 중의 하나인 소나무는 신선들이 늙지 않는 약으로 먹었다 하여 장수를 상징하는 나무이다. 그 솔잎이 찍힌 모양이 멋스럽기도 하지만 솔향이 배어든 떡은 풍미가 있고 기능적으로는 쉽게 상하는 것을 막아주기도 한다. 음식이 상하기 쉬운 음력 8월 중순에 살균력인 강한 피톤치드가 들어있는 솔잎을 사용한 것은 우리 조상의 생활 속 지혜가 담긴 과학적인 한 수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세시풍속집인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팔월 추석에는 햅쌀로 송편을 빚어 차례를 지내고 조상의 묘를 찾아 성묘한다고 하였다. 이 풍습은 지금까지 전해 내려와 송편이 추석의 명절식이 되었고, 올해 가장 먼저 나오는 햅쌀로 빚는 추석의 송편을 오려송편이라고 한다. 솔잎과 함께 쪄내므로 송병(松餠) 또는 송엽병(松葉餠)이라고도 부르고 지역마다 조상 때부터 근방에서 많이 나는 재료를 활용해 송편을 빚어온 까닭에 특색있는 송편이 전해진다. 전라도 지역에는 모시잎 송편과 더불어 꽃송편도 잘 알려져 있다. 꽃송편은 치자와 쑥, 오미자, 도토리, 포도 등의 즙으로 화려한 색을 더해 꽃 모양을 만들어 찐 떡이다. 강원도에서는 산간지방에서 많이 나는 감자와 도토리로 송편을 투박한 모양으로 만들어왔다. 충청도의 호박송편은 밤호박을 삶아 멥쌀가루와 섞어서 익반죽한 다음 깨나 밤을 소로 넣고 찐 떡이다. 추석에는 송편과 더불어 햅쌀로 신도주(新稻酒)를 넉넉하게 빚어 조상에게 먼저 올리고 명절을 쇠러 오는 친척들과 이웃들에게 나누었다. 추석에 빚는 술인 신도주는 새(新) 쌀(稻)로 빚은 술로 신곡주(新穀酒)라고도 불린다. 조선 시대 세시풍속의 정착과 함께 처음 수확한 햅쌀을 이용한 신도주를 빚는 것을 시작으로 가양주(집에서 담그는 술) 문화가 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조선 시대의 규방가사인 『관등가(觀燈歌)』에 우리 님은 어디 가셨노. 팔월이라 추석날에 신곡주 가지고 성묘하러 아니 가시는고라는 구절에 신곡주가 등장하며, 조선 헌종 때 정학유가 지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중 팔월령(八月令)에도 송편과 함께 신도주가 등장한다. 팔월이라 중추가 되니 서늘한 아침, 저녁 기운은 가을의 기분이 완연하다. 귀뚜라미 맑은소리가 벽 사이에서 들리는구나 참깨 들깨를 수확한 후에 다소 이른 벼를 타작하고 담배 몇 줄 녹두 몇 말 등을 파는 것은 돈이 아쉬워서이랴? 장 구경도 하려니와 흥정할 것 잊지 마소. 북어쾌와 젓조기를 사다가 추석 명절을 쇠어 보세. 햅쌀로 만든 술(신도주)과 송편, 박나물과 토란국으로 조상께 제사를 지내고 이웃집이 서로 나누어 먹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중 신도주 추석에 빚는 신도주는 조상의 제사상에도 올리고 여럿이 나누어 마시던 풍습에 따라 가능한 많은 양을 얻을 수 있는 양조 방법을 택해야만 했다. 그래서 차례상에 올릴 청주를 뜨고 남은 술을 걸러 희뿌연 빛깔의 탁주로 만들었다. 추석 때 마시는 신도주를 백주(白酒)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러한 신도주에 대한 기록은 조선 후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소개되는데, 아쉽게도 술 이름만 수록되어 있을 뿐 제조 방법이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앞서는 문헌인 『양주방(釀酒方)』에는 술 빚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는데 햅쌀술이라는 신도주의 한글식 표기로 햅쌀 한 말을 가루 내어 흰무리떡을 찌고, 끓인 물 두 말을 독에 부어 흰무리 찐 것과 더울 때 고루 풀은 후, 다음 날 햇누룩가루 서 되와 밀가루 세 홉을 섞어 버무려두었다가, 사흘 후에 햅쌀 두 말을 다시 쪄서 식힌 후에 끓인 물 한 말과 함께 밑술과 합하여 두었다가 열흘 후 맑게 익으면 마신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런 술을 빚을 때 쌀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누룩이다. 예로부터 호남평야의 중심이 된 벼의 고을인 김제는 풍요로운 고장이었다. 쌀은 물론이고 좋은 술을 빚는데 필수품인 누룩도 김제에서 많이 유통되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의 한 사건으로 등장한다. 1493년 <성종실록>에 김제 군수 최반이 관의 물품을 도둑질하여 처벌된 죄목 중에 누룩 50관을 빼돌린 죄가 기록되어 있다. 당시 잘 발효된 좋은 누룩을 만들려면 많은 양의 물량과 인원이 동원되어야만 했다. 그러한 까닭에 상품의 누룩은 주로 관이 주도하여 만들면서 귀하게 다루었지만, 이익이 많아지자 점차 백성들도 누룩을 만들어 매매하는 예가 많아졌고 관청에서 빼돌리다가 중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인공적으로 누룩의 발효에 적합한 40도가량으로 온도를 조절하기 어려웠던지라 초복 직후에 만들어진 누룩이 가장 상품이었다. 중복과 말복 전에 만든 것을 그다음으로 좋은 누룩이라고 당나라의 농서인 『사시찬요』를 인용한 『산림경제』에 기록되어 있다. 가장 더운 여름 절기에 자연적으로 발효된 최상의 누룩과 질 좋은 햅쌀이 어우러져 최상의 신도주가 나올 수 있었다. 올여름은 그 어느 해보다 무더웠고 태풍이 한반도를 가로지르기도 하여 농민들을 시름에 젖게 했다. 그럼에도 어김없이 사과, 배, 밤 등 제철 과일도 나올 것이고, 황금빛 들판에서는 햅쌀이 수확되어 추석 명절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추석 송편을 잘 빚으면 예쁜 딸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는데, 송편은 하늘의 열매로 달을 상징하며 과일은 땅에서 나는 것으로 땅을 상징한다. 송편의 모양은 오므려서 빚으면 반달이 되고 오므리지 않으면 보름달 된다. 송편은 보름달의 모습이 아닌 반달 모양인데, 반달은 시간이 지나면 꽉 차는 보름달이 되기 때문에 조상들은 반달 모양으로 빚으면서 앞으로의 삶이 더 행복하게 채워지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 날만 같아라!란 속담이 있다. 한 해의 수확을 풍성하게 나누고 행복으로 채워갈 날들을 기약하는 즐거운 추석 명절이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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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13 19:48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40. 『심리록』에 담긴 죄와 공정한 판결

억울함이 없게 하라 법의 올바른 판결에 대한 태도이다. 조선 시대에는 일어나는 모든 살인사건의 경우 왕의 심리(審理)를 받고 최종 판결을 받았는데, 특히 정조는 죽은 자나 살아 있는 범인이 억울한 일이 없도록 진실을 밝히고, 오래전 판결 난 사건에도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재수사를 명령해 한 치의 억울함이 없도록 했다. 유독 살인사건 심리에 관심이 많은 정조는 본인이 심리한 사건을 모아 『심리록(審理錄)』을 편찬하게 했다. 『심리록』에는 전주(全州) 옥사(獄事)의 살인사건에 대한 기록이 있다. 물 대기를 다투다가 구타하여 죽게한 신적문 사건과 절을 하지 않은 광대를 때려 죽게한 주갑득 사건, 놋그릇을 잃어버리고 의심하여 불로 지져 죽게한 이기석 사건, 싸움 말리는 여인을 때려 죽게한 김명옥 사건 등이다. 모두 작금에도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의 유형이다. 그 중 양시돌이란 자가 한설운을 살해하고 목을 매어 자살한 것으로 위장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 있다. 목을 매어 죽었다는데 목을 매었다는 시렁의 높이가 목을 매기에 낮고, 시신에 목을 맨 자국이 없었으며 얼굴 등에 상처가 있는 것에 주목했다. <상처> 두개골이 붓고 딱딱했으며, 뺨에 구멍이 뚫리고 자암색(紫黯色)이었다. <실인> 얻어맞은 것이다. 범인인 양시돌이 진술을 번복하다 술을 마시고 다투다가 구타하여 살해한 것을 자백해 자살로 처리될 뻔할 사건의 진실을 밝혀낸 것이다. 당시에는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원나라 왕여(王與)가 시신을 검시(檢屍)하는 방법과 규정에 관해 쓴 『무원록(無寃錄)』을 토대로 세종시기에 조선의 상황과 법률에 맞도록 개편한 『신주무원록』과 영조시기의 『증수무원록』을 수사 지침서로 활용했다. 정조는 『증수무원록』을 보완해 한글본도 제작, 배포하여 철저한 검시와 체계적인 수사를 통해 억울한 희생이나 피해자가 없도록 엄정하게 진행토록 하였으며 이를 기록에 남겼다. 양시돌 사건 기록을 검토한 정조는 『무원록』에 죽은 뒤에 목을 맨 것은 빛깔이 백색이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애초 검험 때에는 어찌하여 이것을 기준으로 증거로 삼지 않았는가? 사실을 조사하여 장문하라고 지적을 하여 체계적인 수사를 하고 자살로 위장된 사건의 억울함을 풀게 했다. 정조의 『심리록』에는 살인범임에도 불구하고 왕이 그 뜻을 기리게 하고 무죄 판결을 내린 이례적인 기록이 있다. 강진(康津) 김은애의 옥사이다. 천하에 살이 에이고 뼈에 사무치는 원한으로는 정숙한 여자가 음란한 짓을 하였다는 모함을 받는 것보다 심한 것이 없다.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은 잘못이 없고 원수는 갚아야 한다는 것을 환히 알게 하였으며, 평범한 부녀자가 살인죄를 범하고 도리어 이리저리 변명하여 요행으로 한 가닥 목숨을 부지하길 애걸하는 부류를 본받지 않았다. 윤리와 강상이 없고 기절이 없는 자는 금수와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면 반드시 풍교에 일조가 될 것이다. 정조가 김은애 옥사를 판결하며 내린 말이다. 정조는 당시 이덕무(1741~1793)에게 김은애 옥사의 내막과 판결을 기록하게 하여 후세의 본보기로 삼고자 하였다. 그 서문에 상감(정조)께서 모든 옥안(獄案)을 심리하시다가 김은애를 살리게 하시고, 나에게 명령을 내려 「은애전(銀愛傳)」을 지어 『내각일력(內閣日曆)』에 싣게 하셨다고 되어 있다. 제목의 은애는 범인 김은애를 가리킨다. 전라도 강진에서 노파가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범인은 18세의 새댁 김은애로 밝혀졌다. 은애에게 목숨을 잃은 노파는 기생 출신의 몸에 부스럼이 있는 자로, 집이 가난하여 은애네 집에서 먹을 것을 자주 빌렸는데 은애의 어머니가 때로 거절하자 앙심을 품게 되었다. 노파는 친척인 최정련이 은애에게 마음이 있자 부스럼약 값을 받기로 하고, 정련에게 은애와 사통했다고 발설하면 혼인을 성사시켜 주겠노라고 약조한다. 이에 정련은 은애의 오빠에게 은애와 통정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노파는 은애와 정련에 관한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마을에 소문이 퍼졌지만, 김양준이라는 사람은 거짓 소문임을 확신하고 은애를 아내로 삼았다. 은애가 혼인을 한 후에도 노파와 정련은 추잡한 말로 은애를 모함했다. 살해되기 전날 노파는 사람들 앞에서, 은애가 배반하고 다른 데로 시집가는 바람에 정련이 약값을 주지 않아 자신의 몸이 더 망가졌으므로 은애는 원수라고 하였다. 그들의 계속된 시달림을 받은 은애는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자 칼로 노파를 무참히 살해했다. 그런 후 정련도 죽이려 했지만, 그의 집이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어머니가 말리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살인 후 관아에 자수한 김은애는 그동안 쌓였던 원한과 사건 내막을 밝히며 자신이 노파를 죽이긴 했지만, 관에서 자신을 무고한 노파를 벌한 것이 없으니 대신 최정련을 죽여 줄 것을 청하였다. 조사를 마친 강진 현감은 상황은 이해가 되나 사람을 죽였기에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고 했으며 좌의정에 이르기까지 같은 의견을 갖고 정조에게 최종 판단을 청했다. 하지만 정조의 생각은 달랐다. 정숙한 여인을 모함했으니 그 원통함이 살인에 이르게 한 것으로 판단했다. 정조는 김은애를 무죄판결하고 석방하도록 명한 후, 지방관에게 김은애가 최정련에게 복수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후 관련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최정련은 정조의 세심한 지시 덕분에 은애로부터 목숨은 부지했던 것 같다. 정조와 뜻을 같이했던 정약용은 살인사건에 대한 법의학과 판결을 종합해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유배지에서 남겼다. 한자 흠(欽)은 공경하다 존경하다는 뜻과 삼가다 구부리다의 뜻을 품은 것으로 『흠흠신서』는 법을 집행함에 있어 그 누구도 억울함이 없도록 정의롭게 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이는 법을 존중하면서도 죗값을 치르게 함에 있어 신중하고 공정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공정함과 마음까지 어우르는 판결을 주장하면서도 정약용은 관대한 처벌을 반대했다. 특히 술김에 벌어진 살인에 대해 관대하게 처벌하는 경향을 비판하면서 타고난 어리석음은 하늘이 만든 재앙이지만 술주정의 재앙은 스스로 지은 것이므로 이를 똑같이 용서할 수 없으며 이른바 주사(酒邪)로 인한 감경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술김에 지은 죄와 관대한 판결도 그렇지만 억울한 상황들은 과거의 일만이 아니다. 김은애 옥사와 양시돌 옥사처럼 원통함을 풀어주고 진실을 밝혀야 하는 일들은 시대만 달라졌을 뿐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성추행범으로 모함을 받고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사건과 수많은 미투 사건 그리고 약촌오거리 사건과 삼례나라 슈퍼사건 등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었다가 무죄로 밝혀진 사건들이 있다. 불공정한 판결이나 적폐에 의해 신뢰가 무너진 일들은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통해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하며 선조들의 현명한 판결을 살펴보고 복기하여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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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30 18:48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39. 가을보양식, 남원의 추(鰍) - 흔하지만 영양 만점…서민들 원기 북돋운 '효자 음식'

더위에 지친 몸을 추스르기 위해서 많은 이들이 보양식을 찾는다. 보양식의 보양은 잘 보호하고 기른다는 뜻의 보양(保養)과 양기를 북돋워 준다는 보양(補陽)의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대표적인 보양식으로는 민어, 장어, 닭, 미꾸라지, 보신탕 등이 있다. 여름철 귀한 보양식으로 알려진 민어는 7, 8월에 많이 잡히는 어류로 허균의 『도문대작』에 민어 등은 서해안 전역에서 두루 많이 잡히기 때문에 별도로 언급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어 여름철 반가의 특별한 보양식으로 보기 어렵다. 대표적인 보양식인 삼계탕은 1960년대 무렵 대중화된 음식이다. 조선시대의 삼은 원래 자연산 산삼이었는데 영정조 시대에 가삼(家蔘)의 양식 재배가 시작된다. 덕분에 인삼이 비교적 흔해졌지만, 나라에서 인삼을 엄격히 관리했기 때문에 인삼이 들어간 삼계탕을 보양식으로 널리 먹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논두렁이나 냇가에서 잠깐의 수고로 얻을 수 있는 재료로 해먹을 수 있는 서민들의 보양식도 있었다. 여름을 지나며 가을에 먹는 보양식으로 알려진 남원의 대표 음식 추어탕이다. 미꾸라지를 한문으로 추(鰍)라 하는데, 이는 물고기 어(魚)와 미꾸라지가 우는 소리인 추(秋)를 합성한 의성어라는 설과 가을(秋)에 먹는 미꾸라지가 통통하고 맛이 좋아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미꾸라지를 칭하는 다른 한자 이추(泥鰌, 泥鰍)에서는 진흙 니(泥)를 쓰는데 이는 진흙 속에 사는 물고기라는 의미이다. 추어탕은 영양학적으로 장어에 버금가는 보양식이지만 원래는 양반들이 먹지 않는 음식이었다. 이 때문에 궁중음식을 소개하는 조리서에는 추어탕의 제조법은 물론 명칭을 찾아볼 수 없다. 미꾸라지가 선조들의 식재료로 쓰였다는 흔적은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확인할 수 있다. 1123년 작성된 기록에는 당대 고려의 생활 풍속들을 살펴볼 수 있는데 고려에는 양과 돼지가 있지만 왕공이나 귀인이 아니면 먹지 못하며, 가난한 백성은 해산물을 많이 먹는다. 미꾸라지(鰌), 전복, 조개, 진주조개, 왕새우, 무명조개, 대게, 굴, 거북손이 있고 해조인 다시마도 귀천 없이 좋아하는데라며 모두 11종류의 해산물을 기록했고 그 첫머리에 미꾸라지(鰌)가 등장한다. 10종류는 바다에서 나오는 것들이고 미꾸라지만 민물에서 잡는 것이었다. 미꾸라지가 하천이나 논에 흔하므로 서민들이 오래전부터 먹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다른 문헌 기록으로는 중국 명나라 때에 이시진(1518~1593)이 쓴 『본초강목(本草綱目)』에 그 특성이 등장한다. 미꾸라지는 배를 덥히고 원기를 돋우며 술을 빨리 깨게 하고 정력을 보하여 발기 불능에 효과가 있다 양기(陽氣)에 좋고, 백발을 흑발로 변하게 한다며 그 효능을 기록하고, 미꾸라지는 무리의 으뜸이 되려는 습성이 있고 움직이고 요동치기를 좋아하는 성품이므로 두목처럼(酋:두목 추) 튼튼하고 잘 움직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는 성(性)이 온(溫)하고 미(味)가 감(甘)하며 속을 보하고, 설사를 멎게 한다고 미꾸라지가 가진 효능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가 널리 알려져서인지 추어탕은 가을뿐 아니라 사계절 원기회복의 음식으로 인기가 많다. 추어탕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밋구리탕과 추두부탕(鰍豆腐湯)이다. 밋구리탕은 서유구(1764~1845)의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 나온다. 미꾸라지를 이추(泥鰍)라고 하고 한글로 밋구리라고 쓰며, 살은 기름이 많고 살찌고 맛이 있으며 시골 사람들이 이를 잡아 맑은 물에 넣어두고 진흙을 다 토하기를 기다려 국을 끓여 먹는데 특이한 맛이라고 했다. 밋구리탕은 미꾸라지 살을 곱게 만든 다음 된장 푼 물에 넣고 끓여 오늘날 추어탕의 원형으로 추정된다. 추두부탕은 이규경(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등장한다. 진흙과 모래가 섞인 계류에서 잡은 미꾸라지를 물 담은 항아리에 넣어두면 머금었던 진흙을 토해낸다. 하루 세 번 물을 갈아주며 5~6일 계속한다. 이 미꾸라지 50~60마리와 두부 몇 모를 물과 함께 솥에 넣고 불을 때면 물이 점점 뜨거워지면서 미꾸라지들이 열을 피해 두부 속으로 촘촘히 박혀 들어간다. 불을 계속 때면 물이 끓어 미꾸라지가 익는다. 미꾸라지가 사이사이 박힌 두부를 썰어 참기름으로 지져서 먼저 끓이고, 메밀가루와 계란을 풀어 넣고 저어가며 섞어준다. 재료가 어울리게 탕을 끓이면 맛이 아주 좋다. 이 탕이 요즘 서울의 반인들 사이에 성행한다. 이렇듯 19세기 중엽 추어탕은 상류 계층의 음식이라기보다는 서민들의 음식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추어탕은 끓이는 방식에 따라 미꾸라지를 갈지 않고 통으로 넣는 서울식과 미꾸라지를 삶아서 얼망에 걸러내거나 갈아 끓이는 남도식으로 나뉜다. 미꾸라지를 갈아 넣은 남도식 남원 추어탕은 남원 운봉 지역의 무시래기를 주재료로 넣어서 된장을 풀어 들깨와 초피(젠피, 산초)를 넣어 구수한 탕으로 끓여 만든 남원의 대표적인 향토 음식이다. 남원은 지리산과 섬진강을 끼고 있어 청정한 물이 흐르는 지역이다. 계곡을 따라 남원 곳곳으로 흐르는 하천에는 풍부한 퇴적층이 형성되어 있어 미꾸라지를 비롯한 민물고기가 많다. 남원 지역 주민들은 가을 추수가 끝나면 겨울을 대비해서 보양 음식으로 살이 통통히 오른 미꾸리나 미꾸라지를 논두렁이나 수로에서 잡아 시래기와 함께 끓여 먹었다. 같은 추어탕의 재료로 쓰이나 원통형의 몸으로 동글이로 불리는 미꾸리가 몸이 옆으로 납작하여 납작이로 불리는 미꾸라지보다 맛이 좋다. 가을철에 서민들이 주로 먹던 추어탕이 사계절의 보양 음식으로 이해되면서 남원 향토음식이 되었다. 또한 지리산에서 나는 산채와 토란대, 고랭지 푸성귀를 말린 시래기와 각종 나물, 남원 추어탕에 들어가는 향신료 초피를 쉽게 구할 수가 있어 남원은 추어탕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지역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남원에서 추어탕이 상업화된 것은 1950년대로 섬진강 하류 하동 출신의 서삼례가 1959년 요천가 광한루원 주변에 억새풀집 지붕을 얹고 새집이란 추어탕집을 내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인근에 추어탕집들이 생겨나며 남원 추어탕은 음식 브랜드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형성된 추어탕 거리는 전국적인 향토 음식의 거점 지역으로 인정받으며 2012년 음식테마거리로 지정이 되었다. 현재 남원에는 약 50여 개의 추어탕 음식점이 분포해 있다. 하지만, 수요에 비해 자연산 미꾸리와 미꾸라지가 귀하고 남원산 미꾸라지 양식도 부족한 실정이다. 옛 문헌에 나온 미꾸라지 조리법을 계승하면서 젊은 층도 선호할만한 음식으로 발전시키는 연구가 필요하며 남원 문화의 중요한 한 축으로 지속시키기 위한 노력과 관심이 필요하다. 생명력이 강한 미꾸라지는 추운 겨울에는 동면하고 온갖 험난한 자연환경에도 잘 자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어, 미꾸라지 천년에 용 된다란 속담이 있다. 오랫동안 노력하면 훌륭하게 된다는 의미로 쓰인다. 서민의 음식으로 논두렁에서 잡아 끓여 먹던 남원의 추어탕이 전국적으로 인정받는 향토음식의 대명사가 되며 지역의 자산이 되었다. 여름 더위에 지친 몸을 위해 가을철 최고의 보양식인 추어탕을 찾아 남원으로 원기회복을 하러 가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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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16 19:06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38. 남원빙고와 진안풍혈 - 자연이 내린 선물…선조들도 한여름에 겨울 즐겼다

