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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29)(주)전주페이퍼②

첫 제품 시장 출하 68년 10월1일 '창립기념일'로…'새한'서 '전주제지'로 상호 변경

1969년 초지기 1·2호기가 설치 완료된 전주공장 전경. (desk@jjan.kr)

새한제지를 인수한 삼성은 국내 제지업계의 생산시설이 소규모이고 기계가 낡은데다 향후 제지 수요 증가에 따라 공급이 부족할 것으로 판단했다. 1965년 국내 제지업체 63개사의 총 생산 능력은 19만 2600톤에 불과했다. 이중 근대적 설비를 갖춘 12개사의 생산 능력은 10만 9000톤으로 전체의 56.6%에 달했다. 1개 업체당 생산량은 2207톤이었고, 1만톤 이상 생산 능력을 갖춘 업체는 5개사 뿐이었다. 게다가 기술과 시설이 낙후돼 가동률은 총생산능력의 72.1%에 불과, 13만 9014톤 생산에 그쳤다. 1965년 국내 용지 총소비량은 14만 3610톤이었다. 즉 2000톤 가량이 수입되고 있었다.

삼성은 생산 규모 확대를 겨냥, 당초 2만평에 불과했던 부지를 9만 7720평으로 확대했다. 초지기도 하루 40톤 생산 규모로 계획됐던 것을 1967년 2월13일 하루 60톤 생산규모 변경했고, 이를 다시 80톤 규모로 확대 조정했다. 그러다가 1967년 7월에는 80톤 규모 1대와 50톤 규모 1대 등 하루에 총 130톤의 인쇄용지와 신문용지를 생산할 수 있는 기계를 도입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국내 유수 제지업체들이 하루에 40톤을 생산할 수 있는 소규모 시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삼성은 원가 절감 등 경제적 측면에서 양산체제를 갖추는 것이 향후 경쟁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또 시장조사 결과, 1970년을 기준하여 예상되는 부족물량이 신문용지 6만톤, 인쇄용지 4만톤에 달했다. 이 조사 결과를 토대로 새한제지의 생산규모가 연간 4만∼6만톤 정도로 정해진 것이다.

▲ 2년 만에 1·2호기 건설

1966년 12월10일 평토제에 이어 1967년 3월22일 기공식을 가진 새한제지는 곧바로 8만여평 부지에 대한 정지작업을 벌인 뒤 4000여평 공장 기초공사에 들어갔다. 서독 엣샤비스사에 발주한 기계설비가 12월에 도착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공장 신축 공사는 여름 땡볕과 겨울 혹한 속에서도 강행됐다.

1968년 3월에 기계설치공사가 시작됐고, 4월1일부터는 신문용지 생산을 위한 1호기(1일 80톤 생산능력) 조립공사가 시작됐다. 서독 엣샤비스사에서 파견한 기술자가 전주에 도착, 기계 설치작업을 도왔고, 4월30일에는 4000여평 본공장 앞에서 상량식을 올렸다.

 

 

1968년 8월 25일 설치가 완료된 초지기 1호기를 점검하는 시운전이 실시됐다(왼쪽). 전주제지주식회사에서 생산된 모든 제품에 ‘삼성표’상표를 표시했다. (desk@jjan.kr)

 

 

8월5일 쇄목기 2대가 시운전에 들어갔고, 8월9일에는 공업용수 송수가 이뤄졌다. 8월28일 철도 인입선 시운전에 들어간지 사흘만인 31일에는 원목을 실은 기차가 북전주역에서 첫 운행에 들어갔다.

이처럼 모든 작업이 착착 진행되는 가운데 8월25일 설치가 완료된 초지기에 대한 점검이 이뤄졌다. 이날 초지기는 225m/분에서 400m/분까지 운전속도를 내며 가동됐다. 제품에 불순물이 생기는 문제점 등을 개선한 후 1968년 9월1일 유희춘 사장은 전 임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1호기 가동 스위치를 눌렀다. 웅장한 기계음과 함께 1호기가 힘차게 가동됐고, 종이가 차곡 차곡 쏟아져 나왔다. 2년여간 땀을 뻘뻘 흘리며 눈코뜰새없이 부지매입과 정지작업, 공장 건설 및 기계 설치작업에 매진했던 임직원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1호기는 10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제품을 생산했다. 전주제지는 제품을 처음 시장에 출하한 이날을 창립기념일로 정했다.

1일 50톤의 인쇄용지를 생산할 수 있는 2호기도 발주됐는데, 1호기를 제작한 서독 엣샤비스사가 수주했다. 1호기 건설 경험, 공사기간 단축 등 이점이 작용했다. 1969년 12월 도입된 2호기는 설치작업도 순조롭게 진행돼 1969년 4월 시운전에 들어갔다.

새한제지는 1967년 3월22일 기공식 후 2년여만에 초지기 1·2호기를 건설하고 가동에 들어갔다. 이에 투입된 자금은 서독 상업차관 220만달러 등 외자 445만 6168달러와 내자 23억 9639원이었다.

▲ 제품의 생산과 판매

새한제지는 1968년 8월 본격적인 공장 가동을 앞두고 상호를 변경하고 상표를 제정했다. 상호는 8월28일자로 새한제지공업주식회사에서 전주제지주식회사로 변경됐다.

상표는 사내 공모 절차를 거쳤는데, 응모된 1683점 가운데 '삼성표'가 상표로 결정됐다. 이 상표는 둥근 원 안에 삼성을 상징하는 세 개의 별과 새한제지의 첫 알파벳 'S'를 도안하고, 원 위에 '삼성표'라고 썼다. 제지업계의 중심, 원목을 상징한다는 의미가 부여됐다.

1968년 무렵, 국내 신문용지는 고려제지(북선제지의 전신, 훗날 세대제지, 현재 페이퍼코리아)와 삼풍제지, 대한제지 등 3개사가 공급하고 있었다. 북선이 하루 45톤 생산규모였고, 삼풍과 대한은 35톤 생산규모 였으며, 점차 생산 설비를 확대했다. 하지만 이들 3사의 국내 총공급량은 1965년 4만5397톤, 1966년 5만4701톤, 1967년 5만7579톤으로 큰 폭으로 증가하지 않았다. 1967년의 경우 국내 총수요 7만 2039톤 중 1만 4460톤을 수입할 만큼 공급이 부족한 상태였다.

공급 부족은 신문용지 수입 증대로 이어졌고, 이들 3사는 치열한 경쟁을 했다. 이런 시장 환경 속에서 3사의 재고량은 1967년 4080톤에 달했고, 이는 그 해 국내 공급량 5만 7579톤의 7.1%에 해당하는 많은 양이었다.

68년 10월1일 가동에 들어간 전주제지는 첫 해 5524톤의 신문용지를 생산, 생산량의 77%인 4298톤을 판매했다. 불과 2개월여만에 이같은 판매 실적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서울 소재 신문사 9개사와 지방신문사 7개사와 거래하는 등 짧은 기간에 전국 판매망을 갖췄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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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호 jhkim@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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