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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지 않아? 척후의 보고를 받은 후쿠토미가 눈을 가늘게 떴다. 후쿠토미는 42세, 장년이다. 그러나 6척 장신에 뼈대가 굵고 힘이 장사여서 창을 던지면 20보 거리의 표적을 맞춘다. 척후가 대답했다. 예, 사방에 정탐병을 보내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대장군. 그놈들이 우리 허실을 알아내려는 게다. 쓴웃음을 지은 후쿠토미가 옆에 선 부장(副將) 오치를 보았다. 오치는 후쿠토미의 동생이다. 오치, 여기서 기다리다가 놈들에게 기선을 빼앗기겠다. 네가 오늘 밤 기습을 하고 나서 흩어지자. 그러는 게 낫겠습니다. 신중한 편인 오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시(12시) 무렵에 놈들의 좌측을 치고 곧장 벌판을 빠져 나가지요. 그때부터 우리는 소부대로 흩어진다. 후쿠토미가 둘러선 부하들을 하나씩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계백은 대륙에서만 싸웠기 때문에 왜국의 험한 지형도 모르고 이곳에 맞는 기마군 전술도 익숙하지 않아. 모두 숨을 죽였고 후쿠토미의 목소리가 진막을 울렸다. 우리가 무신(武神)이라는 계백을 잡아 죽이거나 지쳐서 도망치게 한다면 우리는 중부(中部) 제 1의 세력이 된다. 근처의 성들이 모두 우리에게 복속할 것이 아니겠느냐? 과연 그렇습니다. 부하 하나가 맞장구를 쳤고 진막 안에 떠들썩한 소란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후쿠토미는 2,3백명 단위의 전투는 수십번 겪었지만 이런 대규모 전쟁은 처음이다. 그러나 전에 겪은 수십번의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후쿠토미다. 지형 이용에 뛰어났고 직접 앞장을 서는 용장이어서 후쿠토미를 따르는 부하들이 많은 것이다. 후쿠토미가 결연한 표정으로 지시했다. 오치, 준비해라. 자시에 기습이다. 해시(오후 10시)가 되었을 때 오치는 기마군 점검을 마치고 출진보고를 하려고 후쿠토미의 진막으로 다시 들어섰다. 후쿠토미의 본진은 무쓰 골짜기의 중심에 위치했는데 3면이 골짜기로 막혔고 앞면만 트였다. 형님, 가겠습니다. 갑옷 차림의 오치가 당당한 모습으로 보고했다. 그럼 나중에 뵙지요. 오, 한바탕 혼내주고 빠져나가라. 이미 후쿠토미도 준비를 마친 상태다. 오치가 진격하면 후쿠토미가 이끄는 본대 5백은 뒤를 따르다가 옆으로 빠져나갈 것이었다. 나머지 1천여 명의 보군도 1백명 단위로 나뉘어져 사방으로 흩어진다. 적은 오치의 기마군 3백을 맞아 당황하다가 곧 앞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었다. 그때다. 와앗! 함성이 울렸기 때문에 둘은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다음 순간 함성이 더 커졌다. 밤에 골짜기를 울리는 함성은 메아리까지 겹쳐 더 크고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때 진막 안으로 장수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장군! 적이오! 적이라니? 짜증이 난 후쿠토미가 버럭 소리쳤을 때 갑자기 함성과 함께 밖이 밝아졌다. 대답도 듣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간 후쿠토미는 사방이 불길로 둘러 싸여 있는 것을 보았다. 화공(火攻)이다. 이, 이런. 함성이 더 커졌고 주위 군사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후쿠토미는 상황을 파악했다. 백제군이 3면에 불을 지른 것이다. 좌, 우, 위쪽에서 불화살이 계속해서 날아왔고 함성은 더 커졌다. 형님, 아래쪽으로! 오치가 다급하게 소리친 순간이다. 아래쪽에서 부장 하나가 달려와 소리쳤다. 적이 계곡 앞을 막았소! 아뿔사. 후쿠토미가 신음했다. 무쓰계곡 앞이 막혔다는 말이다. 적이 3면을 화공으로 막은 후에 앞을 가로막았다. 이 가파른 골짜기가 불길에 둘러싸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후쿠토미다. 함성과 함께 이제는 비명소리가 울렸다.
아스카에서 300여 리, 계백의 영지 이쯔와 성에서 200리 떨어진 무쓰 계곡, 이곳이 호족 후쿠토미(福富)의 근거지다. 후쿠토미는 왜인(倭人)으로 백제계 영주 휘하에서 무사(武士)가 되었다가 따르는 부하들과 함께 미개척지인 동국(東國)을 넘어와 호족이 되었다. 대부분의 도적무리 수괴가 이런 식으로 호족이 되거나 동국의 영주 행세를 하는 것이다. 후쿠토미의 계산에 의하면 영지의 넓이는 사방 70여 리, 서쪽의 영지 기준으로 말하면 25만석, 주민 수는 4만여 명이다. 후쿠토미는 군사 2천여 명을 보유했고 그 중 기마군이 5백, 근처에서는 적수가 없는 무력(武力)이었다. 오후 미시(2시) 무렵, 무쓰 계곡의 10리(5km) 앞에서 원정군을 정지시킨 계백에게 슈토가 다가와 보고했다. 후쿠토미가 전군(全軍)을 모아 결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슈토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기마군 5백, 보군 1천5백 정도입니다. 슈토의 척후가 정찰을 하고 온 것이다. 그때 슈토의 부장이 잡아온 사내를 계백 앞으로 끌고 와 무릎을 꿇렸다. 농민 차림의 사내는 사색이 되어 있다. 이놈이 정찰하다가 도망치는 것을 잡았습니다. 계백이 고개만 끄덕이자 슈토가 사내에게 물었다. 후쿠토미는 지금 어디 있느냐? 예, 진중에 있습니다. 사내는 바로 대답했다. 건장한 체격으로 무사(武士) 같다. 슈토가 다시 물었다. 우리가 오는 줄 알고 있었느냐? 예, 이틀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대비를 하고 있었겠구나? 예, 후쿠토미는 무쓰 골짜기에서 싸운 다음 제각기 흩어져서 소규모 병력으로 백제군을 공격한다는 전략을 세워 놓았습니다. 계백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렇게 되면 원정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그때 슈토가 다시 물었다. 처음부터 소규모 병력으로 싸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냐? 백제 대군과 한번 정면으로 부딪쳐서 허실을 알아내겠다고 합니다. 계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절한 전술이다. 사내를 끌고 가라고 지시한 계백이 둘러선 장수들에게 물었다. 후쿠토미가 주민들을 어떻게 관리하는지를 알아보도록. 서둘 것 없다. 예, 주군. 계백의 의중을 알아차린 슈토가 몸을 돌렸을 때 사다케가 말했다. 주군, 후쿠토미가 선정을 하고 있다면 살려주실 겁니까? 그것도 조건이 있어. 계백이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욕심이 과한 놈이면 살려주지 못한다. 오후 유시(6시) 무렵, 이번에는 노인 두명이 끌려왔는데 후쿠토미 세력권 안에 사는 주민이다. 진막 안으로 노인을 데려온 계백이 둘을 편하게 앉도록 한 다음에 직접 물었다. 너희들은 본래부터 이곳에서 살았느냐? 아닙니다. 서쪽 아오야마 영지에서 마을 전체 주민이 이곳으로 이주했습니다. 노인 하나가 바로 대답했다. 아오야마 영지는 아스카 서남쪽의 15만석짜리 면적이다. 바닷가에 위치해서 어업이 주업이고 산지가 많아서 농작물 소출은 적다. 그때 다른 노인이 말을 이었다. 무신(武神)께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디 이곳을 백제령 직할로 포함시켜 주소서. 후쿠토미의 포탈이 심한가? 수시로 양곡을 빼앗고 젊은이는 군사로 뽑아가니 주민들이 산속에 숨어 살고 있는 형편입니다. 다른 노인이 말을 뱉는다. 법이 없고 도적의 무리나 같습니다. 주민의 절반 이상이 유민이 되어 이곳저곳으로 도망다니고 있습니다. 부디 무신께서 백성을 구제해 주옵소서. 그때 옆에 서있던 노무라가 사다케와 눈을 맞추더니 함께 머리를 끄덕였다. 명분이 충분하다.