덥다. 폭염이 극성이다. 숨이 턱턱 막히는 불볕더위가 이어지자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무더위를 식혀주는 얼음덩어리와 얼음물을 제공하는 지자체가 늘고 있다. 더위 나기는 예나 지금이나 같아 선조들도 찬 바람이 나오는 시원한 장소를 찾았고, 나아가 겨울철 얼음을 여름까지 보관하는 방법을 고민하며 얼음 창고인 빙고(氷庫)를 만들었다. 지금이야 얼음을 언제든지 얻을 수 있고 에어컨과 선풍기로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지만, 과거에는 천혜의 자연조건이 아니라면 많은 공이 필요한 게 얼음이었다. 이와 관련 있는 남다른 장소로 우리 지역에는 남원의 빙고와 진안의 풍혈이 있다. 여름에 얼음을 얻는 것에 대한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전의 일로 중국에는 진시황이 빙고를 사용했다는 기록과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 관련 기록과 유적이 남아 있다. 신라 지증왕 6년(505년), 겨울 11월 처음으로 담당관에 명하여 얼음을 저장하게 하였다(冬十一月 始命所司藏氷).라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에도 유리왕이 장빙고(藏氷庫)를 지었다.고 하고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에는 얼음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관아인 빙고전(氷庫典)을 두었다고 했다. 또한 백제는 세종의 나성리, 화성의 상남, 공주의 정지산, 부여의 구드래, 익산의 금마 등의 유적에서 빙고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고려시대부터는 장빙(藏氷, 얼음을 떠서 빙고에 넣는)하고 개빙(開氷)할 때 사한제(司寒祭) 혹은 기한제라는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으며 얼음을 나누어주는 반빙(頒氷)제도가 있었다. 또한 충렬왕(1297년) 때는 모든 백성도 얼음을 저장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장빙법을 실시하였다. 조선시대 1396년(태조 5년)에 이르러서는 한강변에 동빙고(東氷庫, 현 서울 옥수동과 동빙고동)와 서빙고(西氷庫, 현 서울 서빙고동)를 두어 예조에서 직접 관장하였고 궁궐 내에는 내빙고(內氷庫)를 두어 얼음을 저장했다. 4치 이상(약 12~14㎝)의 두께로 채빙한 동빙고의 얼음으로 종묘에 제향을 올렸고, 동빙고보다 규모가 큰 서빙고의 얼음은 왕실에서 쓰고 차등배급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는 얼음을 깔아놓은 쟁반에 포도를 담아 시원하게 먹으며 연산군이 남긴 시구 얼음 채운 파랑 알이 달고 시원해/옛 그대로인 성심에 절로 기쁘네/몹시 취한 주독만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병든 위 상한 간도 고쳐 주겠네가 기록되어 있다. <효종실록>에는 더운철에는 얼음과 제철 과일을 때때로 들여보내 주어 병나는 것을 면하게 하라는 기록이 남겨져 있어 왕이 무더위 병나는 것을 염려해 얼음을 하사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왕의 종친, 문무 당상관, 70세 이상의 퇴직 관료에게 얼음을 나눠 주고, 빈민 구제치료를 맡던 관청인 활인서(活人署)에 있는 환자들, 의금부전옥서의 죄수들에게도 얼음을 내준다라는 규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여름철 얼음은 왕실과 상류층의 사치품으로도 사용되었지만 애민과 구제에 적극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방의 빙고도 채빙이 수월한 하천변에 만들어 운영했는데, 남원의 요천변 남원빙고에는 특별한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왜적들의 악랄한 만행에 관해 요천변에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노스님이 혼잣말하며 사람들 곁을 지나고 있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한 사람이 노스님에게 달려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묻자, 스님은 요천변 바위에 굴을 파고 겨울철 꽁꽁 언 요천의 얼음과 남쪽 지방에서 나는 백급(白芨)이라는 약초를 구해다 가루를 내어 굴속에 넣어두면, 내년 여름에 요긴하게 쓰일 데가 있을 것이다라고 일러 주었다. 스님의 말에 따라 요천변 산기슭에 동굴을 파서 겨울철 요천에서 채취한 얼음을 가져다 동굴에 채우고 백급가루를 함께 넣어 두었다. 이듬해 8월, 정유재란(1597년) 때 왜적들이 쳐들어와 남원성이 함락되며 많은 이들이 죽고 부상자도 속출했다. 부상자들을 치료할 약이 없어 애가 타던 때에 동굴에 넣어둔 얼음과 백급가루로 피 흘리는 부상자들을 치료했다는 이야기이다. 동굴에 얼음을 보관하였던 일대를 빙고치라 불렀으며 지금도 요천 인근 산책로에는 빙고로 쓰였던 동굴 입구를 살펴볼 수 있다. 빙고뿐 아니라 얼음골로 유명한 곳은 밀양의 얼음골, 의성의 빙혈, 울릉도의 나리분지 내 에어컨굴과 진안군의 풍혈냉천 등이 있다. 그중 진안 양화마을(전북 진안군 성수면)에는 한여름에도 찬 바람이 나오는 동굴인 풍혈(風穴)과 차가운 석간수(石澗水)가 나오는 냉천(冷泉)이 있다. 풍혈냉천이 소재한 마을 이름이 양화(陽化)인 것은 겨울에 눈이 내렸을 때 이 마을에 내린 눈이 가장 일찍 녹아 생긴 이름이고 이는 인근에 온천이 나오는 것과 관련 있는 듯하다. 대두산 기슭에 있는 풍혈은 여름엔 냉풍이, 겨울에는 온풍이 바위틈 구멍에서 나오며 바람의 길인 굴을 통해 구멍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니 지질학적으로 가치 있는 곳이다. 냉천은 섭씨 4도의 찬물이 솟아나 얼음물처럼 차고, 이 물은 조선시대 명의 허준이 약을 달이던 물이라 전해지며 피부병과 위장병 등에 특효가 있는 약수로 알려져 있다. 동네 사람들은 이곳을 냉장고 없던 시절부터 음식을 저장하고 더위 나기 장소로 사용하며 천연냉장고, 천연에어컨이라 불렀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의 차가운 성질을 이용해 잠종(蠶種, 누에씨) 보관소로도 이용했다. 1911년 8월 23일 자 신민일보에는 진안에서 풍혈이 발견되어 잠종을 저장하기로 했다는 기록이 있다. 진안군에 새 풍혈 : 원래 누에씨는 시원한 곳에 두어야 명년까지 보존할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 아는 바이나, 근일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재화잠, 삼화잠등은 온도 4도 이하가 아니면 2~3개월도 보존하기 어려우므로 잠종저장소를 장려하는 나라들은 재산을 들여서 인공으로 제작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천연 잠종저장소를 대구에서 한 곳 찾고 최근 진안군에서 한 곳을 발견하였다 하니, 우리나라는 여러 방면으로 보배스러운 근원이 많이 있는 것을 가히 알겠다. 현재 진안은 풍혈에 보관된 잠종을 받아 잠업을 이어가는 농가도 사라졌고, 풍혈은 원불교 종단 소유의 사유지로 여름철 한시적으로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방된 상태이다. 또한 남원의 빙고는 승월대와 연결하여 달빙고라는 이름으로 칠월칠석에 보관된 요천의 얼음을 나눠 먹고 더위를 식혔다라는 이야기의 안내판이 걸려있고 노승과 관련된 이야기는 전설로만 남아 있다. 1896년에 폐지된 동빙고와 서빙고는 본모습이 사라졌지만 그 이름은 팥빙수 가게의 상호로도 남아있고, 18세기 초 만들어진 빙고 중 경주, 안동, 창녕, 영산, 청도, 달성 그리고 북한의 해주 등 7곳에 설치한 석빙고가 남아 있는데 남한 내의 6곳은 모두 보물로 지정되었다. 자연이 내린 선물인 진안의 풍혈은 지질학적 연구와 더불어 훼손되지 않게 보존하여 지역의 귀한 자산이 되도록 함께 힘을 모으고, 남원의 빙고 또한 지역민의 구제와 더위 나기에 지혜를 모은 의미를 되살려야 한다. 그리고 어느 해보다 무더운 여름, 한여름에 얼음을 나누던 선조의 마음과 애민의 지혜를 따라 더불어 건강하게 지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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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02 20:07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37. 함열산 조선음식 소개서 도문대작 - 미식가·문장가 허균, 유배지서 조선의 진귀한 맛을 읊다

여름이 한창이다. 본격적인 더위를 알리는 초복을 시작으로 보신 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음식에 대한 관심은 사실 시기를 가리지 않고 뜨겁다. SNS를 비롯한 각종 미디어에는 먹방 BJ, 맛집 블로거들이 등장했고, 단순히 먹는 것을 넘어서 대중에게 영향을 끼치는 스타급 음식평론가들이 주목받고 있다. 그 맛칼럼니스트의 원조격으로 조선시대 유명한 음식평론가가 있다. 함열(咸悅, 현 전북 익산시 함라)에서 조선 팔도 음식 소개서인 『도문대작(屠門大嚼)』을 저술한 허균이다. 평생 먹을 것만 탐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스스로 칭한 허균(許筠: 1569~1618)은 『홍길동』의 저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허균은 아버지 초당(草堂) 허엽과 형 허성, 허봉 그리고 여동생 허난설헌과 함께 허 씨 오문장가(五文章家)로 불린다. 그의 아버지 허엽은 강릉에 살면서 바닷물을 간수로 사용해 두부를 만드는 법을 개발한 자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까지도 그의 호를 딴 초당두부는 강릉의 명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가풍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음식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허균이다. 그가 함열에 머물며 우리나라 팔도의 명물 토산품과 별미음식에 대하여 저술하게 된 이유도 분명하게 남아있다. 죄인 허균을 함열현(咸悅縣)으로 귀양 보냈다. 허균은 총민함과 문장의 화려함이 근래에 견줄만한 자가 없지만, 망령되고 경박하며 또 행실을 단속하지 못하였다. 얼마 전 과장(科場)에서 부정을 행하였다가 잡혀 들어가 신문을 받았는데, 이때에 이르러서야 허균이 죄를 자백하니, 법률에 따라 단죄하여 전라도 함열 땅에 정배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에 과거시험관이었던 허균이 조카와 사위를 부당하게 합격시켜 그 죄로 전라도 함열 땅으로 귀양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배지 함열은 허균이 자원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가 함열로 자원한데는 33세 때 전운판관(轉運判官)으로 호남에서 조운(漕運)을 감독하며 그 지역에 익숙한 까닭도 있다. 또한, 그의 다른 생활 근거지였던 부안과 가까웠으며, 당시 친분이 두터웠던 함열현감 한회일(韓會一, 인조대비 인열왕후의 오빠)과도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죄를 짓고 바닷가로 유배되었을 적에 쌀겨마저도 부족하여 밥상에 오르는 것은 상한 생선이나 감자들미나리 등이었고 그것도 끼니마다 먹지 못하여 굶주린 배로 밤을 지새울 때면 언제나 지난날 산해진미도 물리도록 먹어 싫어하던 때를 생각하고 침을 삼키곤 하였다. 다시 한번 먹어보고 싶었지만, 하늘나라 서왕모(西王母)의 복숭아처럼 까마득하니, 천도복숭아를 훔쳐 먹은 동방삭(東方朔)이 아닌 바에야 어떻게 훔쳐 먹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종류별로 나열하여 기록해 놓고 가끔 보면서 한 점의 고기로 여기기로 하였다. 쓰기를 마치고 나서 『도문대작』이라 하여 먹는 것에 너무 사치하고 절약할 줄 모르는 세속의 현달한 자들에게 부귀영화는 이처럼 무상할 뿐이라는 것을 경계하고자 한다. 신해년(1611, 광해군3) 4월 21일 성성거사(惺惺居士)는 쓴다. 『도문대작』의 책명은 위나라 조식(曹植, 조조의 셋째 아들)이 『여오계중서(與吳季重書)』에서 푸줏간 앞을 지나며 크게 씹는 시늉을 함은 고기를 비록 못 얻어도 귀하고 또 마음에 통쾌해서다(過屠門而大嚼, 雖不得肉, 貴且快意)라고 한 데서 따왔다. 푸줏간 문을 향해 입맛을 다신다.라는 작명으로 이는 실제 먹지 못하고 먹고 싶어 흉내만을 낸다는 자족의 의미이다. 그가 조운을 관리하던 시절 귀한 음식으로 대접을 받은 기억으로 선택한 유배지가 막상 죄인이 되어 귀양살이하자 사정이 달랐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옛날에 먹었던 산해진미들이 떠올랐을 것이며 음식의 고마움을 넘어선 그리움에 그리고 부귀영화의 허망함에 대한 심정으로 미식가다운 체험기를 기록한 것이다. 허균의 호인 성소(惺所)를 따 그의 옛글을 정리한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총 26권)》 <설부(說部)>편에 수록된 『도문대작』에서는 병과음식(떡 종류) 11종목, 채소와 해조류 21종목, 어패류 39종목, 조수육류 6종목, 차, 술, 꿀, 기름, 약밥 등 조선 팔도의 명품 토산품이 적혀있다. 또한 서울의 계절 음식 17종과 방풍죽, 차수(칼국수), 두부 등 지역별 별미 음식이 소개돼 있다. 『도문대작』의 서문에서 식욕과 색욕은 본성이며, 먹는다는 것은 더구나 생명과 관계되는 것이다. 선현들이 먹는 것을 바치는 자를 천하게 여겼지만, 그것은 먹는 것만을 탐하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를 지적한 것이지 어찌 음식을 제쳐 두고 음식 얘기는 하지도 말라는 뜻이겠는가?라는 말로, 맛있는 음식을 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며 기존의 규범에 어긋나지 않는 일임을 강조한다. 『도문대작』에 나온 음식들은 허균이 직접 맛본 체험을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 우리 집은 비록 가난했지만, 선친이 살아계실 때 사방에서 별미 음식을 예물로 보내는 이들이 많아 어린 시절 진귀한 음식을 두루 먹어보았다라 하고 부잣집에 장가가 산해진미를 다 맛보았다라고도 써 놓았다. 그래서인지 당시 팔도의 이름난 음식을 적어 놓은 책 『도문대작』에는 음식의 맛과 향에 대한 설명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 음식을 맛있게 먹었던 장소나 그 지방에서 그 음식을 잘 만드는 사람이 누구인지와 같은 것들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도문대작』에 나오는 지역 음식은 공물로 바치는 음식이 주류를 이룬다. 왕실을 핵심으로 여겼던 조선시대의 제도가 그 뒤에 숨어 있는 것으로, 임금에게 바치는 것이 중심이 되고 일반 백성이 좋아하고 상업적인 것은 뒷전이었던 당대의 사회상이 담겨 있다. 그러다 보니 허균이 『도문대작』에서 꼽은 전라북도의 특산으로는 변산의 작설차, 전주의 생강과 크고 달다고 표현한 승도(천도복숭아)와 색이 복숭아꽃 같은데 맛이 매우 좋다고 표현한 부안과 옥구에서 나는 도하(桃蝦,도하새우)와 부안의 것으로 그늘에서 말린 녹미(사슴의 꼬리) 등을 뽑았다. 『도문대작』에 소개된 음식들은 당시에도 맛보기 힘든 진미들로 상류층의 식생활을 살필 수 있으며 시대가 변해 이제는 찾기 힘든 식재료에 대한 기록들도 상세하다. 이는 일제강점기 대중잡지 『별건곤(別乾坤)』에서 소개한 진품(珍品)명품(名品)천하명식팔도명식물예찬(天下名食八道名食物禮讚) 등 조선시대 이후 글들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끈 유명음식을 중심으로 소개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미식가이자 문장가인 허균의 삶 속에서 그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족적이 우리 지역에 남아있다. 부안 기생 매창과의 인연으로도 알려진 허균은 음식과 문화적 향유를 남달리 즐겼지만, 가장 힘들었던 시절 그가 자조하며 남긴 기록을 통해 과거를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익산시는 국가식품클러스터로 지정되었고, 그가 입맛을 다셨을 푸줏간의 터도 함열 동헌터 인근에 어렴풋이 전해져 내려온다. 당시의 식생활에 대한 고증 자료로서 가치가 있는 『도문대작』과 이를 기록한 곳인 함열에 남은 허균의 자취를 지역의 자산으로 가져야 한다. 또한, 되풀이되는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그가 겪었던 당대의 생활사도 세세히 살펴보며 그에 담긴 멋과 교훈도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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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19 19:53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36. 금강 하구에 깃든 최무선의 기상 - 100척 배로 500척 왜구 물리친 600여년 전 함성 들리는 듯

해망(海望), 바다를 바라본다는 의미가 담긴 군산의 아름다운 지명이다. 하지만 해망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지도와 문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1932년 옥구군 미면 신풍리 일부가 군산부에 편입되면서 비로소 해망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금강하구와 서해가 만나 지리적으로 조운이 활발했던 이곳은 일제 수탈의 현장이었으며 625 전쟁 후에는 피난민들의 집단촌이 있던 곳으로 민족의 애환이 담긴 장소이다. 집단촌이 사라진 지금은 일제강점기 수탈의 통로로 만들어진 해망굴(국가 등록문화재 제184호)이 625 전쟁 때 생긴 총탄 자국을 지닌 채 남아있다. 하지만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민족에게 더없는 큰 힘이 되어 준 곳이기도 하다. 바로 최무선 장군이 100척의 배로 500척의 왜군을 물리치는 대승을 거둔 진포대첩(鎭浦海戰)의 기개가 서린 자랑스러운 장소가 그 일대다. 최무선(崔茂宣, 1325~1395년)은 군인이자 과학자였다. 그가 화약을 만들고 진포대첩을 승리로 이끈 활약상은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 7권』에 최무선의 졸기로 기록되어 있다. 검교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 최무선이 졸(卒)하였다. 무선의 본관은 영주요, 광흥창사 최동순의 아들이다. 천성이 기술에 밝고 방략(方略)이 많으며, 병법(兵法)을 말하기 좋아하였다. 고려조에 벼슬이 문하부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말하기를, 왜구를 제어함에는 화약만 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최무선은 우리나라에서 화약과 화약을 사용한 무기를 처음 만들어 사용한 인물이다. 그가 화약과 무기를 만들게 된 계기는 고려 말, 왜구의 잦은 침략과 노략질을 보고 이를 막기 위함이라고 전해진다. 『태조실록(太祖實錄)』에 잘 기록되어 있듯이 최무선은 일찍부터 기술에 밝고 방략이 많았으며, 병법을 논하기를 좋아했다. 특히 각 분야의 책을 섭렵했으며 중국어에도 뛰어나 다양한 문물을 접하기 좋은 자질을 갖추었다. 일찍이 화약에 관심을 가진 그는 화약을 만드는 재료인 초석(硝石)유황분탄 중에서 유황과 분탄은 쉽게 구할 수 있으나 초석(염초)을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렵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불꽃놀이와 무기에 사용된 화약과 화포(火砲)가 있었으나 화약 제조에 필요한 염초를 얻지 못해 수입하는 염초에 의존하고 있었다. 화약의 주요 재료 중 하나인 염초는 진토(塵土)에서 채취했는데, 중국은 그 방법을 극비로 하여 우리나라에는 그 기술을 아는 이가 없었다. 최무선이 직접 화약을 만들기로 결심한 때 중국은 원나라가 명나라에 넘어가는 혼란의 시기라 화약의 관리가 소홀한 시점이기도 했다. 화약의 제조법을 배우기 위해 최무선은 직접 중국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벽란도(碧瀾渡, 개성 인근 예성강하구 국제무역항)에 가서 초석의 제조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았다. 그러던 중 화약에 대한 지식이 많은 중국(원나라) 상인 이원(李元)을 알게 된다. 