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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唐)과 고구려가 전쟁을 하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비담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앞에 선 화랑 유재와 석기수를 보았다. 신라의 사직을 지키려면 여왕과 여왕 일파를 몰사시켜야만 한다. 명심하고 가라. 이제 비담은 거침없이 말을 뱉는다. 깊은 밤, 자시(12시)가 넘었지만 비담의 저택은 열기로 덮여 있다. 넓은 앞뒤 마당은 소리죽여 움직이는 군사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밖에 모인 군사는 2천여 명, 비담의 호위군에서 골라 뽑은 용사들이다. 비담은 그들을 지휘할 장수들로 화랑 유재와 석기수를 임명한 것이다. 주위에 둘러선 장수, 대신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다. 비담이 말을 이었다. 유재, 네가 궁성의 서문으로 진입해서 곧장 여왕의 침전으로 돌입해라. 예, 대감. 유재는 25세, 왕족이기도 하다. 상대등 비담과 먼 친척이 된다. 거구에 팔이 긴 유재가 어깨를 부풀리며 말했다. 반드시 여왕의 목을 베어 신라를 다시 세우겠소. 장하다. 비담의 시선이 옆에선 석기수에게로 옮겨졌다. 석기수, 네 역할도 크다. 너는 궁성 북문으로 진입해서 여왕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예, 대감. 이미 여왕의 퇴로까지 예상하고 있는데다 궁성에는 첩자들이 나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비담이 머리를 끄덕였다. 자, 너희들 뒤를 우리가 따를 테니 어서 떠나라. 예, 대감. 소리쳐 대답한 둘이 몸을 돌리더니 청을 나갔다. 그때 잡찬 박명이 한걸음 나서서 말했다. 대감, 김유신이 호곡성에서 닷새째 나오지 않고 있지만 군사를 보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여왕부터 죽이고 나서. 비담이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잘랐다. 김유신 그놈을 지금 잡을 필요가 없어. 내가 왕위에 오르면 바로 내 발밑에 무릎을 꿇을 놈이야. 김춘추와 매부 처남 사이가 된 이유를 알지 않은까? 그때 옆쪽 장군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하나가 물었다. 대감께서 김유신과 격구를 하시겠습니까? 해야지. 비담이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내 손으로 옷고름을 뜯고 김유신의 누이한테 갈 수가 있네. 대감, 김유신은 이제 미혼인 누이가 없습니다. 이 사람아, 김춘추에게 준 누이를 데려오면 되지 않겠는가? 웃음소리가 더 커졌고 비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덧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오늘밤이 거사일인 것이다. 그동안 철저하게 준비를 해 놓았기 때문에 내일 아침이면 새 왕이 즉위할 것이다. 다만 경쟁 세력이 김춘추와 그의 심복인 김유신이 걸렸지만 김춘추는 지금 북쪽 신주(新州)에 있고 김유신도 40여리 떨어진 호곡성에 들어가 있다. 그리고 비담은 김춘추하고 떨어진 김유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왕족인 김춘추와 인연을 맺기 위해서 격구를 하다가 일부러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떼고는 제 여동생한테 데려간 김유신이다. 그래서 김춘추와 인척이 된 김유신의 속성을 비담이 알고 있는 것이다. 청을 나오는 비담의 뒤를 장군, 대신들이 따른다. 신라 고관의 대부분이 모여있다.
당군이 돌아간다! 함성이 울렸다. 그러더니 사방에서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계백은 성주 양만춘과 함께 남문의 성벽에 서 있었기 때문에 당군의 부대들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퇴각이다. 오전 사시(10시)무렵, 새벽인 인시(4시) 무렵부터 꿈틀거리던 당군이 이쪽에 등을 보인 채 멀어지고 있다. 새벽부터 당군을 주시하고 있었던 터라 거대한 짐승이 꿈틀거린 이유가 퇴군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만세! 이겼다! 이제는 고구려, 백제군이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북소리도 요란해졌다. 여자 목소리도 들리는 것이 주민들도 함께 소리치는 것 같다. 바람이 불어와 성벽에 꽂힌 깃발들이 펄럭였다. 아래쪽에 개미 떼처럼 덮여 있는 당군의 깃발은 평소의 1할도 안된다. 부대별로 구분한 깃발뿐이기 때문이다. 만세! 만세! 군사들의 만세 소리를 들으면서 양만춘이 머리를 돌려 계백을 보았다. 장군, 이세민이 살에 맞아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몇달쯤이 지나야 알 것 같소. 양만춘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라 있다. 어쨌든 당군이 화살 한발로 물러나게 되었구려. 철군하지 않는다면 아마 저곳에서 얼어 죽게 될 것입니다. 계백이 아래쪽 벌판을 가리켰다. 벌판에는 먼지가 가득 덮여 있다. 양만춘은 퇴군하는 당군을 쫓을 생각이 없다. 당군이 퇴군하는 마당에 고구려 군사 한명이라도 상하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장수 몇명이 기마군으로 당군을 치자고 건의했지만 양만춘은 거절했다. 계백은 말할 것도 없다. 그때 양만춘이 웃음 띤 얼굴로 계백을 보았다. 장군, 먼 훗날 역사에 이 전쟁이 어떻게 기록될 것 같소? 당과 고구려가 그때도 존속하고 있다면 각각 다르게 기록되겠지요. 그렇지. 머리를 끄덕인 양만춘이 말을 이었다. 당의 역사에는 승리한 전쟁이지만 겨울이 되어서 물러갔다고 적겠지요. 이세민이 죽지 않았다면 병사(病死)로 기록될 것이요. 먼지에 덮인 당군의 뒷모습을 내려다보면서 계백이 말을 이었다. 아마 황제가 물러가면서 성주께 잘 싸웠다면서 비단이나 금붙이 등 선물을 주고 갔다고 기록해 놓을지도 모릅니다. 고구려나 백제의 역사에는 사실대로 기록이 되어 있겠지요. 눈을 가늘게 뜨고 당군을 보던 양만춘이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오늘밤 소를 잡고 남아있는 술동이를 모두 내놓아서 군민(軍民)을 위로하겠소. 오늘이 승리의 날이오. 양만춘의 목소리가 떨렸다. 장군이 일등공을 세웠지만 내가 보답해드릴 방법이 없구려. 그날밤 안시성 위쪽 하늘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다음날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소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수양제의 대군에 이어서 당(唐)의 대군까지 물리친 고구려는 진정한 대륙의 패자(覇者)였다. 계백은 백제국 지원군으로 안시성주 양만춘을 도와 철궁을 쏘았지만 공을 내세우지 않았다. 양만춘도 계백이 이세민을 쏘았다는 사실을 직접 들은 것도 아니었지만 믿었다. 계백 같은 명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군이 철군한 이틀 후에 계백은 백제군을 이끌고 안시성을 나왔다. 이제는 귀국이다. 이세민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백제군의 깃발은 당군보다 많았다. 초겨울이었다.
으악! 이세민이 이를 악물었지만 마침내 참지 못한 비명이 터졌다. 폐하. 옆에서 지켜서있던 대신(大臣), 장수들이 일제히 외치면서 허리를 굽혔다. 이세민의 눈알 하나가 화살과 함께 빠져나온 것이다. 보라, 어의 육전의 손에 쥔 화살 끝에 이세민의 눈알이 박혀있는 상태다. 육전이 서둘러 눈알에 이어진 살점을 베어내더니 텅 빈 왼쪽 눈구멍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았다. 폐하. 끔찍한 장면을 바라보면서 다시 대신들이 울부짖었다. 폐하, 소신을 죽여주시옵소서. 친위대장 왕양춘이 소리쳤다. 제대로 보호를 하지 못한 친위대장의 책임이 큰 것이다. 어의 육전이 눈구멍에 약초를 넣고 지혈을 시키는 동안 주위의 백관들은 아우성을 치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잠시도 이세민의 몸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그때 허리를 편 육전에게 대장군 하돈수가 물었다. 폐하 옥체는 이상이 없겠는가? 하돈수는 중군 15만을 이끌고 있는 대장군 겸 병부상서다. 현무문의 변이 일어났을 때 태자 건성의 측근이었다가 이세민에게 호응한 공으로 승승장구한 인물이다. 육전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폐하께서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아니, 그러면 위험하다는 말인가? 그때 신음을 뱉고 있던 이세민이 오른쪽 눈을 떴다. 여봐라! 친위대장 있느냐! 이세민의 외침이 진막 안을 울렸다. 예엣, 폐하! 놀란 왕양춘이 소리쳐 대답했다. 폐하, 소신 왕양춘이 여기 있사옵니다. 방금 말한 놈이 대장군 하돈수 아니냐? 예, 폐하. 지금 즉시 저놈 목을 베어라. 예, 폐하. 벌떡 일어선 왕양춘이 허리에 찬 칼을 빼들고 하돈수에게 다가섰다. 목을 늘여라! 왕양춘이 고함을 치자 놀란 하돈수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폐하, 소신 하돈수가. 하돈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을 때 이세민이 소리쳤다. 이놈! 내가 죽기를 바란 말투였다. 폐하! 무얼 하느냐! 베어라! 예엣! 다음 순간 왕양춘이 내려친 장검이 하돈수의 목에 떨어졌다. 엄청난 기세로 내려쳐진 장검이어서 하돈수의 머리통이 떨어지더니 데굴데굴 굴러 이세민이 누운 침상 다리에 걸려 멈춰섰다. 피비린내가 풍겨오면서 진막 안에 모인 1백여명의 장군, 대신들도 숨을 죽였다. 그때 이세민이 누운 채 다시 소리쳤다. 철군 준비를 해라! 예엣! 모두 입을 모아 소리쳐 대답했다. 요동총독 서위의 지휘 하에 철군을 한다. 서둘러라! 예엣! 그때 이세민이 옆에 서있는 육전에게 손을 내밀었다. 짐을 일으켜라. 육전이 서둘러 이세민의 상반신을 일으켰다. 진막 안은 부산해졌다. 친위군이 하돈수의 시체를 치우고 피를 닦았고 장군들은 진막을 빠져나간다. 그때 철군 지후를 맡은 서위가 다가오더니 허리를 굽히면서 말했다. 폐하, 내일부터 철군을 시키겠습니다. 철군이 이렇게 결정되었다.
