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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 관광체육국 신설… 2025년 행정기구 개편 추진

정읍시가 민선 8기 3년차를 맞아 행정기구 개편을 추진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시는 2025년 행정기구 개편을 위해 지난 12일 개회한 제300회 정읍시의회 제2차 정례회에 '2025년 상반기 조직개편안'을 상정할 계획이다. 개편안에 따르면 국(4급 서기관급) 1개 신설, 과(5급 사무관급) 1개 신설 및 과 통합 1개, 3개 사업소(5급 사무관)를 1개 사업소로 축소, 명칭변경 4개 과 등이다. 정원은 1253명에서 1244명으로 축소되어 국장급(4급)이 1자리 증가하는 반면 팀장급(6급)은 3자리, 7급이하는 7자리가 감소한다 이는 지방자치단체의 행정기구와 정원기준 등에 관한 규정 개정에 따라 인구 10만명 이상 15만명 미만의 시를 대상으로 현행 2개 이상 4개 이하 국에서 총액인건비를 준수하여 자율적으로 국 신설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본청에는 문화행정국, 일자리경제국, 복지환경국, 도시안전국 4개국에서 '관광체육국' 을 신설되어 5개국이 운영된다. 또 관광체육국은 관광, 체육, 산림, 도서관 업무를 총괄하고 '시설운영과'를 신설해 시에서 유료로 운영하는 문화 관광 체육시설을 비롯해 현재 조성사업중인 산림휴향시설 등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를 목표로 했다. 아울러 신설되는 관광체육국장은 복수직렬에 개방형직위를 추가하여 향후 사계절관광 활성화를 위한 능력있는 인재 영입도 가능하게했다. '일자리경제국' 산하의 일자리정책과와 지역경제과를 통합하여 '일자리경제과'로 통합한다. 부서명칭 변경은 동학문화재과는 '동학유산과', 체육진흥사업소는 '체육진흥과', 도서관사업소는 '도서관운영과', 건강재활과는 '감염병관리과'로 변경된다. 시는 이번 조직개편을 통해 기존 각 국별 6개과를 일괄적으로 5개과로 편제하여 국장(4급)들의 지휘 업무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계획이다.

  • 정읍
  • 임장훈
  • 2024.11.19 11:17

[김용호 정읍시립국악단 단장 전통문화바라보기] 전라북도 전통문화 창의융합

전통이란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관습·행동 따위의 양식을 말한다. 그러한 전통은 현대 문명의 근본이요 우리가 이어 가야 할 소중한 가치이기도 하다. 우리는 전통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미래의 자아를 찾는다. 또한, 민족의 전통은 숙명적 자아를 통해 동기부여가 되어 우리 공동체 사회의 중요한 역량이 된다. 특히 전통문화는 더욱 그렇다. 전통문화의 범주를 논하자면 광범위하겠지만 민족 간의 전통문화는 가장 중요한 경제적 동기부여를 낳고 있다. 그만큼 독자적이며 특별하기 때문이다. 남과 다른 문화를 형성하며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 특별함을 갖춘다. 전통문화는 이미 마련된 정체성으로 존재의 가치를 빛나게 하며 자국의 경제를 포용한다. 전라북도에는 전통 문화유산이 참으로 많다. 전라북도의 산해진미 전통음식, 의복, 가옥, 풍류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전통문화가 존재한다. 저마다 형형색색의 존재감을 나타내며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특히 전통음악은 더욱 그렇다. 전라북도는 판소리의 고장으로 예로부터 통인청 대사습을 모체로 했던 전주대사습놀이가 있어 명창, 명수를 예우하며 전통예술의 등용과 계승을 극진히 모색했다. 그뿐이랴 전통음식, 의복 제작도 존귀성을 높였으며 하물며 가옥 또한, 완산부지도라는 보물을 통해 옛 선조의 치밀하고 견고했던 삶의 방식과 터전을 알렸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선조가 남겨준 전통문화로 전라북도, 더 나아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위상을 다시 높일 시기에 도래했다. 전통 창의융합이라는 명사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날치 밴드의 조선 판소리와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의 현대무용을 조합한 한국 관광공사 홍보영상 “범 내려온다”란 영상을 보자. 우리의 예술가들은 대중에게 다가설 문화융합을 고민하고 창작하여 현대와 전통을 아우른 프로젝트를 만들었고 그 유튜브 조회 수는 이미 수년 전 3억 뷰를 넘었다. 그에 따른 가치 창출은 지금도 지대하며 현재 진행형이다. 이제, 우리는 전통과 또 다른 전통을 융합할 환경과 귀로에 서 있다. 과거 서양 문물과 전통예술의 융합된 콘텐츠가 사회 문화적 열풍 그리고 독특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듯이 우리는 전통문화만의 활용을 통해 독자적이며 혁신적인 결과를 도출할 시작점에 와있는 것이다. 이는 전통의 유형, 무형 문화유산 융합으로 이어질 것이며 무궁무진한 우리의 자산이자 문화 선진국의 교두보가 될 것이다. 전통음식, 전통가옥과 전통 의복이 그 복합 콘텐츠의 단적인 예이며 함께하는 전통음악은 빼놓을 수 없는 전통문화의 중심축이다. 그러한 천혜 자원 전통문화 중심에 전라북도가 있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3.08.31 17:48

[김용호 정읍시립국악단 단장 전통문화바라보기] 국립부산국악원

국립부산국악원은 전국의 세 곳 분원 중 호남의 두 곳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경상도에 건립된 지역의 국립국악원이다. 근대 국립국악원의 최초 설립 장소가 전쟁 중이었던 1951년 부산의 용두산 공원이었다는 사실로 부산은 국립국악원 설립 명분을 얻게 된다. 또한, 우리나라 제2의 도시라는 의미가 뒷받침되어 충분한 분원의 조건을 갖추게 되지만, 예산과 정책적인 여러 사항이 맞물려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못하고 뒤늦게 2008년 10월 부산광역시 연지동에 세 번째 분원을 설립하게 된다. 특히 당시 영남지역 최초의 국립국악원은 부산의 국악인을 비롯해 문화예술인, 정치경제인사, 시민단체 등 많은 시민의 뜻을 모아 건립이 추진되었는데, 지역의 균형발전, 부산·영남의 전통예술 발굴, 보존이라는 취지가 정부에 전해져 그 뜻을 실현하게 된다. 국립부산국악원은 중앙과 지방 전통예술의 균점화를 이루기 위해 다양한 설립 공약과 정책을 낸다. 먼저 아시아 태평양권 문화예술 도시의 역할과 지역 전통예술의 창조적 계승발전, 공연브랜드의 개발, 부산시민의 전통예술 공유 및 향유, 교육, 체험 등 차별화된 주제로 공약과 정책을 계획하였으며, 국제 해양관광도시로서 아시아 태평양 공연예술 거점을 위한 특화된 주제로 사업도 추진하였다. 부산은 국내에서 해외 크루즈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이며, 지리적 위치와 자연적 환경, 역사적 명소 등 국내·외 관광객들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국제 해양관광도시이다. 이에 국립부산국악원은 국·내외 관광객 대상으로 우리 전통예술을 널리 소개하고, 한류에 이은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한 관광객 전용 공연프로그램을 개발하였으며, 그러한 기반을 통해 특화 역점 공연사업으로 현재도 추진 중이다. 국립국악원의 브랜드 작품은 국가를 대표하는 높은 예술성의 작품이며, 지역의 국립국악원 브랜드 작품 또한 그 지역의 문화예술을 잘 반영하는 독창적이자 특화된 예술의 작품이다. 국립부산국악원은 그러한 브랜드 작업을 지역 고유한 콘텐츠와 연계하였는데 다양한 부산, 영남지역의 특화된 콘텐츠를 이용하여 “부산아라”, “자갈치아리랑”, “대청여관” 등 타 분원과 차별화된 소재의 작품으로 창의성을 구현했다. 더불어 해외 크루즈관광객 공연의 활성화로 한류 상설공연인 2015년 “왕비의 잔치”를 만들었으며 2016년, 2017년 더 다듬어진 “왕비의 잔치Ⅰ, Ⅱ”를 만들어 3년간 자리매김하며 한류 확산 및 전통예술 향유에 큰 업적을 남긴다. 국립부산국악원은 이렇듯 부산과 영남지역의 전통예술 무형자산을 폭넓게 활용하고 있으며 지리적 특성을 관광 인프라와 함께 지역 분원의 특성으로 잘 지켜나가고 있다. 또한, 소외문화계층이나 지역으로 찾아가는 공연을 펼침으로써 문화예술 복지 실현에 국립기관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미래 국악 인재 양성을 위한 청소년 주제의 공연과 교육사업도 펼치며 공감적 내실을 만들었다. 이러한 경상권의 독자적인 인프라를 구상하고 이루어내는 정책은 동아시아 전통문화 발전의 초석이 되었으며 향후 세계 선진 K-문화 중심 요소가 될 것이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3.08.17 17:51