최무선은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후하게 대접하면서 화약 제조에 대한 집념을 보이며 설득을 했다. 최무선의 진심에 감명받은 이원은 초석을 추출하는 방법을 전수해주고 중국으로 돌아간다. 그 뒤 최무선은 홀로 실험하며 여러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초석을 추출해 화약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최무선은 각종 화약을 이용한 무기 개발에 몰두하며 화통도감(火筒都監)의 설치를 여러 번에 걸쳐 조정에 건의했다. 결국 1377년(우왕 3년) 10월 화통도감이 설치되었고, 오랜 바람을 이룬 그는 3년간 화약 무기를 개발하고 병사들이 화약을 잘 이용할 수 있도록 포병부대를 양성하였다. 또한 무거운 화포와 포탄을 싣고도 견딜 만한 튼튼한 군선을 만들어 화약 무기와 훈련된 병사, 군함 등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그러던 중 1380년(우왕 6년) 8월 내륙으로 침입할 목적인 왜구가 500여 척의 군선을 이끌고 진포(금강하구, 지금의 전라북도 군산과 충청남도 서천군 일대)로 접근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최무선의 화기를 시험해 볼 만한 기회라며 최무선을 부원수로 임명해 참전토록 했다. 원수 나세(羅世)를 필두로 심덕부와 최무선이 지휘하는 고려군의 수군은 왜선에 비해 5분의 1밖에 안 되는 군선 100여 척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왜군은 500여 척의 거대한 규모로 위협적인 전세를 펼쳤으나, 화포로 무장한 고려 수군은 대규모 함포 공격으로 적선 500척을 모두 섬멸했다. 진포대첩에서 배를 잃은 일부 왜군이 내륙으로 퇴각하였으나 이를 추격한 이성계에게 남원 운봉 일대에서 섬멸되었으며 훗날 조선의 태동을 이끈 영웅담으로 기록되었다. 대승을 거둔 진포대첩은 고려군이 자체 제작한 화기로 거둔 승리였고, 군선에 최초로 화포를 장착하고 함포 전술에 따른 공격이 감행된 해상전투였다. 서양의 최초 함선으로 알려진 베네치아 해군의 초대형 군용 갤리선인 갈리아스선(Galleass)이 활약한 레판토해전(1571년)보다 200여 년이 앞선 진포대첩은 세계 최초의 함포해전이었다. 이로 인해 해상전투의 획기적 변화를 이뤄낸 최무선은 염초의 채취법과 화약의 제조법 등을 기술한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 『화포법(火砲法)』 등을 저술했지만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지혜와 용맹함을 아꼈던 조선 태조 이성계는 그가 죽자 그를 총리(원수)로 추서했다. 최무선이 진포에서 왜구를 물리친 그해 아들 최해산(崔海山, 1380~1443년)이 태어났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최무선은 부인 이 씨에게 아들이 장성하면 이 책을 주라면서 화약제조의 비법이 적힌 책을 남겼다고 한다. 최무선이 71세로 죽었을 때 최해산의 나이는 불과 15세였지만, 최해산은 아버지의 비법을 전수받아 화약 제조법을 습득했다. 최무선의 뜻을 이은 최해산 역시 태종과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병조참판의 벼슬에 오르고 화약 병기를 비롯한 군 장비를 보강하고 발전시켰다. 최무선 장군의 기개가 깃든 금강하구 일대는 수많은 세월의 풍파를 거친 곳이다. 지금의 해망굴 옆에는 해망자연마당이 자리잡고 있는데 언덕에 올라보면 군산과 서천의 바닷길을 잇는 교량이 눈에 들어온다. 이 교량은 원래 군장대교라 불리다가 동백대교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다. 군산과 서천을 상징하는 꽃이 동백이어서 동백대교라 칭했다고 하지만 동백에서 바로 금강하구의 장소를 연상하기 어렵다. 동백이 유명한 남해안의 여타 지역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해상교량 중에는 지역에 그 흔적을 남긴 위인의 얼을 받들어 사람 이름이 교량의 이름이 된 곳이 있다. 광양과 여수를 잇는 이순신대교와 완도의 장보고대교가 그런 곳이다. 다리 이름만 들어도 그 지역에서 활약했던 위대한 조상의 업적과 지역의 역사를 직관적으로 알게 되는 작명이다. 군산과 서천을 잇는 해상교량의 이름이 동백대교라 확정이 되었다면, 그 일대에 역사적으로 큰 자취를 남긴 최무선 장군을 기려 최무선대교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해망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모습과 더불어 위대한 최무선 장군이 이룩한 이로운 기상도 품고 지역과 사람을 이어주는 희망찬 곳이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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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05 21: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35. 유형원의 숙원, 부안에 깃든 마음 - 초야에 묻힌 위대한 실학자, 국가가 나아갈 길을 말하다

매번 책을 펴서 볼 때마다 그 규모가 크고 식견과 지취가 높은 것에 대해 감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같은 시대에 살면서도 만나 보지 못한 한스러움을 견딜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저도 모르게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며 세상에 이런 위대한 사나이가 있었음을 비로소 믿게 되었습니다. 애석하게도 초야에 묻혀 끝내 죽을 때까지 이름을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슬프고 한탄스럽습니다.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집필한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접한 선비 윤증과 이현일의 심정을 담은 글이다. 살아생전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사회구조 개편이 절실한 시기 개혁의 방향과 대안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정리함으로써 정약용과 이익을 비롯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실학을 집대성하는 데 모범이 되었다. 그 위대한 업적을 세운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완성하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문 부안에는 그의 발자취가 짙게 남아 있다. 유형원은 지금의 서울 정릉에서 유흠(1596~1623)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2살의 나이에 부친이 유몽인과 연루된 광해군 복위설에 휘말려 옥사하여 조부인 유성민(柳成民)과 외가의 보살핌 아래 성장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다양한 학문에 대한 식견이 높았으나 부조리한 현실과 타협하며 벼슬할 생각이 없었던 그는 당대 정치의 폐해를 혐오하였으며 실생활에 유용한 실학을 연구하고 정치 개혁을 꿈꾸며 사색을 즐겼다. 훗날 진사시에 급제하고 진사가 된 것도 조부의 명에 의한 것이라 전해진다. 관직에 관심 없는 유형원은 그의 나이 32세가 되던 때 조부상을 마치자 부안현 우반동(현재 보안면 우동리)으로 내려간다. 우반동은 조선 개국공신인 유형원의 8대조 할아버지인 유관이 공을 인정받아 나라로부터 받은 토지가 있는 곳이다. 유형원의 나이 15세 되던 해에 조부가 땅 일부를 팔 때 쓴 토지매매 문서(부안김씨 종중 고문서 보물 900호)에 이 전답은 나의 6대조이신 우의정 문간공께서 태조조에 개국공신으로 책봉되어 왕으로부터 받은 사패지이다 (중략) 내(川)를 기준으로 그 서쪽은 그대로 두어 나의 농장으로 삼고, 내의 동쪽에 있는 집과 전답은 모두 김홍원에게 방매한다.는 내용이 남아있다. 유형원은 선대의 얼이 깃든 우반동을 아껴 그곳을 반계(磻溪)라 칭하고 자호로 삼고 초가에 기거하며 민초들의 삶을 보살피고 산 중턱에 반계서당을 열어 제자 양성과 학문에 전념하였다. 제자 김서경은 스승 유형원을 위해 지은 행장에서 대나무 숲 가운데 초가집을 짓고 수백 권의 책을 모아 놓았다. 네모난 모자에 가죽 혁대를 차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마음에 새기고 깊이 생각하면서 정미한 내용을 연구하였다라고 그의 삶을 기록했으며 유형원도 골짜기마다 깊숙이 오솔길 비스듬하고 / 반계에는 굽이굽이 복사꽃 떠 온다 / 산에 사는 사람은 스스로 만족한 생애라 여기니 / 긴 대나무 숲이 구름에 잠겨 있다는 시구로 그의 마음을 그렸다. 유형원은 우반동의 삶을 만족해하며 자호인 반계(磻溪)에 완성하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대로 수시로 기록한다는 뜻의 겸손한 표현으로 수록(隧錄)이라 하고 『반계수록』을 완성한다.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통해 알리고자 했던 것은 당대의 불합리한 상황과 이를 개혁하기 위한 실천적 방법이었다. 농업을 중요시한 실학자 이다 보니 『반계수록』의 많은 부분이 토지 문제와 그에 대한 해결 방안을 다루고 있다. 토지는 천하의 근본이다. 이 근본이 바로잡히면 모든 제도가 다 바로잡히는 것이요. 이 근본이 문란하면 모든 제도도 따라서 다 문란해지는 것이다라 하며 토지제도를 바로잡아 백성의 생활을 안정되게 하고 정치와 교육을 바로세울 것을 강조했다. 유형원은 이어서 교육제도와 과거제도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과거제도가 출세의 도구가 됨을 비판하고 과거 위주의 공부보다 나라와 백성에게 도움이 될 실질적인 연구와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관직 임명도 관료의 임기제를 철저하게 지켜 행정의 실효성을 꾀하고, 왕실을 위해 설치한 많은 관청을 대폭 축소하여 국가 재정을 안정시킬 것을 주장했다. 『반계수록』 본문 뒤에 이어지는 속편에서는 당시 노비제도의 문제점을 언급하며, 노비세습 제도의 폐지를 위한 전 단계로서 종모법(從母法)을 실시해 노비의 숫자를 줄여나가자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유형원의 뜻은 그의 생활에서도 여실히 반영되어 농업에 대한 연구를 하였고, 지주로서 많은 곡식을 축적하여 적극적으로 빈민들의 구제에 활용하였다. 유형원은 또한 군대를 강화하여 침략자들을 격퇴하고자 하는 군사학에도 관심을 두어 축적한 재산으로 큰 배 4~5척과 말과 조총, 활 등 무기를 장만하여 자신의 노비들 및 동네 사람들과 함께 사적으로 훈련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총 26권 13책인 『반계수록』은 토지제도를 다룬 전제와 교육과 선발에 대한 방법을 다룬 임관, 관리의 녹봉 체계를 다룬 녹제, 국가 체계를 다룬 직관, 군사제도를 다룬 병제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속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형원은 짧고도 길었던 52세 일생 여러 분야 각 방면 실학 연구에 몰두하면서 방대한 양의 연구를 했지만, 많은 저서가 멸실되었고 그에 대한 평가는 미흡하기만 하다. 그의 숙원이 오롯이 담겨있는 『반계수록』이 당대 현실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이에 대한 해법을 내놓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사후에 인정을 받았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을 1652년 쓰기 시작해 유형원이 49세 되던 해인 1670년(현종 11년) 완성하였으나 사본으로만 남아 있다가 완성으로부터 100년 후인 1770년(영조 46년) 이 책을 보고 크게 감탄한 영조의 왕명에 의해 공식적으로 간행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정조는 마치 100년 전에 살면서 오늘날의 일을 환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중략) 그 사람이 품은 생각은 실로 대단하였다라 하였다. 이렇듯 유형원은 영조와 정조의 극찬 속에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지침이 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유형원의 유허지(전라북도 기념물 22호)엔 그의 정신을 대변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가 새겨진 글을 따라 산기슭에 난 산책길을 오르면 그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우물터와 복원된 반계서당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옛 지명인 우반동(愚磻洞)은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일제에 의해 우동(牛東)으로 개명되었고, 유형원의 고택도 터만 남아있으며 세상을 떠나 묻혔던 묘 역시 후손들이 용인으로 이장을 해 그 흔적만 남아 있다. 더욱이 그의 미래인 지금의 상황에도 지침이 될 위대한 실학자 유형원의 업적과 가치는 아직도 저평가된 상태이다. 그에 대한 학술적 재조명을 꾸준히 이어가고 더불어 관련된 유산들 역시 올곧이 복원되고 훼손된 지역의 이름도 되돌려 지역의 자산과 정신으로 이어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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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21 20:57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34. 과거의 핫라인, 봉수 - 민족이 바라는 희소식만 전해져 봉화 불빛처럼 퍼져나가길

2018년, 한반도를 둘러싼 다이내믹한 변화들로 뉴스를 따라잡기 벅차다. 각 매체의 뉴스는 물론이고 각종 SNS를 통해 소식을 접하며 일희일비하고 있지만, 이렇게 즉각적인 소통을 누리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몇 세기 전만 해도 대부분의 소식을 인편을 통해 접했고, 국가 방위와 관련된 소식을 전달할 때는 봉수(烽燧)를 올려 상황을 전했다. 당시 통신수단인 봉수는 말 그대로 불을 이용한 선조들의 핫라인이었다. 봉수의 봉(烽)은 밤에 불을 피우고, 수(燧)는 낮에 연기를 올려 연락하는 것을 합쳐 일컫고 봉수를 올리는 설비인 봉수대(烽燧臺)는 봉우리 봉(峰)이 아닌 봉화의 봉(烽)자를 따서 불렀다. 봉수는 고대 중국과 일본에서도 행한 것으로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 의종 때 봉수제가 확립되기 시작했고 봉수대의 시설도 이 시기 확충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의 봉수제는 고려의 봉수제를 계승하여 태종대에 이르러 시행하였고, 세종 시기에 들어 봉수제가 정착되었다. 봉수대는 목적과 형태에 따라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 봉수인 경봉수(京烽燧)에서 조선 시기 해안을 살피기 위해 단기간 운용한 요망대(瞭望臺)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봉수대는 지형의 조건에 따라 배치와 시설의 유형도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대부분 산봉우리에 위치한 봉수대는 산짐승의 피해와 바람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축조되었으며 거화시설인 연조(煙竈) 등을 비롯하여, 번(番)을 서는 봉수군의 생활과 업무를 위한 가옥과 우물, 창고 등 부속시설을 갖췄다. 우물이 없는 봉수대는 마을에서 물을 길어 와야 했고 근무지가 험지에 있는 탓에 인근 마을 주민들을 봉졸로 뽑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봉수대에 상주해 교대로 번을 서며 불을 피울 수 있는 재료를 수거 비축하고 망을 살피고 소식을 불과 연기로 매일 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이곳은 자체방호에 필요한 무기와 비품을 갖춘 요새지였다. 봉수는 위급함만을 경고하는 것만 아니라 매일 무사 평안함을 알리는 정기 보고에 쓰였다. 봉수대의 굴뚝을 5개로 두었고 규모에 따라 굴뚝이 하나인 곳은 시간을 조절하여 불이나 연기를 올려 신호했다. 세종 시기의 『경국대전』 규정에 의하면, 평상시 평안함을 표시하여 매일 올리는 봉수를 1거, 적의 모습이 나타나면 2거,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3거, 국경을 넘어서면 4거, 접전하면 5거를 올리게 되어 있다. 그리고 비나 구름으로 신호를 할 수 없을 때는 화포 혹은 나팔소리를 이용하거나 직접 파발로 알렸다. 하지만, 봉수군의 근무 태만에 따른 무지와 착오 등 신호오류와 적의 기습을 늘 염려하며 성종 시기에는 한꺼번에 긴급사항을 올리게 하는 등 시기에 따른 변동을 겪었다. 조선의 봉수는 경흥(함경도), 동래(부산), 강계(평안도), 의주(평안도), 순천(전라도)의 5개 봉수대 기점으로 하여, 한양 목멱산(서울 남산)의 제1봉에서 제5봉의 봉수대로 집결되어 승정원을 통해 왕에게 보고되었다. 한양인 서울을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지역에 1, 3, 4로의 노선은 중국과 몽고 등을 경계하고 남부지역에 2, 5로인 2개의 노선은 주로 일본의 침입을 경계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조선의 봉수망은 5개로인 직선 봉수를 보조하는 간선 봉수를 운영하며 대략 640여 개의 봉수대가 설치되었다. 전라북도에는 삼국시대부터 쓰인 봉수대의 흔적이 지역 곳곳에 남아있는데, 조선 시기 제5봉의 노선 직봉이 부안 계화(界火)면 계화산(244m)에 있다. 계화도의 계화산은 사방 조망이 확 트인 곳으로 서해로부터 침입하는 적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내륙을 다니던 선박들을 감시하기 용이하여 고려시대부터 봉수대가 설치되었다. 계화산 봉수는 전라우수영 소속의 해안선을 연결하는 연변봉수로 순천에서 출발한 봉수를 이어받아 충청도를 거쳐 한양 목멱산인 남산에 전달되는 중간에 위치한 거화선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부안편)에는 계화도 봉수는 북쪽으로 만경현 길관 봉수에 응하고 남쪽으로 점방산에 응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부안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한 봉수대가 있었던 까닭에 계화산을 봉화산으로도 불러왔지만, 기능을 잃고 풍파를 겪으며 훼손되었고 암자를 짓기 위해 봉수대가 파손되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섬이었던 계화도도 1963년 대규모 간척공사로 육지와 이어졌고 훼손되었던 계화산 봉수대는 1995년 부안군에서 복원하여 부안향토문화유적 제9호로 지정했다. 진안에는 1977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된 태평봉수대가 성재 봉우리(830m)에 있다. 태평봉수대는 삼국시대인 백제 때 처음 축조되었다고 전해지며, 이후 조선시대 중기 1595년(선조 28년)에 태평산성과 전주감영에 신호를 보내기 위해 보완을 하여 재축조되었다. 산봉우리에서 남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룬 자연 암반 위에 잡석으로 축조하여 남쪽이 북쪽보다 약 1m 정도 높게 쌓았으며 전체 높이는 4~5m, 둘레는 대략 32m 정도이다. 태평봉수대는 동서 어느 쪽으로든 수도 방어의 길목으로 통하는 요충지에 있어, 동남쪽에 있던 장수군 장안산 봉화를 승계하여 북서쪽의 완주군 탄현성을 연결하는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태평봉수대는 네모난 축대가 원래의 모습을 유지한 채 남쪽과 서쪽 벽이 훼손된 상태였으나 동쪽 편의 돌계단과 함께 보수되었다. 봉수는 오랜 시간 일상의 무사함을 알리고 위급할 땐 신속히 경고해준 선조들의 연락망이었다. 하지만, 정유재란과 임진왜란 등 왜적의 침입에 제 역할을 못 하고 일부 왜적들에 의해 훼손되자 무용론이 대두되었다. 이후 전화통신제도의 도입으로 1894년(고종 31년) 봉수제도가 폐지되자 기능을 잃은 봉수대는 유구만을 남기고 돌무더기로 변한 채 대부분 방치되었다. 일부 복원된 봉수대들도 본래의 기능을 담거나 고증에 의한 모습을 재현하지 못했다. 북한지역에 있던 봉수대들도 625전쟁 시 폭격과 북한군의 군사시설물이 설치되면서 훼손되거나 멸실된 것으로 전해진다. 선조들이 남긴 역사의 산물인 봉수대가 그 가치에 따라 올곧이 복원되어 지역의 자산이 되고 산을 찾는 이들에게 이정표와 쉼터로 활용되었으면 한다. 과거의 핫라인인 봉수와 달리 오늘날 핫라인은 전화와 인터넷을 중심으로 즉시 정보가 전달되고 이슈에 따라 사람들의 관심이 오고 간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나누면 배가 되고 나쁜 소식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란 말은 예나 지금에도 통하는 이치일 것이다. 한반도의 운명을 가를 일들에 우리 민족이 바라는 희소식만이 전해져 평안한 일상을 빛냈던 봉화의 불빛처럼 반짝이며 퍼져나가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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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07 20:26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33. 폐허로 남은 그 터, 고군산진 - 지친 이순신 장군 품어준 곳, 이젠 주춧돌만 덤불 밑 흙 속에