군사 복장을 한 계백이 역시 군사 차림의 화청과 함께 왼쪽 성벽에 올랐다. 지키던 군사들이 계백을 알아보고는 놀라 눈을 크게 떴지만 화청이 나무랐다. 잘 지켜라. 놈들이 이곳을 겨냥해 올 수도 있다. 성문과 2백보쯤의 거리였지만 이곳에는 당군이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래쪽이 급경사여서 성벽 높이가 배나 더 높아진데다 구덩이처럼 팼기 때문에 무덤속이나 같은 곳이었다. 실제로 성벽 아래쪽 구덩이에는 개전 초기에 멋모르고 몰려왔다가 빠져나가지 못한 당군 시체가 지금도 20여구나 쌓여 있다. 철궁을 손에 쥔 계백이 성벽의 틈 사이로 당군의 본진을 내려다 보았다. 그순간 계백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왼쪽이 노출된 이세민의 상반신이 보이는 것이다. 거리는 150보 남짓. 이세민의 앞쪽은 쇠방패로 무장한 친위대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었지만 이쪽에 상반신이 노출되었다. 은솔, 보입니다. 옆에 선 화청의 두 눈이 번들거렸고 목소리가 떨렸다. 무성한 수염은 반백이다. 마침 바람이 뒷바람이 부는군요. 3보쯤 더 나가겠소. 화청의 말을 흘려 들으면서 계백이 철궁에 화살을 먹였다. 단 한발이다. 한발로 맞춰야 한다. 화살이 근처에 떨어지면 친위대는 순신간에 이세민을 철통안에 모실 것이었다. 햇살이 비스듬히 비치고 있다. 함성과 호각, 북소리가 천지를 울리고 있었지만 이쪽 성벽 위는 모두 긴장으로 굳어져 있다. 30명쯤의 군사는 제각기 성벽 틈 사이로 붙어서서 창칼을 번쩍이고 있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성벽 틈 사이에 세워 놓은 깃발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계백은 숨을 들이켜고 나서 화살 끝을 쥐고 힘껏 당겼다. 화살은 싸리나무 대에 가는 쇠심을 박았고 화살촉은 삼각으로 길이는 한치(3cm), 끝은 바늘처럼 날카롭다. 계백은 어금니를 물고 어깨를 힘껏 젖혔다. 그 순간 철궁이 만월처럼 굽혀지면서 화살촉이 철궁을 쥔 왼손 검지 위에 얹혔다. 그때 계백이 화살촉 위에 이세민의 얼굴을 올려놓고는 그대로 겨냥을 한치쯤 올렸다. 한치 위쪽의 허공을 겨냥한 것이다. 철궁을 쥔 왼손이 나무토막처럼 굳어졌고 화살끝을 쥔 손가락의 감각이 없어졌다. 잠깐 후면 손가락이 떨리게 된다. 그순간 계백이 화살끝을 쥔 손가락을 놓았다. 팅! 시윗줄에 끊어질 것 같은 소음이 울리더니 화살이 날았다. 계백은 눈을 부릅떴다. 철궁에서 발사된 화살 속도는 빠르다. 다음 순간 계백이 숨을 들이켰다가 뱉으면서 소리쳤다. 맞았다! 맞았다! 거의 동시에, 그러나 계백보다 배나 더 큰 목청으로 화청이 외쳤다. 그 뒤에 서있던 하도리가 따라 소리쳤고 성벽에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고함을 쳤다. 당왕 이세민이 살에 맞았다! 계백은 이세민이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 안는 것을 보았다. 화살이 얼굴에 박혔다. 다음 순간 대경실색을 한 친위군이 방패로 이세민을 감쌌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친위군은 당황했다. 정연했던 대오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곧 뒤로 물러서면서 황제의 깃발이 비스듬히 눕혀지기까지 했다. 그러더니 뒤쪽의 중군까지 허겁지겁 물러간다. 이세민이 화살에 맞았다! 성벽 위의 고함은 더 높아졌고 어리둥절했던 이쪽 군사들이 따라서 외치기 시작했다. 어느덧 운제가 멈춰 서 있다.
폐하, 요동총병 한문광이 투석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친위대장 왕양춘이 말하자 이세민이 코웃음을 쳤다. 바보 같은 놈, 장수가 돌덩이에 맞아 죽다니. 진막 안에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황제의 심기(心氣)가 극히 나쁜 상태인 것이다. 오전에는 독전을 하다가 화살을 피해 뒤로 물러나는 중랑장 하나를 잡아 목을 베었다. 그 머리통을 창끝에 꽂아 포차 옆에 세워 두었으니 군사는 물론이고 장수들도 화살이나 투석을 피해 뒤로 물러나지 못했다. 요동총병 한문광도 뒤로 못 피하고 죽었을 것이다. 오후 미시(2시)쯤 되었다. 오늘도 아침부터 격렬한 공격을 퍼부었지만 동문 옆쪽 성벽만 조금 허물었을 뿐 수천 명의 사상자만 내놓고 일진일퇴 중이다. 그때 이세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후에도 총공격이다! 장수들이 일제히 대답하더니 진막 안이 분주해졌다. 출동 준비를 하려고 장수들이 뛰어나갔고 전령들이 들어왔다. 폐하, 오후에는 쉬시지요. 친위대장 왕양춘이 말했을 때 이세민은 버럭 소리쳤다. 짐도 출전한다! 준비해라! 예엣. 서문으로 간다. 서문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라고 해라! 왕양춘이 명(命)을 전하려고 뛰어나갔을 때 이세민이 머리를 돌려 뒤에 선 시동을 보았다. 김인문이다. 김춘추가 신라왕이 된다면 네가 그 뒤를 잇겠구나. 황공합니다. 소인은. 소인이 어째? 그런 자질이. 닥쳐라! 이세민이 버럭 소리치자 김인문이 몸을 웅크렸다. 눈을 부릅뜬 이세민이 김법민을 노려보았다. 거대한 진막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세민이 이사이로 말했다. 난세에 드러내도 모자랄 판인데 움츠리고 숨다니, 겁쟁이 놈들. 황공합니다. 네 애비한테 밀사는 보냈느냐? 예, 폐하. 그때 왕양춘이 들어와 보고했다. 폐하, 출동 준비가 되었습니다. 밖에서 북이 울리고 있다. 황제의 출동을 알리는 북이다. 이세민이 또 나오는 모양입니다. 오늘도 서문 성주에 서 있던 계백에게 장덕 백용문이 말했다. 이제는 하루에 두 번씩 총공격을 하는군요. 오전에는 당군 주력이 동문을 공격했던 것이다. 지금 무너진 동문 옆쪽 성벽의 보수작업이 한창이다. 동문 성벽 보수작업이 덜 끝났을 텐데 그곳을 포차가 돌을 퍼부으면 위험할 텐데요. 그때 옆에서 군사들이 소리쳤다. 운제들이 이쪽으로 옵니다. 머리를 든 계백이 구름 같은 먼지 속에서 이쪽으로 향해져 있는 운제 3대를 보았다. 당군이 오후에는 서문을 공격할 것 같다. 머리를 든 계백이 백용문을 보았다. 전원 성벽으로 대기시키도록. 예, 은솔. 곧 백용문의 지시로 북소리가 울리더니 군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때 백용문이 성벽을 내려가고 있는 계백에게 소리쳐 물었다. 은솔, 어디 가십니까? 나는 왼쪽 성벽에 있을 테니 장수들은 성문을 지켜라. 계백이 서둘러 내려가면서 지시했다.
