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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동계면 구미마을에는 600년이 넘도록 한 곳을 지킨 남원 양씨의 종갓집이 있다. 1960년 구미초등학교가 설립되었을 때 학생 모두가 남원 양씨였을 정도로, 남원 양씨는 전라북도에서 중요한 가문의 하나이다. 국립전주박물관 역사실에는 남원 양씨의 보물이자 우리나라의 보물인 양수생 홍패(楊首生 紅牌)(보물 제725호)가 전시되어 있다. 600년의 세월을 간직한 양수생의 과거합격증인 양수생 홍패는 우리를 고려시대의 역사 현장으로 이끌고 간다. 양수생(楊首生)의 아버지 양이시(楊以時, 미상~1377년)는 1353년(공민왕 2)에 생원시에 장원, 1355년(공민왕 4)에 문과에 합격하며 가문을 번창시켰다. 그는 국자감, 집현전 등에서 활동하고 당시 석학인 이색(李穡, 1328~1396년)과 교유하는 등 학문과 문장에 뛰어난 관리였다. 양수생도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1376년(우왕 2)에 문과에 합격하여 집현전 제학으로 활동했다.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남원 양씨의 보물이 언제, 어떻게 고향이 전라북도로 내려오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양수생의 처 이씨 부인의 굳은 결심과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양수생이 과거에 합격한 지 3년 뒤인 1379년, 집안은 큰 슬픔에 잠기게 되었다. 아버지 양이시, 아들 양수생이 한 해에 모두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때 이씨 부인은 아들 양사보(楊思輔, 1377년~미상)를 임신하고 있었다. 친정 부모님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혼자된 딸이 안쓰러워 다른 집안에 시집갈 것을 권유했지만, 이씨 부인은 두 지아비를 섬길 수 없다며 시아버지와 남편의 과거 합격증인 홍패 2점과 족보를 가지고 남편의 고향 남원으로 내려왔다. 얼마 후 왜구 아지발도가 쳐들어와 이씨 부인은 아들 양사보를 데리고 순창으로 피난하여 터를 잡았고, 현재까지도 그 후손들이 머물고 있다. 남원 양씨는 고려의 수도에서 순창으로 터전을 옮겼지만 조선시대에 과거 합격자 30여 명을 배출하는 등 명문가로서의 면모를 유지했다. 이번 여름과 가을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전라북도의 보물 양수생 홍패를 만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간직한 순창 구미마을을 둘러보길 권한다. /이기현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흑색마연기법은 백제 한성기 토기 제작기술 중 대표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이 기법은 토기를 소성할 때 흑연을 이용하여 검은 색을 입히고 표면을 매끄럽게 하여 광택이 나게 한다. 일종의 위세품(威勢品)으로서 특정 계층만이 사용하면서 소유하고 있는 사람의 권위를 나타내 주는 토기로 알려져 있다. 이 토기는 고대 삼국 중 백제 지역에서 발달하였는데, 서울 석촌동 고분군에서 처음 발굴되면서 주목되었으며, 백제의 국가 성립 시점과 과정을 밝히는 열쇠로서 많이 연구되었다. 지금까지 경기 화성 석우리 먹실, 용인 신갈동, 강원도 화천 원천리, 충남 천안 용원리, 서산 해미 기지리, 공주 수촌리 등 백제 중앙의 입장에서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호남 지역의 경우에는 완주 상운리 무덤 유적과 용흥리 집자리 유적을 비롯하여 고창 만동, 함평 예덕리 만가촌 유적에서 확인된 사례가 있다. 완주 상운리와 용흥리에서는 흑색마연기법을 모방한 토기들이 일부 발견되었는데, 그 기종은 한성백제 중앙의 양식과는 다소 차이가 있으며, 마연기법의 수준도 다소 미흡한 편이다. 한편 상운리 유적 나지구 3호 분구 1호 나무널무덤에서 출토된 곧은 입 항아리는 어깨부분에 문양이 새겨진 것으로 볼 때 백제 중앙에서 보이는 토기와 형태와 기법이 매우 유사하다. 아마 상운리의 마한 사람들이 백제 중앙 지역에서 이와 같은 토기 제작 기술을 배우고 와서 만들었거나 직접 가지고 들여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다만 이 토기의 존재는 당시 상운리 마한 사람들과 백제 사람들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완주 지역의 흑색마연토기들은 국립전주박물관 특별전 오로지 오롯한 고을, 완주(6.18.~ 9.15.)에서 직접 만나볼 수 있다. *위세품: 소유한 사람의 권력과 경제력을 대변해주는 물건으로서, 삼국시대에는 금관, 금동제 신발, 장식된 둥근 고리 칼 등과 함께 중국제 청자, 흑색마연토기 등이 있다. /김왕국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문화재 지정 제도는 보존가치가 높은 문화재를 엄격한 규제를 통하여 항구적으로 보존하고자 하는 제도다. 또한 국립박물관은 문화재 기탁 제도를 통해, 박물관 전시 및 연구에 활용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개인 소장 지정문화재 혹은 지정문화재급 유물을 보관 관리하고 있다. 고령(高靈) 신씨(申氏) 종중(宗中)에서 전주박물관에 기탁한 십로계첩(十老契帖)(전북유형문화재 제142호)은 신말주(申末舟)(1429~1503)가 70세가 넘은 나이에 가까운 벗들과의 만남을 기록한 그림이다. 신말주는 역사 속에서 지조 높은 선비이자 은사(恩師)의 모습으로 부각된다. 26세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1456년(세조2년)에 수양대군이 조카였던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르자 이에 불만을 품고 벼슬에서 물러나 순창으로 낙향, 자신의 호를 딴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두 임금을 섬김 수 없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키면서 은거생활을 했다. 1476년, 47세때 전주 부윤으로 일정 기간 관직에 몸담았으나, 말년에는 다시 은거를 하였으니, 대부분의 생애를 관직과 상관없는 처사處士로 보냈다. 말년에 은거하던 중 신말주가 70이 넘은 나이에 이윤철(李允哲), 안정(安正) 등 가까운 벗들과 계(契)를 맺고 십로계(十老契)라 이름하고, 10개의 첩(帖)을 만들어 각각 1개씩 나누어 가졌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십로계첩이다. 10명은 생년월일 순으로 서열을 메기고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돌아가면서 모임을 주관하였다. 