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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아현 소설가-권진희 '언제라도 전주'

서울에서 전주로 다시 내려오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혹자는 나를 붙잡으며 내려가면 심심해서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때는 자신도 떠밀려가는 느낌이 들어 우물쭈물하느라 속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언제고 그때의 선택이 알맞았다고 자부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그에 대한 대답을 상상해 보면 어떨까. 신변잡기의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할 말은 다음과 같다. 전주에서 사는 일은 꽤 분주하고 바쁘다! 날이 좋으면 천변과 근교의 산책로를 걸어야 하고, 여름이 되면 시원한 도서관으로 피서하러 다니고, 틈틈이 전주국제영화제, 책쾌, 독서대전을 구경하러 나서야 하고, 때때로 무형유산원에서 열리는 공연도 보러 가야만 하고, 온갖 생활체육대회와 축제를 즐기느라 바쁘다고 말이다. 물이 좋은 동네라서 늘 맛이 좋고 신선한 식재료며 제철음식이 눈에 띈다. 그러나 즐길 것이 넘쳐나는 통에 잠시 해찰하면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날짜가 지난 현수막을 보며 바닥에 발을 구르는 일은 매년 일어나고 있다. 그러니 항상 고개를 죽 늘이고 두리번거리며 재미와 제철 따위를 찾아다녀야만 한다고. 숨도 쉬지 않고 말할 수 있을 테다. 이런 나의 심정을 한 권으로 정리한 책을 찾았다. 여느 때처럼 콩나물국밥을 시원하게 한 그릇 먹고서 남부시장을 어슬렁거리던 날이었다. 책날개 속 작가 소개가 내 마음을 한 번에 훔쳤다. ‘전주에 살면 무슨 재미냐는 말에 맛집과 책방 이름으로 랩을 하고, 지하철이 없으면 뭘 타고 다니냐는 말에 한옥마을에서 비빔밥을 타서 전북대에서 콩나물국밥으로 환승한다고 농담합니다.’ 작가 소개에서도 느껴지듯이 『언제라도 전주』는 작가가 전주에 가지고 있는 애정뿐만 아니라 그의 취향, 시선, 유머로 가득하다. 겹치는 것이 있으면 반가움에, 새로운 것이 있으면 호기심에 정신없이 책장을 넘겼다. “어떤 사람들은 고작 며칠 머문 다른 나라 다른 도시 전체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머문 시간만큼, 헤맨 땅만큼 겨우 알 뿐이다. 여행지 뿐만 아니라 고향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더 큰 도시, 더 많은 가능성과 더 다양한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도시를 동경한다. 그러나 짐작뿐이지 않나. (133쪽)” 이 구절이 마음이 콱 박혔다. 언젠가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왜 전주에 있으려고 해요?’ 그때 나는 오래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전주만큼의 분주함이 좋아요’ ‘도시는 고유한 속력을 갖는다’라던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전주만의 고유한 속력이 딱 알맞은 사람인 셈이다. 돌아오는 주말에 건지산 둘레길을 걸어볼 요량이다. 언젠가 가봐야지 하고 미뤄둔 것이 벌써 수년이 되었다. 작가는 가을의 건지산을 추천했지만 예습하는 셈 치기로 했다. 책 안에는 가까워 언제든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다 한 번도 가지 않은 여러 얼굴의 전주가 수두룩하다. 이참에 다같이 『언제라도 전주』의 목차 중 무엇이라도 골라 새삼스레 전주 여행을 시작해 보면 어떨까. 최아현 소설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아침대화>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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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09 19:25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경옥 동화작가-로이스 로리 '기억전달자'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여름의 태양이 강렬하게 내리쬐고 있다. 빨간 태양은 불길처럼 타오르고 해가 질 때는 사위어가는 빛깔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나뭇잎들은 금방이라도 초록 물이 주르륵 흐를 것 같다. 아무리 바빠도 계절에 따른 변화를 민감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여름 한가운데에 놓인 여러 색깔과 형태의 다름은 다양한 감정을 불러온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에 색깔이 사라진다면, 계절이 사라진다면,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선택하지 않아도 먹는 것과 직업에 대한 고민이 없어지고, 아이를 낳지 않아도 배급받을 수 있다면, 나이가 들어도 질병이나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감정의 동요 없이 일상을 맞이하고 보낼 수 있다면 어떨까? 무채색의 사회, 변화가 없어서 ‘늘 같음 상태’를 유지하는 사회라면? 위와 같은 사회를 보여주는 작품이 ‘로이스 로리’의 ⟪기억 전달자⟫이다. 작품 속 사회는 모든 것이 규격화되어 있다. 아이를 낳는 산모가 따로 있고, 차이가 가져오는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해 거울도 없는 사회,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나이도 정해져 있고, 주머니가 있는 재킷을 입는 것도 선택할 수 없다. 1년에 50명의 아이만 낳을 수 있는 사회, 배우자도 신청해야만 한다. 이곳은 공동체에 적합한 사람이 되도록 표준화된 교육을 받는다. 가정마다 스피커가 있어서 모든 것을 통제한다. 마치 ⟪1984⟫나 ⟪멋진 신세계⟫처럼 암울한 미래 세계를 보여준다. 살아가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에 당혹스럽기도 하고, 위험한 일에 직면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인간의 나약함에 무기력해지기도 하지만 끝끝내 이겨내기도 하고, 반전이 펼쳐지기도 한다. ⟪기억 전달자⟫속의 규격화된 사회도 흔하지 않지만 우발적 상황을 맞닥뜨린다. 이에 대처하기 위한 최후의 처방은 ‘기억 전달자’이다. 기억은 과거로부터 모든 어려운 상황을 겪어낸 경험의 축적이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기억을 가지지 못한다. 즉, 색깔, 계절, 사랑, 할머니, 할아버지, 죽음, 전쟁, 고통, 행복, 크리스마스의 저녁, 썰매, 언덕, 냇가, 초록의 나뭇잎 등을 기억 전달자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일상에서 너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사라진 도시. 그러나 ‘늘 같음 상태’가 유지되어야 평온하다고 여기는 이곳도 우발적인 현상 앞에서 당혹스러워한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게 과거의 기억이다. 기억은 평안함을 위한 처방전인 셈이다. 과거 선조들이 경험했던 기억들. 그 사회에서 주인공 ‘조너선’이 12살이 되던 해 직업 직위를 받는데 ‘기억 전수자’가 되어 기억 전달자로부터 그동안 알지 못했던 감정들을 하나씩 전수받는다. 그러면서 자신이 속한 사회가 철저하게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아버지가 산모들이 낳은 아기들을 키우는 보육사이면서도 몸무게가 미달 된 아이들을 임무해제 시키는 것을 목격하고 절망한다. 임무해제는 이 사회에서 필요 없는 존재를 죽이는 것이다. 아무런 죄의식 없이 몸무게가 미달 되거나 밤에 우는 아기들은 임무해제 시킨다. 조너선은 기억 전달자로부터 사랑과 기쁨, 고통, 전쟁, 추위, 햇볕의 따스함, 가족의 일상, 하늘에서 내리는 눈에 대한 감촉들을 느끼며 용기라는 감정을 전수받고 자신이 사는 곳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꾼다. 조너선의 집에서 돌보던 가브리엘은 밤에 운다는 이유로 임무해제를 앞두고 있다. 조너선은 어두운 밤, 가브리엘을 자전거에 태우고 마을을 떠난다. 마을을 벗어나자 비를 맞기도 하고, 배가 고파 산딸기나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아 허기를 채우며, 눈보라 속에서 추위에 떤다. 평온하고 안락한 것을 버리고 오직 기억 전달자가 전해준 따스함과 사랑을 기억해내며 발길을 멈추지 않는다. 조너선이 선택한 삶은 평온을 깨뜨린 것이다. 평온 대신 인간의 희로애락을, 많은 감정을, 자연에 펼쳐진 색깔을, 계절을 얻었다. 이제 일상은 위험과 고통, 인내와 고난과 아픔과 상처, 슬픔, 우울, 연민, 증오, 체념 등을 안고 살아내야 한다. 그러나 조너선의 선택에 위로를 건네지 않으련다. 입체적인 일상 속에서 다양한 삶의 결을 느낄 수 있으니까. 다양한 기억을 소유하고, 자신의 기억까지 만들어가는 삶은 누군가의 길잡이가 될 것이라 믿는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힘겨운 시간도 미래의 등불이리라. 이경옥 동화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두번 째 짝>으로 등단했다. 이후 2019년 우수출판제작지원사업과 지난해 한국예술위원회 ‘문학나눔’에 선정됐으며, 2024년 안데르센상 창작동화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의 저서로는 <달려라, 달구!>, <집고양이 꼭지의 우연한 외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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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02 18:25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오은숙 소설가-시몬느 드 보부와르 '아주 편안한 죽음'