서문 좌측 성벽에 선 계백이 아래쪽 당군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거리를 재는 것이다. 노련한 궁사는 표적과의 거리를 거의 정확하게 잴 수가 있다. 많아야 2자(60m)정도 차이가 날뿐이다. 지금 이곳에서 이세민과의 거리는 162보, 쏘면 닿는 거리다. 이세민은 방패를 든 철기군의 철통같은 방어막 안에 앉아 있지만 여기서는 측면이 노출되었다. 가슴 위쪽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상반신은 황금 갑옷을 입은 데다 목에는 쇠사슬 보호대를 둘렀다. 머리에 투구를 썼지만 무거워서 가끔 벗고 황금 관을 쓰기도 한다. 계백이 손에 들고 있는 각궁을 내려다보았다. 소뿔을 대어 만든 각궁은 손에 익었다. 이 거리에서 이세민을 맞출 수는 있다. 이 활은 마상에서 달리면서 쏘기에 적당하다. 1백보 거리라면 달리는 사슴, 범이라도 연달아 속사를 해서 10발 8중까지는 맞춘다. 그때 옆에 선 화청이 말했다. 은솔, 거리가 좀 멉니다. 화청은 군사 차림이었고 계백도 그렇다. 오늘도 이곳 좌측 성벽의 돌출 구역에는 군사가 대여섯밖에 없다. 계백과 화청이 군사 차림으로 이곳에 와있는 것이다. 오전 오시(12시)가 되어갈 무렵이다. 한바탕 활과 포차로 공방전이 벌어지고 난 후에 양군은 잠깐 소강상태로 들어선 상황이다. 화청이 성벽 사이로 밖을 내다보며 말을 이었다. 은솔, 이 거리에서는 맞아도 깊게 박히지 않습니다. 갑옷에 맞으면 튕겨 나갈 뿐이오. 내가 대장장이한테 철궁을 만들라고 했어. 계백이 말하자 화청이 눈을 크게 떴다. 잘 휘어질까요? 마침 좋은 철이 있더구만. 오늘밤까지 만들어 준다니 봐야겠지. 철궁은 시위줄을 대여섯번 쓰고 나서 갈아줘야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상관이 없겠지요. 손에 익지 않아서 맞추기 힘들 거야. 그리고 당기는 힘이 배가 들기 때문에 한두번 쓰고는 쉬어야 한다. 야전용으로는 부적합한 것이다. 기마군이 달리면서 쏘는 화살은 위력적이지만 1백보 안이어야 한다. 보군 궁사가 쏘는 화살은 150보까지는 정확도가 뛰어나지만 먼 거리는 무용지물인 것이다. 지금 계백과 화청은 이세민의 저격을 상의하는 중이다. 계백은 명궁이다. 추위가 닥쳐오면서 필사적으로 되어있는 당군에 치명타를 한발 날리면 퇴군을 할 명분이 생길 것이다. 그날 밤 대장장이를 찾아간 계백과 화청은 만들어진 철궁을 보았다. 각궁보다 조금 크고 가늘었지만 시위는 두배쯤 굵었다. 고구려인 대장장이가 만족한 얼굴로 철궁을 건네주며 말했다. 오랜만에 만들었습니다. 쇠가 좋아서 잘 굽혀지지만 힘은 배가 들 것입니다. 고생했네. 약속한 금화 3냥을 주었더니 대장장이가 활짝 웃었다. 철궁을 쥔 계백이 화청과 함께 곧장 성안 사대로 나갔다. 밤이어서 사대가 다 비어 있었기 때문에 계백도 군사에게 횃불을 들려 2백보 밖에 꽂아두라고 지시했다. 군사들이 2백보 거리에 세워둔 횃불은 7개다. 계백은 철궁에 살을 세우고는 힘껏 당겼다. 과연 각궁보다 두배의 힘이 들어가야 시위가 당겨졌다. 힘껏 당기고 나서 과녁을 겨눴더니 곧 활끝을 쥔 손가락이 떨렸다. 시위를 놓자 살은 번개처럼 날아갔는데 횃불 위쪽으로 날아갔다. 뒤쪽에 선 화청이 한숨을 뱉었다. 계백은 다시 시위에 살을 먹였다. 오늘밤은 50사는 할 예정이다.
진막으로 돌아온 이세민의 갑옷을 시종들이 벗기기 시작했다. 가죽에 금박을 입힌 데다 장식 대부분은 금이다. 갑옷을 벗기자 이세민의 땀에 젖은 비단옷이 드러났다. 시종 둘이 좌우에서 땀을 닦아준다. 그때 이세민이 시종 하나에게 물었다. 네 아비가 언제 온다더냐? 네? 놀란 시종의 얼굴이 금방 하얗게 굳어졌다. 시종은 바로 김춘추의 아들 김인문이다. 이세민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이번에 군량을 백제군에게 탈취당해 나한테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지 않느냐? 김인문이 숨을 죽였고 이세민의 말이 이어졌다. 신라에서 그에 대한 사죄사가 올 텐데 올 인물은 김춘추 뿐이다. 그러는 동안 다른 시종들이 이세민의 겉옷을 입혀주었다. 곧 용상에 앉은 이세민이 김인문에게 다시 묻는다. 어떠냐? 연락받았느냐? 아니옵니다. 짐 앞에서 거짓말을 하면 9족을 몰살시킨다는 것을 아느냐?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내용은 칼로 내려치는 것 같다. 예, 폐하. 허리를 굽힌 김인문의 얼굴은 땀범벅이 되었다. 김인문은 아직 17세다. 그때 이세민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시종으로 내 옆에 붙어있으면서 사흘에 한 번씩 성안에 사는 신라놈들에게 내 근황과 정세를 알려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 그걸 알면서도 짐은 놔두었다. 신라는 당의 신하(臣下)국으로 소식이 빨리 전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세민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져졌다. 이곳 전장에까지 네 심부름을 하는 밀정놈들이 따라왔더구나. 치중대의 내의복 관리하는 놈들이지? 그 말을 옆에서 듣던 친위대장 왕양춘이 어깨를 부풀렸다. 눈을 치켜뜨고 있어서 당장에 김인문을 도륙할 것 같다. 그때 김인문이 입을 열었다. 예, 폐하. 죽여주시옵소서. 내 말에 대답해라. 네 아비는 언제 오느냐? 곧 오실 것입니다. 김인문의 목소리가 떨렸다. 군량을 빼앗긴 사죄사로 올 것 같다고 지난번 인편으로 전해왔습니다. 그렇다면 밀정놈을 신라로 보내서 네 애비가 올 필요가 없다고 전해라. 예, 폐하. 그리고 또 있다. 용상에 등을 붙인 이세민이 지그시 김인문을 보았다. 눈빛이 깊고 차갑다. 당(唐)을 개국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세민이다. 태원유수였던 아버지 이연을 부추겨 수(隨)를 멸망시키고 당을 세운 것이 이세민이었던 것이다. 그 이세민의 시선을 받은 김인문은 마치 독사 앞의 생쥐나 같다. 이세민이 입을 열었다. 신라에서 네 아비만 밀정을 보내고 내 주위를 맴도는 것이 아니다. 김인문을 노려본 채 이세민이 말을 이었다. 상대등 비담도 마찬가지, 그놈도 여왕 이후의 왕위를 노리고 나를 아버지라고 부른다. 난 늙은 자식을 두었다. 이세민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네 아비한테 내 말을 전해라. 비담이 다음 달 그믐밤에 여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를 예정이다. 이미 나한테 보고를 했으니 그날은 틀림없을 것이다. 김인문이 숨을 들이켰다. 큰일났다.