모임을 여는 순서가 한 바퀴 돌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계첩에는 10명의 인물을 각각 채색을 곁들이지 않고 선묘(線描)만으로 묘사하여 그린 후, 각 개인의 생활과 인격, 사상 등을 함께 기록하였다. 이후 18세기에 김홍도가 모사한 십로도상첩(十老圖像帖)(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이 전하여 흥미로운 비교가 된다. /민길홍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동그랗고 앙증맞은 청자 합이다. 합은 뚜껑과 몸체가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기종을 말하는 것으로 무언가를 담아 보관했던 용도로 쓰였다. 손바닥 보다 작은 이 합은 고려시대 여인들이 화장용품을 담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단연 뚜껑에 피어있는 검고 하얀 꽃이다. 언뜻 흑백의 향연을 대표하는 상감象嵌청자 같지만 자세히 보면 상감기법과는 전혀 다르다. 기면을 파서 흙을 넣고 깎아 무늬를 나타내는 상감과는 달리 이 청자는 기면 위에 그저 검토 흰 안료를 붓에 찍어 그렸을 뿐이다. 그래서 자유롭고 경쾌하다. 이러한 종류의 청자를 철화청자, 또 이처럼 흰색 안료까지 베풀어진 청자를 철백화청자라고 한다. 철화청자는 산화철(Fe2O3)이 포함된 흙을 물에 풀어 만든 안료로 문양을 그린 뒤 유약을 발라 구운 청자를 말한다. 즉 유약 아래 안료가 있는 유하채釉下彩 자기이다. 철화안료로 도자기 표면에 무늬를 그린 경우는 철로 그렸다고 해서 철화鐵畫라고 하며 일부 또는 전체에 칠해버린 경우는 철채鐵彩라고 한다. 반면 흰 백토를 발라 유약을 입힌 후 굽게 되면 하얗게 무늬가 형성되는데 이는 하얗게 그렸다고 하여 백화白畫청자라고 한다. 백화기법은 철화기법과 함께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철백화청자라고 한다. 백화기법은 음각양각상감 기법으로 표현한 청자의 보조 무늬로 선이나 점을 나타내는 데 이용하거나, 철화기법과 함께 중심이 되는 무늬 전체를 표현하는 데 쓰인다. 이러한 철화청자 또는 철백화청자는 맑고 푸른빛을 띠는 비색청자나 푸르지만 회색빛이 도는 상감청자에 비해서 짙은 색을 띤 녹갈색, 녹청색, 황갈색 계열이 주를 이룬다. 철화청자 무늬는 사물의 특징을 간결하게 묘사한 예가 많아 섬세한 곡선과 비취색 등을 특징으로 꼽는 상형청자나 상감청자와는 다른 미감을 보인다. 이 작품 역시 간결하면서도 활기찬 국화꽃을 표현하였다. 국화의 특징인 여러장의 꽃잎은 백토로 도톰하게 올렸고 세 개로 갈라진 잎은 철화안료로 검게 그렸다. 또한 측면에는 자유분방한 필치가 느껴지는 초화문을 넣었다. 철은 구하기 쉽고 전국 어디서든 채취가 가능한 안료였다. 따라서 고려청자의 꾸미는 방법으로 자주 애용되었다. 동시에 흑백이 대조되는 색이 드러나기에 어두운 조질粗質의 바탕흙에도 표현력이 좋아 상대적으로 A급의 왕실, 귀족 수요의 비색청자와는 달리 더욱 보편적으로 생산되었다. 전라북도 부안 유천리, 진서리 가마터 등에서도 이러한 철화청자 또는 철백화청자를 제작하였으며 12-13세기 청자를 생산한 가마터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상감청자처럼 정교한 맛은 떨어지지만 특유의 자유분방한 필치가 돋보여 고려청자의 새로운 미감을 제시해주는 작품이다. 철화로 피운 검은 꽃을 느껴보기 바란다. /서유리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어제수덕전편>은 1771년 영조(英祖)가 전주에 조경묘(肇慶廟)를 건립하고 그 경위와 감회를 적은 것이다. 조경묘는 태조 이성계의 시조인 사공(司空) 이한(李翰)의 사당이다. 유교 예법 상 국가를 개창한 군주를 넘어 가계의 시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즉, 태조 이성계를 넘어 전주 이씨의 시조인 사공 이한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당시의 예법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영조는 여러 논의 끝에 전주에 조경묘를 건립하였고, 관념으로만 존재하던 사공 이한부터 태조 이성계 이전까지의 역사를 조선 왕실의 역사로 편입시켰다. 다음은 <어제수덕전편>의 일부이다. 옛날 후직이 천 여 년 전에 먼저 덕을 심었으니[樹德] 문왕이 비로소 천명을 받았으며, 우리 조정의 시조(사공 이한)가 큰 덕과 깊은 자비로 나라를 세울[洪業] 터를 놓으시고, 여러 임금들[列聖]께서 계승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니 아름답도다! 오호라! 400년 해동 조선이 (선조의)덕을 쌓고 어짊을 축적함(積德累仁)에서 비롯하였음을 이 조경묘를 통해서 알 수 있도다. 영조는 시조 이한을 주나라 시조 후직과 동등하게 취급함으로써 왕실의 역사를 끌어올리고 있다. 또 400여 년의 조선 역사가 시조 이한으로부터 오랫동안 덕을 쌓고 어짊을 축적한 결과임을 보여주는 것이 조경묘라고 적고 있다. 동시에 영조는 조경묘를 건립함으로써 왕실의 시조 공경을 모범으로 삼아 신하들이 왕실에 충성하기를 바랐다. 즉, 영조에게 조경묘는 유구한 조선 왕실의 역사를 상징함과 동시에 신하들이 본받아야 할 귀감이었던 것이다. <어제수덕전편>은 본래 정치의 요체가 덕을 세움[樹德]에 있음을 주장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구체적인 목적은 조경묘 건립의 의미를 밝힘에 있었다. <어제수덕전편>에서는 무엇보다 왕실을 존숭(尊崇)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시대적 배경과 동시에 전주가 왕실의 풍패지향(豊沛之鄕)으로써 주목되는 한 장면을 엿볼 수 있다. /박혜인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완주 상운리 유적은 익산-장수간 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발견되었으며, 장장 4년여에 걸쳐 전북대학교박물관에서 조사한 대규모 원삼국시대*~삼국시대 마한계 무덤 유적이다. 300여 점의 토기와 500점이 넘는 철기, 마한사람들의 특징인 옥류가 6천여 점이 넘게 출토되어 당시 상운리 사람들의 위세를 짐작케 한다. 철은 고대사회에서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다른 집단과의 전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중요한 원자재였다. 철을 장악한다는 것은 권력과 부를 단숨에 거머쥘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다. 철의 중요성을 대변하듯 제철능력은 오래전부터 고분의 벽화나 토기의 표면에 신의 능력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의 진시황(秦始皇, B.C.259~B.C.210)이나 한(漢) 무제(武帝, B.C.156~B.C.87)는 철을 국가차원에서 관리하는 법을 만들기도 하였다. 상운리 유적에서는 이러한 철기들이 동시대의 다른 유적들보다 집중적으로 확인되었다. 