백제와 가까운 규슈로부터 이곳까지는 대부분 평정이 되었으나 동쪽은 아직 미개척지가 널려있기는 합니다. 중신(重臣) 하세가와가 말했다. 이쓰와성의 청 안, 계백이 가신(家臣) 1백여 명을 모아 놓고 국사(國事)를 논하는 중이다. 계백은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기 때문에 기존 영지의 중신도 그대로 끌어들였고 그동안 발군의 기량을 보인 무장이나 책사가 중용되었다. 하세가와의 말이 이어졌다. 서쪽 영지에서 영주의 학정을 피해 이주한 주민들도 많기 때문에 그곳을 기반으로 세력을 넓히려는 토호들이 많습니다. 계백이 머리를 끄덕였다. 오늘 회의는 동정(東征)이다. 계백은 이제 40만석 가까운 영지의 영주다. 그러나 풍왕자는 계백에게 은밀히 동정을 지시했다. 물론 풍왕자는 조오메이 여왕과 합의를 한 것이다. 계백의 영지가 늘어날수록 백제방과 함께 왕실의 세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그때 옆쪽에 앉은 사다케가 입을 열었다. 사다케도 중신이다. 주군, 동쪽의 영지를 면적으로 계산하면 수천만 석이 됩니다. 그러나 주민수는 알 수가 없고 무리를 지어 다니는 도적 무리도 몇이나 되는지 모르는 실정입니다. 먼저 사전 조사를 치밀하게 한 후에 시행해야 됩니다. 옳다. 계백이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도 참조하겠다. 그러나 지금은 머뭇거릴 때가 아니다. 도적의 무리 때문에 학정을 피해 달아난 주민들이 다시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있다고 하지 않느냐? 가까운 곳부터 소탕해 나갈 것이다. 계백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계백의 영지는 안정되었고 주민들이 몰려오는 상황이다. 백제에서 계백을 수행해 온 화청, 윤건, 백용문 등은 이제 영지안의 소국(小國) 영주가 되어 내정(內政)에 열중하고 있다. 그들에게 내정을 맡기고 계백은 다시 동진(東進)하려는 것이다. 계백의 시선이 슈토에게 옮겨졌다. 타카모리의 장수였던 슈토는 이제 계백의 중신(重臣)이 되어있다. 타카모리한테서 1천석 녹봉을 받다가 지금은 1만석을 받는 소영주다. 슈토, 출정 준비는 언제 끝나느냐? 예, 사흘 후에는 기마군 3천이 떠날 수가 있습니다. 슈토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예비마 6천필까지 준비를 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계백이 위사장 겸 직할군 사령관인 하도리에게 물었다. 직할군 1천기는? 예, 직할군도 사흘 후면 준비를 끝내고 출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흘 후에 출진이다. 계백이 말하고는 하세가와를 보았다. 하세가와, 그동안 네가 중신들과 함께 국정을 이끌어라. 예, 주군. 사다케와 노무라는 나와 함께 간다. 일사불란하게 회의를 마친 계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백은 슈토와 하도리가 이끄는 기마군 4천기를 이끌고 동정(東征)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날 밤, 계백의 침실에서 품에 안겨있던 하루에가 말했다. 대감, 언제 돌아오십니까? 왜 묻느냐? 하루에의 알몸을 당겨 안은 계백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사흘 후에 동정을 떠나는 계백이다. 내궁의 소실들은 계백이 부르기를 고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계백은 색(色)을 밝히는 성품이 아닌데다 절제력이 강했다. 그것을 소실들도 알고 있어서 내색은 하지 못한다. 그때 하루에가 계백의 손을 잡더니 제 배에 붙였다. 따뜻하고 둥근 배에 계백의 손바닥이 덮여졌다. 순간 계백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너도? 하루에가 계백의 가슴에 얼굴을 붙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배 속에 아이가 들었다는 표시다.
고개를 든 계백이 옆쪽에 선 하도리를 보았다. 하도리는 외면한 채 못 들은 척 하고 있다. 계백이 우에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도 아스나 성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고노의 생존시절에 시녀를 때려 죽인 일도 있었다면서? 예, 주군. 우에노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하룻밤 고노의 사랑을 받았다는 이유로 아스나가 하인들을 시켜 때려 죽인 것이다. 물건을 훔쳤다는 누명을 씌웠지만 고노에게 둘러대려는 핑계다. 주위 사람들은 누명을 씌웠다는 것을 다 안다. 아스나는 겉으로는 청초하고 고고한 성품처럼 보였지만 내면(內面)은 잔인했고 오만했으며 투기와 고집이 세었다. 중신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도 아스나로는 안된다는 민의(民意)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 계백이 말을 이었다. 넌 그대로 영지를 지켜라. 나는 네가 필요하다. 우에노가 눈만 껌벅였을 때 계백의 시선이 하도리에게 옮겨졌다. 하도리. 예. 주군. 다 들었을 테니 네가 히지성(城)에 가서 처리를 해라. 예. 주군. 계백이 다시 우에노를 보았다. 우에노. 너는 하도리가 히지성에서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도록. 그때 우에노가 입을 열었다가 닫고는 고개를 숙였다. 하도리가 서둘러 몸을 돌렸을 때 계백이 말을 이었다. 아마 하도리는 너나 나하고는 달리 사감(私感)을 품지 않고 처리하고 돌아올 것이다. 나흘 후, 소가 가문(家門)의 수장(首長)인 전(前) 섭정 소가 이루카를 맞는다. 이곳은 에미시의 대저택, 이루카가 찾아온 것이다. 양쪽 중신들이 늘어앉았고 두 부자는 마주보며 앉았는데 이루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버님 들으셨습니까? 아, 귀가 먹지 않았으니까 지금 네 말도 듣는다. 요즘 이루카가 제멋대로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에미시가 내쏘듯 말했다. 그때 이루카가 헛기침을 했다. 계백의 위사장 하도리란 자가 옛 고노의 영지로 들어가서 살육을 했더군요. 나도 들었다. 소실로 삼았던 고노의 처와 자식을 무참히 베어 죽였습니다. 계백이 시킨 것이지요. 너는 아느냐? 무엇을 말씀이오? 아스카의 시선을 받은 에미시가 빙그레 웃었다. 죽은 고노는 소실이 한명도 없었다. 그랬던가요? 이번에 죽은 고노의 처가 가만두기 않았기 때문이지. 투기가 심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번에 그 여자가 이쓰와성으로 데려와 달라고 백방으로 손을 썼던 모양이다. 그래서 죽인 겁니까? 계백이 죽인 것이 아니야. 어깨를 편 에미시가 쓴웃음을 지었다. 위사장한테 처리를 맡긴 것이지. 부하한테 책임을 떠넘긴 것 아닙니까? 계백의 용인술이다. 정색하고 말한 에미시가 이루카를 보았다. 반면교사야. 너는 남의 약점이나 장점을 보고 배우도록 해라. 앞으로 보기 싫은 소실은 위사장을 시켜서 꼭 죽이도록 하겠습니다. 네 교만이 언젠가는 네 목을 조일 때가 있을 것이다. 그 꼴을 보려면 아버님은 장수하십시오. 그때 헛기침을 한 에미시의 중신(重臣) 하나가 말했다. 저녁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자리를 옮기시지요. 가끔 있는 일이어서 두 부자는 일어섰고 중신들도 뒤를 따른다.
거성(居城)인 이쓰와 성으로 돌아온 계백은 내정(內政)에 집중했다. 전(前) 영주들이 쌓아놓기만 한 군량을 풀어 굶주리는 주민에게 빌려주고 추수가 끝나면 갚으라고 했더니 창고가 금방 비워졌다. 시도때도 없이 부역으로 징발해온 악습을 철폐하고 한달에 한번, 그것도 부역에 나온 주민에게는 양곡으로 부역비를 지급하도록 했다. 그랬더니 언제 부역날이 있느냐고 기다리는 상황이 되었다. 그것을 계백령 전체에 시행한지 석달만에 주민이 2할이나 늘어났다. 무신(武神) 계백에 대한 칭송이 아스카 조정 근방뿐만 아니라 멀리 동쪽 끝까지 전해졌다. 다른 영주들이 계백령 흉내를 내었지만 바탕이 다르니 웃음거리만 될 뿐이다. 계백은 본국에서 성주(城主)를 지내 성 내 주민들의 의식주를 보살펴준 경험이 있는 영주다. 본국 백제는 왜국보다 문화나 제도가 수백년 앞선 문명국인 것이다. 내치에 힘쓴지 석달이 지난 늦가을의 어느날 저녁, 계백이 거성의 침실에서 다나에의 시중을 받으면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때 다나에가 말했다. 대감, 제가 지난달부터 끊겼습니다. 무슨 말이냐? 예, 임신을 한 것 같습니다. 몸을 돌린 계백이 다나에의 반짝이는 눈을 보았다. 얼굴은 어느덧 붉게 달아올랐다. 계백의 씨가 다나에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냐. 잘했다. 아들을 낳으면. 계백이 웃음 띤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무장(武將)으로 키워라. 예, 대감. 다나에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제 계백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이 순간부터 다나에의 지위는 부인으로 상승된다. 계백이 말을 이었다. 네가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네 자식도 인정을 받는다. 예, 대감, 명심하겠습니다. 왜국에 계백의 자손임을 부끄럽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예. 계백이 지그시 다나에를 보았다. 소실이 넷이나 된다. 계백가(家)의 자손은 더 늘어날 것이다. 이렇게 왜국이 백제화(百濟化)가 된다. 이제는 히지성주가 된 우에노가 이쓰와성으로 찾아왔을 때는 첫눈이 내렸을 때다. 청에서 우에노를 맞은 계백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네가 성주 노릇을 잘 한다고 들었다. 그래, 무슨 일이냐? 예, 말씀드릴 일이 있사온즉, 이것은 은밀히 말씀을 드려야만. 청에 두손을 짚은 우에노가 쩔쩔매면서 말을 잇는다. 주군, 주위를 물리쳐 주시면. 그러냐? 쓴웃음을 지은 계백이 머리를 들고 중신들에게 말했다. 위사장만 남고 다 물러가라. 그러자 하도리만 옆쪽 기둥 옆에 섰고 계백과 다섯걸음 앞에 꿇어앉은 우에노 둘만 남았다. 그때 계백이 웃음 띤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말해라. 예, 아스나님에 대한 말씀을. 도성에 온다는 이야기냐? 불쑥 계백이 묻자 우에노가 숨을 들이켰다가 똑바로 시선을 주었다. 얼굴이 굳어져 있다. 주군, 저한테 그런 부탁을 하셨습니다. 내실 하인 편에 편지를 보냈더구나. 너는 모르고 있었느냐? 예, 주군. 그것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도성으로 두 모자를 불러달라는 부탁을 전하려고 왔느냐? 아스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저는. 무엇이냐? 그러면 안된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우에노가 붉어진 눈으로 계백을 보았다. 아스나님은 투기가 심하시고 기가 세어서 분란을 일으키게 되실 것 같습니다. 제 친척이지만 계백령에는 어울리지 않으신 분입니다. 우에노가 이를 악물었다가 풀고 말을 이었다. 저, 우에노가 아스나님 모자를 모시고 은퇴를 하려고 왔습니다. 국경 근처의 절로 모시지요.