2025년 5월 8일, 향년 79세로 타계하신 스승께서는 생전에 단언하신 바 있다. 문학의 본령은 깃발을 꽂는 데 있다고. 문학은 모든 예술 활동 중에서도 가장 느리게 도착하는 후발대지만, 그 느림 속에서도 깃발을 꽂는 행위로 인간의 삶 한가운데 종지부를 찍는다고. 이후로도 삶은 이어지지만 그것은 변주일 뿐이라고. 그러니, 느리게 간다고 초조해할 필요 없고 빠르게 간다고 우쭐할 것도 없다고. 스승의 단언에 오독이 없길 바라며, 청년 시절 고향 강릉을 떠나온 스승께서 환갑이 넘어 다시 찾은 뒤에 하신 말 또한 깃발에 관한 것이었다. “마침내, 내 이름이 새겨진 깃발을 고향 땅에 꽂았다.” 그 한마디가 닫힌 강의실 안을 감돌던 회환과 맞물려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았다. 뚜렷한 인과를 설명할 순 없지만, 아마도 그때부터 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준비했었는지 모른다. 사신의 그림자가 언제쯤 어머니를 덮칠지 몰라, 마음 한구석이 불안으로 젖어 있던 날들이 많았으니. 새 정부 출범의 깃발이 오른 달에 『아주 편안한 죽음』이라는 책을 소개하자니 어딘지 어색하다. 그럼에도 시몬느 드 보부와르의 이 책은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면은 이재명 정부와 공명한다. 책은 이렇게 시작된다. “1963년 10월 24일 목요일 오후 4시.” 저자의 어머니가 집에서 쓰러지고 병원에 옮겨진 다음 날, 대퇴골 골절 소식을 전화로 들은 시각이다. 어머니는 검사 중에 암이 발견되고 한 달여 만에 세상을 떠난다. 그동안, 저자가 병원에서 어머니를 수발하며 느끼고 사유한 것들이 책의 중심을 이룬다. 끝내 타인일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고,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자신을 용서하는 것도 수발의 시간 속에서 비롯된다. 관찰과 사유의 문장이 자주 등장하며 마음과 시선을 붙잡는다. 밑줄을 긋고 그 여백에 저마다의 사유를 뻗어나가게 만드는 책이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죽음과 돌봄에 대해 더 깊은 웅덩이를 파는 경험을 하게 된다. 책 후반에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 스민다. 이를테면 192쪽에서 “엄마가 그 수요일 아침에 돌아가셨더라면 ~ 악몽과 슬픔 등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나 역시 치매에 걸린 어머니로 인해 겪은 긴 시간의 감정을 하나씩 떠올리게 한다. 193쪽 “엄마의 임종을 늦춤으로써 ~ ,”는 함께한 시간이 회한 없는 작별로 이어졌음을 드러낸다. 194쪽에서는 “공포와 고통과 싸워 얻은 승리를 통해 ~ 실상 엄마의 죽음은 비교적 편안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결국, 이 책의 제목 『아주 편안한 죽음』은 수사적 미화가 아니라 정서적 실체와 가깝다. 집이 아닌 병원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가족의 손길을 느꼈기에 다른 세계로 떠나는 저자의 어머니는 분명, 안도했다. 스승님의 말처럼, 문학은 결국 깃발을 꽂는 행위인지 모르겠다. 보부아르는 어머니의 죽음 위에 언어의 깃발을 세워 사유를 이끈다. 그것은 인간이 타인의 죽음을 곁에서 바라보며 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적 제의다. 전체적으로 소설적 구성을 띠고 있지만, 회환이나 감정의 파동보다는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을 냉철하게 응시하려는 철학적 에세이에 가깝다. 책은 죽음을 대하는 감정의 바닥을 관찰하는 동시에, 독자에게 불편하고 진실한 질문을 던진다. 오은숙 소설가는 202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을 계기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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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18 18:4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정경 시인-앤드루 포터 '사라진 것들'

지난 주말 무주산골영화제에 다녀왔다. 깊디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그 느낌이 좋아서 무주를 남몰래 애틋해 했고, 작은 영화관 하나 없는 곳에서 영화제를 연다는 그 무모함이 멋져서 매년 응원하는 마음으로 영화제 기간에 무주를 찾곤 했다. 덕유산에서 별 반짝이는 밤하늘을 처마 삼아 피크닉 매트에 앉거나 누운 사람들과 섞여 영화를 봤다. 상영작은 마지막까지 흥미로웠고, 숲을 통과하는 바람에선 서늘하고 알싸한 맛이 났다. “아까 별똥별 봤어?” 하는 웅성거림을 바람결에 들었다. 여행 가방을 끌고 어디론가 총총히 사라지는 사람들. 체력을 다 소진한 지인과 나는 이른 새벽, 굽은 길을 더듬어 집으로 돌아왔다. 조금 전까지 축제 한복판에 있었음에도 어쩐지 그 중심에서 비켜난 듯한 느낌이 선명해서 앤드루 포터의 <사라진 것들>이 떠올랐다. 이 책에는 서너 페이지 분량의 초단편을 포함해 소설 열다섯 편이 수록돼 있다. 각각 다른 인물들의 독립적인 이야기이지만, 마치 모든 작품이 연결된 연작소설처럼 읽히기도 한다. 화자가 모두 40대의 중년 남성이라는 점과 주인공이나 주변 사람이 예술계에 몸담고 있다는 공통점 때문일 수 있겠다. “참 이상한 일이다. 마흔세 살이 되었는데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다니, 삶의 어느 시점에서 잘못된 기차에 올라타 정신을 차려보니 젊을 때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곳에 와버렸다는 걸 깨닫다니. - ‘라인벡’ 부분 <사라진 것들>은 ‘잃어버린 것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첼로 연주자가 희소 질환으로 한순간에 재능을 잃어버리고(‘첼로’), 부를 거머쥔 절친한 친구가 갑자기 실종된다거나(‘사라진 것들’), 한 소녀가 부부의 관계를 영영 바꿔놓고 무성한 소문들 속으로 자취를 감춰 버린다든가(‘히메나’) 하는 사건들 말고도 일상의 작은 틈새로 조금씩 빠져나간 것들도 있다. 부모가 되기 전과 후의 삶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에 대해 다루는 ‘담배’는 아이가 생겨남으로써 변한 일상을 그린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 그 모든 게 변한다는 것을. 그런 우리가 영원할 순 없다는 것을, 첫아이가 태어나면 담배가 영원히 사라지고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와인과 심야의 여유도 사라진다는 것을. 이제 우리가 함께하는 인생은 더욱 풍부해지고, 사랑과 선의는 두 배가 되고, 집안에는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웃음과 더 많은 재미가 있겠지만 결국 우리는 줄어들겠지.” - ‘담배’ 부분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것이 사라진다. ‘한때’라고 부르는 다정함에 속해 있던 것들이 흩어지고, 흘러가고, 흐릿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과 ‘존재함’ 사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 나는 ‘상실’을 감당해야 한다. “밖에서는 가끔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 젊은이들이 허공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나는 그런 소리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된 것일까?” (‘오스틴’) 낭만이 넘쳐흐르는 무주를 떠나오면서 나는 정확히 이 문장과 하나가 됐다. 술 대신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거실의 1인 소파에 앉아 평안을 느꼈다. 때때로 “예전에 지녔던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혹은 버려두고 떠나왔다는 느낌”(오스틴)이 들고는 했지만, 그 서운함에서 한 발 비켜나면 새로운 발견이 더 많아진다는 사실. 밤의 잔디밭 위에서 얇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사랑을 속삭이는 젊은 연인과 셔틀버스 기사가 틀어놓은 트로트와 어둠의 종아리를 씻기는 계곡의 물소리 같은 것. 부재를 채우는 것 역시 시간이 우리 삶 속에 일찌감치 파종해 놓았음을 <사라진 것들>을 읽으며 깨닫게 된다. 김정경 시인은 201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 '검은 줄'로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 시집 <골목의 날씨>가 있다. 자칭 ‘산책중독자’. 오래된 골목을 유람하며 채집한 이야기로 시도 쓰고, 산문도 쓰며 살고 있다. 현재 전주문화재단 문예진흥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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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11 19:03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기명숙 작가-정양 '나그네는 지금도'

낭떠러지 같은 이별을 하고 돌아와 이 글을 쓴다. 문학의 숲, 그 박질의 땅을 뚫고 뿌리내린 커다란 나무이며 평생의 스승이셨던 정양 시인(1942~2025.5.31.)이 영면에 드셨다. 강의실에서 처음 선생님의 시를 낭송했을 때,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봄이었다. 그때 나에게 자의식이란 게 있었던가. 노년의 시인이 나지막한 소리로 시론을 펼칠 때 문학판 사이를 겉돌던 나는 검은 휘장처럼 무거웠으며 자의식은 빈약했다. 부조화의 세계였으나 시간의 균열과 주름 사이 늘 선생님의 존재는 확고부동했다. 공전하는 계절을 뒤로 총총히 사라진 선생님을 애도하며 수많은 저서 중 첫 번째 시선집 『나그네는 지금도』(2006,생각의 나무)를 다시 읽는다. 시인이 직접 고른 시선집은 연대기에 따라 엮어졌다. 1980년에 출간한 첫시집 『까마귀떼』로부터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 등 여섯 권의 시집에서 총 90편을 추렸으니 해학과 초절정의 언어미학에 편편이 충격과 경이감이 사무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미욱한 제자가 자칫 스승의 그림자라도 밟을까 두렵다. 하여 시선집에 대해 문단의 정통한 이들의 평가로 대신해야겠다. “언어적인 기교와 관념의 교감 없이 독자를 감동시킨다”라고 오세영은 평하였고 오랜 벗이었던 오하근은 “이 시대를 사는 방법과 진리를 탐구하는 방법을 제시”했다고 하였으며 박태건은 “절실한 감성과 소박한 언어 의식이 감동의 근거가 된다. 즉 직선적이고 솔직한 언어로 독자와 소통한다는 것이다. 순수한 슬픔, 그것은 개인적 차원이 아닌 큰 슬픔에서 기인한 것이기에 어렵고 현학적인 말장난이 들어갈 겨를이 없다. 심장에서 곧바로 튀어나오는, 슬픔의 최상급에서 느껴지는 극한의 아름다움을 갖는다”라고 정의했다. 문학의 미적 체험과 별도로 선생님과의 정서적 교류가 압도적이었던 나는 해학의 정신을 품격있게 풀어내셨던 당시를 떠올리며 새삼 곡진한 슬픔에 잠긴다. 정량화할 수 없는 그리움의 밀도를 가장 가까이 지켜봤던 김병용 소설가의 말로 갈음하고자 한다. “정양 시인이라는 가치중립적인 호칭을 사용할 수 없는, 정양 선생이 아니었다면 최소한 술자리의 삼 분의 일쯤은 소집되지 않았거나, 미국이나 총칼로 집권한 군인들을 덜 미워했을지도 모른다. 육회나 바지락죽의 깊은 맛도 몰랐을 것이고 이병천 형이 수도 없이 막걸리값을 치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늘 바쁜 안도현 형이 집에 들르지 않고 ‘새벽강’으로 달려오는 일도, 정양 선생이 안 계셨다면 정양 선생이 아니었다면...”. 선생님은 언젠가 나와의 인터뷰에서 “한때는 시 쓰는 걸 그만두고 암실에 처박혀 지낸 적 있어요. 정치적으로 암울한 시기였는데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이 안쓰러워서 그랬던 것 같아요. 카메라를 둘러메고 참 많이도 헤매고 다녔어요. 인간의 불행과 고통을 사진 속에 담아서 그 삶의 음영들을 재현하는 일에 심취했었다고 할까요” 또 선생님은 “세상이 많이 변했으니 문학적 상상력도 달라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그래도 시인은 문제의식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고 우리 사회를 개선하는 데 힘을 보탤 수 있어야 한다”라고 하셨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내가 늙어가는 것은 자연의 섭리니 아무렇지 않은데 제자들도 나처럼 늙어가는 것이 아깝고 서글퍼요” 이제 더는 선생님께 늙어버린 제자의 모습을 보여드리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 속으로 들어간 선생님이 벌써 그리워 나는 한동안 환상통을 앓을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우리는 선생님이 걸었던 그 길을 갈 것이다. 본디 길이란 우회와 잃음을 본질로 하지 않겠는가. 늘 그랬듯이 정양 선생님은 고독의 유배지와 다름없는 구불구불한 이 길의 배경이 돼 주실 것이라 믿는다. 기명숙 작가는 전남 목포 출신이며, 200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몸 밖의 안부를 묻다>가 있다. 현재 강의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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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04 18:40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은영 작가-티나 오지에비츠 '도시의 불이 꺼진 밤'