길이가 1m가 넘는 대형의 둥근 고리칼, 철검, 철창, 화살촉, 작은 손칼, 도끼, 낫, 덩이쇠(철기를 만드는 중간소재) 등 당시 철로 만들 수 있는 거의 모든 물건들이 발견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철기를 만드는 도구들인 단야구가 세트로 확인된 것이 큰 특징이다. 단야구는 망치, 집게, 줄, 모루 등 철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필요한 공구들을 일컫는다. 망치와 집게는 기본으로 구성되고 나머지 도구들이 추가되는 양상이다. 총 20세트의 단야구가 확인되었는데, 한반도에서 단일 유적 출토품으로는 가장 높은 밀집도를 보인다. 아직까지는 상운리 유적에서 제련로 등 명확한 철 생산시설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 고대사회에서 국가형성의 기반이 되는 고도의 철기 제작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동시기 다른 유적들과 비교하였을 때 월등히 높은 철기들의 출토량과 다종다양한 단야구들은 상운리 사람들이 철제 도구들의 생산과 소비시스템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상운리 사람들의 단야기술은 상운리 집단이 성장하는 원동력이자 전북지역 마한사회의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원삼국시대: 우리나라 고대 삼국이 성립되기 이전 원초적인 국가의 모습이 나타나던 때. 기원전 1세기~기원후 3세기 정도를 일컫는다. /김왕국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신구법천문도(新舊法天文圖)는 하늘의 별자리를 묘사한 천문도이다. 작품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동양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된 천문도(옛 천문도)와 서양에서 새롭게 유입된 천문도(새로운 천문도)를 함께 배치하여 비교하고 있다. 서양의 천문도는 조선 초기의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에 비해서 새로운 지식을 담고 있기에 신법천문도라 부른다. 한국의 옛 그림이나 책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내용이 진행된다. 따라서 본문의 그림은 오른쪽 상단에서 시작하여 왼쪽 하단에서 끝나게 된다. 천문도의 오른쪽에는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한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수록하였다. 조선시대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크게 세 가지 판본이 존재한다. 태조 석각본, 선조 목판본, 숙종 복각본과 그 탁본들이다. 이 천문도에 수록된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숙종 석각 또는 그 탁본을 기초로 교정을 하여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천문도의 상단에는 황도남북양총도설이란 기록이 있다. 이 글에서는 이 천문도에 사용된 좌표계와 좌표 읽는 방법, 별의 밝기, 은하수가 수많은 별들이 모여서 이루어졌다는 점, 천체 망원경으로 관측한 해, 달, 행성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글의 맨 끝에는 옹정(雍正) 원년(元年) 세차(歲次) 계묘(癸卯)에 극서(極西)에서 온 대진현(戴進賢)이 방법을 수립하고 리백명(利白明)이 새겼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1723년 서쪽 끝의 지역(유럽)에서 온 독일 선교사 쾨글러(16801746)가 작성하고 페르디난도 모기(리백명)가 인쇄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문도의 왼쪽에는 두 개의 원형으로 된 천문도가 있는데, 동양의 전통적인 방법과는 다르게 황도(黃道, 지구가 태양을 도는 큰 궤도)를 중심으로 북쪽의 황도북성도, 남쪽의 지도인 황도남성도를 표현하였다. 이 지도는 황도좌표계의 평사도법(stereographic projection) 기법으로 그려낸 것이다. 가장 왼쪽에는 태양, 달, 진성(鎭星, 토성), 세성(歲星, 목성), 형혹(熒惑, 화성), 태백(太白, 금성), 진성(辰星, 수성)이 그려져 있다. 천체가 배열된 순서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지만 동양의 오행설에 따르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각 천체는 망원경으로 보았을 때의 특징을 묘사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천문도는 중국에 들어와 있던 서양 신부인 아담 샬(Adam Schall, 1591~1666)과 쾨글러가 제작한 천문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물 1318호로 지정된 신구법천문도(국립민속박물관 소장)와는 거의 동일한 형태의 천문도로 여겨진다. 18세기 초에 관상감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연구된 바 있는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지도는 현재 영국과 일본에도 동일한 천문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 서양과 한국의 천문지식을 함께 살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천문도는 높은 사료적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평가된다. /정대영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장신구를 사용했을까? 자신을 꾸미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아래 현대 사람들처럼은 아니더라도 다채로운 장신구를 사용해서 자신의 몸을 치장했을 것이다. 지금은 다이아몬드, 비취, 에메랄드, 금 등이 가장 값비싼 귀금속으로 인식되지만 1600년전 한반도의 마한 사람들은 금과 은보다도 옥을 가장 좋은 장신구 재료로 생각하였다. <삼국지(三國志)> 위서동이전(魏書東夷傳)에는 마한사람들은 금이나 은보다 옥을 귀히 여겨 몸을 꾸미는데 다양하게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증명하듯 마한의 무덤에서는 옥으로 만든 다양한 장신구들이 나타나고 있다. 마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선호한 장신구였음을 의미한다. 마한계 무덤에서 발견되는 옥은 수정이나 마노, 벽옥, 천하석, 탄화목, 뼈, 흙 등 각종 천연재료와 인공적 재료인 유리로 제작된 것들로 나뉜다. 