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畵室 문 들어서면 늘 첫만남의 설렘이 있습니다”
 
    
- 안녕하십니까? 항상 바쁘신 듯합니다. 근황을 좀 들려주시죠.
“생활이라는 게 거의 늘 동어반복적으로 되풀이됩니다. 강의하고, 그림 그리고, 여행 가고…. 그런데 살아가면서 인간관계와 일의 네트워크가 방사형으로 넓혀지면서 비본질적인 일로 시간을 보내는 게 잦아지는 것 같아요.”
- 선생님은 동·서양을 접목시킨 독창적 화풍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크게 보면 1980년대 바보 예수와 1990년대 이후 생명의 노래, 그리고 1990년대 말부터 계속해온 여행시리즈 등으로 나눠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먼저 바보 예수와 관련, 그리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제가 기독교인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연스럽게 제 자각의지가 생기기도 전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됐죠. 바보 예수는 1980년대의 산물입니다. 대학가에 늘 소요가 그칠 날이 없었는데, 특히 서울대학은 아주 심했죠. 어느 날 석양 무렵에 최루탄 연기가 자욱한 교정을 내려오다가 문득 예수님께서 저 최루탄과 학생들 사이에 서신다면 무슨 해법을 내놓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피흘리면서 허공을 바라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아주 순간적으로 떠올랐고, 그러더니 허공에 연속적으로 형상들이 떠오르는거예요. 당혹스러울만큼. 그래서 허공에 떠오른 형상들을 작업실에 돌아가서 그림으로 표현해 본 것들이 바보예수 연작이죠.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 그런데 바보 예수는 호평과 함께 논란도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지금과 달리 그 때만 해도 신성모독적으로 해석하는 시각들이 좀 있었죠. 하지만 이것은 저만의 독특한 반어법적인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애들이 울면서 ‘엄마, 바보야’했을 때와 같은 사랑과 존경과 따뜻함으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단어였는데 이 단어가 오해를 불러 온 거죠.”
- 선생님은 80년대 말 연탄가스 사건 이후 그린 ‘생명의 노??연작은 생명의 기쁨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재밌는 게 문학소년, 문학청년기를 지나면서 하얀 시트가 깔린 병원에 입원해 봤으면…, 예쁜 소녀가 꽃을 들고 위문을 오는 상상을 해봤는데 그것이 현실이 돼 버렸죠. 실제 입원을 해 보니까 양쪽 팔뚝에 주사바늘 몇개씩 꽂고 자야 하는 고통이 결코 그렇게 센티멘탈한 문학적인 게 아니었습니다.”
(김 화백은 1989년 11월 23일 새벽 서울 신림동 비좁은 화실 옆 고시원에서 자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병원에 실려갔다. 50일 가까이 입원했다.)
- 죽음의 경험 이후 지속적으로 ‘생명 주제’를 천착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퇴원하고 교수아파트에 살 땐데 2월 중순쯤에 뒷산에 오르다가 두터운 동토을 밀고 올라오는 작은 꽃이 파르르 떨고 있는 것을 보면서 생명의 경외감이랄까, 아마 제가 오래 입원해 꼼짝 못하고 있어서 생명의 아름다움에 주목해 봐야겠다, 천지가 하느님의 창조미술관이구나. 이렇게 해서 생명의 노래 연작이 나왔죠.”
- 닥 죽을 사용해 토속적인 느낌이 들던데요?
“그건 제가 동양화를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화선지를 쓰게 되는데 화선지가 너무 예민하고 너무 하얗게 표백을 시켜서 시골 소년같은 제 감성하고 좀 안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닥종이를 밀가루 반죽처럼 만들어서 마치 분청사기 표면처럼 좀 두툼하고 어떤 재질감을 만들어 보려고 쓰기 시작했는데요. 중국의 화선지 문화와는 다른 우리 닥문화, 수수하고 덤덤하면서도 텁텁한 그러면서도 뭔가 훈훈하고 한국적인 미감이 그런데 있다고 생각이 들거든요. 뭐 토장국 된장국 장판문화 막걸리 같은 그런 맛을 미술에서도 살려보려고 한 거죠.”