네 이놈들! 성 아래쪽에서 천둥을 치는 것 같은 고함소리가 울렸다. 퇴로가 끊겼으니 이제 너희들은 몰살당한다! 성 안의 쥐새끼 한 마리도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목소리가 커서 성벽 아래쪽에서도 다 들렸다. 당의 장수다. 목청 큰 장수여서 성안의 고구려, 백제군은 목소리에 익숙해졌다. 매일 같은 시간에 소리를 지르기 때문이다. 저놈과의 거리는 180보요. 화청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장수를 내려다 보면서 말했다. 여우 같은 놈이 한발자국도 더 가깝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백제군이 소유한 각궁의 사정거리는 150보. 뿔을 덧대고 길이를 한뼘쯤 넓힌 계백의 각궁은 170보가 유효사거리다. 그 이상이 되면 활 힘이 떨어져 맞아도 깊게 박히지 않는다. 당의 장수는 그것을 알고 사정거리 밖에서 소리치는 것이다. 화청이 손으로 장수 뒤쪽을 가리켰다. 뒤쪽은 갑옷을 번쩍이는 친위군단이 늘어서 있다. 철갑을 입었기 때문에 철벽 같다. 저 뒤에 이세민이 있지요. 보이시오? 보이는군. 계백이 머리를 끄덕였다. 소리치는 당 장수 뒤쪽 30보쯤 거리에 당황제 이세민이 서있는 것이다. 말에 올라 이쪽을 응시하고 있지만 주위에 벽처럼 늘어선 친위군에 가려 상반신만 겨우 드러났다. 오전 사시(10시) 무렵, 이 시간의 안시성 서문 풍경이다. 이세민과의 거리는 210보. 계백의 눈대중은 1, 2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이놈들! 항복하면 목숨을 살려주는 것은 물론 후한 상급을 준다. 장수가 외치고 한걸음 비켜섰을 때 고구려 병사 차림의 사내가 나타났다. 이보게! 내가 동문을 지키던 유강이네! 오늘 밤에라도 성벽을 내려오면 금 10냥을 받네! 사내가 악을 쓰듯이 소리쳤다. 그때 계백이 화청에게 말했다. 저쪽 좌측 성벽에서는 거리가 160보 정도나 될까? 계백이 눈으로 가리킨 곳은 서문 좌측의 성벽이다. 그쪽은 급한 경사지 위에 성벽이 세워졌는데 앞쪽으로 돌출되었지만 당군이 덤벼오지 않는 곳이다. 따라서 성벽 위에는 10여명의 백제군이 지켜 서있을 뿐이다. 그때 성벽에서 시선을 뗀 화청이 계백을 보았다. 과연 그렇습니다. 화청의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160보가 조금 넘을 것 같소. 이세민과의 거리다. 계백이 말을 이었다. 내일 이 시간에도 이세민이 나오겠지. 지난번 그물로 운제에 탄 당군이 몰살당한 후부터 이세민이 이 시간에는 꼭 서문에서 남문으로 내려갑니다. 이세민이 독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곧 고함이 그치고 나면 당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된다. 그때 이세민이 다음 독전지로 떠나는 것이다. 성안의 고구려, 백제군도 이제는 이세민의 동정을 다 외우고 있다. 나타나지 않는 날은 병이나 걸렸나 하고 궁금해질 정도다. 곧 외침이 그치더니 운제 2대가 굴러오기 시작했다. 포차에서 머리통만한 바위가 날아왔고 철갑을 씌운 충차가 굴러왔다. 앞으로 한시진 정도는 격렬하게 공격을 퍼붓다가 상황이 변하지 않으면 물러갈 것이다. 날아온 바위가 앞쪽 성벽을 부수며 떨어졌다. 머리만 틀어 바위 조각을 피하면서 계백이 화청에게 말했다. 당군이 부서지기 쉬운 바위를 던지는군. 성안의 군사들이 다시 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계백이 사처로 돌아왔을 때는 술시(오후 8시) 무렵이다. 마룻방으로 들어선 계백을 서진이 맞았는데 웃음 띤 얼굴이다. “나리, 성안에 소문이 다 났습니다.” 계백의 뒤에 선 서진이 갑옷을 벗기면서 말했다. “당군이 곧 철군을 한다고 합니다.” “허, 우리보다 성안 주민들이 더 빨리 아는구나.” 계백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이제 서진과는 밤에 잠자리를 같이 하는 터라 서로 부담 없는 사이가 되었다. 남녀의 정분은 자연스럽게 몸이 부딪치면서 쌓이는 것이다. 말이 없어도 서먹하지가 않다. 옷을 갈아입은 계백이 저녁상 앞에 앉았을 때 서진이 술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나리, 당군이 철군하면 귀국하시겠지요?” “물론이지.” 술잔을 든 계백이 서진을 보았다. “당연한 일을 왜 묻느냐?” “아닙니다.” 서진이 몸을 비틀며 웃었다. 옷자락이 스치면서 향내가 맡아졌다. 색향(色香)이다. 한 모금에 술을 삼킨 계백이 지그시 서진을 보았다. 그렇다. 육정(肉情)이 들었다. 남녀가 잠자리를 같이 하면 서로의 몸에 정을 느끼는 법이다. 이것은 떼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오래 지속된다. “왜? 백제로 돌아가기 싫으냐?” “아닙니다.” 계백의 빈 잔에 술을 채운 서진이 눈을 흘기는 시늉을 했다. “돌아가셔야지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어. 당군은 필사적이야.” 한 모금 술을 삼킨 계백이 말을 이었다. “당군은 총공격을 해올 거다. 그것도 여러 번. 그 공격을 견디어내야 돼.” 서진이 머리만 끄덕였기 때문에 계백이 손을 뻗어 허리를 감아 안았다. “아직 돌아갈 날을 세기는 이르다.” “나리, 저는 지금이 좋아요.” 계백의 가슴에 머리를 묻은 서진이 낮게 말했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허어.” 쓴웃음을 지은 계백이 서진의 몸을 당겨 안았다. “너는 요물이다.” “나리 앞에서는 아이가 됩니다.” “백제에 돌아가기 싫다는 말이구나.” “백제로 돌아가면 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순간 계백이 서진을 보았지만 시선을 내려서 속눈썹만 보였다. 숨을 들이켠 계백이 술상을 물렸다. 서진의 마음을 읽은 것이다. 술상을 치우고 계백이 침상에 올랐을 때 방의 불을 끈 서진이 옆에 누웠다. “나리, 언니하고 나리를 나눠 모실 수는 없습니다.” 계백의 품에 안긴 서진이 낮게 말했다. “언니는 함께 모시자고 했지만 저는 그렇게 못 합니다.” “……” “다시 태왕비 마마를 모시겠습니다.” 계백이 잠자코 서진의 옷을 벗겼다. 서진도 계백의 바지 끈을 푼다. 방안에 갑자기 더운 열기가 덮어졌다. 오늘 밤 계백은 거칠었고 서진도 적극적이다. 밖에서 가끔 기마군의 말굽소리, 군사들의 묻고 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전장 한복판인 것이다. 그러나 방안은 두 남녀의 몸부림이 이어지고 있다. 이윽고 열풍이 그쳤을 때 서진이 가쁜 숨을 뱉으며 말했다. “나리, 오늘도 군사들이 죽겠지요?” 계백은 서진의 알몸을 잠자코 끌어당겨 안았다. 그렇다. 수백 명이 죽을 것이다.”
신라는? 당군의 군량을 지원하려고 3천 냥의 마차에 군량 6만 석을 싣고 바닷가로 나가다가 백제군의 기습을 받아 군량을 다 빼앗겼다. 고구려군의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영토를 횡단, 바닷가로 나갔던 것이다. 신라의 도성인 금성의 대왕전 안, 선덕여왕이 근심에 덮인 얼굴로 신하들을 보았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황제께서 질타하실 텐데 무슨 방법이 없겠는가?” “전하.” 상대등 비담이 나섰다. 여왕 앞에 선 비담의 시선이 옆쪽의 김춘추, 김유신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군량을 실은 마차를 빼앗긴 장수는 김유신의 부장(副將) 양천이다. 양천은 분전 끝에 전사하고 기마군 3천중 2천이 전사했다. 군량을 실은 마차는 모두 백제군에게 탈취되어 불에 태워졌다. “당에 보낼 군량이 탈취되었으니 황제의 추궁이 있을 것은 당연합니다.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되옵니다.” “사신을 보내란 말이오?” “예, 전하.” “누가 갈 것인가?” “이찬 김춘추공이 가야만 합니다.” 비담의 말투가 강경해졌다. “기마군 지원을 바랐던 당황제께 군량이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득시켰지 않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이찬이 가서 해명을 해야 될 것입니다.” 여왕의 시선이 김춘추에게 옮겨졌다. “이찬, 또 가겠소?” “전하, 가겠습니다.” 김춘추가 허리를 굽혔다가 폈다. “가서 우리가 최선을 다 했다는 것을 황제께 말씀을 올려야 합니다. 그래야 죽은 장병들에게도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렇소.” 머리를 끄덕인 여왕이 다시 물었다. “언제 떠나시겠소?” “이틀 후에 떠나겠습니다.” 그때 여왕이 소리죽여 한숨을 쉬더니 머리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대왕전을 나온 김춘추가 복도로 들어섰을 때 김유신이 다가와 옆에 붙어 걷는다. “대감, 또 가시겠소?” 김유신이 묻자 김춘추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번에도 당군은 패퇴할 것이오.” “전갈이 왔습니까?” “인문이가 지금 황제와 함께 안시성에 있소. 그곳에서 밀사를 보냈소.” “어허.” “곧 겨울이 올 텐데 안시성은 함락될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요. 한 달 안에 당군은 퇴각할 것 같다고 합니다.” “저런.” 어느덧 둘은 마당으로 나와 걷는다. 김춘추가 말을 이었다. “당군이 퇴각하기 전에 사죄사가 가야지 황제가 장안성에 입성하고 나서 논공행상을 할 때 들어가면 큰 화가 미칠 것이오.” “그렇지요.” 김유신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길게 숨을 뱉었다. “그것을 비담은 아는지 모르겠소. 오직 대감을 위험한 곳으로 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구려.” “대장군께 전하와 사직을 맡기겠소.” “염려하지 마시오. 내가 목숨을 걸고 전하를 지키겠소.” “이번에 황제께 또 여왕 교체를 들먹일지 모르겠소.” 걸음을 늦춘 김춘추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비담이 전하를 해치고 왕위에 오를 가능성도 있소. 대장군께서 지켜주시오.” 신라의 운명도 첩첩산중처럼 험하다.