“이봐, 자네들 수로대장(이순신)은 어디로 갔나?” 왜군 신칠량이 통역을 통해 강항(姜沆, 1567-1618)에게 물었다. “알고 싶소? 태안 안행량(安行梁)은 예로부터 물길이 험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야. 이름이라도 좋아야 한다고 안행량이라 한 거지. 그곳으로 말하자면 배가 가는 대로 꼬꾸라지는 망나니 같은 물길이지. 그러기에 그곳을 피해 그 옆길로 명나라 장군이 수만 척을 끌고 내려오는데 벌써 군산포에 와 있다 하더이다! 우리 통제사(이순신)는 워낙 수가 모자라 한때 물러섰지만, 명나라 수군과 합세하여 곧 내려올 걸세!” 명량해전에서 참패를 당한 왜군들은 전열을 다시 가다듬은 후 설욕하기 위해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포로로 잡힌 자들 중에 의복과 처신이 벼슬아치 같다고 여긴 강항을 골라 취조하며 물었다. 그러자 강항은 왜군을 따돌릴 양 반 협박조로 명나라 수군에 대한 풍문을 부풀려 보탰고 지레 겁먹은 왜군들은 결국 뱃머리를 돌렸다. 당시 기지 있는 답변을 한 강항은 강희맹의 5대손으로 문과로 급제해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호조참판의 종사관으로 남원에서 호남 지방의 군량을 모으고 보내는 일을 했다. 그러다 남원이 왜군에 함락되자 격문을 띄워 함평, 순창에 이르기까지 의병을 모았지만 고향 영광마저 왜군들의 손에 넘어가자 식솔들을 데리고 피난을 가던 중 왜군에게 생포되었다. 그리고는 일본으로 끌려가 1600년 귀국하기까지 3년여의 포로 생활을 했다. 강항은 “적지에서 임금에게 올린 글로 주상전하께 엎드려 아뢰나이다”라고 하고 자신이 겪은 일들과 적국의 실태를 국익을 위해 세세히 기록하여 비밀리에 본국에 보냈다. 앞선 대화도 그 안에 수록된 글로 강항은 적지에서 체험한 기록을 『건차록(巾車錄, ‘건차’ 죄인이 타는 수레)』이라 책명을 지었으나 후에 제자들이 『간양록(看羊錄)』으로 고쳐 놓아 지금껏 전해지고 있다. 당시 왜군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던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 직후 서해를 거슬러 올라와 고군산진이 있는 선유도에 정박하고 12일간 머물렀다. 이곳에서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의 승전보를 장계로 꾸며 조정으로 올려보냈으며 수군들과 휴식을 취하고 배를 수리하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스스로 ‘천행(天幸)이었다’라고 한 명량해전에 온 힘을 쏟은 후 긴장이 풀린 탓인지 이순신 장군은 고군산에 있는 동안 자주 아팠다. “21일 맑다. 일찍 떠나서 고군산도에 이르렀다. 호남 순찰사는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배를 급히 타고 옥구로 갔다고 한다. 늦게 바람이 미친 듯이 불었다… 23일 맑다. 싸움에서 이겼다는 장계 초본을 수정하였다… 몸이 좋지 못하여 끙끙 앓았다… 밤에 몹시 좋지 않고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몸이 좋지 않아 하루 내내 나가지 않았다…” 『난중일기(원명 정유일기)』에 기록된 말이다. 일기에서도 엿보이듯이 반년 남짓한 기간에 투옥과 고문, 모친의 죽음, 목숨을 건 전투를 연이어 겪다 보니 몸이 급격히 쇠약해졌을 것이다. 비로소 한숨 돌리듯 자신을 추스르며 수군과 휴식을 하는 동안 가족을 챙기려 아들 회를 아산으로 보낸다. “2일 맑다. 아들 회가 배를 타고 올라갔는데 잘 갔는지 모르겠다. 이 마음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랴! 3일 맑다. 새벽에 배를 띄워 변산을 거쳐 법성포로 내려가는데 바람이 부드러워 따뜻하기가 봄날 같았다…” 이순신 장군이 고군산에 머무르던 12일의 시간은 몸을 추스르는 시간이었으나 아산의 본가가 왜적들의 분탕질로 잿더미가 됐다는 비보를 들으며 마음과 몸이 아팠던 시간이었다. 『간양록』에도 기록되었듯이 당시 왜적들의 만행은 해안가는 물론이고 조선 내륙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백성들을 무참히 살육했다. 이순신 장군의 행방을 놓친 왜군의 수군들은 육지의 왜군들과 합세하여 보복하며 아산의 이순신 장군 본가에 화풀이했다. 육지 쪽 사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이순신 장군은 10월 3일 12일간의 휴식을 마치고 고군산진을 출발해 남하했고 이듬해 1598년 11월 지금의 남해 앞바다인 노량해전에서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한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고군산’으로 처음으로 등장한 고군산진(古群山鎭)은 조선 후기 1624년(인조 2)에 군산 지역의 해상 방어를 위해 군산도(현재 선유도)에 설치한 수군진이다. 고려와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군산도(群山島)라고 불린 이곳은 고려시대 대외 교류의 관문으로 외교사절이 머무는 객관(군산정(群山亭))을 운영했으며 조선 태조 6년에 수군 만호영을 설치했고, 선조 2년에는 수군절제사가 파견됐다. 임진왜란 이후 군산 지역의 군사적, 경제적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자 군산진은 운송을 전담하게 하고, 군산도에 수군 진을 하나 더 설치하여 방어를 전담하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지게 된다. 이에 따라 1624년(인조 2) 별장(別將)을 파견하고, 진의 이름을 기존 진포에 설치된 군산진과 구별하고자 ‘고군산진’이라고 칭한다. 군사적 중요성에 비해 고군산진이 설치된 초기에는 방패선 1척만 배치될 정도로 그 규모나 전력이 미약하였지만, 점차 필요에 의해 강력한 진이 되었다. 전성기에 1,000명 이상의 수군이 주둔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군산진은 크게 번창을 하였고, 고군산진 부근의 주민들도 돈을 받고 수군 역에 종사하게 되면서 타 지역의 사람들보다 훨씬 풍요로운 생활을 누린 것으로 보인다. 1864년에 편찬된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고군산 주민들의 경제적 상태를 “주민들은 모두 부유하고 집과 의복, 음식의 호사스럽고 사치스러움이 성읍(城邑)보다 훨씬 더하다.”라고 기록하였고 고지도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1872년 만경현 고군산진지도』에서 건물의 종류와 배치 살펴볼 수 있고 『호남진지』와 『여지도』에서도 규모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번창하던 고군산진은 설립한 지 271년 만인 1895년 해체되고, 수군진이 없어진 1909년에 내각 총리 대신이었던 이완용의 주도 하에 지방 관청 건물들과 함께 고군산진터 역시 일반인에게 매각되었다. 당시 매각된 선유도 진말의 수군진은 일제강점기인 대략 1930년경 커다란 노거수에서 시작된 불이 번져나가 소실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순신 장군이 전쟁을 치른 뒤 지친 마음과 몸을 쉬인 그 고군산진터는 이제 도자기 파편과 주춧돌만을 남긴 채 덤불 속에 애달프게 남아있다. 이순신 장군의 행로를 추적하지 못하게 한 강항 선생의 『간양록』도 일제강점기 금서였다가 해방 후 빛을 보며 수록된 시가 조용필의 노래 ‘간양록’으로 불리고 있지만, 아직 그 진가가 덜 알려진 책이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전쟁의 피폐한 환란 속에서 세세한 기록을 남긴 『난중일기』와 『간양록』을 살펴보며 선조가 알리고자 한 과거를 복기해봐야 한다. 고군산진터의 소실에 관한 이야기도 들리는 바에 의하면 땅 주인이 진터를 포크레인으로 다듬은 후 산사태가 났고 남아있던 주춧돌과 진터의 흔적들이 민가 위 밭으로 보이는 곳까지 밀려 내려와 묻혔다고 한다. “그 진말의 집들이 나무의 불에 옮겨 탔는지 부서졌는지 잘 모르겠지만, 불 난 그 큰 나무의 밑동을 잘랐는디 이무기 같은 큰 구렁이가 있었댜~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지다 귀경하고 그랬댜~ 그기 진터 원쥔이 그 뭐가 되려던 이무기였던 것 갑소. 이래 봐도 여그가 이순신 장군이 대승하고 쉬었던 진말이여!” 아름다운 선유도의 해변 길을 앞에 둔 고군산진터는 수많은 사연을 품고 거친 모습으로 남아있지만 진말 어르신의 기억 속에 전설이 되었고 지역의 자부심임엔 분명하다. 특별한 안내판도 없이 언덕에 자리해 모르면 지나칠 곳이다. 폐허 안에 묻힌 그 터를 감히 지역의 자원이라고 말하기가 참으로 송구하고 마음이 아프다. 해상교량으로 섬들이 이어지며 고군산을 찾는 방문객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봄을 지나 여름이 되면 고군산 일대가 휴가객들로 북적이게 될 것이다. 그곳에 가거든 아름다운 풍광 뒤꼍에 있는 고군산진터를 살펴보자. 오래전 전쟁에 지친 이순신 장군을 품고 우리를 지켜낸 고군산진터를 올곧게 돌이켜야 한다. 그리고 선조들이 남겨둔 치유의 장소인 그곳에서 우리도 살아갈 힘을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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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17 20:38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32.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땅의 힘 - 산 많은 진안·장수, 18·19세기 조선시대 최상품 담배 재배지 명성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 아주 먼 옛날 옛적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단골 구절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으레 시작하는 그 말로 옛날이야기 들려주시면 재미있었지만, 호랑이가 진짜 담배를 먹었는지 피웠는지가 늘 궁금했다. 아주 오래전 짐작도 할 수 없는 옛날 이야기란 의미를 담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이야기로 시작되었다고도 하고, 담배가 유행인 시대에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고 담배를 즐기니 호랑이도 담배를 피운다 할 그 시절을 의미했다고도 하며, 전북지역을 중심으로 구전된 효자 황팔도란 담배 피우는 호랑이로 변신한 효자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호랑이 변신에 관한 이야기는 중국 문헌에도 많이 수록된 이야기로 당나라의 장위가 엮은 『선실지(宣室志)』에도 등장한다. 중국에서 호랑이의 변신하는 이야기에 대한 이유가 아무 설명 없이 도교적 느낌이 강한데 반해, 우리나라의 호랑이 변신 이야기는 효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변신설화인 효자 황팔도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어머니 병환을 위해 스님이 일러준 비법에 따라 주문을 외워 호랑이로 변신해 황구를 잡아 어머니의 병구완을 했던 효자가 황팔도이다. 비책을 보며 밤에 몰래 나가 호랑이로 변하는 남편을 무섭고 못마땅하게 여긴 아내가 비책을 불태워 버려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화가 난 황팔도가 아내를 해치고 호랑이 모습으로 다녔다. 그 호랑이를 두려워 한 사람들이 궁리를 내었고 가까이 간 어릴 적 친구인 포수를 만나자 호랑이가 친구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며 신세 한탄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한 번쯤 들어봄직한 호랑이 이야기도 그렇지만, 전북 일대에 호랑이 담배 피우는 이야기가 구전된 이유 중의 하나는 진안과 장수가 조선 최고의 담배 산지로 유명하니 담배 피우는 이야기가 섞여 전북과 충남 일대까지 퍼져나갔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담배 도입 시기를 살펴보면 그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기란 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오랜 옛날이 아닌 빨라야 16세기나 17세기 경 임을 알 수 있다. 연초, 남령초, 남초, 담바고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 담배의 유입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임진년(1592)이나 광해군 때인 16081618년 왜초(倭草)란 이름으로 일본에서 들어왔거나, 중국을 내왕하던 사람들에 의하여 서초(西草)로 도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5년(1623)의 기록을 보면 동래 왜관에서 화재가 발생해 80칸을 모두 태웠다.라고 나와 있는데, 화재 원인에 대해 실록의 사관은 왜인이 담배를 즐겨 피우므로 떨어진 담뱃불로 화재가 일어난 듯하다라고 진단하고 있다. 또한 <인조실록>에서는 담배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해를 병진년(1616년)부터로 처음에는 피우는 사람이 많지 않다가 신유년(1621)부터는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어 손님을 대할 때면 술과 차 대신 담배를 내놓을 만큼 급속하게 확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표류해 와 당시 생활상을 기록한 하멜의 표류기에도 현재 그들 사이에는 담배가 매우 성행하여 어린아이들까지도 4, 5세부터 담배를 배우기 시작하고, 남녀 간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고 기록되어 있다. 담배가 유행함에 따라 재배지에 대한 관심도 많았는데, 당시 최상품의 담배 생산지로는 지금의 전북 진안과 장수, 그리고 평안도 지방을 꼽았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서도 진안이 담배의 명산지로 나온다. 진안은 마이산 밑에 있는데 땅이 담배 가꾸기에 알맞다. 진안 경계 안이라면 비록 높은 산꼭대기에 심어도 무성하게 자라 많은 주민이 이것을 업으로 삼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영향을 받은 조선 후기 지도를 보면 진안지역에 남초(南草)라는 두 글자가 함께 적혀 있다. 지도에 특별히 특산물을 표시한 것으로 보아 진안을 대표하는 지역의 상징물이 남초로 불린 담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지가 많아 벼농사가 수월치 않았던 진안과 장수에서는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담배를 집중적으로 재배하였고, 호랑이 담배 피우는 일화 및 진안 친구 망한 친구란 속어 등 담배에 얽힌 일화가 진안 지역 담배 재배의 역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문헌뿐만 아니라 그림에서도 담배의 유행을 확인해 볼 수 있다. 담배 썰기는 김홍도가 조선시대의 갖가지 풍속 장면을 종합한 화첩인 <단원풍속도첩>에 실린 그림 중 하나다. 이 그림에서도 볼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는 담배가 널리 보급되어 서민들도 즐겨 피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신윤복의 풍속화에도 긴 담뱃대를 문 기생과 양반들이 종종 등장할 만큼 담배가 애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서당에서는 훈장과 학도가 맞담배를 피웠다는 기록도 남아있으며, 조정의 공신들도 마찬가지여서 조회를 하는 정전이 담배 연기로 가득했다고 한다. 광해군은 이에 분노해서 자신의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 이유로 임금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되었고, 이것이 민간으로 퍼져 어른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예의로 여겨졌다는 설이 있다. 당시 담배의 유행은 편두통, 배앓이뿐만이 아니라 매독에도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민간요법에서 만병통치약으로 쓰였던 까닭도 있다. 박세당은 담배처럼 귀한 약초가 세상에 있는 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라 했으며, 박지원은 <양반전>에 식후에 담배를 피우면 위가 편안해지고, 새벽에 입안이 텁텁할 때 피우면 씻은 듯 가신다. 걱정근심이 많을 때 피우면 술을 마신 듯 가슴이 씻은 듯하다. 과음으로 간에 열이 날 때 피우면 답답한 폐(肺)가 풀리고, 시구(詩句)가 생각나지 않을 때 피우면 연기에 따라 시(詩)가 절로 나온다. 뒷간에 앉아 피우면 똥 냄새를 없애준다고 극찬했다. 반대로 <인조실록>에서 담배는 요망한 풀로써 요초(妖草)라 등장한다. 담배 뇌물로 벼슬을 샀다가 파직되는 사례도 있었다. 담배가 조선 사회를 병들게 한다고 한탄했고, 담배의 경작으로 농토가 줄어 담배 경작을 법으로 제한해 달라고 상소한 기록이 <정조실록>에 남겨져 있다. 그러나 애연가인 정조는 그것은 각 지방의 감사에게 달린 일이라고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고 여러 가지 식물 중에 이롭고 유익한 것으로는 남령초만 한 것이 없다. 민생에 이용되는 것으로 이만큼 덕이 있고 공이 큰 것이 어디 있겠느냐?라고 했으며 책문의 시제로 남령초(南靈草)를 내걸었을 정도로 담배를 즐겼다. 그러한 연유인지 연초가란 제목으로 운을 띠우며 시를 남긴 기록이 많이 남아있고 애연가였던 정약용도 다산시문집에 담배(煙)에 관한 시구를 남겨 놓았다. 가만히 빨아들이면 향기가 물씬하고 / 슬그머니 내뿜으면 실이 되어 간들간들 차도 좋고 술도 좋지만 새로 나온 담배가 귀양살이하는 사람에게 제일 친한 물건이라고 표현했으며, 정약용은 담뱃대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머금게 할 뿐이고, 사람들에게 먹힘을 당하지는 않는다.란 의미심장한 글로 담배를 표현하였다. 시대가 흘러 300여 년간 자유 경작을 했던 담배 재배도 1921년부터 국가에서 관장하는 전매제도로 바뀌었다. 조선 제일의 담배로 유명했던 진안의 담배밭은 이제 인삼을 주로 재배하게 되었고 장수의 담배밭은 사과밭으로 바뀌었다. 땅의 힘은 세월을 품고 우리를 올곧게 서게 한다. 험지를 새로운 작물의 재배로 지혜롭게 살았던 진안의 담배 이야기를 써 내려간 여태명 선생의 글에서도 그 땅의 힘이 느껴진다. 진안과 함께 최상품 담배 재배지로 이름을 알린 평안도의 담배밭은 그대로 일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상이 달라져 가고 있지만, 평안도 담배의 안부는 애연가로 알려진 북한 국무위원장인 김정은의 담배 피우는 모습에서 엿보고, 남편의 건강을 염려하는 리설주 여사의 마음을 보며 사람살이 매한가지 임을 새삼 느끼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며 함께 심은 식수 표지석에 진안 출신 여태명 선생의 글씨가 굳게 새겨졌다. 지금의 다이내믹하게 전개되는 우리 민족의 일들을 아주 먼 훗날 볼적에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자랑스럽고 멋진 역사로 아로 새겨지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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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03 21:03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31. 오랜 나무가 품은 세월의 숨결 - 수백년 풍상 겪으며 꿋꿋하고 고고하게 우리 곁에 우뚝

