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기 놀라 깬다는 경칩(驚蟄)이 지났다. 서슬이 퍼렇던 동장군이 물러나고 새싹이 파릇파릇 움 트는 시기다. 그래서 그런지 대문을 드리운 라일락 가지 끝에서 파릇한 기운이 엿보인다. 경칩은 동지 이후, 74일째 되는 날로 양력으로는 대개 3월 5일 무렵이다. 이날이 지나면 대동강 물이 풀린다고 할 정도로 완연한 봄을 느낀다. 며칠 전부터 고로쇠 물을 마신다는 소식이니 얇은 옷으로 갈아입어야 할까 보다.
40여 년 공직생활을 마칠 때가 되어 고민한 때가 있었다. 평생을 직장만 오가며 생활했으니 사회 물정엔 문외한이었다. 다시 직장을 구하면 받아줄 곳은 있을까? 만약에 갈 곳이 없다면 무엇을 해야 할지. 내 마음에 동장군이 자리 잡은 것이다.
퇴직 후에 대한 걱정을 하다 보니 그날은 어김없이 오고 말았다. 고민을 한다고 마음의 동장군은 물러나지 않고.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실컷 자보자는 심정으로 며칠을 집에서 뒹굴었다. 아내는 무슨 잠이 그렇게 오느냐며, 시내도 나가보고 친구들도 만나라며 성화를 댔다. 직장에 다닐 때 실컷 자보고 싶은 생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항상 잠이 모자라 피로가 겹쳐 눈이 충혈하기 일쑤였다. 겨우 동네 사우나 가는 것으로 한 달을 보냈다.
우연히 어느 정년퇴직자 부인들이 모인 장소에서 오가는 말들을 잘 정리하여 소개한 책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정년퇴직하면 무엇을 할 것인가 걱정하는 아내. 정년퇴직한 지 꽤 됐는데도 놀고 있는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 놀기만 하면 사람이 처지고 빨리 늙는다고 걱정하는 아내. 밖에도 잘 나가지 않고 집에서 매끼 밥을 차려 달래서 미워 죽겠다는 아내 등. 더는 자리에 앉아있기가 거북해서 자리를 피했다는 작가의 말이었다. 예비 퇴직자들이 모이면 “퇴직하면 뭐 할래?”가 인사다. 바로 내가 받는 인사가 되고 말았다.
직장에 다니면서 취미생활로 한 점 두 점 수집했던 수석이나 분재 수집도 그만 둔지 몇 해 되었다. 그 뒤 시작한 것이 13년간의 서예 공부였는데, 갑자기 손 떨림 증후가 나타나 붓을 잡을 수가 없었다. 평탄한 아스팔트 길에 웅덩이가 생긴 것처럼 허무했다. 건강에 이상이 없었다면 서예 공부를 계속할 수 있어 취미생활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월남전에서 얻은 고엽제 후유증으로 걸핏하면 병원 신세 지는 일이 다반사였으니, 병원생활이 비중을 크게 차지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렇게 좋은 세상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떨리는 손이지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수는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취미생활은 문학이다 싶어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에 입문했다. 내 마음의 동장군이 풀리는 경칩의 절기가 온 것이다.
동료 문우님들은 나와 같이 손 떨림 증후가 있는 분이 없었다. 부러웠다. 선배들은 작품을 발표하고 동료들로부터 평가를 받는데 감히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쉬는 시간이면 선배들의 자상한 귀띔에 넋을 잃기도 했다. 두어 주 지났을까, 작품을 한 편 써 놓고 발표할 생각을 하니 두려웠다. 선배가 주는 용기에 나도 발표할 기회를 갖기 시작했다. 여러 문우들로부터 들은 내용을 다시 읽어가며 수정하기를 거듭했다. 문장이 매끄러울 때는 손도 떨리지 않는지 자판위에서 춤을 춘다.
경칩이 지나면서부터 동장군을 잊듯 문학에 빠지고 말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글감이다. 내 마음을 짓눌렀던 동장군이 기러기를 따라 북쪽으로 갔는지 평화롭다. 지난해, 부끄럽지만 수필집과 시집을 출간하고, 부안 해변에 있는 펜션을 빌려 한 달여 혼자 숙식했다.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경칩이 지났으니 다시 걸어야지.
△김정수 시인은 시는 《한국국보문학》 수필은 《대한문학》에 등단했다. 2016년에 시집 ‘詩의 창에 꽃비 내리던 날’, 수필집 ‘파랑새 둥지를 품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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