백제방에서 계백은 왕자 풍과 함께 하룻밤을 묵었다. 풍이 묵고 가라면서 주연을 열었기 때문이다. 백제방의 고위 관원, 계백을 따라온 화청과 장수들이 모두 참석한 주연이다. 달솔, 대왕께서는 아직도 신라와의 통합을 바라시는 것 같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술에 거나하게 취한 풍이 넌지시 말했기 때문에 계백은 긴장했다. 둘이 나란히 앉아 있어서 다른 사람은 듣지 못했다. 계백이 몸을 조금 기울였고 풍이 계백의 귀에 입술을 가깝게 대었다. 신라는 이미 김춘추가 왕이 된 것이나 같고 당의 1개 현이 되었다.계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하. 그러니 신라를 빨리 멸망시킬수록 이롭습니다. 그것이 가능하겠느냐? 신라는 이미 영토의 절반을 잃었습니다. 그때 풍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져졌다. 당왕 이세민이 놔두지 않을 것이다. 김춘추는 무서운 놈이다. 동방(東方)의 한신이지요.나도 그런 말을 들었다. 다시 웃은 풍이 길게 숨을 뱉었다. 김춘추는 이제 당(唐)에 업혀있는 몸이야. 당왕을 주무르는 영웅이지. 운(運)이 끝까지 따라줄까요?김춘추의 운이 강하면 백제와 고구려의 대륙진출은 일장춘몽이 되지. 풍이 길게 숨을 뱉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너는 왜국에서 기반을 더욱 굳혀야 한다. 풍은 이 말을 하려고 김춘추 이야기를 꺼낸 것 같다. 아스나가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우에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후 해시(10시) 무렵, 늦은 시간이다. 이곳은 고노성의 내성 마룻방 안. 늦은 시간이었지만 우에노는 고노성 성주대리를 맡고 있는데다 아스나의 친척이기도 하다. 마님, 부르셨습니까? 우네노가 묻자 아스나가 앞 쪽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우에노님, 주군께선 지금 어디 계시지요? 어제 백제방에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우에노가 바로 대답했다. 방주 전하를 뵙고 오실 것입니다. 어디로 오실지 알고 계세요? 그것은. 머리를 든 우에노가 아스나를 보았다. 어제 계백은 고노성을 떠난 것이다. 백제방에 간 것은 확실하지만 계백령의 도성으로 돌아갈지 또는 어디로 갈지 알 수가 없다. 이제 40만석 가깝게 되는 대영주인 것이다. 한번 움직일 때마다 기마 위사대 1천기가 따른다. 그때 아스나가 입을 열었다. 우에노님, 제가 도성에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히지하고 같이 말입니다. 히지님은 주군(主君)의 양자가 된 신분, 주군과 함께 있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스나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고 두 눈이 반짝였다. 우에노는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영주 고노가 생존시에도 아스나는 당찬 영주 부인으로 소문이 났다. 고노가 오히려 심약한 성격이어서 아스나를 여영주라고 가신들이 부르기도 했던 것이다. 그때 아스나가 말을 이었다. 나도 이젠 주군의 어엿한 소실, 이런 좁은 영지의 작은 성에 박혀 있으면 다른 소실들의 기세에 밀릴 가능성이 많아요. . 주군을 가깝게 모셔야 잊혀지지 않고 무시를 당하지 않게 되거든요. 그때 우에노가 고개를 들고 아스나를 보았다. 마님, 조금 기다려보시지요. 아스나의 시선을 받은 우에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서두르시다가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가 있습니다. 남녀 관계라는 것이.
계백은 달솔 품위로 임명되고 나서 왜국 백제방의 제 2인자가 되었다. 달솔은 백제 16개 관등 중 2품으로 좌평 다음이다. 동, 서, 남, 북, 중 5개 방의 방령(方領)을 맡거나 중앙관서인 내관(內官) 12부와 외관(外官) 10부의 장(長)이 달솔 관등이다. 또한 본국(本國) 외의 영토인 22개 담로의 태수도 대부분 달솔 관등인 것이다. 왜국의 백제방은 특별한 경우여서 왕자를 보내 왜왕과 함께 통치한다. 고노 영지의 분란을 수습하고 돌아온 계백이 먼저 백제방으로 찾아가 풍왕자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했다. 잘했다. 보고를 들은 풍이 칭찬부터 했다. 내가 여왕께 보고드리고 소가 섭정을 불러 영지를 네 앞으로 정리하겠다. 풍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소실이 하나 더 늘었구나. 양자도 한 명 얻었고. 예, 전하. 씨를 뿌려서 곡식을 얻는 법인데 그대는 남이 뿌린 곡식을 창고에 쌓기만 하려느냐? 전하. 계백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남이 거둔 곡식도 제 손에서 잘 자라면 제 곡식이 됩니다. 고노의 자식이니 왜인(倭人)이겠지만 씨가 좋으면 좋은 종자가 되겠지. 잘 기르지요. 왜국의 지도층이 모두 백제계이지만 왜인의 균형도 필요하다. 명심하겠습니다. 신라가 자주 당(唐)에 걸사표를 보내 당군(唐軍)을 끌어들이려고 한다, 풍이 화제를 바꾸었다. 백제방의 첩 안에는 중신(重臣) 10여명이 둘러 앉았지만 대화는 풍과 계백이 나누고 있다. 풍이 말을 이었다. 지난번 김춘추, 김유신이 비담의 난을 이용하여 여왕을 시해한 후부터 신라인의 민심(民心)이 김씨 왕가(王家)를 떠났기 때문이다. 김춘추에 대한 민심이 나쁜 것입니까? 바로 그렇다. 정색한 풍이 계백을 보았다. 김춘추 그 자는 당(唐)의 신하가 되겠다고 진즉부터 당왕(唐王)에게 약속을 했지 않느냐? 제 아들을 당왕의 시종으로 보내고 신라 관원에게 당의 관복을 입히고 신라가 당의 속국이 아니라 1개 주(州)로 인정 받기를 바라는 놈이다. 신라의 사직을 지킨다는 명분이나 그것은 김춘추 자신의 욕심일 뿐이다. 백제의 왕 의자나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대륙으로 진출하여 천하(天下)를 제패하려는 것과는 반대다. 신라가 반도의 구석에 박혀 밖으로 뛰쳐나갈 길이 막혀있는 지리적 여건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때 풍이 불쑥 물었다. 달솔, 네 영지가 얼마나 되었느냐? 예, 이번 고노의 3만8천석까지 38만3천석으로 늘어났습니다. 소가 가문의 영지를 합하면 두 부자(父子)가 200만석 가깝게 된다. 풍이 말을 이었다. 50석당 군사 1인을 모은다고 해도 4만명이야. 전시(戰時)에는 3명도 모을 수 있으니 10만이 넘는 군사가 된다. 전하, 소가 가문이 백제방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겠습니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특히 권력욕은 절제하기가 어렵다. 정색한 풍이 계백을 보았다. 수천년 역사에서 상대를 믿었던 왕국이 꼭 망했다. 그리고 그 망한 왕국은 패륜과 무능, 압제로 매도당했다. 너도 그것을 명심해야 된다. 계백이 숨을 들이켰다. 승자가 정의다. 장민호기자 ledzepp79@
그날 밤, 침상에 누워있던 계백이 문이 열리는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아스나가 들어서고 있다. 기둥에 붙여놓은 양초의 불꽃이 바람결에 흔들렸다. 그 바람이 슬쩍 계백의 코를 스치면서 옅은 향내가 맡아졌다. 여자의 체취다. 계백의 시선을 받은 아스나가 잠간 눈동자를 고정시키더니 눈길을 내렸다. 볼에 홍조가 피어났다. 화장기가 없는 피부는 창백하기 때문에 표시가 난다. 아스나가 시선을 내린 채 다가온다. 한 걸음, 두 걸음, 흰색 비단 겉옷을 입고 두 손을 앞에서 마주 쥔 채 다가오는 것이다. 품위가 배어나고 있다. 지금까지 여러 명의 소실을 상대했지만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다. 아스나는 중키에 가냘픈 몸매다. 이윽고 침상 끝에 선 아스나가 시선을 들어 계백을 보았다. 이제는 얼굴에 홍조가 가득 덮였다. 불빛을 받은 눈도 번들거리고 있다. 아스나의 꽃잎 같은 입이 열렸다. 벗고 들어갈까요? 그러는 게 좋겠다. 그러자 아스나가 그 자리에서 겉옷을 벗어 방바닥에 떨어뜨렸다. 마치 나비가 껍질을 벗고 나오는 것 같다. 그 순간 계백이 숨을 들이켰다. 아스나의 알몸이 드러난 것이다. 아스나는 겉옷 빝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 계백의 시선을 받은 아스나가 한 손으로 젖가슴을, 다른 손으로 음부를 가렸지만 그것이 더 자극적이다. 아스나가 그 자세로 계백을 보았다. 