화려한 삼월인데 화창한 햇볕은 더디고 / 궁궐 둑의 버들은 실보다 푸르구나 꾀꼬리는 비를 피해 잎 속에 깊이 숨었는데 / 산책하는 여자들은 봄 구경하면서 작은 가지를 잡아 매네 정조 임금이 세손 때 쓴 시로, 음력 삼월 버드나무 가지와 어우러지는 봄 풍경을 평화롭게 그렸다. 어린 시절부터 나무에 유달리 관심이 많았던 정조는 조선의 임금 중 나무 심기와 관리에 많은 공을 들인 임금이었다. 그가 나무 심기에 관심을 가진 것은 후대와 백성을 위해서였지만 사도세자인 아버지를 위해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죽은 나무로 만든 뒤주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사도세자의 아들인 그는 푸릇한 생명이 가득한 나무를 아버지 무덤 주변에 심어 마음에 위안을 드리고자 했을 것이다. 정조는 1789년 가을부터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현 화성시 소재 융릉) 주변에 7년 동안 1,200만여 그루의 나무를 심으며 이를 문서로 정리했다. 날짜, 나무의 종류와 숫자, 가격 그리고 각각의 역할에 따라 관련된 사람과 나무 심기에 관한 포상에 이르기까지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 기록과 흔적은 정조가 심었던 나무의 후계나무로 추정되는 나무들로 숲을 이루며 아직까지도 그 정신을 계승해 주고 있다. 당시 효의 마음을 담아 나무를 심는 임금의 모습에 감동한 백성들도 나무 심기에 자발적으로 동참하였고, 정조는 백성들이 구하기 편리하고 구황에 도움이 되며 농사와 수원(水原) 확보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나무들을 마을 근처에 심도록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일부 숲 공간을 백성들에게 개방하여 농지를 개간하게 하고 땔감과 목재를 제공하였으며 식량을 얻게 했다. 하지만 지금과 달리 나무의 쓰임이 많다 보니 무분별하게 벌목하고 개간을 위해 숲에 불을 내 숲의 면적이 줄어들면서 민둥산이 되어가는 곳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일부 지역에 금표(禁表)를 설치하고 나라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하는 봉산(封山)으로 지정하고 백성의 출입을 제한하며 관리를 하여왔다. 그러한 연유로 나라가 특별히 보호하고 관리한 봉산이 고지도 속에 표기되어 있고 아직까지 그 흔적이 우리 고장에 남아있다. 각각의 나무는 지역과 장소에 따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는데, 남원 운봉 람천 부근의 서림숲도 그러하다. 서림숲이 있는 서천리는 여원치에서 팔랑치로 부는 바람의 통로로 지세가 허한 곳이라 하여 석장승과 나무로 비보 및 액막이와 방제 등의 역할을 하게 조성하였다. 서목(西木)을 우리말로 서나무라고 했다가 서어나무가 된 것으로 추정된 서어나무가 숲을 이루어 서림숲 혹은 선두숲이라 부르며 마을에서 관리했다. 그러던 중 숲을 이루던 서어나무가 폭풍과 병해로 고사하기 시작하여 개체 수가 줄어들어 5그루 정도만이 남아 당산목인 느티나무 곁에서 그 이름만 걸어두고 있어 안타깝다. 오래된 나무는 마을 어귀 정자목과 표지목이 되기도 하며 당산목과 신목(神木)으로 보호를 받으며 사람들의 바람과 사연을 품고 고을을 지켜온 경우가 많다. 그중 수령이 많은 오래된 나무를 노거수(老巨樹)라 하는데, 세월을 켜켜이 담고 있는 노거수의 모습을 보고 싶어 찾아가 보면 그 사이 고사했거나 병들어 있는 경우가 있어 애석하기만 했다. 특히 천연기념물인 노거수는 오랜 세월 동안 한 장소에서 시간을 견디며 살아온 나무로 역사 문화적 가치와 생물학적 가치가 높은 생명체이다. 전북에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가 14그루 있었으나 익산의 곰솔나무가 고사하면서 2008년 해제되어 전북에는 13종의 천연기념물인 노거수가 남아있게 되었다. 천연기념물 제188호였던 익산의 곰솔은 논산과 경계인 신작리에 있어 양쪽 고장 화합의 상징이었으나 피뢰침을 세우는 공사가 한창일 때 불행히도 번개에 맞은 후 고사하였다. 지금 그 자리를 찾아가 보면 익산 곰솔과 흡사한 작은 곰솔나무를 볼 수 있는데, 고사 전 유전자를 이어받은 후계목이 그 자리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 다행이다. 선운사의 동백이 절정인 지금 선운사 올라가는 길 초입에는 도솔천을 앞에 두고 절벽에 뿌리를 내린 천연기념물 제367호 송악이 눈길을 잡고 있다. 두릅나무과의 덩굴식물로 소가 잘 먹는다 하여 소밥나무라 불리며 상춘등, 용린, 담장나무로도 불리는 사철 푸른 나무이다. 나무 아래에 있으면 머리가 맑아지고 줄기와 잎은 지혈작용도 하며 고혈압에도 좋다고 하여 귀히 여긴 나무가 송악이다. 고창 삼인리에 있는 송악은 높이 15m에 둘레가 80㎝에 이르며 내륙에 자생하는 송악 중에서 최북방 한계선에 있는 가장 큰 거목으로 주변 경관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신비로운 노거수이다. 남원 산내면에는 지리산 천년송이라 불리는 천연기념물 제424호로 지정된 소나무가 있다. 천년송의 나이가 진짜 천년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오랜 세월 지리산의 기운을 받으며 그 자리를 지켜온 경이로운 노거수라 천년송이라 불린 듯하다. 천연기념물인 천년송은 할머니나무로 불리고 근처 20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소나무를 할아버지 나무라 하는데 마을에서 보호하며 관리를 하고 있다. 매년 설에는 지리산 천년송 아래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열고 있고, 태아에게 소나무 바람 소리를 들려주는 솔바람 태교와 금줄과 혼례상에도 솔가지를 꽂는 풍습이 마을에 전해지고 있다. 노거수를 마주하면 수백 년 풍상을 겪어온 꿋꿋함과 고고함에 사뭇 경건해진다. 특별한 사연과 전설을 지닌 채 많은 이들의 마음속 염원을 들어주고 오랜 세월 묵묵히 우리 곁을 지켜 온 나무들은 귀한 생명체이다. 봄이 한창인 지금 봄꽃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낭만을 건넨다면 나무는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존재이다. 꽃을 피워내고 열매와 그늘을 내어주며 죽어서까지 자재로 쓰이고 아낌없이 주며 우리 곁에 있었다. 오랜 세월을 품고 견디어 온 노거수가 고사하여 사라져가기 전에 그 모습을 눈과 마음에 담아 보고, 보존할 가치가 있는 나무들의 유전자를 채취하여 후계목을 육성하여 웅혼함을 지닌 나무의 상징성을 이어 그 모습을 후대에도 살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시급하다. 오동나무는 천 년을 늙어도 항상 곡조를 품고 있고 / 매화는 일생을 춥게 지내도 향기를 팔지 않고/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이 변치 않으며 / 버들가지는 백 번을 꺾여도 새로운 가지가 돋는다라는 말이 있다. 가만히 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고 그 숨결이 전해오는 오랜 시간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리고 변치 않을 가치를 이어가기 위해 봄의 때를 놓쳤다면 늦가을 나무 심는 시기에 나무를 심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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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19 20:18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30. 선비들 유람기로 만나는 지리산 - 진시황이 애타게 찾던 그곳, 우리는 이렇게 그냥 얻고 있네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는 공자의 유명한 말과 그곳에 산이 있어 오른다라는 말이 있다. 현대에 와서는 자연을 즐기며 인증한 여행기를 SNS에 올리는 시대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남긴 기행문을 살펴보면 수려한 풍광을 지닌 산을 찾아 유람하는 것은 산을 그저 등산한다는 의미와 달랐던 것 같다. 그 중 『어우야담(於于野談)』의 저자로 유명한 유몽인(柳夢寅, 1599~1623)이 53세 때 쓴 기행문 《유두류산록(流頭流山錄)》은 지리산 유람기의 백미로 전해져 오고 있다. 2월 초에 임지에 부임했다. 하지만 용성(현 남원)은 큰 고을이라 업무 처리에 정신없이 바쁘기만 하다. (중략) 목동에는 수춘암이 있는데 그 수석이 매우 아름답다. 진사 김화가 그곳에 살면서 집을 재간당(在澗堂)이라 불렀다. 그 집은 두류산(頭流山) 서쪽에 있어서 서너 겹으로 둘러싼 안개 낀 모습을 누대 난간에서 바로 마주 볼 수가 있다. 두류산은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불렸는데,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에도 방장산은 저 바다 건너 삼한에 있네라고 한 구절이 있다. 또한 시의 주석에는 대방국의 남쪽에 있다라고 했다. 지금 살펴보니 용성의 옛 이름이 대방(帶方)이다. 그렇다면 두류산은 삼신산(三神山: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중의 하나가 되는 셈이다. 그 옛날 중국 진시황과 한무제는 배를 띄워 이 삼신산을 찾게 하느라 쓸데없이 공력을 허비했는데, 우리는 이렇게 앉아서 그냥 얻고 있으니. 남원수령으로 부임한 유몽인이 1611년(광해 3년) 지리산을 유람하고 쓴 《유두류산록》의 서문 중 일부이다.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를 모은 야담과 우리나라 산천을 두루 유람하며 기록을 남긴 유몽인은 장원급제를 하고 벼슬에 오른 뛰어난 문필가이자 외교관이였지만 역모죄에 몰려 처형되어 불행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그의 글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뛰어남을 인정받았고, 임금 정조로부터 그의 곧은 지조와 문장에 대한 극찬을 받으며 사후 170년 만에 의정(義貞)이라는 시호를 받고 이조판서가 된 인물이다. 그가 남긴 글들을 순조 때인 1832년 후손들이 『어우집』에 모아 내어 당대 선비들의 진솔한 생활사와 해학과 풍류를 지금에 와서도 엿 볼 수 있게 되었다. 천생 이야기꾼인 유몽인은 그의 이름과 별칭도 남다르다. 전남 고흥 출신으로 호랑이를 상징하는 큰 꿈을 품은 이름을 아버지에게 받았다. 또한, 호인 어우당(於于堂)의 어우는 과장해서 속이거나 아첨한다는 뜻으로 공자를 비판한 장자의 『천지』에 나오는 말이다. 밭일하는 노인이 공자의 제자에게 공자를 빗대어 허망한 말로 세상을 속이고 홀로 악기를 연주하며 슬픈 노래를 불러 천하에 이름을 파는 사람이 아닌가. 밭 가는 일을 방해 말고 가라고 조롱하듯 남긴 말에서 따온 의미이다. 당시 유교사상이 만연한 조선에 유교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가치관과 장자를 흠모하는 마음을 담은 호이다. 그런 생각을 지닌 유몽인이다 보니 그의 글은 점잖은 선비의 글이라기보다는 온갖 군상들의 삶과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냈다. 봄이 움트는 날 남원에서 지인들과 함께 지리산을 다녀온 글에도 근엄한 선비들의 모습보다 지역의 이야기를 나누고 수려한 풍광을 즐기며 흥겹게 유람한 모습이 담겨 있다. 유몽인보다 앞선 시기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유두류록(流頭流錄)』을 필두로 지리산은 북에 있는 금강산과 더불어 선비들이 가장 많이 찾고 유람기를 남긴 산으로 역사 속에서도 전라도와 경상도 양도의 지방 명산으로 기록된 산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 경상도 편은 주흘산, 태백산, 사불산, 가야산을 포함한 다섯 명산(名山) 중 하나로 지리산을 꼽고 있으며, 전라도 편은 방장(方丈), 또는 두류(頭流)라고도 불렸던 지리산의 다른 이름과 함께 주위의 고을과 산악경관, 기후와 속설 등 관련 정보 등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지리산의 다른 이름 두류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지리산은)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 산세가 높고 웅대하여 수백 리에 웅거하였으니, 여진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내려 여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두류(頭流)라고도 부른다. - 이행, 윤응보 등,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제39권 「전라도 남원도호부」 두류산이란 백두대간의 산맥이 흘러왔다는 데서 생긴 이름으로 지리산에 대한 선조의 인식을 짐작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하는 이인로의 《파한집》이나 『고려사절요』 속 《옥룡기》의 문구에서는 지리산이 백두산의 맥을 잇고 있다는 언급을 보다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지리산이 백두산에서부터 시작하여 꽃 같은 봉우리와 꽃받침 같은 골짜기가 면면하게 잇따라서 대방군(帶方郡)에서는 수천 리를 서리어 맺히었는데, 산을 둘러 있는 것이 10여 주이다. 한 달이 넘게 걸려야 그 주위를 다 구경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백두산(白頭山)에서 시작하여 지리산(智異山)에서 끝나는데, 그 지세는 오행으로 보아 수(水)를 뿌리로 하고 목(木)을 줄기로 하는 땅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렇듯 두류산이란 이름도 불린 근원이 깊은데, 지리산(智異山)은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지는 산이란 뜻으로 그 이름의 지닌 의미가 다분히 철학적이다. 수려한 풍광은 물론이고 자연의 이치에서 성찰하고자 했던 선비들의 성향이 영산(靈山) 지리산의 가치를 키우고 선조들의 마음과 발길을 불러 모았을 것이다. 서두에 소개한 글에 이어 유몽인은 지인들에게 지리산 유람을 청하며 이런 문구를 이어갔다. 술이 좀 거나해질 때, 내가 술잔을 들고 좌중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는 봄에 두류산을 마음껏 유람하여 오랫동안 묵은 빚을 좀 갚고 싶었소. 누가 나와 함께 유람하실 분이 계시오? 유몽인과 선비들은 여러 차례 편지를 교환한 후 재간당에서 모일 것을 기약한 후 만났다. 3월 28일. 처음 약속한 장소에서 다시 모였다. 기생들이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가운데 모두 실컷 취해 버렸다. 그러기를 한밤중까지 계속하다 그대로 시냇가 재간당에서 잤다. 3월 29일. 요천을 따라 내려가다 반암을 지났다. 때는 멋들어진 풍경 속에서 꽃들이 활짝 피었고, 밤사이에 내린 비도 아침이 되자 맑게 개어 꽃을 찾는 흥취가 손에 잡힐 것만 같다. 낮에는 운봉과 황상의 비전에서 쉬었다. 그리고 곳곳을 실감나고 감질나게 잘 기록하고는 그의 유람기 마지막에 두류산이 우리나라 제일의 산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일 인간 세상의 영화를 다 마다하고 영영 떠나서 돌아오지 않으려고 한다면 오직 이 두류산만이 은거하기에 좋을 것이다라고 지리산에 대한 총평을 남겨 놓았다. 옛 선비들의 유람기 속에 생생하게 묘사된 의미 있는 흔적들을 살뜰하게 돌아보고 지역의 자산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유몽인의 지리산 유람 출발점이 되었던 남원 목동리 재간당 곳곳에는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고, 그 곁을 흐르는 냇물은 그 시절의 풍류를 품고 선비들의 즐거운 흥얼거림 같은 소리를 내며 흐른다. 지리산까지 이르는 길의 축으로 황산 이성계의 전설을 비롯한 지역의 이야기며 꽃들과 물고기를 비롯한 생물들의 생김새와 이름, 갖은 악기로 연주된 곡과 흥에 겨워 먹을 가며 시를 지은 기록들이 그들의 발자취를 그린다. 유몽인의 말에 선비들이 화답하여 지리산 유람을 떠났던 것처럼 저도요!라고 응답하며 선비들의 아지트였던 재간당 기둥에 기대서서 지리산을 마주 하고 싶다. 지리산이 지척에 있어 그저 얻고 있음을 새겨듣고 감사하게 여기며 《유두류산록》을 여행책자 삼아 재간당의 주변과 옛길에 남은 그 귀한 자취를 돌아보며 옛 선비들의 지리산 유람 길을 더듬더듬 찾아가고 싶다. 사라지고 희미해진 옛길과 지명이지만, 남아있는 글귀와 흔적들이 남원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지금도 확연하게 알 수 있다. 그의 멋들어진 안내를 따라 운봉을 거쳐 지리산의 명승지를 두루 돌고 다시 남원으로 흘러온 길을 가볼 참이다. 선비들이 지리산을 찾은 마음처럼 어리석음을 다스리고 웅혼한 지리산의 정기를 받아 진정 지혜로워진 마음으로 세상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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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2 19:17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29. 눈물처럼 지는 꽃, 선운사 동백 - 다시는 불나지 말라 심었지만 붉은 꽃잎 불꽃처럼 '활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 지는 건 잠깐이더군 /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 이더군. 최영미의 <선운사에서>란 시의 문장이다. 동백꽃의 소식이 들리기 시작하니 문득 이맘때쯤 선운사(禪雲寺)를 찾아가 발길을 돌렸던 기억이 난다. 추운 겨울 흰 눈 속에서 붉게 피어나는 동백의 모습을 그리며 찾았던 선운사는 동백꽃이 피기 전이었다. 선운사의 동백은 봄날이 한창일 때 벚꽃과 더불어 핀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찾았을 때는 이미 송이째 떨어져 처연하게 지고 난 후라 그 잠깐의 아름다움을 번번이 놓쳤다. 몇 계절에 이름을 걸어 놓고 피어나는 동백(冬柏)은 흔히 겨울에 꽃이 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피어나는 시기에 따라 선운사의 동백처럼 봄에 피는 춘백(春栢)도 있고, 가을에 피는 추백(秋栢)도 있다. 오래전 중국에서는 해홍화라고 불리다 지금은 산다화라고 부르며 일본에서는 애기동백을 다매, 유럽에서는 카멜리아라 불리는 등 그 이름이 많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동백으로 불리며 그 아름다움이 문학의 소재가 되고 노래로 불리는 꽃이다. 가수 이미자의 대표곡인 동백아가씨는 1964년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영화 <동백아가씨>의 주제가로 35주간 가요순위 1위를 달렸던 히트곡이다. 그러나 동백아가씨는 인기 절정을 누리던 중 갑자기 왜색풍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는 수난을 겪게 된다. 일제강점기 시절 대중가요의 주류였던 일본 엔카와 비슷한 트로트가 다시 유행되는 것을 염려했다는 것과 동백나무의 주요 자생지가 일본으로 잘못 알려져 금지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동백아가씨는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다가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해금된 노래로 땅에 떨어져 다시 피어나는 동백과도 같은 아픈 사연을 지녔다. 동백에 대한 색다른 오해를 남긴 문학작품도 있다. 김유정의 단편 『동백꽃』으로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풋풋한 사랑을 담은 작품이다. 소설 속에서 동백꽃은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져 쓰러지며 한창 피어 흐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그만 아찔하였다.라는 문장 속에 등장한다. 대부분 붉은빛이나 흰색을 띠는 동백꽃과 달리 작품 속에서 노란 동백꽃으로 서술된 꽃은 바로 강원도에서 동백나무 혹은 동박나무로 불려왔던 생강나무 꽃이다. 이른 봄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생강나무를 입안에 넣고 깨물어 보면 알싸한 향이 나니 작품의 내용과 맞아 떨어진다. 우리가 알던 동백이 아닌 생강나무이다 보니 이런저런 오해를 불러오기도 했다. 붉은 동백꽃이 김유정의 단편집 표지와 관련 자료를 장식했고 김유정 문학관 조성 시 쪽동백나무가 심어졌다가 생강나무로 다시 심었다는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어찌 되었건 동백나무는 유명세만큼이나 사연이 많은 꽃나무이다. 이들 동백 중에는 우리 민족과 운명을 같이하며 슬픈 사연을 지닌 동백도 있다. 울산과 제주의 동백이다. 울산이 원산지인 울산동백은 한 나무에 오색빛깔 여덟 겹으로 피어나는 희귀종으로 학성에 자생하고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동백을 발견하고 채집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쳐지면서 일본에 빼앗긴 꽃이다. 불행히도 학성의 울산동백은 군락지가 소멸되었으나, 이후 1989년 일본의 한 사찰에서 발견되어 반환 운동을 통해 다시 고향인 울산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지금은 울산시청과 울산 중구 학성공원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제주의 아픈 역사인 43항쟁의 70주년을 상징하는 꽃도 동백꽃이다. 제주 43항쟁 때 토벌을 피해 주민들이 동백동산으로 숨어들었던 그 슬픔이 이젠 역사의 아이콘이 되어 우리의 가슴과 어깨 위에서 붉게 피어나고 있다. 꽃이 아름다운 동백은 그 모습과 다르게 향기가 없는 꽃이다. 게다가 추운 겨울부터 피는 꽃이다 보니 벌과 나비가 아닌 새에 의해 꽃가루가 수정되는 조매화(鳥媒花)로 동백의 이름을 딴 동박새와 공생한다. 차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중국 등에 분포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군락지 중 북단 경계에는 고창 선운사(禪雲寺)의 동백숲이 있는데, 그 가치가 높고 사찰과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어 1967년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선운사 동백나무는 정확히는 동백(冬栢)이 아니라 봄기운이 제대로 올라야 활짝 피는 춘백(春栢)이며 절 뒤쪽 비스듬한 산 아래 절을 수호하는 모습으로 군락을 이루어 선운사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선운사는 신라의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년) 때 창건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백제 무왕 무렵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고려말 공민왕 3년(1354년)에 중수되었고, 조선 성종 때에 이르러 십여 년에 걸쳐 건물이 189채나 되도록 중창되면서 1475년 봄에는 선왕선가(先王仙駕)를 위한 수륙재(水陸齊)를 크게 열고 번창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인 선조 30년(1597년)에 어실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이후 광해군에 이르러 승려를 위한 선방과 법당을 건립하게 되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당시 사찰의 역사를 기록한 『선운사적』, 『운사고작』 ,『선운사사적』등이 전해져와 선운사의 자세한 창건기록은 물론이고 조선시대의 불교사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5호로 지정되었다. 동백나무 숲은 정확지는 않지만 사찰이 전소된 후 중건과정에서 승려들이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선운사 대웅전 뒤편 경사진 언덕에 평균 높이는 약 6m이고, 둘레는 30㎝인 동백나무 2000여 그루가 병풍처럼 띠를 둘러 선운사를 호위하듯 조성되어 있다. 아름다운 사찰 경관을 위해 심은 듯하나 선운사에 동백나무 숲을 조성한 이유는 분명하다. 동백나무의 두꺼운 잎이 수분을 많이 머금고 있어 예로부터 방풍림이자 방화림으로 쓰여 화재로부터 사찰을 보호하기 위해서라 한다. 그래서인지 선운사는 정유재란 이후 화재 피해가 없었다. 게다가 열매에서 짠 동백기름은 머릿기름이나 사찰을 밝히는 등불과 부처님전에 바치는 등잔불의 기름으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임신한 왕비의 태교를 위해 쓰인 『태교보감』에는 동백기름이 피부를 탄력 있고 윤택하게 가꾸어주기 때문에 피부에 좋다고도 나와 있으니 동백나무는 여러모로 선조들에게 사랑받는 나무였던 것 같다. 선운사에 있어 동백숲의 조성은 필요에 의한 이로운 나무의 식재였지만, 선운사와 어우러진 동백숲의 아름다움은 봄날의 감성을 건네주는 지역의 귀한 자산이 되었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 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 눈물처럼 후두둑지는 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송창식의 노래가 선운사의 동백숲으로 마음을 이끈다. 봄이 한창인 어느 좋은 날 춘백으로 남아있는 선운사에 다시 가볼 참이다. 가서 선운사와 어우러진 동백나무도 보고 눈물처럼 후두두 지어 땅에서 피어난 처연한 꽃송이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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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08 20:04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28. 번영과 쇠락의 군산 째보선창 - 역사의 시계추, 이제 어느 쪽으로 째깍거리고 있는가

