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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진숙 수필가- 김소영 '어떤 어른'

얼마 전 「어른 김장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그는 한약방을 운영하며 번 돈으로 수많은 장학생을 후원했고 학교를 설립하여 국가에 헌납했으며 인권, 문화, 역사를 위해 평생을 낮은 자세로 섬기면서도 대가를 바라거나 명성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 ‘줬으면 그만이지’라는 철학으로 묵묵히 촛불을 밝혀 온 그분을 보며 ‘나는 과연 어떤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고민을 하던 중 만난 책이 ‘2025 전주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김소영의 <어떤 어른>이다. 오랜 기간 독서 교실을 운영해 온 김소영 작가는 수많은 어린이를 만나는 동안 ‘좋은 어른’이 되고자 애써왔다. ‘존경받을 수 있는 어른, 닮고 싶은 어른, 때론 기대고 싶은 어른’이 되기를 바라며 노력했다. 작가는 어린이에게 예의를 갖추어 대한다. 아이들에게 물 한 잔을 줄 때도 가장 좋은 컵과 받침까지 준비한다. 어린이에게 비속어를 쓰지 않고 존대를 하며 한 사람의 인격체로 존중한다. 그런 소소한 배려와 넉넉함이 어른의 품격을 만든다고 강조하며 때론 ‘냉정한 비판 속에서도 품격과 유머를 잃지 않는 어른’이 되기 위해 정성을 다한다. 흔히 ‘좋은 어른’이 되려면 큰 업적을 세우거나 세상을 바꾸는 특별한 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책은 화려하거나 위대한 인물이 아닌, 일상 속에서 묵묵히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주목한다. 돌아보니 내 곁의 수많은 어른들은 성실하게 일상을 대하며 소중함을 일깨운 분들이었다. 봄이 오면 쑥버무리나 쑥개떡을 해서 싱그러운 봄을 먹이시던 어머니, 축의금 봉투에 정성스럽게 축하 편지를 써넣던 이웃 언니, 엘리베이터 문을 잡아주던 아저씨, 태풍 부는 날 우산을 함께 쓰며 아이를 집까지 데려다준 아주머니까지. 지금도 그들은 내 마음속 어른으로 살고 있다. 최명희 소설 <혼불>에서 “우리 사람의 정신 속에는 반드시 정신의 눈이라 할 혈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곳에 제대로 있고, 그 혈을 보는 눈이 밝은 사람을 세상에서는 어른이라고 한다”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정신의 눈’이란 단순한 나이나 경험이 아닌 성찰과 바른 도리, 세상을 품을 수 있는 품격을 뜻할 것이다. 내 주변의 좋은 어른들 또한 묵묵히 자신의 혈을 지키며 세상을 비춰온 그런 존재였다. 나 또한 언젠가 돌아보았을 때 부끄럽지 않을 어른의 모습을 갖추고 싶다. 소중한 일상을 성실히 지키며 살아가는 일. 그런 수많은 작은 일상들이 모여 한 사람의 품격이 빚어지고 그것은 내가 속한 공동체의 품격이 될 것이다. 그렇게 소중히 마음의 혈을 지키며 살아가다 보면, 이웃에, 내가 속한 사회와 국가에 한 줌의 소금 역할을 하는, 조금은 괜찮은 어른이 되어 있지 않을까. <어떤 어른>은 바쁘고 거친 세상 속에서 느리더라도 바른 길을 걷고자 애쓰는 이들에게 건네고 싶은 책이다. 그런 길 위에서 품격 있고 고요히 빛나는 어른이 되도록 안내할 것이다. 다가오는 ‘전주독서대전(2025.9.5.~9.7)’에서 김소영 작가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진숙 수필가는 전직 국어교사 출신으로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에 당선됐다. 이후 최명희문학관에서 “혼불” 완독 프로그램 진행하며, <우리, 이제 다시 피어날 시간> 오디오북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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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25 18:57

[2025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소감 : 소설] 느지막이 새로운 길 앞에 서다

소설을 긁적이기 시작하면서 이런 날이 오기까지 30년이 흘렀다. 몇 번의 최종심 심사평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지 얼마간 도전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40대가 되면서 나는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영화에 빠져들었고, 소설은 그저 이미지로만 내 머릿속을 떠돌았다. 영화 속 수많은 삶과 허구들이 소설로 들어서는 경계를 막아섰다. 50대에 접어들자 프레임 속 이미지에 갇혀있던 눈에서 시리게 눈물이 흘렀다. 나를 가두고 있던 프레임의 틀을 벗어나자 생각은 차곡차곡 정리되고, 그 거름을 자양분 삼아서 이야기들은 조금씩 스스로 살아나기 시작했다. ‘글쓰기란 어쩌면 자문자답하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독자의 동감을 설득하는 과정을 동반해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작년, 전북일보 최종심에 올랐던 나의 작품에 대해 김병용, 송하춘 선생님은 큰 울림을 던졌다. 꽁꽁 싸매고 살아온 내 삶과 글을 과감히 탈피해서 다양한 타인들의 생각으로 고치고 또 고쳤다. 인생의 변곡점에 들어선 나이에 아직 늦지 않았음을 깨닫게 해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드리고 싶다. 느지막이 맞이한 새로운 도전 앞에서 그저 설레고 벅차다. △ 장용돈 씨는 전라북도 고창 출생으로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중에 동아문학상(소설)을 수상했다. 2005년에는 전태일 문학상(소설 부문)을 받았다.

  • 문학·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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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1 18:40

[2025 전북일보 신춘문예 심사평 : 소설]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소설

202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14편이었다. 세상이 어수선하고 현실이 소설의 현재를 넘어서는 시대에 소설 역할은 무엇일 수 있을까. 사회, 경제, 정치적 억압이 심할 때 소설의 경향은 지극히 개인적 서사에 머무는 경우가 많고 대의나 대전제를 작품에 적용하거나 가늠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오히려 소설은 그러한 조건에서 문학적 힘이 발휘된다는 전제를 굳게 믿고 큰 기대와 함께 심사에 임했다. 심사위원들은 14편의 소설을 꼼꼼하게 읽고 최종심에 올릴 작품 4편을 선정하여 심의에 들어갔다. 단점이 적은 작품보다는 장점과 미덕이 많은 작품, 신춘문예 특성에 잘 맞는 작품에 중점을 두고 당선작을 가리는 최종 심사에 들어갔다. 「점, 선, 면」은 발상이 기발하고 전개가 독창적이며 개성도 돋보인 작품이었다. 하지만 독백의 서술이 다소 설명적이고 관념이 삶이 되지 못하고 끝맺는 주제의식의 발현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미친 인간들의 노래」는 정치, 경제계의 추악한 면면을 현실감 있게 그린 전개, 가독성이 좋았으며 인물의 성격을 통한 주제의식의 형성이 매끄러웠다. 다만 주요 서사가 익숙하고 단조로운 고발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새로움이 덜했다. 「기원제」는 현실을 사는 직장인의 욕망과 애환, 삶의 가치를 지켜야 하는 갈등을 소재로 삼고 있다. 전개가 자연스러우며 우리가 매일 겪고 있는 생활의 한 치부를 건드려 여운을 길게 남긴 좋은 소설이었다. 다만 소설의 주제가 다소 협소하고 너무 많이 다룬 소재이다 보니 새로움이 덜했다. 좋은 필력을 가지고 있으니 더 좋은 성과가 있으리라 기대한다. 202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당선작은 「넋두리」이다. 작품은 현재의 농촌을 배경으로 소를 키우고 소를 잃는 농부의 이야기이다. 그런 이유로 낡은 느낌을 주는 것 빼곤 단점이 가장 적고 장점이 넘치는 소설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단점도 소설 안에 들어가면 기우에 불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전혀 낡지 않은 현재를 그리고 있다. 작품은 소설이 가져야 할 여러 미덕을 잘 갖추고 있다. 뚜렷하며 시대적 반영이 이루어진 주제의식, 서사적 긴장감, 안정적인 문장 등 여러 작품 중 단연 돋보인 작품이었다. 지역어의 복원을 통한 유려한 문장은 이 시대의 소설이 필요로 하는 좋은 예이다. 두 심사위원은 지금 꼭 필요한 소설이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이렇게 진득한 소설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넋두리」를 당선작으로 뽑게 되어 기쁘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건네며 좋은 작가로 남길 바란다./심사위원 이광재·백가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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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1 18:39

[2025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소감 : 동화] 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동화쓰기 정진

3살짜리 손녀가 감기에 걸렸어요. 어린이집에 못 가고 답답해 하길래 도서관에 갔지요. 널찍한 유아실이 놀이터인줄 알고 뛰는 손녀를 잡으러 다니다가 당선 전화를 받았어요. 동화쓰기를 시작하고 20년 만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영광의 순간은 항상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믿기지가 않았어요. 공모전에 수없이 떨어지고 좌절하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쳤지요. 글쓰기에 재능도 없는데 헛꿈을 꾸는 건 아닐까. 동화에서 도망갈 궁리를 찾는데, 딸이 육아를 부탁했어요. 헛된 꿈보다 손녀 육아가 보람 있는 일인 것 같았어요. 손녀와 개미와 벌, 나비를 쫓아다니느라 동화는 잊어버렸어요. 3월, 손녀가 어린이집에 가자 다시 동화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당선이 더욱 기쁜 건, 내 고향 신문에 작품을 선보이게 된 것입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떠나왔지만 잊은 적 없는 사랑하는 고향, 전라북도. 고향신문에 작품이 당선되어 영광이고 기쁨입니다. 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안겨준 전북일보 관계자분들, 부족한 제 동화를 읽어주고 당선작으로 밀어주신 심사위원분들, 감사합니다. 이제 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동화쓰기를 멈추지 않겠습니다. 거친 초고를 읽어주는 글벗 선생님들, 든든한 버팀목 양중님, 혜진, 대희, 경하, 하영 사랑합니다. △ 김정숙씨는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나 현재 경기도 김포시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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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1 18:39

