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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81) 장마에 그 마을은 안녕한가

주룩주룩 쏟아지는 비가 온 세상을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란 윤흥길 소설 「장마」의 구절과도 같은 나날을 지나고 있다. 장마는 여러 날 오랫동안 내리는 비로 오란비라 하였고, 오랜의 한자어인 장(長)과 맑다에서 유래한 물의 옛말인 마ㅎ과 합해져 1500년대 중반 이후부터 ㅤㄷㅑㅇ마ㅎ로 표현되다가 쟝마에서 장마로 변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맛비를 보니 삼 년 가뭄에는 살아도 석 달 장마에는 못산다. 장마에 논둑 터지듯 한다.란 근심을 담은 속담과 더불어 임실군 덕치면 물우리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섬진강 상류에 자리한 물우리(勿憂里)는 물이 주변에 많다는 의미로 불린 물골 혹은 물구리에서 유래되었다. 하지만, 강에 인접한 탓에 물로 인한 근심이 끊이지 않은 곳이어서 물우리라 알려졌다. 물우리는 섬진강이 아름답게 굽이치는 물가의 마을이지만, 항상 물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있다 보니 마을의 평안을 기리는 장소를 만들었다. 섬진강이 내려다보는 곳에 특별한 당산나무와 두 기의 가묘가 있는데 그 유래가 깊다. 마을의 수호나무인 당산나무는 강한 기운을 지니고 있어 도둑이 마을에서 재물을 훔치고는 당산나무 근처에서 뱅뱅 돌다가 결국 마을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잡히게 한다는 이야기와 정성껏 제를 모시면 아들은 얻는다고 전해지는 나무이다. 신비로운 힘을 지닌 당산나무 옆에는 당산 할머니의 형상을 만들어 묻고 봉분을 올려 만든 할매묘가 있고 길 위쪽에는 할아버지 형상을 만들어 묻어 동네에서 할아씨묘라 불리는 할배묘가 있다. 당산제를 지내는 모습을 보아온 물우리의 양승래(1940년생)에 의하면, 매년 정월 보름날에 지냈던 당산제는 마을의 큰 행사였다. 마을 사람들은 각각의 역할에 따라 분주히 움직였으며 제물을 장만하는 사람은 일주일 전부터 몸가짐을 조심하며 근신했고, 제사 5일 전부터는 당산나무에 새끼줄로 만든 금줄을 치고는 제를 준비했다. 마을에서 채취한 붉은 황토를 봉분에 더했고 할배묘에 먼저 제를 지낸 후 할매묘에 내려와 제를 지냈다. 제물로 바친 돼지머리를 가묘에 묻고 모정 쪽에 있는 넓은 바위를 가져다 그 위를 덮은 듯 눌러 놓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했다 한다. 농업을 중요하게 여겼던 선조들에게 가뭄과 장마는 큰 문제였다. 큰비나 장맛비가 내리면 나라에서도 비를 멈추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기청제(祈晴祭)를 지냈으니 물우리 같은 물가에 자리한 마을에서는 모두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지낸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곡창지대가 있는 우리 고장은 나라의 주요 관심지로 『조선왕조실록』에 김제에 많은 비가 퍼붓듯이 내려 물가의 전답이 모두 침수되어 곡식들이 썩거나 손상되었고, 김제의 넓은 들은 넘실거리는 물결이 바다와 같다는 것과 남원에 홍수가 나 인명피해가 나고 전답이 묻혔다는 등의 내용이 수해 보고와 상의한 기록 속에 상세히 등장한다. 조선 시기 비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제사를 지내는 것 외에 저자를 여는 등의 여러 대책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도성의 숭례문과 숙정문을 닫거나 여는 것이었다. 장마 때는 숭례문을 열고 숙정문을 폐쇄했고 가뭄 때는 정반대로 했다. 남쪽의 숭례문에서 양의 기운이 들어오고 북쪽의 숙정문에서 음의 기운이 들어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음양을 조절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음의 기운이 넘치는 장마 때는, 양의 기운을 늘리고 음의 기운을 줄이고자 숭례문을 열고 숙정문을 닫으며 음양의 기운을 맞추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왕은 자신의 덕이 부족한 탓에 장마가 지고 백성들이 피해를 받는다고 여겨 반찬 가짓수를 줄였으며, 독특한 장마 대처법으로 가난해 결혼 시기를 놓친 원한들이 화기(和氣)를 범했다 여겨 혼수를 넉넉히 주어서 결혼을 시키기도 하였고 피해받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제원을 마련하고 구황을 하며 여러 방법을 동원했다. 그리고, 홍수로 인한 산사태와 하천의 범람은 산의 나무를 함부로 베어 토사가 유출된 것이 원인이라며 산림을 보호하고 천변에 둑을 쌓고 나무를 심으며 정비에 만전을 기했다. 천변에 버드나무와 푸조나무 물푸레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을 식재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관이 만든 제방 숲을 뜻하는 관방제림도 조성하며 적극적으로 치수에 힘을 썼다. 물우리에서 성대하게 지내던 당산제도 새마을운동이 번져나갈 무렵 동네의 무관심 속에 어느 순간 맥락이 끊어졌고 돼지머리를 누를 때 사용했던 모정 옆 바위도 행방이 묘연하다. 하지만, 당산나무와 가묘는 제자리에서 모두의 안녕을 기리는 마음을 품고 마을을 지켜주고 섬진강을 담담히 바라보고 있다. 이제는, 마을을 잇는 튼튼한 다리가 잘 정비된 섬진강 위에 놓여 졌으니 큰 근심은 덜은 셈이다. 거저 줘도 안 먹는다는 억수장마 끝물의 참외같이 밍밍하고 답답한 일상을 지나고 있지만,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란 말을 굳게 믿는다. 소설 「장마」에서 할머니가 이제 나가 놀아도 좋다라고 말하고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라는 문장으로 소설이 끝맺은 것처럼 유달리 긴 장마 끝에 얼굴을 내미는 쨍한 햇살로 장마를 끝내고는 길을 나서고 싶다. 섬진강이 아름답게 휘도는 물우리에 들러 당산나무에서 모두의 안녕을 기원하고 섬진강 자전거길을 기분 좋게 내 달릴 생각에 마음이 먼저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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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23 16:25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80. 품격의 집, 남원 몽심재

남원 지리산 서쪽에는 호음실(虎音室)이란 마을이 있다. 마을의 지형이 호랑이가 누워있는 형국에다 마을 산인 호두산(현 견두산)에 호랑이가 많아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여 불린 이름이다. 지금의 내호곡으로 개칭된 호음실 마을 안쪽은 죽산박씨(竹山朴氏)의 집성촌이 자리한 곳으로 격이 남다른 고택인 몽심재와 죽산박씨의 종가가 있다. 몽심재(夢心齋)란 이름만 보면, 그저 꿈꾸는 마음으로 풍류의 장을 연 선비의 집인가 싶지만, 고려 말 충신 박문수의 지조 있는 정신을 이은 집이다. 박문수는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개성 근처의 두문동에 들어가고 가족들을 고향인 남원 초리로 내려보냈다. 지금의 수지면 초리에 내려온 죽산박씨 일가는 그곳에서 300여 년을 지냈는데 집안에 재화가 끊이지 않자 1700년 초반 옆 동네인 호곡리로 이주했다. 당시 종손인 박원유는 탁발하러 오는 스님을 늘 정성껏 공양했는데, 하루는 스님이 어머니의 묫자리는 걱정하지 말라이르고 돌아갔다. 얼마 뒤 모친이 세상을 뜬 다음 날 그 스님이 찾아와서 간밤에 어머니가 별세했는지를 묻고는 산에 가면 그곳만 눈이 녹아 있는 터가 있으니 그 자리에 묘를 쓰면 자손이 흥할 것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점지해 준 곳에 묫자리를 쓴 뒤로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박원형과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낸 박홍구 등 두 명의 재상을 내었고, 많은 후손이 문과에 급제하면서 벼슬이 끊이질 않고 만석꾼 부자도 내며 융성한 명문가가 되었다. 몽심재는 박동식(1736~1830년)이 지은 집의 사랑채 이름으로 박동식의 14대조인 박문수가 정몽주에게 충절을 다지며 보낸 시에서 유래했다. 도연명과 백이 숙제가 보여준 고결함과 지조를 빗대어 마을을 등지고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는 도연명이 꿈꾸고 있는 듯하고, 산에 오르니 고사리는 백이 숙제의 마음을 토하는 것 같구나(隔洞柳眠元亮夢 登山薇吐伯夷心)라 지은 시의 첫줄 끝 자인 몽(夢)자와 둘째 줄 끝 자인 심(心)자를 따서 몽심재라 지은 것이다. 지금은 국가민속문화재 제149호로 지정된 남원 몽심재를 몽심재 고택이라 칭하는데, 비탈진 사면에 앉힌 집의 구조가 독특하다. 집은 트인 ㅁ자형으로 경사진 지형을 살려 여러 채의 건물이 앞뒤로 높이를 달리하여 지어졌다. 솟을대문이 우뚝 선 문간채 동쪽에는 대청을 내어, 연못을 조망하기 가장 좋은 곳이어서인지 즐거움이 가득하다는 의미로 요요정(樂樂亭)이라 이름 짓고 하인들의 쉼터로 내주며 배려했다. 대문 안 정면에는 경사진 마당 위에 돌로 가지런히 축대를 쌓고 특이하게도 둥근 기둥이 아닌 팔각형의 기둥을 쓴 사랑채에 몽심재 편액이 걸려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중문을 두었고, 사랑채 위 ㄷ자형으로 자리한 안채는 아궁이가 있는 아래층과 다락에 마루를 매달아 낸 2층의 독특한 구조로 되어있다. 또한, 비탈을 이용하여 돌과 바위를 놓고 꾸민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데, 앞마당에 있는 바위는 마음을 한군데에 집중해 잡념을 없앤다는 주일무적에서 따온 주일암과 존심대 등이 새겨져 있다. 지리산의 기운이 호두산을 타고 그 바위로 모인다니 그 덕에 이 집에 묵으면 큰 인물을 낳는다는 설도 있다. 네모난 연못과 돌로 조성된 물길도 주변 화초와 잘 어우러져 있으며, 너른 뒷마당에는 채마밭과 대나무숲이 조성되어 있어 조선 상류층 정원의 취향을 엿볼 수 있다. 몽심재의 주인은 박동식에서 박주현 박해창으로 이어지는데, 박주현(1844-1910년)은 문과에 급제하며 관직에 올라 승지를 지내다 러일전쟁 이후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다. 남원에 내려온 박주현을 일제가 포섭하려 했지만 응하지 않다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조달하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안타깝게 순국했다. 박주현의 장남인 박해창(1876-1933년)에 이르러서는 만석꾼이 되어 당시 남원은 물론이고 구례까지 박씨 집안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길을 걸을 수 없을 정도라 했다. 이 시기 소작농들에게 추수한 곡식을 넉넉하게 배분하고 이웃에게도 후한 인심을 베풀고 학교(현 수지 초등학교)도 세웠다. 박해창의 둘째 아들은 경성법학전문학교(현 서울법대)를 나와 원불교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교헌(敎憲)을 제정한 원불교 상산 박장식 교무(1911~2011년)이다. 박장식은 물려받은 집(몽심재 옆 건물)을 원불교 교단으로 개조했으며 현재 몽심재도 원불교에 기증되어 원불교 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박문수의 21대 후손이자 내호곡 이장인 박향기(1961년생)는 몽심재와 종가는 인심 좋은 곳으로 소문나 과객들이 한양으로 가다 들리는 중간 기점이자 영호남의 교류를 꽃 피운 곳이지요. 아낌없이 베풀며 덕을 쌓은 죽산박씨의 나눔과 배려의 철학을 대대로 이은 곳이라 전했다. 몽심재 옆에는 박문수를 모신 사당이 있는 종가가 삼강문이라는 편액을 걸고 자리하고 있다. 곧은 마음에 덕을 베풀어 번창한 죽산박씨는 매년 음력 2월 2일 사당에서 박문수의 제를 지낸다. 몽심재에 담긴 사연을 보며 그 가문과 집에 깃든 융숭한 의미를 되새겨 본다. 코로나로 인해 슬기로운 집콕생활이란 유행어가 생긴 요즘의 우리에게 있어 집이 지닌 의미는 무엇일까. 각자의 달라진 일상에서 진정한 치유의 장소로 살아갈 힘을 얻어야 할 곳이야말로 집일 것이다. 집의 의미가 남달라지는 지금 남원의 격조 높은 몽심재 들러 특별한 가문의 철학과 명당의 기운을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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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02 16:54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79. 한반도를 관통한 국도 1호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란 길에 관한 유명한 말이 있다. 이는 로마의 힘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구로, 도로 건설에 능했던 로마인들은 그 기술을 바탕으로 로마를 중심으로 뻗어가는 길을 완성했다. 로마인들의 욕망을 실은 그 길은 군대가 이동하고 물자의 교역과 문화를 전하는 통로였다. 그러한 길의 역할은 인류가 있는 어느 곳이라도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 지역에도 또렷한 땅의 역사로 남아있다. 그 중, 목포에서 정읍을 지나 전주, 익산, 천안, 서울, 평양을 거쳐 신의주까지 한반도를 관통하는 국도 1호선은 수많은 흔적을 품고 길 위에 사연을 더하고 있는 도로이다. 고대 부족 간의 교류로 형성되기 시작한 길은 삼국시대부터 도로로 정비되고 역이 설치되었으며, 통일신라 때는 경주였다가 고려시대에는 개성으로 중심이 옮겨가면서 도로망이 형성되었고 통일문화의 꽃을 피웠다. 조선시기에는 한양인 서울을 중심으로 역로가 만들어져 운영되어 발전하였다. 지금의 국도 1호선의 노선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령으로 신작로를 놓은 것을 근간으로 하는데, 당시 신작로는 경성인 서울을 중심으로 과거 삼남대로인 삼남길의 노선을 대부분 이어받은 것이었다. 삼남대로는 삼남 지방을 가는 큰길로 한양을 중심으로 남쪽에 있는 삼남지방인 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총칭하고 삼남대로는 구체적인 길의 명칭이라기보다 이 지방으로 가는 길을 말한다. 삼남대로라는 명칭의 사용 유래는 확실치 않지만, 『조선왕조실록』에 삼남이라 자주 등장하고 조선 중기 이후 문집, 지방 군현 지도 등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명칭으로 보인다. 그중, 국도 1호선의 근원이 된 삼남대로의 흔적은 1770년 신경준이 기술한 『도로고』상의 6대로 중 제5로인 제주로에 해당하고, 1861년 제작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상의 10대로 중 제8로인 해남로에 해당한다. 그 일부 구간이 현재 남한의 국도 1호선 노선과 동일하여 충남 천안 이북 구간은 조선의 주요 대로와 비슷하지만, 이남 구간은 일제의 수탈과 식민 통치 목적에 따라 일부 변형되었다. 일제강점기 러일전쟁을 앞두고 있던 일제는 비밀리에 밀정을 파견하여, 국내의 간선도로를 조사했고, 러일전쟁 후 한반도 지배권을 장악하자 본격적인 수탈을 위해 항만도로정비, 철도의 건설을 추진하는 등 기반시설 확충에 힘을 기울였다. 일제는 당시 일본인 거점과 수탈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장소를 연결하는 경로를 찾는 작업을 진행하여, 목포와 군산의 개항장을 거점으로 내륙의 곡창지대를 연결하는 노선을 선정했다. 전북에서는 군산항을 거점으로 만경강의 평야지대를 관통하여 전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전주는 조선시대부터 행정중심지이자 물자의 집산지로 평야지대의 종점이라는 지형적 조건도 있어서 지목되었고 전남에서는 목포항에서 영산강 유역의 곡창지대를 연결하는 노선을 택했다. 일제는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도로를 정비하며 3번(경성-목포)과 2번(경성-신의주)으로 부르며 신작로를 조성하여 서울 이북은 만주 침략의 이동통로로 호남의 구간은 수탈의 통로로 사용했으며, 국도 1호선의 근간이 된다. 광복 후 정부수립과 6.25 전쟁을 치른 후 분단되어 신의주까지 이어지던 길은 파주 임진각에서 멈추었고, 1963년 일본이 건설한 신작로를 중심으로 노선을 지정했는데 지금의 국도 1호선은 당시에는 신작로의 노선을 따라 3번인 경성목포선이었다. 이후 1971년 일반국도 노선지정령에 따라 오늘날의 국도 1호선의 명칭이 확정된다. 국도 1호선은 한반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면서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여 지역의 정체성을 품고 있어 길에 자리한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정취가 다채롭게 어우러진 곳이다. 하멜이 제주에서 표류하여 한양으로 압송되던 길이기도 했지만, 선조들이 큰 꿈을 품고 한양으로 가던 길이기도 했다. 그중 한양을 오가려면 반드시 거쳐 지나가던 정읍의 과교천(목제천) 위에 놓인 나무다리는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선비가 그 다리를 건너면 합격을 한다는 삼남길 내 행운의 전설이 깃든 곳이었다. 또한 그 길은 동학농민혁명군이 꿈을 꾸며 지나던 길이었다. 한편 이 길은 많은 이들이 유배지로 귀양을 가던 슬픔의 길이기도 했다. 정약용, 송시열, 김정희 등이 이 길을 통해 유배된 인물들이다. 왕족인 이방간이 유배를 와 자리 잡은 곳을 향해 세 번의 예를 갖추었다는 데서 삼례의 지명이 유래가 되었다 하며, 그 삼례의 만경강가에 자리한 정자인 비비정은 송시열이 비비정기를 써주며 그 의미를 지역에 새겨놓았지만, 이후 송시열은 유배를 가다 그 길이 이어지는 곳인 정읍의 한 길목에서 사약을 받고 명을 달리했다. 풍류를 즐긴 선조들의 흔적과 민초들의 고단한 흔적까지 고스란히 깃든 길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안타깝게 사라진 것들도 많다. 마을에서 깻다리, 목다리, 과교로 불린 나무다리는 콘크리트가 대신 자리한 채 전설로만 남아있고, 인근 피향정에서 아름답게 연꽃을 피어내던 두 연못 중 상연지는 일제가 신작로를 내며 메워져 사라진 상태이다. 하지만, 그 길 깊은 진흙 안에는 피어나길 꿈꾸는 연의 씨앗과 어려운 시절을 지나는 우리에게 행운을 건네줄 전설이 잠자고 있다. 게다가 멈춰버린 신의주까지의 국도 1호선의 노선도 남북관계가 호전되면 온전하게 이어지는 꿈을 꾸게 한다. 과거 누군가에게 길은 욕망을 내달리게 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전과는 다른 일상의 길을 나서는 지금은 오래된 길에 남겨진 선조들의 흔적이 힐링의 길이 되고 나아가 지역의 자산이 되어 모두의 힘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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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11 16:37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78. 김삼의당이 남긴 조선판 부부의 세계

