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요즈음 세간의 중심에서 회자되는 아파트 관리소장이다.
그런데 아파트 관리소장이 언제부터 매스컴의 중심에 서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는 아마도 관리소장이 어떤 마인드를 가지고 업무에 임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고 본다. 전국의 아파트에는 책임감을 가지고 직을 수행하는 관리소장이 참 많다. 관리소장이라는 업무적 직책보다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며 소신 있게 일하는 관리소장들은 신뢰가 쌓여 입주민들과 한 식구가 된다.
필자는 몇 년 전부터 자신이 관리하고 있는 아파트를 도심 속 작은 수목원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계획을 세워 실행하고 있다. 올해도 2월부터 작년에 심어놓았던 경로당 앞 동강 할미꽃들이 잔설을 이고 불을 지피더니 이에 뒤질세라 놀이터에도 흰 개나리꽃이라 불리는 미선나무가 봄 향기를 피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자태를 드로내기 시작하면 주민들은 이에 취해 무한 질주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감상을 하는 슬로우 아파트가 된다.
전주시 삼천천을 옆에 끼고 느티나무처럼 서 있는 중화산동 햇빛찬 아파트가 필자가 관리하는 아파트다. 꽃밭에는 120여 종의 수목과 화초류가 각 세대의 문패처럼 이름표를 달고 반긴다. 출근 후 이름표를 보며 출석이라도 부르듯 봄바람 따라 아파트를 돌며 미리 내 마음속 월령가를 불러본다.
가난하지만 향기를 팔지 않는 3월의 매화를 따라 하얀 목련이 한 잎 두 잎 떨어진다. 마치 여인의 하얀 발걸음이 내려와 서성인 듯하다. 동백은 또 언제 피었는지 함빡 웃으며 맞이하고 노란 수선화는 지나던 미소년이 고개를 내밀 듯 손짓한다. 바위틈의 난초는 붉은 꽃대를 올리며 암자처럼 고요하다. 4월이 오면 라일락꽃 살구꽃 옥매꽃이 무더기로 향수를 자극하고 5월이 오면 모란과 작약은 성화처럼 한바탕 마당을 달굴 것이다. 6월의 상사화가 서럽다. 그님을 볼 수 있는 길은 오직 꿈길 밖에 없으니….
7월의 백합, 그 앞을 지나면 누구나 하얀 천사가 된다. 여름의 산수국, 헛꽃이 피어 벌 나비를 부르니 희생과 겸양지덕을 가르친다. 9월의 단풍숲이 붉은 이별을 준비하는 동안 10월의 국화는 존엄한 늦가을을 기도한다. 11월에는 남쪽 섬마을에서 시집 온 털머위꽃이 노란 향기로 파도치고 12월에는 금목서 은목서 구골목서 삼총사가 시퍼런 잎겨드랑이에서 은총의 눈가루를 뿌린다. 그리고 마지막 1월은 모든 생명들에게 대지의 모신 곁으로 동면휴가를 보내나니.
이처럼 햇빛찬이 꽃대궐로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경남 남해의 섬 외도식물원처럼 불모의 땅을 갈아엎고 꽃과 나무를 사랑한 김용신 아파트회장님의 순수함 때문이다. ‘푸름은 생명이다.’라는 철학으로 아침마다 푸른 연잎 같은 모자를 쓰고 꽃삽을 들고 테마가 있는 씨앗을 뿌린 덕이다. 이에 아파트대표님들과 관리사무소 직원들도 자기 앞마당처럼 가꾸며 오늘도 온고지신의 꽃밭으로 늘 탐구하며 실천한다. 그래서인지 10년 넘은 아파트이지만 젊은 동강할미꽃처럼 햇빛찬의 풍경은 늘 동안의 얼굴로 진화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이국적인 꽃들도 많이 이주해 살고 있다. 크리스마스로즈, 클레멘티스, 아프리카봉선화, 루피너스, 튤립, 서양산딸나무, 마로니에, 붓들레야 등 마치 다문화집 같다. 비유하자면 햇빛찬은 모든 국가와 민족이 웃음꽃을 피우며 살고 있는 작은 지구촌이다. 해마다 햇빛찬에 꽃구경하러 오시는 이웃 주민들과 유치원생들의 발길이 늘고 있다. 그들의 눈빛은 꽃눈이 되고 마음은 꽃향기를 닮아갈 것이다.
꽃의 힘을 생각해본다. 총구를 녹이는 순수함이 숨어 있다. 평화와 공존을 노래하는 꽃은 시인이요 위대한 정치가요 혁명가다. 나는 오늘도 행복지수가 높은 세상을 위해 꽃삽을 든다.
△왕태삼씨는 지난 2012년 계간 〈문학시대〉로 등단했다. 시집 〈나의 등을 떠미는 사람들〉이 있으며, 현재 전북문인협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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