[김용호 정읍시립국악단 단장 전통문화바라보기] 국립남도국악원

전라북도 남원의 국립민속국악원 설립 후 7년이 되는 1999년 9월. 전라남도 진도에서는 남도의 예술 발굴·전승, 국악의 체계적인 교육과 연구 등 특화된 남도 전통예술 진흥을 위해 국립국악원 분원의 설립이 추진된다. 이후 2000년 논의된 ’신명나는 국악마을‘이라는 건립 기본 계획을 토대로 2004년 3월 임회면 귀성포구에 청사를 신축하면서 본격적으로 남도 음악의 과거를 아우르고 미래를 조망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전라남도 진도군은 다양한 전통예술이 존재하며 그에 상응하는 향유층 또한 타 지역에 비해 많고, 정부와 전라남도에서 지정한 무형문화재도 인구와 지역에 대비해 많은 수를 보유하고 있다. 이는 국립남도국악원을 설립하는 중요한 정책적 방향에 도움을 주었으며, 향유와 전승을 통해 지역의 관광자원과 연계하여 국내·외 전통 및 현대적인 공연 페스티벌 개최 등 전통예술 보급의 소중한 초석이 되었다. 더욱이 진도아리랑, 진도씻김굿, 진도북춤 등 지역명이 포함된 예술작품은 특화된 남도음악 보전과 전승·공연예술 국립기관 거점을 두기에 충분한 요건으로 작용했으며, 섬이라는 지리적 천혜는 지역 문화관광사업과 연계된 국악 연수, 교육의 특화된 사업 명분을 얻게 되고, 그러한 정책은 분원으로서 충분한 임무를 수행할 것이라는 예측과 결과를 갖게 된다. 국립남도국악원은 지역의 인구수와 지역의 열악한 거리 조건 속에서도 애호가와 연수생의 수가 전라북도의 국립민속국악원과 부산광역시에 있는 국립부산국악원보다 많았으며, 특히 교육 및 체험 횟수는 국립민속국악원, 국립부산국악원의 두 배 근사치로 나타났다. 이는 다양하고 폭넓은 계층의 수요자가 전라남도 진도라는 특화된 장소를 선택한 것이며 그러한 수요자를 대응할 수 있는 숙박 시설이 정책적으로 잘 예측이 되어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설립된 국립민속국악원의 특성화 사업의 주체가 판소리와 창극이라면, 국립남도국악원의 특화된 주체는 굿과 무속이다. 작품 선정과 제작에서도 남도 지역의 민속예술을 조명하여 타 분원과의 차별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전라남도 진도의 특화된 진돗개, 진도씻김굿, 강강술래, 대금산조의 창시자 박종기, 조선후기 화가 소치 허련, 진도와 섬 등 다양한 콘텐츠를 연계하여 <백구가 부르는 진도아리랑>(2008), <씻금>(2010), <술래야, 술래야>(2012), <진도씻김굿>(2013), <절대, 박절대>(2014), <운림산방-구름으로 그린 숲>(2016), <섬>(2022)과 같은 기획 및 브랜드 작품을 만듦으로써 남도만의 독창적인 작품 제작을 지향하고 있다. 이렇듯 국립남도국악원은 차별화된 예술 정책과 기능, 운영으로 지역 예술의 고른 발전을 위해 크게 이바지하고 있으며 현재도 진행 중에 있다.

  • 문화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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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10 18:07

[김용호 정읍시립국악단 단장 전통문화바라보기] 명창 정창업, 다시 도전하다.

정창업은 헌종 13년인 1847년에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나 개항기 전라북도 익산에서 거주하며 활동하던 명창이다. 어려서부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고 타고난 목에 재주도 많았다. 12세에 전남 보성의 박유전 문하에 들어가 5년간 소리를 배웠으며 이후 산 중 절로 들어가 5년 동안 모진 노력 끝에 스스로 득음하기에 이른다. 정창업은 득음한 후 산에서 내려와 자신의 실력을 확인도 하고 만인에게 실력을 알릴 겸 전주대사습에 참가한다. 22세의 어린 나이라 많은 관중 앞에 소리하는 것이 익숙지 않았던 그는 경연 소리 도중 그만 사설을 놓치고 머뭇거리는 일이 일어나고 만다. 춘향가 중 한 대목이었는데 정창업은 몹시 당황하며 “나귀 등에 솔질 솰솰. 솔질 솰솰. 솔질 솰솰...” 다음 대목 사설이 생각이 나지 않아 계속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곧 청중들은 수군거리며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고 어느 사람은 “저 혹독한 솔질에 나귀는 곧 죽을 거야. 푸하하!”라고 비웃음을 던졌다. 곧이어 정창업은 퇴장을 당했고 불행히도 낙방하기에 이른다. 그러한 일이 있고 난 뒤 그는 비참한 심정에 소리를 그만두고 만다. 그의 소문은 경연 후 걷잡을 수 없이 세간에 퍼지게 되었으며 창피함과 수모에 그만 정창업은 식음을 전폐하고 목숨을 끊으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국창 이날치가 나주목사 생일연에 축하 소리를 하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이날치는 같은 박유전의 제자였지만 정창업보다 나이가 27세나 많은 대선배로 부모님과 같은 심정을 가진 동문이었다. 정창업 또한, 이날치를 아버지처럼 따르고 존경했다. 이날치는 정창업에게 “나는 자네를 위로하러 온 것이 아니네.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인 것을, 한 번 실수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니 다시 분발해 명예를 회복해야 하지 않겠나? 어서 다시 보성으로 가서 공부하시게” 하지만 정창업은 스승의 명예에 욕되게 함을 죄스럽게 생각하며 다시 돌아가지 못함을 밝힌다. 그러자 이날치는 “그러면 전라북도 고창에 가서 신재효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게나.”라고 권유하였고 정창업은 기력을 회복한 후 고창으로 가 신재효 문하에 입적하기에 이른다. 그는 신재효에게 다시 소리를 공부하며 더불어 판소리에 대한 이론과 견문을 넓혔다. 심청가를 주력하였는데 그 비장함의 소리는 어떤 소리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정창업은 3년 후 다시 전주대사습에 참가한다. 심청가 중 남경장사 선인에게 끌려가는 대목부터 심봉사가 효녀비를 부여안고 통곡하는 타루비 대목, 집에 돌아온 심봉사가 적막한 집을 보며 심청을 생각하며 울부짖는 대목을 차례대로 애원성과 함께 비장하게 소리를 하니 모든 청중은 눈물을 흘리고 그의 소리에 탄복하였다고 전한다. 그렇게 정창업은 다시 도전한 전주대사습에서 장원을 차지하게 된다. 여느 어전 광대처럼 운현궁에서 1년간 소리하며 수 천냥을 벌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많은 소리판을 이끌었으며 제자를 배출하기에 이른다. 그의 아들은 명창 정학진이요 손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였던 정광수이며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2호 수궁가 보유자 정의진은 증손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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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03 17:29