부부는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흔들리기도 하고 뒤집히고 깨지기도 해.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극중 지선우로 연기한 김희애의 대사이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파격적인 불륜이야기라면, 우리 고장에는 조선 시기 하늘이 맺어준 부부의 사랑이야기가 있다. 남원의 한동네에서 같은 날에 태어나 진안에 잠든 김삼의당 부부가 그 특별한 사랑의 주인공이다. 조선의 여류문인 김삼의당(金三宜堂, 1769~1823)은 본관은 김해이고 하립(1769~1830)의 부인이다. 여성의 이름을 밝히기를 꺼리던 당시의 관습에 따라 본명은 알려지지 않고 김 부인이라 불리며 남편이 『시경』에서 차용하여 지어준 삼의당이란 당호로만 전해져 오고 있다. 어린 시절 삼의당은 한글로 된 『소학』을 스스로 읽고 제자백가를 터득하여 문학에도 남다른 실력을 지녔다. 어릴 때부터 성인의 책을 읽어 성인이 가르친 예를 안다고 했으며, 열세 살의 내 얼굴은 꽃과 같고 / 열다섯 살엔 말이 차분해졌네 / 내칙은 이모에게 배우고 / 치장하는 법은 어머니에게 배웠네란 시구를 남겨 몰락한 양반가였지만 예법을 터득하며 가정교육을 잘 받았음을 표현했다. 삼의당은 연산군 무오사화에 화를 당한 김일손의 후손이며, 하립은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의 후손으로 남원 교룡산 기슭에 자리한 서봉촌(지금의 유천마을)에 태어나 같은 마을에 살다 부부가 되었다. 그 기이한 인연에 대하여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태어났으니, 기축년(1769) 10월 13일이었다. 같은 고을 같은 동네에서 살았으니 남원 서봉방 한 마을이었다. 병오년(1786) 봄에 혼례를 올리고 남편과 아내가 되었으니 하늘에서 정해준 배필이며 고금에 거의 없던 일이다는 기록을 남겼다. 삼의당이 남긴 글들은 사후 110여 년이 지난 뒤인 1933년에야 『삼의당고(三宜堂稿)』로 발행되었다. 남원과 진안에서의 생활사가 오롯이 담긴 글은 총 2권 1책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 시가 260여 수이고, 편지글 6편, 서(序) 7편, 제문 3편, 잡록 6편이 실려 있어 조선 여성으로서는 가장 많은 작품을 남겼다. 기녀들이 주를 이루었던 조선의 여류문인의 작품과 달리 그의 특별함은 평범한 여성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것과 남편과 주고받은 시가 많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혼례식을 올린 첫날밤부터 특별한 마음을 시로 주고받는다. 먼저 하립이 천생연분을 만나 좋다는 마음을 전하며 아내의 도리를 다하라고 운을 던지자, 삼의당도 하늘이 정해준 인연이 좋다면서 집안의 화목함이 당신 손에 달렸다고 화답한다. 이로부터 부부는 일상을 시로 주고받는 시우(詩友)가 되었으며, 시문에 남다른 하립의 부모와 형제들도 삼의당을 인정하고 격려한 덕에 많은 작품을 남기게 되었다. 삼의당은 몰락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하립의 과거 급제를 평생 꿈으로 삼고 뒷바라지를 했지만, 하립은 낙방을 거듭했다. 그러는 사이 가세가 더욱 기울어지자 하립의 부모 형제들과 함께 1801년에 남원을 떠나 진안군 마령면 방화리로 이주했다. 진안에 와서는 샘물 달고 땅 비옥한 작은 시내 남쪽 / 좋은 곳 단장하여 초가집 지었네... 사는 곳은 땅을 가려야 지혜롭다하고 / 앉으면 꼭 책을 읽어야 스스로 편안해한다네라는 시구와 가난한 농촌 양반가의 일상과 풍습 그리고 지금처럼 전염병이 돌았을 때 심정 등을 남겼다. 또한, 하립과 부모의 봉양을 위해 장신구와 머리카락을 팔아 여비와 찬거리를 마련한 일들도 기록했지만, 가족을 진심으로 위하고 남편을 그리워하며 애태운 심정을 주로 담았다. 그러나, 하립은 42세에 이르러서야 예비시험 격인 향시에 합격하지만, 안타깝게도 본 시험인 회시에 낙방했다. 기나긴 세월 생이별을 자처했던 삼의당은 허망했지만, 낙방하고 돌아온 하립을 위해 한양에는 훌륭한 인재가 많다지요라며 다독이고 품어준다. 인생 말년에 시서 읽으며 천성을 즐기노라 / 어찌 구구하게 하고 싶은 것을 구하리오 / 이 한 몸 편하게 거처하니 신선이 따로 없네라는 하립의 시구에 삼의당은 서울에서 십 년 동안 분주했던 나그네 오늘은 초당에 신선처럼 앉아 있네라 차운하며 마음을 내려놓고 그간 인고의 세월을 위로했다. 비록 남편이 과거급제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한결같이 남편을 믿고 지지한 삼의당은 하립과 함께 진안에 잠들었으며, 고향 남원에는 그녀를 기리는 시비가 세워졌다. 요즈음 방송가는 불륜이야기가 대세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것은 자극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삼의당 부부와 같은 지고지순한 사랑이 아니겠는가. 천생배필을 만나 부부로 지낸 삼의당의 글과 사연은 믿기 힘든 이야기가 난무하는 세상에 보석같이 빛나는 삶의 기록이며 사랑이야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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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21 18:26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77. 모악산 소나무의 선물, 김제 송순주

소나무는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 보니 애국가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게 소나무이다. 최근에는 코로나와 싸우는 의료진과 지친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해주기 위해 편곡된 노래에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는 익숙한 노랫말로 등장하며 커다란 위안을 건네주었다. 주변에 흔할 뿐 아니라 쓰임도 많아서 목재 외에 약재와 식재로도 사용되는데, 우리지역에는 모악산이 내어준 소나무로 빚은 완주의 송화백일주(松花百日酒)와 김제의 송순주(松荀酒)가 명주로 알려졌다. 완주의 송화백일주가 소나무의 꽃을 주재료로 사찰에서 즐기던 곡차에서 출발했다면, 김제의 송순주는 소나무의 어린 싹인 새순을 주재료로 집안에서 빚어온 전형적인 가양주이다. 오래전부터 소나무를 원료로 한 술은 다양했지만 이중 특히 송순주와 송화주 송근주 송실주 송엽주 등을 한 데 묶은 술은 오송주라 불리며 선조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 독특한 향과 맛이 탁월한 술은 여러 문구에 등장했으며 제조 방법과 약효를 담은 기록도 많이 남아 있다. 고려 문인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 한 잔의 송료(소나무 술)를 마주 앉아 마시며 / 은근한 정 나누면서 눈물 뿌리네라는 시구를 남겼다. 고려 시기 중국에서 건너온 독주를 중화하기 위해 곡주를 섞어 마시면서 소나무를 원료로 한 술도 빚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한때 부안에서 왕실의 재목을 관리하는 직책을 역임하며 소나무에 둘러싸였던 이규보도 그 향과 맛을 즐기며 시구로 남긴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배지인 익산 함열에서 조선 음식을 평했던 허균도 『성소부부고』에 송료를 언급했으며, 정약용은 『아언각비』에 송순주는 우리나라의 유명한 술이다라며 아예 송순주를 언급하였고, 송순주의 향에 매료된 조선의 문인 김정은 송순주의 맑고 산뜻한 향을 예찬하며 벽향춘(碧香春)이라는 별칭을 지어 『해동잡록』에 시구를 실었다. 김제 송순주로 알려진 송순주는 김제시 요천동 경주김씨 집안의 특별한 사연과 더불어 제조 방법이 전승된 술이다. 경주김씨 집안에 조선 선조 때 병조정랑까지 지낸 김탁은 평소 위장병과 신경통으로 고생했다. 부인 완산이씨는 힘들어 하는 남편을 위해 여러 방법을 찾던 중 산사의 여승으로부터 소나무 순으로 빚은 송순주가 병세에 좋다는 말을 듣고 제조법을 배워 남편에게 복용시켰는데 병이 정말 호전되었다. 이후 그 소문은 조정에까지 퍼져 궁중에서도 송순주를 약주로 즐겼다고 전해진다. 그로부터 400여 년이 넘도록 경주김씨 집안에서 이어온 김제 송순주는 15세에 시집와 시어머니와 시할머니로부터 송순주 빚는 비법을 전수받은 배음숙이 며느리인 김복순에게 전해 주었다. 오랜 세월 동안 송순주가 빚어지지 않은 시기는 6.25 전쟁 때뿐이라 전해지며 주세법에 따른 밀주 단속에서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적은 양이라 할지라도 제사용으로 빚었다고 한다. 송순주는 제조 기간이 약 100일 동안 정성을 들여 만드는데 그 절차가 까다롭다. 주재료인 송순의 채취가 품질을 좌우하기 때문에 이른 봄 새로 자란 양질의 송순을 채취하여 시루에 넣어 수증기로 찐 뒤 햇볕에 말려 수분을 제거한 이후에 사용해야만 그 고유의 향과 맛을 지닌 최상의 송순주가 탄생할 수 있다. 모악산 줄기의 청정 소나무와 좋은 물과 옥토인 김제에서 나는 재료들은 최상의 맛을 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밀주를 단속하는 시기에는 이를 피하기 위해 송순주를 빚는 날에는 밤잠을 자지 않고, 한밤중이 되기까지 기다렸다가 대문을 걸어 잠그고 고두밥을 짓고 누룩을 디뎠다. 부엌 바닥에 땅을 파서 술독을 묻고는 장작과 솔잎을 덮어 철저하게 감추는 수고를 감내하며 명맥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밀주 단속이 사라진 1980년대부터 집안에서 편하게 송순주를 빚자 그 명성이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1983년 전라북도 문화재위원회가 주최한 민속주 심사에서 지역의 최고 술로 인정을 받으며, 이를 계기로 1987년 4월 지방 무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면서 김복순은 김제 송순주 제조 기능보유자가 되며 한동안 유명세를 탔다. 그런 까닭에 눌제 정재범의 집안에서 내려오는 술을 계승한 박흥선 명인의 함양 송순주는 김제의 송순주의 명성으로 인해 송순주라 하지 않고 함양 솔송주란 이름으로 지어져 경상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대전의 은진송씨 가문의 술은 대전 송순주로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서울은 해를 넘긴 송순인 송절을 사용한 서울 송절주를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명성이 자자한 원조 송순주 격인 김제 송순주는 기능 보유자인 김복순의 작고 이후 그 명맥이 사라졌다. 한동안 김제시와 김제문화원에서 관련 포럼을 열며 송순주 보존을 위해 노력했지만, 자손들이 이어가지 못하며 그 흔적만 지역에 짙게 남겨 놓았다. 김제의 경주 김씨 집안에서 김제 송순주가 전승되지 못한 사정이 경제적으로 큰 수익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라 전해지나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모악산의 소나무가 내어준 선물에 귀한 사연이 더해져 다져진 전통주의 맥락이 사그라지는 것이 너무도 안타깝다. 아직도 남아 있는 그 흔적을 후손과 더불어 지역의 자산으로 되찾아내면 좋겠다. 한 모금 머물면 입안에서 감도는 은은한 솔향과 감칠맛이 일품인 김제 송순주가 올곧게 복원되기를 기원하며 그 여정에 힘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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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07 16:19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76. 보물이 된 연동리 석불