[2025 전북일보 신춘문예 심사평 : 동화] 기발한 설정과 마음을 울리는 메시지

요즘 어린이들은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맞춰 본심에 오른 7편의 작품은 SF, 판타지, 의인화, 생활 동화가 고루 있었다. 7편 모두 어린이의 관심을 담고자 하는 노력이 잘 드러났다. 그중 ‘형광펜’, ‘단비 오는 날에’, ‘재주 내기 한판 할래’가 눈에 띄었다. ‘형광펜’은 어린이의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한 점이 뛰어났다. 그러나 사고로 휠체어를 타게 된 형과의 관계에서 주인공이 주체적인 존재가 아닌 수동적인 상태로 결말을 맞이해서 아쉬웠다. ‘단비 오는 날에’와 ‘재주 내기 한판 할래’와 를 두고 오랜 고심을 하였다. ‘단비 오는 날에’는 안정적이고 흡인력 있는 문장으로 가독성이 뛰어났다. 이야기는 인공비만 내리는 미래 도시의 우산 가게가 배경이다. 할아버지는 우산이 필요 없는 세상에서도 우산을 만들면서 자연비를 기다린다. 최근 심각해진 기후위기를 상징적으로 다루면서 희망을 보여주려는 시도가 돋보였다. 그러나 인공비가 내리는 미래 도시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지 않아서 우산이 필요 없다는 설정에 설득력이 떨어졌다. 당선작 ‘재주 내기 한판 할래’는 도깨비 더잘난이 휴대전화와 내기를 하겠다는 시작이 기발했다. 옛이야기를 읽는 듯한 자연스러운 문장과 빠른 전개도 장점이었다. 더 잘난은 휴대전화에 빠진 아이들에게 외면당하고, 어른들에게는 구경거리가 된다. 다시 떠돌던 중 아들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리는 할머니를 만난다. 더잘난이 휴대전화 속으로 들어가서 아들 목소리를 선물하는 결말이 인상적이었다. 작품은 진정한 재주는 내가 더 잘났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돕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 다소 매끄럽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앞으로 크게 발전하리라 기대해 본다. 당선을 축하하며 응모해 주신 모든 예비 작가에게 격려와 응원을 보낸다. /심사위원 전은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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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1 18:39

[2025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소감 : 수필] 겨울에도 꽃은 핀다-김수현

올해 초, 사람들에게 글을 그만 써야겠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마음을 가다듬기 쉽지 않았다. 오랫동안 글을 쓰는 것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일방적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정리해야 할 때를 아는 것도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시기를 한국어교육학과에서 극복했다.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몰라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면 조언을 아끼지 않는 교수님들이 계셨다.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도 정서적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이렇게 즐겁고 행복하게 학교생활을 해도 되나, 겁이 날 정도였다. 2학기가 되고, 글쓰기와 관련된 전공과목을 수강했다. 주제를 선정해서 신문 기사를 작성하거나, 글을 다시 쓰고, 고쳐 썼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글을 1년 이상 쓰지 않았을 때였다. 쓰다 보니 다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한국어교육학과 전공 연계로 후에외국어대에서 특강을 하고 난 후, 중복 투고 확인 전화를 받았다. 다음날 당선 통보를 받았다. 한국어교육뿐만 아니라 삶의 태도에 대해서도 알려주시는 송복승 교수님, 김지현 교수님, 한지현 교수님, 이정아 교수님, 박은경 교수님, 김정 교수님, 나선혜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한국어교육학과 강의실에서 맞은편을 바라본다. 내가 10년 전에 글을 배웠던 문예창작학과가 있다. 글의 토대를 닦을 수 있게 해 주신 김길수 교수님, 곽재구 교수님, 안광진 교수님, 장철문 교수님, 전성태 교수님, 김춘규 교수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덧붙여, 이 자리까지 오는 데에 많은 지지를 보내 준 가족들과 친구들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 김수현 씨는 전라남도 순천 출신으로 순천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해, 같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수료했다. 그는 현재 순천대 한국어교육학과에 재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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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1 18:39

[2025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소감 : 시] 치열하게 꿈꾸는 시인이 될 것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배 한 척, 넘실대는 파도를 가로질러 수평선으로 향합니다. 때론 기우뚱 방향을 잃기도 하지요. 시에 대한 갈증과 물음을 가득 싣고 떠난 배처럼, 시는 가까이 존재하지만 확 잡히지 않는 또 다른 나였습니다. 아우성처럼 쏟아지는 많은 말들을 마음속으로 다시 밀어 넣습니다. 10대 때부터 함께 한 ‘시’이지만, 모든 것이 치열하지 못했던 아쉬움과 핑계일 테니까요. 차곡차곡 접어 둔 못다 한 언어들은 앞으로 써야 할 작품 속에 녹여내면 되지 않을까요. 시를 쓰면서 조금 깨달은 게 있습니다. ‘시’는 언제나 그 과정 속에 놓여 있기에, 매 순간 새롭고 치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 어렵고 힘들지만 참 설레이고 행복한 일이기도 합니다. 특별한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넘치게 받은 당선 소식에 감사하고 기쁜 마음입니다. 부족한 제 자신을 다독이면서 더 힘을 내라는 메세지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먼저 부족하지만 가능성을 보시고 선택해주신 김사인 시인님, 박남준 시인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창살에 갇히지 않고 훨훨 날아갈 수 있는 시인이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조말선 선생님, 시의 내밀성을 찾지 못하고 추위에 떨고 있는 제가 많이 안타까우셨죠. 시의 바닥과 그 깊이를 채워주시려고 하신 마음 알기에,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선생님께서 늘 강조하신 사유와 인식, 그리고 대상의 속성으로 새로움을 발견해내는, 이미지와 묘사를 잃지 않는 시인이 되도록 애쓰겠습니다. 시를 쓰는 과정에서 함께 한 신정민 선생님, 강영환 선생님께도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시’에 대해 함께 고민하며 많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누던 다정한 지평 선생님들, 저보다 더 많이 기뻐해 주시는 모습에 울컥했습니다. 애정어린 잔소리로 응원해 준 사랑하는 남편과 딸 시현, 기뻐해 주시는 아버님, 버팀목과 안식처인 김경남 나의 엄마, 현승, 현준 사랑하는 가족을 비롯해, 진심으로 기뻐해 주시는 소중한 지인분들과 나의 사랑하는 벗들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딸이 글쓰는 걸 늘 응원해주셨던 그리운 아버지, 아직 늦지 않았지요, 치열하게 꿈꾸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 이주경 씨는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부산광역시와 김해장유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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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1 18:39

[2025 전북일보 신춘문예 심사평 : 시] 고요한 영혼의 시위를 당겨라

‘신춘 병’이라는 오직 문청이라 분류 지칭되는 종족에게만 대책 없이 전염되고 일사불란하게 치유를 거부하는 지독한 병이 세대를 초월해서 아직도 유효한가 보다. 일천여 편이 넘는 투고 시가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왔다. 모두 열두 분의 44편이었다. “필락경풍우 시성읍귀신(筆落驚風雨 詩成泣鬼神), 붓을 들어 떨치면 비바람이 놀라고 시를 지어 이루면 귀신도 울고 가는 이라며 두보가 이백을 일러 존경을 표한 헌사가 있다. 모름지기 시를 짓는다면 적어도 이 정도의 문장을 꿈꾸어야 하지 않는가.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라고 젊은 날 시마에 빠져 시의 날을 벼리기도, 그렇지 못한 남루한 시적 재능을 자학하던 시절이 있었다. 발칙 풍부하고 패기 넘치는 상상력, 갓 건져 올린 물고기의 비늘에 파닥거리는 윤슬, 우주를 들이마신 숨을 멈추며 이윽고 고요한 내면의 시위를 당긴 숨 가쁘도록 팽팽한 긴장, 수면을 차고 튀어 오른 물방울에 비친 영혼의 무게. 신춘문예 심사를 하다가 위와 같은 문장을 만날 때가 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기쁨을 누리는 순간이다. 잊고 있었던 호승심이 일기도 부러움에 눈꺼풀이 가만히 내리 감기기도 한다. 「카카리키 앵무」외 2편과 「컨베이어 벨트」외 3편, 두사람의 작품을 두고 아주 잠시 머리를 맞댔다. 기성의 시문법, 감각을 안정적으로 운용하는 훈련도 쉽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심사위원으로 대표되는 기성의 미적 감각과 안목을 돌파 해주는 그러한 신선함 속에 시적 설득력을 발휘하는 새 목소리, 새 힘을 우리는 기다리는 것이다. 적어도 그런 의욕과 모험의 열정을 기대하는 것. 기준이 그러했다. 「자석 수평계」, 「새점」, 비록 완성도가 높은 수준작이기는 하지만 기성세대와 크게 다를바없는 작품은 적어도 신춘에서는 보류하기로 했다. 당선작은 왜 꼭 한사람이어야 할까. 「들깨꽃 부각」은 시대상황과 맞물려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시란, 시인이란 내일을 향한 날카로운 예각의 안테나를 갈고 닦고 기다려야 한다. 뮤즈의 샘물이 가득 차오르기 까지. 「카카리키 앵무」는 사회문제로 떠오른 층간소음문제, 육아, 가족, 교육문제등을 반려동물을 통해 바라본 작품이다. 당선작을 받쳐주는 다른 작품의 수준이 조금은 고른 이에게 마음이 더 기울였다. 또한 시를 끌고 나가는 뒷힘과 함께 당선자 쪽의 발랄과 생기가 우리의 의도에 더 맞는 것으로 여겼다. 부디 당선작이 대표작이 된 시인으로 머물지 않기를 바라며 당선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박남준·김사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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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1 18:39

[2025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시] 카카리키 앵무-이주경

조용히 우는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주전자 물 끓는 소리보다 작게 울어도 가둔다 미풍에 머리카락 날리는 소리보다 작게 울어도 가둔다 창문보다 낮게 목소리를 죽이는 아이, 이웃집엔 중문도 방음벽도 없단다 얌전히 울면 해바라기 씨를 가득 줄 테야 호기심 많은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탁자 위에 놓인 꽃병을 쪼아대도 가둔다 짧고 단단한 부리로 백합 꽃잎을 쪼아대도 가둔다 동글동글한 눈빛으로 수도꼭지를 툭툭 건드려도 가둔다 집안에서 제일 예민한 각도로 웅크리는 아이, 이웃집엔 꽃병도 수도꼭지도 없단다 너의 호기심을 잠그면 해바라기 밭을 줄 테야 혼자 놀기 좋아하는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오후 햇살이 올리브색 깃털 위로 미끄러져도 가둔다 건반 위를 콩콩 뛰어다니기만 해도 가둔다 깨지지 않는 거울을 보고 혼잣말을 해도 가둔다 방안에서 깃털을 고르는 아이, 이웃집엔 햇살도 거울도 없단다 방안 가득 네 꿈을 펼친다면 새장을 통째로 줄 테야 아파트 밖을 나서는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창문 여는 소리만 들려도 가둔다 놀이터에서 들리는 웃음소리가 높아져도 가둔다 마오리족의 깃털처럼 가벼워지려는 아이를 가둔다 창살 안에서 노란 깃털을 뽐내는 아이, 이웃집엔 너 같은 아이도 악보도 없단다 내 앞에서만 노래하면 새장을 요람처럼 흔들어 줄 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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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1 18:38