[김용호 정읍시립국악단 단장 전통문화바라보기] 명창 장자백, 목숨을 구하다

운현궁의 명창으로 유명했던 전라북도 순창 출생의 장자백 명창에 대한 일화이다. 장자백은 순조 22년(1822년)에 태어났다. 국창 김세종의 직계 수제자이며 동편제의 계보를 잇는 명창으로 그는 소리뿐만 아니라 타고난 외모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판소리를 잘했던 소리꾼이 아니어서 항상 김세종의 제자들에게 뒤처져있었고 그의 처마저 그러한 재능과 노력에 불만을 품고 가출하기에 이른다. 장자백은 부인이 무단가출 후 깊이 깨닫고 각고탁마(刻苦琢磨) 득음하여 전주대사습에 출전, 많은 명창을 제치고 장원을 하게 된다. 장원 후, 장자백이 고종 임금의 부름을 받고 고향을 떠나 한양에 도착 후 일어난 일화이다. 서툰 지리에 장자백은 한양길을 이리저리 헤매다 종묘 담길을 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장정 두 사람이 나타나 그를 보쌈하여 어느 곳으로 납치하게 된다. 정신을 차린 장자백이 “여기가 어디요? 이제 죽었구나.” 이때 나타난 여인 한 명. 그녀는 다음과 같이 그에 말을 건넨다. “이 모든 것은 부모님이 시켜서 하는 일이니 원망하지 마시오.”라고 말하며 계속 그에게 사정의 내막을 이어 나간다. “저의 사주가 혼인을 하면 남편이 죽는다는 망부살(亡夫煞/지아비를 헤치는 독한 기운과 귀신의 짓)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요?” 처자가 답하기를 “당신이 오늘 밤 저와 첫 남편으로 지내고….” 그렇다. 옛 풍속에는 양반집 딸이 망부살이 있게 되면 하인을 시켜서 밤중에 길가는 남자를 보쌈하여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새벽에 데리고 나가 감쪽같이 죽여버리는 일들이 많았다. 그렇게 되면 그 첫 남자는 죽음으로 살을 끝내고 이후 정식 혼인하는 남편은 죽지 않는다는 속신(俗信)이 있었다. 그렇게 하룻밤을 보낸 후 새벽. 장자백은 망연자실하여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전라도 순창 사는 장자백이란 소리꾼이요. 전주대사습에서 장원하여 임금님의 부름을 받고 어제 올라왔는데 이리 죽으면 억울하고 원통하니 어찌 살 방법이 없겠소?” 여인은 그 사연을 듣고 작은 자개 상자를 하나 주며 그에게 답한다. “저는 당신을 죽게 하고 싶지 않아요. 이것을 가져가 유용하게 쓰세요.” 그것은 여인의 패물 상자였다. 이윽고 장정 둘이 나타나 장자백을 끌고 나가게 되었고 한강 절벽 위에서 그를 해하려는 찰나, 장자백은 여인이 준 패물을 주며 사정 얘기를 건넸고 그 내막을 들은 두 장정은 장자백을 풀어주며 “당신은 죽은 거야. 우린 이 패물을 가지고 가겠소.”라며 도망가기에 이른다. 이후 목숨을 구한 장자백은 궁궐에 들어가 무사히 어명을 받들게 된다. 훗날, 패물을 준 여인은 순창 군수의 처가 되어 다시금 장자백을 찾아 만나게 되는데 그에게 말하기를 “대사습에서 장원하여 왕명으로 한양에 올라왔는데 만약 당신을 죽였다면 우리 가족은 큰 벌을 면치 못했을 것이외다. 살아주어 고맙소.”라는 말을 건네고 반갑게 환대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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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27 18:18

[김용호 정읍시립국악단 단장 전통문화바라보기] 대원군 친형 이최응과 이날치

고종 임금의 백부이자 대원군 친형인 이최응은 성질이 몹시 곧고 냉정해 결코 희로애락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김병학(고종 1년 이조판서)과 자리를 같이하고 이런저런 세상 환담을 하다 화제가 판소리 명창으로 옮겨지고 있을 때였다. 김병학이 “명창은 능히 사람을 울리고 웃기는데 이날치는 정말 그러합디다.”하고 말했다. 김병학은 원래 철종의 외척인 안동 김씨의 일족으로 철종 말년 김병기의 부름을 받고 올라갔던 가왕 송흥록과 교동 김병기 저택에서 3년간 기거를 같이하다시피 하면서 송흥록의 소리를 날마다 들어왔기 때문에 판소리의 이해가 깊었고 명창 소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최응은 대원군과 같이 외척 김씨의 학대를 받아가면서 살아왔기에 명창을 한 번도 대해본 일이 없었고 광대가 무엇이며 소리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 이최응은 김병학의 말에 반박하며 말을 건넨다. “그럴 리 없소.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졸장부라면 몰라도 기백 있는 대장부가 어찌 한낱 비천한 소리에 감정이 좌우된다니 당치도 않은 말이요.”하고 말다툼을 하다가 결국 이날치를 불러들여 시험을 해보기로 한다. 이날치 앞에 선 이최응은 “네 소리에 감동하여 울고 웃게 되면 천 냥의 상을 내릴 것이요, 만일 아무런 감정이 없을 때는 너의 목을 베리라!” 말한다. 이날치는 어이없는 명(命)에 당황하였지만, 흔연스럽게 모인 사람들 앞에서 <심청가> 중 심청이가 선인들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하는 가장 처절한 대목을 소리하기 시작한다. 소리 내용 중에는 심봉사가 실성발광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날치는 실물의 심봉사인 양 몸부림을 치면서 쓰러졌다 통곡하고 울부짖고 아픈 심정을 토로한다. “나, 눈 안뜰란다. 나 안떠!” 소리와 아니리의 울부짖음은 관객에게 말할 수 없는 깊은 감동으로 전해졌다. 이윽고 소리가 종반으로 다가설 때 쯤이었다. 심청이 선인들과 배를 타고 인당수에 당도하여 절규하며 바다에 뛰어들고 하늘의 곡(哭)이 청중을 덮을 때 천지를 누를 것 같은 같던 기세의 이최응도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게 된다. 이때 이날치는 재치있게 소리의 분위기를 또다시 돌려 “대감님께서 슬피 우셨사오니, 이제는 웃으시도록 하겠나이다.”라고 외치고 뺑덕이네의 생김새와 행실을 재담으로 엮어가다가 심봉사와 뺑덕이네 정사 장면에서는 익살과 해학의 소리로 모인 청중을 박장대소케 했다. 이최응도 지위와 체면을 잊은 체 손바닥으로 마룻바닥을 치며 크게 웃었다 하니 이러한 일화를 보더라도 과연 이날치의 기예는 신의 영역에 도달했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이최응은 이날치의 손을 잡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명창은 능히 사람을 울리고 웃긴다 하더니 과연 헛말이 아니로다. 너야말로 천하의 명창이로다.” 훗날 이날치는 재주를 인정받고 운현궁에서 1년간 기거했는데 명성과 더불어 돈도 수만금을 벌었다고 전한다.