지난달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 대규모 정전이 발생했다. 비행기, 철도, 지하철의 운영이 중단되었고 전화, 인터넷이 끊겼다. 신호등이 꺼진 도로에서 차들은 우왕좌왕했고 멈춰 선 엘리베이터에 갇힌 사람들은 구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도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자,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고,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기도 했다. 정적과 어둠으로 뒤덮인 도시는 인간에게 두려움과 공포로 다가왔다. 하지만 모두 다 그렇게 생각했을까? 사실 도시는 사람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그곳에는 수많은 생명체가 공존하고 있다. 문득 전기가 사라진 도시를 보며 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해졌다. 그림책 『도시에 불이 꺼진 밤』에는 발전소가 고장이 나 깜깜해진 도시에서 비로소 제 존재를 드러내는 생물들이 나온다. 가재는 해가 진 뒤에도 대낮처럼 환한 호수를 견디지 못해 호수 끄트머리로 밀려났다.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살았던 곳을 떠나 불빛이 비치지 않는 조그만 땅으로 떠난 것이다. 그런데 어둠이 호수 전체를 감싸자 어릴 때 잠을 자던 호숫가의 익숙한 나무 기둥까지 가본다. 가로등 밑에 사는 분꽃은 불빛 때문에 제대로 자랄 수가 없었다. 해가 지면 꽃받침을 펼치고 다채로운 모습을 드러내는 다른 꽃을 보며 ‘나는 꽃을 피울 수 없는 걸까?’ 고민한다. 하지만 가로등 불빛이 꺼지자 비로소 꽃잎을 활짝 펼친다. 주차장 덤불 속에 사는 고슴도치 역시 밖으로 천천히 나와 밤새 돌아다닌다. 그동안 밖은 밤낮으로 시끄럽고, 밝아서, 먹이를 찾기도 힘들었다. 다른 고슴도치를 만난 지도 너무 오래라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슬픔에 빠지기도 했다. 풀밭으로 올라온 개구리는 목청껏 울어대고 날개를 활짝 펼친 나방은 곧장 어둠 속으로, 꽃들의 품 안으로 날아간다. 오소리는 새끼 오소리들에게 처음으로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굴 밖으로 나오고, 올빼미는 날개를 쫙 펼치며 날아오른다. 도시의 난개발에 밀려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던 생물들은 불이 꺼진 도시에서 당당하고 아름답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아간다. 이상기후로 지구 곳곳에서 재난이 발생하고, 신종 바이러스가 발생해 생존을 위협받는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이미 늦어버린 건 아닐까 조바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도시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것만으로 희망은 있다. 오직 인간의 편리만을 위한 개발을 멈추고, 다른 생명과의 공존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지구는 우리가 꿈꾸는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다. 도시 곳곳에서 숨 쉬고 있는 생물들이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도시 역시 평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다. 장은영 동화작가는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통일 동화 공모전, 2024 남도의병 콘텐츠 공모전 스토리 부분 대상, 전북아동문학상과 불꽃문학상을 수상했다. 2022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발표지원)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광대특공대』, 『역사와 문화로 보는 도시 이야기 전주』, 『책 깎는 소년』, 『으랏차차 조선 실록 수호대』, 『열 살 사기열전을 만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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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28 18:3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창영 작가-고대현 '어쩌다 환경인'

어떤 책은 가볍게 세상에 나오고 어떤 책은 긴 시간 숙성되어 독자들과 만난다. 『어쩌다 환경인』, 이 책은 후자에 속한다. 그만큼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환경교육’이라는 다소 생소한 단어가 등장한 이후 지자체나 교육기관 등에서 환경의 중요성과 대응 전략에 대해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 최근 들어 기후 위기, 지구 온난화 등 환경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실제로 이른 더위가 일상화되며 5월임에도 한여름 같은 기온이 이어지고 있다. 그 중심에 환경이 있음은 물론이다. 환경교육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삶과 미래에 대해 현실적이면서도 직면하고 있는 실체이다. 환경을 언급하면서 올해는 얼마나 더우려나, 또 추우려나와 같은 단편적인 감상에 그쳐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환경교육과 관련하여 다양한 형태의 연수도 이루어지고 있고 양질의 자료도 연일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일선 현장에서 교사나 일반인에게 환경교육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멀다. 당연히 학생들의 진로교육 등에서 다루는 환경 관련 비중도 미미하다. 가장 큰 이유는 교육현장에서 환경문제 전문적으로 다룰 만한 교사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경기도 교육청에도 환경을 전공한 교사가 손에 꼽는다고 할 정도이니 다른 시군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 책은 환경에 대한 현장의 현실적인 수요와 문제 해결을 위한 고민 끝에 만들어졌다. 일선 현장에서 환경을 담당하는 시민과학자, 도예가, 환경교사 등 13명의 저자는 자신들이 왜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 일을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거창한 소명의식이나 사명감보다는 자신의 일을 하면서 우리가 처한 환경의 현실을 깨닫게 되었고,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들을 환경인의 길에 들어서게 만들었다. 이 책의 제목이 ‘어쩌다 환경인’인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가 학생들과 함께 지역 환경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 그 안에서 새롭게 배우고 삶이 변화하는 모습을 읽다 보면 우리 지역의 현실은 어떤가 의문이 저절로 생긴다. 말로만 듣던 공정여행이 어떤 식으로 현지인들과 공생의 방식을 찾아가는가를 알아보는 일도 즐겁다. 유약의 중금속이 환경에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안을 마련해가는 도예가의 모습에서 우리가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도 있다. 이 책은 우리 주변에서 환경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13명의 목소리이자 우리 삶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다. 더 늦기 전에 오늘이라도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은 어떨까? 언제나 그렇듯이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때로는 가장 빠른 법이다. 장창영 작가는 전주 출신으로 2003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불교신문·서울신문 신춘문예에도 당선돼 창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사업과 전주도서관 출판제작지원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시집으로 <동백, 몸이 열릴 때>, <우리 다시 갈 수 있을까>, <여행을 꺼내 읽다>, <나무의 속살을 읽다>가 있으며 인문서로 <나무의 문을 열다>, <디지털문화와 문학교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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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21 18:55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근혜 작가-김연진 '눈물 파는 아이, 곡비'

<눈물 파는 아이, 곡비>의 곡비 ‘아이’는 이름이 없어 ‘아이’로 불린다. 청조 아씨의 꽃신을 훔쳐갔다는 도둑 누명을 쓸 때도 울지 않던 아이는 양반이 죽으면 대신 곡을 해 주는 곡비의 딸로 태어났기에 울어야 하는 운명이다. 하지만 그 일에 소질이 없기로도 유명하다. 생각해 보니 어릴 적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며칠 동안 간헐적 곡소리를 들은 기억이 난다. 엄마를 비롯해 집안 여자들이 내는 곡소리는 판에 박힌 듯 똑같았다. 하나 같이 ‘아이고, 아이고!’를 박자에 맞춰기계적으로 뱉어 내는데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듣다 못 한 할아버지가 관을 박차고 일어나서 이렇게 외칠 것만 같았다. “이놈들. 나 죽어붕게 시원혀냐? 허벌나게 울어도 모자라분디 고따구로 운다냐!” 하며 꽃상여가 부서지라 되살아나는 상상에까지 이르렀다. 그날 이후 내게 죽음이란, 다만 죽은 자만의 슬픔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살아남은 자에게 죽은 이를 애도하는 것은 형식이요 과정일 뿐이라고. 그러니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는 결론을 내리며 오래오래 살게 해달라고 천지신명께 빌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울고 싶지 않아도 울어야 하는 곡비인 ‘아이’와 반대로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아이 오생이 있다. 오생은 팽형(죄인을 솥에 삶는 벌로 삶는 척만 하는 형벌)으로 인해 13년째 살았어도 죽은 거나 진배없는 아버지를 둔 죄로 호족에 오르지 못하고 과거도 못 보는 형벌에 묶여 살아가야 한다. 벼슬길에 오르고 싶은 오생의 꿈은 잘못된 법으로 인해 시작부터 사장 당하고 만 것이다. 그런 오생에게 ‘아이’는 운다고 해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숨어 있지 말고 당당히 세상 밖으로 나가라 한다. 오생의 아버지 또한 “나는 왜 사는 걸까?”라는 오생의 물음에 “밥맛이 밥 먹을 때 나듯이 사는 맛도 살아 있으면 알게 되겠지.”라며 자신 때문에 삶의 의미를 잃은 아들에게 끝까지 살아서 삶의 이유를 증명하라며 넌지시 말을 건넨다. 오생이 처음으로 아버지의 존재 의미를 깨닫는 순간이지 싶다. 동화에서 죽음을 다루는 일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일이다.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 동화라고 그런 책임에서 비켜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작가는 곡비라는 신분과 팽형으로 존재를 부정당한 아이를 내세워 죽음이 남아 있는 자들에게 고통이 아닌 더 나은 삶을 살게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함을 조심스레 내비치고 있다. ‘오늘 누군가는 조용히 죽었고, 누군가는 울면서 태어났고, 누군가는 저렇게 웃으며 살고 있다. 어머니가 말한 인생이란 게 이런 거구나.’(p.89)에서 말하듯 탄생과 죽음은 삶의 과정일 뿐이다. 누구 하나 예외가 없는 생사의 길 위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소중한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이토록 아름다운 계절을 지키고 가꾸는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죽음을 뜻 깊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눈물이 동그란 이유는 멀리 굴러가라는 뜻이란다. 뭐가? 슬픔이나 미움이. 오늘 비가 동그랗게 내린다. 어디선가 이 빗소리에 기대 동그란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부디 그의 슬픔과 미움이 빗물과 함께 멀리 떠나가길. 더불어 오생처럼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이들을 대신해 곡비가 되어주는 건 어떨까? 김근혜 작가는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전주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장편동화 <제롬랜드의 비밀>, <나는 나야!>, <봉주르요리교실 실종사건>, <다짜고짜 맹탐정>, <베프 떼어 내기 프로젝트>, <들개들의 숲>, 청소년 소설<유령이 된 소년>, <너의 여름이 되어 줄게>(공저), 오디오북<날아라 자전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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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14 18:4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영주 작가-윤미숙 '렛츠 기릿 나나나나는 래퍼!'