[2025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소설] 넋두리-장용돈

코뚜레에 걸쳐진 줄은 용수철처럼 딴딴하고 팽팽하다. 조교사들은 금방이라도 튕겨 나갈 듯한 줄을 잡고 용을 쓰며 끌어당긴다. 곧이어 두 소의 머리를 맞대고 코뚜레의 줄을 빼내는 순간, 이내 싸움은 시작된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혓바닥에서 연신 거품이 흘러내린다. 단단한 근육으로 뭉쳐진 네 개의 발은 땅바닥에 단단하게 고정해 상대방의 힘에 밀릴지언정 제 발로 물러서지는 않는다. 목덜미를 앞으로 수그린 채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친 뿔을 부딪치면서 상대 소에게 굴복해 절대로 밀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녀석들의 커다랗고 순한 눈알에서는 이제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전의가 불타오른다. 상대 소는 800Kg 이상의 제일 무거운 체급인 갑종 싸움소 중 청도에서 정읍까지 벌써 4연승을 달리는 갑짱이다. 그렇게 15분여가 흐른 뒤, 갑짱을 상대로 창해의 적극적인 뿔걸이 공격이 시작된다. 창해의 뿔이 갑짱의 뿔을 걸어서 목을 왼편으로 꺾는다. 갑짱은 혓바닥을 땅에 끌릴 듯 길게 늘어뜨리고,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쉰다. 창해는 뿔 기술뿐만 아니라 머리 밀기, 목 감아 돌리기, 들어 밀치기, 배치기 등 어느 기술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정말 싸움을 하려고 태어난 소 같다. 창해의 지능적인 싸움 앞에서 호흡이 불안해진 갑짱의 눈빛에 긴장한 기색이 뚜렷하다. 곧이어 창해가 뿔걸이 상태로 갑짱의 육중한 몸을 밀치기 시작한다. 밀리지 않기 위해 버티는 갑짱의 앞발이 점차 땅바닥을 파헤치며 뒤로 끌린다. 그러나 창해의 뚝심 있는 밀치기 앞에서 갑짱은 도무지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는 듯 몸을 돌려 싸움을 포기하고 만다. 자신보다 100kg은 더 나가는 갑짱을 이긴 뒤, 창해는 머리에 시퍼런 멍이 들고 뿔에 찢겨 피가 흥건한 상황에서도 갑짱을 뒤쫓아 가지 않는다. 관중들의 환호를 들으며 싸움장 한가운데에 콧바람만 씩씩거리면서 자리를 지킨 채 서 있는 창해의 당당한 눈망울. 당신은 논두렁 길에 우두커니 서서 창해의 맑고 선했던 그 눈망울을 떠올리며 심란해지는 마음을 애써 추스른다. 잔뜩 성이 나서 논배미 위를 휘감아 돌던 바람이 발정 난 수캐처럼 덤벼든다. 조만간 겁나게 심헌 비라도 퍼부어대면 인자 포도시 뿌리 내리고 여물어가는 벼 모가지들이 제대로 버틸랑가, 라고 당신은 멀리 먹물이 번지듯 하늘을 뒤덮은 채 몰려드는 구름을 보며 걱정스레 혼잣말을 한다. 그 구름이 터지면서 내뿜기라도 하는 듯 거칠고 강한 바람이 푸른빛으로 물들어가는 나락을 훑으면서 쏟아져 내린다. 바람은 이내 시누대처럼 가늘고 구부정한 당신의 허리를 세차게 훑는다. 당신은 찢어진 창호지가 되어 금방이라도 바람에 실려 공중으로 날아갈 듯 위태로운 발걸음으로 유모차를 밀면서 논두렁을 걸어간다. 굳이 새로 난 포장된 길이 아닌 좁은 논두렁 길을 택해 걷는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지만, 당신이 매일 이렇듯 비좁은 길로 마을회관에 오고 갔음을 나는 오늘에서야 알게 된다. 잠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당신은 이삭이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벼를 자식들 머리카락을 빗겨주듯이 어루만진다. 당신의 손가락 마디에 내 입김이 닿을까 싶어 세차게 내려앉아 보지만, 당신은 그저 두 손에 더욱 힘을 주고서 흔들리는 유모차의 손잡이를 부여잡고 걸어간다. 당신은 젊은 시절 같았으면 몇십 초면 될 마을회관까지의 그 짧은 거리를 한참이나 걸려 어렵게 도착한다. 저 멀리 마을 입구에서는 동물방역단 통제관과 동물위생시험소 소속 가축방역관, 방역팀 등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고, 회관 앞 공터에 모인 사람들에게 군청에서 나온 조사관이 보상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근방에서 소, 돼지 등을 키우는 집은 5가구 정도인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있다. 열대여섯 중에서 이장을 비롯한 서너 명의 60대를 제외하면 대부분 70, 80대 노인만 있을 뿐 조사관 또래의 50대 아래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제 머지않아 이 사람들조차 하나둘 떠나고 나면 마을은 잡초와 바람만 무성한 채 느리게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이번에 살처분한 가축들 현시세대로 보상비도 받고, 거기다 위로금까지 더 보태주니 오히려 축산 농가에게는 이득이죠. 그리고….” “에끼! 고런 느자구 없는 야그를 할라문 그냥 우리들까정 다 한꺼번에 묻어 불라고 하쇼. 우리가 키우는 돼아지, 소가 어디 그냥 가축이간디. 맨날 빈 항아리에다 우물물 붓드끼 사룟값도 안 나올 거 뻔히 알면서도 몸이 뽀사져라 지금껏 애지중지 키운 것은…고것들이 우리헌티는 어찌 되었든간에 귀허디 귀헌 자식새끼 같은게 그리 안 했겄소.” 조사관이 설명을 다 마치기도 전에 이장이 금방이라도 멱살이라도 잡아챌 것처럼 눈을 부라리며 잔뜩 부아가 치민 목소리로 말을 던진다. 그는 아침부터 해장술이라도 했는지 눈알이며 얼굴이 불그레하다. “하따! 그렇게 귀헌 자식새끼 같으믄 백신도 잘 맞히고 허지 좀…….” 올봄 이장 선거에서 떨어진 뒤 서로 말도 잘 섞지 않는 낙근 씨가 이장에게 비아냥대면서 말을 받는다. 이번 동물 전염병 사태는 바로 이장이 기르던 소가 처음으로 1급 전염병 판정을 받은 뒤 시작되었기에 사람들은 은근히 이장이 미안하다는 표시라도 해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마을 축산 농가에게 고개 한번 숙이지 않을 정도로 당당했다. “저짝은 고작 3마리밖에 안되는디, 거그서 300미터 떨어진 나는 20마리란 말요. 글고 아, 솔직히 말혀서, 3년 전, 전국적으로 그 생난리를 쳤던 구제역 파동 때도 병으로 죽은 소가 어디 있었다요? 다들 예방 차원에서 수만 마리나 살처분해 불었제.” 낙근 씨가 이장 쪽으로 손가락질을 하더니 조사관을 향해 말을 이어간다. 이장은 은근히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 태도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삭이려고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문다. 먼 친척이면서도 두 사람은 무엇이든 서로를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라 결국 이장 선거 때는 삿대질까지 하면서 언성을 높이더니 얼마간 왕래를 끊기까지 했다. 당신은 사람들이 왜 모여있는지, 당신이 여기에 왜 왔는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유모차를 한곳에 삐딱하게 버려둔 채로 ‘백계리 마을회관’이란 팻말이 붙여진 현관을 지나쳐 바로 옆 당산나무 앞으로 걸어간다. 오매, 지지리 복도 없는 년! 태어날 때부텀 망태기로 퍼 담을 맹키로 차고 넘치는 복을 원허지도 않았는디 …. 당신은 느닷없이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더니 신세 한탄을 쏟아낸다. 마을 사람들은 또 시작이라는 듯이 하나둘 그런 당신에게서 시선을 돌린다. 군청 직원이 줄을 선 사람들에게 조사서를 나눠주면서 힐끗 당신을 한번 쳐다보았을 뿐, 당산나무를 향해 연신 절을 하면서 주저리주저리 뱉어내는 당신의 말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나무와 처음 마주하던 날, 낯선 곳에서 시작될 새로운 생활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이 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어리고 귀엽기까지 하던 당신의 모습과 지금의 당신은 도무지 겹치지 않는다. 신부 화장을 곱게 하고 수줍은 얼굴로 가마에서 내리던 당신은 그때도 당산나무를 보고 손을 모은 채 절을 했었다. 그 당산나무는 이제 곳곳이 썩고 생채기가 나서 몸통만 유독 만삭의 아낙네 배처럼 부풀어 오르고 위쪽으로 가지들은 앙상하게 말라 있다. 몇 년 전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몸 곳곳에 영양제를 찔러대고 보수를 해주어도 도무지 예전의 풍성한 잎들을 드러내지 못한 채 죽어가는 중이다. 당신이 여기 백계리로 시집을 온 것은 막 스물다섯 살 생일을 보낸 며칠 뒤였다. 열 살도 되기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등지는 바람에 엄니 혼자서 위로 오라버니 셋, 아래로 여동생 둘까지 육 남매를 키우다 보니께 울 엄니 손바닥은 늘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맹키로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고, 삼시 세끼 때만 되면 자식들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할 생각에 걱정이 가실 날이 없었당게요. 그래서 울 엄니가 나를 열한 살 때 광주에 있는 고모 댁으로 식모살이를 보냈제. 그때는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라도 한 방울 나올지 알았더만, 엄니 고생을 덜어준다고 생각허니께…. 오매, 거 아예 속이 시원섭섭허드랑게. 그때부텀 난 나중에 시집가더라도 울 엄니처럼 시골 사는 남자하고는 상종도 안할 것이라고 속으로 각오를 해불었제. 그런디도 뭔 놈의 팔자가 이리 배암이 똬리 튼 것 맨키 배배 꼬인 것인지 먼 친척 되는 아재가 중매를 서서 여그 백계리까정 안왔겄소, 첫날 밤, 당신의 옷고름을 풀어주기도 전에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내 머리맡에 앉아 당신은 앞으로 펼쳐질 이곳에서의 생활을 뻔히 아는 사람처럼 방바닥이 꺼지라 한숨을 토하며 혼잣말을 해댔다. 당신이 시집을 온 백계리는 이름처럼 하얀 닭 머리 모양의 산 아래 위치해서인지 돌산이 절반을 차지하고 기껏 논이라고 해봤자 갯물을 먹어서 나락을 심어도 한 마지기에 겨우 서너 가마니밖에 안 나와 농사짓기에도 젬병인 그런 동네였다. 그 논에다 거름 져 나르고 땅심을 북돋아가면서 한 해 한 해 힘겹게 농사를 짓다 보니 기름진 농토가 되었고, 또 밤낮으로 쇠스랑이며 곡괭이로 파내고 일구다 보니 그 많던 돌산에 지렁이가 바글거리고 심는 족족 씨알이 굵은 곡식들이 자라는 밭이 생기게 되었다. 참말로 그때만 하더라도 논밭이 아니면 세상에 먹고 사는 길이 없는 줄 알고 당신이나 나나 눈에 쌍심지 켜고 죽어라 일만 했다. “꼭 송충이마냥 겁나게 징그럽더만, 고것이 인자는 맥없이 좋소잉.” 소쩍새 한 마리가 뒤안 대숲에 앉아서 울고 있었다. 곤히 잠들어 있는 어린 것들이 깰새라 당신은 이불을 돌돌 말아 몸에 감더니 코 먹은 소리로 나를 보며 그랬다. 송충이처럼 떡하니 자리 잡은 눈썹을 보면서 처음에는 징그럽다고 하던 당신은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얼굴에서 눈썹이 사내답고 강하게 보여서 유독 좋다고 했다. “남우세스럽구만 잉.” “워매, 고것이 뭣이 남우세스러운 일이다요. 젊을 적에사 밥 먹다 말고도 눈 맞아서 자빠뜨리고 자빠지고 다 그리함서 새끼들 낳고 허는 것이제.” 