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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주보기] 석전 황욱 선생의 서예

장진아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실장

국립전주박물관에는 서예가 석전(石田) 황욱(黃旭, 1898-1993) 선생의 전시실이 있다. 박물관에 기증하신 선생의 유품을 전시한다. 전통 문화유산의 한 갈래로 ‘서예’라는 분야가 엄연하고 우리 문화를 이해하는 데 소홀히 할 수 없는 역사적 성취가 시대별로 있건만, 지필묵과 한문에서 멀어진 관람객들이 옛 글씨의 멋과 맛을 누리는 것은 쉽지 않다. 이해에 앞서 무언가 보이고 느껴져야 알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겠는가 싶은데, 서예는 유난히 낯설다. 눈앞에 벽이 있는 것 같다.

한데, 황욱 선생의 글씨는 좀 다르다. 석전 전시실은 어린이박물관과 함께 있어 가족 관람객의 발길이 가끔 닿는다. 젊은 부모와 아이가 선생의 글씨 앞으로 자연스럽게 걸어가 ‘신기하게’ 작품을 보며 글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대부분 글씨의 형태를 이야기하는데, 그만큼 개성 있는 글씨인 건가 싶어 눈여겨보곤 한다. 

황욱 선생의 글씨는 ‘악필(握筆)’이라고 부르는, 흔하지 않은 붓 잡는 법에서 완성되었다. 네 손가락으로 붓대를 움켜쥐고 엄지로 위를 꾹 눌러 힘을 주고 팔을 움직여서 글씨를 쓴다. 힘 있는 서체를 위해 일부러 이렇게 쓴다고도 하나, 석전 선생의 악필법은 환갑 넘어 얻은 수전증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전북 고창에서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의 7세손으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고 서예를 익혔다. 일찍이 뛰어난 필력을 인정받기도 했으나, 손떨림으로 점차 글씨 쓰는 것이 어려워지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악필법(握筆法)을 시도했다. 68세 무렵이었는데, 글씨와 시, 음률로 자오(自娛)했던 선생의 삶이 ‘서예가’의 일로(一路)에 들어선 것도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오른손으로 악필법을 구사했으나, 이조차 어려워지자 87세 무렵부터는 왼손 악필법으로 마침내 자신의 서예 세계를 일구었다. 

선생의 글씨는 수전증이 오기 전은 물론, 오른손 악필의 시기가 다르고 왼손 악필의 시기가 또 다르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붓 잡는 힘이 약해져 가는 노년의 세월, 매 순간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도전하고 도전했던 놀라운 시간이 글씨에 그대로 나타난다. ‘여든 살 밭 가는 늙은이 석전[八十畊叟 石田]’이라고 낙관을 쓴 팔십 대의 작품이 여러 점 있다. 수십 년 악필법의 시간이야말로 석전 선생 그 자신이었음을 드러내는 낙관이다. 하루하루 묵묵히 밭을 갈며 수확에 이르는 고된 시간을 기어이 내것으로 만드는, 서예가로서의 오직 한 길이 거기에 있다.

서론(書論)에 의하면 붓을 움켜쥐는 악필은 힘이 있어서 강직함을 보여야 하는 글이나 큰 글씨 등에 강점이 있다고 한다. 전북의 명소 곳곳에는 선생의 글씨로 된 현판이 많다. 만년에도 현판 크기 그대로의 큰 글씨를 쓰셨기에, 몇 시간 동안 팔이 아프도록 먹을 갈아드렸다는 기증자 가족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적당한 크기로 쓴 글씨를 확대하는 요령을 용납하지 않은 선생의 기개 또한 악필의 오묘한 법을 체득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서예의 매체인 붓을 쥐는 손이 떨린다는 것, 그것도 육십 노년에 이르러 만난 벽 앞에서 시작한 선생의 길은 아흔이 넘은 나이에 이르러, 타고난 재능을 칭송받던 젊은 날의 글씨보다도 더 또렷한 자신만의 세계를 이루었다. 어린이박물관에 온 아이들의 눈에도 그것이 보이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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