아이들이 등교하고 잠깐 쉬는 새,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사연에 귀가 세워졌다. 유치원 다니는 아들의 장래희망에 관련된 얘기였다. 달리는 차 뒤꽁무니에 무사안착 하는 청소부가 되겠다는 맹랑함에 끌렸다. 아이에게는 어벤져스급 푸른 꿈에 진지했다. 엄마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DJ는 아주 설레어했다. 아이는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계획적으로 밝혔다. 엄마는 철없는 아들을 말려달라는 의도인데 듣는 사람은 신통하고 무엇이 될지 흥미진진해졌다. 사연을 듣던 나도 아이가 크게 될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도 아들의 미래가 궁금한 마음이 있어 사연을 보냈을 심상도 있었길 기대했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다 하라고, 한없이 다 해보라고 더 일찍 말했더라면…… 이제 와서야 달라졌을까! 아쉬움, 미련의 앙금으로 스멀스멀 올라온다. 한국 안데르센 대상작 『렛츠 기릿 나나나나는 래퍼!』는 부모가 지도하는 것이 아닌 자유롭게 스스로 키워가는 과정을 알려준다. 동화 속 경주는 기타와 랩 사이에서 갈등한다. 기타 연주로 인정받는 경주다. 그럼과 동시에 매료된 랩을 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오케스트라의 바이얼린 주자인 엄마는 경주와 신경전이 팽팽했다. "하고 싶은 것/ 해야 하는 것/ 하고 싶은 거/ 먼저 하고 싶은데/ 돼돼돼/ 하고 싶은 거/ 먼저 해도 돼/ 돼돼돼/ 하고 싶은 거‘먼저 해도 돼/ 돼돼돼/ 나나나나도 음악해도 돼/ 공부해도 마음이 편치 않아/ 나의 미래가 편치 않아/ 내 책가방의 무게는 헉헉헉 "<본문 랩 중에서> ‘난 진짜로 랩을 하고 싶나?’ 번민에 번민을 거듭하며 자신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망설이지 말고 던져/ 내 멋대로 던져/ 똑똑한 그것보다 독특함을 살려/ 시키는 대로 하기보다 내 멋대로/ 내 생각대로 씽씽 달려"<본문 랩 중에서> 머뭇대던 경주에게 랩은 자꾸 ‘Let’s get it!’ 일깨운다. 스토리가 역동적이어서 읽는 내내 후끈하다. 글 속에 사이사이에 나오는 랩은 느슨할 간격을 없애고 촘촘하게 엮었다. 윤미숙 작가가 이 작품을 위해 자료를 수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으리라 짐작된다. 오케스트라, 기타, 랩 등등 음악가와 래퍼가 얼마나 노력 끝에 만들어졌는지 가히 느껴진다. 작품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수없이 확인하고, 실행을 반복했을 것이다. 아이가 마음껏 경험하도록 길을 것을 통감하게 만드는 책이다. ‘돼돼돼!’는 방치, 방관이 아닌 가능성을 열어준다. 『렛츠 기릿 나나나나는 래퍼!』는 아이가 쑥쑥 성장한다. 자신의 이상과 의욕을 자유롭게 스스로 키워가는 과정에 고개가 끄덕여지게 한다. 아 참! ‘영, 아니다 싶으면 유턴해.’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할 뿐더러 되돌아오는 것도 일러줘야지 덤으로 알게 해준다. 성장판이 멈추지 않게 가능성을 부여하고 바라봐 주는 것, 여유가 아닌 여유로 곁을 두는 일이 양분이 될 때를 배운다. ‘다시 키우면 잘 키울 텐데’ 후회는 접어두고, ‘Let’s get it!’ 외쳐라. 김영주 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수필당선, 2018년 《동양일보》 동화 신인문학상, 저서로는 『레오와 레오 신부』, 『가족이되다』, 오디오북 『구멍난 영주씨의 알바보고서』, 『너의 여름이 되어줄게』공저. 『크리스마스에 온 선물』이 있다. 현재 아이들과 동시쓰기를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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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23 18:0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정숙인 작가-이선애 '방울을 울리며 낙타가 온다'

이삼십 대엔 월급을 타고선 월례처럼 서점엘 갔다. 요즘엔 서점보다 도서관의 서고에 더 매력을 느낀다. 다른 작가나 시민의, 책을 골라 읽는 큐레이션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올봄, 전주시립 완산도서관의 <자작사색> 입주 작가로 3층 책장의 두 칸을 큐레이션 하게 되었을 때, 이선애 시인의 『방울을 울리며 낙타가 온다』를 선보인 적이 있다. 에로티시즘으로 읽어야 할지, 자기 구현으로 읽어야 할지. 그의 시는 상처투성이의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에 멈추지 않고, 공감 이상의 세계, 그 고통의 세계로 거침없이 들어가는 것이다. 상처와 어둠을 이해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함께 버티는 것이다. 그의 시는 매일의 뉴스, 내가 기억하거나 잊었거나 어떤 사건의 뒤를 추적하게 했다. “산다는 것은 머리를 박고/ 목숨을 불꽃 위에서 꽃피우는 것”(「사랑의 기술 2 –가스레인지」) “꽃잎은 그렇게 죽음을 앞지른다” (「사랑의 기술 3 –업사이클링」) “들여다보면 희생도 이기적이다/ 강산은 그저 변하지 않고/ 나를 통하여 너에게 간다/ 악역은 늘 나의 몫” (「사랑의 기술 4 -전골」) 한때 저자의 스승이기도 한 이은봉 시인은,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이 12년만인 2020년에 첫 시집을 낸 것에 대해 추천사를 붙이는 일이 감개무량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꼼꼼하게 뜯어 읽어야 그의 시가 지닌 깊이에 이를 수 있다고. 프랑스 시인 랭보의 말을 빌려,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라며 상처를 드러내지 않고 향기 있는 시, 좋은 시를 쓰기는 어렵다고. 그가 제 시를 상처의 기록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기인한다고. 시인의 말에서 그는 “한 발자국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공중을 펼쳐 놓고/ 발자국을 더듬었다./ 발이 푹푹 빠졌다 그때 낮게 하늘을 나는/ 한 무리 새들의 흰 배가 보였다./ 여린 숨결이 밀고 가는 굶주린 탈주/ 새들의 바닥은 하늘이구나!/ 오독의 천국에서 시간을 눌러 죽였다.”고 했다. 그의 모든 삶과 공간은 슬픔과 고통을 기록하는 작업실로 존재한다. “완성은 언제나 미완성보다 쓸모없는 것인가”(「안나푸르나 –산 혹은 밤」) “사라진 과거는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방울을 울리며 낙타가 온다」) “사라진 과거는 돌아오지 않고”(「공룡발자국 옹달샘」) 시인은, ‘내 몸’이 ‘어린 神이 태어나는 고요한 능선, 정신만 외롭게 빛나는 사막’임을 놓치지 않는다. ‘서늘한 카페’에서 ‘진한 아라비카 커피가 목젖을 적’시면 ‘실재와 악몽 사이에서 기호를 낳는 자궁’이 된다. 그의 과거는 지하도시 같은 비밀스러운 카페와 책꽂이가 가득한 도서관이나 자신의 서재와 같은, 침묵이 으르렁대는 절집, 또는 그의 모든 기록의 장소인 사람, 그 장소를 통해 공간과 시간을 낙타의 가시 돋친 붉은 꽃을 먹으며, 환골탈태의 고통을 견디고 버티지 않고서는 다다를 수 없는, 창작의 쾌감을 기다린다. 사라진 시간을 놓친 슬픔과 그리움, 자기검열의 공간. 그의 시 한편한편은 각각 하나의 방에 들어있다. 원고지 한칸한칸의 네모난 방에 든 것이다. 그의 시집은 아파트 한 동 같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았고, 언제나 현재형으로 살아있다. 그의 네모난 원고지, A4, 워드 자판은 세계이며, 모든 시로 향한 거울이다. 시인은 수없이 많은 방에, 과거의 기록을 가진 사람을 들이고 타자와 자신의 경계를 허문다. “한 줄기에서 태어난 수많은 잎사귀/ 똑같이 제 몫의 햇살 나누어 갖는다/ 그의 붓 자국이 내게로 건너온다”(「사람주나무」) 과거, 현재, 미래가 섞여 있는 것이 시이고, 시의 순간은 지난 시간을 더듬는 자리에서 온다고, 시는 우리가 지나온 과거의 발자국에 대해서만 물을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정숙인 작가는 2017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백팩'으로 등단했다. 작품으로는 몇 편의 단편소설과 채록집 <아무도 오지 않을 곳이라는, 개복동에서>(2017)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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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16 18:1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영종 시인 – 김해자 외 ‘시 읽는 일이 봄날의 자랑이 될 때까지’