- 선생님은 1998년부터 화첩기행 시리즈를 조선일보에 4년 가까이 연재해 장안의 지가를 높였습니다. 감성어린 탄탄한 글발까지 가미해 미술의 대중화에 이바지했습니다. 화첩기행은 글과 그림의 융합에 의한 제 3의 장르라는 평도 들었는데요. 특히 라틴아메리카까지 폭넓게 다니셨는데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아주 오래 전부터 남미를 꼭 가보고 싶었어요. 왜냐면 거기에 제가 좋아하던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라는 시인이 있고, 수많은 화가 음악가 등 제게 정신적인 자양분을 준 많은 예술인들이 살던 곳이니까요. 무엇보다 화가인 저로서 감동적이었던 것은 유교문화권에선 색채에 대한 절제가 있는데 남미는 색 자체에서 생의 기쁨을 발견하는 것 같아요. 제가 깜짝 놀라고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게 미술관에 들어가 유명한 화가의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은 게 아니고 집이고 자동차 의복 남녀할 것 없이 내뿜는 어떤 기운, 낙천성을 색채로 유감없이 발산하는게 저는 감동적이었죠. 그래서 ‘남미가 저에게 색채의 교사였다’ 그런 생각을 하게 했죠.”
- 선생님은 ‘여행을 하면 삶의 에너지가 돌아온 것 같다’고 하신 적이 있는데 글과 그림, 여행의 메카니즘이랄까를 좀 설명해주시죠.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진득이 앉아서 공부 안하고 어디를 그렇게 싸돌아 다니느냐’하셨는데 어렸을 때부터 들로 산으로 다니고, 그러고 보니까 남쪽의 소도시가 답답한 거죠. 그래서 늘 지리부도를 들여다보면서 도시명을 노래 가락처럼 부르고 다녔는데 실제로 그 도시를 찾아다니면서 느꼈던 기시감(旣視感·언젠가 와 본 듯한 느낌), 그런 환상이 실제와 부딪쳐서 일으켰던 감동이 아니었던가 생각해요. 정말 많이 돌아 다녔죠. 저는 예술적 에스프리랄까, 이런 것을 공감하고 싶은 여행이 대부분이었죠.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몰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이란 루마니아 불가리아 이런 예술적인 에스프리가 넘쳐나는 곳을,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화첩기행으로 묶으려고 하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국내외 합해서 10권 정도가 될 것같고 앞으로 10년 정도 안에 그걸 완성하면 국내외 예술기행으로서 유니크한 형태가 되지 않겠는가 싶어요.”
- 그럼 앞으로 갈 곳은 어딘가요?
“제 사적(私的) 비전이 공적(公的) 논리의 요청을 받고 있다. 무슨 얘기냐? 조금 거창하게 생각한다면 오늘의 한국사회가 자연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는 부분을 유럽 중심의 소위 자연과 인공을 잘 조화시킨 나라들에 대한 기행문을 통해서 소개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생명의 노래를 그렸던 화가로서 이 나라가 우리의 후손이 살아갈만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지혜롭게 자연과의 공존을 살펴볼 때가 되지 않았는가, 내 어렸을 때 봤던 일망무제의 보라색 자운영 밭 같은 것, 형형색색의 야생초 같은 것들이 영국의 코츠월즈(Cotswolds)의 바이버리(Bibury)마을같은데 가면 그대로 다 되어 있어요. 예컨대 유럽의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어떻게 일찍이 자연과 관계를 맺으면서 건물을 지을 때 자연 앞에 겸손하려 했으며 결국 이런 의식들이 공공디자인이나 도시의 간판까지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 이런 좀 선진화된 의식의 한 부분을 그림과 글로 표현해 보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 선생님은 그림뿐 아니라 인문학에도 두루 밝은 것 같습니다. 특히 유가철학 연구를 하셨는데 동양화의 바탕에 철학성이 있다고 생각하신건가요?
“동양의 그림이라는 게 원래 문(文)·사(史)·철(哲)·예(禮), 이렇게 얘기합니다. 포괄적이고 종합적이에요. 그림만 가지고 논하지 않고 그림의 이론 같은 것도 노자나 논어 같은 곳에서 끌어오기도 하고, 또 약간의 호학(好學) 취미같은 게 있는데다??”