고고학 분야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통칭하여 옥(玉)으로 부르고 있으며, 형태에 따라 곡옥(曲玉), 관옥(管玉), 조옥(棗玉), 다면옥(多面玉), 환옥(環玉丸玉)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옥 장신구는 마한의 이른 시기로 평가되는 초기철기시대부터 발견된다. 이 시기에는 청동기시대부터 이어져 온 장식문화를 유지하면서 신소재로 제작된 옥 장신구가 새롭게 등장하는데, 그 소재가 바로 유리이다. 철기와 함께 당시 최첨단 기술의 결과물인 유리는 부여 합송리, 당진 소소리, 장수 남양리 등에서 대부분 관옥의 형태로 발견된다. 초기철기시대 옥 문화는 원삼국시대 마한사람들에 의해 꽃을 피운다. 이 시기 옥 장신구는 특정 형태나 색상에 국한되지 않고 각양각색, 형형색색의 다채로운 양상으로 발견되면서 옥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전북지역 최대의 마한 분구묘 유적인 완주 상운리 유적에서는 6000여점에 이르는 옥 장신구가 수습되었다. 마한사회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재료와 형태의 옥이 발견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양은 조금 투박하지만 그 영롱한 빛깔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김왕국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국립전주박물관 역사실에 들어서게 되면 거대한 비석의 탁본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높이 267cm, 폭 130cm에 이르는 탁본의 윗부분에는 한자 전서(篆書)체로 황산대첩지비(荒山大捷之碑)라는 비의 제목이 크게 쓰여 있다. 황산대첩은 고려 말 1380년 이성계가 장군이던 시절 전라도 남원 운봉의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친 전투를 말한다. 그렇다면 이 탁본에 담긴 의의와 역사는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고려 말 한반도는 외부의 침략에 의해 혼란에 빠져 있었다. 북쪽에서는 홍건적 세력이 남하하여 개경에 이르렀으며, 남쪽에서는 왜구가 남부 내륙을 비롯하여 해안을 따라 약탈을 자행하던 상황이었다. 이 두 난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면서 국가를 안정시킨 인물이 바로 이성계였다. 개경탈환에 큰 공을 세운 이성계는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한 그를 국가적인 영웅으로 이끈 전투가 바로 남원 운봉에서 있었던 황산대첩이다. 지리산 자락까지 내륙을 침략했던 왜구의 세력은 이 전투를 기점으로 약화되었다. 황산대첩을 계기로 이성계는 조선 건국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전북 지역에 전하는 이성계 설화의 시초가 되기도 하였다. 이 승리를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선조 10년(1577)에 황산대첩비가 세워졌다. 당시의 승전 사실을 길이 전하기 위하여 호조판서 김귀영이 글을 짓고 송인이 글씨를 써서 제작되었다. 건립 당시에는 비각(碑閣) 등의 다른 건물도 지어 비를 지키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비터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1945년 1월에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따라 소방대를 동원하여 비를 폭파하고 비문의 글자를 긁어 문화재를 훼손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광복 이후 사적으로 지정된 뒤 비석을 새롭게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다. 파괴된 비석의 조각은 현재 파비각(破碑閣)을 마련하여 보관하고 있다. 국립전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황산대첩비 탁본>은 비가 파괴되기 전의 탁본으로 옛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정대영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도자기는 과거 삶의 복원에 많은 힌트를 준다. 도자기를 생산했던 가마터는 당시 생산 환경과 입지를, 무덤에서 나온 도자기는 계층별 부장문화와 소비경향을, 또 바다에서 나온 것들은 생산에서 소비까지의 유통과정을 보여준다. 최근 군산, 태안 등 서남해안에 과거 도자기를 선적하여 항해했던 침몰선들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한두점이 아닌 수천에서 수 만개의 그릇들을 선적하여 어딘가로 이동하던 중 천재지변 등의 이유로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그 사정은 안타깝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중요한 과거의 정보들을 주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조운제도가 체계적으로 운영되었다. 주로 선박을 이용한 수운이 활발히 활용되었고 운영주체는 국가였다. 해로는 운반시설이 발달되지 않았던 과거에는 중요한 운송로였으며, 물산이 풍부한 서남해안으로부터 개경으로 향하는 루트가 중심이 되었다. 청자의 중심 생산지인 해남, 강진, 부안 등 전라도 지역에서 만든 그릇들은 바로 이 방법으로 소비처로 향하였다.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유적은 고군산도에 위치한 한 섬에서 조개잡이 어부가 작업 중 그물에 청자들이 걸려나온 것이 조사 계기가 되었다. 공식 발굴을 통해 팔천점이 넘는 많은 청자들이 세상에 나왔다. 발과 접시, 기름병, 작은 합 등 일상생활에서 쓰는 기종들이 주를 이루며, 이들은 짙은 녹색 및 황녹색을 띤다. 접시 중에는 꽃모양으로 만든 화형花形접시가 섞여있으며, 상감이나 철화 등 청자를 장식하는 다양한 시문기법들은 보이지 않는다. 이 청자들은 12세기 해남지역에서 만든 청자들과 유사한 조형적 특징을 보여 이곳에서 만든 후 영암에 설치되었던 장흥창長興倉에서 선적되어 서해연안 항로를 따라 수도인 개경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다 군산 부근 해역에서 항로를 이탈하여 침몰한 것으로 추정된다. 십이동파도 유적에서는 청자뿐만 아니라 도기 등 항해에 필요한 각종 물품들도 발견되었고 그대로 가라앉아 배의 실체도 드러났다. 특히 청자를 차곡차곡 포개어 포장해서 선적하는 효율적인 방법까지 밝혀졌다. 하나의 침몰된 조운선이지만 도자기를 배에 싣는 방법, 선적 상태, 배 위의 생활 등 고려인의 삶의 수수께끼를 풀어주었다. 즉 십이동파도 유적에서 출수된 다양한 유물들은 고려의 경제, 사회, 문화를 살필 수 있는 하나의 문화코드인 셈이다. /서유리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완주 갈동을 비롯한 전북혁신도시 개발 구역 내에서는 우리나라 초기철기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1세기)의 움무덤들이 100기가 넘게 발견되었다. 