여기 펜이 있습니다. 4+1입니다. 샤프심과 빨강, 초록, 파랑, 검정 펜이 들어있어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찾아봅니다. 플라스틱, 금속, 스테인리스강, 염료, 벤질 알코올, 지방산, 흑연, 햇빛과 달빛의 속삭임, 바람의 귀 기울임 등등 헤아릴 수 없군요. 어느 노동자의 땀과 숨결이 섞였을 수도 있어요. 걷는사람 시인선 100호 기념 시집 〈시 읽는 일이 봄날의 자랑이 될 때까지〉는 98명의 시를 한 편씩 가리어 뽑았어요. 제목은 문신의 시 ‘시 읽는 눈이 별빛처럼 빛나기를’에서 가져왔고요. 생각은 힘이 셉니다. 마을 사진을 찍는 드론에 탈 수 있어요. 빈틈이 있어 많아진 물이 흐릅니다, 적으나 정밀한 불이 타닥타닥 무얼 짓고요. 강하고 견고한 바위가 새소리처럼 질문을 던지기도 하죠. 흩어져 있지만 실한 흙은 콧노래 부릅니다. 두 최고봉을 봅니다. 걷는 사람과 걷지 않는 나무. 다 달라, 하나하나가 시입니다. 가지가 굽었거나 썩었다고 사람과 나무를 비난할 순 없습니다. 칭찬할 걸 찾아 눈과 귀를 엽니다. 그들이 고래처럼 펄럭펄럭 춤을 출 수 있으니까요. 그들이 되어봅니다. 누군가 읽어주길 기다리며 한자리를 지켜온 그들은 자신들의 나이테가 읽을거리가 되는지 어떤지 자책에 떨지 모릅니다. 이름을 부릅니다. 누가 지어주었나, 어떤 (무)의미가 있나, 물어봅니다. 그들에게 코를 기울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배달하는 그들의 내음이 올라옵니다. 펜 하나 눌러 시 하나 펼쳐 봅니다. 경제, 과학기술, 외교, 지역 균형, 문화의 심들 하나씩 눌러 민주와 정의를 쓰고 싶듯. “길은 늘 발끝에서 어린 양처럼 멈춰 서곤 했고/ 그래서 양이 잃어버린 것은 길이 아니라 동행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며”(송주성 ‘막북漠北에 가서’ 중). “소가 나를 찾아온 밤엔/ 마음이 잉어를 잡아다 넣어 둔 항아리처럼/ 일렁거려 잘 수가 없네”(송진권 ‘소 꿈’ 중). “죽 먹으러 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순한 거 같아”(고중식 ‘초식동물’ 중). “갓 쌓인 눈에 발이 잠기는 순간까지만/ 바래다 줘”(박진이 ‘바래다 줄게’ 중). “자작나무가 자꾸만 자작나무다워지는 곳이 있었습니다/ 나도 내가 자꾸만 나다워지는 곳에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안상학 ‘몽골에서 쓰는 편지’ 중). “내놓고 치라고 슬픔이 밖에 나와 있는 걸 안다 마음에 두었던 색을/ 허리에 매고 나아갈 쪽 반대를 치겠다”(졸시 ‘꽃멸치’ 중). “혼자 앉아 있는 것보다 옆에 커피잔이 놓여 있으면 덜 심심하다/ 아는 할머니 한 분은 헤이즐넛 커피를 해질녘 커피라고 한다”(하상만 ‘잔’ 중). “나는 누구의 대신일까/ 누가 나 대신 황야를 걸어 노을 속으로 심부름 갔을까”(김안녕 ‘뼈 심부름’ 중). 시 읽는 일은 낯설지만 본 듯한 곳으로 여행을 가게 합니다. 두근대는 심장을 가슴 밖에 내게 해요. 무심코 지나쳤던 순간의 눈을 반짝이게 합니다. 시 속엔 무엇이 있을까요? 경계 없는 유일한 탈것이라는 상상이 기다리고 있어요. 시인이 오래 담가두었던 언어들이 진한 향을 내며 뒷걸음질 치고 있어요. 내 아픔과 등을 기댈 님의 아픔이 갓 지은 밥풀 냄새를 풍기고요. 이영종 시인은 2012년에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아르코 문학창작기금에 선정되어 2023년에 첫 시집 〈오늘의 눈사람이 반짝였다〉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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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09 18:51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아현 소설가 – 김채람, 양소영, 이풀잎 '효자, 시절'

익산시 남중동의 마당 없는 주택에서 자랐다. 주택을 상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과는 거리가 있는 주택이었다. 소담스러운 골목, 대문, 마당 그리고 화단을 지나 나오는 집의 현관 같은 것들. 나의 어릴 적 공간은 이런 전원 주택 타입은 아니었다. 사거리의 모퉁이에 있었고, 마당이나 화단 같은 건 없었다. 문짝이 하나인 대문을 열면 곧장 계단이 있었고, 그 끝은 바로 현관이었다. 1층은 가게고 2층은 살림집인 주택이었다. 나는 집이 실용적이어서 좋았다. 곳곳의 틈새는 가게를 위해 알차게 사용했고, 막연히 걸어야만 지나갈 수 있는 길 없이 모든 공간이 효율적으로 활용되었다. 마당 대신 있는 옥상에서는 햇볕에 빨래를 널거나 화초를 키우고 아빠와 친 텐트에서 여름밤을 나기도 했다. 집 곁의 사거리에서는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사거리의 모두 다른 길로 연결되었다. 다만 동네에 가게랄 것은 우리 집인 그린유리와 하이퍼마트(몇 년 전, 편의점이 되었다.)뿐이었다. 덕분에 우리 집은 동네 사람들이 택배를 맡기거나 택시에서 목적지로 말하는 랜드마크 같은 곳이 되었다. 내가 성장하는 동안 동네는 서서히 바뀌었다. 아주 어릴 적에는 날마다 내 손을 잡고 집에 데려가 밥을 먹였다던 동네 오빠의 집도 있었고,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다 쉬던 친구네 집도 있었다. 어느 순간 그 집들은 전부 비어서 을씨년스러워졌고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다. 나중에는 어디에 누가 사는지조차 모르게 되었다. 그러기를 잠시, 집의 양옆으로 큰 빌라와 거대한 아파트가 들어섰다. 빌라와 아파트가 지어지는 동안 사이에서 말 못 할 고생도 많이 했다. 그러나 이전의 동네가 얼마나 한산하고 어두워 보였는지를 생각하면 무턱대고 거대 아파트가 싫다고 말하기도 망설여졌다.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괴롭고 고민스럽기는 사는 이도 마찬가지다. 갑작스레 동네의 변화를 회상한 것은 『효자, 시절』을 읽은 탓이다. 책은 효자주공3단지를 중심으로 그곳에서 살고, 벌고, 떠나고, 버틴 사람들의 이야기를 인터뷰로 묶어 기록하고 있다. 책의 말미에서는 다른 아파트나 커뮤니티의 기록 작업도 이어나갈 예정이라고 언급했다. “사무실 앞 창고에는 아파트를 관리하며 모아두었던 사진과 도면, 각종 영수등들이 정돈되어 있다. 20년 전 효자주공3단지에 처음 왔을 때부터 어지럽게 널려 있던 자료들을 시기별, 내용별로 분류하고 정리한 것이다. 아파트가 재건축되면 다 사라질 흔적들이다. (161쪽)” 그동안의 모든 일을 기록하고 정리해 둔 관리사무소의 이야기를 다룬 내용이 계속해서 마음에 남아 남중동의 그린유리까지 이어졌다. 덩달아 어릴 적 살던 동네를 나름대로 복기해보고 싶어졌다. 건너편이 아파트가 된 마당에 부모의 청장년이, 나의 유년기가 녹아있는 남중동 집도 언젠가 밀리고 헐려 사라질지 모를 일이니까. 작년에는 내게도 새로운 동네가 생겼다. 친구와 함께 전주의 97년생 아파트를 고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시작된 나의 새 시절을 가꾸며 『효자, 시절』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린다. 최아현 소설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아침대화>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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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02 18:3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경옥 동화작가-김두를빛'벽을 타는 생쥐, 바타'