마당에 덕석 깔고 콩 타작을 할 때면 도리깨를 들어 올릴 적마다 내 눈썹이 위아래로 꼼지락대는 걸 보다가 ‘오매, 참말로 가슴을 콩닥거리게 허요’,라며 당신은 내 팔을 잡아당기고는 했다. 당신과 나는 아직 몸이 젊을 때라 밭에서 일하다 말고 풀밭에 쓰러져 함께 뒹굴기도 여러 번이었고, 논두렁에서 피 뽑다 말고 내 우악스런 손아귀에 못 이기는 척 논 옆 비닐하우스에 들어가서 그런 적도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큰아들놈 낳고 둘째까지 낳아 오직 자식놈 뒷바라지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평생을 살았다.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남의 집 품앗이 다니고, 하루 일 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뼈가 부서지도록 바쁘게 살다 보니 어느덧 두 마지기였던 논이 네 마지기로 늘었고, 밭도 기름지고 볕 좋은 놈으로 서너 마지기를 장만할 수 있었다. 나는 땅문서에 찍힌 도장밥이 마르기도 전에 당신을 안고 좋아 죽겠다는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오매, 이녁은 몸뚱이는 째깐해도 뭔 일을 혀도 각단지게 허는구만. 그동안 겁나게 고생해 불었네.” “으째 근다요. 나는 암시랑도 안해라. 이쁜 우리 아그들 덕분에 신간은 겁나게 편했당게요.” 나는 그런 당신이 얼마나 귀여웠던지 내 몸쪽으로 바짝 당겨서 안고, 밤이 새도록 탐했다. 자식들도 자기 부모 힘들게 일하는 거 보면서 이런 촌구석 아이들 같지 않게 공부도 잘해주고 아무런 말썽도 부리지 않으면서 잘 커 주었다. 큰아들이 그 어렵다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떡하니 합격했을 때 당신은 얼마나 신이 났던지 마을 입구에는 현수막 걸고, 당산나무 아래엔 덕석 깔고서 동네 사람들 다 불러 놓고 돼지도 잡고 떡도 해서 크게 잔치를 열었다. 다들 아시지라? 그날 진안댁이 막걸리에 취해가꼬 먼저 죽은 자슥놈 생각난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잔치판이 난장판이 되질 않았습디요. 근디 자식 놈들을 그렇게 애지중지함서 키웠는디 그라문 뭣헌다요, 당신의 말은 또 이쯤에서 끊긴다. 당신은 빙판길에서 쓰러진 뒤로 고관절 수술을 두 번씩이나 했다. 그 뒤로 당신은 말투가 어눌해지고 행동거지는 생각대로 되지 않아 늘 마음과 말이 엇박자를 놓았다. 큰아들 명호가 베트남 비행기에 오른 그해 겨울, 눈에 파묻힌 마을은 무섭도록 아름다웠다. 당신의 증상도 아마 그날부터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다랑이 논 사이로 드문드문 베트남 전통가옥인 냐산의 삼각뿔형 지붕이 들어서 있다. 논두렁 위, 시커먼 털과 크고 뾰족한 뿔을 가진 물소에 올라탄 채 까맣게 얼굴이 그을린 중년의 아들이 활짝 웃고 있다. 그 옆에 대나무로 만든 뾰족한 논라를 머리에 쓰고 붉은색 아오자이를 곱게 입은 채, 아직도 앳돼 보이는 트엉이 수줍은 듯 서 있다. 마을을 떠난 지 한 달이 넘어서야 보내온 사진 속에서 아들과 트엉은 행복해 보였다. 당신은 아들이 보내온 사진을 나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봐서 몰래 감춰두고 수시로 꺼내 보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마실 가고 없을 때면 몇 번씩 훔쳐보고는 했기에 아들이 중국과 국경을 나란히 한 베트남 북부 농촌 마을에서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날이 저리 개러가꼬 어쩔까이? 아무래도 올해 장마는, 몰아치는 바람이며 몰려드는 시커먼 구름떼가 시피 볼 것이 아니구만요. 그랴도 작년처럼 징헌 물난리는 없어야 쓰겄는디.” 언제 왔는지 당신과 그나마 각별하게 지내는 금평댁이 작년 물난리 이야기를 꺼내며 자꾸만 과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당신의 생각을 토막 낸다. 정말이지 작년에는 염병할 놈의 태풍이 초복이 한참 지나서야 뒤늦게 몰려들더니 근 열흘 동안 내리퍼붓던 장대비 때문에 저수지 둑이 무너져 성수네 논이며, 금평댁 수박밭이 죄다 물에 잠겨버렸다. “어따 성님, 저거 쪼까 보랑게요. 저런 오살헐 놈의 시궁창물이 우리 목심줄 겉은 수박들을 다 아작 낸 것도 모자래서 시방 동동거림서 나를 약 올리는 거 맞지라잉. 오매 징한 거! 저 아까운 것들 우짠단가.” 그 금싸라기 같은 수박들이 물 위로 동동 떠내려가는 걸 망연한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금평댁은 힘이 빠진 목소리로 그랬다. 그리고 그날 이후, 금평댁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유모차를 앞세우지 않고서는 제대로 바깥출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올해는 장마가 오기 전부터 징글맞게 궂은일들만 무시로 들이닥쳐서 당신은 애간장이 다 녹아버릴 듯 힘들 때가 부지기수다. 애써 마음을 추스른 채 금평댁의 유모차를 따라 당신과 당신의 유모차는 사람들 쪽으로 향한다. 조사관 앞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밀치고 당신이 맨 앞으로 끼어들어도 누구 하나 막아서지 않는다. 근디 우리 소는 다르단 말요, 라고 시작되는 당신의 넋두리는 당신이 굳이 다음 내용을 말하지 않아도, 회관 앞에 모인 사람들은 당신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모두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당신은 개의치 않는다. 벌써 사흘째, 당신은 매일 같은 시간에 그곳에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중이다. 긍게로 이런저런 사정 다 따져서 암만 생각혀도 제일로 불쌍한 것은 우리집 양반이랑게. 우리집 양반이 그 많던 농사는 등한시 하고 날마다 싸움소에 정신이 저러코롬 환장하게 된 게 벌써 십몇 년이 넘었지라. 아들놈들도 어지간한 송아지 열 마리 값을 암시랑도 안하드끼 지불허고 고작 싸움소 될 성싶은 송아지 한 마리만 덜커덩 사오는 즈그 아부지가 제정신이 아니라며 등을 돌리다시피 했당게. 근디도 기언코 우승시키겄다고, 그 양반이 정성을 기울인 내막을 내가 여그서 다 말하는 것은 어림 택도 없을 것이여. 그동안 우시장마다 돌아댕김서 쓸 만한 송아지를 사다가 금이야 옥이야 해감서 보약 다려 멕이고, 타이어 매달고 들로 산으로 끌고 다님서 훈련시킨다고 쏟아 부은 돈만 허드라도 논 열댓 마지기는 족히 넘을 것이요. 근디, 이 양반이 농사일까정 내팽개쳐 감서 그렇게 송아지부텀 온갖 정성을 다해서 키워 어느 정도 자라 코뚜레하고 고생고생 해가꼬 훈련을 시키면 뭣한다요. 이놈의 것들을 비싼 운반 트럭에 태워가꼬 그 먼 곳까지 데리고 가서 조교사까지 붙여 싸움장에 내려놓기만 하면 출전 호명과 함께 잔뜩 긴장을 해가꼬는 상대방 소 한번 들이받지도 못한 채 엉덩이를 빼고 줄행랑을 치기 일쑤였당게. 근디 창해는 고것이 아니드란 말요. 싸움소, 창해! 창해는 흔히 볼 수 있는 누렁소가 아니라 그런 싸움소 중에서도 보기 힘들다는 호랑이 털빛 같은 얼룩 문양을 가진 칡소였다. 정읍 우시장을 수십 번을 다니며 발견한 놈이었고, 태어난 지 석 달밖에 안 된 송아지인데도 목이 드럼통처럼 굵직하고 가슴팍은 단단하면서도 넓으며 등과 뒷다리가 척 봐도 힘깨나 쓰게 생겼었다. 거기다 꼬리는 말 꼬랑지같이 길고, 눈과 귀가 작은 것이 간이 커서 싸움판에서 쉽사리 물러서지 않을 듯 보였다. 당신은 싸움소에 대해 잘 아는 듯이 창해 등짝을 매만지면서 자랑삼아 말했다. 여보! 이놈은 말여, 무엇보다 뿔이 맘에 든당게. 여그를 좀 보소. 아직 삐져나오지는 않았지만 여그 뿔 자리가 하늘을 향해 있는 모양새가 분명히 노고지리 뿔이여. 인자 이놈이 싸움판에 나서기만 해보라제. 뿔치기, 뿔걸이에서 이놈을 당할 소는 없을 것인게. 창해가 소싸움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올 때면 마을회관에서는 늘 당신 덕에 잔치가 열렸다. 멀리 경상도 김해에서 열렸던 소싸움 대회의 갑종 부문에서 창해가 우승했을 때도 그랬고, 전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싸움소 120마리가 모인 창녕 소싸움 대회 결승전에서 목치기 한판승으로 이겼을 때도 당신은 마을 사람들과도 이 기쁨을 같이 해야 한다며 기필코 상금 800만원 중에서 200만원씩이나 턱하니 잔칫상 차리는데 내놨다. 만약에 매일같이 그런 잔치만 있었다면 당신이 말하듯 ‘가슴팍 한구녕에 애리게 박아 놓은 상처’는 좀 누그러졌을까. 당신이 둘째를 낳고, 겨우 산후조리를 마친 그 날밤, 나는 읍내의 허름한 선술집 김 양의 진한 분 냄새에 취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나는 정신이 회까닥해버린 상태였다. 당신은 그 어둡고 먼 밤길을 손전등 하나만 달랑 들고서 한 시간을 넘게 걸었다. 산짐승과 풀벌레 소리에 잠식되어 어디쯤인지 분간도 하기 힘든 길 위로 눈을 똑바로 못 뜰 정도로 무시로 바람이 덮쳐 왔다. 당신은 고갯길을 두 개나 오르고 바람도 잦아들고 해서 잠시 쉬느라 바위 위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가득 별들이 마치 화롯불에서 활활 타오르는 숯덩이를 마당에 확 흩뿌려 놓은 것처럼 요상스럽게 빛을 뿜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들이 가슴팍으로 아리게 파고들더니 불안한 마음의 잉걸불이 되어 버렸다. 불안은 인제 의심 덩이가 되어 가슴팍에다 쉼 없이 풀무질을 해대고 맥없이 눈물마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당신은 담박질로 읍내까지 가서 기어코 두 눈으로 확인을 하고야 말았다. 부뚜막 아궁이에 집어넣고 장작 때기를 겹으로 쌓아 불을 싸질러도 시원찮을 연놈들이 방구석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저승사자 보듯이 당신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눈앞에서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으면서 온몸에 있는 기운이 실타래 풀어지듯 스르르 땅바닥으로 꺼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참 주저앉아 있다가 그 문짝이 부서지라 닫아버리고 뒤돌아서 터벅터벅 집까지 걸어갔다. 그날, 당신이 나를 원망하거나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면 아마 나는 당신을 따라서 그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 당신은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일이 있으면 나를 쏘아보며 ‘씨는 못 속인당게. 꼭 그런 것만 저그 아부지를 탁했응게로. 서방 복 없는 년이 뭔 놈의 자식 복을 바란디야.’라며 사금파리처럼 예리한 한 마디를 남편인지 아들인지 모르는 상대에게 쏘아붙이고는 했다. “한탕주의나 부추기는 소싸움이 무슨 놈의 전통이고 민속이라고. 솔직히 불쌍한 동물을 학대하는 거죠. 이제 고만 좀 하세요.” 싸움소에게 먹일 쇠죽에다 미꾸라지며 인삼을 갈아서 넣고 있을 때였다. 아들은 외양간 앞에 삐딱하게 선 채 비꼬는 말투로 이제 막 3살이 되는 창해를 팔자고 했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하마터면 왼손에 들고 있는 솥뚜껑을 놓칠 뻔했다. 서울의 그 좋다는 대학 나와서 착실하게 회사 생활하면서 아파트도 한 채 있겠다, 거기다 많이 배운 마누라 얻어서 떵떵거리면서 잘 살던 아들이었다. 