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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격랑에 휩싸인 시대가 명시를 남겼다. 국내외에서 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던 고려 말기의 고승 나옹선사가 지었다는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靑山兮要我以無語)’도 그런 시가 아닐까.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나옹선사는 1347년 중국 연경의 법원사에서 4년여간 머물며 지공선사로부터 수학한 고승이다. 공민왕의 명으로 신광사, 회암사 등에서 후학 지도를 하거나 절을 중창했고, 문수회 법회(뛰어난 지혜의 공덕을 지녔다는 문수보살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법회)를 열었다. 고려말 불교계 중심 인물로 살았다. 1371년에 공민왕은 나옹선사에게 금란가사ㆍ내외법복ㆍ바리 등을 하사하고,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 보제존자(王師 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 普濟尊者)’를 봉했다. 하지만 공민왕 사후에 왕위에 오른 우왕은 그를 내쳤다. 우왕은 제위 2년째인 1376년 나옹선사에게 밀양 영원사로 갈 것을 명했고, 영원사로 가던 나옹은 여주 신륵사에서 열반했다. 불과 57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그의 제자 무학대사가 조선 건국과 함께 왕사로 책봉돼 나옹의 불교를 이어갔지만, 나옹선사의 마지막은 그야말로 비운이었다.

 

어쩌면, 그의 시는 자신의 운명을 말해주고 있다. 중국에 수년간 유학하며 그 시대 고승들로부터 불교의 정수를 수학하고, 귀국해서는 왕명에 따라 조국을 위해 일했다. 난세에 민초들의 어려움을 다독이고, 국가 부흥을 기원하는 법회를 주도했다. 스님으로서 열정적 삶을 살았다. 하지만 경기도 양주 회암사 중창과 문수회 법회 등 과정에서 우왕에게 찍혔던 모양이다. 나옹은 멀리 있는 영원사로 좌천돼 가던 도중에 열반하고 말았다. 청산은 나옹에게 말없이 또 티없이 살라했지만 나옹은 그렇게 살 수 있는 여건에 있지 않았다. 그는 권력의 가시권에 있었고, 권력의 감시를 받았다. 이미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기에 힘든 위치에 있었다.

 

모든 생명체는 생로병사한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서 초연할 수 있는 삶을 추구한다. 영원할 수 없는 삶이다. “옳거니 그르거니 상관말고/ 산이든 물이든 그대로 두라/ 하필이면 서쪽에만 극락세계랴/ 흰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김재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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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호 jhkim@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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