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5-12-22 17:22 (Mon)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기고
일반기사

홍대 앞 길모퉁이 소녀의 허망한 눈빛

▲ 이형구 (사)생활법률문화연구소 이사장·법무사 법학박사
홍대 앞 소녀상.

 

대한민국의 소녀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나라 잃은 한을 소녀상으로 승화하여 그 부끄러웠던 과거를 잊지말라는 간절한 염원을 담은 영혼의 절규를 분신화한 것이다. 그동안 국가가 일본을 상대로 위안부 운운하며 우겨대는 소리에 정작 몸과 정신을 송두리째 짓밟히고 할퀸 상처를 가슴에 묻고 살아온 할머니가 전해준 말씀이 왜 우리가 위안부냐고 하면서 피눈물을 흘리셨다.

 

옛 말에 가물치가 뛰니 몽둥이가 뛴다고 했던가. 그럴싸하게 포장된 명함을 가지고 방송이나 언론에 이름 석자를 내밀고 나와 일본이 즐겨 쓰는 ‘위안부’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온 나라에 유행가처럼 나불대고 있고, 덩달아 정부 고위 관리들도 너나없이 ‘위안부’를 애창곡처럼 불러댄다.

 

1910년을 우리는 교과서를 통하여 ‘한일합방’이라고 배웠고, 이미 머릿속에 굳어 있다. 그러나 ‘한일합방’은 우리가 아닌 일본이 전해준 말이다. 우리는 1910년을 반드시 ‘경술국치’라 말해야 하고, ‘위안부’ 역시 ‘징집녀’라고 말해야 한다. 1998년 유엔인권소위원회 특별보고관의 보고서 내용에서도 ‘일본군 위안부’라는 말로 일본군이라는 서두어를 붙여서 기록했으며, 더욱이 이 보고서가 정확한 표현은 ‘일본군 성노예’라고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 보고서의 내용 중에 ‘위안부’의 차출 방법 중에 일부는 가난과 가족의 빚을 갚기 위해서라는 부분이 있으나, 이는 일본의 진술에 의존한 부분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시대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반인륜적 전쟁행위로 광분하고 있는 주범자가 대한민국 처처에서 헤아릴 수 없는 소중한 생명을 도륙하고 살육하는 파렴치범들이 어찌 가난과 가족의 빚을 염려해주며 차출해 가겠는가 말이다.

 

필자는 이미 ‘위안부’라는 말은 안 된다고 했다. 사람을 전쟁공물로 여기고 징집해간 것이다. 꽃다운 소녀들을 하찮은 물건으로 취급하고 징집해 갔기에 그래서 ‘징집녀’인 것이다. ‘일본군 성노예’라고도 할 수 있으나, 단순히 일본군의 육체적 만족을 위하여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강제로 끌고 갔기 때문에 노예가 아닌 징집이 더 설득력이 있고 바른 것이다.

 

소녀상은 이런 깊은 대한민국 국민적 아픔과 고통의 감정 표현을 함축하고 있다. 이 나라 방방곡곡에 소녀상을 세워도 우리의 국민적 한을 풀고 자존심을 되찾는 데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대학교 정문이면 어떻고, 교내면 어떤가. 무엇이 두려워 그것도 99년 전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전국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당시를 재현하는 3월 1일에 처참하게 짓밟힌 상처 투성이 꽃다운 소녀의 구국 혼을 일본인 몇몇의 눈치를 보며 거부하는가.

 

세월이 흘렀다 하여 있었던 사실들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 사실들이 반인륜적 패륜적 행위로 내 나라 내 민족을 말살하려는 작태로 점철되어 오늘에 이르러서도 반성은 고사하고 그 사실 조차도 부정하는 그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으며, 끝났다는 그 세치의 혀가 아직도 우리를 능멸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홍대 앞 길 모퉁이에 우뚝 선 소녀는 허망한 눈빛을 남긴 채 차가운 지게차에 실려 참혹한 당시의 대동아전쟁터로 끌려가고 있는 듯하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