그런데 주식이며 부동산 투자한답시고 눈알이 핑 돌더니 밑 빠진 독에 양수기로 물을 퍼 담아 날라도 차지 않을 만큼 맨날 돈을 꼬라박기 시작했다. 결국, 아파트를 처분한 돈과 회사 퇴직금까지 날리고 이혼까지 당하더니 빈털터리가 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은 싸움소가 돈이 된다는 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사업자금으로 쓸 돈을 해달라고 보챘다. 그건 가당치도 않았다. 당신과 나에게 창해는 그저 사고팔 수 있는 짐승이 아니었다. 그러더니 아들은 동업자인 친구 상현이가 보증을 서준 덕분에 농협에서 빚을 내 콤바인과 트랙터 등의 농기계를 사 왔다. 둘은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기계로 수확해주는 일을 시작했다. 노인들이 대부분인 농촌에서 그나마 몇 안 되는 젊은 사람들인지라 어느 정도 사업이 성공한 듯 보였다. 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성실하게 살아주는 그런 아들의 모습에 괜히 마음이 아려오기까지 했다. 아직 한창인 창해를 싸움소에서 은퇴시킨 것도 몸이 늙고 병이 와서라기보다는 아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앞서서였는지도 모른다. 럼피스킨병! 당신에게는 화성이니 명왕성처럼 도무지 가늠하기도 어렵고, 발음조차 하기 힘든 낯선 이름의 병명을 방역관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전염성이 강한 병이라고 했다. 같은 마을의 소는 물론이고 돼지들 전부 살처분 대상이라고 했다. 살처분이라는 말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 더미를 처리하는 것처럼 너무도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당신은 그저 창해 발굽에 조그마한 물집이 잡히고 고열이 있으면서 며칠간 침만 질질 흘리고 먹지도 않아 걱정스러워했을 뿐이다. 창해는 은퇴한 지 벌써 5년이 되었지만 비실비실한 일반 소와 달리 싸움소 출신이라 그런 병에 쉽사리 걸리지 않을 것이란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가축방역관들은 인근 500미터 근방의 모든 소는 살처분 대상이라며 막무가내로 창해에게 마취제를 찔러 넣었다. 마취제를 맞더니 힘이 빠진 채 두 눈을 끔뻑이며 당신을 뻔히 쳐다보는 고것 눈에서 굵은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리는 걸 당신은 분명히 보고 말았다, 아직 숨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창해를 매몰지까지 싣고 온 굴착기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구덩이에다 쳐 박아넣고 흙으로 덮어 버렸다. 당신은 자기 몸이 굴착기의 삽으로 난도질당하고 파묻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슴이 녹아내릴 듯이 아프고, 발길이 허청대며 제자리에 발붙이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고혈압 땜시 크게 쓰러지고 난 뒤로는 죽을 날만 기둘리며 몸할라 지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양반이 창해가 있는 외양간으로 기다시피 가더니만 꽥꽥거림서 나옵디다. 내가 야그를 마치기도 전에 이 양반이 울부짖음서 창해가 묻힌 땅을 손가락으로 파내는디 오매, 손톱이 빠지기라도 혔는지 그 양반 손가락 살점들이 찢겨져 피가 흥건해지고 세상 다 망했다는 듯이 눈물을 흘리면서 꺼억꺼억 소리 내어 통곡까정 허더랑게요. 그리고 그날 저녁부텀 시름시름 앓더니만 인자는 저렇게 영영 못 일어나는 신세가 안되야 부렀소. 하이고, 우리 영감 불쌍혀서 어짠단가. 저 양반, 소를 지 자식새끼보다 더 애지중지함서 키웠는디. 좋은 것 많이 멕임서 죽을 때까정 호강시키겄다고 벼르고 있었는디. 말 못 허는 짐승이야 그렇다 치고, 시방 자기할라 이 시상 뜰라고 저래 숨을 꼴딱거리고 있응께 인자는 배겨낼 재간이 없는갑소, 말꼬리를 늘어뜨리며, 당신은 이제 거의 눈물 콧물 범벅인 채로 땅에 털썩 주저앉아 부지깽이처럼 말라비틀어진 손으로 땅바닥을 내리치며 울부짖기까지 한다. 군청에서 나온 조사관이 재빨리 체크리스트를 넘기면서 무엇인가를 찾는다. 그리고 당신과 이장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부러 한마디 던진다. “그건 너무 걱정마세요. 분명 일반소와 싸움소 가치를 달리해서 보상할 테니까요.” “음마! 누가 보상비 바라고 이라요? 거, 좋은 방법으로다 안락사라는 것도 있는디 뭣땀시 애먼 것들을 그리 숭악허게들 생으로 죽이느냐 이 말이제.” 금평댁이 당신의 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조사관을 앙칼지게 쏘아보며 한 마디 내뱉는다. “시간과의 싸움이니까요. 지금 저희도 동물방역당국과 협조하에 현장 통제와 소독, 역학 조사를 벌이느라 밤낮없이 많은 사람이 고생하고 있습니다. 최대한 해당 동물들 고통 없이 처리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너무 염려치 마세요.” “그라요? 그라문 하다못해 마취제를 쓰든가 아님, 가스를 쓰든가 해야 쓸 것 아니요. 몇 년 전에 전국적으로 구제역 돌 때는 시간 아낀다고 애먼 근육 이완제를 쓴 거 다 아요.” 담배만 연신 뿜어대던 낙근 씨가 갑자기 나서면서 3년 전에 전국의 축산업을 위기로 몰았던 구제역 파동으로 이야기를 돌려댄다. 그때는 너무 긴박하고 어려운 상황이라 동물 사체처리반 중에서도 과로사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고, 워낙 많은 수의 살처분이 진행되었기에 근육 이완제만 주사하고 바둥거리는 동물을 곧바로 매몰시키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조사관은 곤란한 표정이 역력한 얼굴로 서류를 신경질적으로 넘겨댄다. 당신은 조사관이 입술 꼬리를 한쪽으로 말아 올리며 인상을 쓰는 모습을 보면서 어쩐지 아들 명호의 그것과 닮아있음을 느낀다. 상현에게 국제결혼을 부추긴 것은 명호였다. 어릴 때부터 소아마비를 앓아서 몸이 불편했던 상현은 나이가 들어서도 연애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명호는 그런 상현에게 사내로 태어났으면 결혼도 한번은 해보는 게 좋을 거라며, 내켜 않는 그를 꼬드겨 부득불 베트남까지 동행했다. 그렇게 스물다섯 살의 트엉은 낯선 땅에서 신부가 되었다. 트엉은 눈이 솔방울처럼 크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 그렁그렁한 눈동자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가느다란 허리와 어딘지 여리게만 보이는 얼굴은 보호본능을 자극하고 서툰 한국말로 인사를 할 때의 목소리는 상냥했다. 얼마간 결혼 생활은 순탄하게 흘렀다. 그러나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절고, 말이 어눌한 것이 늘 상처로 남아있었던 상현이는 툭하면 술에 취해 아내가 자신을 무시한다며 행패를 부려댔다. 낯선 한국에 아직 적응도 되지 않은 채 나이도 어리고 마음마저 여렸던 트엉에게 이제 의지할 사람은 명호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명호가 빠져든 것은 어쩌면 시간문제였다. 명호는 상현이 몰래 농기계를 처분한 돈과 그의 아내인 트엉까지 챙겨서 폭설로 버스마저 끊긴 마을을 도망치듯 떠나갔다. 그날 이후, 매일 술에 취해 동네를 배회하고, 집에 찾아와 명호의 행방을 묻던 상현이는 갈수록 폐인처럼 변해갔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상현이가 베트남 비행기에 올랐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리고 이듬해 봄이 되어서야 베트남에서 돌아온 상현이는 형사들에게 둘러싸여 손에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다. 느자구 없는 놈! 하루 점드락 모가지 빠지라 기둘려도 편지 한 장 안 보낸디야. 당신은 우체부가 돌아서는 대문간에서 매일같이 항공우편을 기다렸다. 하지만, 당신이 기다리는 그 편지가 더 이상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나는 차마 아직껏 말하지 못했다. 꽃상여라? 참말로 벨시럽소잉.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당신에게 꽃,상,여,라고 말했고, 당신은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군청 장례식장이나 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르면 손님 맞이하기도 훨씬 쉽고 오시는 문상객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장마철을 앞두고 꽃상여를 태워 보내달라고 하니, 당신은 분명 영감탱이가 죽을 때까지 참말로 주책없이 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지막 가는 길은 그랬으면 했다. 옛날엔 비록 어렵고 힘들게 살았지만, 동네 사람들이 못줄을 치고 한 줄로 서서 타령 불러가며 모내기를 하고 나락도 함께 베었다. 세상 살기 좋고 편해졌지만, 나는 그때 기억들이 뭉실뭉실하면서 간절해질 때가 있었다. 한 세상 궂은일만 징그럽게 하다가 저세상 가는 마당에 온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 마당에 널찍한 차양치고 넉넉하게 차려진 음식 먹어가면서 시끌벅적하게 웃고 떠들고 하는 것 보면 저세상 가는 게 심심치는 않을 것이다. 간짓대에 걸린 꽃술이 깔끄막부터 온 동네에 휘휘 날리며 저세상 가는 길을 훤히 밝혀 주고, 창해가 맸던 워낭을 요령 삼아 앞소리꾼이 메기고 상두꾼들이 받아주는 상엿소리를 들으며 동네 사람들 모두 다 나와서 잘 가라고 손이라도 한번 흔들어주면 북망산천도 꽃구경 삼아 갈만 할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바닥에 퍼질러 앉은 당신을 내려다본다. 당신은 바닥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금평댁이 다시금 당신의 몸을 부축해 유모차의 손잡이를 잡게 도와준다. 당신은 한 손으로는 유모차의 손잡이를 잡고, 또 다른 손으로는 코를 팽하고 풀어서 바지춤에 쓱쓱 닦는다. 그리고 이제야 사람들에게 전할 말이 생각난 듯 조금은 가볍고 경쾌한 목소리로 말한다. 어짤라요? 내 홍어 무침도 허고 된장 푼 물에 애 넣고 시원허게 홍어국도 끓일 것인디. 거그다 술까정 푸짐허니 준비헐틴게, 여그 계신 양반들 다들 오실 거지라? 나는 인자 싸게싸게 집으로 가봐야 쓰겄소. 오매, 근디 오늘 저녁에는 저놈의 하늘이 기언시 비를 뿌릴랑가 참말로 날씨 한번 미친년 널뛰드끼 요상시럽구만 잉. 당신 것일 수도 있고, 내 것일 수도 있는 목소리에는 끊어질랑 말랑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줄었다 박자가 있다. 당신의 유모차는 그 박자에 맞춰 느릿느릿 논두렁 길을 지난다. 그러다가, 당신에게 손짓하며 더 너른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나를 쫓는 듯이, 박자는 점차로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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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1 18:37