우리나라 중서부 지역에서 발견된 것으로는 가장 많은 수이다. 갈동 유적에서는 출토 위치가 확실한 한국식 동검과 청동 꺾창 거푸집이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며, 신풍 유적에서는 간두령 한 쌍이 최초로 동시에 출토되기도 하였다. 이외에 또 주목되는 것이 다양한 잔무늬청동거울이다. 청동제 잔무늬거울은 한국식 동검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크기는 보통 직경 20cm 내외이며, 둥근 거울 뒷면의 중앙에 2~3개의 고리가 달려 있고, 나머지 공간에 여러 선으로 무늬를 새긴 것이 특징이다. 정교한 무늬를 새기기 위해 고운 점토로 만든 거푸집을 만들어 세밀한 원과 선으로 공간을 나누고 내부에 녹인 청동을 부었다. 잔무늬거울의 뒷면은 삼각형 또는 사각형, 원형, 사선무늬 등을 이용하여 다양한 무늬를 새겼다. 대부분의 잔무늬거울은 서로 다른 크기의 동심원을 사용하여 크게 2~3등분으로 되어 있으며, 그 안에는 13,000여개가 넘는 선이 새겨져 있다. 무늬가 있는 면에 달려 있는 2~3개의 고리에는 구멍에 끈을 넣어 사용을 했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기하학적인 무늬는 마치 20C 초 네덜란드 추상화의 대가인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의 작품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햇무리의 모습을 무늬로 새긴 잔무늬거울은 신을 부르는 도구인 청동 방울, 정치적 권위를 보여주는 한국식 동검과 함께 주로 무덤에서 확인된다. 이중에서는 일부러 깨뜨려 넣은 것도 있어 당시 사람들의 매장 의례도 살펴볼 수 있다. 현재 전북지역에서는 지금까지 잔무늬거울 20여점이 발견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수가 확인된 곳이다. 또한 완주 갈동 유적 5호와 7호 움무덤에서 출토된 잔무늬거울은 곧 보물 지정이 예고되어 있다. 잔무늬거울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던 전북지역 초기철기시대 사람들의 금속학적 기술과 디자인적 감각은 현대와 비교해보아도 뒤처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어떤 부분에서는 더욱 뛰어난 면을 보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왕국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고려시대의 도자공예라고 하면 우리는 대부분 청자를 떠올린다.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다양한 청자가 생산되었고, 고려청자는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고려시대 공예를 대표하며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도 백자가 생산되었다. 한반도에서 자기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시기에 축조된 벽돌가마에서 백자를 생산하였다는 사실이 고고학 조사에서 밝혀졌다. 도자 제작기술이 중국에서 고려로 들어오면서 개경을 중심으로 중부 서해안에 초기 가마들이 10세기 후반경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중국 저장성(浙江省) 일대의 가마와 형태가 유사한 가마로 고려 초기에 축조되었다. 청자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백자가 생산되었고, 특히 경기도 용인 서리 가마터는 청자에서 백자로 전향했다는 사실이 층위로 밝혀졌다. 퇴적층 가장 아래에는 초기에 제작된 청자들이, 그 위층에서는 백자가 주로 발견되어 처음에 청자를 제작하다가 차츰 백자를 제작하는 가마터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대표적 고려청자 생산지인 부안이나 강진 등의 가마터에서도 백자가 발견되어 고려시대 청자의 전성기 중심 속에서 백자가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다만 고려 사람들의 주된 수요 대상이 청자였기 때문에 백자는 적은 양만이 생산되었고 따라서 완형으로 전하는 예도 드물다.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자화(磁化)가 이루어지는 조선시대 백자와는 달리 고려시대 백자의 태토는 2차 점토이다. 따라서 고려백자는 다소 연질(軟質)로 아백색(牙白色)을 띠며 부드러운 느낌을 자아낸다. 이 매병은 전형적인 고려청자의 매병처럼 어깨가 풍만하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홀쭉해지는 형태이다. 다만 하얗게 빛나고 있어 백자임을 알 수 있다. 몸체에 모란당초무늬를 비스듬히 깎아서 무늬를 입체적으로 표현하였다. 모란에는 화맥(花脈)과 엽맥(葉脈)을 새겨 세밀함을 더하였다. 아랫부분에는 양각 연판문(蓮瓣文) 띠와 음각 번개무늬(雷文) 띠가 2단을 이루고 있다. 유약이 박락된 부분이 있지만 완벽한 형태의 백자 매병에 세밀한 무늬까지 새겨진 예는 거의 없어 주목된다. 청자의 형태와 문양을 본떠 만든 소중한 고려시대 백자 매병인 것이다. 이러한 백자들은 고려시대 도자문화를 더욱 다채롭게 해주고 있다. /서유리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었던 물건이었을까? 제일 큰 것은 약 7.7cm정도의 손바닥만 한 크기로 아주 작아, 자세히 들여다봐야 부처와 보살들의 표정이 보인다. 그러나 작은 네 개의 판불에는 아주 큰 세계가 담겨 있다. 이 네 개의 판불은 1980년 김제 대목리(大木里)의 한 밭에서 출토되었다. 여래좌상(如來坐像)과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을 각각 본존으로 한 삼존상(三尊像), 4명의 보살, 승려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래삼존상은 협시보살까지 모두 좌상(坐像)으로 표현된 매우 드문 예이다. 반가사유상은 좌우에 승려상이 배치된 특이한 형식이다. 부처와 보살의 얼굴 묘사 등 표현 양식으로 볼 때 백제 말기인 7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반가사유상은 중국에서는 크게 유행했지만 이러한 도상배치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등장하는 독특한 도상으로,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형식이다. 