얼굴이 더 붉어졌다. 침상으로 올라갈까요?들어오라. 아스나가 한쪽 다리를 들어 침상에 오르는 순간 검은 숲이 드러났다. 숲속의 선홍빛 연못도 보인다. 계백이 이불을 들쳐서 금방 태어난 아이 같은 아스나의 몸을 받아들였다. 아스나가 바로 계백의 가슴에 얼굴을 붙이더니 두 손으로 허리를 감싸 안으면서 말했다. 추워요. 과연 알몸은 바깥 공기를 맞아 차다. 계백이 아스나의 어깨를 바짝 감싸 안았다. 다리 하나가 자연스럽게 아스나의 하반신을 둘렀다. 그때 아스나의 숨결이 계백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장군, 감사드립니다. 이제 네 낭군 아니냐? 예, 낭군. 아스나의 손이 뱀처럼 미끄러져 내려와 계백의 남성을 쥐었다. 그러더니 숨을 들이키면서 얼른 손을 떼었다. 계백이 아스나의 입을 입에 넣듯이 붙였을 때 뜨거운 혀가 꿈틀거리며 빠져나왔다. 다음날 오전, 계백은 아스나, 히지와 함께 청에 올랐다. 전(前)에 아스나의 남편인 영주 고노가 생존했을 때와 같은 분위기다. 고노 대신으로 계백이 영주 자리에 앉았을 뿐이다. 계백은 아스나를 옆쪽에 앉게 했고 히지의 자리는 그 가운데다. 청 안에는 계백의 장수들뿐만 아니라 성에 남아있던 고노의 가신들도 불렀기 때문에 좁은 청이 가득 찼다. 아스나는 처음에는 부끄러운지 시선을 내린 채 얼굴을 붉혔다가 곧 냉정을 되찾았다. 이제 계백의 소실인 것이다. 그때 슈토가 계백에게 보고했다. 대감, 성 밖 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중신(重臣) 오시마와 오우치가 일족과 함께 도주하다가 생포되었습니다. 명을 내려 주십시오! 그놈들을 따르던 부하까지 다 몰사시켜라. 예엣! 앞으로 이곳은 히지성(城)으로 부른다. 히지가 성장하면 이곳 성주가 될 테니 가신들은 잘 보좌하라. 추상 같은 명이다. 모두 머리를 숙였고 계백의 말이 이어졌다. 우에노가 중신(重臣)으로 성의 수비장을 맡아 히지를 모시도록 하라.
그때 계백이 머리를 돌려 히지를 보았다. 히지는 대여섯살쯤 되어 보였는데 단정한 모습이다. 얼굴도 아스나를 닮았다. 그러나 마당에서 일어난 참극을 보고는 얼굴이 하얗게 굳어져 있다. 아스나도 마찬가지다. 나란히 앉은 두 모자(母子)는 나무로 만든 인형같다. 이제 사방이 조용해졌다. 마당에 수백명의 장수와 군사가 모여섰고 청 안의 장수들도 숨을 죽이고 있다. 그때 계백이 입을 열었다. 너, 몇살이냐? 히지에게 물은 것이다. 깜짝 놀란 히지가 아스나부터 보았다. 눈에 두려움이 가득차 있다. 나란히 앉아있던 아스나가 대답을 하라는 눈짓을 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히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섯살입니다. 계백이 다시 물었다. 저놈들이 왜 죽었는지 아느냐? 예. 계백의 눈빛이 부드러웠는데 히지가 입안의 침을 삼키고 나서 말했다. 욕심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무슨 욕심? 영지를 차지하려고. 땅입니다. 머리를 끄덕인 계백이 히지에게 물었다. 너, 내가 누군지 아느냐? 무신(武神). 누가 그러더냐? 아스코가. 아스코가 누구냐? 시녀입니다. 넌 무엇이 되고 싶으냐? 어머니를 따라 중이 되고 싶습니다. 중? 예. 왜? 아버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었다면 네 아비의 뒤를 따라 영주가 되었겠구나? 예. 영주가 되고 싶으냐? 그때 아스나가 숨 들이켜는 소리를 내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러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져있다. 청 안의 장수들, 마당에 모여선 장졸들도 숨을 죽이고 있다. 바람이 불어와 피비린내가 맡아졌지만 모두 히지를 주시하고 있다. 그때 히지가 대답했다. 예. 그순간 아스나가 어깨를 치켜 올렸다. 다시 숨을 들이켰기 때문이다. 장수들도 술렁거렸고 마당의 장수 하나는 혀 차는 소리를 내었다. 그때 계백이 물었다. 네가 영주가 되려면 부하를 모으고 네 땅을 빼앗은 영주를 죽여야되지 않겠느냐? 히지가 눈만 껌벅였지만 그 말이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는 표정이다. 그때 계백의 시선이 아스나에게 옮겨졌다. 네 어머니하고 같이 말이다. 그때 아스나가 두손을 청 바닥에 짚고 엎드렸다. 아이의 생각없는 말입니다. 대감. 아스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머리를 든 아스나의 볼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그때 계백이 다시 히지에게 물었다. 너, 영주가 될 수련을 할테냐? 이제 히지는 상황을 조금 안 것 같다. 얼굴이 하얗게 굳어진 채 눈동자만 굴리고 있다. 그때 계백이 다시 물었다. 너, 내 양아들이 되지 않겠느냐? 그순간 청 안 장수들이 술렁거렸다. 슈토가 어깨를 한껏 부풀렸다가 소리죽여 숨을 뱉는다. 계백의 목소리가 이어서 울렸다. 내 양아들이 되어서 영주 수련을 해라. 히지는 여전히 대답하지 못했고 계백의 시선이 아스나에게로 옮겨졌다. 그대는 내 소실이 되겠는가? 아스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그렇습니다. 아스나가 대답했다. 그때 슈토의 뒤쪽에서 우에노가 나타났다. 마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에노가 소리쳤을 때 슈토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렇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오. 반란군은 이제 진압되었소. 잠시 후에 모시러올 터이니 기다리시오. 슈토가 말하더니 우에노를 돌아보았다. 우에노, 마님을 모시고 있게. 예, 슈토님. 우에노가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을 때 아스나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고노성의 영주가 정무를 처리하는 청은 돌보지 않아서 마룻바닥이 부숴졌고 천정에 거미줄이 걸쳐졌다. 그래서 군사들이 서둘러 바닥을 깔고 청소를 했다. 작은 성안에 1천기의 기마군이 진입해온 터라 말발굽 소리로 가득 찼다가 차츰 가라앉았다. 청에 오른 계백이 안쪽에 마련된 보료에 앉았을 때 군사들이 성 안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중신 타노와 타마나를 끌고 와 앞쪽 마당에 꿇어앉혔다. 마당 주위에는 군사들이 늘어섰고 청안에는 장수들이 좌우로 벌려 앉았다. 한낮, 태양이 중천에 떠 있는 맑은 날씨다. 그때 하도리가 말했다. 전(前) 성주의 부인이 오십니다. 곧 안쪽 문으로 아스나가 아들 히지를 데리고 청안으로 들어섰다. 주위는 조용하다. 둘러앉은 장수들은 시선을 받은 아스나가 하도리의 뒤를 따라 다가오고 있다. 계백이 아스나를 보았다. 그 순간 계백이 숨을 멈췄다. 아스나와 시선이 마주쳤고 잠시 떼어지지 않았다. 흰옷 차림의 아스나는 창백한 얼굴에 조금 홍조가 띄워져 있다. 적당한 키, 갸름한 얼굴, 스물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나이에 몸매는 가늘지만 품위가 있는 모습이다. 그때 계백이 눈으로 옆자리를 가리켰다. 앉으시오. 미리 비워둔 자리다. 계백에게 머리를 숙여 보인 아스나가 히지와 함께 옆쪽 방석 위에 앉았다. 다섯 보쯤 떨어진 자리지만 옅은 향내가 맡아졌다. 청안은 조용하다. 장수들도 숨을 죽이고 있다. 마당에 꿇어앉은 타노와 타마나는 40대 중반쯤으로 아직 정신을 수습하지 못한 상태다. 타노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칼등으로 맞았기 때문이다. 그때 계백이 마당에 선 장수에게 물었다. 저놈들 휘하 군사는 어떻게 되었느냐? 예, 일부는 죽였고 나머지는 모두 항복해서 잡아놓았습니다. 장수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머리를 끄덕인 계백이 명령했다. 다 죽여라. 옛. 저놈 가족들도 몰사시켜라. 옛! 저놈들의 친척도 찾아서 다 죽여라. 옛! 그리고 내 눈앞에서 저 두 놈을 베어죽여라. 난도질을 하는 게 낫다. 옛! 몸을 돌린 장수가 둘러선 군사들에게 소리쳤다. 베어 죽여라! 타노와 타마나는 말 한마디라도 할 여유를 갖게 될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러나 계백의 추상같은 명령이 이어서 떨어졌고 그것을 들은 몸이 위축되었을 때 군사들이 사방에서 칼을 치켜들고 덮쳐왔다. 험악한 기세다. 으으악! 난도질은 공포감과 고통을 극대화시킨다. 단숨에 죽이는 것은 호사다. 두 반란수괴의 비명이 계속해서 이어지다가 피걸레가 되면서 멈춰졌다. 고깃덩이가 남았다.