[2025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수필] 겨울에도 꽃은 핀다-김수현

“언니, 자?” 잠결에 동생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날따라 초저녁부터 일찍 잠이 든 터였다. 평소 방문이 닫혀 있으면 동생은 걷는 것도 조심하곤 했다. 눈도 뜨지 않은 채, 손을 뻗어 머리맡에 둔 안경을 찾을 때였다. 방문이 요란스럽게 열렸다. “자는 거, 깨워서 미안해.” 미안하다면서도 동생은 자기 휴대전화를 불쑥 들이밀었다. 어느 유튜버가 라이브 방송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텍스트로 와글와글 떠들었다. 안경을 쓰자 그제야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국회의사당이 휴대전화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가끔 서울에 올라갔을 때 지하철 안에서나 보았던 곳이다. 국회의사당 앞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계엄령이 선포되었대.” 그 말에 준비 없이 찬물에 몸을 담근 듯, 숨이 가빠졌다. 계엄령이라는 단어는 아주 낯설지는 않았다. 학창 시절 내내 역사책에서 계엄령에 대해서 배웠다. 전라도에 둥지를 틀게 되면서는 광주민주화운동과 여순사건에 대해 조금 더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나의 삶과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계엄령과 가까운 것은 미얀마였다. 미얀마에서 온 유학생들은 ‘계엄령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죽고 있다’고 말했다. 미얀마 유학생들은 자기 나라에 있었을 때, 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다고 했다. 군대가 오면 골목으로 흩어져 숨을 죽였다고 한다. 미얀마 상황을 동영상으로 볼 때면, 미얀마 유학생들은 울곤 했다. 젊은이들은 남녀 구분 없이 군대로 가도록 법이 바뀌었으며, 미얀마로 돌아가면 출국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고 했다. 말로만 들었던 미얀마의 현실이, 한국에도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문득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처형될 사람들의 사진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같은 이불로 몸을 둘러싸고, 동생과 나는 작은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겨울바람이 창문을 뚫고 집을 배회하는 것만 같았다. 국회의원들은 담을 넘었고, 닫힌 국회 문을 열고 들어갔다. 기자들과 시민들도 따라 들어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헬기가 날아다니고, 군대는 국회의사당의 창문을 깨고 들어갔다. 일련의 과정들이 각종 매체를 통해서 전달되는 동안, 휴대전화는 잠시도 쉬지 않고 울렸다. 사람들은 메신저의 속도가 느려지고 포털 사이트에 접속이 되지 않는 것을 두고 걱정했다. 외국계 메신저를 다시 사용해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예술을 하거나 언론을 배우는 친구들은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소식은 외국까지도 금방 퍼져, 외국의 친구들이 한국에서 얼른 몸을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연락이 왔다. 커뮤니티에는 도로에 탱크가 다닌다는데, 진짜냐고 묻는 글들이 올라왔고, 가상화폐 거래소는 접속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원화의 가치는 떨어졌고, 비행기표를 구매했던 사람들은 출국 금지 명령이 내려오지 않을지 걱정하였다. 나와 동생은 생필품을 구비할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으며, 과거 계엄령에 대해서 다시 찾아보곤 했다. 문득 얼마 전, 일터에서 앞 시간대 사람과 교대하며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날 아침, 그는 평소와는 달리 상기된 표정이었다. 매장에 방문했던 손님과 이야기를 하다 의견 충돌이 생긴 모양이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우리가 과하다고 할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우리에게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없었잖아.” 그가 어릴 때,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의 사촌들은 광주에 살고 있었고, 혼란한 광주에서 근처 지역으로 몸을 피하려고 했다. 그의 고모는 사촌 누나 둘의 손을 잡고 밤에 산을 탔다. 그러나 군인들에게 발각이 되었고 고모와 큰 사촌 누나는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다. 작은 사촌 누나는 중학생이었지만, 또래에 비해 작았다 한다. 군인은 그의 작은 사촌 누나에게 너는 어려서 살려 준다고 했다. 그의 작은 사촌 누나는 머리에 피를 흘리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울면서 며칠을 걸어 그가 있는 지역에 도착했다고 한다. 광주에 있던 그의 친척 중, 살아남은 사람은 그의 작은 사촌 누나 단 한 사람이었다.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아마 그녀는 머리의 묵은 흉을 만지작거렸으리라.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몇십 년 만에 과거의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었다. 이번에는 계엄령이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해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혼란에 빠졌다. 경제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표현의 자유마저 걱정해야 할 정도로 민주주의는 퇴보하였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덕담을 나누는 시점에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혼란이 와도 해는 매일 뜬다. 새해는 올 것이고, 1월 1일의 겨울 해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보다 더 빨리 세상을 밝힐 것이다. 겨울 추위에 마냥 웅크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추울수록 뛰어야 몸이 더워지는 법이다. 이불에서 나와 책장에 있는 역사책을 꺼내 든다. 얇게 먼지가 쌓여 있다. 마른 휴지로 가만히 숨죽인 시간을 털어 낸다. 슬프고 화날 때는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기도 한다. 책의 여백에 오늘 날짜를 쓴다. 새해의 시작이 조금 울적하더라도 괜찮다. 서로 손을 잡고 따뜻하게 데운 방바닥에 앉아 옛날이야기, 지금 이야기 가릴 것 없이 도란도란 나누다 보면 지금보다 한결 가볍게 새해를 시작할 테니. 나뭇가지가 창밖에서 참 춥게 흔들린다. 쓸쓸하고 힘든 계절이다. 그래도 몇몇 나무는 꽃을 피운다. 대표적인 것이 동백이다. 제주에는 동백이 한창이라고 한다. 곧 이곳도 동백이 필 것이다. 겨울에도 꽃은 핀다. 그리고 몇 되지 않는 꽃에도 새들이 지저귀며 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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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1 18:36

