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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전북기업사] (60)전북은행-③1970년대

전주 경원동에 새 둥지…도약의 시대 '활짝'

(좌)1971년 8월 30일 전북은행 경원동 본점 이전, 1970년 3월 18일 전북은행 북부 예금취급소 개점. (desk@jjan.kr)

1970년대의 전북은행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는 전주시 경원동 청사였다.

전북은행은 창립당시 전주시 전동에 본점을 뒀었다. 하지만 지상 3층 규모에 불과한 당시의 본점은 전북은행의 위상과 어울리지 않았고, 창립직후부터 본점 신축논의에 들어갔다. 은행측은 전주시 경원동1가 108번지를 새 둥지로 낙점한 뒤 1970년 9월 22일 본점 신축기공식을 가졌다. 그리고 1년뒤 전북은행은 1971년 8월 30일 경원동 본점 이전식을 갖고 '경원동시대'를 활짝 열었다.

지상 11층·지하 1층 규모의 경원동 본점은 전주는 물론 전북의 대표 건물로 손꼽혔다. 지금도 장년층 이상의 지역민이라면 누구나 이른바 '미원탑'의 심장부에 위치한 경원동 본점에 대한 각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전북은행은 경원동 청사 입주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사세를 확장했다.

 

 

 

(좌)1970년 12월 27일 도내 최초 음단위 김제지점 신설, 유가증권 상장증서. (desk@jjan.kr)

 

전북은행은 창립 100여일만인 1970년 3월, 총예금규모가 10억원을 넘어섰고, 총대출금은 5억7400만원을 기록했다. 같은 해 5월에는 이리지점을 개설했고, 첫날 1억1700만원의 예수금을 올리기도 했다. 12월 27일에는 도내에서 처음으로 읍단위 지점인 김제지점을 신설했다.

1971년 1월에는 고창 상공인협회 대의원들이 '전북은행 지점 유치운동'에 본격 나서는 등 전북은행을 유치하자는 각 지역의 열망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여기에 경원동으로 본점을 옮긴 뒤에는 은행의 질적·양적성장이 이뤄지면서 향토은행의 명성을 착실히 쌓아갔다. 1972년 3월 22일에는 지방은행 가운데선 처음으로 전북은행의 주식을 증권시장에 상장하는 영예를 누리며 공개법인이 됐다. 같은해 전북은행의 총 영업점수는 10곳으로 늘어났다.

1973년 들어 이은행은 예금규모를 처음으로 50억원대로 늘렸고, 이를 앞세워 도내 일반 은행의 예수금 가운데 30.7%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또 같은 해 6월 전국금융노동조합 전북은행 지부로 노동조합을 결성했고, 초대위원장은 박종한씨가 선출됐다. 당시 노조 결성을 주도했던 최공술 전북은행 동우회장은 "서슬이 시퍼렀던 시절이었던 만큼 노조결성은 모험에 가까웠다"면서 "전북은행의 발전을 위해서는 은행내 민주화와 소통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따라 공채 1기 직원들이 팔소매를 걷어부쳤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1975년 6월에는 은행의 숙원이었던 서울지점을 개점하며 은행발전사의 또다른 전기를 마련했다. 이에 따라 전북은행은 지역은 물론 서울지역까지 영업구역을 확장하면서 재경 전북출신 기업인들과의 업무제휴를 강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련도 없지않았다. 1976년 9월 한독맥주㈜가 부도를 내면서 원금 4억2700만원을 포함한 13억500만원의 손실이 발생했다. 이는 당시의 전북은행의 규모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액의 부실여신을 안게 된 셈이다. 결국 이를 계기로 같은 해 10월 당시 3연임했던 최주한 은행장이 퇴임하는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뒤이어 같은 해 11월 제2대 송규섭 은행장이 선임됐고, 새 행장을 중심으로 이른바 '한독쇼크'를 탈출하기 위한 전 임직원의 고난행군이 이어졌다. 그리고 불과 수개월만인 1977년 3월 들어 숙원이었던 총예수금 200억원을 돌파한 데 이어, 같은 해 말에는 213억3800만원을 달성하는 등 가파른 경영정상화가 이뤄졌다.

1979년 2월에는 총예금 400억원을 돌파하는 금자탑을 쌓았고, 수권자본금을 기존의 34억원에서 50억원으로 늘리는 등 자본확충 기반을 튼실하게 마련했다.

전북은행은 같은 해 2월 율산실업㈜의 부도로 인해 취급여신이 부실화되면서 다시한번 시련을 맞게됐다. 또 성장위주의 경제정책에서 비롯된 인플레이션 압력에 시달려왔던 당시의 국내 경제는 원유가격 폭등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까지 겹치면서 스테크플레이션 현상까지 두드러지는 등 내우외환이 불가피해졌다.

이런 와중에서도 10년차에 접어든 전북은행은 '100년 은행'의 토대를 다지며 본격적인 도약을 예고했다. 1979년말의 예수금규모는 457억원으로, 대출금도 314억원에 달했다. 당기순이익도 5억4000만원을 시현하며 18.6%의 배당을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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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우 epicure@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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