이것으로 보아 이 판불은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도상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불교는 삼국시대에 중요한 국가적 통치 이념으로 도입되었으며, 특히 삼국 중에서도 백제는 동아시아 불교문화 교류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침류왕(枕流王) 1년(384)에 동진(東晉)으로부터 전해진 불교문화는 백제에 이르러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된다. 그 배경에는 당시 백제가 선진문물을 수입했던 중국에서 불교문화가 대대적으로 융성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상들은 기존에는 압출불(押出佛, 동판을 대고 두드려 만든 부처상)을 제작하기 위한 청동 원형 틀로 알려져 있었으나, 2006년 국립전주박물관에서 과학적 분석을 한 결과 청동 원형 틀이 아니라 금동 부처상임이 밝혀졌다. 이 판불들은 원래의 봉안 상태를 알 수 없으나, 비슷한 예로 일본 호류지(法隆寺) 금당의 나무 천개를 장식했던 것처럼 소형 감실 내부를 장식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김혜영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원
2002년 6월, 호남문화재연구원 한수영 실장은 그해 봄에 진행한 완주군 반교리 일대 지표조사 보고서 작성 마감을 앞두고 다시 한 번 현장을 찾았다. 그는 갈동 마을 저수지인 갈동제 남동쪽 호남고속도로 건너편에 위치한 나지막한 구릉인 이곳을 시굴조사 대상 지역으로 포함시켜야 할지 고민이었다. 조사 당시 이곳은 오래전에 성토(盛土)되어 지표상에는 별다른 유물이 채집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 실장은 이곳이 완만한 구릉지대라는 지형적 특성과 인근 완주 반교리, 전주 여의동 등지에서 청동기시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지표조사 보고서에 이곳을 시굴조사 대상 지역으로 포함시켰다. 그러나 시굴조사에서도 구릉 정상부에 초기철기시대의 도랑 흔적만 확인되었을 뿐, 구릉 사면은 1~1.5m 정도로 최근의 흙이 쌓여 있어 별다른 유구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한 실장은 전면 발굴조사 여부를 두고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이번에도 그는 다소 무모해 보일지라도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성토된 흙을 전면 제거하여 발굴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흙을 거둬내니 움무덤 4기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움무덤 내부를 조사하던 조사단은 전혀 예상치 못한 유물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식동검의 거푸집이었다. 금속을 녹여 부어 도구를 만들기 위한 거푸집은 한 사회가 금속기를 주조하였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고고학 증거로, 그 사회의 생산력 수준과 사회발전단계 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당시까지 한국식동검 거푸집은 평양 장천리, 경기 용인 초부리, 영암에서 발견 수습된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갈동 유적 초기철기시대 움무덤 안에서 완벽한 형태의 거푸집이 최초로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학술적 의미가 매우 크다. 유적의 중요성을 인식한 문화재청은 갈동 유적의 현지 보존을 결정하였고, 이 거푸집은 29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 하였다. 한 연구자의 직감과 신념이 학술적 가치가 큰 유적과 유물을 세상에 선보이게 하였다. 양성혁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관
고산자 김정호(1804~1866 추정)와 그의 대표작인 <대동여지도>는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스물 두 개의 책으로 나누어져 제작된 이 지도는 조선시대 지도학의 금자탑과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다 펼치게 되면 높이가 어른 세 명의 키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지도는 미적인 요소와 규모에서도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한 발자국 깊게 들어가게 되면 여전히 대동여지도에는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많이 남아있다. 현재 대동여지도는 목판본과 손으로 그린 필사본 등을 합하면 국내외에 25점 가량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작 당시부터 품이 많이 가는 작업일 것이기에, 대부분 남아있는 자료들은 주요 정부 인사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95년, 대동여지도를 만들 때 사용된 목판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확인되면서 제작과정에 대한 여러 의문점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어떠한 과정을 통해 인쇄하여 책이 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는데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된 낱장 대동여지도는 이러한 궁금증을 해결해 줄 실마리가 되었다. 총 48매가 남아있는 이 지도는 1861년경에 인쇄된 초기본에 해당된다. 어떠한 목적으로 이 지도가 완성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듬어지지 않은 종이의 결이 그대로 남아있으며, 인쇄과정에서 번지거나 실수한 부분도 확인이 되고 있다. 남아있는 낱장은 전라도, 경상도, 함경도의 대부분과 평안도, 강원도의 일부이다. 각 지도는 인쇄된 후 제단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목판의 외곽에 해당하는 검은 면의 부분이 상당수 그대로 남아있다. 대동여지도를 <토지>와 같은 대하소설로 생각한다면, 이 낱장들은 여러 차례 퇴고를 진행한 초고와도 같은 느낌을 주게 된다. 김정호라는 인물이 어떻게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였는지는 역사 기록이 부족하기에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자료의 등장은 여러 시행착오 끝에 대동여지도가 탄생하였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한다. /정대영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전북 동부 산악지역 금강 상류에 용담호라는 커다란 호수가 있다. 