[2025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동화] 재주내기 한판 할래 - 김정숙

구름산 꼭대기 큰 바위굴에 도깨비 가족이 살고 있어요. 아빠도깨비는 예전에 씨름 잘하기로 유명했고요. 엄마도깨비는 재주꾼 '참'으로 뽑혔대요. 이 부부에게 태어난 도깨비 ‘더잘난’은 힘이 세고 재주가 뛰어났어요. 쓰러진 통나무를 번쩍번쩍 들어 올리는 것도 식은 죽 먹기고요, 남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성대모사 재주가 보통이 넘었어요. “마을에 내려가 재주 내기 한판 할래!” 배운 재주를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더잘난이 아빠를 졸랐어요. “더잘난, 마을은 위험해. 차도 많고. 더구나 도깨비 재주보다 센 휴대폰이 사람들 혼을 쏙 빼갔다는 소문이 있어.” “그럼, 휴대폰이랑 재주내기 할래!” 더잘난은 재주대결 할 생각을 하자 힘이 불끈 솟았어요. 휴대폰과 재주내기를 한다면 이길 자신이 있었거든요. 안개가 아랫마을의 높은 건물을 다 잡아 먹은 밤이었어요. 엄마아빠가 잠든 걸 확인한 더잘난이 쏜살같이 산 아래로 내려왔어요. 거리엔 자동차가 씽씽 달리고요, 사람들이 북적북적 했어요. 가게마다 색색의 전깃불을 켜고 사람들이 모여 웃고 떠들었어요. 더잘난은 자동차 지붕에 올라 타 보기도 하고, 사람들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기도 했어요. 더잘난이 장난을 치며 돌아다녀도 관심을 갖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사람들은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거나, 사진을 찍고, 검색하기 바빴어요. 아빠 말처럼 휴대폰의 재주에 사람들이 모두 홀린 것 같았어요. 더잘난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아이를 봤어요. 휴대폰에 코를 박고 있는 아이는 더잘난이 옆에 앉는 줄도 몰랐어요. “야, 나랑 재주내기 한 판 하자!” “싫어!” 아이는 고개도 들지 않고 짜증을 냈어요. 더잘난이 아이를 슬쩍 밀었어요. 아이가 휴대폰을 들고 땅바닥에 주저앉았어요. “헉!” 더잘난과 눈이 마주친 아이가 흠칫했어요. 더잘난이 혓바닥을 쏙 내밀었어요. 아이가 벌떡 일어나 뒷걸음을 쳤어요. “나랑 한 판 붙자!” “바빠. 학원가야 돼.” 더잘난이 아이의 다리를 덥석 잡았어요. 아이는 다리를 잡히지 않으려고 버둥댔어요. “재주 내기 하자!” “안 돼. 바쁘다고!” 아이가 신경질을 부리며 더잘난을 노려봤어요. 아이의 관심을 끌려고 더잘난이 공중제비를 돌았어요. 아이의 입 꼬리가 잠깐 올라갔다가 금세 내려왔어요. “쳇 별거도 아니면서. 요건 손만 까닥하면 다 해주는데.” 아이가 휴대폰을 흔들어 보였어요. 아이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휴대폰 속에서 노래를 부르고, 게임을 하고, 춤도 추었어요. 휴대폰의 재주는 더잘난의 상상을 뛰어 넘었어요. 또 친구도 사귀고, 아무리 멀리 있어도 금방 소식을 전할 수 있대요. “이제 알겠니? 네 재주가 얼마나 시시한지.” 아이가 휴대폰을 더잘난 코앞에 들이댔어요. 더잘난은 휴대폰의 놀라운 재주에 정신이 아찔했어요. 엄마, 아빠보다 더 뛰어난 자신의 재주가 시시한 취급을 받아 속도 상했어요. 더잘난이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노란차가 달려와 아이를 태우고 떠났어요. 더잘난은 휴대폰 재주에 밀리긴 했지만, 구름산으로 돌아가기 싫었어요. 자신의 재주를 알아주고 좋아하는 사람을 꼭 만나고 싶었어요. 더잘난은 색색의 전기불이 켜져 있던 흥청거리에 다시 가보기로 했어요. 그 거리에 유난히 사람이 많았거든요. 너무 빠르게 달려 사람들이 그냥 지나쳤는지 몰라 이번에 천천히 걷기로 했어요. 더잘난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광장에 가서 발랑발랑 재주넘기를 했어요. 때마침 사진을 찍고 있던 사람이 더잘난의 재주넘기를 보고 뛰어왔어요. “와, 도깨비다. 같이 사진 찍어요!” 젊은 여자 두 명이 더잘난에게 사진을 찍자고 했어요. 어깨가 으쓱해진 더잘난은 젊은 여자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을 찍었어요. 여자들이 더잘난과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리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왔어요. 더잘난은 사람사이에서 옴짝달싹도 못하고 사진만 찍혔어요. 이리저리 떠밀리고 더잘난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어요. 사람들 등쌀에 더잘난은 흥청거리가 싫어졌어요. 더잘난은 재주를 부리는 척 하다가 작은 골목으로 달아났어요. 사람들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구름산이 있는 산등성이 마을로 향했어요. 높은 빌딩이 많은 산 아래와 달리 산비탈 마을은 지붕이 낮은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어요. 골목길 입구에 가로등이 켜 있고 허리가 굽은 사람이 느릿느릿 움직이는 게 보였어요. 가까이 다가간 더잘난이 전봇대 뒤로 숨었어요. “비가 오려나. 무릎이 콕콕 쑤시네.” 볼이 홀쭉하고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파인 할머니가 중얼거렸어요. 할머니는 몹시 고통스러운 듯 옆에 세워둔 수레를 잡고 일어서려고 했어요. 비틀거리던 할머니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어요. 더잘난이 가로등 아래로 달려갔어요. “할멈 괜찮아?” 더잘난이 할머니를 부축했어요. 허리를 편 할머니가 더잘난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어요. “이게 누군 겨? 도깨비 아녀?” “헤헤. 할멈, 나 가짜 도깨비야.” 더잘난은 흥청거리 사람들이 생각나 거짓말을 했어요. 할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어요. “내 눈은 못 속여. 넌 진짜 도깨비구먼. 이게 얼마만이여?” 할머니가 더잘난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였어요. 반가워하는 할머니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더잘난이 생글거렸어요. “할멈, 나랑 재주내기 한판 어때?” “이 늙은이랑 재주내기를?” 할머니가 옷소매로 눈물을 찍어내며 웃었어요. 그때 할머니 목에 걸린 휴대폰이 윗옷 사이로 삐져나왔어요. 휴대폰을 발견한 더잘난이 뒷걸음을 쳤어요. “할멈도 있네.” 더잘난이 휴대폰을 가리켰어요. 할머니가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조심스럽게 어루만졌어요. 할머니 손이 움직일 때마다 손등의 굵은 힘줄도 따라 꿈틀거렸어요. “늙은이가 전화할 때가 어디 있남? 혹시나 아들한테 연락 올까 가지고 다니는 거지. 한 달 요금이 쌀 한 말 값이 넘는구먼.” 할머니는 휴대폰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다시 품에 넣었어요. “도깨비도 돌아 댕기는구만. 잘 있다고 전화 한번 할 것이지.” “할멈, 전화 기다려?” “좋은 전화 갖고 다니면 혹시나 연락 올 까 했지. 다 쓸모없는 짓이구먼. 자식 놈 목소리 한번 듣는 게 소원인데……. 전화가 안 와.” “그럼 할멈이 전화해.” “전화를 받아야지…….” 할머니가 말꼬리를 흐리자 더잘난도 함께 시무룩해졌어요. 만능 재주꾼인줄 알고 부러워했던 휴대폰이 할머니를 더 쓸쓸하게 하는 것 같았어요. “쳇, 재주가 많으면 뭐해? 할멈 마음도 모르면서.” 더잘난이 할머니의 앞섶을 노려봤어요. 할머니가 수레를 끌고 언덕길로 향했어요. 어둠속으로 할머니가 사라지자 더잘난이 외쳤어요. “할멈, 기다려!” 순식간에 할머니를 따라잡은 더잘난이 수레를 언덕에 올려놓았어요. “호오, 힘이 장사네.” “맞지? 할멈. 내 재주 아직 쓸 만하지?” 할머니의 칭찬에 으쓱해진 더잘난은 공중제비를 휙휙 돌았어요. 그리고 휴대폰에서 보았던 아이돌가수 춤을 흉내 냈어요. 할머니가 앞니를 드러내고 웃었어요. “할멈, 정말 재밌어?” “암, 재밌고말고!” 할머니가 어린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벙싯거렸어요. 재주를 실컷 뽐낸 더잘난이 할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했어요. 할머니 얼굴이 어두워졌어요. 더잘난도 할머니랑 헤어지는 게 섭섭해 발걸음이 무거웠어요. 몇 발짝 걸었는데 할머니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더잘난이 뒤를 돌아봤어요. 할머니가 휴대폰을 들고 혼잣말을 하고 있었어요. 더잘난이 살금살금 되돌아왔어요. “아들, 전화 좀 받아. 오늘따라 할 말이 많구먼.” 더잘난은 휴대폰에서 무슨 소리가 들릴까 바짝 다가갔어요. 휴대폰의 신호음이 울렸어요. 신호가 끝나고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간다는 안내가 나왔어요. 잠시 머뭇거리던 할머니가 휴대폰에 대고 말을 했어요. “아들, 도깨비처럼 불쑥 나타나도 괜찮아. 애미 안 놀랜다.” 음성사서함을 닫은 할머니가 다시 전화번호를 눌렀어요. 할머니 표정이 점점 어두워 졌어요. 지켜보던 더잘난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어요. 실망한 할머니가 전화를 끊으려고 했어요. 그때, 더잘난이 움칠하더니 할머니 전화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갔어요. “엄니, 나야! 아들!” 할머니가 놀라 휴대폰을 떨어뜨렸어요. 휴대폰 속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어요. “도깨비처럼 나타나도 안 놀랜다고 했잖아.” “정말 내 아들 맞는 겨?” “엄니, 아들 목소리도 잊었어?” “그럴 리가. 내 아들 목소리 맞다.” 할머니가 휴대폰을 쓰다듬었어요. 휴대폰 속에서 엄니, 엄니, 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할머니가 우는 아이를 달래듯 가만가만 속삭였어요. “아가, 오늘 말이여. 도깨비를 봤다. 너도 어릴 때 도깨비불 본 적 있지. 비올 때 앞산에 도깨비불이 꽃처럼 피었구만. 기억 나냐? 너는 무섭다고 내 등 뒤로 숨었어. 고놈들이 어찌나 장난이 심하던지 앞마당까지 불을 켜고 왔지. 그런 밤은 넌 꼭 오줌을 쌌단다. 아가, 너도 도깨비처럼 불쑥 나타나도 괜찮다.” “알았어. 엄니, 내가 도깨비처럼 불쑥 나타나도 놀래지마.” 할머니 휴대폰 속에서 나온 더잘난이 구름산으로 쏜살같이 뛰어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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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1 18:35

[2023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소감 : 시] 황사라

눈 내리는 ktx 안에서 등단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책이 자꾸 미끄러져 내려옵니다. 흘러온 시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2016년 시를 처음 접했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였지요. 제가 접한 시들은 예전에 알고 있던 시들이 아니었습니다. 시가 전해주는 의미와 감정의 결도 모른 채 수십 권의 시집을 필사했습니다. 그럴수록 시는 더욱더 혼미한 곳으로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불현듯 ‘시는 본래가 그런 것이다’라는 어디선가 본 글이 떠올랐습니다. 삶처럼 시도 그럴 수 있겠구나, 삶과 다를 바가 없겠구나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습니다. 앞선 등단자분들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등단은 시작일 뿐이라고. 오직 좋은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이산 아카데미 길상호 선생님, 시클 하린 선생님, 걷는 사람 김성규 선생님, 박형준 교수님을 비롯한 동국예술대학원 교수님들, 시로 좋은 예시를 보여주신 많은 시인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중대포엣, 블루버드 선생님들도 고맙습니다. 크리스티나, 필립보 네리, 너희들이 있어 엄마는 항상 웃을 수 있단다. 마지막으로 전북일보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진심으로 감사 인사드립니다. * 황사라 작가는 익산 출생으로 동국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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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01 14:17

[2023 전북일보 신춘문예 심사평 : 시] 어렵지 않고 자연스럽게 펼쳐 보인 시적 진정성

이미지의 부조화와 언어표현의 부정교합으로 빚어내는 파격미 혹은 의외적 정서충격도 소통의 가능성을 전제로 했을 때 유의미하다. 투고한 많은 작품들이 새로움의 추구라는 강박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다 보니 소통을 염두에 두지 않은 실험적 언어표현을 과도하게 구사한다든지 열린 언어 구조로 너무 많은 것을 독자의 몫으로 떠넘기는 경우를 본다. 의미맥락을 간추릴 수 없거나 일상적 의미맥락에서 너무 멀어진 경우가 많다. 주제의 치우침 현상 때문에 예심을 넘어서지 못한 작품들이 많았다. 사회적인 주제를 직간접적으로 다루었을 때 변별력을 잃고 또한 상식을 넘어서는 개성을 찾기 어려웠다. 그리고 투고된 많은 작품들에서 산문화 경향이 뚜렷했다. 압축과 생략 그리고 비유를 통해 간접적으로 메시지를 드러내는 (혹은 감추어두는) 시의 언어적 속성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긴 시간 고립된 생활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문장 특성도 자주 발견되었다. 고립된 시간을 견디며 혼자 읊조리는 독백형, 사변형의 문장들이 그것이다. 배출 혹은 배설과 다른 지점에서 씨 쓰기의 이유는 찾아져야 한다는 점에서 얼마간의 우려를 하기도 했다. 예심을 통과한 작품 가운데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작품은 '아보카도', '밀리터리룩의 이중성', '활어', '검은 고양이'다. 이 작품들과 함께 제출한 다른 작품도 참고하여 시인이 그의 시 세계를 계속하여 펼칠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도 가늠하였음을 미리 밝힌다. '아보카도'에서 견디기 힘든 폭염 속 시적화자는 “비닐하우스가 녹아내려 그 안에 자라고 있던 푸른 식물들이 다 타버릴지도 모를 날들”을 떠올린다.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환기한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밀리터리룩의 이중성'은 위선과 관능과 관음을 도덕으로 위장한 ‘이곳’(도시)에서 ‘그곳’으로의 이탈(혹은 일탈)하고자 하는 자유의지를 표현했다. 시의적절한 문제의식과 함께 많은 장점을 갖고 있음에도 단순 서사에 머물거나 설명적 요소가 강하여 형상화가 미흡하다거나 정서 수준으로 용해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검은 고양이'는 빚어내는 이미지가 발랄하고 언어가 불러일으키는 상상이 흥미롭다는 점에서 눈이 오래 머물렀다. 하지만 그 이미지와 상상이 과잉된 측면이 있고 그 어떤 메시지로 수렴되기엔 부족한 면이 있다. '활어'는 바닷가의 삶에서 읽어낸 활력과 긍정의 힘을 그려낸 작품이다. 어렵지 않은 표현으로 끌어가는 시의 흐름이 자연스럽고 안정감이 있다. 그가 펼치는 정서에 신뢰를 갖게 하는 노련함이 보인다. 서정성도 잃지 않고 있다. 그 어떤 섬광 같은 새로움이 아쉽지만 새로운 시도를 보여줄 역량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이의 없이 「활어」를 당선작으로 밀기로 하였다. /심사위원 김사인(문학평론가)·복효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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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01 14:16