얼마 전, ‘과학사’를 다룬 책을 읽었다. 현재의 문명사회를 이룩하기까지 과학의 역사가 얼마나 많은 도전과 실패의 결과인지를 보여주는 책이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도전과 실패의 반복은 단순히 과학사에만 한정되는 건 아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목숨까지 담보로 도전한 결과 지구상에 인간이 출현한 짧은 시간 안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처럼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벽을 타는 생쥐, 바타>이다. 목련 아파트 202동 지하에 사는 생쥐 부부의 열세 번째 아들이 탐험가를 만난 건 그날 내린 눈 때문이었다. 하얀 눈송이가 소복소복 내리는 것을 본 열세 번째 아들의 가슴은 어느 때보다 빠르게 뛰었다는 서문으로 시작한다. 지하에 사는 생쥐 가족 중 유일하게 호기심이 많은 열세 번째 아들은 창밖을 바라본다. “세상이 너무나 멋져 보여서.”라는 말과 함께 모두 잠든 새벽, 지하를 나와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 위로 첫발을 내디딘다. 호기심이 없다면 시도할 수 없는 위험한 외출인 셈이다. 밖으로 나오면 생쥐에게는 위험한 상황의 연속이지만 엄마마저도 ‘너 자신을 위해서 살라.’며 열세 번째 아들의 모험에 불을 지핀다. 지하가 아닌 아파트 단지 내를 돌아다니며 드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삿짐을 옮기는 사다리차를 발견한다.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차를 보면서 고개를 뒤로 젖히던 열세 번째 아들은 지금껏 생각해 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방향인 ‘위’를 보고 놀란다. 그곳에서 탐험가 쥐를 만난다. 처음 탐험가를 만났을 때 그에게서 먼 길, 바람과 햇살, 촉촉한 새벽 공기와 오후의 마른 대지를 지나, 적막한 밤의 길을 걸어온 것 같은 바람 냄새를 맡는다. 작가가 생각하는 탐험가에 대한 묘사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을 탐험하다 보면 끊임없이 낯선 곳을 찾아다니며 고단한 길 위에서 걷고 바람과 햇살과 이슬을 함께 해야 하니 어쩌면 바람 냄새가 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탐험하며 정처 없이 떠도는 게 신기하기만 한 열세 번째 아들은 탐험가 쥐에게 묻는다. “왜 떠돌아다녀요?”라고. 이에 탐험가는 “문득 ‘쥐로 태어난 건 어쩔 수 없지만, 어떻게 사느냐는 내가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아닌 낯선 곳에 가보고 싶어졌지. 그때부터 여기저기 떠돌아다닌다.”며 대답한다. 탐험가 쥐의 대답 속에서 조건보다 선택과 도전의 필요성을 제시한다. 탐험가 쥐의 말을 들은 열세 번째 아들은 사람들이 사는 공간에 호기심을 가지고 사다리차를 타고 오른다. 10층이 넘는 거실에서 바라본 세상은 지하실 안에서는 본 적이 없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비밀스러운 세상을 보게 된다. 경이로움을 느낀 열세 번째 아들은 창문과 현관문이 닫히는 사이에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곳에서 알게 된 햄스터와 며칠을 보내며 결국 인간에 의해 발각되어 쓰레기봉투에 담겨 버려지고, 쓰레기 차에 실려 쓰레기 처리장까지 옮겨진다. 우여곡절 끝에 가족들이 있는 목련 아파트로 돌아왔지만, 가족들은 떠나고 없었다. 이에 열세 번째 아들은 고양이에게 쫓기면서 나무를 타고 아파트 벽을 오른다. 평상시라면 생각도 할 수 없는 벽을 오르는 도전. 그렇게 오른 20층 아파트 옥상에서 바라본 세상은 땅에서만 살았으면 볼 수 없는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세상은 이렇게 생겼구나’를 인식하고, 도전하지 않고 지하에 안주하고 살았더라면 결코 알지 못했을 세상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그러다 옥상에서 만난 인간 여자는 열세 번째 아들을 바라보고 신기한 듯 먼 곳을 가리킨다. 그곳은 옥상보다도 더 높은 ‘라라타워’다. 열세 번째 아들은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며 다시 또 길을 떠난다. 과연 열세 번째 아들이 도전에 성공할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미 그는 도전했고, 자신의 세상과는 다른 낯선 세계를 확인했다. 그리고 또 다른 탐험의 길을 떠난 것으로서 자기 세계의 확장이라는 경험을 선택했기에 여기에 또 다른 평가는 의미가 없다. 이처럼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시도하기 전과 시도한 후의 삶의 변화는 크다. 도전은 자신의 공간을 넓혀가는 작업이기도 해서, 새로운 것에 대한 모험은 살아있음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경옥 동화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두번 째 짝>으로 등단했다. 이후 2019년 우수출판제작지원사업과 지난해 한국예술위원회 ‘문학나눔’에 선정됐으며, 2024년 안데르센상 창작동화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의 저서로는 <달려라, 달구!>, <집고양이 꼭지의 우연한 외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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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26 18:33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진숙 수필가-송태규 '직진도 충분히 아름답다'

봄이다. 긴 겨울을 지나 땅이 깨어나듯, 우리도 새로운 시작을 꿈꾼다. 땅속에서 움튼 새순은 고요한 인내 끝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고, 들녘의 씨앗은 따스한 햇살을 머금으며 생명의 여정을 시작한다. 무엇이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계절, 우리의 마음도 봄을 닮아야 하지 않을까. <직진도 충분히 아름답다>의 저자 송태규는 바로 그런 삶을 살아간다. 그는 스스로 한계를 넘고자 했던 도전을 통해 성장했고, 마침내 활짝 피어났다. 어릴 적 그는 운동과는 거리가 먼 아이였다. 마흔이 넘어서야 비로소 자신을 넘어서는 도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증명해 보였다. “도전 없이는 성취도 없다.”(프레드 데버)라는 말처럼, 그는 도전을 통해 스스로를 변화시키며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나간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도전은 울트라마라톤과 철인 3종 경기다. 마라톤 하나도 버거울 법한데, 그는 교통사고로 무릎 수술을 받은 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도전에 나섰다. 철인 3종 경기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다. 극한의 인내를 요구하는 경기다. 거친 파도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도 자전거 페달을 밟아야 하며, 마지막에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힘겨운 마라톤이 기다리고 있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을 가족의 응원과 동료들과의 연대의 힘으로 직진하며 이겨냈다. 그의 ‘직진’은 고등학교에 재직할 당시에도 통했다. ‘도전! 골든벨’에 여러 차례 도전하고 등교 시간에 단속 대신 음악으로 맞이하는 등 늘 학생 편에서 발전적인 것을 추구했다. 특히 '500회 헌혈'을 향한 조용한 도전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의 선한 영향력은 가족에게 전해졌다. 아들과 딸, 며느리까지 함께 헌혈을 이어가며 ‘헌혈 명문가’가 되었다. 또 주변의 친구와 지인들도 그의 뜻에 동참하고 있다. 한 사람의 실천이 가족을, 그리고 이웃을 변화시킨 것이다. 그가 흐르게 한 따뜻한 피는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길이 되었고, 사랑의 강물처럼 이웃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은 “강한 자가 버티는 게 아니라, 버티는 자가 강한 것이다.”라는 말이다. 우리는 때때로 강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낀다. 하지만 저자가 보여준 강함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견디는 작은 용기에서 비롯된다. 지치고 힘든 그 순간에도 한 걸음 더 내딛는 것임을 그는 몸소 증명해 보였다. 이 책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에게 지금 필요한 직진은 무엇인가?” 살아가다 보면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머뭇거리게 된다. 도전을 망설이거나,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삶은 넘어지고 깨져도 다시 일어서는 사람의 것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빠르지 않아도,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직진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 나는 저자처럼 다시 직진을 선택한다. 아울러 당신도. 봄처럼 다시 피어나길. 이진숙 수필가는 전직 국어교사 출신으로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에 당선됐다. 이후 최명희문학관에서 “혼불” 완독 프로그램 진행하며, <우리, 이제 다시 피어날 시간> 오디오북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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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19 18:26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오은숙 작가-에밀 졸라 '돈'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서는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상인 안토니오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기한 내에 갚지 못하면 1파운드의 살을 받겠다고 조건을 단다. 현진건의 단편 <아다다,1921>에서는 사람을 팔고 사는 수단으로써 비정한 돈의 역할이 부여되고 저 유명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벌,1866>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가 도끼를 손에 들고 전당포를 찾는 이유가 된다. 언제나 내 마음속 청춘인 <날개,1936>의 주인공은 아내가 준 돈을 모두 화장실 변기통에 버리기도 하였으나 오늘날 돈은 화폐로서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양심을 소환하던 시대를 넘어 궁극의 목적이 되길 원한다. 어떤 면에서, 최초의 현대인이라는 수사가 어울리는 에밀 졸라. 그는 어떤 눈으로 돈을 바라보았을까. 졸라의 소설 <돈>은 주인공 사카르가 만국 은행을 설립하여 은행장이 되었다가 파산하는 과정을 그리며 다양한 인간 군상이 나온다. 사카르는 돈을 쓰지 않고 모으기만 하는 구두쇠가 아니다. 할 수만 있다면 남의 돈이라도 갖다 쓰고자 한다. 검찰 총장 아내와 여흥을 즐기는 것도 만국 은행 주식을 파는 방식으로 투자를 받으려는 속셈이다. 그는 자신이 싫어하는 증권 거래소의 실세 군데르만을 찾아가 투자하도록 설득하기도 한다. 위장병이 있어 우유로만 생활하며 그마저도 한 모금 들이키는 시간이 길어 지루했던 순간을 견디고 그가 들은 말은 은행장이 되어도 결국은 파산할 것이라고 했다. 돈의 흐름에 예민하고 고집스런 유대인 군데르만은 과도한 열정과 비약적인 상상력, 남의 돈을 가지고 사업하려는 사카르의 자세를 실패의 원인으로 들었다. 그런 식이라면 어떤 일에도 안착하기 힘들겠지, 하고 나는 동의한다. 지참금으로 주식을 산 모녀가 일부를 팔려고 하자 사카르는 반대한다. 오르고 있는데 왜 파느냐고. 돈을 빌려서라도 더 사야 한다고. 마르셀은 기죽은 남편에게 돈을 양동이로 퍼서 안겨주는 방식으로 위로하고 싶다. 그녀가 돈을 빌리러 간 친정에서는 이미 많은 주식을 샀기 때문에 돈이 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한편, 루공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가에 영향을 미치는 정보가 한순간에 유출되는 사정을 비추어 오늘날을 생각하니 흥미로웠다. 5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이야기에서 눈길이 가는 인물은 단연 카롤린이다. 어린 나이에 이혼한 그녀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사카르의 집무실을 드나들며 일하다 그의 과도한 지출과 횡령을 알아차린다. 그녀의 조언으로 보름 후에 지출이 절반으로 줄었기 때문일까. 그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자신이 두 번째 남자가 되는 게 싫다는 이유를 들어 혼자서 감정을 정리한다. 대부분 인물이 돈을 갈망하는 것과 비교하면 그녀는 오히려 “세상의 모든 돈을 없애 버렸으리라”하고 서술하듯 거리를 둔다. 그럼에도, 사카르조차 알지 못하는 그의 아들을 빈민촌에서 구할 때는 자기 돈을 쓴다. 그러는 과정에서 허황되고 무절제한 사카르에게 연민일지 애정일지 모를 감정이 싹튼다. 1891년에 발간된 이 책은 스무 권으로 된 루공-마카르 총서 중 하나다. 대가의 글이라고 취향을 안 타는 것은 아니다. <나는 고발한다>와 같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글자들이 백지 위에서 춤춘 탓에 두 달여에 걸쳐 읽었다. 읽다 보니 인물에 애정도 생겼다. 심리묘사가 생각보다 많은 것은 의외의 수확이었다. 19세기 말에 출간된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오늘날 주변을 옮겨 놓은 듯한 이 작품을 익숙하지 않은, 낯선 길을 걷듯 읽었다. 오은숙 작가는 202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납탄의 무게>가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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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12 18:46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박태건 시인-하상욱 '달나라 청소'