  • 문화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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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20 16:24

[김용호 정읍시립국악단 단장 전통문화바라보기] 여성국극단의 탄생과 쇠퇴

해방이 지나고 1948년이 되던 해, 서울에서 박록주, 김소희, 박귀희, 정유색, 임유앵, 김경희, 임춘앵 등이 주축이 되어 여성국악동호회가 결성된다. 그해 10월 창립공연으로 서울 명동에 있었던 시공관(현재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여성만으로 춘향전을 <옥중화>라 칭하고 작품을 올렸는데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한다. 이듬해 1949년 2월 여성국악동호회는 두 번째 작품으로 <햇님달님>을 역시 명동의 시공관에서 올렸는데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 작품의 흥행을 이끈다. 극의 내용은 햇님왕자와 달님공주가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애정물로 햇님왕자 역에는 여장 남역의 박귀희, 달님공주로는 김소희, 여왕 역에는 정유색 등이 주연을 담당했다. 극 내용 자체는 오래된 옛날이야기 같으나 대형 무대장치와 의상, 소품 등이 호화 찬란했고 더불어 오로지 여성만으로 화려한 공연이 이루어져 일반 대중 특히, 부녀층을 사로잡는 계기가 되었다. 이 소문은 서울 장안에 널리 퍼졌고 가정생활에만 얽매여 있었던 부녀층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팬심이 깊은 여성들은 부모와 남편에게 소원하여 너나없이 시공관으로 몰려드는 광경을 만들었으며 극장 문전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어 국악 흥행 사상 전무후무한 관객 수를 기록했다.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공연을 마친 여성국악동호회는 대구와 부산에서도 공연하였는데 특히 부산에서는 부산시민뿐만 아니라 도서(島嶼)에 있던 사람들이 모여들어 부산역 앞 공회당은 인파로 메워져 통행이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 당시 부산극장에서 공연 중이던 국극사(國劇社 1945년 10월에 조직한 민간 대한국악원 산하의 창극 단체/ 정부 소속 국립국악원은 1951년 4월 개원. 국극사는 한국전쟁 후 국악 보급, 발전에 힘쓰다가 1961년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산하 한국국악협회로 통합)의 대작인 <만리장성> 작품은 <햇님달님>의 관객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고 전한다. 이렇듯 여성국극단의 탄생은 초기부터 창극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으며 그로 인해 활동 중이던 국극사, 국극협회, 김연수 창극단 등 단체는 운영의 큰 영향을 받는다. 이후 여성국악동호회는 한국전쟁과 더불어 회원들의 여러가지 사정으로 흥행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당시 김주전(金主傳/경서도민요 성악가)은 여성국악동호회와 제휴하고 진용을 정비하여 여성국악동호회 햇님국극단이라 명칭하고 <햇님달님> 그 후편으로 <황금돼지>란 작품을 만들어 또 한 번의 흥행을 이어간다. 이후 대도시의 일류극장에서는 햇님국극단을 데려가려고 혈안이 되었고 단체가 제시한 모든 조건을 수락하면서까지도 공연을 추진했다고 전한다. 1954년에는 햇님국극단 외에도 여성국극단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근대 서구 예술의 유입과 유행 등의 문화환경 변화로 찬란했던 여성국극단의 영광은 점차 그 빛을 잃어갔으며 60년대 말 이후에는 공연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20여 년이 지난 후 1990년대에 김경수, 박미숙 등의 국악인 중심으로 여성국극단이 다시 창단되었고 현재에도 지난날의 화려한 재기를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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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13 18:11

[김용호 정읍시립국악단 단장 전통문화바라보기] 거문고의 명인 고(故) 강동일

거문고의 명인 강동일의 예명(藝名)은 동완(東完)이며 1928년 11월 20일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하리 603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강동일은 유성옥(柳性玉)으로부터 1개월간 거문고 풍류를 배웠다. 유성옥은 방금선의 형부로 짧은 학습 기간이었지만 선비 음악의 정수(精髓)를 어린 강동일에게 심어주었다. 방금선은 거문고산조의 창시자인 백낙준에게 산조를 전수한 신쾌동의 여제자로서 스승의 선율을 곧바로 이어받은 인물이다. 강동일은 방금선과의 짧은 전승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산조를 구사했다는 것은 그의 천재적 음악성을 익히 알 수 있는 부분으로 자기화를 통해 음악적 완성도를 높였다. 이후 자신과의 음악적 고뇌를 통해 그는 성숙해졌고 20∼25세 때 신쾌동과 한갑득을 만나 수련하고 자신만의 거문고산조를 정립하여 그의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강동일은 1959년 32세에 성금연으로부터 가야금산조를 사사하고 음악적 역량을 키웠다. 이후 조금행 국악원에서 3년간, 임춘앵 국극단에서 10년간, 김진진 일행에게 3년, 박미숙 단체에 1년 등 창극 반주를 맡아 생활했다. 1960년대 들어오면서 강동일은 김윤덕(金允德)으로부터 가야금을 익혔고 1963년에는 아쟁을 택하여 혼자 수련하기도 했다. 1965년부터 1967년까지 전주국악원 강사를 역임했다. 1978년에는 제4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 거문고산조로 출전하여 차하로 입상하였고 다음 해인 1979년에 이어 출전하여 차상을 받았다. 세 번째 도전이던 1980년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 기악부 장원을 비로소 거머쥐고 명인 반열에 오른다. 이후 강동일은 재능을 인정받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가 된다. 이렇듯 강동일은 생전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적 가치를 갖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제자들에게 계승하지 못했다. 그 사유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먼저 그의 연주 능력을 전수할 만한 제자가 없었으며 또한 쉽게 자신의 예술적 자산을 전승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품은 매우 온순하고 정직하며 강직하셨던 분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이러한 성품으로 자신의 예술적 기량과 자료를 경제적인 요건에 결부시키지 않았으며 제자의 능력에 따라 바르게 전승하고자 노력했다. 강동일은 거문고 이외에도 가야금을 잘 탔고 흥이 나면 병창을 부르는 일도 많았다 한다. 아쟁도 연주했으며 가야금을 이용하여 개나리 활대로 연주하는 모습에 제자들이 놀란 일화도 있다. 이렇듯 강동일의 천부적인 음악성은 모든 이를 감동하게 했고 그를 “신금(神琴)을 울리는 명인”이라 지칭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동일의 천부적인 재능은 올곧게 다 전승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아쉬움을 남긴 채 잊혀가고 있다. 이제 남겨진 그의 주법, 가락과 악보를 바탕으로 다시금 강동일이란 한국 민속악의 거문고 명인은 재조명되어야 하겠으며 많은 연구 또한 지속하여 그가 남긴 음악과 자료가 국악사에 길이 남는 유산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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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06 17:54

[김용호 정읍시립국악단 단장 전통문화바라보기] 고수(鼓手)의 기억을 담다

판소리에는 당연히 고수의 북 장단이 따르기 마련이고 고수의 역량에 따라 소리를 하는 명창의 기량이 현저히 표출되기 때문에 예로부터 일고수 이명창이란 말은 당연한 사실로 인지되어 왔다. 과거 판소리가 발생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백을 헤아리는 명창이 배출되었으나 그에 따라 명고수도 많았을 것인데 기록이 없으므로 부득이하게 구전으로 내려오거나 그러한 내용을 쓴 논문으로 인용할 수밖에 실정이다. 전주 완주 출신 대명창 권삼득의 수행 고수는 가왕 송흥록의 부친 송첨지로 전하고 있으며, 송흥록의 고수는 그의 친동생 송광옥이었는데 명창과 고수와의 차별대우가 너무 심한데 불만을 품고 가출 후 제주도 한라산으로 들어가서 독공하여 명창이 되었다. 명창 주덕기도 처음에는 모흥갑 명창의 수행 고수를 하였다가 후에 송흥록의 고수가 되었는데, 그 역시 고수를 천대하는데 불만을 품고 산중에 들어가서 수년 동안의 천신만고 끝에 대성하여 초대 여덟 명창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국창 이날치는 원래 줄타기 명수로 30세까지 줄을 타다가 판소리에 뜻을 세우고 처음에는 절창 정읍 박만순의 수행 고수 노릇을 하면서 소리를 연마하였는데 후에 박유전 명창의 지도를 받고 대성하여 중기 여덟 명창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 후 많은 역대 명창은 전하면서 고수의 내력은 전하지 않고 있는데 학계에 논하는 바로는 이날치의 수행 고수로 전라남도 나주 출신 박판석이 명고라 하였고 박판석의 동배(同輩)로 담양 출신의 신갑두와 승주군 낙안 출신의 오수관, 오성삼 그리고 오성삼의 동배인 신찬문이 유명하였다고 전한다. 명창 박기홍의 오랜 고수였던 박지흥은 훗날 명창이 되었고 장판개, 김정문 두 명창도 한때 송만갑의 고수 노릇을 하였다고 전하며 그 밖의 알려진 고수는 밝혀진 바 없어 뚜렷한 자료를 찾기 어렵다. 그러나 명불허전, 뚜렷한 사실 중 하나는 원각사 시절의 한성준은 자타가 공인하는 명고(名鼓) 중의 명고로 유명하였으며 조선말 고종 임금으로부터 참봉 벼슬을 제수받았고 명창과 명고를 동등한 위치로 끌어올린 공로자로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한성준은 불세출의 명고수였을 뿐 아니라 남도색 짙은 민속 무용의 대가로서 민속 무용을 정리하고 함께 전승한 장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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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6.29 17:27