익산 미륵사지에서 3km 떨어진 삼기면 연동리에는 석불 사거리가 있다. 오래전부터 인근 태봉사의 삼존석불과 더불어 유명한 석불이 있어서인지 조선 시기 고지도에도 석불 관련 표기를 찾아볼 수 있는 장소이다. 이곳 석불 사거리에 자리한 석불사에는 특별한 모습과 사연을 지닌 백제의 석불이 모셔져 있다. 비교적 일찍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연동리 석불은 1934년 일제가 조선의 문화재에 가치를 부여하고자 선정한 보물 153건 중 제60호로 지정된 보물이었다. 당시의 명칭은 보물 제60호 익산 석불리 석불좌상이었지만,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한 뒤 일제가 지정한 보물들을 재분류하며 이듬해에 보물 제45호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으로 바뀌었다. 보물이 된 석불은 한눈에 봐도 원래의 불두(불상의 머리)가 아니라 후대에 새로 만들어 붙인 모습임을 알 수 있다. 비록 불두는 사라졌지만 일제도 보물로 인정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7세기경의 현존하는 백제 최대의 환조(丸彫)석불로 몸체와 불상을 올려놓는 대좌와 아름답고 거대한 광배가 고스란히 남아 있고, 석불이 품은 사연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불두가 없는 불상은 많이 있다. 불두가 사라진 것에는 여러 상황이 추측되는데, 오랜 세월을 지나며 사찰이 폐사가 된 까닭도 있지만 대부분 조선 시기 불교의 탄압으로 훼손되었고 더러는 6.25전쟁을 겪으며 파손되기도 했다. 연동리 석불의 불두도 언제 사라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지역에는 불두가 잘린 사연이 전해진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지금의 익산으로 쳐들어온 왜군이 금마에 들어서자마자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짙은 안개가 일어나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근처의 석불로 사람들이 몰려가 왜군이 빨리 물러가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석불에서 밤인데도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광채가 나자 당시 왜군 장수였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안개의 조화를 빛나는 석불의 탓이라 여겨 석불의 목을 베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비가 내려 조총과 화약이 비에 젖어 적들의 무기가 무용지물이 되었고, 이때 의병들이 습격해 왜적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역에서 굳건하게 믿는 석불의 호국전설은 전해져 내려왔지만 그 이후 석불은 사라졌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사람의 꿈에 나를 꺼내 달라며 부처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가 잠에서 깨어나 꿈에서 점지받은 땅을 파보니 석불이 발견되었고, 그곳에 보호각을 세워 석불을 보호하다가 1963년 석불사라는 절을 지으면서 쓰러진 광배를 일으키고 석불을 법당에 모셨다. 석불사의 옛 사찰명은 봉림사로 백제 시기인 600년경에 창건되어 고려 중기인 12~13세기 무렵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나 관련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지금의 불두는 대략 1900년대 제작하여 올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간 보아온 불상의 자애로운 모습이나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동시대의 얼굴 모습과는 분명 다르다. 친근한 스님을 닮은 것도 같은 석불의 얼굴은 몸체와 다소 이질적일지라도 사라진 불두를 안타까워하며 만든 불심과 투박한 돌을 징끝에 정성을 담아 새긴 석공과 불자들의 깃든 마음들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후대에 만든 불두와 몸체를 붙인 자국이 선명하고 여기저기 마모된 흔적들이 보이지만, 불두를 제외한 156cm의 높이의 균형 잡힌 몸체에 양어깨를 감싸고 대좌까지 길게 내려진 백제 특유의 부드럽고 유려한 옷자락이 우아하다.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중지와 무명지를 구부려 다리에 올려놓은 특이한 수인을 하고 있다. 거기에 결가부좌한 무릎 아래 옷자락이 세련되게 새겨진 대좌는 백제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현재 대좌가 불단에 가려져 있던 것을 정비하고 있는데 불단정비 이후에는 강건하면서도 부드러운 모습의 석불을 온전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광배는 상부에 파손된 흔적이 보이지만 지면기준 높이 448cm에 최대폭 226cm의 연잎형으로 현존하는 광배 중 가장 크다. 불두의 바로 뒤 광배의 중앙에 원형의 두광을 두고 열여섯 개의 연꽃무늬가 조각되었으며,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배경으로 일곱 구의 작은 화불을 새겼다. 연동리 석불에 나타난 전형적인 백제의 광배 형식은 일본 아스카시대 불상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아 일제가 일찍이 조선의 보물로 인정했다고도 전해진다. 또한, 연동리 석조여래좌상의 영험함은 땀 흘리는 석불이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바로 국가의 큰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석불이 땀을 흘린다는 것이다. 석불이 처음 땀을 흘린 것은 과거 6.25전쟁 전이라 알려져 있는데, IMF 외환위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 등 나라에 큰 위기가 오면 땀을 흘렸다고 한다. 연동리 석불을 올려다보니 우리를 품어주는 순전한 자비의 모습이 지긋하다. 천 오백여 년의 시간을 품고 수많은 중생의 염원을 받아주고 다독여준 단단한 믿음들이 투박한 돌에서 묵묵히 피어난다. 신비한 이야기를 과학으로 증명해도 애초의 모습을 찾아 추정하며 다른 형상을 투영해도 알 수 없는 마음이 있다. 2020년 예상치 못한 전염병의 유행으로 우리의 일상이 사라진 지금에도 봄꽃은 피어나 열매를 맺어 주듯이, 다가오는 부처님 오신 날에는 백제의 향기 그윽한 석불사를 찾아 위안을 받고 희망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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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4.16 16:59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75. 세상의 이치를 담은, 고창 윤도

속도보다는 방향이라는 말이 있다. 빨리 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옳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시절을 지나다 보니 우리네 삶의 올곧은 좌표를 안내받고 싶은 생각이 절실하다. 까마득한 시절 선조들은 길을 찾고자 할 때 하늘을 올려다보며 달과 별 그리고 해의 위치를 살펴 낯선 곳이나 어둠 속에서 방향을 찾았다. 이후 지도와 나침반으로 방향을 살피다 이제는 인공위성을 활용한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가끔은 첨단기술의 네비게이션도 잘못된 방향으로 안내하는 오류를 범하는데, 고창에는 조선시대부터 그 방향이 틀림없다 인정받은 전통 나침반인 윤도(輪圖)가 전승되고 있다. 나침반은 기원전 4세기경 중국에서 발명되어 이후 아랍 상인들에 의해 널리 전파됐다고 알려졌다. 우리나라는 기원전 54년에 일식을 관찰했고, 별과 해의 모습 등 하늘을 자세히 살피며 점을 쳤고, 유성이 떨어지거나 해가 두 개 나타났을 때 죄수를 사면한 것 등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시대부터 『주역』과 천문학이 발달해 백제에 천문학을 담당하는 일관부(日官部)와 신라의 천문박사(天文博士) 등이 있던 것으로 보아, 천문학의 중요한 도구인 나침반은 삼국시대부터 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통일신라 때는 풍수사상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고려에 이르러서는 해와 달을 비롯한 별들을 관찰해 천체에 관한 지도를 만들고 별자리의 변화를 계산해 농사철을 확인할 정도로 천문학이 발달했다. 조선시대에는 천문학을 담당하던 관상감에서 윤도를 제작했으며 관련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한 여러 문헌에 남아있다. 1600년(선조 33)에는 명나라의 이문통이 나경을 보여 주었는데, 윤도와 비슷하나 더 자세하며 크기도 소반만큼 크고 해그림자를 재는 것도 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를 보아 이전부터 우리나라에 있던 윤도가 중국의 나경과 같은 목적으로 쓰인 것으로 파악된다. 윤도는 지침을 활용해 방위를 알아보는 것이지만, 동서남북뿐만 아니라 십이지와 팔괘로 방향을 표시하며 우주의 순리와 법칙, 동양의 음양오행 사상이 오롯이 담긴 세상의 질서를 새겨놓은 나침판이다. 그렇다 보니 윤도는 지관이 묘터인 음택과 집터인 양택을 알아보는 풍수용으로 주로 쓰였고, 간략한 형태로 만들어진 윤도는 여행자들이 방향을 보기 위해서도 쓰이며 지남철, 지남판, 나경, 패철로도 불렸다. 패철(佩鐵)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다 하여 불린 이름으로, 부채에 휴대용 해시계 겸 나침판을 장식용으로 단 선추와 거울에 단 면경철과 거북이 등에 윤도를 박은 거북 패철까지 다양했다. 그 중, 조선시대 흥덕현에 속한 고창에서 만든 윤도를 특별히 흥덕 패철이라고 칭했다. 이를 보아 윤도는 천문학자나 풍수를 보는 지관만이 아니라 휴대용 생활과학 도구로 주로 사대부를 위시한 일반인들도 사용했으며, 명품의 대명사가 된 흥덕 패철은 그 방향이 정확하고 견고해 전통 나침반 중 으뜸이었다. 특히 고창 낙산마을에서 제작된 윤도의 정교함을 알아보는 방법이 남다른데, 예로부터 낙산마을 뒷산인 제성산에 있는 고인돌이 그 정확함을 증명해주었다. 거북이를 닮아 마을에서 거북바위라 불리는 고인돌에는 작은 구멍들이 파여 있어 완성된 윤도의 지침을 남북에 맞추고, 실을 동서로 되어있는 거북바위 등에 맞추면 지침과 실이 직각을 이루게 되어 윤도의 정확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그 거북바위의 신비한 기운이 서려서인지 낙산마을은 오래전부터 정확한 윤도를 만드는 고장으로 유명했다. 윤도를 만드는 전문 기술자를 윤도장이라 부르는데, 1996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10호 윤도장 기능 보유자로 지정된 김종대(1934년생)가 낙산마을에서 그 맥을 잇고 있다. 그가 윤도를 전승하게 된 것은, 그의 조부인 김권삼이 한운장이라고 알려진 한씨에게서 기능을 물려받으면서부터이다. 낙산마을의 윤도장 계보는 전씨에서 한씨, 서씨, 한(한운장)씨에서 김권삼(현 보유자의 조부)의 아들 김정의에게 이어지다 아들 대신 손재주가 뛰어난 조카 김종대에게 전승되었다. 윤도장 김종대의 장남으로 현재 전수교육조교인 김희수(1962년생)는 윤도를 만드는 중요한 물건인 자철석, 윤도 판본, 작업대, 50여 개의 연장이 한 세트로 350여 년 동안 가보로 전해지고 있어요. 그 중, 원래 두 개였지만 증조할아버지 때 아쉽게 하나를 잃어버린 자철석(磁鐵石)이 가장 중요한 보물이지요. 자철석은 자성을 띠는 자연석으로 우주에서 온 운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철석은 윤도의 지침을 만드는 것으로 철심을 자철석에 붙여놓으면 자성이 철심에 그대로 옮겨져 지침이 되게 하는 특별한 돌입니다. 자력을 입힌 지침을 결이 고르고 단단한 대추나무에 꽂아 세상사를 새겨 윤도를 만드니 우주의 이치를 새긴다라는 말이 나온 갑소.라 했다. 김종대의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윤도 판본은 1848년(헌종14) 관상감에서 만든 윤도 판본으로 정간과 분금을 하고 각자를 하는 데 기본 자료가 된다. 대를 이어온 윤도장들의 지극한 손길과 세월이 흔적이 고스란히 스며든 작업대 위에서 우주의 질서를 새긴 셈이다. 어릴 적 보았던 할아버지 부채에 매달려 대롱거리던 선추도 어쩌면 이 세상길에서 헤매지 않고 싶었던 어르신의 바람이었을 것 같다. 봄꽃이 아름다운 계절, 온갖 불안을 안고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춘삼월 꽃놀이의 유혹을 떨치고 잘 견뎌내어 좋은 날이 오면 고창으로 길을 나서야겠다. 선운사의 춘백이 그때까지 남아있으면 서글프게 떨어지는 꽃송이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다. 그리고 낙산마을을 찾아 윤도장전수관도 둘러보고, 선사시대의 신비가 서린 거북바위에 변함없이 가리키는 윤도의 올곧은 방향으로 삶의 좌표를 얹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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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26 16:38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74. 천리물길 금강, 뜬봉샘에서 째보선창까지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인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서두 한 구절이다. 금강의 맑은 물이 탁류로 변하는 과정을 빗대어 일제의 압박을 받았던 시대를 표현한 역작이다. 탁류로 표현된 군산 금강하구 째보선창에 합류된 그 물을 따라 천리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끝에 맑은 샘이 있다. 바로 비단을 풀어 놓은 듯 아름다운 강이라 불리는 금강의 발원지 뜬봉샘이다. 뜬봉샘은 전라북도 장수군 수분리의 산자락에서 금강의 첫물을 내는 작은 샘이다. 뜬봉샘이 있는 장수(長水)는 긴 물길이라는 지명으로 물과 깊은 연이 있다. 장수는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룬 고장으로, 물과 얽힌 이름이 유독 많은 곳이다.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에 둘러싸인 장수에는 산이 많은데, 그중 팔공산의 산줄기에서 나와 신이 춤을 추었다 하여 이름이 지어진 신무산(神舞山)은 수분마을을 품은 산이다. 신무산에는 신당이 있던 곳으로 당재라고도 불리는 수분령이 있는데 수분(水分)은 물을 나눈다는 것을 의미하며 북쪽의 물은 금강으로, 남쪽의 물은 섬진강으로 물을 나누어 보내는 기점을 뜻하는 말이다. 그 이름을 딴 수분마을은 오래전부터 물뿌리의 사투리인 물뿌랭이 마을로 불렸다 하니 물의 근원이라는 것을 예로부터 증명해온 셈이다. 수분리의 뜬봉샘은 이성계의 조선 개국 설화와도 관련이 있다. 이성계가 신무산 중턱에 단을 쌓고 백일기도를 올리자, 백일 되는 날 오색찬란한 무지개를 타고 봉황새가 올라가고 하늘에서 새 나라를 열라는 천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성계는 산신의 계시를 들은 단 옆에 하늘의 소리를 귀로 들었다는 의미로 상이암(上耳庵)이란 작은 암자를 짓고 봉황이 뜬 곳의 샘물로 제수를 써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한다. 그 영험한 장소는 봉황이 떠오른 샘이라 하여 뜬봉샘이란 이름이 생겼지만, 상이암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지금은 전설로만 남았다. 뜬봉을 마을에서는 뜸봉이라고도 불렀는데 마을의 재앙을 막고 풍년과 무탈을 기원하며 신무산에 뜸을 뜨듯이 봉화를 올렸다란 것에서 유래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신무산에 장군대좌혈의 명당이 있어 역적이 날까 두려워 그 자리에 숯불을 놓아 그 기운을 다스려 뜸봉이 되었다고도 한다. 그 설에 이어 과한 땅의 기운을 물의 성질을 지닌 뜸봉샘이 자연스레 다독거리게 되니 땅의 합에 더없이 좋은 것이란 말도 전해진다. 그 뜬봉샘 인근에는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천주교 신자들이 은신했던 장소로, 피난을 와 평화와 쉼을 얻은 신자들에게 신앙의 중심지가 된 수분공소(水分公所)가 자리하여 수분마을은 천주교 마을이 있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수분에서 시작된 금강은 우리나라에서 낙동강과 한강에 이어 세 번째로 긴 강으로 여러 문헌과 고지도에 관련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의 『임하필기』에는 금강의 근원이 장수산의 수분치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흘러 용암에 이르러서 송탄이 되고 옥천에 이르러 강경을 거쳐 옥구를 지나 용당진이 된다고 기록이 되어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상류에서부터 적등강, 호강, 차탄강, 화인진강, 말흘탄강, 형각진강, 웅진강, 백마강, 고성진강으로 각 지역을 지나는 금강의 이름들이 거론되고 있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여러 고지도와 일제강점기의 지도에서는 장수 일대의 산맥과 수계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데, <동여도>에는 장수의 수분치 옆에 금강지원이 표기되어 있다. 일설에는 금강 발원지의 위치가 지금의 뜬봉샘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도 하나, 뜬봉샘은 금강의 첫물을 내어 흐르다 강태등을 지나며 금강의 첫 실개천인 강태등골을 이루고 수분천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이어 진안의 용담으로 흘러가 무주를 지나 금산에 이르러 붉은 바위가 많이 있어 적벽강이라 불리며 강의 모습을 갖는다. 이어 영동, 옥천, 대청호로 흘러 대전과 공주에 이르러 금이 곰을 부르는 소리와 비슷하여 생겨난 웅진강으로 불리다 부여에서 백마강이 되어 논산과 익산 곰개나루를 지나 서천과 군산 사이로 흘러 째보선창에 이르러 천리 물길을 다하고 바다와 만난다. 금강하구는 『탁류』에서 초봉이의 아버지 정주사가 서천 땅을 처분하고 똑딱선을 타고 군산으로 건너와 미두장에서 돈을 탕진한 뒤 자살을 기도한 곳이기도 하다. 채만식은 소설의 구절을 빌어 돈을 잃은 미두장이가 강물에다가 눈물이나 몇 방울 떨어뜨리며 울기들은 잘한다 하며, 금강은 백제가 망하는 날부터 숙명적으로 눈물을 받아먹을 팔자라 했다. 하지만, 금강의 첫물을 낸 뜬봉샘은 이성계가 꿈을 이룬 곳이고, 금강하구는 최무선 장군이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을 이용한 진포대첩으로 대승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해도 금강은 백제의 문화를 꽃피운 강임이 틀림없다. 작은 샘에서 솟아 강물로 흘러 바다로 나아가는 그 물길의 시작과 끝에서 자연의 위대함을 다시금 생각한다. 세상의 어려움이 어떠하든 자연은 흔들리지 않고 뜬봉샘은 봄물을 한껏 쏟아내 겨우내 움츠렸던 땅을 적시고 봄을 맞이한 세상에 생기를 불어넣고 꽃을 피워내고 있다.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는 요즘 어수선한 날이 지나면 뜬봉샘과 금강하구의 째보선창을 찾아 다시 시작할 힘을 얻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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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12 16:36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73. 완주의 힘, 봉동생강