그 시간에 연개소문은 안시성 동쪽 1백여리 지점에 있는 오골성(烏骨城)에서 장수들과 주연을 벌이는 중이다.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장수들 앞에는 술상이 놓였고 연개소문의 얼굴에는 취기가 배 있다. 이세민은 안시성에 발이 묶여진 셈이야. 시간이 지날수록 떠나기가 더 힘들어진다. 술잔을 든 연개소문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권위에 집착하게 되면 제 위신과 타인의 평가에 신경을 쓰는 법이지. 이세민은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않고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대막리지 전하. 막리지 요영춘이 연개소문을 보았다. 신라가 백제군에게 군량을 빼앗긴 후에 이세민의 질책이 두려워서 사신을 다시 파견한다고 합니다. 그래야겠지. 이번 전쟁에 신라의 충동질이 일조했으니까. 연개소문이 장수들을 둘러 보았다. 사신으로 또 김춘추가 갈 것인가? 김춘추밖에 인물이 없습니다. 막리지이며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로가 대답했다. 더구나 김춘추의 아들 김인문이가 이세민의 시동으로 전쟁에 나와 있습니다. 이세민의 기색을 제 아비한테 알려줄 테니까요. 과연. 연개소문이 머리를 끄덕였다. 어느덧 얼굴에서 웃음기가 지워졌다. 신라에서 다음 왕위(王位)는 김춘추가 차지하겠다. 모두 입을 다물었고 연개소문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지 않으냐? 고구려, 백제, 신라, 당, 대륙의 4국 중에서 김춘추만큼 제 왕국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고 뛰는 인물이 어디 있느냐? . 김춘추는 왜국에도 들어가 청병을 했다가 수모를 당하고 쫓겨났다. . 그 후로 나한테도 단신으로 찾아와 백제를 견제해달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다가 잡혀 죽을 것 같으니까 도망쳤다. . 그 후에는 백제 수군(水軍)에 잡혀 의자왕 앞에까지 끌려갔다가 놓여나지 않았느냐? 4국(國)에서 이런 위인이 있는가 찾아봐라. 술잔을 내려놓은 연개소문이 길게 숨을 뱉었다. 온갖 수모를 견디면서 대륙의 왕국을 종횡무진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자는 영웅이다. 그러더니 연개소문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웃었다. 다음에 이자를 보면 불문곡직하고 죽여라. 말 한마디 들을 필요가 없다. 무조건 죽여라. 알았느냐? 예엣. 둘러앉은 고관 장수들이 일제히 대답했을 때 연개소문이 다시 술잔을 들었다. 난세일수록 운이 강해야 영웅이 되는 법. 역사는 결국 승자의 편에서 쓰이게 마련이다. 모두 술잔을 들었지만 아무도 감히 말대답하지 않는다. 주연이 끝나고 청을 나왔을 때는 술시(8시) 무렵. 막리지 요영춘의 옆으로 태대형 고준이 다가왔다. 고준은 연개소문의 측근으로 이번 전쟁에서 주력군의 선봉장을 맡았다. 연개소문은 오골성에 12만 대군을 주둔시키고 있다. 요영춘이 멈춰 섰을 때 고준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우리 대막리지 전하와 의자왕, 이세민과 김춘추가 영웅이란 말씀일까요?
의자왕이 계백의 서신을 받았을 때는 안시성 공방이 3개월이 넘었을 때다. 계백의 서신을 품고 온 장덕 백용문은 안시성에서 빠져나와 남쪽 바닷가로 내려온 후에 백제 무역선을 타고 왔다. 대륙의 동쪽은 백제령 담로가 이어져 있어서 백제 무역선을 쉽게 만난다. 의자가 백용문이 올린 계백의 서신을 읽고 나서 얼굴을 펴고 웃었다. “백제군이 안시성의 주력군으로 기틀을 잡았구나. 장하다.” 그때 아래쪽에 서 있던 병관좌평 성충이 말했다. “대왕, 당왕 이세민이 겨울이 되기 전에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면 철군해야만 살 길이 열릴 것입니다.” “이세민이 수 양제보다 나을 게 없지.” 의자가 바로 말을 받았다. “군사력이나 장비 면에서 수 양제가 이세민보다 몇배는 나았다.” 그러나 수 양제 양광은 요동성에서 막혀 1백만 대군이 곤욕을 치르다가 회군했다. 당시 요동성을 우회하여 고구려 내륙으로 진입했다. 수의 30만 대군은 살수대첩에서 고구려 을지문덕에게 대패하여 살아 돌아간 군사는 2천여명 뿐이었다. 그것이 수(隋) 멸망의 원인이 된 것이다. 단 아래쪽에 있던 내신좌평 흥수가 한걸음 나섰다. “대왕, 안시성으로 돌아갈 장덕 백용문에게 고구려 대막리지께 가는 밀서를 줘 보내면 되겠습니다. 따로 사신을 보낼 필요가 없겠습니다.” “옳지.” 의자가 머리를 끄덕였다. “네가 잘 왔다.연개소문공에게 가는 밀서와 내 말까지 전하거라.” “예, 대왕.” “밀서는 곧 써주겠지만 전할 말은 이렇다. 잘 들어라.” 의자가 헛기침했다. 글로 적어 보내는 밀서와는 달리 전할 말은 사담(私談)에 가깝다. 개인적인 말이니 친숙한 사이에서의 전갈이다. “내가 신라 김유신이 끌고 올라가려던 수레 3천대를 포획했다고 전해라. 이건 밀서에 적을 만한 일도 아니다.” 긴장한 백용문에게 의자가 웃어 보였다. “양곡이 6만석 실려 있었으니 당군 30만이 넉 달간 먹을 양식이었다.” “예. 대왕.” “우리 백제군이 신라의 양곡 수송로를 차단하고 있을 테니 이세민을 꼭 잡아서 구경을 시켜주기 바란다고 전해라.” “예. 대왕.” 둘러선 백관들 사이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백제 조정 분위기는 밝고 자유스럽다. 왕좌에 앉은 대왕 앞에 문무백관이 늘어서 있지만 가끔 자색 관복과 비색(緋色) 관복의 신하들이 뒤섞일 때도 있다. 그러다가 제자리로 돌아간다. 자색띠와 관복을 입은 것은 1품 좌평(佐平)에서부터 6품 나솔까지이며 7품 장덕에서 11품 대덕까지는 비색 관복, 12품 문독에서 16품 극우까지는 청색 관복인 것이다. 그때 성충이 입을 열었다. “지난달에 신라 국경에서 가야족 6천호 3만여명이 백제령으로 넘어왔다고 은솔에게 전해주게.” “네. 좌평.” 성충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남방방령이 가야족 이주민이 넘쳐나는 바람에 아예 국경에 대군을 대기시켜놓고 있다네.” 그말을 들은 안시성의 백제군 사기는 충천할 것이다. 먼 이국땅에서 고국 백제가 번성하고 있다는 것을 듣게 되면 적의 목을 몇개 벤 것보다 더 기운이 날테니까. 그것을 모두가 안다.