고노 영지의 거성(居城)은 둘레가 8리(4km) 정도에 높이는 10자(3m) 남짓의 석벽이 세워진 소성(小城)이다. 그런데 이 소성이 남북으로 두동강으로 나뉘어져서 북쪽은 중신(重臣) 타노(田野)가, 남쪽은 역시 중신 타마나(玉名)가 차지했다. 이 소성을 빼앗으려고 두 중신이 제각기 군사 2백여명을 끌고 들어와 진을 쳤기 때문이다. 서문 안쪽에는 고노의 처자인 아스나, 히지 모자(母子)가 내몰려 있었으니 보기에도 안타깝고 흉했다. 아스나는 끝까지 충성하는 가신(家臣) 10여명에 시녀, 군사 1백여명과 함께 저택에서 기거하고 있었으니 하루가 10년같은 세월일 것이다. 거기에다 성밖의 영지에도 중신 2명이 호시탐탐 영지를 노리는 상황이다. 아스나가 진즉 히지를 데리고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죽은 남편 고노의 유지를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남았다. 자신마저 도망치면 영지는 사분오열이 되어 내란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전 진시(8시) 무렵, 북문 안에 주둔하고 있던 타노는 말구소리에 눈을 떴다. 처음에는 지진이 난 줄 알고 벌떡 일어났다가 그것이 말굽소리인 줄 알고는 얼굴이 굳어졌다. 문을 박차고 나간 타노가 마루에 서서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 그때 마당으로 군사 하나가 뛰어들었다. 기마군이요! 누구냐! 어느 기마군이야? 말발굽소리는 1,2백기가 아니다. 엄청나다. 42세의 타노가 처음 듣는 말굽소리다. 그때 군사가 소리쳐 대답했다. 모릅니다! 몰라? 벌써 북문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때 말굽소리가 더 가까워지더니 비명과 함성, 외침이 일어났다. 놀란 타노가 방에 있는 검을 집으려고 몸을 돌렸을 때 마당으로 10여필의 기마군이 들이닥쳤다. 이놈! 멈춰서라! 뒤쪽에서 벽력같은 외침이 일어나자 타노의 오금이 얼어붙었다. 머리만 돌린 타노는 경장 차림의 기마군들을 보았다. 내려와라! 앞에 선 기마군이 소리쳤다. 장수같다. 누, 누구요! 타노가 기를 쓰고 겨우 소리쳤을 때 장수가 달려왔다. 아앗! 놀란 타노가 외침을 뱉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방으로도 도망치지 못한 타노는 장수가 내려친 칼등에 머리통을 맞고 뒤로 벌떡 넘어졌다. 기절을 한 것이다. 아스나는 땅이 울리는 말굽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계백군의 진입을 알고 있었다. 계백군은 북문 수문장인 우에노가 열어놓은 북문으로 몰려들어올 것이다. 작은 성이다. 곧 말굽소리가 가까워지면서 비명과 외침이 일어났다. 모두 성 안의 군사, 장수들의 입에서 터져나온 소리다. 담장너머 성 안이 온통 말굽소리, 외침으로 가득찬 것 같았다. 그러더니 곧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밥 한그릇 먹을 시간도 안되었다. 어느덧 놀라 지르는 외침이 뚝 끊긴 것이다. 말굽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때 내궁으로 쓰는 저택 대문으로 기마군 대여섯이 들어섰다. 앞에 선 기마군은 장수다. 황소뿔 투구를 썼지만 어깨와 허리 갑옷만 걸쳤고 손에는 피가 묻은 장검을 쥐었다. 아스나는 마루에 나와 서있었는데 황소뿔 장수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때 장수가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아스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는 계백령 영주 계백대감의 기마군 대장 슈토요, 아스나님이시오? 목소리가 우렁찼다.
마님. 부르는 소리에 아스나가 머리를 들었다. 침실 안, 아스나는 막 아들 히지(日出)을 재운 참이다. 밤, 해시(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다. 시녀 마스꼬의 목소리여서 아스나가 낮게 물었다. 왜 그러느냐? 그때 방문이 열리면서 마스꼬가 얼굴만 조금 안으로 내밀었다. 마님, 우에노 님이 오셨습니다. 눈을 크게 뜬 아스나가 잠깐 망설였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안으로. 네, 저는 밖에 있겠습니다. 마스꼬는 망을 보겠다는 말이다. 곧 문이 더 열리더니 방 안으로 우에노가 들어섰다. 우에노는 아스나의 먼 친척이 된다. 올해 37세. 3백석을 받는 수문장직이지만 백제에서 가져온 불경을 외우고 검술에도 뛰어났다. 그래서 지난번에 타카모리 영지와의 합병을 상의했던 것이다. 방안으로 들어선 우에노가 예의바르게 문 근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얼굴이 무섭게 굳어져 있다. 마님, 지난번 말씀을 듣고 실행을 하지 못했으나 그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우에노가 두손을 방바닥에 짚고 아스나를 보았다. 제가 타카모리의 가신 슈토 님께 말씀을 드렸던 바, 슈토님은 타카모리 님께 말씀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호흡을 고른 슈토가 말을 이었다. 슈토님은 타카모리님이 마님과 히지님을 살려둘 분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타카모리 님이 영지 욕심을 내다가 백제방의 장군인 계백 영주께 타도당해 영지가 일거에 몰수되었습니다. 그때 우에노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아스나를 보았다. 마님, 제가 조금 전에 슈토 님이 보낸 전령을 만났습니다. 숨을 들이킨 아스나에게 우에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슈토님은 이제 계백 영주의 가미군대장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50리 거리인 하소산 건너편에 기마군 1천 기를 이끌고 와 있습니다. 계백령의 영주이신 계백 영주를 모시고 와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아스나가 숨을 죽였고 우에노의 말이 이어졌다. 계백 영주께서는 슈토 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역적들을 단숨에 처단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님과 히지 님을 안돈시켜 드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마님. 우에노가 부르자 아스나가 입을 떼었다. 우리 두 모자가 절에 가서 살기만 하면 돼요. 마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백성들이 하루라도 빨리 전쟁에서 벗어나 농사를 지어야지요. 모두 산으로 도망가서 3년째 농사를 짓지 못하고 있어요. 마님. 손등으로 눈물을 닦은 우에노가 아스나를 보았다. 돌아가신 주군께서도 잘 하셨다고 하실 것입니다. 제가 끝까지 마님과 히지 님을 모시겠습니다. 우에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군, 저쪽 산 너머가 고노 영지입니다. 슈토가 손으로 왼쪽 산을 가리켰다. 오후 미시(2시) 무렵, 계백은 슈토가 이끄는 기마군 1천기와 함께 기동훈련 중이다. 슈토가 말을 이었다. 3년 전에 영주 고노가 병으로 죽고 지금은 미망인인 아스나 부인이 6살짜리 아들을 키우고 있는데 중신(重臣)들이 서로 영지를 차지하려고 칼부림을 하고 있습니다. 내란 중이지요. 의외의 말이어서 계백은 듣기만 했고 위사장 하도리는 빤히 슈토를 보았다. 슈토가 몸이 가벼워져서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네 다리를 움직이는 말 배를 무릎으로 조였다. 억센 힘이어서 놀란 말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 바람에 백성들이 3년째 고생을 합니다. 중신들이 서로 세금을 뜯어가는 바람에 굶어 죽는 백성이 늘어났습니다. 이런. 쓴웃음을 지은 계백이 지그시 슈토를 보았다. 그래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냐? 아니올시다, 주군. 슈토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쓰와 성을 떠난지 사흘째, 이곳은 이쓰와 성에서 7백여 리 거리인 것이다. 하루에 2백5십리를 전진했으니 왜군(倭軍) 기마군으로는 꿈도 못 꿀 전진 속도다. 중무장한 왜군 기마군은 하루에 5, 60리 전진이 고작인 것이다. 앞쪽의 고노 영지는 계백령 서북쪽 변두리에 위치한 소국(小國)이다. 3만8천석 넓이에다 영주가 병사하고 내분이 일어난 영지인 것이다. 그때 슈토가 말했다. 이곳의 가신(家臣) 중 우에노라는 자가 있습니다. 소신과 친분이 있는 자인데 지난번에 저에게 서신을 보내어 차라리 타카모리 님이 이 영지를 병합하는 것이 백성을 위해서 낫겠다고 했습니다. 슈토의 얼굴에서 땀이 배어나오고 있다. 계백의 지시대로 슈토도 투구는 썼지만 어깨와 가슴만 가죽 갑옷으로 감싼 경장 차림이고 말도 가슴 가리개만 했다. 허리에는 장검을 찼고 손에 단창을 쥐었다. 간편한 무장이다. 슈토가 말을 이었다. 아스나 부인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유자 히지 님과 아스나 님은 국경 근처의 절에서 살게만 해주면 영지를 넘기겠다고 했습니다. 슈토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제가 타카모리 님께 그 말씀을 전하기도 전에 영지 문제가 일어난 것입니다. 슈토 님이 전해줄 마음이 없었던 것이 아니오? 듣고 있던 하도리가 불쑥 묻자 슈토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렇습니다. 슈토가 계백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타카모리 님은 아스나 님 모자를 살려두시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오. 그때 계백이 물었다. 이곳 내란을 일으키는 중신(重臣) 놈들은 몇이냐? 예, 넷입니다. 슈토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모두 2백에서 5백 정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는데 모두 물욕에만 눈이 먼 놈들입니다. 슈토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계백을 보았다. 그리고 제각기 소가 전(前) 대감과 현(現) 대감께 청을 넣어 영지를 장악하면 심복이 되겠노라고 서약서를 넣었다는 것입니다. 뇌물도 바쳤는데 두 대감은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백성만 죽어나는구나. 입맛을 다신 계백이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말했다. 오늘은 이곳에서 정찰을 하도록 하자.