[김용호 정읍시립국악단 단장 전통문화바라보기] 아쟁산조의 합(合)

악(樂)은 마음속에서 생겨난다. 마음은 사물의 감동에서 오는 것이며 그 감성의 이완은 다음과 같은 소리 현상에서 나타난다. 슬픈 마음이 감동할 때는 소리가 목이 쉰 듯하여 낮고 약하며, 즐거운 마음이 감동할 때는 소리가 풍부하고 한가롭다. 기쁜 마음이 감동할 때에는 소리가 높게 올라가 빠르고 차분하지 못하고, 노여운 마음이 감동할 때는 소리가 곧고 맑다. 또한, 사랑하는 마음이 감동할 때에는 소리가 평화롭고 한없는 부드러움을 갖는다. 이러한 여섯 가지의 소리는 사람 본성(本性)이 아니고 마음이 외물에서 감촉한 후 생겨나는 것이라 옛 선인들은 말하고 있다. 우리의 선왕(先王)은 그러한 감동의 합을 소중히 여겨 예(禮)로써 그 뜻을 이끌었으며 악(樂)으로 소리를 화(和)하였고 정치로써 그 행동을 하나로 만들고 형벌로써 그 간사함을 막았다. 그러한 형상을 예악형정(禮樂刑政), 치국평천화(治國平天下)라 불렀다. 옛 문헌 글처럼 현시대에도 소리의 합(合)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산조(散調)라는 우리나라 전통 민속기악 독주곡이다. 산조는 19세기 말경부터 형성된 음악인데 처음 가야금에 얹어 틀을 갖추었고 독주곡의 형식으로 만들었다. 이후 다른 악기로 퍼져 지금은 가야금, 거문고, 해금, 대금, 피리, 퉁소, 단소 등 독주가 가능한 전통악기 대부분이 여러 산조의 틀을 갖추어 연주하고 있다. 필자의 전공인 아쟁 또한 악기의 기능을 늘려 느린 박자의 음악은 물론 빠른 박자의 곡을 연주할 수 있도록 개량 “산조아쟁”으로 만들어 산조를 연주하기에 이른다. 아쟁산조도 여느 산조처럼 느린 <진양조>로 음악은 시작된다. 느린 6박이 한 장단을 이루고 그 6박의 4개가 한 집을 만든다. 진양조 느림의 미학 속에는 용서와 순응 그리고 각오가 있다. 한(恨)의 소리라고도 칭하는 아쟁 소리는 화합과 관용이라 불리어도 아깝지 않은 고귀한 내면이 존재한다. 가장 느린 장단 다음으로 찾아오는 <중모리>의 호흡은 서양음악 안단테(보통 빠르기)와 같은 속도로 그 평화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의 이완을 만든다. 12박의 중모리가 끝날 무렵 <중중모리> 빠른 12박은 용기의 미학(美學)으로 다가와 다채로움과 화려함을 장식한다. 그리고 곧 이어진 자진모리 빠른 4박은 소리의 극점으로 몰아쳐 수많은 심경의 변화를 이루게 하고 한(恨)을 승화시킨다. 그 후 안정된 속도와 가락 풀이로 세상과 나는 일심동체가 되고 소리 속 평화로움을 이룬다. 지금 여러분도 아쟁산조를 들으며 이러한 소리 합의 소중함을 느껴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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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6.22 17:59

[김용호 정읍시립국악단 단장 전통문화바라보기] 소리만 생각해라

1986년 어느 늦은 봄날. 전주시 덕진구 진북동 대로변 어느 건물 3층. 또렷한 춘향가 중 사랑가의 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짧은소리와 더불어 불호령 같은 선생님의 외침. “틀렸잖아. 그것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냐.” 문 앞에 다가섰지만,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조용한 틈을 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찾아온 손님이 무색할 정도로 소리 지도에만 몰두한 50대 초반의 무서운 선생님. 모질게 야단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소리를 받는 어린 소녀. 거실을 정리하고 있지만, 무엇인가 중얼거리며 오직 소리에만 빠져있는 한 청년. 그 시절 옛 모습은 판소리를 배우겠다고 전주로 낙향 후 처음으로 바라본 이일주 명창, 송재영 명창, 장문희 명창의 모습이다. 지난 5일 판소리 거장 이일주 명창이 돌아가셨다. 하늘이 무너지고 가슴이 터지는 듯한 마음을 추스르며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필자에게 이일주 명창은 국악을 처음으로 알려주시고 평생 업으로 시작하게 해주신 큰 스승님이셨다. 경제적 여건이 좋은 타 이과 공부를 포기하고 전주로 낙향한 필자를 안타깝게 생각하셨는지 이일주 선생님의 첫 만남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며칠하다 갈꺼면 배우지 마시여.” 필자에게 하신 첫 말씀이 그랬다. “아니에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받아주세요.” 그제야 선생님은 마음을 여시고 이야기를 푸셨다. “소리는 어려워. 단단히 맘먹고 해야 해. 전주까지 내려왔으니 그냥 내 집에 살아. 살면서 공부해. 옛날엔 다 그렇게 했어.” 당황한 필자를 바라보시며 손을 잡아주시던 그 모습. 필자는 그렇게 이일주 선생님과 송재영 명창, 선생님의 조카 장문희 명창과의 동거에 들어갔고 3년간 함께 생활하며 소리 속을 익혔다. 생전의 이일주 선생님은 곧으시고, 정직하셨다. 오로지 소리밖에 몰랐다. 음식도 잘 못 만드셨고 돈도 선생님에게 큰 중요한 삶의 요건이 아니었다. 소리에만 한평생을 바치셨던 진정 예술가였다. 그래서인지 선생님의 제자 중에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소리꾼이 많다. 우리 예술가는 평생 자신의 예술을 위해 인생을 바친다. 하지만 세상의 허무에, 세속의 야속함에, 생활의 배고픔에 많은 포기를 한다. 그렇게 넘어지고 쓰러질 때 다시 일어날 용기를 주셨던 분이 필자에겐 바로 이일주 선생님이셨다. 이제 선생님의 모습을 볼 수 없다. 하지만 선생님이 남기신 소리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맴돈다. “소리만 생각해라. 용호야.”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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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6.15 17:12