그물에 걸린 고기나 마찬가지다. 당군은 그물 속에서 꿈틀거렸고 성벽 아래쪽으로 물러선 백제군은 일제히 활을 쏘았다. 투석기로 던진 돌은 하나도 빗나가지 않고 그물에 덮인 당군에 맞았다. 함성이 진동하고 있다. 이제 성벽 위로 올라온 백제군이 그물속의 당군을 찔러 잡는다. 성 밖의 당군이 넘어진 운제를 기어올라 왔다가 기겁을 하고 물러가다가 굴러떨어졌다. 성벽 위의 그물 덩어리와 그물에 덮여 죽는 당군의 참상을 본 때문이다. 그리고 그물에 걸려 성벽 위로 올라설 수도 없다. “와앗!” 성벽 위의 백제군이 당군의 시체를 성 밖으로 던지면서 함성을 질렀다. 성벽에 걸쳐진 거대한 운제 2개는 불타오르고 있다. 해가 한 뼘쯤 솟아올랐을 때 당군은 물러가기 시작했다. 전에는 시체를 수습하고 갔지만 지금은 버려두었다. 그만큼 혼란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대승이오.” 지원군을 이끌고 달려온 양만춘이 계백의 옆에 서서 패퇴해가는 당군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성 밖의 들판에 깔린 당군의 시체는 5백여구나 된다. “운제에서 쏟아진 당군을 그물로 덮을 묘수를 썼다니, 우리도 그물을 만들어야겠소.” 양만춘이 옆에 늘어진 그물을 뜯었다. 질긴 삼줄과 쇠줄을 섞어 만든 그물이다. 칼로 끊기 어렵게 가는 쇠줄을 안에 심어 놓았다. 성벽 뒤쪽에 늘어뜨려 놓았다가 좌우에서 당기면 그물이 펼쳐지는 단순한 구조다. “이세민이 운제를 묶어 새로운 공성기구를 만들었지만 우리한테 당했구려.” “당군은 또 다른 공성기구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양만춘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져졌다. 당군은 땅을 파서 성 안으로 들어오려고 세 군데에서 땅굴을 팠다. 하루에 1백자(30m)씩 무서운 속도로 파 들어오다가 그것을 탐지한 고구려군에게 몰살을 당했다. 고구려군이 위에서 땅굴을 허물어버린 것이다. 땅굴 안에 있던 당군 수백명이 생매장을 당했다. 이제 당군은 투석기로 돌을 날리지 않는다. 성안의 고구려, 백제군은 이미 지하에 엄폐물을 만들어놓았을 뿐 아니라 날아온 돌을 모아 무기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성안에는 1년 반을 지탱할 양식이 저장된 데다 수십 군데의 마르지 않는 식수가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구려, 백제 연합군의 사기가 높아지고 있다. 계백이 사처로 돌아왔을 때는 오후 신시(4시)가 되어갈 무렵이다. 이제는 사처 집사가 된 덕조가 계백을 따라 마루방에 들어서면서 물었다. “주인, 당군이 동쪽도 막았다는 게 정말입니까?” 머리를 끄덕인 계백이 덕조를 보았다. “왜? 넌 도망갈 생각이었느냐?” 당군은 터놓았던 동쪽까지 막아버린 것이다. 이것은 안시성의 군민(軍民)을 몰사시키겠다는 결의다. 지금까지는 성을 비우고 후퇴하도록 해준 것이다. 그래서 경비가 허술한 동쪽을 통해 덕조와 서진이 성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아니올시다. 주인께선 서운한 말씀을 하시오.” 얼굴을 찌푸린 덕조가 말을 이었다. “주인, 낮에 시장에 나갔다가 상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왔습니다.” 그때 방으로 서진이 들어와 계백의 갑옷을 뒤에서 벗겼다. 자연스러운 행동이어서 덕조는 뒤로 물러섰다. 벽에 등을 붙인 덕조가 서두르듯 말을 잇는다. “그런데 성안에 당군 첩자들이 많이 들어와 있다고 합니다.”
계백이 함성 소리에 눈을 떴다. 먼 쪽에서 울리는 함성이다.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을 때 서진이 이불을 끌어 가슴을 가리면서 따라 일어났다. 갑자기 터진 함성에 문밖은 소란해졌다. 옷을 걸친 계백이 밖으로 나왔을 때 위사장 하도리가 마당에서 소리치듯 말했다. 당군의 공격이오! 이 시간에? 계백이 동녘 하늘 보았다. 아직 날도 밝지 않았다. 석달이 되는 동안 당군이 새벽부터 공격하는 것은 처음이다. 당군이 서문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하도리의 두 눈이 불빛을 받아 번들거리고 있다. 서문을? 계백이 갑옷 허리끈을 여미면서 마당으로 내려왔다. 서문은 백제군이 맡은 것이다. 당군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공방전을 치르면서 서로 부르고 답하며 욕설은 욕설로 상대하다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계백이 서문으로 달려갔을 때 하늘은 부옇게 밝기 시작했지만 공격은 절정에 올라 있었다. 당군(唐軍)은 이번 안시성 공격에 모든 기구를 다 동원했는데 현장에서 만든 것도 많았다. 구름사다리인 운제는 말할 것도 없고 포차로 돌을 쏘아 성벽과 성안 가옥을 부쉈고 당차, 충차, 누차 등을 동원하여 성벽과 성문을 깨뜨렸고 불화살을 쏘았다. 그때 마침 2대의 운제가 위쪽에 당군을 가득 싣고 다가왔는데 평상시와는 다르다. 계백이 그것을 보고는 소리쳤다. 준비해라! 오늘밤 서문을 맡은 장수는 나솔 윤진. 목청이 터질 것처럼 소리쳐 독전을 하고 있다. 그때 어둠을 뚫는 것처럼 운제(雲梯) 2대가 다가왔다. 그런데 이번 운제는 2대를 연결시켜 통로를 만들어 놓고 그 통로에 가득 당군을 태우고 있다. 운제 2대와 통로에 태운 당군은 수백명이다. 이 수백명이 성벽 위로 쏟아지면 당해내기 어렵다. 쏘아라! 장수들이 목이 터져라 하고 외쳤지만 운제는 괴물처럼 다가왔다. 이쪽에서 쏜 불화살에 운제 곳곳이 불에 타고 있었지만 워낙 튼튼하게 만들어서 부서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불덩이가 다가오는 터라 더 위협적이다. 운제의 밑쪽에는 거대한 나무바퀴가 10여개나 달려 있었는데 당군 수천명이 뒤쪽과 아래쪽에서 밀고 있다. 계백이 마침내 허리에 찬 장검을 빼 들었다. 윤진이 다시 소리쳤다. 기다려라! 아래쪽 당군이 내지르는 함성과 백제군이 맞받아 지르는 외침이 천지를 진동하고 있다. 오늘 당군은 결판을 내려는 것 같다. 운제 2대를 묶은 괴물의 크기는 길이가 250자(75m), 높이가 1백자(30m)였고 각 운제의 두께는 50자(15m)가 넘는다. 당군은 그동안 이 괴물 덩어리를 만든 것이다. 계백이 칼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기다려라! 놈들이 쏟아질 때까지! 이제 운제가 20자(6m) 거리로 다가왔다. 운제 위에 탄 당군의 눈도 보인다. 그때다. 운제가 앞쪽으로 기우는 것 같더니 엄청난 굉음을 내면서 성벽 위로 넘어졌다. 우와앗! 당군의 함성이 진동했고 그 순간 운제와 통로에 가득 타고 있던 당군이 성벽 위로 쏟아졌다. 수백명이다. 그때 계백과 윤진, 화청까지 소리쳤다. 그물을! 그 순간 좌우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십명의 백제군이 일제히 그물을 당겼다. 우왓! 보라. 성벽 위로 그물이 펼쳐지면서 쏟아진 당군을 물고기처럼 덮어버렸다. 거대한 그물이다.
밤, 남장을 벗고 여자 옷으로 갈아입은 서진은 아름답다. 삭막한 바위산에서 솟아난 꽃 같다. 안시성주 양만춘은 정부인에 소실까지 거느렸고 장수, 군관들까지 부인을 두고 있었지만 백제군 장졸들은 홀애비다. 그래서 여자 좋아하는 화청은 이미 과부 하나를 숙소에 데려다 놓고 임시 부인 노릇을 시켰고 장수들에다 12품 이하 관직의 무장들까지 요령껏 여자를 두었다. 고구려나 백제 모두 혼인한 남녀 간의 정절은 중하게 여겼지만 교제는 자유롭고 여자가 위축되어 살지는 않는다. 신라는 여왕이 다스리는 나라인 것이다. 계백도 양만춘이 여러 번 숙소로 여자를 보내 시중을 들게 했지만 다음날에는 내보냈다. 서진이 술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섰을 때가 자시(12시)쯤 되었다. 밤늦게 술이냐? 술상을 본 계백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술상 머리에 앉은 서진이 술병을 들면서 따라 웃었다. 한산성에 잡혀 있을 때부터 이 날을 기다리고 있었죠. 요망한 년, 이곳에서는 신라 첩자 노릇은 못 하겠구나. 술잔을 든 계백이 지긋이 서진을 보았다. 제가 도성의 나리 사택에 있을 때도 태왕비께 여러 번 다녀왔습니다. 서진이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잇는다. 그것을 아씨는 아시지요. 같은 신라 출신이라 그런가? 예, 저도 가야 출신인데다 고향이 아씨 마을에서 30리밖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계백이 술잔을 비우고는 긴 숨을 뱉었다. 술맛이 달다. 전장(戰場) 한복판에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서진의 목소리도 꿈속에서 울리는 것 같다. 그래서 한산성에 있을 때부터 아씨를 언니로 불렀습니다. 아씨가 저보다 한 살 위이시거든요. 잘 한다. 그래서 아씨도 첩자로 만들었느냐? 아씨께서 나는 아이 때문에 움직일 수 없으니 네가 나리를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계백의 잔에 술을 채운 서진이 옆으로 붙어 앉았다. 서진한테서 향내가 맡아졌다. 체취가 섞인 색향(色香)이다. 나리, 전 아직 남자의 몸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서진이 반짝이는 눈으로 계백을 보았다. 그러나 얼굴은 붉어져 있다. 하지만 몸은 뜨겁고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가 있어요. 허, 과연 요물이구나. 나리를 그리면서 여러 번 몸이 뜨거워졌습니다. 계백은 어느덧 자신의 몸도 뜨거워진 것을 깨달았다. 그때 서진이 계백의 바지 허리끈을 쥐면서 몸을 붙였다. 나리, 술상을 치울까요? 놔둬라. 술이 반병이나 남았다. 술에 취하시면 방사가 금방 끝난다고 합니다. 그만두시지요. 이런 색녀(色女) 같으니, 넌 긴 방사를 좋아하느냐? 오래 안기고 싶은 거죠. 마침내 참을 수가 없어진 계백이 술잔을 내려놓았을 때 서진이 허리띠를 풀었다. 나리, 불을 놔둘까요? 이미 새빨갛게 달아오른 서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물었다. 계백의 바지를 벗기던 서진의 손이 뜨거운 몸에 닿는 순간 놀라 움츠렸다. 첫 경험일 것이다. 그때 계백이 서진의 치마를 젖히고는 속바지를 찢듯이 벗겼다. 그리고는 서진을 번쩍 안아서 침상에 눕혔다. 서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눈을 감았다. 계백이 서진의 알몸이 된 하반신을 보았다.