‘햇빛 잘 드는 툇마루에 앉아/ 신문지 펴고 손톱이나 깎는/ 오후를 좋아하고’, ‘가끔 지나가는 채소 트럭 확성기 소리를 들으며/ 시장에 장 보러 간 당신을 기다리는’ 것이 소망이었던 시인이 있(었)다. 그의 존재를 과거형으로 말하려니 갑자기 울컥해진다. 그는 이제 죽은 사람, ‘생의 적막한 오후를 견디기 위해서 아직 남아 있는 햇빛을 애인과 나눠 쬐고 싶었던’ 순정한 사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겨울의 끝자리, 전주한옥마을에서 『달나라 청소』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하상욱 시인(1967~2023)은 남원에서 태어나 원광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그가 남긴 『달나라 청소』을 윤동주 시집 이후 가장 순정한 유고시집이라 하겠다. 시인에게 ‘세상은 아름답기만 한 것도, 그렇다고 노엽기만 한’ 것도 아닌 ‘쪽문 앞 개망초 작은 꽃들을/ 쪼그리고 앉아서 보듯’ 사는 것이다. 윤동주 시인이 일제 강점기의 비루함을 고결한 영혼으로 이겨냈듯이, 하상욱은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노골적인 인간 소외를 맑고 깨끗한 눈빛으로 견디려 했다. ‘죽음이 삶을 껴안든/ 삶이 그 무엇을 껴안든’ 살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상처를 여행해야 하는 걸까. 어쩌면 사는 게 쉽지 않은 것은 ‘너무 많이 가지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수학 기호인 루트를 보면 모자를 벗기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 그만 하면 됐다고, 모두가 자본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데 열중할 때 한발 벗어난 고독한 생의 응시를 통과하느라 시인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상욱 시인은 타인의 가쁜 숨소리도 들을 줄 아는 시인이었다. “항아리가 숨을 쉰다는 얘길 들었다/ 항아리가 숨을 쉬니까 그 속에 담긴/ 된장도 고추장도 숨을 쉴 거다/ 된장도 고추장도 숨을 쉬니까/ 된장을 푼, 고추장을 풀어 끓인 찌개도 보골보골/ 숨을 쉴 거다 /(……)/ 이리저리 치이다 돌아온 당신도/ 숨을 쉬며 살아가는 거다”(‘항아리’ 일부) 시인은 이제 광란의 질주를 멈추자고 한다. 뉴스를 켜면 모두가 미쳐 돌아가는 것 같은 세상에서 하상욱의 시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무어라고 몇 줄 썼다가 지웠다/ 눈이 내리는데 계속 걸었다/ 뒤돌아보면 내가 함부로 찍어 놓은 발자국들/ 눈이 조용히 덮어 주고 있었다/ 간다고 가는데 언제나 여기였다/ 다시 몇 줄 썼다가 지웠다/ 여기에서 저기까지 가 보면 저기가 다시 여기가 되고/ 가다가 멈추면 동그란 무덤이 생겼다…”(‘눈 오는 아침’ 일부) 『달나라 청소』를 읽으며 이 좋은 시들을 더 볼 수 없다는 것이 슬퍼졌다. ‘그리워도 볼 수 없는 것’ 중에서 그의 이름도 추가되었다. 한밤중에 취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하상욱이 없는 이 세계의 ‘눈발 속을 계속 걸어갈’ 수 있을까? 그의 짧은 시를 소개하면 글을 마친다. “기차는 길다/ 괴로움의 증거다// 달려가라/ 달려가라”(‘기차’) 시인을 힘들게 했던 겨울이 지나갔다. 지난 사랑은 언제나 비극이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박태건 시인 1995 전북일보 신춘문예와 시와반시 신인상에 당선됐다. 시집 <이름을 몰랐으면 했다> 로 불꽃문학상을 받았다. <나바위성당 팔각창문 아래서> , <익산문화예술의 정신>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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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05 18:27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기명숙 작가- 임후남'나를 아껴준 당신에게'

임후남 선생님 『나를 아껴준 당신에게』 북토크에 참여했다. 책갈피처럼 가지런히 접혀있던 독자들이 시를 낭송하고 작가와의 인연과 작품에 대해 말하는 연대의 장이었다. 선생은 용인에서 ‘생각을 담는 집’이라는 시골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전주를 떠나 타향에서의 객창감이 잦아들지 않을 무렵 찾아간 곳이었다. 고요의 질감 속 책과 식물에 둘러싸인 맑고 단정한 사람, 그렇게 선생과 인연을 맺었다. 임후남 선생의 작품들은 장르를 불문 삶의 양식과 동시에 이루어진다. 느린 여백의 시간과 필요한 만큼의 적요, 자연 친화적인 공간에서의 작고 연약한 것들과의 상호 작용이 그것이다. 그녀의 처소는 약육강식의 세계가 아니어서 위계 없이 평화롭다. 선생은 언뜻 시골 후미진 책방에서 고립된 존재처럼 보이지만 꽃나무 풀들의 뿌리가 땅속에서 엉켜있듯 수많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오랜 도시 생활에서 체득한 방식을 버리고 동안 꿈꿔왔다던 ‘나만의 방’에서 타자의 삶을 보듬는 플랫폼으로 기인한다. 책방에 들르는 사람, 꽃나무와 보리와 들깨와 낡아가는 책들에 귀를 기울인다. 『나를 아껴준 당신에게』는 그것에 대한 기록이다. 작품들에서 상실한 자의 목소리, 떠나온 자의 슬픔을 발견하곤 한다. 인간 실존에서 상실과 분리는 시 공간의 이격에서 오는 당면과제다. 그런데 이 시집은 쇠락의 운명일 게 분명한 자연과 인간을 슬픔과 상실로만 규정하지 않는다. 시 전편을 관통하는 실존방식과 무한 애정은 ‘상처와 실패’를 곱씹는 자에게 존엄성 회복에 도달하기 위한 연료 공급처로 기능한다. 누군가 “나무들이 내뿜는 기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목수가 된다”라고 하였다. 자연 기호에 매혹되고 예민한, 직접 체득에서 나오는 선생의 감응 능력이 시적 언술로 그치지 않고 확장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나 또한 균열 된 세계로부터 위로를 찾아 숲속 책방을 찾아간 것이었으니 돌올한 선생의 ‘덕목’임이 분명하다. 한편 생로병사를 피할 수 없는 고통의 복판에서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노인과 실직자와 쇠락한 집과 희미한 유년기의 기억 등을 현학과 자의식 과잉 없이 드러낸다. 언어실험이니 한방에 녹다운시키려는 언어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지 않고 매화 꽃망울이 터지듯 툭툭, 던지는 말의 오묘함이 있다. 시집을 읽는 내내 선생의 관계망 속에 긴밀히 연결됐다는 안도감과 더불어 취약한 존재라는 것을 들켜도 부끄럽지 않게 된다. 시인의 말에서처럼 “삶의 풍경은 저마다의 계절이 있고” 아픔은 균등 배분되지 않고 각자 몫으로 견뎌내야지만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면 다시 봄이 올 것”이니까. 북토크에서 나는 「시인」을 낭송했다. 삶의 전장에서 “김밥을 말고 소주를 마시며 그냥 아줌마로 불리는” 시를 접어버린 이와 반대 값인 “쉰에 시인이 된 그는 육십 넘은 지금 김밥집에서 김밥을 말고 있다 (중략) 김밥을 말다 시가 튀어나오면 얼른 볼펜을 집어 들었다 (중략) 사람들은 그를 시인이라고 불렀다.” 시인으로 산다는 것이 불균형적이고 도구적 측면에서 무용하대도 진정한 시인으로서의 추동 방식은 다르다. 이질적인 두 사례의 향방에서 나는 어디쯤 있는 것이냐! 힘든 사연도 말하고 나면 고통이 줄어든다. 선생은 아픔과 슬픔 견딜 수 없는 그리움까지 털어놓게 한다. 선생의 수필집 『책방 시절』과 『나는 괜찮아지고 있습니다』에서도 일관된 메시지가 있다. “나와 이웃한 삶에 자꾸 귀 기울이”는 선생이 넌지시 묻고 선생에게 위로받았던 나는 대답한다. “나는 이제 괜찮아지고 있습니다.” 기명숙 작가는 전남 목포 출신이며, 200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몸 밖의 안부를 묻다>가 있다. 현재 강의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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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26 18:51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은영 작가, 김순정'아주 특별한 발레리노 프로기'