성질이 따뜻하고 맛이 매우며 독이 없다. 담을 삭히며 기를 내리고 토하는 것을 멈추게 한다, 습기를 없애고 딸꾹질을 하며 기운이 치미는 것과 숨이 차고 기침하는 것을 치료한다. 허준의 『동의보감』에 기록된 생강의 효능이다. 공자도 자신의 몸을 위해 즐겼다고 전해지는 생강은 우리 선조 때부터 몸을 보하는 민간요법에 주로 쓰인 약재료이자 식재료이다. 그렇다 보니 요즘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 바이러스 19 예방을 위해 면역력을 높이는 식품으로 완주 봉동의 명물인 생강에 관심이 간다. 완주 봉동은 우리나라 생강의 종가로 알려진 고장이다. 봉동에서는 생강을 여러해살이 생강풀인 새앙에서 변형된 말인 시앙으로도 부른다. 오래전부터 지역특산품으로 유명한 봉상생강의 생산지인 봉상이 1914년 우동과 통폐합되어 봉동이 되면서 봉동생강으로 불리고 있다. 봉동은 만경강 상류 봉실산 아래에 자리한 지역이다. 그 까닭에 겨울 북서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산이 막아주고 햇볕까지 잘 들고 물이 풍부하면서도 물 빠짐이 좋아 생강이 잘 자랄 수 있는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생강에 관한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기록은 고려 현종 9년인 1018년에 북쪽 변방에 전사한 장수와 병졸의 부모와 처자에게 생강 등을 하사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기록을 보아 11세기 이전부터 재배된 것으로 추정되나, 고려 때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이 중국 봉성현에서 가져온 생강을 전남 나주와 황해도 봉산군에 심었다가 재배에 실패하자, 봉(鳳)자가 들어간 봉상(鳳翔)에서 재배에 성공하면서 봉동생강의 기원이 됐다는 설도 있다. 당시 생강 관련 기록이 있던 유일한 고장이 지금의 완주를 포함한 전주부였음을 살펴보면 그럴싸한 이야기다. 그 외에, 허균의 조선음식 소개서인 『도문대작』에 소개되었고,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며 삼례와 전주를 지나던 길에 생강을 선물 받은 내용이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 등 여러 문헌과 일제강점기 시장조사 자료에 봉동 장기리 시장의 생강이 특산품으로 소개되었고 『매일신보』등 신문에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세월 봉동생강이 명성을 이어 온 것이 분명하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에는 왕과 생강에 관한 기록이 많이 있는데 정조의 감기나 기침을 다스리는 약으로 쓰였고, 82세까지 장수한 영조는 생강차를 자주 마셨고, 중종 때에는 왕이나 세자가 신하들에게 생강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그 중, 완주의 삼례란 지명을 있게 한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인 회안대군 방간(1364-1421년)과 관련이 있는 생강탄핵으로 화자 된 사건이 있다. 방간이 보낸 생강을 받고도 임금에게 아뢰지 않는 심종을 탄핵하다란 1414년(태종 14년)의 기록이다. 청원군 심종이 지난해 가을, 임금의 행렬을 따라 남쪽으로 갔을 때 완산에 유배 중이던 방간에게 지역의 특산물인 생강을 받고, 그 내용을 임금에게 아뢰지 않았으니 그를 벌하라는 내용이다. 결국, 태조 이성계의 차녀인 경선공주의 남편이자 선왕의 사위이며 태종이 자신의 매제이기도 한 그를 귀한 생강을 몰래 혼자 차지한 죄로 처벌한 사건이다. 생강 때문인지 왕자의 난을 겪고 왕위에 오른 태종이 역모의 징조로 보고 방간과 친한 심종을 벌하며 형인 방간을 견제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결국, 심종은 생강 선물을 받고 난 3년 뒤인 1416년에 지금의 파주인 교하로 유배를 가 유배 생활 끝에 지금의 황해도에서 병으로 죽는다. 당시 사건의 중심에 있던 방간은 왕위 계승 싸움에서 방원에게 패한 뒤 전주 근교인 지금의 완주에 칩거할 때 연류된 것이었다. 생강 선물에 얽힌 이야기가 대신들의 입방아에 오르며 태종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지만, 풍파 속에 물러난 왕족에 관한 예의로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그가 사는 곳을 향하여 세 번 절을 하게 되면서 삼례란 지명을 남겼고, 봉상생강은 유명세를 치렀다. 완주봉동생강 국가중요농업유산 등재 추진위원장을 지낸 이용국(1955년생)은 봉동에 살면서 생강에 얽힌 숱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어요. 우리나라 생강 시배지가 봉동 낙평리라는 이야기도 들었지요. 그곳은 바짝 마르면 흰 모래밭처럼 보이다가 비가 내리면 거무튀튀하니 비옥하게 보이는 희안한 땅이어요. 만경강 수맥이 지나는 곳으로 물을 품은 땅이면서 물 빠짐도 좋아 생강 키우기에 좋고, 오래전부터 씨생강을 보관하는 저장굴이 동네에 내려오고 있어 생강이 잘 된 거라 하지요.라 한다. 생강은 알싸한 향 때문인지 병충해가 적지만 재배와 보관이 까다로운 식물이다. 그렇다 보니 재배환경 못지않게 추운 겨울 생강 종자를 보관하는 방법이 중요하다. 그런 까닭에 봉동은 오래전부터 전해져 오는 전통농업인 온돌식 생강저장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생강농업보존 방식을 잘 계승하기 위해 주민과 전문가와 완주군청이 함께 힘쓴 결과 지난해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중요농업유산 제13호로 지정받았다. 봉동의 온돌식 생강굴은 구들장 밑으로 고래라 불리는 고랑을 파 밑에 생강 저장굴을 만들고 고래에 바위를 깔아 아궁이의 열기로 고래 바윗돌을 데워서 생강 종자를 보관하기 좋은 온도를 유지하여 저장하는 과학적인 방식이다. 잘 보관한 씨생강을 봄에 파종하여 가을에 캐어 식재료로 쓰고 차나 술의 알싸한 맛과 깊은 향을 내기도 하며 몸을 보하는 약재료로 쓰이는 게 생강이다. 또한 강한 생강의 냄새가 산짐승이나 잡귀가 접근하지 못한다고 여긴 선조들이 밤길을 걸을 때 씹기도 한 것이 생강이었다. 몸에 좋은 생강을 많이 먹어서인지 유난히 씨름판 천하장사를 많이 배출한 곳이 봉동이다. 그 천하장사를 낳은 힘의 원천이 생강이라면 코로나 19와 한 판 붙어도 이길 수 있는 면역력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에게 건네주며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기를 원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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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27 15:19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72. 어느 시기에나 있는 두려움, 전염병

염병하네!라고 국정논단의 몸통인 최순실에게 시원하게 외쳤던 환경미화원의 일갈이 한동안 화제였다. 당시 사이다 발언으로 알려진 그 말에 등장한 염병은 지금의 장티푸스로, 염병한다는 것은 전염병에 걸려 헛소리한다란 욕이다. 염병(染病)의 한자어는 염색에 쓰이는 염으로 병을 물들이듯이 옮긴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표현대로 중국 우한시에서 발생한 신종 바이러스인 코로나19가 우리 지역에까지 스며들어 일상을 뒤흔들고 있다. 전염병은 오래전부터 널리 유행하는 병이라는 의미의 역(疫)과 좋지 않은 병이라는 뜻의 여(癘)로, 역려역질여역역진 등 병의 종류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전염병이 발생하면 나라에서 치료와 관리에 힘을 쏟았지만, 귀신의 조화로 전염병이 번졌다고 여겨 전염병이 많이 돌 때는 여제(癘祭)를 행하고 굿을 통해 원통하게 죽은 귀신인 여귀를 달래기도 했다. 전염병에 관한 오랜 기록으로는, 기원전 15년인 백제 온조왕 4년 봄과 여름에 가물어 기근이 생기고, 역병이 유행했다는 것과 신라 선덕왕이 역진으로 죽고, 고구려에서도 전염병이 있었다는 것이 『삼국사기』에 남아있다. 선조들이 지칭한 전염병의 개념은 광범위했다. 유행하는 질병은 물론이고 때로는 흉년이나 기근에 따라 생겨난 영양 부족도 전염병으로 간주했다. 그러다 점차 의학지식이 늘어나자 병에 대한 분류와 치료가 생겨났으며, 그 기록이 『조선왕조실록』과 여러 문헌에 등장했다. 조선 시기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전염병은 지금의 천연두, 장티푸스, 콜레라, 홍역이었다. 홍역은 제구실, 제것이라 부르며 일생에 한 번쯤은 치러야 하는 병이라 여겨 홍역을 치른다란 표현을 했다. 또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손님과도 같은 성향이 있는 전염병을 빗대어 홍역을 작은 손님, 천연두를 큰 손님으로 불렀다.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으로 시작하는 공익광고에 등장한 마마는 천연두이다. 병을 옮기는 신이 두려워 마마라 높이 부르거나 두창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명의인 허준은 선조의 아들이자 훗날 광해군의 천연두를 완치시켜 신임을 얻어, 『동의보감』외 천연두의 예방과 치료에 관한 『언해두창집요』를 왕명을 받아 저술했다. 또한, 오염된 물이 전염병의 주된 요인이라 밝힌 『신착벽온방』 등을 집필하고 수많은 백성을 치료하여 이름을 떨쳤다. 그 외 숙종의 천연두를 치료한 유상이 유명하고, 천연두를 앓았던 정약용이 집필한 『마과회통』이 있으며 지석영은 『우두신설』을 저술하여 천연두 치료에 큰 업적을 남겼다. 현종 때 『조선왕조실록』에는 팔도에 기아와 여역과 마마로 죽은 백성을 이루다 기록할 수 없고 특히 삼남(三南)이 더욱 심하고 참혹한 죽음이 임진년의 병화보다 더 하다라 했다. 당시 삼남인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에 전염병 빈도가 높았던 것은 삼남길이 뻗어가는 곳에 문물과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해 전염병이 옮기 쉬운 조건이었고, 유난히 강우량이 많았던 기후도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 9년인 1733년에는 전라도에 역질이 유행하여 2081명이 사망하였고, 영조 26년에는 역질이 크게 번져 여러 도에서도 여제를 지내고, 전라도에 근신(近臣)을 보내 여제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다. 중종은 전라도에 여역이 창궐하여 많은 백성이 사망하였다고 하니, 의원을 보내어 마음을 다해 구완하라.명했다. 전염병이 퍼지게 되면 임금은 신하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고 정사에 대해 조언하도록 하며 마음을 바르게 다잡았다. 수라상의 반찬 가짓수를 줄이고, 정전을 떠나 다른 곳에 머물며, 제사나 연회에 연주를 금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근신함으로써 재해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전염병이 돌면 나라에선 백성들의 부역을 정지하고 공납을 연기하며 민생을 안정시킬 대책을 마련하였다. 구제와 치료를 맡은 관청인 활인서와 혜민서 등에서 병막을 가설하여 치료와 음식과 의복약 등을 배급하기도 하고, 무의탁 환자를 수용하고, 연고가 없는 시신의 매장은 물론 제사까지 지내주었다. 특히나 감옥의 문을 열고 청소를 하여 밀폐되고 협소한 장소에서의 전염병 전파를 막고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선별하여 석방하기도 하였다. 순종 때에는 콜레라가 퍼지자 경시청은 마을의 공동 우물 사용 금지령을 내렸다. 인도의 풍토병으로 알려진 콜레라는 일본을 거쳐 고종 때 전염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처음에는 병의 정체를 알 수 없어 그저 괴질이라 불렀다. 그러다 쥐귀신이 잠자는 사람의 다리를 갉고 올라와 몸 안으로 스며들어 뱃속을 뒤집어 놓는 것이라 여겨 쥣통이라 했으며 호열자(虎列刺)라 부르기도 했다. 호열자는 콜레라의 중국 표기인 호열랄(虎列剌)을 음역하는 과정에서 랄(剌)을 자(刺)자로 혼동하며 생겨난 이름이다. 이제는 의학의 발달로 새로운 전염병에도 잘 대처하게 되었고, 선조들이 두려워했던 전염병들은 과거의 기록으로 남았다. 뿌옇게 소독연기를 피우며 골목을 지나던 방역차의 꽁무니를 따라다니고, 주사가 무서워 떨며 팔뚝을 걷어 올리고 길게 줄을 서서 예방주사를 맞았던 일도 이제는 아득하다. 하지만, 인간의 능력이 발전하듯이 변이를 통해 점점 강해지는 바이러스가 두렵다. 그럼에도 전염병 대응은 지난 사례의 철저한 복기로 향상되고 있다. 바라건대, 이제 더 이상의 피해 없이 순하게 지나가 우리의 일상이 평온하고 지역의 곳곳이 사람들의 온기와 활기로 넘쳐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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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13 15:29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71. 목숨을 건 놀이, 석전(石戰)의 기억