[김용호 정읍시립국악단 단장 전통문화바라보기] 국립민속국악원 대표작품 톺아보기

지난주 국립민속국악원의 대표 창극 ‘산전수전 토별가’를 관람했다. 오랜 세월, 민속악의 본산이자 판소리 특화 국악원으로 그 역사성과 예술성의 맥을 성실히 이어온 지역의 대표 국립국악원. 민속악이란 큰 명제를 두고 국가를 대표하는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책임감과 연구와 전시, 교육의 총체적 활성화란 의무는 참으로 막중하고도 소중하다. 과거 국립민속국악원은 여느 국공립 창극 단체처럼 다양한 창극을 제작했다. 여느 시·도립 전통예술단체의 예산에 비교해도 적잖은 예산과 수준 높고 특별한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국가의 전통문화 가치 실현을 위해 노력해 왔다. 더욱이 국립민속국악원은 전라북도라는 지역의 판소리 문화에 가치확산을 두고 창조적 발전을 모색해 왔기에 지역민의 눈높이는 항상 높고 기대감이 컸다. 이러한 주어진 큰 명제를 안고 국립민속국악원이 만들어낸 이번 대표작품 ‘산전수전 토별가’는 특별함을 주는 신선함이 있었다. 창극의 변화는 무한하다. 이번 창극은 그러한 변화에 독창적인 탈바꿈을 주도한 작품으로 먼저 국립민속국악원의 전통 창극에 대한 열정과 희열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신묘한 연출자의 창의력과 고민하고 몸을 불사린 창극단원과의 절묘한 교합이 아니었을까? 국립기관으로서의 차별성.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지만 그동안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도립창극단이나 시립창극단에서 보아온 창극과의 차별성. 진정 쉬운 작업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한 고민을 안고 만들어낸 ‘산전수전 토별가’는 국립국악원의 창극이 ‘어떠한 예술적 관점으로 어떠한 정체성으로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기획되고 제작되어야 하는가’라는 딜레마에 실마리를 풀어주는 듯한 작품이었다. 동시대적 문화의 관점을 풀어 넣으며 현대에 치우치지 않고 전통 창극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회유성. 국립창극단과의 차별성은 또 다른 과제다. 국립국악원과 국립극장은 엄연히 구현하며 추구하는 아젠다가 다르다. 적극적인 동시대성은 국립창극단만으로도 족하다. 그러한 관점으로 보았을 때도 본 작품의 지향성은 혁신과 수용에 있어 본질을 잃지 않았다. 이제 더욱 깊은 민족정신과 전통 삶의 방식을 이해하며 올바른 계승과 창작 그리고 올곧은 전통 수용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민족 자아의 존재감을 더욱 묘사할 줄 아는 창극이 되어야 하겠다. 긴 세월 민속악의 본산으로 자리를 지켜온 국립민속국악원. 신선한 창의적 토별가를 보며 더욱 민속악 본산으로서의 기대감이 높아진다.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드신 모든 국악원 구성원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더욱 다듬어 브랜드의 가치로 만들어 주시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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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6.01 17:06

[김용호 정읍시립국악단 단장 전통문화바라보기] 칭기즈 칸의 어록

아마도 80년대 초인듯하다. 라디오 방송에서 자주 나오는 노래 중 하나였던 “칭기즈 칸”. 뜻 모를 내용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노래의 리듬에 흥취 되어 짧은 독일어로 된 노래 가사를 따라 부르던 시기가 있었다. <징. 징. 칭기즈 칸. 헤. 라이터. 호. 라이터. 헤 라이터. 이머. 바이터!> 노래와 함께 어깨를 덩실대며 추던 즐거운 기억에 잠시 칭기즈 칸이란 인물과 그의 어록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몽골 유목민 중 한 부족의 우두머리였던 테무친은 우여곡절 끝에 1206년 유목민의 대표 자리인 칸에 오른다. 이때부터 그는 칭기즈 칸으로 불리게 되며 이름의 뜻처럼 칭기즈 칸은 ‘강력한 힘을 가진 군주’가 된다. 칭기즈 칸은 몽골의 부족들을 모두 통일하였으며 나아가 서요와 서하를 정복하고 이어 만주와 중국 북쪽을 지배하던 금나라와 중앙아시아까지 뻗어 나갔던 시대 인물로 대륙의 정복자란 뒷모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도 훌륭한 정책과 평가는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시행했던 계급 폐지와 종교의 자유 그리고 인종차별 금지였다. 또한, 고른 인재 등용이란 혁혁한 평가가 있는데 가족뿐만 아니라 능력이 검증된 가까운 친구 그리고 적이었다 하더라도 아군이 된 사람에게 능력과 신의가 인정되면 중요한 역할을 맡기고 나라를 운영하는데 등용했다. 칭기즈 칸은 좋은 혈통을 가진 집안이었지만 처절한 몰락을 겪었고 재기를 위해 자신과 혈연이 없는 부하들의 능력을 활용해 다시 성공한 정복자로서 삶을 살았던 인물로 그의 등용 방식은 특별한 가치로 인물사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칭기즈 칸은 인재를 등용하며 다음과 같은 어록을 남겼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칭기즈 칸이 되었다.> 큰 의미를 주는 어록이다. 현대인이 시대의 정복자로 불리는 그 이름을 부르며 아련한 노래에 추억을 담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도 오래된 위인의 이름이 담긴 음악을 되찾아 들으며 역사의 흐름을 가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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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25 17:39

[김용호 정읍시립국악단 단장 전통문화바라보기] 문화의 재발굴과 재향유

싱그러운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 다양한 기념일이 있고 각 지역엔 풍성한 축제가 형형색색 주제로 펼쳐져 그동안 잊었던 우리 삶에 쉼과 감사함을 선사한다. 외국도 5월에는 흥겨운 축제가 넘쳐나는 시기이다. 그러한 축제와 많은 기념일에 특히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제품이 있으니 그것은 굿즈(goods 특정 브랜드나 연예인 등이 출시하는 기획 상품. 드라마, 애니메이션, 팬클럽 따위와 관련된 상품)란 제품으로 콘텐츠마다 특성에 맞는 이미지와 광고가 붙어 어린이를 비롯하여 성인도 소유하고자 하는 감성을 유도하기도 한다. 브랜드 굿즈와 맞물려 조립형 장난감 Lego란 회사는 시대적 관심과 사회적 공감을 받은 콘텐츠와 연계한 상품을 개발하고 선을 보여 큰 인기를 얻었는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인기 장난감으로 남녀노소에게 모두 사랑받고 누구나 하나쯤 소장하는 히트 상품이 되었다. 우리나라 강원도 춘천시에도 장난감 디자인으로 조성된 테마파크 레고랜드가 생길 정도이니 그 인기는 단연 최고인듯하다. 현재 한국에서 인기 있는 레고는 새롭게 개발되는 것. 즉, Marvel이나 Ninjago, Chima 시리즈이다. 하지만 영국의 경우 최고 인기 레고는 단연 Star Wars로 한국과 다른 성향의 결과를 찾아볼 수 있다. 영국에서 Star Wars는 시대를 뛰어넘는 공감적 문화에 가깝지만, 한국 아이들은 Star Wars 자체를 잘 모른다. 한국 아이들에겐 낯선 인디애나 존스 같은 경우도 이곳 아이들에겐 상당히 인기 있는 캐릭터이다. 유럽은 한국에 비해 세대 간의 문화적 단절이나 격차 같은 것이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계속해서 새것을 추구하기보다는 옛것을 재발굴, 재향유하는 문화가 있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영국은 과거를 계속 되새김하는 경향이 큰 나라라 더욱 그렇다. TV 등에서 과거의 가요나 드라마, 영화 등을 계속 되풀이 보여주는 것도 전 세대가 공통의 문화를 누리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이다. 학교에서도 옛 가요나 영화 등을 수업시간에 자주 이용하는 듯하다. 아이들이 7, 80년대 심지어 5, 60년대의 대중문화를 접하는 기회가 많고 그러다 보니 결국 부모와 아이가 같이 즐기는 문화들이 많아진다. 과거의 대중문화는 유행 지난 구닥다리로 취급받으며 그 시대의 향유자 외의 사람들에겐 완전히 낯선 것이 되는 우리의 풍토와는 꽤 다르다. 한 나라의 문화 정체성은 발굴과 향유에 있다. 지나간 대중문화가 낯선 취급을 받는 시대에는 전통문화의 가치도 더욱 빛을 잃는다. 고른 시대의 문화 향유는 더욱 다양한 가치를 창조하며 존재의 우수성을 이루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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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18 17:56