백제 유민을 먼저 규슈의 남쪽에서부터 기반을 굳히기 시작하여 차츰 동진(東進)했는데 왜인(倭人)들에게는 선진화된 문명을 전해주면서 지방 호족으로 자리잡았다. 따라서 왜국(倭國)의 영주, 호족 대부분은 백제계다. 왜국의 왕실도 수백 년 전에 도래한 백제계일 뿐만 아니라 왜국의 섭정 소가 가문도 백제계이고 영주 대부분이 백제계였으니 백제방(百濟方)은 왕실과 함께 왜국을 통치하는 담로의 하나다. 백제는 대륙을 포함하여 왜국까지 22개의 담로를 소유하고 있었으니 백가제해(百家齊海)란 말에서 국명(國名)이 만들어졌다. 봄, 3月, 백제방 직할 영지의 거성(居城) 이쓰와(五和)성의 청에서 영주 계백이 중신들에게 말했다. 기마군 장비가 너무 무겁다. 오늘부터 기마군의 말에는 안장과 가슴 가리개만 붙이고 다 떼도록 해라. 중신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더니 수군거렸다. 왜국의 기마군은 장비가 대단했다. 머리에 쇠 투구를 씌워 눈과 입만 내놓게 했고 투구에 거대한 황소 뿔을 붙이기도 했다. 말 목에도 갑옷을 덮었으며 가슴은 물론 엉덩이와 배까지 사슬 갑옷을 늘어뜨려 말 갑옷 무게만 20관(90㎏)이나 되었다. 거기에다 기마군의 갑옷도 엄청났으니 말이 사람 넷을 태우고 달리는 셈이었다. 계백의 백제 기마군은 경장에 말 갑옷도 가슴에 가죽만 붙인 것이어서 백제 기마군의 속도는 왜국 기마군의 2배가 되었다. 그때 계백의 장수가 된 슈토가 말했다. 주군, 그렇게 되면 적의 화살에 당하게 됩니다. 기마군이 궁수들에게 밀릴 수가 있습니까? 빠른 기마군은 화살을 피할 수가 있는 법, 궁수 무서워서 기마군을 뭍에 올라온 거북이로 만들 수는 없다. 계백이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장 오늘부터 말 갑옷을 떼고 기마군 갑옷도 가슴만 가리고 다 떼어라. 계백의 시선이 하도리에게 옮겨졌다. 하도리, 네가 감독관이 되어라. 옛. 기마군은 기습과 속도가 생명이다. 근접전은 보군한테 맡기고 기동력을 향상시켜야만 한다. 계백이 다시 슈토에게 말했다. 슈토, 네가 내 영지의 기마군 대장이다. 하도리와 함께 기마군을 재편성하라. 옛. 슈토가 청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계백 영지의 기마 대장이면 중신(重臣)이다. 슈토는 새 영주의 중신이 된 것이다. 이제 계백령에는 질서가 잡혔고 군사 5천여 명을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도 갖췄다. 평시에는 영지 50석당 군사 1명으로 계산해서 계백령에서는 6900명을 낼 수 있지만 계백령은 소출이 많고 인구도 많아서 2만까지 병력을 갖출 수가 있는 것이다. 그때 마당에서 말굽 소리가 울리더니 위사가 먼저 뛰어 들어와 보고했다. 주군, 백제방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계백이 머리만 끄덕이자 백제방의 관원인 장덕 목기수가 들어와 인사를 했다. 영주께 인사드리오. 오, 장덕 왔는가? 방주 왕자 전하께서 말씀 전갈입니다. 말하라. 본국에 간 덕솔 백종이 먼저 왕자 전하께 전령을 보냈습니다. 계백의 시선을 받은 목기수가 말했다. 은솔께서 이번에 달솔로 품위가 오르셨습니다. 허어. 계백이 놀란 외침을 뱉었을 때 청안의 모든 중신들이 엎드려 치하했다. 주군, 감축드리오. 경사입니다. 이제 계백은 제2관등인 달솔이 되었다.
그 시간에 백제왕 의자는 왜국의 백제방주 풍 왕자가 보낸 사신을 맞고 있다. 왕자 풍은 의자의 동생이니 형제간이 본국과 속국을 지배하는 셈이다. 의자는 동생 풍과 우애가 깊어서 부친 무왕(武王)의 칭찬을 받아왔다. 사신은 풍의 중신(重臣) 덕솔 백종이다. 풍이 직접 쓴 서신을 읽고난 의자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의자가 서신을 먼저 병관좌평이며 대좌평인 성충에게 건네주면서 백종에게 물었다. 이곳에서도 소문을 들었다. 무역선 선장들이 퍼뜨린 소문은 이미 남방(南方)으로도 번져나갔을 것이다. 백제(百濟)는 백가제해(百家濟海)의 줄임말이니 수많은 무역선단을 이끌고 대륙과 남방, 인도를 넘어 서쪽으로 해양 진출을 해왔다. 그래서 백제는 대륙과 서쪽에 22개의 속령인 담로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왜국도 담로중의 하나다. 그때 서신을 다 읽은 성충이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대왕, 계백이 무신(武神)으로 명성을 떨친다니 대왕께선 무신을 거느린 천신(天神)이 되셨습니다. 옳지. 의자가 소리내어 웃었다. 좌평, 그대는 무신을 지휘하는 병관무신(兵官武神)이냐? 청안에 가득 모인 신하들 사이에서 웃음이 일어났다. 도성의 청은 웅장하다. 왕좌에 앉은 의자의 모습에서는 저절로 위엄이 풍겨져 나온다. 의자는 영명한 군주다. 나이 40이 넘어서 즉위한 터라 태자 시절부터 겪은 국정을 바로 실천할 수 있었다. 그때 성충이 말했다. 대왕, 이곳 도성에 계백의 처자가 있습니다. 계백이 왜국 영주가 되었으니 처자를 보내 주시지요. 계백이 처자를 두고 갔구나. 의자가 머리를 끄덕이더니 잠깐 성충을 보았다. 그러더니 백종에게 물었다. 계백이 왜국에서 소실을 두었느냐? 예, 대왕. 당연한 일이지요. 성충이 거들었다. 영지 네곳을 획득했으니 전(前) 영주의 처첩은 당연히 전리품이 됩니다. 으음, 좌평도 계백이 부러운 모양이구나. 예, 부럽습니다. 대왕. 다시 청에 웃음이 일어났을 때 의자가 정색하고 말했다. 계백의 처자는 이곳에 두어라. 예, 대왕. 머리를 숙여보인 성충이 의자를 보았다. 계백을 부르실 계획이십니까? 아직 아니다. 의자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필요하면 부르겠다. 대왕, 계백이 공을 크게 세우고 있으니 품위를 올려 주시지요. 성충이 말하자 의자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 계백에게 달솔 품위를 하사한다. 계백을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성충이 말하자 백관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황공합니다. 의자가 백종에게 말했다. 계백에게 줄 관복과 관을 가져가라. 예, 대왕. 왜국 소실들 한테서 자식을 많이 낳으라고 전해라. 예, 대왕. 백제계가 왜국으로 건너가 백가제해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이제 곧 신라를 합병하고나면 더 큰 세상으로 뻗어나가야 될 것이다. 예, 대왕. 대답을 백종이 했지만 백관들도 듣는다. 왕국에도 기세(氣勢)가 있다. 백제 왕국 왕궁의 기세는 가히 하늘을 찌를 것 같다. 바로 백가제해(百家濟海)의 기세다.