[2023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수필] 골죽 - 지영미

수직으로 곧게 뻗은 대나무 군락, 속을 비운 대들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흘러넘치는 푸르른 본능 사이사이로 햇살이 부서져 내린다. 댓잎에 튕긴 빛이 눈이 부시도록 반짝인다. 바람이 불자 일제히 우듬지를 출렁이며 허공에 부서진 소리를 쓸어 담는다. 대나무들은 하룻밤에도 훌쩍 키가 자란다. 늦게서야 자라는 대는 죽죽 뻗고 싶지만, 햇볕은 먼저 큰 친구들이 차지한다. 시간이 갈수록 초라한 모습이 도드라진다. 버스럭거리는 낙엽만이 골골이 파인 상처를 감싸줄 뿐이다. 속 깊은 자괴감에 비하면 겉면을 타고 내리는 고통쯤은 참을만하다. 제때 자라지 못한 몸뚱이는 결핍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긴다. 시간이 갈수록 마디를 파고드는 골이 깊어진다. 생장의 마디마다 사연을 간직한 채 낮은 자세로 사는 법을 터득해야만 한다. 골이 깊어진 대나무, 골죽은 위로 자라는 대신 속을 채운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후미진 곳이지만 그것도 하나의 삶이기에 야무지게 제 속을 키운다. 속살은 두텁게 불리고 겉은 단단하게 여민다. 눈을 늦게 떠 늦자란 죄, 뭉툭하고 못생긴 자신의 모습을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모두가 속을 비우는 대숲에서 내면을 옹골지게 키우며 자신을 지킨다. 잘 자란 대나무들은 진작 주인의 눈에 들었다. 살을 얇게 저민 고운 합죽선이 무용수의 손에서 나붓거리고, 매끈한 대는 실팍한 붓대가 되어 명필의 손에서 일필휘지 一筆揮之로 명문장을 휘갈긴다. 성글게 엮은 죽부인은 한여름 밤 어느 여염집 주인의 품에 든다. 숲을 떠나는 튼실한 대나무들을 보면서, 골죽은 소박한 국숫집 채반이라도 꿈꾸지만, 이마저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들 잘려나간 자리에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숨죽인 대들이 뿌리를 드러내고 주검처럼 누웠다. 남은 녀석들도 언제 잘릴지 모른다. 두려움보다는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골죽에게 찾아들었다. 이제야 햇볕을 흠뻑 받고 달빛을 마시지만, 몸을 바꾸기에는 이미 늦었다. 서러워 울고 싶어도 누가 건들어 주지 않는다.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휘이잉 속울음을 운다. 대숲을 흔드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온다. 노인이 대숲을 이리저리 살핀다. 숲을 헤집는 낫이 달빛에 번득인다. 이놈은 너무 굵고, 저놈은 가늘어서 안 되고, 골 깊은 대나무를 응시한다. 저놈이 쓸 만하군. 온 힘을 다해 한 몸으로 엮어진 골죽을 뿌리째 뽑아낸다. 매서운 눈으로 골의 형상과 속살의 두께를 가늠한 노인이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이윽고 불을 지피기 시작한다. 불길로 병골죽의 겉면을 이리저리 굽는다. 은근한 불에 시퍼런 거죽이 거뭇해지다가 누렇게 변한다. 지지고 펴고 뿌리는 물세례에 허연 연기가 허공에 솟구친다. 우두둑 철심이 속살을 휘젓는다. 푹 파인 속심 사이로 소금기가 흘러든다. 베이고 파이고 골 죽은 만신창이가 된다. 저릿한 아픔이 전신을 파고든다. 죄라고는 기형으로 자란 것밖에 없다. 그런데 몸을 참하는 형이라니, 이 고통을 받아야 한다면 필시 다른 이유가 있을 터이다. 툭, 한순간 골죽은 컴컴한 방 한쪽에 놓인다. 골방에서 세월을 곰 삭인다. 골죽의 머리가 명인의 어깨에 살포시 얹힌다. 곧게 편 왼팔과 약간 낮게 드리운 오른팔이 대금을 수평으로 받쳐 든다. 취구를 따라 당겼다 늘렸다 입술에 주름을 편다. 입김이 소리 구멍으로 들어간다. 손가락이 꿈틀거린다. 이윽고 골죽은 명기名器가 된다. 후루루 휘리리 후루후루 휘리리 명인의 날숨을 마신 대금이 첫울음을 토해낸다. 숱한 기다림과 번민의 시간이 진양조장단으로 흘러나온다. 속울음이 심금을 흔든다. 취구에 불어 넣은 입김이 끊어질 듯 말 듯 사그라들다가 중모리에 이르면 다시 굵고 길게 살아난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꽁지를 터는 새처럼 파르르 떤다. 혀를 굴리다가 튕기고 막았다가 떼고 들숨과 날숨의 어우러짐이 절창 絶唱에 이른다. 명인의 기교에 음정은 자진모리장단으로 거듭난다. 청의 떨림에 바람이 지나가고 달빛이 아른거린다. 시조를 읊조리듯 감은 눈이 움찔거린다. 장구 소리가 추임새를 넣자 입술과 어깨가 파도를 탄다. 토해내지 못한 설움이 입김을 타고 나오자 절로 손가락이 춤을 춘다. 골마다 묻어 두었던 통한과 비명이 파문을 일으킨다. 불의 다스림을 무수히 견딘 고통의 비틀림이 신비로운 가락으로 풀려난다. 떨고 흘리고 꺾고, 다시 혀를 치는 모든 기교에, 억눌렸던 고통이 대금의 골을 타고 승화한다. 소리 내어 우는 것은 가슴 깊숙한 곳에 정한 情恨을 품었기 때문이다. 가락도 외침도 하물며 비명까지, 맺힌 것이 있어야 밖으로 새어 나온다. 무른 나무에서는 좋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고생에 고생을 거듭한 나무라야 딴딴한 소리가 난다. 숱한 역경을 이겨낸 사람의 울음이 영혼을 울리듯, 울 줄 아는 나무 한 그루가 대신 울어주는 악기가 된다. 깊은 한이 담긴 저릿한 소리는 문득 슬퍼지기도, 이내 비장해지기도 한다. 너울거리는 선율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밑바닥을 훑는다. 깊은 골짜기 눈 쌓인 언덕, 사람 발길이 뜸한 산자락까지 휘감아 돈다. 침묵이 필생의 업인 바위, 태풍에 가지가 부러진 나무, 아파도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미물들을 쓰다듬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며 가슴에 구멍이 뚫려, 공허에 빠져본 사람이라야 제대로 울줄 안다. 심연 深淵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절절함으로 삼라만상의 아픈 것들을 보듬는다. 다시 맑고 청아한 음색이 울린다. 대숲을 지나는 바람 소리가 사뭇 비장하다. 교교한 달빛이 만상 萬象에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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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01 14:16

[2023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소감 : 수필] 지영미

매서운 바람에 눈발까지 흩날리는 날 낭보를 받았습니다. 전화 속 목소리에 몸속 깊숙한 곳이 온기로 그득 해졌습니다. 속절없이 흘러가 버린 세월의 보상이며, 보이지 않는 글을 잡아보려 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명이었습니다. 일과 글쓰기 사이에서 글만 파고들 수 없는, 무의식 저 너머의 불안을 말끔하게 씻어주었습니다. 치유로 시작한 글이 바닥을 보이며 제자리에서 맴돌기만 했습니다. 또 다른 도약을 위한 목표물이 필요했습니다. 신춘문예를 생각하면 마음이 부듯해졌습니다. 해마다 수상작과 심사평을 읽어가며 혼자만의 방을 키웠습니다. 거대한 벽이 앞을 가로막으면 깃발이 펄럭이는 방을 꿈꾸었습니다. 집 맞은편 대나무 숲의 소리가 유난히 맑게 들립니다. 쓸모없는 병든 대나무가 자신의 결핍을 발판으로 인고의 세월을 감내하고 명기가 됩니다. 삼라만상의 아픈 것들을 보듬는 과정을 함께 아파하고 지켜보는 마음으로 글을 썼습니다. 저의 글이 누군가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상쇄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글쓰기는 자신을 이겨내야 하는 혼자만의 싸움입니다. 누구도 함께 해주지도 않지만, 한편의 글을 해산한 후에 찾아오는 희열이 언제나 저를 추동합니다. 저의 글을 낙점해주신 심사위원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문우들이 있어 글살이의 고난과 보람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저의 발자국마다 이끌어 주신 모든 분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오래도록 같이하고 싶습니다. 전북일보에 감사드립니다. * 지영미 작가는 울산 출생으로, 지금은 청도로 귀촌했다. 현재 고등학교 영어 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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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01 14:16

[2023 전북일보 신춘문예 심사평 : 수필] 체험을 통한 발견과 의미 담긴 작품

수필은 삶의 경지이고 깨달음에 닿아있기에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응모 작품에서 인생과 마음의 경지를 보면서 체험을 통한 발견과 의미를 살펴본다. 작품 5편을 가려내어 다시 읽어 보았다. 수필은 다른 장르와는 달리 자신의 삶을 피워내는 작업이고, 삶의 경지와 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응모 작품 중 두 편을 골랐다. ‘골죽’과 ‘옹이’이다. 제목 자체가 궁금하기도 했다, ‘골죽’은 골이 깊어진 대나무, 위로 자라는 대신 속을 채우는 대나무를 말한다. 골죽이 불기운과 물과 철심으로 다듬어져 대금으로 탄생한다. 오랜 고통과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 취구에 입김이 닿으면 중모리, 자진모리, 진양조장단의 가락으로 심금을 울리는 악기로 재탄생한다. 인간의 자각은 삶의 발견에서 얻어지는 깨달음일 것이다. ‘골죽’을 당선작으로 선정한다. 나무의 옹이는 줄기가 견뎌 온 인고의 흔적이다. 바람에 가지가 부러지고 그루터기 상처를 입어 몸부림을 친다. 새 살이 돋은 것이 바로 옹이다. 인생도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 더 단단히 꿈을 안고 옹이가 박혔을 테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드리며 건승, 건필을 빈다. /심사위원 정목일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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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01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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