설 명절을 보내고 나니 새해의 날이 한 달이 지났다. 작심삼일 등 여러 말들이 있지만, 아직 신년다짐을 이어가기에는 늦지 않은 시기이다. 그렇다 보니 우리 선조들은 설에서 정월 대보름에 이르는 시기에 액을 막고 복을 맞는 다양한 민속놀이를 즐겼다. 그 풍습이 전승되어 지금도 정월 대보름에 부럼을 깨고 오곡밥을 먹고, 더러는 달맞이 놀이를 하지만, 오래전 기억 속 까물거리는 풍속으로 목숨을 건 놀이인 석전(石戰)이 있었다. 석전은 패를 갈라 돌팔매로 승부를 겨루는 돌싸움으로 하천 변이나 들판에서 주로 성행했던 놀이다. 사실, 전쟁이라 붙인 한자어를 봐도, 돌을 던지고 싸우며 논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석전을 하다 다치는 경우가 허다했고 죽는 경우까지 있었으니 그야말로 목숨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치열하게 석전을 치른 이후 승패가 갈리면 죽거나 다쳐도 그 책임을 묻지 않았다 하니, 요즘 세상에는 있을 수 없는 놀이이다. 우리 고장에서 성행한 석전에 관한 이야기를 더러 접할 수 있는데, 단오에도 석전을 했다지만, 정월 대보름 횃불놀이를 하다가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번져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횃불놀이의 채비는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 싸움용 홰를 만들면서 시작된다. 싸리나무나 빗자루 사이사이에 송진이 많이 붙어있는 소나무 가지나 그루터기를 촘촘하게 박고 기름을 듬뿍 먹인 솜뭉치를 꼬아 불심지를 만들어 단단히 맨다. 불을 붙이고 휘둘러도 횃불이 꺼지지 않도록 여러 방법을 쓴 것이다. 주로 마을 대항으로 벌어지는 편싸움인지라 마을 경계를 이루고 있는 하천이나 들로 나가 상대 마을 사람들의 약을 올리며 본격적으로 싸움을 건다. 홰를 들고 앞서 나가는 사람을 홰꾼이라 불렀으며, 보름달이 떠오르면 홰에 불을 붙여 휘두르며 싸웠다. 진안 백운면 마을 간의 홰싸움이 치열했고 남원의 횃불싸움은 인월의 달집 태우기와 더불어 유명하다. 고창의 댓불튀기도 대나무를 태우는 소리가 타다타다닥 요란하게 나 놀란 잡귀가 도망가라고 집 마당에서 댓불을 피우는데, 인월의 달집 태우기는 커다란 달집을 태우면서 대나무를 타는 소리와 불의 모습이 장관이다. 댓불튀기나 달집 태우기며 횃불놀이 모두 다가오는 액을 쫓고 무사태평과 풍년을 비는 마음은 매한가지다. 횃불놀이는 편을 갈라 치열하게 싸워 횃불싸움이라 불리었고, 그 싸움에서 자기편이 질 기미가 보이면 돌을 던져 합세하며 돌팔매 싸움으로 번졌다. 이 싸움에서 이긴 마을은 농사에 필요한 물을 먼저 확보하고 상대 마을의 산에서 풀을 먼저 벨 수 있는 권한을 가지니, 농사가 근본인 마을에서 그 내기가 걸린 싸움은 목숨을 걸듯 치열했을 것이다. 순창에서는 마주 보는 복실리와 장덕리의 석전이 정월 대보름마다 들판에서 열렸고 전주에서는 삼천과 전주천 변에서 패를 갈라 동네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치러진 석전이 떠들썩했다. 석전의 유래는 고대 전투에서 생겨난 것으로, 중국의 오랜 세시풍속으로 성행했으며, 돌에 맞아 피가 흐르면 그 집에 행운이 오고,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을 태운 뼈를 논밭에 넣으면 풍년이 든다 하여 이긴 편에서 그 재를 나눴다는 설도 있다. 우리 선조들은 석전인 돌팔매 싸움을 석전희(石戰戱), 편전(便戰), 변전(邊戰), 척석희(擲石戱)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고구려 임금도 즐겼다는 석전에 관한 기록이 중국 역사서인 『수서』에 신라 돌팔매 부대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있으며, 고려 때에는 여진 정벌의 핵심 부대에 돌팔매군을 편성했고 백성들 간에 석전이 성행했다 전해진다. 조선시대에 들어 태종, 세종을 위시한 왕들이 백성들의 석전을 보고 난 뒤, 돌팔매 부대인 척석군(擲石軍)을 정규부대로 편성해 군사적 목적으로 돌팔매 기술을 사용했고 실전에서 왜구를 격퇴하며 많은 공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이 석전을 즐기다가 부상자가 많이 나자 세종은 석전을 금지시켰다. 영조 시기에는 어떤 책임도 묻지 않는 관행을 이용해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것이 적발되는 등 폐단이 속출하자 가장 강력한 금지령을 내렸지만,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미개한 풍습이라며 금지하기 전까지 성행했다. 일제가 금했던 이유는 작게는 수십 명 크게는 수백 명이 패를 갈라 돌을 던지며 싸우는 모습이 위협적으로 보였고, 선조들의 전투훈련 방법으로 실전에 응용된 것을 파악하고 철저하게 금지시켰던 것이다, 게다가 살벌한 분위기로 치열하게 싸워 돌에 맞아 다치거나 죽어도 누구 하나 문제 삼지 않고 끝나면 쌓인 감정을 푸는 그 호방한 기질도 두려워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대까지 성행했고 금지된 기록은 당시의 신문을 비롯해 『경도잡지』와 『동국세시기』에 정월 대보름날 풍습인 석전의 설명으로 남아있으며, 이탈리아 총영사인 까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도, 석전을 구경하던 미국인이 자기 주위에 떨어진 돌을 되던져 한 사람이 죽어 추방되었다는 외국인 참여 기록을 남겼다. 이제는 돌팔매 싸움을 했다는 무용담을 듣기 힘들고, 들판이나 천변에 나가 구경했다는 어르신도 많지 않다. 몇 해 전부터 전주시가 관련 기록을 찾고 있지만, 수집하지 못했다. 이제 마을의 명예를 걸고 피가 터지도록 치열하게 석전을 했던 기억들은 정월 대보름의 달빛 전설로만 남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석전을 치르며 마을의 안위를 지키려 했던 그 마음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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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1.30 16:46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70. 실상사 철불의 손

우리의 신체 중 타인과 접촉이 가장 많은 곳은 손이다. 반갑다 악수를 하고, 손짓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손찌검이라는 단어도 있지만, 힘에 부칠 때 따스하게 잡아주는 손이야말로 그 자체가 위로이고 위안이다. 손을 말하는 특별한 명칭 중에는 부처님의 손을 뜻하는 수인(手印)이 있다. 부처님을 형상화한 불상을 살펴보면 다양한 손 모양을 볼 수 있는데, 어떤 의미를 지닌 불상인지 그 존명(尊名)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바로 그 수인이다. 수인은 고대인도의 제사의례에서 손동작인 무드라(mudra)에서 깨달음과 덕행 등을 연꽃이 피어나는 모습으로 표현한 데서 유래가 되었다고도 한다. 각각의 손 모양에 따라 의미가 부여되다 보니 여러 종류의 불상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수인이 된 것이다. 이렇듯 불상에서 손이 지닌 의미가 깊은데 남원 실상사 철불의 손은 본래의 철로 된 손이 아닌 나무로 만든 손이 끼워져 있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수인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실상사는 당나라에서 유학한 홍척스님이 828년 신라 흥덕왕 대에 창건한 우리나라 최초의 선종사찰이다. 지리산을 지척에 두고 산이 아닌 완만한 들에 자리한 것이 특별하고, 수도 경주가 아닌 남원에 대형 철불이 조성된 것도 획기적이다. 실상사는 실상사가 번창하면 나라도 융성하고 실상사가 쇠락하면 국운도 쇠퇴한다는 말에 따라 왕실의 후광을 받고 번창한 사찰이다. 액운을 막고 모자란 기운을 보충하는 의미로 설립하는 사찰을 비보사찰(裨補寺刹)이라 하는데, 실상사야말로 신라 말 기울어가던 국운을 바로 세우려던 염원으로 창건된 비보사찰이자 호국사찰이다. 풍수지리에서 실상사가 자리 잡은 터는 지리산과 덕유산의 기운이 모이는 곳으로 천왕봉을 마주하는 곳에 자리하여 지리산을 넘어 일본이 영산이라 여기는 후지산으로 대륙의 정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형세로 알려져 있다. 그런 까닭에 실상사는 이후 왜적의 표적이 되고 세조 때 큰불이 나 폐허가 되는 굴곡을 겪었지만, 억불정책이 만연했던 조선 때에도 임금인 숙종의 지원으로 중창된 기록이 남아있다. 실상사 비보의 흔적은 보광전에 있는 종에도 있다.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에 일본 지도를 새겨 종을 칠 때마다 일본 지도를 후려쳐 일본 땅의 기운을 교란시키는 의도로 1694년에 만들었다 한다. 일제가 우리 국토 곳곳에 쇠말뚝을 막아 민족의 정기를 말살시키려 했다면, 실상사는 쇠로 만든 종과 철불 등으로 일본의 지운을 차단했던 것이다. 그 특별한 의미를 지닌 실상사 철불은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이란 정식명칭을 지닌 보물 제41호로 높이 269cm 최대 너비 203cm인 대형 불상이다. 840년에서 860년 사이로 추정되는 시기 실상사 2대 조사인 수철스님 때 엄청난 양인 철 4천근으로 조성한 철불이다. 신라 말 초대형 철불이 남원에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왕실의 후원을 받은 이유도 있었지만, 대규모의 제철산지가 있는 남원 지역의 특성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인근에 철이 많이 나고 지리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만수천을 끼고 있어 물과 땔감이 풍부해 철을 조달하고 제련하기 수월했으며, 실상사가 번창하면서 조성된 것으로 보아 대형 철불을 제작하는데 필요한 인력의 수급도 원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상사 철불은 넓적한 얼굴에 육계라 불리는 상투 모양의 머리를 하고 있다. 세상사를 비춘다는 눈썹 사이의 흰 점인 백호가 뚜렷하고, 옆으로 긴 두 눈에 비해 코와 인중이 짧고 작고 두툼한 입술이 또렷하다. 목에는 가로의 세 줄기 주름인 삼도(三道)가 보이고 넓은 어깨부터 내려오는 법의(法衣)의 주름이 유려하게 흐른다. 부처님의 세계를 의미하는 오른손은 올려 있고 중생계를 뜻하는 왼손은 내려져 있는데, 세월의 풍파 속에서 훼손된 그 손뿐 만이 아니라 등과 다리의 일부가 나무로 되어있다. 약사전에 모셔져 약사불로 알려졌지만, 원래 봉안처도 건물지의 규모와 철정이 가장 많이 발견된 위치로 보아 현재의 보광전 아래 금당지로 추정된다. 1987년 철불의 해체 수리과정에서 철제의 손과 『묘법연화경』을 비롯한 다수의 부장품이 철불 몸통에서 발견되었다. 복장에서 발견된 수인이 두 손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아미타불의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이라 아미타불일 수 있고, 시기적으로 중창과정에서 수인이 교체된 노사나불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어찌 되었건, 발견된 철불의 손은 현재 철불이 모셔진 약사전 안에 연꽃과 함께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철물로 손을 복원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철불이니 철로 된 손이라 맞겠지요. 그런데 기술적인 어려움도 있지만 복원한다는 게 자칫 훼손이 될 수도 있어서 쉽지 않은 일이예요. 하지만, 부처님 손이 나무로 되어있으니 손을 잡으면 철손보다 나무손이 더 따스할 것 같지 않나요.라며 이야기하는 실상사 수지행자의 얼굴이 환하다. 또한, 절망의 나날을 보내는 사람들이 이곳에 와 위로를 받고 희망을 찾는다는 말을 전했다. 불상의 손이 처음 모습으로 복원 되지 못했더라도 그 여러 시간의 흔적이 더해 특별한 의미를 건네며 남겨져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철불과 한 몸을 이룬 나무의 손은 이미 우리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위안의 손이 되었으니 말이다. 새해에 다가오는 액을 막고, 복을 받으며 운을 트이게 하려거든 남원 산내면에 자리한 실상사를 찾아 철불을 만나는 것도 좋겠다. 그리고 영험한 기운이 서려 있는 지리산의 정기도 한껏 품고 한 해를 살아갈 지혜와 힘을 얻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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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1.09 16:05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69. 드루와 전킨 선교사가 남긴 유산

일제강점기 망국의 설움에 젖은 선조들의 손을 잡아준 벽안의 사람들이 있다. 그중, 미국인 드루(A, D, Drew, 한국이름 유대모, 1859-1924년)와 전킨(W. M. Junkin, 한국이름 전위렴, 1865-1908년)은 선교사로 들어와 의료와 교육 활동으로 지역의 근대화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군산은 조선시대에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으며 뱃길을 이용한 물자수송의 주요 거점이었지만, 1899년 개항하기 전까지는 작은 고을이었다. 당시 외국인들이 한국에 들어온 경로는 주로 배로 닿을 수 있는 곳이었고, 그들이 군산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한 것은 제물포인 인천과 부산에서 뱃길로 들어오기 쉬운 호남의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배 안에서 군산을 처음 바라본 초창기 개척 선교사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땅 이구나라고 감탄을 하며 군산에 상륙하여 호남에서 선교를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1893년부터 선교사 레이놀드를 필두로 하여 군산을 통해 들어온 선교사들은 군산에서 전주로 이어지는 지역을 따라 선교답사를 했다. 당시 선교사들을 통역하며 한국어를 가르친 정해원은 전주 은송리에 26불을 주고 집 두 채를 매입하여 선교사를 맞이하였으며, 장터와 거리에 나가 전도를 하여 호남에서 복음을 전도한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 1894년 인천에서 배를 타고 군산에 들어와 선교 활동을 한 드루는 이듬해 합류한 전킨과 함께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했다. 군산과 전주는 그들의 종파인 남장로교 호남선교의 시작지점이었고, 특히 의료와 교육 선교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의 선교활동은 레이놀즈 선교사가 주도하였으며 교육 선교는 전킨이, 의료 선교는 드루가 주관하였다. 그러던 중,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여 서울로 잠시 돌아갔다가, 1896년 전킨과 드루의 가족이 군산으로 이주하면서 군산 선교부가 정식 개설되었다. 두 선교사 가족은 군산 수덕산 기슭에 초가집 두 채를 얻어 사람들을 선교했으며, 이러한 활동으로 전북과 충남 지역에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다. 드루는 미국에서 약학과와 의학부를 졸업한 선교사로, 가난해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다. 기록에 의하면, 드루는 1896년 한 해 동안 2700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약 600건의 간단한 시술을 했다고 한다. 어려운 사람들을 정성을 다해 돌보아주며 선교 활동을 하던 중 남장로교 선교부가 군산에서의 철수를 결정하며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드루의 반대로 오늘날 구암동인 궁멀(거북이 마을, 궁말)로 거처를 옮기며 군산에서의 활동이 이어졌다. 궁멀로 간 드루는 배를 마련하여 고군산과 금강을 따라 김제, 강경, 익산까지 찾아가 전도하면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다. 그곳에서 궁멀교회와 훗날 일제가 구암병원으로 부르도록 한 야소병원이 시작되었다. 예수의 한자어 야소(耶蘇)를 딴 야소병원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으나 1940년대 문을 닫았고, 구암병원의 이름은 한국인 의사들에 의해 1980년대까지 유지되었다. 내가 누워있으면 조선인이 죽어간다는 말을 하며 무리한 탓에 몸이 쇠약해진 드루는 미국 선교부의 명에 따라 치료차 1901년 귀국했으나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드루가 펼친 사랑은 이 땅에 오롯이 남아있다. 전킨은 판사의 아들이자 신학을 전공한 미국인으로 부인 메리 전킨(한국명 전마리아)과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부부선교사는 군산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 어린 세 아들을 풍토병으로 잃는 아픔 속에서도 영명학교를 세우며 지역에 커다란 유산을 남겼다. 교육을 통한 선교는 메리 전킨과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자택과 예배당에서 성경과 일반 교과를 가르치면서 시작됐다. 학생이 늘어나자 1902년 선교부 옆에 작은 집을 짓고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들을 나누어 가르쳤다. 그것이 1919년 3월 5일 호남 최초로 3.1 독립운동을 시작한 영명학교의 시작이었다. 메리 전킨을 중심으로 시작된 영명여학교는 멜볼딘(메리볼딘)여학교로 불렸다. 멜볼딘여학교은 3.5 만세운동이후 일제의 탄압 속에서 신사참배에 대한 강요가 심해지자 1937년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폐교했다가 이후 영광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이 된다. 전킨은 남학교 교장에 취임했고, 영명남학교는 1909년 안락소학교와 영명중학교로 확대되었다가 같은 이유로 폐교되었지만, 해방 후 복교되어 군산제일고등학교가 되었다. 과로로 쇠약해진 전킨도 선교부로부터 전주로 사역지를 옮기고, 20리 반경 안에서만 활동하도록 명령받았다. 하지만 전주서문교회를 맡고, 고아원을 설립하는 등 강행군을 펼치다가, 1907년 성탄절에 폐렴이 걸려 1908년 1월 2일 향년 43세로 별세했다. 이듬해 고인을 기리는 뜻에서 전주여학교는 그의 이름을 따 기전여중학교로 개명하고 메리 전킨이 초대 교장을 역임했다. 전킨의 유족은 전주서문교회에 종을 기증하였고 종탑 안에 종은 그의 행적과 더불어 지금도 남아 큰 울림을 건네고 있다. 두 선교사를 기리기 위해 그들의 첫 도착지인 옛 군산세관 앞과 활동지였던 수덕산에는 기념비와 작은 공간이 세워졌고, 전킨의 유언에 따라 구암동산에 묻혔다가 전주선교사묘역에 잠든 전킨의 묘비 아래에는 풍토병으로 세상을 떠난 세 아들의 작은 묘석도 자리 잡고 있다. 연말이 되니 우리 지역에서 숭고한 삶을 산 그들의 발자취에 마음이 닿는다. 그 선한 영향을 이어 추운 겨울 소외된 이웃들에게 따스한 손길을 나눠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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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26 15:49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68. 천년을 지킨 미륵사지석탑의 석인상