우석: 어디인 것 같더노. 그 장소는? 진우: 낡은 건물인데, 무슨 여관 같았습니다. 우석: 여관 위치는 기억나나? 진우: 얼굴을 가리고 끌려가가, 근데 뱃고동 소리가 났고, 기차 소리도 가깝게 났습니더. 영화 《변호인》에서 주인공 송우석 변호사(송강호 분)가 빨갱이로 몰려 고문을 당한 피고인 진우(임시완 분)를 변호하기 위해 고문 장소로 추정되는 곳을 찾아 헤매는 장면이 있다. 영화 속에서는 부산으로 묘사되지만 사실 이 장면은 군산에서 촬영되었다. 1980년대 그 시절의 기찻길이 지나는 낡은 항구 풍경을 고스란히 재현해 낸 곳은 바로 군산의 째보선창이다. 지금 가보아도 일제강점기부터 가까이는 1970~1980년대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째보선창이라는 독특한 이름은 현재 군산시 금암동, 과거 옥구군 죽성리에 위치했던 포구로 일제강점기부터 째보선창으로 불려왔다. 본래 이름은 죽성포구였으며 고려시대부터 군산 지역 주요 포구 중 하나였다. 죽성이라는 이름은 근방에 있던 넓은 대나무 밭이 마치 성(城)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보호하는 형상이어서, 마을 이름을 죽성리(竹成里)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죽성 포구는 대나무숲의 풍광이 아름다워 포구 일원이 군산 팔경(八景)의 하나로 꼽히기도 하였다. 그 죽성포구가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째보선창으로 개명되듯 불린 유래도 독특하다. 포구의 모습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되는 설로, Y자 형태로 째진 듯이 조성된 포구가 마치 째보(언청이의 사투리)처럼 보인다고 하여 포구 이름을 째보선창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혹은, 죽성 포구에 살던 힘센 째보 객주가 포구 주변의 상권을 장악하고 일대를 꽉 잡고 있어 그의 별명 그대로 째보선창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전해진다. 그런데, 이 독특한 이름의 째보선창은 군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라남도 목포에도 째보선창이 있다. 목포시 유달산 아래 다순구미(따뜻하다는 다순과 후미지고 깊은 곳이란 뜻의 구미의 순우리말 합성어로 지금의 온금동)앞에 물자 수송을 위해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곳이다. 배를 접안하는 부두시설의 삼면 중 한 면만을 연 모습이 언청이 모습과 흡사하여 째보선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목포의 째보선창은 일제강점기에 그 지역의 주요 사업체인 조선내화의 화물을 중심으로 물자를 실어나르며 번성기를 누린 포구이다. 그러다, 1981년 제10회 전국소년체전이 열리던 시기 유달산 일주도로를 확장 정비하면서 사라졌고 조선내화마저 광양으로 본사와 공장을 이전한 후에는 번창했던 기억과 불린 이름만 남아있다. 군산과 목포가 각기 같은 이름의 째보선창을 가졌던 것처럼 두 지역은 동시대에 비슷한 번영과 쇠락의 시간을 보냈다. 두 곳은 예로부터 어족이 풍부하고 어획량이 많아 자연스럽게 포구가 형성되었고 이를 내다 파는 어시장이 함께 발달했다. 배가 많이 드나드는 지리환경이다 보니 나라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에는 군산의 전신이었던 옥구와 목포를 전라도의 4진으로 언급하고 있다. 대비하고, 도관찰사로 하여금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을 상고하게 하였다. 경상도는 4진(鎭)인데, 합포(合浦)강주(江州)영해(寧海)동래(東萊)이고, 전라도의 4진은 목포(木浦)조양(兆陽)옥구(沃溝)흥덕(興德)이고, 충청도의 3진은 순성(蓴城)남포(藍浦)이산(伊山)이고, 풍해도(豊海道)의 2진은 풍주(豊州)옹진(甕津)이고, 강원도의 2진은 삼척(三陟)간성(杆城)이다. -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5월 21일 임신 1번째 기사 각도의 병마 도절제사를 파하고 각 진에 첨절제사를 두다 조선시대 군산에는 전라도 7개 고을 세곡을 취급하는 옥구 군산창(群山倉)이 있어 이곳에 객주도 많았다. 1899년에는 군산항이 개항하면서 당시 군산포, 죽성포, 경포 등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군산 객주들이 각종 상회사(商會社)를 설립하였고, 이들 상회사는 을사늑약(1905) 이후 우리 민족 국채보상운동과 교육사업을 지원하고 활약하여 일본 상인들의 경제침투를 어렵게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군산에 발달한 포구만 해도 째보선창(죽성포), 설애장터(경포), 구암포(궁포), 나리포(나포), 달개나루(월포), 서시포(서포) 등이 있었으나 째보선창 주변은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한다. 그러다 일본영사관이 이 지역에 들어서면서 째보선창은 군산의 대표 포구가 된다. 경술국치(1910년) 이후 일제는 일본인 거주 지역이었던 지금의 해망동에 1918년 서부어시장을, 외곽지역이었던 째보선창 일대에는 1923년 동부어시장을 개설한다. 그런데 막상 어시장이 개설된 이후에는 개량된 선박과 근대화된 어구를 갖춘 일본 어민이 주로 동부어시장을 애용하여 거래 규모가 서부어시장에 비해 현저히 많았다. 이후 1928년에 째보선창 앞바다 해면 매립 공사가 완공되고, 이어 1929년 조수간만의 차에도 항상 수평을 유지하는 뜬다리(잔교, 길이 49m, 폭 4m)가 설치되면서 째보선창 일원은 어항으로서 제반 시설을 모두 갖추게 된다. 1932년 째보선창은 군산부로 편입되면서 동빈정(東濱町)이 되었다. 1930년대 동빈정에 있었던 주요 사업체 및 기관만 해도 군산어업조합, 전북어업조합 판매소, 전라북도 수산시험소, 황목조선소, 전북조선철공소분공장, 경마장(헌병, 경찰기마대 훈련장), 해안순사파출소, 임경상점(군산냉장고), 신탄시장(숯, 장작 등을 파는 시장), 수호제염소등 다양해 일대의 번영을 짐작하게 한다. 동빈정은 1945년 광복 후 금암동(錦岩洞)이 되었고, 금암동은 바닷물이 드나드는 간석지였으나 매립공사를 통해 육지가 됐다. 1978년 이곳을 흐르던 째보천이 복개되었고 선창의 핵심 공간이던 어시장 역시 2003년 동백대교 근처로 이전하면서 지금은 어수선하고 쇠락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째보선창은 한때 군산지역의 소위 제일 잘 나가던 포구로 중요한 뱃길이자 일제강점기 수탈의 통로였다. 번영과 쇠락의 역사를 동시에 지니며 지역의 애환이 짙은 째보선창은 문학에서도 그 이름이 등장한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주요 배경지로 주인공인 정주사가 충청남도 서천(용댕이)에서 식솔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와 첫발을 내디딘 곳이 바로 째보선창이다. 그 외 조정래의 『아리랑』 그리고 고은의 『만인보』에서도 째보선창의 애환이 담긴 사연을 찾아볼 수 있다. 군산항과 목포항 두 곳 모두 비슷한 시기 2년의 차이를 두고 개항했고, 째보선창이라는 이름의 부두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일제강점기를 관통하며 생겨나 역사의 풍파 속에 있었다. 같은 이름 다른 곳의 째보선창은 금강과 영산강의 끝자락에 번영과 수탈의 기억을 동시에 지닌 장소이다. 목포의 째보선창은 작년 12월 남아있던 조선내화 건물(1938년 건축)이 등록문화재(제707호)로 등재되면서 목포 째보선창이 있던 장소의 복원 계획이 탄력받고 있고, 군산의 째보선창도 영화 속의 배경과 문학 속에 남아 있으며 일대가 근현대사의 중요한 자산으로 인식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군산시는 현재 구도심과 째보선창 일대를 새로운 도시재생 지역 및 관광명소로 만들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마치 추운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이 찾아오듯이 쓸쓸하고 적막해 보이는 역사의 현장에 따스한 햇볕이 내비치는 듯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군산의 겨울 바다는 얼어붙은 군산시민의 마음만큼 그 어느 때 보다도 춥고 스산하다. 번영과 쇠락을 오가는 역사의 시계추가 이제 어느 쪽으로 째깍거리고 있는지 그곳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염려와 염원들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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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2.22 19:08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27. 역사를 지켜낸 곳, 사고 - 역사는 기억의 투쟁…잊히고 지워야 할 과거는 없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조지오웰의 작품 <1984>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이다. 과거의 기록은 힘 있는 자들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지만, 가장 힘이 있던 왕을 중심으로 한 기록은 당대 역사의 사실을 헤아려보고 지금까지 이어오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 선조는 예로부터 왕을 중심으로 한 일들을 기억하고 남기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고려시대부터 춘추관과 예문관을 상설하여 조선시대까지 이어오며 상세히 기록하였다. 대부분 전대의 왕이 죽고 난 후 다음 왕이 즉위된 초창기에 실록을 편찬하였으며 이를 특별히 설치한 사고(史庫)에 안전하게 보관해 왔다. 그렇게 특별한 관리를 받은 사고들도 재난과 외세의 침입에 훼손되었고, 그 와중에 기록한 사람들 못지않게 역사의 저장고인 사고를 지켜낸 사람들이 있어 지금도 우리는 과거 역사를 디딤돌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왕의 곁에서 기록되는 실록은 춘추관 내 임시로 둔 실록청에 재상을 중심으로 문필이 뛰어난 대제학을 비롯한 사관(史官) 등으로 조직되어 편찬되었다. 사관은 두 명이 조를 이루어 왕이 잠이 들기 전까지 역할을 나누어 왕의 행동을 기록하고 왕의 말을 기록하는 등 모든 언행을 기록하였다. 사관이 기록한 공식적인 사초는 관장사초(館臧史草)라 하여 춘추관에 보관하였고, 미처 기록하지 못한 사항을 집에 돌아와 기억을 되살려 기록한 것을 가장사초(家臧史草)라 하였다. 가장사초도 왕이 죽고 나면 실록편찬을 위해 제출해야 했지만, 미처 제출하지 못한 가장사초는 사관이 죽으면 함께 묻었던지라 종종 가장사초가 사관의 무덤에서 발견되기도 한다.국보 제151호인 조선왕조실록은 태조에서 철종까지 조선왕조 472년의 역사의 실록이 지정되었는데, 1935년에 편찬되었으나 국보에 못 들어간 고종실록과 순종실록도 있다. 그러한 연유는 이전 왕들의 실록이 4부에서 5부만 보관돼 있는 데 반해 일제 치하에서 200부나 발간되어 역사적 가치도 떨어진 데다가, 총편집인을 일본인이 맡은 까닭에 외면을 받고 세계기록유산 등재에서도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제외되었다.집필하고 수정하는 과정에서의 파기와 보관도 철저하게 다루었던 실록청은 편찬이 끝난 실록의 보관에 힘을 다했다. 사고에 보관된 실록은 종이로 제작되었기에 습기와 벌레의 피해를 막기 위해 3년에 1번가량 햇볕에 말리거나 바람을 쐬게 하는 포쇄 과정을 거쳤다. 또한, 국가의 제례나 행사에 과거의 전례를 참고하기 위해 사관이 살펴보는 것을 제외하고는 열람을 금지하며 엄정하게 관리했다. 실록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사고는 곧 당대의 중요한 기억을 보존하는 장소였기에, 안전한 위치에 짓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복사본을 만들어 여러 곳에 나누어 둘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궁궐 안에 내사고(內史庫)를 두고, 외사고(外史庫)를 지방에 두는 이원체제로 관리했다. 그중 고려시대의 내사고는 개성 수창궁(壽昌宮)에 있었고 외사고는 충주에 충주사고로 두었다. 이후 내사고는 수창궁의 화재, 한양으로의 천도 등에 따라 궁궐 안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조선시대 1440년(세종 22년) 경복궁 안에 세운 춘추관에 정착하였다. 외사고는 1439년(세종 21년)에 충주에 이어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새로운 사고가 설치되어, 도서관 역할을 한 내사고인 춘추관사고, 보존을 목적으로 둔 외사고인 충주사고, 성주사고, 전주사고의 4대 사고 체제가 완성되어 임진왜란 이전까지 운영되었다.춘추관(春秋館)에서 아뢰기를, 《태조실록(太祖實錄)》 15권, 《공정왕실록(恭靖王實錄)》 6권, 《태종실록(太宗實錄)》 36권을 이제 이미 각각 네 본(本)씩을 썼사오니, 한 본(本)은 본관(本館)의 실록각(實錄閣)에 간직하여 두고, 세 본(本)은 충주(忠州)전주(全州)성주(星州)의 사고(史庫)에 나누어 간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10권, 세종 27년 11월 19일특히, 외사고가 전주에 자리 잡게 된 까닭은 전주가 조선 왕실의 본관이자, 태조의 어진이 경기전에 봉안된 것을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실록을 차례로 옮겨가며 경기전 내부에 실록각을 설치하여 보관하였다. 초기 3곳 외사고 중 하나였던 전주사고는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춘추관, 충주, 성주의 사고가 불에 탄 후, 유일하게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남게 되면서 역사적인 의의를 갖게 되었다. 대부분 평지에 있던 사고들은 외부의 침략 등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지만, 다른 곳의 사고와 달리 전주사고가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전주 지역 선비였던 손흥록, 안의, 승려 등이 실록을 안전한 곳에 옮겨 지켜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중 사고를 지키기 위해 분투했던 지역민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왜군이 전주 인근에 진입해왔을 때, 당시 경기전 참봉 오희길은 태조의 어진과 사고의 실록들을 안전하게 옮겨 보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실록 총 805권 614책 및 기타 전적 등을 옮기기 위해서는 말 20여 필과 많은 인부가 필요했다. 이를 고민하던 중 지역의 명망 있는 선비 손홍록을 찾아가 의논하였다. 나라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보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혼자 하기엔 역부족이오니 도움을 청하고자 합니다.고 하자 손흥록은 흔쾌히 뜻을 같이하기로 하였다. 뜻을 함께한 안의와 조카 손숭경, 하인 30여 명과 함께 태조의 어진과 실록을 정읍 내장산의 은봉암으로 옮겼다가 하루 뒤 산중 더 깊숙이 들어가 용굴암으로 피난시켰다. 그 후 태조의 어진을 따로 비례암으로 옮겨 안전하게 보관될 수 있었다.그 덕분에 전주사고의 실록은 남았지만 이후 나머지 소실된 실록의 복구와 안전한 보존이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전주사고본을 모본으로하여 2년 9개월 만에 4부의 실록을 다시 완성하였고 이를 더욱 안전하게 보관할 장소로 깊은 산속 험한 장소들을 고려하게 되었다. 그 결과 강화도 마니산, 오대산, 태백산, 묘향산이 채택되었고, 이에 따라 전주사고의 실록은 마니산으로 옮겨졌다가 인근의 정족산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묘향산사고는 한반도의 북방에 위치한 탓에 중국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관리 소홀이 지적되어 논의되다 묘향산사고의 실록이 1633년(인조11년) 무주 적상산(赤裳山)으로 옮겨졌다. 이로써, 4대 사고에서 춘추관, 정족산, 오대산, 태백산, 적상산의 5대 사고의 시대가 되었다.하지만, 이후 적상산사고의 실록들은 1911년 일제 강점기 창덕궁 내 장서각으로 옮겨졌다가, 6.25 전쟁 때에 북한으로 옮겨졌고, 다른 사고의 실록들도 조선총독부로 옮겨지고 일본으로 반출되는 등 나라의 운명과 같은 풍파를 겪게 되었다. 북한으로 넘어간 적상산사고의 실록은 1980년도에 번역되었고, 강화도로 건너간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적상산사고는 1992년 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될 위기에 놓이자 적상산 위쪽으로 옮겨졌다. 현재, 4대 사고와 5대 사고 중 전라북도에 있는 전주사고와 적상산사고만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당시 사고의 역사성을 전해주고 있다.역사는 기억의 투쟁이다. 한쪽에서는 기념해야 할 것들을 간직하여 소중한 미래의 발판으로 삼고 다른 한편에서는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피눈물을 삼키며 지난 과거를 곱씹는다. 민족이나 공동체와 연관된 기억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교훈을 전달한다. 우리 선조들이 사고를 여러 곳에 나누어 두면서까지 역사를 지키려 했던 까닭이다. 그 애쓴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의 면면도 다시 살려 돌이켜 보아야 한다.역사 안에서 잊히고 지워야 할 기억은 없다. 당대 왕의 기록물인 실록을 두려워하고 귀히 여기며 봉안에 힘썼던 선조들의 지혜를 다시 보게 된다. 디지털 세상이 도래하면서 역사의 기록과 저장의 수단이 달라져 보관에 대한 개념의 차이가 있지만, 오히려 또 다른 오류와 변종의 폐단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2018년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지나온 역사를 복기하며 지난 시간과 작금의 기억들을 유산으로 잘 남겨내는 것 또한 과거를 잘 이어갈 사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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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2.02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26. 고을의 수호신 장승 - 서민 대변하는 조상의 얼굴…지역 문화자원으로 계승해야

