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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자 "고국 있으니 日귀화 생각안했죠"

20여년 만에 국내서 새 음반 발표

일본에서 '엔카의 여왕'으로 군림한 김연자(50)가 20여년 만에 국내에서 새 음반을 내고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활동한다.

 

1974년 '말해줘요'로 데뷔한 김연자는 88올림픽 폐막 무대에서 고(故) 길옥윤이 작곡한 '아침의 나라에서'를 불렀고, 일본어로 번역된 이 노래가 일본에서 동시 히트하자 국내 활동을 중단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팬들에게 아쉬움을 줬다.

 

지난달 27일 귀국한 김연자를 7일 밤 서울 양재동의 녹음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검은 원피스에 빨간 재킷을 입은 그는 눈가에 주름이 조금 늘었을 뿐 쉰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화사했다. 가녀리게 떨리는 섬세한 바이브레이션에 쭉쭉 뽑아내는 고음의 시원한 목청은 더더욱 나이가 들지 않았다.

 

2월 말 발매될 음반에는 송창식이 작사ㆍ작곡한 노래 '안돼', '슬픈 얼굴 짓지 말아요', '불꽃'과 히트곡 '수은등', '아침의 나라에서' 등이 담긴다. 이중 송창식이 부른 '슬픈 얼굴 짓지 말아요'와 정미조의 '불꽃'은 김연자가 처음 취입하는 곡.

 

이날 그는 서너마디를 끊어서 녹음하는 여느 가수들과 달리 단 두번만 불러 한곡의 녹음을 마치는 탄탄한 가창력을 자랑했다.

 

"'안돼'는 25년 여만에 다시 녹음하는데 엊그제 부른 것 같아요. 한국말로 부르니 긴장되고 생각보다 노래가 잘 안되네요. 호호."

 

◇아버지, 남편

 

1980년대 인기 절정의 가수가 왜 일본에서 신인의 길을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아침의 나라에서'가 일본에서 반응이 좋아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일본에 처음 진출한 건 1977년 18살 때였는데 3년간 활동하고 돌아온 한이 있어 재도전하고 싶었어요. 또 1982년 스물세살 때 18세 연상의 밴드 악단장 출신 재일교포 김호식 씨와 결혼했는데 떨어져 살고 있기도 했고요. 1988년 일본에 건너가 1989년 처음 NHK '홍백가합전'에 나갔고 이후 1994년, 2001년에도 나갔죠."

 

일본에서 많은 음반을 내며 오리콘차트 엔카 부문 1위, 일본레코드 대상 등을 수상하며 승승장구한 그가 다시 고국을 찾은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또 2007~2008년에 걸쳐 일본 데뷔 20주년 투어를 마쳤으니 어느 정도 위치에 올랐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난해 8월6일 일본에서 새 싱글이 나와 한창 활동 중이었는데 아버지가 이틀 후인 8월8일 돌아가셨죠. 연예인들이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말이 제 얘기가 될 줄 몰랐어요. 세 자매 중 장녀여서 책임감이 컸기에 죄송했죠. 귀국 직후 찾아간 곳도 아버지의 산소였어요."

 

"남편, 강아지 세마리와 도쿄 스기나미 구에 산다"는 그는 1년에 100일 콘서트, 100일 방송, 100일은 음반 작업을 해 나이 들 시간이 없을 정도로 노래만 했다고 한다. 늘 향수병이 있었고 '내가 한국에서 활동했더라면'이라는 생각도 해봤다. 말 못할 사정이 있으면 혼자서도 많이 울었다.

 

그러나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은 없었다고 했다. 중도에 한국으로 돌아가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는 것이니 뭔가를 이루고 싶었다. 그를 '큰 딸'이라고 부르는 남편이 큰 의지가 됐다.

 

"처음 일본 진출 때 방송에서 만난 남편과는 2년간 연애를 했어요. 저는 잠만 자고 노래만 하니 일본에서도 남편이 모든 생활을 도와줬죠. 2세요? 마흔네살이 되자 체념이 되더라고요. 일본에서 저만 바라보는 스태프가 30명이 넘으니 쉴 수가 없어요. 운명이죠."

 

◇오디션 프로, 데뷔

 

김연자는 전라남도 광주가 고향이다. 노래를 무척 좋아하던 아버지는 김연자가 14살 때 학교를 중단시키고 가수가 되라며 서울로 보냈다. 완행열차를 타고 홀로 서울에 와 작은 아버지 집에 살며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그러다 나훈아, 송대관이 있던 오아시스레코드 사장의 눈에 띄었다.

 

"청계천에 위치한 오아시스레코드 2층에 작곡가 선생님들이 계셨어요. 김학송 선생님께 노래를 배웠죠. 그때 TBC에 오디션 프로그램 '가요 신인 스타'에 출연해 합격했어요. 그 날이 1974년 10월3일이어서 제 데뷔 날짜로 정했죠."

 

오아시스레코드에서 그는 LP판의 B면 가수로 출발했다. 그는 국내에서는 오히려 히트곡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봄비가'가 히트 조짐을 보이던 즈음, 일본 오디션을 봤는데 합격했고 1977년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을 일본어로 불러 데뷔했다.

 

그는 "당시 일본 기획사로부터 받은 월급을 송금해 집 한채를 산 게 전부였다"며 "3년간 출세를 못하고 1980년 귀국했는데 광주사태가 나 엄마가 울고 불고, 그래서 돌아온 해를 기억한다. 이후 작곡가 김영광 씨가 메들리 음반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메들리 3집은 카세트 700만개가 팔릴 정도로 히트했다"고 말했다.

 

◇귀화제의, 고국

 

김연자는 여전히 한국 국적을 갖고 있다. 일본에서 귀화 제의도 여러차례 받았을 터.

 

"일본 잡지 주간여성과 인터뷰를 할 때 풍수 전문가가 '귀화를 하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절대 안하죠. 한국은 고국이고 제 인생의 마지막은 역시 한국에서 보내고 싶거든요. 귀화 고민을 해본 적도 없어요."

 

"내가 잘못하면 한국이 거론되니 실수하지 않고자 늘 긴장했다"는 그는 일본 콘서트 때도 한국 노래를 빼놓지 않는다. 드라마 '태왕사신기', '주몽', '대장금'의 주제가도 레퍼토리다.

 

마지막으로 그는 2001년, 2002년 4월 북한 공연 당시 만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에피소드도 털어놓았다.

 

"김 위원장은 정치 대신 예술 분야 얘기만 했죠. 음악 등 예술에 조예가 깊었어요. 전통악기와 서양악기를 접목한 악기도 있더라고요. 2002년 공연 때 평양 외에 북한의 여러 지역을 돌며 공연해 달라는 김 위원장과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네요."

 

그는 "고(故) 김일성 주석이 나의 메들리 3집을 좋아해 김 위원장에게는 아버지와 추억이 어린 노래였던 것 같다"며 "'내 목소리가 변하지 않았냐'고 묻자 김 위원장은 '어쩔 수 없지, 나이가 들었는데'라고 말하더라"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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