익산 금마면에 있는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석탑 하단 모서리에는 천진한 얼굴의 석인상이 있다. 20여 년간의 복원 기간을 마치고 공개된 석탑에 눈길을 빼앗기느라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자그마한 크기이다. 미륵사는 백제 제30대 왕인 무왕 대(639년) 창건된 사찰로 당시 목탑 1기와 동편과 서편에 석탑 2기를 세웠으나 목탑은 소실되었고 동편의 석탑은 1990년대 복원되었다. 미륵사지석탑으로 불리는 서편의 석탑은 일제강점기 탑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당시 기술로는 최선인 콘크리트로 보수했지만, 석탑위에 덧바른 콘크리트는 우리 역사위에 덧씌워진 오욕의 흔적처럼 아픈 더께로 남아있었다. 조선에 존재하는 석탑 중 최대라며 미륵사지석탑을 평했던 일제는 1910년 12월 조사단이 촬영한 사진과 1915년 석축과 콘크리트로 무너져내린 서쪽 면을 보강한 뒤 석탑의 사진과 도면을 『조선고적도보』 등에 남겼다. 콘크리트로 보강되었던 석탑은 1998년 정밀구조 안전진단 결과 안전성에 문제가 제기되어 문화재위원회에서 해체보수가 결정되면서 복원을 하게 되었다. 앞서 복원된 동탑이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조형물로 인식되자, 서탑의 복원은 2001년부터 18년간의 검증을 거치며 원래 있던 부재를 80%가량 사용해 복원을 마무리했다. 해체와 복원을 거쳐 공개에 이르기까지 지난한 과정이었지만, 그 시간을 다독인 손길들에 의해 미륵사지의 비밀을 풀 수 있는 결실도 얻었다. 2009년 해체조사를 하던 중 석탑 1층 심주석 중앙에 봉인해 놓은 사리장엄구의 발견은 석탑의 건립시기와 미륵사 창건과 연관된 사연을 알게 된 최대의 성과였다. 그에 앞선 2008년에는 그 천진한 얼굴의 석인상 1기가 발견되었다. 해체 전 탑의 북동, 북서, 남동 측의 기단 모서리와 바닥에는 총 3기의 석인상이 있었는데, 남서 측의 석인상이 발견되면서 석탑의 사방을 수호하는 수호석상의 완전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보물로 지정된 석탑과 사리장엄구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발견 당시에 화제가 되었다. 해체하던 중 남서 측 바깥의 지면 석축 내부에서 발견된 석인상은 오랜세월 외부에 노출되어 풍화작용을 겪은 3기의 석인상과 달리 석축 안에 있던 상태라 보존상태가 매우 좋았다. 보수정비사업단에서 실무를 담당한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사 김현용은 석인상이 하나 더 있으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당시 7~8명이 함께 석축 해체 작업을 하는데 넙적하게 덮어 놓은 돌 아래에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돌을 걷어내니 둥그런 머리통에 이어 온전한 몸통을 지닌 석인상이 드러나는데 어찌나 기쁘던지요. 늘 긴장하는 현장에서 순박한 얼굴과 가지런히 손을 모은 모습을 온전하게 발견한 그 날이 아직도 생생해요라며 당시의 감회를 전해주었다. 석탑 모서리에 자리한 석인상에 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1910년대에 일제가 남긴 사진과 도면을 통해 붕괴된 석축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구석에 반쯤 묻혀있거나 삐딱하게 자리한 석인상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자료를 보면 9층으로 추정된 석탑이 17세기 초 7층으로 무너지기 전에 이미 석축을 쌓았고, 18세기 중기에 석축이 다시 무너져 6층으로 변형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과정에서 석탑의 사방에 놓여 있던 석인상도 석탑이 붕괴되고 보수되는 과정에서 조금씩 이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석인상은 석탑이 처음 창건된 백제 때 탑과 함께 조성된 것이 아니라, 후대에 사방수호신격으로 탑의 네 모서리에 안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 1층 기단 주위에 노출되었던 기존의 석인상 3기는 풍화와 훼손이 심해 제작시기와 양식을 알기 어려웠지만, 남서의 석인상이 발견되면서 그나마 추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각각의 석인상은 미세한 높이 차이가 나지만 그들의 키는 대략 92~93cm이다. 북동의 석인상은 가장 심하게 풍화된 상태지만 두상과 몸체를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을 지녔고, 북서의 석인상 역시 풍화가 심한 상태로 두상의 일부가 파손되어 떨어져 나가 있으나 손과 얼굴의 모습이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상태이다. 남동의 석인상은 1910년 조사단이 촬영한 사진에서도 그 모습이 상세히 남아있는 석인상으로 북쪽의 석인상에 비해 손 모양과 두상의 귀 모양 등 몸체의 구분이 분명하다. 일제가 기록한 사진과 도면을 통해 붕괴된 석축의 모습과 석인상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남서 측의 석인상은 석축을 축조하면서 석축 안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외부 환경과 차단되면서 다른 세 위치에 놓인 석인상에 비해 훼손되지 않고 뚜렷한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이다. 석인상의 투박하고 순진한 얼굴은 돌하르방과 돌장승을 닮았으며 가지런히 두 손을 가슴에 얹은 자세로 조각되었다. 석인상은 동물에서 사람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이며 둥그런 몸체와 두툼하고 큰 귀의 표현 등을 보았을 때 고려말이나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와 흡사한 유래로는 진묘수(鎭墓獸)라 하여 무덤을 수호하는 목적으로 사용한 석상이 있다. 백제 무령왕릉을 지키는 무덤에도 있으며, 신라시대 성덕왕릉 앞에도 석조물이 있다. 그러한 수호의 기능을 위해 석탑의 사방을 지키는 사방신의 의미로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듯하나 각각 바라보는 방향도 각기 다르고 손과 얼굴의 모습도 다른 석인상은 백제 무왕과 왕비가 품었던 꿈을 굳건하게 수호한 물상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천년을 넘게 사방을 주시하며 그곳을 닳도록 지켜 온 석인상을 만나 그 순전한 모습을 마주하고 탑돌이를 하며 우리의 꿈도 기원하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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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12 17:16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67. 시간이 쌓이는 만경강 다리

만경강에 은빛 물결이 넘실거린다. 갈대와 물억새가 바람에 흔들거리며 군락을 이룬 모습은 봄철 벚꽃만큼이나 아름답다. 오래전부터 만경강 갈대밭이 백리길에 이른다 하여 이곳을 노전백리(蘆田百里)라 불렀는데 그 명성 그대로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그 모습을 여자의 마음에 빗대어 갈대와 같다고 했는데, 사실 그 갈대라 생각한 은색의 꽃이삭은 억새이다. 벼과에 속하는 둘은 헷갈릴 수 있지만, 구별방법은 의외로 쉽다. 억새는 정갈한 은빛머리이고 갈대는 갈색의 부스스한 사자머리를 하고 있다. 혼돈되고 잘못 알려진 경우가 어찌 갈대와 억새뿐 이겠는가. 그들과 함께 만경강에 어우러져 있는 새창이다리(만경대교)와 목천포다리(구(舊)만경교)가 그렇다. 만경강 다리들이 있는 마을에서는 만경강을 지나는 다리를 모두 만경강 다리라고도 불렀다. 그래서인지 1933년 준공된 새창이다리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콘크리트 다리라는 잘못된 정보가 알려지게 되면서 널리 퍼졌다. 사실, 한강의 최초 인도교인 한강대교는 1917년 준공되었고, 만경강만 보더라도 1928년 준공된 만경교가 새창이 다리인 만경대교보다 먼저 놓인 콘크리트 다리이다. 당시의 고증은 만경강교준공이란 제목 아래 백구면 유강리에서 준공식을 거행 하얏다더라라는 1928년 2월 16일자 기사와 8월 2일 성대한 준공식을 거행했다는 만경대교 준공을 알리는 1933년 8월 4일자 기사로 남아있다. 연장 길이 550m인 만경교는 지금의 김제시 백구면과 익산시 목천동을 잇는 다리로 만경강의 큰 포구였던 목천포에 위치했다. 그 목천이란 지명은 옥야현에 속한 곳으로 남쪽에 위치한 천(川)을 남쪽의 내라 하여 남(南)의 내라 했는데 나무내로 불리다 남이 나무로 인식되면서 목천이 되었다. 또 다른 설로는 목천(木川)이라는 이름을 가진 총각 뱃사공의 사연이 있다. 아름다운 처녀를 짝사랑한 청년이 처녀가 세상을 뜬 것을 알게 되자 상사병을 앓다가 죽자 그 이름을 따 목천포구라 했다고도 한다. 만경교는 만경대교와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일제가 곡물을 수탈하기 위한 통로로 만들어진 다리이다. 1928년 준공되었지만, 오랜 시간의 흔적과 켜켜이 쌓인 포구의 수많은 사연이 깃든 곳이라 그런지 만경교란 정식 명칭보다 마을에서는 목천포다리로 불렀다. 세월이 흘러 다리가 노후화되어 옆에 새로 다리가 놓이면서 기능을 잃고 폐교량이 되자 구 만경교로 불렀다. 1990년 새로운 다리에 역할을 넘기기 전까지 62년간 호남평야의 중심에서 지역의 추억을 잇고 26번 국도의 통로를 연결해 준 다리였다.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의 현장을 지켜본 다리였고, 6.25 전쟁 때에는 우리나라가 해병대를 설립한 후 처음으로 작전을 실시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서슬 퍼런 군부 시대에는 지나는 행인을 검문하던 초소가 다리 양쪽에 있었고, 봄철 강변을 따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벚꽃축제가 화려하게 열리던 장소였다. 또한, 윤흥길 작가의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기억속의 들꽃』의 배경이 된 다리이기도 하다. 푸른 하늘 바탕을 질러 하얗게 호주기 편대가 떠가고 있었다. 비행기 폭음에 가려 나는 철근사이에서 울리는 비명을 거의 듣지 못했다...눈길을 하늘에서 허리가 동강이 난 다리로 끌어 내렸을 때, 내가 본 것은 강심을 겨냥하고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는 한 송이 쥐바라숭꽃이었다. 소설 속 만경강 다리로 등장한 만경교는 이미 소중한 문화자산임이 분명한 다리였다. 지역에는 매우 의미 있는 다리였지만, 사고의 위험이 높아지고 주변 경관을 저해하며 만경강 유수소통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로 1988년 8월 감사원의 지적에 따라 노후교량으로 분류되어 철거 대상이 되었으나, 주민의 이동통로와 벚꽃축제에 이용하기로 한 마을의 의견에 따라 철거를 보류했다. 그러다 쓰임이 줄어들자 익산지방국토관리청에서 만경강 하천환경정비사업을 시작하면서 2014년 12월 철거 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역사적 흔적이 남아있는 다리를 두고 존치냐 철거냐에 대한 많은 공론이 오고 갔다. 당시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국 주민과 지자체와 관계기관의 의견을 수렴하여 구 만경교의 일부 교량을 존치하여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기로 합의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만경교를 기억합니다란 컨셉트로 2015년 6월에 교명판과 난간 등 기존 교대부와 슬래브 2경간인 26m를 양안에 남겨 기념할 수 있는 공간 구성을 하고 나머지는 철거했다. 김제시 청하면과 군산시 대야면을 잇는 만경대교도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다. 포구인 신창진(新倉津)의 이름을 새창이라 불리던 것이 만경대교에도 쓰여져 새창이다리가 된 것이다. 1928년 착공되어 1933년 준공된 만경대교는 노후화로 인한 사고 우려로 차량 통행이 금지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다리 곳곳이 금이 가고 일부 콘크리트가 떨어져 철골이 드러날 정도로 흉물스럽게 부서지는 등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지만, 사진을 찍고 낚시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어 시급한 조치가 필요하다. 세월의 흔적이 담긴 두 다리는 둘 다 만경강 다리로 불리며 닮은 역사의 흔적을 지녔지만, 다른 모습으로 남아있다. 구 만경교는 기념 공간만을 남기고 부분 철거되었고, 새창이다리는 주민들의 요청으로 철거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그 자리에 서 있다. 은빛 물결로 빛나던 만경강에 철새들이 찾아들고 흰눈이 내리게 되면 그 두 다리는 또 다른 시간 속 겨울 풍경으로 우리를 부를 것이다. 겨울의 문턱에서 만경강을 찾아 갈대와 억새들의 속삭임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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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28 16:49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66. 인심난 김제의 장화리 쌀뒤주