[김용호 정읍시립국악단 단장 전통문화바라보기] 우우당의 기억

서울 노원구와 의정부 양 둘레를 아우르는 수락산. 그곳에는 유장한 벽운동 계곡이 있는데 계곡이 시작되는 입구를 조금 걷다 보면 우우당(友于堂)이라는 터가 나온다. 우우당은 사도세자의 비(妃)이며 정조대왕의 어머니였던 혜경궁 홍씨가 어릴 적 많은 시간을 보낸 곳으로 홍씨의 아버지이자 삼(三)정승을 역임한 홍봉한의 별장이기도 하다. 지금은 터라는 곳을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조그만 출입문과 담장 그리고 말을 묶던 주춧돌만이 남아 아련한 역사의 기억을 잇고 있다. 혜경궁 홍씨를 생각하면 필자는 두 가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대왕이 어머니 마음을 위로하려 차린 회갑연이요. 또 하나는 홍씨가 쓴 한중록이다. 필자는 전통예술가의 삶을 산지라 널리 알려진 한중록보다는 회갑연의 기억이 더욱 선명하다. 과거 국립국악원은 전통문화 가치를 재발견하고 조명하기 위해 조선 왕실 음악과 춤 소재로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특히 2001년 초연된 <태평 서곡>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내용이 담은 작품으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속 고증으로 만들어졌다. <수제천>, <여민락> 등의 궁중음악과 <무고>, <선유락> 등 화려한 궁중무용이 충실히 재연되었다. 사실 1795년 수원 화성에서 연행되었던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은 단순한 잔치나 연희의 수준을 넘는 궁중문화의 결정체였다. 그러한 이유로 국립국악원에서는 전통음악, 전통무용뿐만 아니라 궁중 복식과 의물 등 평소 접하기 어려웠던 궁중의 문화를 함께 담고자 노력했으며 작품 완성도에도 많은 세심함을 배려했다. 이러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재현 작품은 2001년 초연 이후 200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과 2010년 파리 일드 프랑스 페스티벌 등에 초청되면서 세계의 많은 관객에게 뜨거운 찬사를 받았으며 2010년 7월엔 국내 부산에서도 국립부산국악원과 국립국악원 본원과 협업, 공동제작을 통해 재발표되었다. 그 당시 필자는 국립부산국악원 악장으로 집박(궁중음악과 무용을 지휘하는 직분)의 역할을 맡아 함께 참여하였는데 한국 정신문화의 정수인 효(孝)와 예(禮)를 알리는 보람된 작업으로 현재까지도 생생히 기억되고 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고 친정인 풍산 홍씨의 몰락을 탄원하며 자신의 친정 집안을 신원(伸寃)하기 위한 목적으로 집필한 문집으로 현재 3대 궁중문학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평탄치 못한 삶을 살았던 혜경궁 홍씨. 지아비를 안타깝게 잃어야 했던 불운. 아들인 정조대왕의 정성 어린 효.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들과 처가를 지키시고자 노력했던 강직함. 이젠 수락산 우우당의 자취는 사라졌지만 간직된 효와 예의 이야기는 후대에 소중히 전해져 간직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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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11 18:07

[김용호 정읍시립국악단 단장 전통문화바라보기] 한국 풍류의 멋 “샘소리터”

지난 미세먼지가 온 세상에 가득한 토요일, 정읍 내장산 어귀 “샘소리터”라는 한 가옥에서는 한국 풍류의 멋을 알리는 작은 음악회가 있었다. 마치 세상에 뿌려진 더러운 먼지와 기운을 없애는 듯 아정한 풍류 선율은 오신 한분 한분의 심신을 치료해주는 묘약과도 같았다. 풍류란 의미를 찾아보면 <속된 일을 떠나 풍치(風致) 또는 운치(韻致)가 있고 멋스럽게 노는 일>이라 칭한다. 그래서 우리는 음악과 관련해 풍류를 잘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을 풍류가 또는 풍류객이라 불렀다. 옛 우리 민족은 조선, 고려, 삼국 등 왕조의 제도적 관제에서 궁중 연희를 필요한 요건으로 포함시켰고, 그러한 귀속된 행위에는 악공이라는 직책을 두고 책임을 맡아 관장하게 했다. 제도적 관제를 벗어난 민간 즉 궁중 밖 일반 백성에게도 풍류가 있었으니 그러한 행위도 소위 민간잔치에서 치러진 풍습으로 이어졌다. 단지 민간에서는 전문적인 악공이 없는 관계로 창우·광대·재인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이렇듯 풍류란 관(官)과 민(民)이 모두 함께하던 전통의 순수 문화였으며 즐기던 민족 전통예술이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지식과 재부(財富)를 겸한 중인층이 시회(詩會)나 가단(歌壇)을 형성하여 민간풍류를 새로운 풍류로 발전시켰다. 그런 풍류의 음악문화는 성악인 '가곡·가사·시조', 기악인 '영산회상(靈山會相)' 등 새로운 갈래의 민간 풍류로 이어졌으며 조선 후기 음악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우리나라 민간풍류의 실질적인 개척자로는 단소 명인인 추산(秋山) 전용선(全用先) 명인이 계신다. 그는 전라북도 정읍 입암면 출신으로 정읍지역 풍류계인 아양계와 초산율계 등 지역 풍류의 전승과 보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본인이다. 전용선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편재준, 나금철, 유종구 등이 있으며 그가 전한 풍류는 후에 한국의 민간(이를 향제鄕制라 부르기도 한다) 풍류의 주춧돌이 된다. 정읍 내장산 '샘깊은소리회'는 풍류 가인(佳人) 김문선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로 대한민국 풍류의 초석이라 할 수 있는 정읍 풍류 맥을 잇고 있는 순수 민간 풍류악회이다. 매주 정읍의 지역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학습하며 풍류를 즐긴다. 진정 풍류가 좋아 음악을 함께 즐기는 모임으로 한국 전통예술이 살아 숨 쉬는 전승(傳承)의 현장이라 하겠다. 진정한 민간(향제鄕制)풍류란 정형화된 무대가 아닌 이렇게 삶의 현장 속에서 몸과 마음을 함께하며 일구어낸 음악이 아니었을까? 그날의 공연을 보며 내심 우리의 전통문화를 올곧게 지키는 이는 바로 전문 예술가들이 아닌 우리 가족이고 친구이며 이웃들이라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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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27 17:30

[김용호 정읍시립국악단 단장 전통문화바라보기] 경사스러운 터의 두 사자

전주 한옥마을 가다 보면 전동성당 앞 큰 궁궐이 지어져 있는데 그곳은 모두가 아는 바로 ‘경사스러운 터에 지은 궁궐’이란 뜻의 “경기전(慶基殿)”이다. 조선이 건국되자 왕의 권위를 만방에 알리고자 세워진 건물로써 건립 시기는 1410년인 태종 10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화)을 모시기 위한 목적으로 창건됐다. 현재 경기전에 안치된 어진은 국보 31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872년 서울 영희전의 영정을 초상화의 대가인 운계 조중묵이 모사(模寫)한 것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태조의 어진이다. 예로부터 임금의 용안을 보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실제로 임금의 용안을 본 사람도 적을뿐더러 신변 보호를 위해 모습을 드러내는 적도 드물었다. 이러한 차로 귀한 어진을 모셔 놓은 경기전의 위엄은 남달랐다. 우선 경기전 입구에 “하마비(下馬碑)”라는 석비(石碑)가 있는데 자그마한 위엄의 동물을 세웠다. 이 돌상은 특이하게도 암수 두 마리의 돌 사자상으로 되어 지나치는 사람의 경계를 자극한다. 또한, 지방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흰 대리석 돌기둥의 두 행(行) 세로 형식의 글이 쓰여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곳에 이르렀거든 모두 말에서 내리라.(至此皆下馬) 잡인들은 출입할 수 없다.(雜人母得人)” 임금의 어전이 있는 경기전은 항상 신성한 곳이므로 함부로 몸을 두어서는 안 되며 지위와 신분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려야 하고 특히 잡인은 애초부터 출입을 금지한다는 뜻이다. 경기전 앞을 많은 시간 다녀 보았지만 정작 하마비의 글과 두 돌 사장상을 자세히 보기엔 처음이었다. 내심 경건한 마음까지도 생기던 차, 두 돌의 모습이 ‘해태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었지만 역시나 섣부른 판단은 무지한 까닭이고 문헌을 찾아보니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은 사자 숫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사자 암놈’이라 기록되어 있었다. 즉 암수 사자 한 쌍이 특유의 조화를 이루면서 경기전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무심코 지나간 경사스러운 터 “경기전” 그리고 그 아정함과 태조 어진의 위엄을 지키는 “하마비”는 풍패지향 전주를 외치며 애향심을 보듬었던 필자 무지(無知)의 부끄러움 속에 스며들었다. 한때 정유재란(1597년)으로 경기전이 불에 타자 태조의 영정은 정읍-아산-강화-묘향산 등지로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광해군 6년인 1614년 가을에 관찰사 이경진에 의해 경기전을 다시 짓게 되고 어진을 비로소 모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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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20 18:09