당황제 이세민을 만나고 왔다고 벼슬이 오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당군(唐軍)의 공격이 수그러진 것도 아니다. 당군은 안시성의 고구려, 백제군 수뇌부를 투항시키려면 심하게 공격하여 위세를 보여야 한다고 결정한 것 같았다. 연일 맹공을 퍼부어서 성벽이 하루에도 몇 번씩 허물어졌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군은 즉각 보수하고 반격했다. 당군은 안시성 4면을 포위,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동쪽은 터놓아서 퇴로를 만들어 놓았다. 지원군이 오지 못하도록만 할 뿐이지 언제든지 동문을 통해 물러나도록 한 것이다.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사흘, 닷새, 열흘이 되더니 한 달이 금방 지났다. 두달이 지나 석달째가 되었을 때 공격하는 당군은 지친 기색이 드러났다. 반대로 수비하는 고구려 주민들의 사기는 그만큼 높아졌다. 더구나 겨울이 닥쳐오고 있다. 북방의 안시성은 겨울 추위가 매서운 곳이다. 안시성은 창고에 1년 이상 먹을 양곡이 쌓였고 성안에 마르지 않는 우물이 수십 군데가 있어서 내년 겨울까지도 버틸 수가 있다. 그러나 성밖에 포진한 30만 가까운 당군은 겨울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 “또 반복되는 것이냐?” 마침내 당황제 이세민이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목소리가 신음을 뱉는 것 같다. 둘러선 장수들은 머리를 숙였고 이세민의 목소리가 바위처럼 굴러떨어졌다. “이 성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회군해야 된단 말인가!” 그동안 수많은 전략이 나왔지만 모두 채택되지 못했다. 안시성을 놔두고 뒤를 쫓지 못하도록 5만 군사를 배치시킨 후에 곧장 고구려 심장부로 진군하자는 의견이다. 그러나 황제의 친정(親征)을 장수들을 내보내어 싸우는 것처럼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다는 말에 아무도 더 주장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당군은 초조해졌고 사기가 떨어졌으며 안시성의 사기는 높아졌다. 그래도 당군은 쉽게 철군하지 않았다. 황제의 친정인 것이다. 이세민의 탄식처럼 ‘또’ 패주했다가는 수(隋)양제의 전철을 밟을지도 모른다. 고구려가 바로 천하의 중심(中心)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계백에게 위사장인 하도리가 달려왔다. 저녁 무렵, 성안 사택을 숙소로 쓰고 있는 계백이 마악 저녁상을 물렸을 때다. “은솔, 백제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이? 백제에서?” 놀란 계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일행이 보였다. 앞장선 사내는 덕조다. 깜짝 놀란 계백이 눈만 크게 떴을 때 덕조가 소리쳤다. “주인! 다시 뵙습니다!” “웬일이냐!” “아씨가 보내셨소!” 다가온 덕조가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마루에서 내려간 계백이 덕조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다가 숨을 들이켰다. 덕조의 뒤에 서 있는 사내가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희고 깨끗한 얼굴, 두건을 썼지만 소년같다. “아니, 네가…….” 그때 소년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옆으로 다가온 덕조가 말했다. “아씨가 시중을 들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때서야 계백의 시선이 미소녀에게서 떨어졌다. 바로 서진이다. 태왕비의 시녀, 신라의 첩자 취급을 당하고 계백의 사저에 갇혀 지내던 서진이다. 사비도성으로 옮겨 왔을 때 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고화가 보내다니, 몸을 돌린 계백이 덕조와 서진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때 서진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리, 전장에서라도 모시고 싶습니다.” 백제를 떠난지 반년째다.
“어서오너라.” 이세민이 떠들썩한 목소리로 계백을 맞았다. 계백이 20보쯤 떨어진 거리로 다가왔을 때 소리친 것이다. 파격이다. 계백도 놀라 주춤거렸을 정도였으니 둘러선 당의 장수들은 숨까지 죽였다. 이세민이 다시 소리쳤다. “가까이 오라. 가까이.” 계백이 두 손을 모으고 다가갔다. 뒤를 우보성과 윤건, 하도리가 따른다. 진막 안이 조용해졌다. 계백과 사신들의 발자욱 소리만 난다. 10보 거리에서 계백이 발을 멈추고 이세민을 보았다. 이세민의 속눈썹까지 보인다. 당태종, 정관19년, 제위에 오른지 19년째다. 47세, 계백을 내려다보는 눈빛이 강하다. 진막 앞에 걸린 곽영탁의 머리통과 우성문의 결박된 모습은 계백에 대한 압력이다. 계백에게 참패한 무장들인 것이다. 그때 계백이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백제 은솔 계백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어떠냐?” 이세민이 대뜸 물었다. “대당(大唐)의 분위기가 어떻다고 돌아가서 말할 테냐?” “폐하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보지 못 했다고 말할 것 같습니다.” “앗하하.” 소리내어 웃은 이세민이 지그시 계백을 보았다. “너희들 왕, 의자와 비교하면 어떠냐?” “감히 어찌 비교를 하겠습니까? 말씀을 거두워 주옵소서.” “그래야지.” 선선히 머리를 끄덕인 이세민이 정색하고 말했다. “네가 오기 전에 말이 많았지만 살려서 보내주마. 다만 이 말 한마디는 명심하고 돌아가거라.” “예. 폐하” “내가 대륙을 평정하지 못 하고 저승에 갈 지도 모른다.” 이세민의 목소리가 진막을 울렸다. “인생(人生) 50년, 피었다가 순식간에 지는 꽃처럼 세월이 흐르지만 사는 동안 만이라도 보람을 느껴야 하느니라.” 계백도 숨을 죽였고 이세민의 말이 이어졌다.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도 다 부질없다. 귀신이 되어서 뭘 듣고 자랑으로 여기겠느냐.” “……” “순간의 영화를 위하여 나는 비열하게 살지 않는다. 이것이 군주의 마음가짐이다.” 이세민은 결국 자신의 입장을 피력한 것이다. 계백이 허리를 굽혔다. “폐하. 명심하겠습니다.” “돌아가서 내 말만 전해라.” “예. 폐하.” “고구려왕, 백제왕의 자질이 나보다 나을지도 모르지만 하늘은 준비한 자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계백이 다시 허리를 숙였을 때 이세민이 문득 물었다. “너는 다음 신라왕이 누가 적합하다고 생각하느냐?” 난데없는 질문이어서 계백은 쳐다만 보았고 뒤에 선 우보성과 윤진 등은 몸을 굳혔다. 이세민의 얼굴에 웃음이 떴다. “백제왕도 신라왕을 겸할 수가 있겠지. 하지만 신라인으로 누가 여왕의 뒤를 잇는 것이 나을 것 같으냐?” “김춘추가 낫겠지요.” 계백이 똑바로 이세민을 보았다. “김춘추는 왕이 되면 백제와 통합을 한다고 각서를 썼습니다.” “앗핫핫.” 다시 소리내어 웃은 이세민이 말했다. “그런가? 김춘추가 뛰어난 놈이다.”