단풍이 한창이다. 내장산을 비롯한 단풍명소들이 북적인다. 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구경도 배부른 다음이라는 것인데, 우리에게는 유독 밥 먹는 것에 대한 속담이 많다. 한술 밥에 배부르랴. 익은 밥 먹고 선소리 한다. 찬밥 더운밥 다 먹어봤다.란 말이 있다. 이렇듯 밥과 음식이 함께 다룬 주제로는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속담과 어우러진 나눔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나눔에 대한 오래전 기록으로는 충렬왕 때 쌀 100석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이야기가 『고려사』에 남아있으며, 『조선왕조실록』과 각종 문헌에는 공납하는 쌀에 대한 내용과 가난한 백성을 구휼하고 공신들에게 쌀을 상으로 내린 기록들이 많이 있다. 나눔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로는 배고픈 이웃이 가져갈 수 있도록 곡식을 담은 뒤주를 따로 밖에 내어놓은 경주의 최부자와 구례 운조루의 사례가 있는데, 대표 곡창지대인 김제에도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에 걸맞은 훈훈한 유산이 있다. 1976년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된 김제 장화리 쌀뒤주이다. 1864년(고종 1년)에 정준섭이 만들어 사용한 쌀뒤주인데 작은 정자만한 크기가 예사롭지 않다. 높이 1.8m 너비 2.1m 정방형 목재에 두께 3.3cm의 널빤지를 짜 맞춘 벽체가 초가지붕을 얹은 채 주춧돌 위에 놓여 있다. 그 모양뿐 아니라 커다란 뒤주에는 특별한 사연이 담겨있다. 뒤주가 자리 잡은 집은 돼지명당으로 알려진 곳으로 선조 때부터 많은 토지를 소유하여 만석꾼으로 불리며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정준섭의 집이다. 인심 좋기로 소문난 집은 지나가는 과객에게도 늘 풍족하게 식사를 대접해 항상 손님으로 북적였다. 쌀 70가마가 들어가는 초대형 쌀뒤주였지만, 많은 사람들의 끼니를 챙겨주다 보니 그 큰 뒤주에 있는 쌀도 한 달 식량으로 모자를 정도였다고 한다. 집안의 후손으로 고택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집에 살고 있는 정주철(1946년생)는 이 뒤주는 집식구를 위해 만든 게 아니라, 잘 나누려는 목적으로 만들었다 들었어요. 집을 찾는 손님을 위한 것이지만, 우리 고장에 흉년이 들었을 때 뒤주를 열어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쓰였다지요.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임금이 상으로 지금으로 치면 구례군수인 구례현감이라는 벼슬을 내렸다네요. 그 덕분에 사람들이 이 집을 정준섭의 정 구례현감을 지냈다하여 구례를 따 정구례집이라는 애칭으로 부르지요라 한다. 그 이야기는 고종 26년(1889년) 7월 26일자 『고종실록』에 흉년을 당한 때에 재물을 내어 백성을 구한 전 감찰 정준섭에게 표창하도록 한다는 기사의 제목으로 나온다. 김제에 사는 정준섭이 큰 흉년을 전후하여 1만 3,000냥의 재물을 내어 죽어가던 백성들이 모두 그 덕에 살아났다. 재산을 아끼지 않고 구제한 액수가 매우 많은데, 매우 가상한 일이니 수령의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서 조정에서 표창하자는 의정부의 청을 임금이 윤허하였다.는 내용이다. 이후 넉 달 뒤인 11월 27일자 『고종실록』에 정준섭을 구례현감으로 제수했다는 기록으로 그 사연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제는 후손의 이름을 따 정종수 고택으로 불리는 집에서 두 내외가 살며 선조들의 정신을 잇고 있다. 원래에는 사랑채와 곳간 옆에 뒤주가 있었지만 1976년에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뒤주를 대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안채 쪽으로 옮겼다. 초가의 이엉을 얹는 관리가 힘들어 지붕을 잠시 기와로 한 적도 있지만, 자리를 다시 잡은 뒤로 매년 봄마다 시에서 초가 이엉을 교체해주고 보수를 하고 있다. 그리고 쌀을 채우다 세간살이도 종종 넣었던 뒤주는 3년 전부터 뒤주 안을 비운 채 관리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많은 것이 바뀌고 있지만, 쌀을 귀히 여긴 선조들의 정신과 유산은 지역 곳곳에 오롯이 남아있다. 소설가 윤흥길은 고향 쌀은 고향 바로 그 자체야, 우리네 한국인의 심성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쌀에 대한 관념은 거의 종교에 가까울 정도로 신성한 것이야. 왜냐하면 땅과 쌀과 사람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순환관계를 이루고 있는 동일체이기 때문이지. 어제의 땅은 오늘의 쌀이 되고, 오늘의 쌀은 오늘의 사람하고 한 몸을 이루고, 오늘의 사람은 다시 내일의 땅이 되는 법이야. 땅이 곧 쌀이고 쌀이 곧 사람이고 사람은 곧 땅인 그 이치를 최서방 같은 젊은이들이 알 턱이 없지라는 말을 중편소설 『쌀』에 남겼다. 소설 속 장인이 사위에게 해준 이 말은 농사가 천하의 근본이 되어온 우리 선조들에게 종교처럼 자리 잡은 생각이었다. 점차 쌀농사에 대한 비중이 줄고, 쌀의 소비가 예전만 못하다 보니 그 이치를 알 턱이 없는 세상이 되긴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식사를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 밥을 먹는다라는 말로 부르고, 밥 먹었냐는 인사를 나누고 밥이 곧 보약이며 밥심이 최고란 말을 한다. 그 힘의 원천이 되는 우리나라의 최대 곡창지대가 만경강과 동진강을 따라 펼쳐져 있으며 수많은 수탈의 흔적까지도 지역의 자산으로 남아있다. 조선의 실학자 이익은 그가 남긴 『성호사설』에 책을 좋아해 날마다 끙끙대며 읽느라고 쌀 한 톨 내 힘으로 장만하지 못하는 자신을 천지간에 좀벌레 한 마리라 표현했다. 쌀에 담긴 농부의 노고와 자신의 처지를 빗댄 겸손함의 표현이겠지만, 햅쌀밥을 감사한 마음으로 먹으며 한켠으로 밥값을 잘 하고 있나란 생각을 해본다. 가을빛이 사라지기 전에 김제평야만큼 넉넉했던 인심이 깃든 정종수 고택을 찾아 그 따스함을 배우며 겨울 채비를 하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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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14 17:08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65. 7일의 왕비와 순창 삼인대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삼국지연의』에서 유비, 관우, 장비가 복숭아밭에서 의형제를 맺은 데서 유래한 말이다. 주로 뜻이 맞는 사람끼리 굳은 다짐을 하고 행동을 같이할 때 빗대어 쓰이는데, 순창에는 세 명의 관료가 모여 결의를 다진 특별한 장소가 있다. 강천산 계곡에 있는 삼인대(三印臺, 3개의 직인을 올려놓은 곳)로 소나무 가지에 각자의 관인을 걸고 삼인결의(三印結義)를 한 곳이다. 순창의 절의정신으로 칭해지는 삼인대가 생겨난 데에는,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인 7일 동안 왕비였던 단경왕후 신씨(1487-1557년)와 관련이 있다. 신씨는 신수근의 딸로 1499년(연산군 5년) 13살의 나이에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진성대군(성종의 둘째 아들로 연산군의 이복동생, 훗날 중종)과 혼인했다. 7년 동안 부부의 연을 맺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그러던 중 1506년 연산군의 폭정에 반기를 든 세력에 의해 연산군이 제거되고 새로운 왕을 내세운 중종반정이 성공하게 된다. 이에 신씨의 지아비인 진성대군이 왕이 되고 그녀 또한 중전의 자리에 올랐으나 어찌된 일인지 아버지 신수근은 죽임을 당하고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폐출을 당한다. 그리하여, 신씨는 7일 동안의 왕비였다가 내침을 당한 폐비로 역사에 남았다. 사실, 그 7일의 시간도 왕비가 된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연산군의 정비였던 폐비 신씨가 그녀의 고모로 아버지 신수근은 중종의 장인이었지만, 연산군의 처남이기도 하여 중종반정에 참여하지 않자 반정세력의 표적이 되어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 여파로 신씨는 반정공신인 박원종 등에 의하여 이른바 강제 이혼을 당하고 폐비가 된 것이다. 1506년 9월 9일 그녀는 퇴출되었고, 그다음 날인 10일 중종은 새 왕비 책봉을 허락했다. 중종은 새 왕비인 장경왕후 윤씨와 후궁들을 들였지만, 궁 밖으로 퇴출된 신씨는 홀로 지아비를 죽을 때까지 그리워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궁에서 잘 보이는 인왕산의 바위에 자신의 치마를 매일같이 널어놓으며 중종이 자신을 기억하고 불러주길 바랐다 한다. 폐비 신씨의 사연을 담은 그 바위는 지금껏 치마바위로 불리고 있다. 폐비 신씨의 사연이 더 애처로운 것은, 1515년(중종 10년) 장경왕후 윤씨가 아들(훗날 인종)을 낳고 6일 만에 세상을 등지자, 다시 복위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순창군수 김정(1486-1521년), 담양부사 박상(1474-1530년), 무안현감 유옥(1487-1519년)은 강천산 계곡에 모인다. 각자 관료로 자리 잡은 그들이지만, 당당하게 할 말을 하고자 폐비 신씨 복위를 청하는데 뜻을 같이하고 관직과 목숨을 내놓는 비장한 각오를 한다. 그 증표로 각자의 관인을 소나무 가지에 걸어 놓고 맹세를 한 것이다. 이들은 다짐하며 작성한 글을 1515년 8월 8일 자 상소문으로 올리는데 함께 결의한 유옥은 부모를 공양해야만 하는 외아들이란 이유로 상의 끝에 상소문 작성자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당시 김정과 박상이 올린 상소문은 임금만이 볼 수 있도록 위아래로 단단하게 풀로 붙여 뜯어 볼 수 없게 봉사(封事, 밀봉하여 왕에게 올리는 의견서)된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었는데 그 내용은 실로 목숨을 건 상소였다. 유교적 명분에 대한 논리를 펼치며 『역경』, 『시경』 등에 나오는 부부간의 예와 도리를 인용하고 폐위할 까닭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는데 전하께서 폐위하신 것은 과연 무슨 명분이십니까?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이 이미 신수근을 제거하고는, 왕비가 곧 그 소출이므로 그 아비를 죽이고, 그 조정에 서면 뒷날 후환이 있을까 염려하여, 바르지 못하게 자신을 보전하려는 사사로움을 위해 폐위시켜 내보내자는 모의를 꾸몄으니 이는 진실로 까닭이 없고 명분도 없는 것입니다...는 절절한 내용을 올렸다. 이름이 거론된 대신들은 세상을 뜬 자들이었지만, 폐비 신씨의 복위를 주창하며 폐비를 퇴출한 주동자들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상소문은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다. 중종의 번민과 일부 대신들의 복위 찬성에 대한 의견이 있었지만, 오랜 논쟁 끝에 신씨가 복위되어 아들을 낳게 되면 원자와의 왕위계승이 문제가 되고 후한이 생길 것을 두려워한 자들과 중종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관직을 박탈당한 김정과 박상은 귀양을 갔고, 폐비 신씨는 생전에 복위되지 못한 채 중종이 승하한 지 21년이 지난 71세의 나이에 사가에서 숨을 거둔다. 특히, 순창군수였던 김정은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복직되었지만, 기묘사화에 휘말려 금산과 진도를 거쳐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가 유배를 가며 순창을 지날 적에는 애통해하는 백성들이 울부짖으며 따랐다 하나, 36세의 젊은 나이에 제주에서 사사되었고, 상소문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유옥도 35세에 병으로 요절했다. 이후, 1744년(영조 20년)에 이르러 유림과 순창의 선비들이 주도하여 그들이 다짐한 장소인 강천산 계곡에 비문을 세웠고, 김정과 박상 그리고 유옥은 신말주, 신공제, 김인후, 양사형 등과 함께 순창에 있는 화산서원에 배향되었다. 또한, 폐비 신씨도 1739년 영조의 명에 의하여 단경왕후로 추상되어 양주 온릉에 안치되었다. 가을 강천산은 붉은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하지만, 옳다고 여기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뜨거운 기상이 서린 삼인대를 품고 있어 더욱 빛이 난다. 삼인대의 비문에는 강천의 물이여, 동쪽으로 끝없이 흐르도다. 온릉의 나무여, 북쪽을 보고 창창하도다. 돌은 닳아 없어질지라도 선생의 이름은 끝까지 남으리라고 새겨져 있다. 역사의 풍파 속에서 정의롭게 행동했던 일들은 후세에라도 올곧은 평가를 받게 된다. 하루가 달리 휘몰아치는 요즘의 상황도 그럴 것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강천산을 찾아 그들의 의로운 행동과 우리의 현실을 반추해 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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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17 17: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64. 표암 강세황이 인증한 부안

가을바람이 불어오니 설렌다. 그 산들거리는 바람결에 묻어나는 산과 들의 내음이 기억 속의 한 장면을 불러오기도 하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게 한다. 예로부터 선조들은 우리 산천을 비단에 수를 놓듯 아름다운 강과 산이라는 뜻인 금수강산으로 칭하며 사철마다 그 풍광을 즐겼다. 가을은 특히나 많은 이들의 마음을 부추겨 자연으로 발걸음을 이끌게 하는 계절이다. 요즘에는 청정한 자연을 찾는 생태관광이 인기가 있고 수려한 풍경을 인증한 사진들이 SNS로 전파되어 떠오른다. 이러한 열풍은 예전부터 있던 것으로 선조들의 경험과 시선을 담은 그림과 기행문이 유행하여 선비들의 유람문화를 불러일으켰다. 조선 시대에 가장 핫한 장소로는 금강산과 지리산을 비롯한 팔도의 명승지들이 많았는데, 그중 조선 최고의 문인화가가 부안 일대를 유람하며 그린 그림이 있다. 바로, 등에 표범 문양의 얼룩점이 있어 표암(豹庵)이라는 호를 지닌 강세황(姜世晃, 1713-1791년)이 그린 <부안유람도권(扶安遊覽圖卷)>이다. <우금암도> 혹은 <부안실경도>로도 알려진 그림은 강세황의 둘째 아들인 강완(1739-1775년)이 부안현감으로 재직하던 1770년이나 1771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두루마리 형태의 옆으로 긴 횡권 위에 그려진 6장면의 그림은 간략하게 묘사되었다. 그야말로 야외 스케치로, 짧은 시간에 특징을 요약해서 그린 실경산수화의 밑그림 격인 초본 같다. 그림과 함께 기행문을 중간에 적어 넣었는데 간간이 수정한 흔적이 보인다. 이후 글은 유람기로 정서하여 그의 문집인 『표암유고』 등에 실었다. 글과 그림을 따라가 보면 음력 2월이라고만 기록한 그의 동선을 만날 수 있다. 부안 유람의 여정은 아들이 있는 부안현의 서문을 나서면서 시작되어 동림서원, 청계서원을 거친다. 변산 입구로 들어서 전각이 날듯이 서있다며 개암사를 칭하고 그림에서의 첫 장면이 펼쳐지는데, 우금굴이 있는 우금암을 웅장하게 표현하고 그 품 안에 옥천암을 그려 넣었다. 바로 옆의 봉우리는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 우금암을 그려 넣은 것으로 보인다. 중앙에는 소감을 적어놓고, 우금암에서 실상사로 가는 길에 있는 석벽에 둘러싸인 평지인 문현을 그렸다. 그림 한켠을 살펴보면 산길을 오르는 가마 탄 일행의 정겨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어진 그림에는 그의 일행이 하루 묵은 실상사와 용추폭포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 사실, 그의 글에 의하면 실상사에서 묵고는 경치가 좋다던 월명암을 가려던 참이었는데, 눈길이 미끄러워 가지 못하고 방향을 바꾸어 간 곳이 용추폭포였다. 하지만 오히려 더 험한 길에 고생을 하였다며 후회한 내용을 기록했고 용추폭포 절벽 쪽은 가파르게 표현했다. 그는 길이 험해 가마조차 타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었다란 글을 남기며 앞서 가마를 탄 모습에 자신의 감정을 실었다. 그리고는 폭포 위에다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두 명의 사람을 그려 넣어 긴장감이 느껴지도록 하면서 현장감도 살렸다. 마지막에는 지금은 남아있지 않는 실상사의 부속암자로 여겨지는 극락암을 그렸고 내소사를 거쳐 돌아 온 것으로 일박 이일의 부안여정을 인증하였다. 그는 어렵게 다니며 그림을 남겼지만, 이제는 개암사 주차장까지 차로 올라가 개암사와 어우러진 우금암을 사진으로 인증할 수 있다. 개암사는 백제 634년 묘련스님이 창건한 왕궁 사찰로 알려져 있다. 개암사의 사적기에는 676년 원효, 의상 스님이 우금암 아래에 있는 우금굴에 머물렀고 이를 암자로 중수해, 이후에는 원효방(元曉房)이라 불렀다 한다. 그곳은 고려 문인 이규보도 인증한 곳으로 <팔월 이십일에 능가산 원효방에 제하다>에 원효가 머문 바위굴에 다녀간 심정을 시구로 남긴 바 있다. 원효방의 본사인 개암사의 대웅전(1636년 중건)은 보물 제292호로 지정된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또한, 개암사는 1688년 부안의 기녀 이매창의 문집인 『매창집』을 간행한 장소로 강세황도 유명한 이 일대를 인증하고 싶었을 것이다. 강세황은 부안을 비롯하여 개성과 금강산 등의 산수화와 왕의 어진을 관장하며 인물화를 그리고 활발하게 활동을 한 문인화가이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강세황은 그림을 그리지 않은 절필 시기가 있었다. 바로 그 무렵 부안에 와 <부안유람도권>그린 것으로 추정되어 더욱 특별하다. 김홍도의 스승인 그는 특출난 화가였지만, 영조와 정조 임금에게 인정을 받았던 관료였다. 강세황이 관료가 된 과정도 독특한데, 그는 명문가의 자제였지만 벼슬길을 포기하고 처가가 있는 안산에서 30여 년을 지냈다. 하지만, 뛰어난 인물로 소문난 그를 눈여겨본 영조가 관료들이 그를 그림을 잘 그리는 자로 표현을 하자 천한 기술이라고 업신여길 사람이 있을 터이니 다시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하명했고, 이를 전해 듣고 감복한 그는 51세부터 10여 년 동안 스스로 절필했다. 이후 강세황은 영조의 배려로 늦은 나이인 61세에 벼슬길에 올라 현재의 서울시장격인 한성부판윤을 지내기도 하였다. 강세황이 부안유람을 나선 길에 멋진 풍경을 보고는 흥취에 젖어 화폭에 풍경을 담아내기는 했지만, 왕명과 자신과의 약속을 의식해서였던지 간략한 스케치로만 남았다. 사실 영조의 명으로 절필했다는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없으며, 그 절필의 과정과 문인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은 본인의 자서전과 그의 넷째 아들 강빈의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가을의 흥에 대하여 강세황은 산에 있는 스님이 단풍이 붉게 물들었다고 전하니 / 단촐한 행장이지만 그림 도구와 시 짓는 통을 가져가리라는 멋진 문장을 남겼다. 나들이를 부르는 계절, 가을 깊어가는 산에 단풍 소식이 들리면 그 스케치 여행길을 따라 어제와 오늘을 함께 인증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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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03 16:20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63. 나훈아의 ‘고향역’은 익산에 있다