이 호수는 1992년 착공하여 2001년에 완공된 용담댐 건설로 인해 생긴 인공호수이다. 저수량으로 본다면 소양호, 충주호, 대청호, 안동호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규모이다. 지금은 호수 위를 달리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로 각광받고 있지만, 그 깊은 물속에는 옛 사람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혀있었다. 일정 면적의 건설공사를 할 때는 법적으로 고고학 조사를 필수적으로 하도록 되어 있다. 진안군 6개 읍면, 68개 마을이 수몰된 용담댐 건설도 당연히 조사 대상이었다. 1995~2001년 모두 4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조사에서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여러 시대에 걸친 다양한 유적이 밝혀졌다. 특히 정천면 갈머리 마을과 진그늘 마을에서는 전북 동부 산악지역 최초로 신석기시대 집자리가 확인되었다. 이 두 유적에서는 완전한 형태로 복원 가능한 토기 몇 점이 수습되었다. 이것들은 영남 내륙지역 신석기시대 유물과 관련 있는 것으로, 진안고원 일대가 선사시대부터 중요한 내륙 교통로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으로 제시된 토기는 갈머리 유적에서 확인된 빗살무늬토기이다. 고고학에 있어 토기는 문화 흐름이나 집단 차이를 밝히는 데 주요한 도구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빗살무늬토기의 다양한 무늬는 기하학적 도형을 형성하면서 그 자체로도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바닥이 뾰족하여 기능적으로 불안해 보이지만 밑으로 내려가면서 체감되는 간결한 V자 형태는 비례의 극적인 대비를 이루고 있다. 무늬구성을 살펴보면, 맨 위에는 선으로 이루어진 세모꼴 무늬가 연속적으로 둘러져 있고, 아래로는 방향을 달리한 비스듬한 선들이 가로방향으로 연속적으로 채워져 있다. 한편 맨 위에 새겨진 세모꼴 무늬는 크기가 거의 일정하다. 이는 신석기인이 토기를 만들기 전 미리 전체 토기 둘레를 가늠한 뒤 일정한 크기로 무늬를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신석기인의 뛰어난 공간구성능력과 미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양성혁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관
유약을 입혀 높은 온도에서 구운 자기는 최상의 기술로 완성되는 섬세한 예술품이다. 고려는 이러한 자기를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제작했으며 이는 도자기 역사에서 의미가 크다. 찬란한 공예품을 탄생시키고 향유했던 고려는 청자를 개발하고 발전시켰다. 고려 건국 이후, 선종의 유행, 차의 재배와 차를 마시는 풍습, 그리고 그 차를 담아 마시는 도구인 완의 지속적인 수요는 중국산 자기 대신 고려에서 자체 제작의 동기를 부여했다. 고려에서 완을 중심으로 청자의 제작이 시작된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차 문화의 확산과 발전으로 다완 외에 잔, 잔탁, 차를 보관하는 합, 물을 끓이거나 따르는 주자, 찻잎을 가는 다연, 찌꺼기를 버렸던 타호, 차 숟가락, 음식을 놓았던 방형대 등이 제작됐다. 술 또는 차를 마시는 공간을 장식하였던 꽃병과 분위기를 돋우는 악기, 탁자와 의자까지 청자들은 실로 다양하다. 오늘날 한국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지닌 고려청자는 전라북도 부안, 전라남도 강진을 중심으로 대량 생산됐다. 이 작품은 완과 발, 잔 등의 일상기명과는 달리 독특한 모습을 뽐낸다. 높이 35cm되는 소담한 청자 의자로 윗면은 편평한 편이며 배가 불룩하여 안정감을 주는 구조이다. 몸체 전면을 겹쳐있는 고리무늬로 투각했으며, 넝쿨무늬가 새겨진 장식을 윗부분에 투각했다. 투각기법은 기면을 뚫기 때문에 번조 시 잘 터져버리는 단점이 있다. 이처럼 큰 투각의 청자 의자를 만든 것은 고려인들의 뛰어난 제작기술 덕분이다. 전체적으로 화려한 장식성이 돋보이며, 고리무늬 같은 경우 고려시대 목가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요나라 고분벽화 등에서 나타나는 도상에서 볼 수 있듯이 고려시대 차나 술을 마시는 향유 공간에서도 청자 의자를 놓고 앉아 썼을 것이다. 청자로 의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고려인들의 화려했던 생활을 짐작케 해주는 귀중한 예로 이 의자에 앉아 한가로이 음료를 즐기며 바둑을 두는 등 고려 귀족들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부안 유천리 가마터에서 이처럼 두텁고 투각된 청자 의자 편들이 출토된 바 있으며, 따라서 이 청자도 부안 유천리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유리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 1729년~1791년)은 고창 출신의 학자이다. 그에 대한 설명에는 일반적으로 음운학자라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자모변(字母辨)>, <화음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과 같은 저술이 후대 국어학자들에게 크게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될수록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대학자이자 백과사전식 연구를 했던 인물임이 드러나고 있다. 관직을 역임하며 서울에서 머물기도 했던 그는 평생에 걸쳐 자신의 삶을 일기로 남긴 바 있다. <이재난고(頤齋亂藁)>라는 이 책은 한문 초서로 쓰여 있어 해독이 쉽지 않았으나 한문으로 정서가 되어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 책에는 방대한 분량답게 18세기 지성인이 보고, 듣고, 느낀 여러 일들의 기록이 있으며, 공부 노트이자 자아성찰의 공간이기도 하다. 황윤석은 음운학분야 뿐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야 전 분야에 걸쳐 관심을 나타내었고 특히 천문학과 수학, 지리학에 큰 관심을 보였다. 지금을 따지면 이공계 학자였던 셈이다. 일기를 살펴보면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와 수학자를 찾아다니며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그가 저술한 이과 관련 백과사전이 바로 <이수신편(理藪新編)>이다. 