[김용호 정읍시립국악단 단장 전통문화바라보기] 씨앗 호떡집에 불났네

며칠 전이다. 주말을 이용해 가족과 함께 부산하고도 자갈치시장 더불어 남포동에 바람도 쐴 겸 나들이를 하러 갔다. 코로나19의 역병이 끝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이 주말을 이용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나들이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참 반갑고 기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자갈치시장에서 회 한 접시로 식사하고 부산의 중심지 남포동을 갔는데 신묘한 장면을 목격했다. 그 모습은 남포동 씨앗호떡을 파는 길거리 포장마차의 풍경이었는데 대기 순서를 기다리는 줄이 약간의 거짓말을 섞어 자그마치 한 1km는 되는 것 같았다. 인산인해(人山人海)의 사람들은 버터에 튀기는 씨앗호떡이 신기한 듯 내심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필자 또한, 익히 소문에 들은 씨앗호떡의 자태를 보니 구미(口味)가 당겨 발걸음을 멈추고 순서를 기다리게 되었다. 호떡을 바라보니 많은 생각이 났다. “보통 호떡은 겨울에 생각나는 간식인데? 신기하게 사람이 많네. 호떡은 우리 전통음식인가? 중국 음식인가? 호떡 안에는 도대체 무엇을 넣어도 맛이 있네. 짜장면 같은 음식이네 등등” 순서를 기다리는 긴 시간 동안 마치 요리연구가 된 듯 필자의 궁금증은 더해갔다. 이 글을 읽는 우리 독자들도 씨앗호떡이 뭐길래 하는 궁금증이 있으실까 봐 잠시 맛난 호떡에 대해 논해 보고자 한다. 호떡을 문헌에 찾아보니 우리의 전통음식도 중국의 고유 음식도 아니었다. 호떡의 ‘호’는 한문 ‘胡’인 오랑캐를 뜻한다. 즉 호는 서역(西域), 지금의 중앙아시아와 아랍 사람을 일컬어 부르던 명칭으로 이름에서 보듯 호떡은 오랑캐인 호인들이 만들어 먹던 떡에서 유래되었다. 중앙아시아에 삶의 터전을 둔 흉노족과 돌궐족은 쌀보다 밀이 더 많이 생산되는 관계로 밀가루를 반죽하여 화덕에 굽거나 기름에 튀겨 먹는 주식(主食)의 문화가 있었다. 그러한 지역의 특수성에 의해 즐기던 호떡은 기원전 2세기 무렵 흉노족의 왕자가 처음으로 중국 본토인 한나라로 유입한 후 동아시아까지 그 맛을 전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호떡 유입 기원은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 시기쯤이라 논하는데 그 당시 전쟁이 끝나고도 본토로 돌아가지 않은 중국 상인들이 생계를 위해 만두와 호떡과 유사한 음식을 팔기 시작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처음엔 호떡의 속 내용물로 설탕이나 조청 등을 넣어 만들었으며 시대가 변화하면서 취향도 다양해져 치즈, 씨앗, 꿀 등 많은 재료가 들어가게 된다. 부산은 1980년대 후반 남포동에서 각종 견과류를 넣어 판매하면서 씨앗호떡이 생겨났다. 건포도, 해바라기씨, 땅콩 등의 견과류로 속을 채워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맛을 추구하는 특별한 호떡이 되었다. 부산 외에도 한국의 호떡은 충남 당진 황가네 호떡, 속초 찹쌀 씨앗호떡 등 지역의 특별한 맛으로 재탄생하여 많은 식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이제 <호떡집에 불났다>라는 표현이 왠지 어색하지 않게 들려온다. 호떡은 그렇게 우리 대한민국 전통문화 속에 작은 쉼표를 만들며 지역의 든든한 간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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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13 18:05

[김용호 정읍시립국악단 단장 전통문화바라보기] 진양조를 만든 김성옥

가왕 송흥록 친누님의 남편이었던 김성옥(金成玉)은 정조 19년이던 1795년 충남 강경에서 출생하여 전라북도 여산에서 생활하며 활동하던 시대 명창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소리에 타고난 신동이었지만 집안이 궁핍한 환경이어서 재능을 펴지 못할 어려운 사정이었다. 김성옥은 그러한 환경에 굴복지 않고 소리에 대한 열정을 높여갔는데 이른 14세에 계룡산으로 들어가 소리 공부를 하게 된다. 하늘도 그의 맘을 알았을까? 피나는 노력과 인내 끝에 입산한 지 10년이 되던 해 그는 득음대성(得音大成)하여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김성옥은 춘향가 중에서 <사랑가>를 잘 불렀다. 하루는 전라감사의 부름을 받고 선화당에서 소리를 하게 되는데 청중은 그의 첫소리만으로도 감동하여 매력에 빠지게 된다. 김성옥의 맑고 아름다운 성음 그리고 풍성한 성량은 듣는 이로 하여금 탄복을 자아냈다. 저마다 “성대 제일인자의 명창”이란 극찬을 하게 되었고 그의 명성은 하늘을 치솟듯 올라갔다. 그러나 김성옥은 계룡산에서 수련할 때 굴속 냉골 방에서 10년 동안 기거하고 오랜 시간을 제대로 먹지 못한 관계로 몸은 쇠약해 있었고 외모는 병에 걸린 사람인 듯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여산군수의 생일연에 불려가 소리를 하는데 김성옥은 소리 도중 갑자기 비명을 지르고 다리를 주체못해 쓰러지게 된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 내로라하는 명의를 불러 침도 맞고 약을 먹어 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판명된 병명은 학슬풍(鶴膝風). 마치 학의 다리처럼 가늘면서 무릎만 붉게 부어올라 고통이 심해, 마치 산 송장처럼 누워있을 수밖에 없는 고약한 병이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자결하려 했으나 애원하는 아내의 눈물과 설득으로 마음을 다시 잡는다. 등을 받쳐 겨우 밥을 먹었고 대소변을 받아내는 등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는 아들인 김정근에게 자신의 기량을 전승하며 소리에 대한 애정을 쏟는다. 이때 장단에 대해 특별한 고민도 하게 되는데 <진양조>라는 장단을 창안하여 사용하기에 이른다. 순조 22년이던 1822년 어느 날, 김성옥의 처남 송흥록과 송광록은 병문안 차 왔다가 고마움의 화답으로 부른 <진양조> 소리를 듣게 된다. 이때만 하더라도 판소리 중 가장 느린 장단은 <느린 중모리>로 한계가 있었다. 이보다 더 느리고 애처로운 장단인 <진양조>를 그 자리에서 듣게 된 송흥록은 흥분하여 감탄을 자아냈고 이에 김성옥은 송흥록에게 <진양조>를 더 다듬어 완성케하여 세상에 전해달라는 소원을 청한다. 그 후 가왕 송흥록에 의해 <진양조>의 완성은 최고에 이르렀고 우조(羽調)와 계면조(界面調)가 어우러져 소리의 극치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김성옥은 천재의 빛을 다하지 못하고 순조 25년인 1825년 31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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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06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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