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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선과 아버지

김희관 법무연수원장·前 광주고검장
김희관 법무연수원장·前 광주고검장

고향 쪽에 이런 저런 일들이 생겨 가끔씩 전라선을 타게 된다. 열차에 오르면 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을 잡고 전라선 열차에 올라 타 아버지의 고향이었던 구례를 자주 찾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동이리역에서 출발해 대장촌-삼례-동산촌-전주-신리-관촌-임실-오류-오수-서도-남원-주생-금지-곡성-압록-구례구역으로 이어지는 그 길디 긴 완행 철길. 얼마나 느렸던지 다섯 시간이나 걸린 적도 있었다. 할머니 보러 구례에 가자는 아버지를 향해 가끔은 안가겠다고 떼를 쓰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팥연양갱과 사이다를 사주겠다는 아버지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냉큼 따라 나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아버지가 올해 87세가 되셨다.

전라선은 내게는 그저 즐거운 추억거리지만, 아버지에게는 인생의 중대한 분수령으로 기억될 것이다. 아버지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소년 가장이 되었다. 여섯 형제중 둘째로 태어난 아버지는 일찍이 부친을 여의었고, 그나마 의지하던 큰 형님마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노모, 어린 네 동생들, 심지어 큰 형이 남기고 간 조카 2명의 생계까지 떠맡아야 했다. 그가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교정을 걸어가는 소년의 귀에 선생님들의 대화가 비수처럼 꽂혔다. “00이는 철이 없어. 집안 형편이 그렇게 어려운데도 고등학교를 가려고 하다니 말이야.”

이 말을 들은 15세의 어린 소년은 그 순간부터 어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얼마 후 전라선 열차에 몸을 싣고 익산으로 향하였다. 고등학교 진학의 꿈을 접고 먼 친척이 운영하는 양은 솥단지 공장의 점원으로 취직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로 동생 2명은 교사가 되었고, 큰 형님의 아들은 의사가 되었다. 그 다음 대에서는 의사가 4명이나 나왔다. 아버지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 집안은 다시 일어설 수 없었을 것이다.

한때 국민적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송혜교가 중동의 한 나라에서 의료봉사 활동중 ‘파티마’라는 전쟁고아 소녀를 돕는데, 송중기가 걱정스럽게 송혜교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렇게 해도 그런 아이가 한 둘이 아닌데, 세상이 달라지겠습니까”라고 말이다. 그러자, 송혜교는 이렇게 대답한다. “세상은 바뀌지 않겠지만, 파티마의 삶은 바뀔 것이고, 그것은 파티마에게 세상이 바뀌는 일이겠지요”라고.

그렇다. 애당초 아버지에게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야망이나 포부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저 자신에게 던져진 고난의 삶을 견뎌내야 할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저 자신에게 맡겨진 식솔들만큼은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각오로 살았을 뿐이다. 그의 삶을 소시민적이었다고 불러도 좋다. 하지만, 그의 희생과 헌신은 세상을 바꾸었다고 확신한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몇 사람이라도 아버지가 돌보고 보살폈던 그 사람들의 세상은 그로 인해 바뀌었기 때문이다.

가정의 달인 5월이 며칠 남지 않았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라는 어느 시인의 통찰이 가슴에 와 닿는다. 평생 동안 가족을 위해 땀과 눈물로 고달픈 삶을 묵묵히 살아 온 이 땅의 아버지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그 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들의 세상을 바꾸어 주셔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김희관 법무연수원장·前 광주고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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