아이고 이것이 웬일인가, 나무하러 간다더니 장승 빼어 왔네 그려. 나무가 암만 귀하다 하되 장승 패어 땐단 말은 언문책(諺文冊) 잔주(注)에도 듣도 보도 못한 말. 만일 패어 땠으면 목신동증(木神動症), 조왕동증(竈王動症) 목숨 보전 못 할 테니 어서 급히 지고 가서 선 자리에 도로 세우고 왼발 굴러 진언(眞言)치고 다른 길로 돌아옵쇼.신재효가 정리한 판소리 여섯 마당 중 한 작품이기도 하고, 남원 출신의 명창 송흥록이 특별히 잘 불렀다고 전해지는 판소리 《변강쇠가》 속 한 대목이다. 가루지기타령, 횡부가라고도 불리는 이 사설은, 주인공 변강쇠가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나무 대신 장승을 빼어온 것을 보고 부인 옹녀가 놀라 내뱉는 말이다. 목신동증은 나무 신이 노해서 얻는다는 병이고, 조왕동증은 부엌 신이 노해서 얻는다는 병인데, 벌을 받기 전에 장승을 어서 되돌려 놓으라는 부인의 말을 듣지 않고 장승을 패어 불을 피웠던 변강쇠는 결국 전국 장승들의 저주를 받아 온갖 병을 얻고 장승처럼 서서 죽게 된다. 장승 설화를 일부 근원설화로 하는 변강쇠가는 지리산에 있는 남원시 산내면이 그 배경으로 알려져 있다. 변강쇠가에 등장한 나무 장승뿐만 아니라 우리 지역에는 특별한 장승들이 남아 있다.주로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졌던 장승들은 마을이나 절 입구, 고개 등지와 길가에 세워져 도로 위 이정표나 마을의 랜드마크 역할을 담당했다. 어찌 보면 무섭고 근엄하기도 하고, 한없이 천진하고 인자해 보이기도 하는 장승은 세밀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 의해 툭툭 쳐내듯 만들어져 투박하고 친근한 모습이다. 이 같은 장승은 마을의 안팎을 구분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마을 밖에서 들어오는 재앙을 막아주는 신령한 수호신이었다.지금에야 장승이라는 말로 통일해 부르지만 조선시대에는 한자로 후(堠), 장생(長栍), 장승(長丞, 張丞, 長承) 등으로 썼고, 지역에 따라 장성장싱장신, 벅수벅슈벅시법수, 당산할아버지, 수살수살막이수살목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장승이라는 말의 어원은 1527년 최세진이 한글로 해석한 한자 사전 『훈몽자회』에서 후(堠)를 설명하면서 댱승 후라 기록하였으며, 이 댱승이 쟝승에서 장승으로 변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벅수 등의 말은 호남과 영남지방에서 불리었던 것으로, 바보나 눈치 없는 사람의 뜻으로 쓰여지기도 했다. 멍하니 장승처럼 그저 눈치 없이 서 있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벅수 이빨을 세면 벅수가 된다란 속담이 있고 벅수같이 서 있다란 말이 남아있다. 또한, 수살 등의 이름은 장승을 세워서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살(煞)인 나쁜 재액을 막아 준다 하여 붙인 말로, 민속문화 형태로 천하대장군, 지하대장군이 남성, 여성 형태의 장승과 벅수로 오늘날 일부 전해지고 있다.최초의 장승은 선인의 얼굴을 새긴 원시 신앙물로서 유목 생활과 농경문화의 소산으로 파악되지만, 실제 역사적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존재한다. 분명하게 추측되는 것은 일종의 수호 신상으로서 공통적 염원을 담은 상징이 되어오다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들어 불교의 영향으로 사찰의 장생표(長生標)로 사용되었다 한다. 전해지는 기원 중 신라시대 소지왕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신라 21대 왕인 소지왕이 역참(驛站) 제도의 일환으로 나라의 땅과 길을 과학적으로 관리하며 안전한 길을 안내하고 알려주기 위한 푯말로서 장승을 5리 또는 10리마다 세웠다는 것이다. 그 밖에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에 의하여 중국에서 길을 통해 들어오는 좋지 못한 귀신을 막고자 십 리마다 세운 이정표에 무서운 얼굴을 새기고 장생이라 한 것 등 장승의 기원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다양한 역할을 담당한 장승은, 그 역할 구분에 따라 다르게 불리었는데 마을의 이정표나 안내판 구실을 했던 장승은 노표장승이라고 하였고, 농경과 수렵 및 땔감을 얻는 땅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세운 장승은 경계표 장승이라고 했다. 방위신 역할을 했던 방위 수호 장승이 있으며, 성문 앞에 세워 성문을 지키는 역할을 했던 성문 수호 장승도 있다. 마을 입구에 세워 역병과 재앙을 막았던 장승, 고을과 마을의 지맥이나 수구가 허한 곳을 다스리기 위해 세웠던 읍락 비보 장승이 있으며, 신령한 기운을 품고 제사를 지내거나 소원을 비는 신앙의 대상이었던 장승과 사찰 입구에 세워 경내의 청정과 존엄을 지켰던 불법 수호의 장승도 있다. 산천 비보라고 하여 풍수도참설에 의한 국기의 연장과 군왕의 장생을 기원하기 위해 사찰 주위에 세웠던 장승은 얼굴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장승은 그 역할이나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어찌 보면 못생기고 투박한 모습이지만 우직하고 나름의 멋을 지닌 장승들은 당시 민중의 모습을 표현한 듯하다. 제주도의 돌하르방의 얼굴과 비슷한 모습이 여러 돌장승에서 언뜻 보이기도 하는데, 지리산 기슭 남원 운봉 서천리에 자리한 돌장승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방어대장군, 진서대장군(중요 민속자료 제20호)이라 새겨져 있는데, 세모꼴 벙거지 형상에 둥근 눈망울, 주먹코와 합죽이 모양의 다문 입 등 그 표정이 천진하다.진서대장군은 1989년 도난을 당했다가 되찾았다 하는데, 목이 부러져 연결해 놓은 자국으로 인해 부부싸움을 했다는 설과 두 장군이 싸우다 목이 부러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산내면 실상사의 석장승(중요 민속자료 제15호)도 남원을 대표하는 장승이다. 조선시대 영조 1년인 172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장승으로 높이 250㎝~290㎝가량에 통방울눈에 주먹코를 하고 커다란 귀에 벙거지를 쓴 익살스러운 모습의 장승이다. 원래는 실상사를 지키는 상징적인 장승으로 절로 가는 냇가에 세워진 두 쌍의 돌장승으로 네 개가 있었으나 한 개가 1936년 홍수에 유실되는 바람에 현재 세 개만 남아있다.장승촌과 장승축제가 이어져 오는 순창에는 특별한 장승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순창 충신리 장승(중요 민속 문화재 제101호)은 높이 180㎝로 한 면만 다듬어 장승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머리는 왼쪽으로 경사지듯 깎여 있고 다른 장승에 비해 작은 눈을 하고 턱 아래에 가슴의 흔적인 듯한 조각이 특이하다.순창의 북쪽을 지켜주던 남계리의 장승(중요 민속 문화재 제102호)은 높이 175㎝로 연지 곤지를 찍은 듯한 둥근 점이 볼에 있고, 양미간에는 불상의 눈썹 사이에 있는 백호를 조각하였고, 메롱 하듯 혀를 내밀고 웃는 모습이 해학적이다. 장승의 콧날이 뭉툭하게 잘려져 있는 것은 장승의 코가 아들을 낳는 데 효험이 있다고 믿은 까닭에 떼어진 흔적으로 보인다. 충신리와 남계리에 있던 두 장승은 2004년도에 순창문화회관으로 옮겨져 전해지고 있다.장승은 여러 가지 역할과 모습으로 조상들의 삶과 정서를 다양하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장승은 역참제도가 폐지된 이후부터 점차 소멸되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개화의 바람이 불면서 그저 미신과 구습의 하나로 치부되면서 생명력을 잃어갔다. 하지만, 장승이 예전처럼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자 신앙의 대상이 아닐지는 몰라도, 민속문화의 상징으로 서민을 대변하는 조상의 얼굴인 것은 변함없다. 장승의 역할과 상징은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점차 사라져가고 있지만, 과거 조상들이 품었던 믿음과 가치는 선조들의 손길이 스민 장승의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절절한 기원의 마음이 담긴 채 우리를 너그럽게 바라보며 지켜주는 장승을 지역의 자원으로 잘 전승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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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19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25. 무술년, 다시 돌아본 오수의 개 - 오수견도 진돗개처럼 국내 대표 품종에 포함돼야

사람은 짐승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만 / 人恥平爲畜(인치평위축)공공연히 큰 은혜를 저 버린다네 / 公然負大恩(공연부대은)주인이 위태로울 때 주인을 위해 죽지 않는다면 / 主危身不死(주위신부사)어찌 족히 개와 같다고 논할 수 있겠는가 / 安足犬同論(안족견동논)무술년(戊戌年) 개띠의 해가 오니 사람보다 나은 개를 추모하며 지은 「견분곡(犬墳曲)」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견분곡은 고려시대 문인 최자(崔滋, 1180~1260)가 지은 『보한집(補閑集)』에 실려 있는 작자 미상의 노래이다. 이인로의 파한집을 보충한다는 의미로 지은 시문집인 보한집에는 오수의 개 설화와 더불어 전라도 안찰사를 지낸 그가 살펴봤던 가치 있는 글이 많이 담겨 있다. 그를 정계로 천거하며 인연이 깊은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1200년 오수역(獒樹驛)이란 시구를 남겨 고려시대부터 의견 이야기와 더불어 유명했던 오수에 대한 지명의 근거를 남겨 놓기도 했다.오원에서 점심때 떠나 / 烏園侵午出오수에서 잠깐 쉬었네 / 獒樹片時留사슴은 숲 속에서 한가히 졸고 / 閑鹿眠深草새는 계곡 물에 몸을 적시네 / 幽禽浴淺溝산은 눈에 가득한 그림이고 / 山供滿目畵바람은 내 가슴 상쾌하게 해주네 / 風送一襟秋두 차례 대방국(남원)에 들어왔으니 / 再入帶方國승경(勝景) 속에서 맘껏 즐겼구나 / 天敎飽勝遊- 이규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전집 제9권(1241년), 「남원(南原)으로 갈 때 오수역(獒樹驛)에서 누상(樓上)의 벽에 붙은 시를 차운하다」오수(獒樹)는 개를 뜻하는 한자 오(獒)를 사용한다. 익숙하지 않은 한자지만 개 중에도 특히 사람에게 잘 길들여진 개, 4척(약 120㎝) 이상의 큰 개를 특별히 가리켜 개 오(獒)자라 한다고 하니 글자를 다시 눈여겨보게 된다. 큰 개 오(獒)와 나무 수(樹)자를 합친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의 지명은 한자만 살펴보아도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디 오수뿐이랴.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개, 말, 토끼, 닭, 쥐, 뱀은 물론이고 곰, 호랑이 같은 야생동물이나 용과 같은 신화 속 영물까지 갖가지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들을 지명 속에 남겨왔다. 그러나 막상 이와 같은 지명의 사연이 오늘날까지 지역의 자산으로 남겨져 있는 예는 많지 않다.오수면 근방은 고려시대 남원부 둔덕방과 남면으로 불리던 곳이었으나 특별한 개의 이야기가 지역에 전해져 내려와 지역민들이 이를 지명으로 삼기 원했고, 주민의 요청 끝에 명칭 변경이 승인되어 1992년 오수면으로 확정되게 되었다. 신라시대의 실화로 추측되는 이야기가 천년을 넘어 구전되다 지명에 짙게 남겨진 오수견 사연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임하필기』 등에 전해지고 있다.김개인(金蓋仁)은 거령현(居寧縣) 사람인데 집에서 기르는 개를 몹시 사랑하였다. 하루는 개인이 출행하는데 개가 따라 왔다. 개인이 술에 취하여 길가에서 잠이 들었는데 들불이 일어나 사방에서 타들어오니, 개가 가까이 있는 내에 뛰어들어가 몸에 물을 적셔 와서는 개인이 잠들고 있는 주위를 뒹굴어 풀에 물기를 뿌렸다. 이 행동을 반복하여서 불은 껐으나 개는 기진하여 죽고 말았다. 개인이 술에서 깬 뒤에 죽어있는 개의 모습을 보고 노래를 지어 슬픔을 표하고 봉분을 만들어 묻어 주고 지팡이를 꽂아 표시하였더니, 그 지팡이가 잎이 피는 나무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 지명을 오수(獒樹)라 하였으니 악부(樂府) 중에 〈견분곡(犬墳曲)〉은 바로 이것을 읊은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9권 「전라도 남원도호부」오수의 이야기인 줄은 몰랐어도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어딘가에서 전해 들었을 법한 이 이야기는, 현대에 들어 이 의견(義犬)을 기리기 위해 노력해온 지역 주민들과 지자체에 의해 다양한 기념과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원동산 공원에 세워진 의견비(義犬碑)는 오랜 세월 풍파를 겪으며 마모돼 글씨를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지만 상리 천변에서 발견되어 세워지기까지의 이야기도 드라마틱하다. 의견비에 대한 기록은 1923년 임실군지에 충구비인 의견비(義犬碑)가 있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큰 홍수로 의견비가 사라져 실체를 알 수 없었다. 이후 1930년경 오수면 상리에 사는 주민의 꿈에 나타나 당시 전라선 철도개설공사 현장인 상리 천변에서 발굴되었으나 의견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이에 의견비 위에 고사를 지내니 움직일 수 있게 되어 논둑으로 옮겨졌다가, 현재의 장소인 오수면의 공원으로 1939년 다시 옮겨져 오수의 자산이 되었다. 마모되어 뜻의 의미가 퇴색된 의견비는 지역민들과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해 일부 해독돼 오수견의 충성심을 입증해주고 있다. 무게 5톤, 높이 218㎝, 넓이 98㎝, 두께 28㎝의 의견비는 육조체로 쓰여진 석문으로 되어있어 고려시대 중기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 또한, 개의 발자국 같은 문양과 개의 상반신을 추측할 수 있는 신비로운 문양이 시비를 세우는 데 뜻을 함께 한 사람들의 명단과 함께 새겨져 있는 명물로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무술년(戊戌年)의 무가 땅(土)의 기운을 의미하는 황색을 뜻하다 보니 2018년 새해를 황금개의 해라 한다. 행운의 감을 지닌 황금개라 하지만 실상은 누런 개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네 고향 마을 어귀 어디에서나 꼬리 치며 반기던 누렁이 황구(黃狗)들의 해인 것이다.흔히들 잡종견을 일컬어 똥개라 불러왔지만, 진도의 진돗개, 경주의 동경개, 경산의 삽살개 그리고 북한의 풍산개와 같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품종의 토종개들이 여럿 존재한다. 이 같은 견종들 사이에 임실 오수개도 마땅히 포함되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오늘날 임실군에서는 의견 이야기를 활용한 지역축제나 의견비만이 아니라 고증과 연구를 통해 당시 오수견의 모습을 복원하려고 노력하며 재조명을 하고 있다.연구에 따르면 오수견은 몸에 물을 묻혀 불을 꺼야 했으므로 장모종이었을 것이라는 의견과 덩치도 진돗개보다 조금 큰 중형견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여러 고증을 거쳐 토종견의 혈통을 이어받아 복원된 오수견이 얼마 전 평창올림픽 성화 봉송의 길에도 함께 했다. 오수견의 계속된 관심과 지원이 이어져 우리 고장의 이야기와 더불어 토종 오수개가 올곧이 복원됨을 인정받아 대표 토종개로 우리 곁에서 사랑받기를 바란다.개는 사람과 가장 친근한 동물로서 이제는 반려견이라는 명칭을 얻으며 가족처럼 지내는 존재가 되었다. 견분곡에서 노래했듯이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타고난 충성심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영특함으로 사랑을 받다 보니 우리 주변에는 개에 관련된 여러 속담과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도 개 짖는 소리에 묵은 재앙이 나간다는 속담이 유독 마음에 와닿는 연초이다. 땅의 기운이 강한 새해를 맞으며 다사다난했던 2017년의 묵었던 재앙이 물러가고 황금개가 상징하는 행운과 복이 만방에 가득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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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05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24. 굽이굽이 사연 품은 섬진강 - 긴 세월 수많은 사람 만나며 오감 아우른 감성 가득한 물줄기

2017년도 한 해가 저물어간다. 다가오는 2018년은 고려시대 현종 9년(1018년) 이래 전라도(全羅道)라는 지명이 만들어진 지 천년이 되는 해이다. 긴 세월 이 터에 자리 잡은 수많은 사연이 천년 동안의 시간을 지나며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전라도를 아우르는 많은 이야기 중에 오랜 세월 옥토를 적시고 곁을 주며 흘러온 섬진강(蟾津江)이 있다.섬진강은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팔공산에 위치한 데미샘을 발원지로 물을 내어 마이산의 물과 합쳐져, 전북의 임실, 순창, 남원, 전남의 곡성, 구례, 광양 등 전라도 땅을 고루 적시며 경남의 하동까지 끌어안고 남해로 흘러가는 물길이다.많은 고장을 머물고 흘러가며 이야기를 남긴 강으로, 지금이야 섬진강으로 불리지만, 지역마다 정감 있는 이름으로 달리 불리던 강이다. 하늘로 올라가는 봉우리란 뜻을 지닌 천상데미에서 흘러나와 오원천, 운암강, 옥정강, 앞강, 적성강, 순강(鶉江), 순자강, 방제천, 압록, 잔수진 그리고 모래가 많고 곱다고 하여 모래가람, 다사강(多沙江), 대사강(帶沙江), 사천(沙川), 용왕연, 섬강(蟾江), 두치강(豆恥江) 등 굽이굽이마다 달리 불리던 이름이 지역의 사연을 싣고 육백리를 흘러가는 아름다운 강이다.가녀린 데미샘의 물줄기가 임실 사선대에서 까마귀가 놀던 강이란 뜻의 오원천이 되었다가, 옥정호를 지나 순창 적성리에서 적성천이 된다. 옛날 이 강에는 신이 살던 미륵바위가 있었는데 배를 타고 강을 건널 땐 신이 노하지 않게 항상 마부가 말을 죽여야만 했다. 어느 날 최고원이라는 자가 말 대신 미륵바위의 팔을 칼로 베어버렸고, 미륵바위에서 나온 피로 강이 붉게 물들어 이 강에 적성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바위의 팔은 적성진 앞에 돌무더기로 변했다고 한다. 그 적성강이 흘러 남원에 닿아 순자강이 된다. 여성의 이름인듯한 순자라는 이름은 순한 여성의 마음같이 남원과 곡성 부근을 순하게 흘러서인가도 싶지만, 메추리 순자를 써 순자강(鶉子江)이다. 넓은 들판의 풍부한 곡식과 강에 넘쳐나는 물고기 등 많은 먹이가 있어 사시사철 갖가지 새들이 있고 특히 메추리가 많아 순자강이라고 불렀다 전해지지만, 순자강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옛날 남원 송동(두동리)에 살던 김취용(金就容, 전주 판관을 지냈다 함)이 병으로 몸져눕자, 아들 김정설(金廷卨)이 지성을 다하여 아버지를 간호했으나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병환 중인 아버지가 메추리 고기를 먹고 싶다고 했으나, 메추리는 가을철이 되어야 돌아오는 겨울철 새로 더운 여름철에 메추리를 구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효성이 지극했던 김정설은 천지신명에 열심히 기원하고는, 메추리가 많이 서식한다는 순강을 찾았다. 강가에 가자 그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메추리 한 쌍이 하늘에서 나타나 강으로 떨어졌고, 김정설은 반갑게 그 메추리를 건져다 아버지에게 고아 드렸더니 아버지 병이 말끔히 나았다고 한다.이 이야기가 전해지자 나라에서는 그의 효성을 치하하여 정려를 내리고 이 강을 메추리가 떨어진 강이라 하여 메추리 순(鶉)과 효성 지극한 아들 자(子)를 합하여 순자강(鶉子江)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효자, 효부 이야기는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것이지만 메추리 이야기와 더불어 지역의 강 이름으로 전해져 오는지라 더욱 의미가 있다.순자강(鶉子江)은 두 갈래의 근원(根源)이 있다. 그 남쪽 근원은 장흥군(長興郡)에서 나와 북쪽으로 꺾여 동쪽으로 흘르다가 순천(順天)과 곡성(谷城)을 경유하여 압록 나루〔鴨綠津〕에 이르는데, 남원(南原)에서 온 북쪽 근원의 본류(本流)와 여기에서 합쳐진다. 압록 나루의 위로 수백 리 물길은, 산과 계곡을 뚫고 시내와 여울을 모으면서 굽이굽이 감돌아 흐르므로 뛰어난 절경이 많다.- 황현, 『매천집』 제6권 「영의정기」 중에서또한, 황현의 글을 보면 강의 아름다움의 근원을 말하는 곳에 순자강과 더불어 압록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압록은 대황강인 지금의 보성강이 섬진강과 만나는 곳으로, 푸른 초록의 두 강이 합해지는 곳이라 하여 합록(合綠)으로 불리다가 철새들이 많이 날아드는 것을 보고 합(合)을 오리 압(鴨)으로 바꿔 불러 압록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푸른 압록은 구례에 이르러 잔잔한 물결을 뜻하는 잔수진이 되었다가 화개에서는 용왕연이 되고 모래와 관련된 이름들이 나오다 광양에 이르러 지금의 섬진강과 관련된 섬진(蟾津)이 등장한다. 