주택으로 이사를 하면서 옥상 텃밭을 가꾸고 있다. 사각 고무통에 흙을 채우고 처음으로 씨앗을 뿌리면서, 싱싱한 채소를 수확할 꿈에 한껏 부풀었다. 다행히 몇 번 시행착오를 겪고 난 뒤, 샐러드를 해먹을 만큼의 푸성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텃밭 농사를 지으면서 간과했던 것이 있다. 그건 어쩔 수 없이 다양한 벌레와 공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무통에서 자라는 상추를 하루 만에 다 먹어 치우는 배추흰나비 애벌레, 고추나무에 사는 노린재를 일일이 손으로 잡으면서 수확의 기쁨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다양한 나비가 내 텃밭에 놀러 오고, 매일 아침 나타나는 크고 뚱뚱한 호박벌과 여름 막바지에 찾아오는 고추잠자리를 기다리며, 자연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곤 했다. 김순정 작가의 그림책 『아주 특별한 발레리노 프로기』에서도 눈길을 사로잡은 건 개구리였다. 발레 신발을 신고 발끝을 세우며 춤을 추는 ‘프로기’를 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태어날 때부터 뒷다리가 남달라 엄마 아빠의 기대를 한껏 높였던 프로기.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프로기는 멀리 뛰기나 파리를 잡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춤추는 것에만 열심이다. 연못에서 들리는 물방울 소리, 빗소리, 새들의 노래에 맞춰 행복하게 춤추며 마냥 행복한 프로기. 그런데 그런 프로기를 연못 속 생물들은 이상하다고 수군거린다. 프로기의 이런 상황은 인간의 삶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초등학생이니까’, ‘20대니까’, ‘엄마니까’ 당연히 이러해야 한다는 통념을 가지고 있다. 그에 반하는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불편해하며 때로는 비난하기도 한다. 나와, 혹은 우리와 다른 모습을 인정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고정관념은 때로 진정한 내 모습을 찾고 개성을 키워가는 데 걸림돌로 작용한다. 내가 정말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주위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비웃을까 봐 시도조차 하지 않거나, 아이가 애써 찾은 꿈을 현실적인 이유를 들며 싹조차 틔울 기회를 빼앗는 것이다. 나는 왜 춤을 추는 거지?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만 뱅글뱅글 돌던 생각을 끌어 올렸어요. 그거야, 춤을 추면 행복하기 때문이지. 고민에 빠졌던 프로기는 춤을 좋아하고 즐기는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했고, 시간이 지나자 숲속 친구들 역시 프로기가 춤추는 걸 보며 아름답다고 느낀다. 산다는 것은,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가는 일이다. 진정한 행복은 하고 싶은 일을 통해 재능을 꽃피우고 스스로 발전하고 성장하는 데 있다. 설사 그것이 하찮고 누구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라 해도, 그 순간에 몰입하고 최선을 다한다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장은영 동화작가는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통일 동화 공모전, 2024 남도의병 콘텐츠 공모전 스토리 부분 대상, 전북아동문학상과 불꽃문학상을 수상했다. 2022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발표지원)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역사와 문화로 보는 도시 이야기 전주>, <책 깎는 소년>, <으랏차차 조선 실록 수호대>, <열 살 사기열전을 만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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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19 18:11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창영 작가- 박현아'인공지능, 말을 걸다'

올 1월, 우연한 기회로 서울에서 미디어 아트 전시회에 참여했다. 텍스트를 입력하면 그림을 생성하는 '미드저니'를 활용해 만든 개인 작품들을 전시하는 행사였다. 이전 화가들이 자신의 취향이나 의지에 기반을 두고 자신만의 그림을 그렸다면 이제는 프롬프트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만드는 시대가 도래했다. 작업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지만 최종 결과물의 완성도는 전문가도 놀랄 수준이다. AI 덕분에 언감생심 평생 동안 그림 전시회는 꿈도 못 꾸던 이들도 전시회를 하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축하 노래를 만들 수도 있게 되었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다양한 AI 프로그램도 놀랍지만, 그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날이 갈수록 더 정교해지고 있다. 프롬프트 한 줄만 넣으면 동영상까지 만들어주는 시대를 살다 보니 몇 년 후에 우리는 어떤 변화를 맞이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단이나 출판을 꿈꾸면서도 망설이던 이들도 이제는 쉽게 자신의 이름을 새긴 책을 만들어낸다. 챗GPT나 Claude AI의 도움을 받으면 자신이 쓰고자 하는 책 한 권을 하루에 쓰는 일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그렇게 만든 책으로 작가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사실에 뿌듯해하는 이들이 제법 많다. 가끔 그런 사람들을 보면 그동안 긴긴밤 고뇌하면서 글을 썼던 시간이 그리워진다. 글이라는 세계를 안 후 세상과 만나는 일은 얼마나 큰 축복과 행복을 주었던가. 분노가 나를 휘감을 때, 슬픔이 몰아칠 때, 감동이 나를 사로잡을 때 그 모든 순간마다 글이 내 곁에 있었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잘 한 두 가지는 여행과 글쓰기를 만난 일이다. AI의 도움을 받아 책을 쓴 이들은 만약 AI가 없다면 제대로 된 글 한 줄 쓰기가 버거운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제목이나 키워드만 넣으면 시를 가래떡 뽑아내듯 쏟아내는 모니터 화면을 보고 있노라면 여러 생각이 든다. 저 사람들은 자기가 썼다는 시를 기억이나 할까? 만약 다른 이들의 작품과 섞어 놓는다면 자신의 작품을 구분도 못할 것이다. 가끔 그들에게 글쓰기는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까 궁금해진다. 『인공지능, 말을 걸다』라는 이 책의 기본 화두도 “가장 인간적인 기계가 던지는 질문”이다. 이 책이 나올 때만 하더라도 챗GPT와 같은 대화 전문 인공지능 챗봇이 없었다. 그래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저자의 기본적인 고민들은 오늘날에도 개발자와 사용자들에게 여전히 가치를 지닌다. 가장 좋은 가전제품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말처럼 우리가 기술의 발달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나는 사람들이 AI를 외치는 시대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AI가 주는 공허함은 단순한 기술 발전만으로 채울 수 없는 문제다. 많은 사람들이 AI가 업무의 효율성과 처리 속도를 높여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서 남는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쓰고 있는가 의문이 든다. 나는 요즘 자연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 중이다. 자연 속에서 우리의 작은 존재를 깨달을 때, 시야는 넓어지고 사고는 깊어진다. 오늘은 잠시 매체에서 벗어나 자연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서는 것은 어떨까? 그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AI시대를 슬기롭게 살아가는 생존법이리라. 장창영 작가는 전주 출신으로 2003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불교신문·서울신문 신춘문예에도 당선돼 창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시집으로 <동백, 몸이 열릴 때> 와 문학이론서 <디지털문화와 문학교육>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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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12 14:5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경옥 작가, 켈리 양 '프런트 데스크'

2021년 영화 <미나리>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았었다. 낯선 미국 땅, 아칸소로 떠나온 한국 이민자 가족의 삶을 보여준 영화였다.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미나리’는 아무리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듯 이민자들의 녹록지 않은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여전히 백인 중심 사회의 암묵적인 차별이 이민자들에게는 거대한 장벽으로 다가오면서 거칠고 불안정한 삶이 펼쳐졌다. 그러면서 가족 간의 갈등과 아이들의 불안감, 외로움이 부각 되었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프런트 데스크> 책의 저자도 여섯 살에 가족과 함께 중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한다. 모텔에서 일하던 부모님을 도와 모텔 프런트 데스크 일을 하며 자랐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프런트 데스크>다. 1900년대 초,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을 떠나 미국에 이민을 온 ‘미아’네 가족 이야기다. 그 시절 이민자, 그것도 아시아인 이민자가 미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식당 보조나 모텔 관리인 같은 일뿐이다. 자유와 기회의 땅이라고 알고 있는 미국은 순순히 이방인에게 그들이 원하는 좋은 자리를 내주는 곳은 아니다. <미나리>에서 보듯 이민자가 다른 나라에서 정착하며 살아간다는 건 예상치 않은 어려움이 많다. 그것도 1900년대 아닌가! 주인공 ‘미아’네 가족. 성공한 이민자를 꿈꾸며 사회주의 국가를 떠났겠지만, 일자리를 구하는 것부터 난관에 부딪힌다. 중국에서는 엔지니어로 일했던 아빠는 미국에 와서 식당 서빙을 하고, 엄마는 주방 보조로 일하게 된다. 하지만 두 부부가 하루 종일 매달려서 받은 월급은 집 월세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다. 결국 집세를 감당하지 못해 모텔 관리인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숙식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모텔 주인을 찾아간다. 모텔 관리를 하게 된 ‘미아’의 부모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일을 하게 된다. 이를 조금이라도 도우려는 열 살 소녀 ‘미아’는 프런트 데스크를 맡으며 미국 사회의 모순을 마주한다. 모텔에 장기 숙박 중인 손님도 있고, 하루하루 맞이하는 다양한 손님들 틈에서 유색인종을 얕잡아 보는 미국인들의 적나라한 인식을 알아가게 된다. 부모님 역시 ‘미아’를 기회의 땅에서 자라게 하고 자유를 만끽하게 하려고 했던 생각들이 현실의 벽 앞에서 무너질 때가 많다. 학교에서도 미아는 유색인이라는 이유로 놀림의 대상이 된다. 거기에 모텔에서 장기 투숙하는 행크라는 인물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범죄자 취급당하는 걸 그대로 본다. 이민자로서, 유색인종으로서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게 희망보다는 절망의 순간들이 많다. 그럼에도 열 살 ‘미아’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이민자 아이들과 마음을 나누기도 하고, 장기 숙박을 하는 유색인종 어른과의 교류 속에서 자신만의 희망을 설계한다. 모텔 주인인 ‘야오’는 다른 도시에서도 모텔 사업을 하면서 어려움이 지속되자 ‘미아’ 가족이 관리하는 모텔을 팔아넘기려 한다. 어른들이 망연자실하며 손을 놓고 있을 때, 미아는 여러 사람에게 모텔의 지분을 갖게 하고 투자를 유도한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투자자들이 몰리고 결국 모텔을 소유하게 된다. 물론 순수한 ‘미아’네 모텔은 아니었지만 수십 명의 후원으로 얻어낸 보금자리인 셈이다. 길거리로 쫓겨날 것만 생각하고 있었을 때, ‘미아’는 거침없이 도전하면서 미국 생활에 한 발 내딛게 되고, 이민자로서 터를 다진다. ‘아시아태평양 미국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책이고, 어린이의 시점으로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정착하는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또한 어린이의 도발적 행동으로 모텔을 얻게 되는 통쾌함도 맛볼 수 있다. 물론 투자자들의 의기투합으로 얻어진 모텔의 운영이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텔의 관리인에서 경영자의 입장으로 닻을 올린 상황이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도전은 잠자고 있는 우리의 일상을 꿈틀거리게 한다. 지금 살아가는 익숙한 공간도 두드리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두려움을 걷어내는 용기가 필요한 시점에서 길잡이로 다가온 책이었다. 새해를 맞이했다. 그동안 마음 안에서만 설계했던 일들을 주저하지 않고 펼칠 수 있는 용기를 책에서 찾아본다. 이경옥 아동문학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두번 째 짝>으로 등단했다. 이후 2019년 우수출판제작지원사업과 지난해 한국예술위원회 ‘문학나눔’에 선정됐으며, 2024년 안데르센상 창작동화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의 저서로는 <달려라, 달구!>, <집고양이 꼭지의 우연한 외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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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05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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