- 같은 주제라도 재료에 따라 그림의 분위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바보 예수’는 골판지에 검은 먹으로, ‘생명의 노???닥종이에 천연안료를, 화첩기행은 아크릴 물감도 거침없이 썼습니다.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내용을 담기 위한 형식과 재료는 마음껏 내가 쓰겠다. 형식이나 재료는 구속받지 않겠다. 여기선 수묵화로 남명 조식(曺植)에 관한 그림을 그렸으면, 남미에 가선 그것 가지고는 안되겠다는거죠. 극채색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고 … 그러니까 어떤 내용을 담는데 있어 형식은 종이가 됐건 나무가 됐건 그건 구애치 않는 거고요.”
- 선생님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남원의 자연환경, 즉 지리산과 섬진강의 정취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가요?
“그렇죠.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전주 남원은 앞으로 경쟁력이 있는 곳이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흐르는 섬진강 자락과 멀리 지리산의 억센 뼈대, 그리고 평사리 들판들, 일부러 슬로시티라 하지 않아도 삶의 정말 중요한 정서와 여운을 느꼈는데 여기에는 대단한 노력과 철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고도의 문화의식, 감각, 디자인적인 역량, 자연에 대한 의식 이런 것들이 동원돼야 합니다. 전주나 남원도 독특한 조선조 왕도로서의 잔영이지만 아름다운 기와집들, 훌륭한 미각문화, 그리고 유서깊은 역사의 현장들 이런 것들을 잘 살려서 지혜를 모은다면 대단히 유니크한 도시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 전북의 문화예술인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그건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아직 제가 현역으로 있어서, 나중에 내가 원로가 돼 가지고 그 때나…(웃음)”
- 끝으로 한 말씀?
“저는 정말 감사한 게 그림 그리는 데 대한 아주 설렘이 있습니다. 저는 어려서 아침에 일찍 학교를 가는 거예요. 왜 일찍 가느냐? 공부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 칠판을 가득 몇번씩 왔다 갔다 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그러면 해갈이 되는 느낌, 그런데 집안이 기울어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해 주변에서 못하게 하려고 많은 핍박이 있었거든요. 예를 들면 아주 어려운 시절에 조강지처를 만나서 함께 늙어가면서 애틋하게 바라보는 시선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시종일관 첫사랑인 미술 하나를 가지고 끊임없이 대화하고 사랑을 불태우면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감격할 때가 많은 거예요. 이제 본격적으로 할 단계에 접어들지 않았는가 하는 기대와 설렘이 있는 거죠.”
- 오히려 열정이 식는 게 아니라 더 뜨거워 지는 것 같습니다.
“더 많은 그림에 관한 파노라마들이 펼쳐지고, 그러니까 천생 환쟁이인 것 같아요. 한 가지 저에게 미덕은 정말 열심히 한다는 거예요. 이거는 잘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참 열심히 빠져드는구나 하는 마음을 스스로 갖는데 그 배후에는 13살 이전에 크레용도 없고 못하게 했던 분위기, 눈물겨운 그림과의 인연, 애틋함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분이 저한테 담담할 담(淡)에 늙은이 옹(翁)자, 담옹재라는 당호 현판을 보여주면서 어떠냐고 해요. 그래서 제가 노(No), 나는 불꽃 염(炎)자 염옹(炎翁)으로, 꿈꾸는 소년에서 불꽃의 노인으로 갈지언정, 내면에 그림에 대한 용광로가 타오르는데, 담옹 가지고는 만족을 못할 것이다라고 해서… 우스개 소릴했는데, 정말 신기할만큼 열 두세살의 그림에 대한 열정과 설레임이 조금도 죽지 않은 거예요. 그러니까 천생 환쟁이인데 딴 거 시켰으면 어떻게 됐겠어요.”
- 안타까운 부분은 없으신가요?
“다만 안타깝고 회한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뭐냐. 나는 이 나이 정도가 되면 굉장히 성숙된 인격과 성숙된 신앙인이 되는줄 알았어요. 그런데 인격도 신앙도 아주 지진아인 상태로, 도대체 진보되지 않는 거예요. 왜 이렇게 되는가 보니까, 그림 그리는 자기 중심적 행위 속에 빠져서 지나다 보니까, 어쩔 때 보면 내가 대단히 유치하고 미성숙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요.”
(인터뷰가 끝나고, 집 아래 호수집으로 향했다. 동네 사람들이 지나며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정겨웠다. 민물 매운탕으로 저녁식사를 하며 중학교 때 신문배달을 하다 빼먹은 얘기며 친구인 이강래 국회의원과의 자취생활, 형님과 서울에 있는 전북출신들의 활동 등에 대해 들려줬다. 4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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