1972년 나훈아의 노래로 탄생한 명곡이 있다. 그 노래에는 기차통학을 했던 1956년 까까머리 중학생의 아련함과 고단함이 서려 있다. 숨이 턱턱 막히게 뛰어올라 기차를 타니, 기찻길 옆에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가 눈에 들어왔소. 아~ 그 꽃을 보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며 고향에 계신 어머니 생각이 나더이다. 내게 코스모스는 그리움에 사무치는 눈물꽃이고 기차역은 서글픈 곳이요.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내 고향~으로 시작하는 <고향역>은 많은 사랑을 받는 국민애창곡이다. 이쁜이 곱쁜이도 나오는 노래가 고향의 첫사랑이 아닌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곡이 된 사연은 특별하다. 그 곡의 작사 작곡자인 임종수(1942년생)는 순창 출신으로 어머니 나이 46세에 얻은 8남매의 막내이다. 국민학교 때 이리(현 익산)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하던 형이 집에 오면 너는 남성중학교를 가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했다 한다. 이에 어린 임종수는 시험을 치르고 이리의 남성중학교에 합격해 고향인 순창을 떠나게 되었다. 입학 후 여관에서 형과 하숙하다가 중학교 2학년 때 형이 결혼하게 되면서부터 형의 신혼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러다 삼기면에 있는 지서로 발령이 난 형을 따라가 학교까지 걸어서 4시간 걸린다는 곳에서 통학했다. 산 고개를 세 개 넘고 황등역에서 기차를 타고 이리역에 내려 학교로 가는 길을 매일 같이 왕복해야 했다. 그렇다 보니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했고 아침밥도 못 먹고 점심 도시락도 챙기지 못한 채 허겁지겁 뛰어 기차 시간에 맞춰 다녀야 하는 일이 허다했다. 귀한 늦둥이로 자란지라 그런 어려움에 더욱더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그 시절의 기억은 훗날 임종수에게 천금 같은 기회를 준다. 하지만 처음부터 <고향역>이란 타이틀로 만든 곡이 아니었다. 무명 작곡가인 임종수는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인 나훈아를 무작정 찾아갔다. 3개월을 기다린 끝에 만나서 들려준 <차창에 어린 모습>을 마음에 들어 한 나훈아는 1970년도에 음반을 냈다. 그러나, 가사가 불건전하다는 이유로 방송불가 판정을 받는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퇴폐풍조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이별, 상처 등의 노랫말 등이 국민에게 슬픔을 조장한다고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그렇게 곡이 사라질 운명인가 싶었는데, 일 년 뒤 우연히 만난 나훈아가 아까운 곡이라며 방송이 될 수 있는 건전한 가사와 경쾌한 리듬으로 고쳐 주이소라 한다. 그 건전하게란 대목에서 어린 시절 기차에서 바라본 코스모스와 어머니를 떠올리며 고향역으로 주제를 잡고 고고 리듬을 더하여 곡을 완성한다. 1972년 2월에 취입한 곡은 그해 9월 코스모스와 함께 활짝 피어나 크게 히트를 치고 임종수를 무명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이후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옥경이>, 최근 나훈아의 신곡인 <인생소풍>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히트곡을 내게 한 원동력이 된다. 사실 임종수의 고향인 순창에는 기차역이 없다. 그렇다 보니 고향역은 황등역과 이리역을 왕복했던 통학 기찻길과 연관된 것이고, 화물 역사로 변한 황등역과 이리역 폭발사고를 겪고 호남권 허브 역사로 변신한 익산역에는 당시의 모습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 노래는 가을에 하늘하늘 피어나는 코스모스와 추석 명절을 즈음하여 고향을 떠올리는 정서에 나훈아의 음색이 어우러져 모두의 고향역이 되어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즐기는 노래는 대중들의 애환과 욕망을 담고 다양하게 변해간다. 역과 기차를 주제로 한 노래 또한 다양한데, <기찻길 옆 오막살이>에서부터 <목포행 완행열차>, <춘천으로 가는 기차>와 <안동역에서>가 있고, 게다가 이제는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처럼 지하철역을 주제로 하는 노래도 나왔다. 하지만, <고향역>처럼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명곡들은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는 힘이 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노래뿐 아니라 대중문화 속 명소의 탄생은 유형을 달리하고 있다. 그 감성은 장소를 떠올리는 것에서 출발해 관광자원이 되면서 도시를 홍보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지자체마다 관광자원을 만드는데 열심이다. 지역의 풍경이 설정과 맞아 떨어져 히트를 치는 경우도 더러 있는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요 배경이 된 남원의 서도역이 그렇다. 사실 서도역은 최명희의 소설 <혼불>에서 효원과 강모가 이용한 역으로 주요한 감정선을 담은 장소이다. 1931년 간이역으로 건립된 후 2002년 전라선 개량공사로 철거 위기에 처했지만, 현재 위치로 이전해서도 옛 모습을 간직한 아름다운 역이다. 드라마의 인기에 서도역을 찾는 방문객이 늘어나자 남원에서는 <혼불>과 <미스터 션샤인>의 배경이 된 서도역을 중심으로 한 관광 활성화를 준비하고 있다. 이제는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다녀간 장소도 팬들에 의해 관광 루트로 만들어지고 있다. 완주를 비롯해 국내 이곳저곳을 안내하듯 다니는 방탄소년단의 모습이 정겹고 고맙다. 지역의 자산은 새롭게 만들기가 쉽지 않다. 많은 노력과 자본이 필요한 경우가 대다수이고 이마저도 성공을 보장하기 힘들다. 있는 지역의 콘텐츠를 잘 발굴하고 기회를 잘 활용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표 고향역의 대명사가 된 장소를 보유한 행운의 도시는 익산이다. 그러나 같은 익산의 행정지역에 있으면서 고향역의 배경이 황등역이다. 지금의 익산역이다란 논란으로 몇 년째 노래비마저 못 세우고 있다니 안타깝다. <고향역>의 저작권자인 임종수는 학교를 오고 가며 양쪽 역을 다 이용했으니 두 역 다 고향역의 배경이재. 어디 한 곳이 아녀.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옛말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고향역>의 노래가 역에서 흘러나오고 코스모스라도 먼저 기찻길에 식재하며 그 정서를 잇게 하는 것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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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05 17:33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62. ‘기니미굴’이라 불린 라제통문

신라와 백제의 경계로 알려진 굴이 있다. 바로 무주에 있는 라제통문(羅濟通門)이다. 삼국시대에 뚫려 통로로 쓰였으며 굴을 경계로 신라와 백제로 나뉘어 양쪽의 말씨와 풍습이 다르다 했다. 게다가 김유신이 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지나던 길이라 하니 통일문이라 불리며 한때 교과서에 실려 수학여행의 코스까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굴은 삼국시대에 뚫은 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신작로를 내며 뚫린 것이다. 라제통문의 유래가 왜곡된 것에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지만, 그곳은 무주구천동의 입구로 무주구천동 33경(景)의 시점이 될 만한 곳이다. 라제통문을 제1경으로 시작하여 33경인 덕유산 향적봉까지 이어지는 곳은 전라북도와 충청남북도, 경상남북도 5도의 접경지로 유구한 역사가 깃들고 풍광이 빼어난 곳이다. 접경지이다 보니 굴을 경계로 경상도와 전라도가 나뉜다 했지만, 실제 라제통문은 설천면 신두마을과 이남마을 사이를 잇는 통로로 모두 무주군에 속한다. 인근 냇가에 민물 게가 많아 게가 넘어가는 곳이란 기니미가 이남마을의 옛 이름이라 라제통문을 기니미굴 혹은 설천굴이라 했고, 그 굴을 낸 산은 덕유산(德裕山) 자락에 있는 석견산(일명 석모산)이다. 예로부터 덕이 많아 너그러운 산으로 불리던 덕유산은 다양한 생명을 넉넉하게 품은 산이다. 산세 따라 계곡이 발달한 덕유산 계곡의 맑은 물에는 꺽지, 금강모치, 동사리, 갈겨니 등이 서식하고 있고, 계곡 주변과 숲은 다릅나무, 전나무, 황벽나무, 구상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과 야생화들로 계절마다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낸다. 그중 덕유산 최고봉인 향적봉(香赤奉)의 이름은 천연기념물인 주목(朱木)에서 따왔다. 향이 좋고 나무의 껍질과 열매가 붉기 때문에 향목 혹은 적목이라 불리는 주목 7000여 그루가 군락을 이룬 곳이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향적봉으로 오르는 중턱에는 백련사(白蓮寺)가 있다. 오래전 덕유산에는 절이 많았다고 전해지나 아쉽게도 흔적만 남아 있고 지금의 백련사는 6.25 전쟁 때 소실된 절터 옆에 1960년대 새로 지은 절이다. 고려 시기 번창하여 산 내 암자를 14개나 두었고 조선시기 부휴, 정관, 벽암, 매월당 등 유명한 고승들이 머물렀다 전해지는 사찰은 고지도 속 비슷한 위치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구천동사(九千洞寺)이며 이를 백련암으로 혼용하여 부른 것으로 추측된다. 이름에서 연상되듯이 무주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구천동이란 지명은 불사와 깊은 인연이 있다. 일설에 구씨(具氏)와 천씨(千氏) 집안싸움을 어사 박문수가 말리면서 구천동(具千洞)이 구천동(九天洞)으로 되었다고 하지만, 조선시기 문인 임훈(1500-1584년)이 덕유산을 유람하며 남긴 『등덕유산향적봉기(登德裕山香積峰記)』에는 구천 명의 성불공자(成佛功者)가 머문 땅이라 하여 구천둔(九千屯)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승려들의 거처를 진 칠 둔(屯)으로 칭한 것은 묘향산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을 적상산사고로 이관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 마니산사고의 실록이 훼손되자 적상산 사고본을 근거로 교정하는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이에 수호사찰인 호국사(護國寺)를 창건하여 승군(僧軍)을 두고 사고의 경비를 강화했던 것이다. 절이 많던 덕유산에 승군까지 합세하다 보니 구천 명 주둔설이 나왔고, 밥을 지을 때 쌀 씻은 물이 만조탄(무주구천동 제10경)까지 흘러 내려와 뜨물재라고도 했으니 구천둔에서 구천동이라는 지명이 생겨날 만했다. 무주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백제가 한성을 잃고 공주로 도읍을 옮기며 정세가 불안해지자 가야계 소국 반파와 신라가 이 일대를 차지하기 위해 잦은 전쟁을 치렀다고 알려진 곳이다. 그 전쟁은 철의 전쟁으로 칭할 만 했고, 지역에서의 철의 생산과 가공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무주현 편에서는 한 곳의 철장(鐵場)이 있어 봉촌(蓬村)에서 연철(煉鐵) 2천 2백 근을 선공감(繕工監)에 바치고, 9백 14근을 전주에 바친다라는 대목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토산으로 송이, 꿀, 인삼, 닥종이와 더불어 철을 내세운 기록이 있다. 지금도 제철유적은 구천동계곡과 얼음령계곡 등에 철을 제련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찌꺼기인 슬래그(Slag)의 흔적을 남겼고,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눈독을 들이는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다보니 철을 비롯한 무주의 각종 임산물을 수탈하기 위해 김천역으로 이어지는 신작로를 내며 기니미굴을 뚫은 것이다. 일제강점기 <매일신보>의 기사 속에는 무주 김천 간 도로 개통에 따른 효과를 홍보한 기사가 남아 있다. 오랫동안 세를 늘리며 번창했던 덕유산의 절들은 세월의 풍파 속에 소실되었지만, 라제통문은 국도 30호선을 이어주며 무주구천동 33경을 열고 있고, 백련사는 불자들의 마음과 덕유산을 찾는 방문객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또한, 1910년 국권을 잃고 폐지된 적상산사고는 치열하게 지키고자 했던 선조들의 융숭한 정신을 품고 새로 옮겨진 자리에 굳건히 남아 있다. 뜨거운 팔월을 지나다 보니 덕유산 넉넉한 품에 깃든 이야기와 아울러 잊지 말아야 할 일제의 수탈 흔적에 마음이 간다. 라제통문을 통과하면서 만나는 아름다운 절경과 선조의 얼이 깃든 사연은 우리를 특별한 시간으로 이끈다. 그곳엔 수려한 풍경보다도 더 귀한 사연을 지닌 무주 설천면 출신의 의병장 강무경(1878-1909년)을 기념하는 공간이 있다. 의병활동을 함께 한 부인 양방매와 부부 의병으로도 알려진 강무경은 치열한 의병활동을 이어가다 일제에 붙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무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반딧불이를 보러 가거들랑 우리의 역사를 올곧게 다져준 선조들의 빛나는 마음도 함께 만나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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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22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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