제목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이 책에는 물리학, 수학을 비롯한 이학의 총체가 담겨져 있다. 천문학 분야에는 천문, 역법 등 동서고금의 여러 학설이 종합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는 중국에서 전래된 서양 선교사들의 책을 접하였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켜 나갔다. 수학 분야에서는 전통적인 고전 산법을 3권에 걸쳐 상세히 다루기도 하였다. 또한 음운학, 성운학, 언어철학과 관련된 글들도 수록되어 황윤석의 방대하고 깊이 있는 학문세계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정대영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도 관청의 중재 혹은 도움이 필요한 경우, 공공기관 민원 절차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일이 빈번하였으니, 문서의 형식을 갖추어 민원의 내용을 올리고 담당 직원이 처분을 내린 결과가 적혀 있는 문서를 소지(所志)라고 한다.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박영란(朴英蘭, 16세기)의 충절을 추천하는 문서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이 문서에는 좀 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몇백 년이 지난 19세기 어느 날, 지역 유림들 21명이 예전 우리 지역에 충절로 뛰어난 인물이 있는데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면서 연대 서명하여 순찰사(巡察使)에게 그의 충절을 추천했던 연명첩(聯名帖)이기 때문이다. 박영란은 김제군에서 훈련원(訓鍊院) 주부(主簿)를 지낸 인물이었다. 문서의 내용에 따르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 공도 박영란이 하찮은 일이라도 애를 쓰고 절의에 죽으려 했던 뜻은 사람을 감탄하게 만든다.고 할 정도였다. 또한 임진왜란때 큰 공적이 있어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실릴 정도였으며, 우리 고장(김제군) 선비들의 여론은 선무공신에서는 제외된 것에 대해 모두 서글프고 안타깝다 하며, 지금 임금이 효행과 충절로 뛰어난 사람을 추천받으니 연대 서명하여 진정한다고 하였다. 마지막 부분에 21명의 이름과 함께, 충절이 뛰어나므로 진정한 대로 처분한다는 결과가 적혀 있다. 문서에는 계미년 6월이라고만 되어 있는데, 1799년에 간행된 <호남절의록>이 인용된 것으로 보아 그 이후인 1853년일 것으로 추정된다. 본문에는 선조대에 나라가 어수선해 졌습니다. 그때 재주 많은 준걸들이 조정에 가득 차고 절의를 지닌 선비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리하여) 나라의 기틀이 다시 높아지고 운세가 다시 새로워졌으니 충성스럽고 어진 인물들을 드러내 높여주며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둔 효과가 어떠했습니까?라고 하였다.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어진 인품을 잃지 않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두는 것이 중요함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민길홍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부안 변산반도의 끝자락에는 서해바다의 수호신인 개양할미를 모신 수성당이 있다. 1992년 해안초소를 보수하면서 수성당 주변자리가 고대 삼국 중 백제 이래로 계속 제의행위가 이루어진 곳임이 확인되었다. 이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은 지금까지 발견된 백제의 유일한 해양제사 유적으로 항해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의행위는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넘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삼국시대 유물들이 양호하여 당시 구체적인 제사의 양상을 잘 말해주고 있다. 출토유물은 토기류가 대다수이고 금속유물과 모조품, 옥제품, 중국제 자기, 일본 계통의 토기들도 있다. 토기들은 4세기 중반~7세기 전반까지 백제의 것들이 모두 확인되고 있는데, 5~6세기대가 중심연대이다. 대형항아리 중에는 말안장테, 철제 방울 등의 마구류나 철제 거울이 담겨진 채로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 유적은 유일한 백제의 해양 제사유적이라는 중요성 이외에도 고대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교차점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으로도 큰 의의를 가진다. 중국제 흑갈색 유약을 입힌 흑유항아리와 청자항아리, 일본 계통의 스에키(5~6세기 일본 고분시대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토기)뿐만 아니라 신라, 가야지역의 유물들도 함께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흑유항아리는 4세기대 중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 서울의 풍납토성, 홍성 신금성 등 주로 한성백제의 중앙을 비롯한 주요 지역에서만 확인되고 있다. 스에키도 웅진백제의 수도였던 공주 정지산 유적을 비롯하여 나주 복암리, 정촌 유적 등에서 발견되어 백제가 바닷길을 통해 일본이나 영산강유역 사람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죽막동에서 이루어졌던 제사는 이 지방의 토착세력들이 주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흑유항아리나 중국제 청자들은 평범한 지위에 속했던 사람들이 사용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스스로 해양교섭능력을 가졌거나 상당한 사회경제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던 계층으로 보인다.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은 제의를 주체한 사람들이 바닷길을 통해 이루어진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한 축이었음을 증명하면서 해양국가 백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김왕국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전북과 각별…황석영 소설가 ‘금관문화훈장’ 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