장군, 백제군은 방책도 쌓지 않았습니다. 기마군 진지 안쪽으로 보군 초소만 있을 뿐입니다. 장군 박길천이 말했을 때 김유신이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보았다. 기마군으로 기습하면 승산이 있습니다. 네 용기가 장하다. 먼저 칭찬을 해준 김유신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앞쪽을 보았다. 방금 선봉장 박길천이 직접 첨병대를 이끌고 적진을 염탐하고 돌아온 것이다. 박길천은 33세, 그동안 수십번 전쟁을 치른 용장이다. 주위에 둘러선 장수들이 김유신의 시선을 따라 앞쪽을 본다. 오시(12시) 무렵, 한낮의 햇살이 밝은 초가을이다. 이곳 신라 서쪽의 변방인 안산벌에서 신라군과 백제군이 대치한지 30일째, 백제군은 동방 방령인 달솔 의직이 이끈 3만5천, 그중 기마군이 1만2천이며 보군은 2만3천, 아주 적당한 비율이다. 이를 맞는 신라군은 대장군 김유신이 이끄는 3만2천, 기마군 8천에 보군 2만4천이다. 그때 김유신이 말했다. 달솔 의직은 명장이야. 성격이 급한 것 같지만 전장(戰場)에서는 교활하고 치밀하다. 내가 겪어보았다. 모두 숨을 죽였다. 진막 밖에 모여선 10여명의 장수들을 가을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곳은 야산의 중턱이어서 멀리 백제군의 보군 초소까지 다 보인다. 김유신이 손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저 숲이 비어있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백제군과의 중간에 위치한 숲을 가리켰다. 평지에 잔나무만 무성한 숲이다. 신라군이건 백제군이건 상대를 향해 나아가려면 숲을 돌파해야 한다. 그러나 평지의 숲이어서 백제군은 초소도 세우지 않았다. 기마군은 거침없이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숲이 방책이다. 김유신의 목소리가 주위로 펼쳐졌다. 우리가 돌파하면 백제군은 기다렸다가 불화살을 쏠 것이다. 그 순간 서너명이 탄성을 뱉었고 박길천은 숨을 들이켰다. 숲의 넓이는 1리(500m)쯤 된다. 김유신이 말을 이었다. 이곳 저곳에 마른 풀, 나무가 늘어났구나. 백제군이 화공을 하려고 몰래 쌓아놓은 것이다. . 우리 기마군이 숲 안에 다 들어갔을 때 불화살을 쏘겠지. 그럼 절반은 타죽고 빠져나온 절반은 포위된다. 그 뒤를 보군이 따른다면 후퇴하는 기마군에 밟혀 몰사하겠지. 김유신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신라의 김유신은 오래전부터 신라인에게 무신(武神)으로 불리었다. 용병술이 뛰어난데다 한번도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제의 뛰어난 무장들과 부딪쳐서 손색이 없는 것이다. 김유신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명심해라. 후세에는 승자 이름만 남는다. 우리가 이기면 너희들 이름은 수백년, 수천년 뒤에도 이어질 것이지만 저기. 김유신이 턱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저기 있는 백제군 달솔 의직이란 이름은 우리가 백제를 멸망시킨다면 이름 하나만 남기도 어려울 것이다. 나무 걸상에 앉은 김유신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저기 백제땅, 백제 백성은 모두 신라의 장원이 되고 농노가 되겠지. 너의들은 백제땅을 나눠받은 지주 신분으로 백제인들을 농노로 소유하는 것이다. 역사는 신라의 위대함만 기록한다. 장수들의 얼굴에 생기가 떠올랐다. 이것이 김유신의 용인술이기도 하다. 장수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 그래서 장수들도 김유신을 따른다.
당의 관복을 입고 당의 계급과 관습을 따르며 당황제를 모시면 어떻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김춘추도 당(唐)의 관복을 입고 있다. 어깨를 편 김춘추가 왕좌에 앉아 있는 여왕을 보았다. 여왕 김승만(金勝曼)은 사촌언니인 여왕 김덕만(金德曼)이 비담과의 전쟁 중에 피살되고 나서 왕위에 올랐는데 김춘추의 하인(下人)이나 같았다. 김춘추는 왕관만 쓰지 않았을 뿐이지 국정을 자신의 집안에서 처리했다. 김춘추가 말을 이었다. 6백년 사직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당에 사대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왕전하. 당황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에 패한 후에 사사건건 우리 신라에게 트집을 잡고 있소. 경은 무슨 방책이 있소? 여왕이 주저하며 묻자 김춘추가 쓴웃음을 지었다. 청안에는 30여명의 고관이 품계에 따라 서 있었지만 모두 숨을 죽이고 있다. 김춘추가 말을 이었다. 당은 지난번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거의 궤멸당했고 황제는 계백의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이 빠졌습니다. 아마 몇 년 못살 것 같습니다. 여왕이 몸을 굳혔고 김춘추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전하께서 수를 잘 놓으시니 비단에다 당황제를 칭송하는 글귀를 수로 넣어주시지요. 그것을 당황제께 보내면 좋아할 것입니다. 내가 말이요? 예, 정사는 소신에게 맡기시고 수를 놓아주시면 그걸 갖고 당황제께 가려고 합니다. 경이 말이요? 예, 그걸로 달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알겠소. 여왕의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오늘부터 수를 놓겠소. 왕좌에서 일어선 여왕이 청을 나갔을 때 김춘추가 헛기침을 하고나서 대신들을 둘러보았다. 대신들은 감히 시선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때 김춘추가 입을 열었다. 지금 신라는 적에게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소. 김춘추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서쪽은 백제, 동쪽은 백제의 속령인 왜국, 북쪽은 고구려에, 남쪽 바다는 백제 수군(水軍)에 막혀있으니 믿을 곳이라고는 대국(大國) 당 뿐이오. 모두 숨을 죽였고 김춘추가 부릅뜬 눈으로 대신들을 보았다. 김춘추가 임명한 대신(大臣)들이다. 비담의 반란을 계기로 비담 일당은 물론 반대파까지 모두 숙청을 한 터라 신라 조정은 모두 김춘추에게 충성을 바치는 인물들로 채워졌다. 왜국은 백제방의 권한을 더욱 강화시켜 여왕과 함께 직할통치령을 늘려가는 중이고 은솔 계백은 그곳의 대영주가 되어 무신(武神)으로 불릴 정도가 되었소. 이 상태가 계속 된다면 신라는 말라죽은 나무 꼴이 될 것이오. 소리치듯 말한 김춘추가 어깨를 부풀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당황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눈 하나를 잃었지만 고구려 백제 연합에 잠을 못자고 있을 것이오. 당을 이용해 원수를 치는 방법밖에 없소. 대감, 백제왕 의자가 동방(東方)에 대군을 집결시켜 놓고 있습니다. 벌써 한 달째인데 사신을 보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찬 김부안이 묻자 김춘추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자가 아직 합병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거야. 대장군에게 전권을 일임했으니 당분간은 막아줄 것이다. 대장군이란 김유신이다. 김유신과는 처남 매부 사이일 뿐만 아니라 서로 의지하는 수족 같은 사이다. 김춘추는 김유신이 없으면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될 것이고 김유신은 김춘추 없이는 진골 왕족들의 무시를 받고 하루도 견디지 못한다. 신라 왕성의 청안에 긴장감이 덮여져 있다.
타카모리의 영지 18만석까지 포함시켰으니 계백은 34만5천석의 영지를 소유한 영주가 되었다. 대영주다. 그리고 계백의 명성은 화살 한 대로 타카모리의 용장 아리아케를 사살함으로써 천하에 떨쳤다. 이곳은 계백의 거성(居成)인 이쓰와(五和)성. 계백은 아리타의 거성에서 이곳으로 거성을 옮겼다. 타카모리는 영지 서쪽에 있는 호안사(寺)로 들어가 중이 되었다. 타카모리를 따르는 가신은 한명도 없었으니 그야말로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다. 이쓰와성의 청 안에서 계백이 중신(重臣)회의를 하고 있다. 계백의 중신은 이또의 중신이었던 사다케, 타카모리의 중신 하세가와, 아리아케의 중신 노무라 등이었으니 구(舊) 영주의 중신들을 모두 받아들인 셈이다. 또 끝쪽에 타카모리의 용장 슈토의 모습도 보였는데 슈토는 대군을 이끌고 왔다갔다 하다가 투항했다. 넓은 청 안에는 1백여명의 가신, 장수들이 앉아 있다. 그중 일부는 계백을 백제에서부터 따라온 장수였지만 대부분이 왜국(倭國) 출신이다. 계백이 입을 열었다. 흥망성쇠가 빈번한 시대이니 주인을 잘 만난 신하와 백성은 안락을 누리고 그렇지 못하면 함께 지옥구경을 하지 않느냐? 계백의 목소리는 크고 우렁차다. 턱을 조금 치켜 든 계백의 용자는 위엄이 넘쳐흐른다. 앞쪽에 나란히 앉은 화청, 윤진, 백용문도 그 기세에 압도당한 듯 숨을 죽이고 있다. 이 셋이 영주 계백의 동지이며 측근이다. 셋은 제각기 이또, 아리타, 마사시의 거성을 근거지로 삼아 소영주가 되어 있다. 계백이 말을 이었다. 왜국은 백제의 속국이며 담로다. 백제계 왜왕이 백제방 방주와 함께 통치하는 체제인데 요즘 들어 지방 호족의 발호로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다. 어깨를 편 계백이 말을 이었다. 