뭐라고? 사신이? 이세민이 앞에 선 대장군 우성문을 보았다. 오전 사시(10시)무렵, 우성문은 어깨를 부풀리며 거친 숨을 뱉는다. 예, 그런데 사신이 백제군 수장인 계백이란 놈입니다. 오오. 이세민의 눈이 좁혀졌다. 황제의 진막안이다. 백여명이 넘는 장군들이 긴장한 채 이세민과 우성문을 번갈아 보고 있다. 그때 우성문이 말을 이었다. 폐하, 그놈이 아군의 허실을 염탐하려고 온 것입니다. 바로 참수해서 머리를 창끝에 꽂고 위세를 보여야만. 가만. 이세민이 우성문의 말을 막았다. 말이 많구나. 황공하옵니다. 폐하. 넌 몸보다 말이 빠른 놈이다. 황공 무지로소이다. 이세민이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우성문의 감군으로 나갔던 곽영탁이 어디 있느냐? 네, 폐하. 말석에 서있던 곽영탁이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진막 안은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세민의 대장군이며 태수, 도독 등 여러 직임을 보유하고 있는 우성문을 개 부르듯이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곽영탁 따위는 말할 것도 없다. 이세민의 눈이 다시 좁혀졌다. 너는 감군으로 우성문의 패퇴를 속인 놈이다. 네 죄를 알렸다? 기가 질린 곽영탁이 숨도 쉬지 못하고 땅바닥에 이마를 붙인채 엎드려 버렸다. 이세민의 시선이 우성문에게 옮겨졌다. 호가호위(狐假虎威)는 너를 두고 한 말이겠다. 그렇지 않으냐? 이제는 우성문이 땅바닥에 엎드렸고 이세민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쥐새끼가 여우의 위세를 빌어서 나대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이세민의 시선이 요동총독 서위에게로 옮겨졌다. 총독이 말해보라. 예, 서가호위(鼠假虎威)가 되겠습니다. 이놈, 우성문. 이세민이 엎드린 우성문을 꾸짖었다. 백제군 계백에게 대패를 하고 감군과 함께 그 사실을 숨기고는 계백이 사신으로 오니까 탄로가 날까봐서 겁이 났느냐? 우성문은 엎드려 떨기만 했다. 이세민과 긴 인연이 있었으니 성격을 더 잘 아는 것이다. 냉혹하고 잔인해서 형제도 눈 깜박 하지 않고 살육하는 이세민이다. 부친인 태조 이연도 이세민이 겁이 나서 현무문의 변이 일어난지 두달만에 황제 위를 이세민에게 넘겨주고 물러났다. 그때 이세민이 엎드린 둘을 향해 말을 이었다. 이놈들, 내가 모르고 있었던 줄 아느냐? 이세민이 아래쪽에 선 위사장에게 지시했다. 감군 곽영탁의 머리를 떼어서 창끝에 꽂아 계백이 들어오는 입구에 세워 놓아라. 네, 폐하. 우성문은 사지를 결박해서 그 머리통 옆에 꿇려놓아라. 네, 폐하. 계백을 극진히 영접하여 나한테 데리고 오라. 이세민이 지시하자 장수들이 서둘렀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는데 질서가 엄정한 한편으로 빈틈이 없다. 이윽고 안시성에서 보낸 사신 계백 일행이 황제의 진막 앞에 도착했다. 그때 진막 앞에는 창끝에 꿰인 곽영탁의 머리가 먼 하늘을 바라보며 세워져 있었고 그 밑에는 우성문의 사지가 결박한 채 꿇려져 있다.
“성안 군기가 엄정하면서도 장졸의 사기가 높았습니다.” 유춘관이 말을 잇는다. “오가는 주민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띠었고 전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유춘관은 이세민에게 안시성 분위기를 전하는 중이다. 안시성에 들어갔다가 나온 유춘관의 말을 들으려고 진막에 모인 장수들은 귀를 세우고 있다. 이세민이 쓴웃음을 짓고 물었다. “내 제의를 비웃더냐?” “아니올시다. 폐하.” 정색한 유춘관이 이세민을 보았다. “요동왕에 임명한다고 했더니 놀란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하지만 주위에 장수들이 많아서 속에 있는 말을 내놓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백제 장수는 어떻더냐?” “담로왕으로 봉한다고 했더니 담로 10군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놈이 욕심이 과한 놈이군.” 이세민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일부터 맹공을 하면 놈들이 다급해져서 내 제의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예, 폐하.” “시간이 지나 기력이 떨어지면 요구조건이 더 내려가게 된다. 흥.” 이세민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요동왕? 담로왕? 어림없다.” 그 시각에 양만춘과 계백, 그리고 양국의 지휘부가 둘러앉아 다녀간 당 사신 이야기를 한다. “성안 동정을 살피러 온 것이야.” 양만춘이 말하자 장수들이 머리를 끄덕였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성안에 오면 분위기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장수 하나가 대답했다. “성안 분위기를 보고 오히려 사기가 꺾였을 것입니다.” “며칠 공격을 하고 나서 또 사신을 보낼 것입니다.” 다른 장수가 말했다. “지난 전쟁 때 수(隋)와 요동성 싸움에서 수 양제는 사신을 여덟 번이나 보냈습니다. 그때 성안 동향을 잘못 전했다고 사신으로 갔던 장수를 양제가 베어 죽인 일도 있었습니다.” “당황제의 후의에 감격했다고 했는지도 모르겠군.” 양만춘의 말에 장수들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때 계백이 말했다. “이때 우리도 사신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순간 좌중이 조용해졌고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양만춘이 계백을 보았다. “우리가 말씀이오?” “예, 우리는 성안 장졸과 주민을 설득시키겠다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당군(唐軍)이 20리쯤 물러나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옳지.” 양만춘이 손바닥으로 무릎을 쳤다. “그러면 우리는 시간도 벌고 당군이 진용을 옮기는 실리까지 얻을 수가 있겠습니다.” “두번째는 속지 않겠지만 지금은 설마 하고 사신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묘안이오.” 고구려 장수들도 대부분 머리를 끄덕이거나 웃었다. 그때 고구려군 부장(副將) 한성위가 계백에게 물었다. “그런데 누가 사신으로 갑니까?” “내가 가지요.” 계백이 바로 대답했다. “내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고구려군 장수 우보성이 나섰다. 기마군 대장으로 5품 조의두대형 장군이다. 양만춘이 정색하고 계백을 보았다. “백제군 수장(首將)이 가셔도 되겠소?”
사신이 왔어? 되물은 양만춘이 옆에 앉은 계백을 보았다. 당황제 이세민이 보낸 사신이 성 밖에 있다는 것이다. 서문(西門)의 수문장이 이마의 땀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말했다. 예, 성주께 황제의 전갈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이부상서라고 했습니다. 들여보내라. 양만춘이 웃으면서 지시했다. 이세민이 어떤 조건을 내놓는지 그것으로 그자의 용인술을 보겠다. 잠시 후에 안시성의 청에는 당의 사신으로 온 이부상서 유춘관이 중랑장 둘을 대동하고 들어섰다. 금박을 입힌 붉은 색 비단 예복을 입고 머리에 관모를 썼는데 풍채가 좋았다. 뒤를 따르는 중랑장 둘도 장군이어서 늠름하고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한걸음씩 갈지자로 걸어들어온 유춘관이 양만춘과 계백의 열 걸음쯤 앞에서 멈춰섰다. 청안은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1백평 쯤 되는 청에는 아름드리 기둥 좌우에 고구려, 백제 장수들이 갈라서 있었는데 가운데 선 왕의 사신 옆모습을 보는 자세다. 잠깐 정적이 덮여졌다. 이부상서 유춘관은 언변이 좋고 지모가 뛰어난 인물이다.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을 일으켰을 때 계략을 짠 인물이기도 하다. 그때 유춘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당(大唐)의 사신 이부상서 유춘관이 안시성주를 뵙소. 양만춘과 계백은 앞쪽의 의자에 앉아있다. 사신 유춘관과 장수 둘은 서 있는 상황이다. 마치 상국(上國)에 문안인사차 온 조공국의 사신같은 꼴이다. 양만춘이 대답했다. 말하라. 양만춘은 고구려 서부(西部)의 성주다. 당의 이부상서는 6조의 우두머리 상서이니 최고위층 관리인 것이다. 순간 유춘관이 호흡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황제께서 안시성주 양만춘이 투항을 하면 고구려 서부를 식읍으로 하사하시고 대장군 겸 요동왕으로 봉하신다고 했소. 나를 요동왕으로? 되물은 양만춘이 눈을 크게 떴다. 상서, 그 말이 사실인가? 황제의 임명장을 드리겠소. 임명장까지 써주고 실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천하 백성의 황제가 될 수 있겠소? 고구려를 정벌하지 않더라도 임명하신다고 말씀하셨소. 여기 백제군 장수도 와 계시는데 어떻게 한단 말인가? 백제군 장수 계백은 백제 담로왕으로 임명하신다고 했소. 그 휘하 장수들도 합당한 직위를 하사하실 것이오. 굉장한 포상이다. 양만춘이 감동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내가 요동왕이 되다니, 조상의 은덕이 이제야 나한테 쏟아졌구나. 유춘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양만춘의 말이 진심인지 헷갈린 것이다. 그때 계백이 유춘관에게 물었다. 상서, 백제의 담로는 아직 정벌하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나를 담로왕으로 봉할 수가 있단 말이오? 물론 그렇지만 고구려가 멸망하면 백제 담로도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담로가 22개니 그중 몇 개 군을 주시겠소? 난 10개는 받고 싶은데. 그것은. 그때 양만춘이 나섰다. 내 수하 장수들에게도 왕을 시켜주면 안시성을 드리지. 적어도 왕 5명은 더 있어야겠는데. 그때 참다못한 고구려 장수 하나가 웃음을 터뜨렸고 청 안은 웃음으로 덮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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