고려가 새로운 시대를 연 후에 붙여진 이 이름은, 고려 우왕(1385년) 때 왜구가 지금의 섬진강 하구로 침입해 오자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자 이에 놀란 왜구가 광양지역을 피해갔다고 하여 두꺼비 섬(蟾), 나루 진(津)을 써서 부른 이름이다.조선시대에는 현재의 섬진강을 섬강(蟾江)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섬진강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나루의 섬진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때에는 섬강을 구례 현으로부터 섬진나루를 지나 지금의 광양만에 이르는 물줄기를 가리키다가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지금의 섬진강 본류 전 유역을 섬진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작은 물줄기 데미샘에서 남해에 이르기까지 섬진강은 흐르는 물길만큼 수많은 세월과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우리의 강이다. 그래서 오랜 옛날부터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섬진강 강을 노래하는 시인이나 문학, 그림 그리고 소리가 발달하여 오감을 아우르는 감성 가득한 강이다.섬진강을 중심으로 동쪽은 동편제 서쪽은 서편제로 나뉜다 하지만, 본디 두 소리가 한 곳에서 출발했고 한 곳으로 흐르므로 두 소리 모두 웅숭깊은 소리를 지닌 이유는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에 근본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2018년 전라도 정도 천 년이 되는 해, 그 이상의 사연이 켜켜이 자리하고 있는 산하를 둘러보며 전라도 옥토에 가득한 우리 이야기들을 살뜰하게 살펴보자. 섬진강만 보더라도 옛 이름이야 남아있지만, 그 귀한 사연들은 아직 세상에 온전하게 빛을 내며 전해지지 않고 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는 옛말처럼 섬섬옥수 귀한 자원을 이제 하나둘씩 꿰어 천년을 더 할 이 땅의 의미를 되살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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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2.22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23. 미륵사지·광한루원 다리가 남긴 흔적 - 돌다리, 상상과 전설로 지역-역사를 잇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취객이 다리를 더 잘 건넌다, 다리 아래서 원을 꾸짖는다, 십 리에 다리 놓았다, 언다리에 빠진다 등 예로부터 다리에 대한 속담은 많은 의미를 지닌 채 전해지고 있다.그 중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란 말은 매사에 신중하고 안전하게 행동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지만, 한편으로 돌다리(石橋)가 그만큼 튼튼하고 안전하다는 이면의 의미를 품고 있기도 하다. 다리는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다양한 재질과 형태로 발전해왔지만, 우리 선조들은 단단한 돌다리를 가장 바람직한 다리의 재질로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반영구적으로 오랫동안 남아있기를 원하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동네 냇가를 건너기 위해 디딤돌을 듬성듬성 놓았던 징검다리에서부터 석재를 길게 걸쳐 놓은 듯한 널다리나 교각이 반원형을 이루게 하여 구름다리처럼 만드는 등 돌다리는 석재의 특성과 축재기술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모양이 어떻든지 간에 대부분 돌다리를 만들기 위한 석재는 주변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돌이 재료가 되기 마련인데, 익산의 황등을 비롯하여 석재가 풍부했던 우리 지역은 돌다리의 가설 여건이 좋아 돌다리의 옛 흔적은 물론이고 관련된 이야기가 진하게 남겨져 있는 곳이다.삼국시대 뛰어난 석공 기술을 지녀 신라로 뽑혀가 불국사 석가탑을 건설했다던 백제인 아사달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추고천황 20년(612년)에 백제의 토목기술자인 노자공이 일본에 건너가 현재 일본의 3대 기물의 하나인 오교(吳橋)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 백제인의 석공기술과 다리 축조기술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는 현존하는 백제 다리가 없는 것으로 오랫동안 알려져 왔으나 발굴 진행 중인 익산 미륵사지에서 다리 유구가 조사되면서 백제시대에 남겨진 다리에 대한 귀한 흔적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다리 유구는 익산 미륵사지의 강당터(講堂址) 중심축 사상에서 북측 승방터(僧房址)와 금당 사이를 잇던 것으로, 석조 다리 위는 목로 회랑으로 추정되며 교각은 4개소인 누교(樓橋)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누교는 옛날에 존재했던 다리 형식으로 다리 위에 누각이 있거나 다리 전체가 회랑식 건물로 되어 있어 다리를 덮고 있는 형태를 띠었다고 한다. 미륵사 누교는 백제시대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할 때 함께 가설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다리의 연결과 정자 역할을 함께 하며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잇는 월랑의 누교로 보인다. 아직은 그 모습을 추측만 할 뿐이지만, 백제의 우월한 아름다움과 기막힌 기술을 미륵사지의 바른 복원과 함께 재현되기를 바랄 뿐이다.이렇듯 백제인의 돌 가공에 대한 우월한 기술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는 익산의 백제 다리가 있는가 하면, 남원에는 조선시대 세조 때 가설된 오작교(烏鵲橋)가 이야기를 품고 지역과 역사를 이어주고 있다. 오작교라고 하면 음력 7월 7일 칠석날에 견우와 직녀의 상봉을 위해 까마귀와 까치가 모여 만들어준다는 은하수 다리를 떠올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작교는 전설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인용한 다리가 전라북도 남원에 석재 다리로 실존하고 있다. 남원 광한루원에 있는 오작교가 주인공으로 춘향전(春香傳)에서 춘향과 이도령이 사랑을 속삭인 바로 그 장소이기도 하다.오작교가 놓인 남원 광한루원의 역사는 조선시대 황희(黃喜)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되어 온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원에 온 황희는 주변을 거닐다가 풍광이 아름다운 곳을 발견하고 조그마한 누각을 지어 이름을 광통루(廣通樓)라고 하였고, 이후 1444년(세종 26)에 하동부원군 정인지가 이곳 누각에 올라 호남의 승경이로다. 달나라에 있는 궁전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가 바로 이곳이 아닌가?라며 감탄한 데서 그 이름을 광한루(廣寒樓)라고 바꿔 부르며 오늘에 이르렀다. 광한루 탄생 이후 오작교는 남원부사 장의국이 광한루를 수리하면서 주변에 물을 끌어다가 누 앞에 은하수를 상징하는 큰 연못을 만들고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담긴 석교를 가설하면서 생겨났다. 오작교는 화강암을 가공하여 4개의 홍예(무지개 모양의 아치)를 석축으로 길게 쌓아 연결하였는데 그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1872년(고종 9)에 전라도 남원부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채색지도 《남원부지도》에는 화려한 색상과 정교한 표현으로 당시 남원 주변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데 지도 정중앙 읍성의 남문(우측 방향) 밖에 광한루와 오작교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어 아름다운 모습을 전하고 있기도 하다.남원부(南原府)에 광한루(廣寒樓)가 있고, 그 밑에 오작교(烏鵲橋)가 있는데, 그 고을의 뛰어난 경치를 이루고 있다. - 강희맹, 『해동잡록』(1670년)교룡성 북쪽 산은 창 모양 같고 / 蛟龍城北山如戟오작교 남쪽 강은 비단 같구나 / 烏鵲橋南水似羅- 이덕무, 『청장관전서(1795년)』광한루와 오작교는 이곳을 거쳐 간 선조들이 그 풍광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옛글로 앞다투듯 남겨 놓았다. 광한루는 정유재란 때 불타 1626년에 복원되었지만, 돌을 주재료로 쓴 오작교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한 아름다운 모습에 더해 오작교가 더 귀한 것은 사랑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덕분일 것이다. 은하수를 건널 수 없어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연인들이 일 년에 오직 하루, 까마귀와 까치가 만들어주는 다리를 건너 만나게 되는 재회의 희망과 기쁨, 그리고 다시 헤어져야만 하는 슬픔. 하늘길을 이어주는 견우와 직녀 사이의 다리는 신분의 도랑을 뛰어넘어 두 사람을 이어주는 이도령과 성춘향의 사랑과 흡사하기도 하다. 오작교는 이제 견우와 직녀, 춘향과 이도령의 사연이 덧대어져 부부가 같이 건너면 금슬이 좋아진다는 전설이 되어 과거와 현재를 이어준다.이처럼 다리는 필요에 의해 공간을 잇기 위한 것으로 만들어져 사람과 사람을, 시간과 시간을 연결하는 이야기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 지금은 옛날 선조들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고군산의 바다에도 섬과 섬 그리고 지역과 사람을 잇는 해상교량들이 세워지고 있다. 그 일대를 누비었던 최치원 선생과 이순신 장군과 석재 기술자인 아사달도 지금의 고군산도를 이어주는 다리를 보면 세상이 개벽한 일이라 여겼을 것이다. 시간을 내어 다리로 건널 수 있는 고군산도도 찾아가 보고, 덜 복원되어 상상 속에 존재하는 익산 백제 다리와 현존하는 남원 조선 다리가 남긴 흔적을 찾아보면 어떨까. 아직도 건재하게 남아 아름다움을 이어주는 오작교에 대한 문헌 속 이야기를 찾아 선비들의 마음과 사랑 이야기도 살펴보고, 옳게 복원되기 위해 천천히 시간을 되돌리는 과정을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거기에 상상 속에서만 맴도는 미륵사지의 아름다운 다리에 대한 이미지를 지금의 정보통신기술을 빌어 재현하여 백제시대의 선조들이 전하는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빨리 체험할 수 있으면 한다. 그리고, 돌다리에 대한 속담을 되새기며 여유가 있는 이들에게는 조심조심 돌다리를 두드려 가며 행보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살이 처신이겠지만 두드려볼 틈도 없이 급히 다리를 건너야 하는 이들에게 튼튼한 다리가 되어주는 것 또한 여유 있는 사람들의 책임이 아닌가 싶다. 최명희 작가의 혼불에 나오는 징검다리처럼 디딤돌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며 한 해를 소중한 마음으로 잘 마무리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머무는 곳을 소중하게 알아야 한다. 고을이건 사람이건 바로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 내가 만난 이 순간의 사람이 내 생애의 징검다리가 되는 것인즉.- 최명희 『혼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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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2.08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22. 지진의 역사가 말해주는 것 - 역사의 경고…한반도에 지진 없던 시대 없었다

태종 12년 2월 1일 전라도(全羅道)에서 지진(地震)이 일어나니 서운관(書雲觀)에서 해괴제(解怪祭)를 행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예전 사람이 말하기를, 천재지변을 만나면 마땅히 인사(人事)를 닦으라.고 하였으니, 반드시 제사를 행할 것은 없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2월 1일 병진 1번째 기사)지진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중 일부이다. 경주 지진에 이어 최근 포항에서 일어난 큰 지진으로 나라가 떠들썩하다. 바다 건너 멀리 일본의 일일 뿐 지진 안전지대인 줄로만 알았던 우리 일상에 닥친 변고로 많은 사람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지만 사실 우리 역사 속에서 지진의 경고는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되어 기록으로 남아 있다.삼국시대나 고려시대까지 멀리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조선왕조실록』에는 지역마다 일어난 지진 등 천재지변에 대한 기록과 이에 대한 관리와 임금의 다양한 반응과 조치들이 기록되어 있다.앞서 임금에게 지진을 이야기한 서운관은 기상을 관측하고 시간을 관장하는 곳으로, 고려시대부터 일식과 월식 그리고 우주의 별들을 관찰했고 조선시대 초반 태조시기 한양 천도에도 관여를 하였다. 1395년에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의 석각을 제작하고, 비의 양을 재는 측우기와 하천의 깊이를 알 수 있는 수표 등을 제작하고 설치하는 등 지금으로 치면 기상청의 역할을 더해 각종 과학 관련 업무까지 담당하며 장영실을 비롯한 많은 관원을 배출한 곳으로, 세조 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이 된 관청이다. 그렇게 천기(天氣)를 살피며 기상을 예측하는 일을 담당하다 보니 천재지변에 관한 일을 주로 임금에게 아뢰다 이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을 경우 꾸중을 듣거나 귀양을 가는 일이 많은 관직이기도 했다.『조선왕조실록』에 남겨진 많은 지진 기록에는 지진의 횟수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단순히 지진이 발생한 횟수보다도 사람들의 반응과 대처 자세이다. 지진이 나고, 가옥이 흔들리며(「선조실록」 52권), 담과 가옥이 무너지고 허물어져 사람이 많이 깔려 죽기(「단종실록」 12권)까지 하는 여러 피해 기록 속에서, 신하들은 자연의 현상을 무언가의 계시로 보아 제사를 청하거나 임금이 직접 나라에 재변(災變)이나 기이한 자연 현상이 있을 때 이를 해소하기 위해 지내던 제사인 해괴제(解怪祭)를 지내기도 하였다.그중 태종은 지진을 정국의 정치적 개편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어전에서 회의하다 직접 지진의 진동을 강하게 겪은 태종은 지진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두려워하며 즉각 이용했던 왕으로, 지진을 사람 탓으로 치부하여 자신의 왕권 강화에 방해된다고 여긴 처남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제거했다. 처음에는 민 씨 형제의 부덕함을 지적한 사간원의 상소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이들을 제주도로 귀양 보냈으나 이듬해 다시 큰 지진이 발생하자 이들의 해괴함으로 다시금 큰 지진이 발생했다 탓하며 자결을 명하여 이들을 지진의 희생양으로 삼았다.또한, 지진을 정치적으로 보다 극적으로 활용한 사례는 중종 때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던 조광조의 사림파와 그 반대파인 훈구파의 대립이었다.조광조는 중종에게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음(陰)이 성하는 조짐이어서 지진으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소인(공신)들을 멀리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다고 주장했고, 이에 중종은 조광조의 손을 들어주어 사림파가 정국 개혁을 주도하게 하였다. 그러나 1518년 큰 지진이 다시 일어나자 도리어 반대 세력에게 역공을 당하게 된다. 이는 결국 사림파가 대거 숙청되는 기묘사화로 이어지고 이후에도 중종은 1518년의 대지진이 기묘사림의 변란(己卯士林之變) 때문이라고 언급하는 등 불운한 사건으로 남았다. 또 지진을 예언하여 민중들의 동요를 일으킨 사람들의 죄를 벌해달라는 기록들을 살펴볼 수 있다.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을 사람 탓으로 돌리는 것은 지금의 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한 판단으로야 터무니없는 이야기이지만 당시에는 충분히 받아들여질 법한 이유였나 보다.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의 태평시대에도 어김없이 지진 발생의 기록이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역사적으로 시대를 막론하고 한반도에 늘 지진이 있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므로 방심 없이 자연재해에 철저히 대비하는 것이다.조선시대 지진의 기록은 지진의 범위가 경상도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주, 익산, 고부 등 우리 전라북도 지역에도 고르게 발생했다. 그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 지역도 결코 안심 지역이 아님을 알 수 있다.전라도의 전주(全州)남원(南原) 등 27개 고을에 지진이 일었다 (「세종실록」 15권)전라도 전주 등 13고을에 지진이 일었다 (「세종실록」 65권)전라도 전주에 지진(地震)이 일어나니,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해괴제(解怪祭)를 행하였다 (「세조실록」 9권)남원부(南原府)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예종실록」 7권)전라도 익산군(益山郡)에 지진이 있었다 (「중종실록」 27권)전라도 임실(任實)에 지진이 일어났다 (「명종실록」 17권)전라도의 전주(全州)여산(礪山)임피(臨陂) 등 고을에 지진이 있었다 (「인조실록」 42권)전주(全州)김제(金堤) 등의 고을에 지진이 있었다 (「효종실록」 20권)전라도(全羅道) 정읍(井邑) 등 세 고을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숙종실록」 29권)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전라도 지역의 지진 기록을 전라도 키워드가 포함된 것으로만 한정해도 200여 건에 이르고, 나라에 본격적인 지진 관측이 시작된 1978년 이래로 따져도 전라북도에서 발생한 지진은 80여 차례에 이른다고 한다.조선시대에는 해괴한 일로 여겨 지진을 두려워하며 제사를 지내거나 누군가의 잘못으로 탓을 돌려 반대파를 숙청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지진을 이용하였다.그런 악폐가 있었지만, 관은 지진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의 상황을 파악하여 이를 기록하고 구호 활동을 하는 등의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지진과도 같은 큰 자연재해가 두려움에 대상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특히 현재의 과학으로도 정확하게 예보할 수 없는 지진의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일상에서 위험을 예측하고 준비하며 다가올 상황을 앞당겨 예행연습처럼 시뮬레이션해보는 것은 중요하다. 지반이 약한 곳이나 붕괴의 위험이 있는 장소를 미리미리 점검하고, 재난이 발생했을 때 헤쳐 나갈 방법을 숙지하고 준비해야 한다.수많은 역사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과거의 기록들이지만, 기록의 힘으로 우리에게 정확한 메시지를 준다. 역사의 기록으로 알려 준 우리 지역의 지진 진앙지를 분석하여 재난에 대비하여야 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포항 시민에게도 온정의 손길을 내어주는 것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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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24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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