나는 백제방 방주 직속령을 통치하는 영주이며 백제국 은솔 벼슬의 무장이기도 하다. 나는 왜국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이것이 대영주가 된 계백의 소신이다. 그것을 가신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회의가 끝났을 때 야마토 성주 화청이 계백에게 말했다. 청에는 중신들만 남아 있다. 주군, 제가 야마토성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주 급합니다. 무슨 말인가? 계백이 묻자 화청이 헛기침을 했다. 이또가 버리고 간 측실들이 넷이나 남아 있습니다. 그때 윤진과 백용문은 외면했고 사다케가 한숨을 쉬었다. 계백이 물었다. 그래서? 그러자 화청이 옆쪽의 사다케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놈한테 물어보시지요. 계백의 시선이 사다케에게로 옮겨졌다. 사다케, 화청님과 무슨 일이냐? 네, 주군. 사다케가 다시 한숨부터 쉬었다. 사다케는 55세, 이미 장년으로 이또의 중신이었다. 그러나 화청이 누구인가? 65세의 노장(老將)이다. 40여년 전, 당왕 이세민이 태원유수 이연의 아들이었을 때부터 옆에서 보아 온 당의 장수 출신이다. 사다케로서는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 할 입장이다. 사다케가 입을 열었다. 예, 화청님께서 이또의 남은 측실 넷을 모두 측실로 갖겠다고 하셔서 제가 조금 기다려 보라고 했던 것입니다. 왜 그랬는가? 계백이 추궁하듯 묻자 사다케가 대답했다. 예, 아직 주군께서 측실을 다 정하지 않으셔서 그랬습니다. 이런. 어깨를 부풀린 계백의 시선이 윤진과 백용문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시시성을 물려받은 윤진이나 아리타성 성주가 된 백용문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모두 내실에 소실들이 남은 것이다. 계백이 중신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각 거성의 성주가 내실도 관리한다.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화살 1대로 타카모리의 용장 아리아케를 죽이고 영지를 차지했다. 계백의 군사는 부상자만 10여 명뿐인 대승이다. 아리아케가 끌고 나온 200기마군 중 1백여 명이 전사, 1백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던 것이다. 사기가 오르면 1당백이 되고 사기가 떨어지면 1천명이 1명을 당해내지 못한다. 그날 밤, 쿠로기성의 내실을 차지한 계백이 어젯밤까지 아리아케의 소실이었던 다나에를 품고 자리에 누워있다. 자시(12시)가 넘은 시각이다. 다나에는 스물세 살, 아리아케가 가장 아끼는 소실이었는데 오늘 밤 수청을 들 처첩을 고르려고 위사장 하도리가 나섰을 때 자원을 했다. 누가 모시겠느냐? 하도리가 처첩을 모아놓고 물었을 때 내가 모십니다하고 바로 대답했다는 것이다. 아리아케는 본부인 외에 소실이 6명, 그 중 자식이 있는 처첩이 셋이었는데 저녁때 셋은 자식들을 데리고 떠나갔다. 그래서 남은 소실 넷 중 다나에가 자원한 것이다. 다나에는 손안에 쥔 작은 새 같은 몸이었지만 뜨겁고 사나웠다. 성(性)의 쾌락을 아는 터라 죽을 것처럼 비명을 지르면서 매달렸다. 쾌락의 끝이 죽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자세였다. 계백도 오랜만에 육욕의 만족감을 느낀 밤이었다. 가쁜 숨이 가라앉았을 때 계백의 팔에 안겨있던 다나에가 꿈틀거렸다. 땀에 배인 알몸이 미끈거렸고 따뜻했기 때문에 계백이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때 다나에가 더운 숨을 뱉으면서 말했다. 대감은 무신(武神)이 맞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 성안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이제는 몸에 익숙해져서 어려움이 덜어진 다나에가 볼을 계백의 가슴에 붙였다. 더운 숨결이 가슴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소문이 퍼져? 예, 대감이 무신이라는 소문입니다. 내가 신(神)이 아니라는 소문은 네 입에서 퍼져 나가겠다. 계백이 다나에의 젖가슴을 움켜쥐며 웃었다. 이렇게 인간으로 육정을 나누지 않았느냐? 아닙니다. 신이십니다. 다나에가 두 손으로 계백의 허리를 감아 안고 몸을 딱 붙였다. 인간이 아니신 것 같았습니다. 아니, 왜? 이런 쾌락을 주신 것은 대감이 처음입니다. 허어. 계백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네년이 이렇게 아리아케를 녹였느냐? 아닙니다. 아리아케는. 닥쳐라. 부드럽게 꾸짖은 계백이 다나에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알몸이 살아있는 낙지처럼 꿈틀거리며 몸을 붙여왔다. 대감은 무신이세요. 다시 숨이 가빠진 다나에가 허덕이며 말했다. 사흘 후의 한낮, 백제방으로 왜국의 섭정 소가 이루카와 그의 부친인 전(前) 섭정 소가 에미시의 행차가 들어왔다. 청에서 기다리던 백제방 방주이며 왜왕 죠오메이의 자문관인 왕자 풍이 둘을 맞는다. 풍의 격이 둘보다 높기 때문에 일어나지도 않는다. 앞자리에 나란히 앉은 둘이 인사를 나눈 후에 먼저 아비인 에미시가 입을 열었다. 전하, 이번에 장군 계백이 타카모리의 영지를 정벌했습니다. 외침을 일으켜 변란을 일으킨 죄값을 받는 것이니 이제 그 영지의 배분을 결정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래야지요. 선선히 머리를 끄덕인 풍이 둘을 번갈아 보았다. 지난번 말씀 나눈 대로 이와강 서쪽 땅을 소가 가문에서 가져가시지요. 계백에게 이미 그렇게 지시했습니다. 예, 그런데. 이루카가 풍을 보았다. 그곳에 2개의 성이 있습니다. 내 가신들이 들어가도 반항하지 않겠지요? 그것까지 확인을 받고 가려는 것이다.
오후 신시(4시) 무렵, 쿠로기(黑木) 성 동문 앞 1백보 거리에 긴 장대가 하나 꽂혔다. 20자(6m)가 넘는 대나무 장대다. 장대 위에 투구를 쓴 채로 아리아케의 머리가 꽂혔는데 눈 사이에 화살이 박힌 채다. 눈을 치켜뜬 아리아케는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딱 벌리고 있다. 놀란 표정 같기도 하다. 성벽에서는 아리아케의 얼굴까지 다 보였기 때문에 군사들의 시선이 모이지 않을 리가 없다. 군사들 사이에 낀 주민들도 보인다. 백제군은 5백보쯤 떨어진 거리에 정연하게 늘어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말은 옆에 세워놓아서 언제든지 출동할 준비는 되었다. 계백도 나무 걸상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갑옷을 입은 채다. 그때 옆에 선 윤진이 말했다. 장군, 성에서 누가 나옵니다. 윤진은 계백한테 장군이라고도 불렀다가 주위에 사람이 많으면 주군이라고도 부른다. 계백은 이곳 영주이며 윤진은 그의 신하가 된다. 계백은 어떻게 불러도 상관없다는 태도다. 머리를 든 계백이 성에서 나오는 3인의 기마인을 보았다. 앞장 선 기마군이 든 창에 백기가 달려져 있다. 사자다. 오래전부터 백기는 사자나 투항자의 표시가 되어있다. 윤진이 웃음 띤 얼굴로 계백에게 말했다. 노무라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윽고 기마인은 아리아케의 머리 밑을 지나 군사들의 안내를 받고 계백 앞에서, 말에서 내렸다. 앞장선 장수는 노무라다. 노무라가 계백의 다섯 걸음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핏발이 선 눈으로 계백을 보았다. 아리아케의 가신 노무라가 계백 영주님을 뵙습니다. 노무라는 52세, 대를 이어서 아리아케의 가신을 지내고 있다. 마른 체격, 그러나 붉은 기운이 도는 눈빛이 강하다. 노무라의 목소리가 이어서 울렸다. 영주께 아리아케 영지를 바치려고 왔습니다. 계백은 시선만 주었고 노무라가 다시 외친다. 지금 입성하시면 가신들을 모두 만나실 수 있습니다. 처분을 맡기겠습니다. 그때 계백이 말했다. 투항자는 살려주겠다. 장졸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소집할 때까지 해산해라. 해산하란 말씀입니까? 눈을 크게 뜬 노무라가 다시 물었다. 집으로 돌려보냅니까? 그렇다. 집에서 쉬도록. 내가 다시 부르면 새 영주를 모시려고 모이는 것이다. 예, 대감. 모두 감복할 것입니다. 이마를 땅바닥에 붙였다가 뗀 노무라가 다시 계백을 보았다. 대감, 가신들은 모두 청에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아리아케의 처첩, 자식들은 어떻게 합니까? 내가 처첩으로 삼겠다. 바로 대답한 계백이 어깨를 펴고 노무라를 보았다. 아리아케를 모신 것이 무슨 죄란 말이냐? 내가 다시 처첩으로 삼을 테니 그리 알라고 해라. 예, 대감. 당황한 노무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러면, 아리아케의 자식들은. 제 애비의 복수를 할까? 감히. 나하고 같은 내실에 살기 거북할 테니 떠날 사람은 떠나도록 해라. 예, 대감. 그때 계백이 윤진을 돌아보았다. 그대가 노무라를 따라가 수습하도록. 윤진이 기마군 1백기를 거느리고 먼저 노무라와 함께 쿠로기 성에 입성했다. 새 영주 계백을 맞을 준비를 시킨 것이다. 이제 타카모리의 거성까지의 모든 성을 장악했다. 앞으로 타카모리의 거성이 남아있었지만 하세가와는 이미 전 가신의 서약서를 써서 백용문에게 건네주었다. 타카모리의 영지 25만석이 평정된 것이다. 그것도 기마군 5백도 안 되는 병력으로 정벌했다. 계백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왜국은 새로운 땅이다. 새로운 백제가 이곳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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