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넘어가는 길에서
 늦은 오후 고향 마을을 나서서 읍내를 향하여 재를 넘어가는 길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여름 새소리가 소년의 귓가에 맴돌듯이 들렸습니다. 고향 마을 입구에 있는 삼거리에 서서 어머님의 흔드시는 손이 먼 발치에서도 또렷이 보였습니다. 한여름 무더운 들판에서, 오일장 열리는 추운 읍내 장터에서 그분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들렸습니다. 어머님의 목소리가 들녘, 병원에 다니시느라 어느 때부터인가 이따끔 씩 들리지 않자, 소년은 집문 밖을 서성이고 서성이다 눈물을 훔치고 작은 손에 책을 들어 글을 읽기 시작하고, 알고 싶어하는 길을 찾아갑니다. 무엇을 알고 싶어서인지, 어떤 것을 찾고 싶어서인지 모르지만 근원적 존재자에 대한 막연한 관심이나 마음을 찾는 궁리의 노정에 들어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몇 해 지나서 전주에 있는 셋방으로 소년을 데리고 이사온 어머님이 고향 읍내 오일장에 가시면, 소년은 학교 매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책을 찾으러 3층 도서관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다가 소년은 돈 계산을 놓쳐 매점 아저씨께 손해를 끼치기도 하였지만,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일하는 소중한 체험으로 도덕률의 첫 걸음을 하게 됩니다. 청년이 되면서 걷기도 하고, 버스를 타기도 하고, 나중에는 자전거를 빌려 타고 다니며 도서관에 몇 년 머무르다 꽃 재배단지가 남아 있는 서초동에 이른 후 십년이 3번을 흘러갑니다. 그 세월 동안 무덥고 추운 날의 새벽이슬, 거친 폭풍우 한 가운데서도 오롯이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님,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의 합심 덕택인 것을 마음에 새겨둡니다. 여름 새소리를 잊지 못하던 소년은 청년을 지나 장년을 넘어설 즈음 수년간 병상에 계시다 떠나시려는 어머님을 부여잡다가 거부할 수 없는 떠남을 모시려고 삼생지양을 하지 못한 통한을 가슴 깊이 움켜쥐고 피눈물도 흘리지 못한 채 장례 버스로 그 재를 넘어갑니다. 아내와 아이들, 형제와 친척들, 빈천지교이자 평생 친구들의 위로와 부축을 받으며 고향의 산에 이릅니다. 이제는 장년이 된 소년은 그 재에서 들리던 새소리, 책과 더불어 궁구의 길을 좇아갑니다. 그 길은 학교 매점에서 일하던 소년의 응시, 사유, 깨달음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길 가운데 황금률을 마음 깊이 심어두었습니다. 그 길에서는 셋이자 하나인 빛나는 진리가 있으므로 그 길을 따르게 되고, 한없는 그리움과 더불어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 삼가함으로 내면을 곧게 하고, 의로움으로 바깥을 바로한다) 라는 현자들의 깊은 글로 선한 마음을 나누며, 평생친구들의 따뜻한 미소가 손짓하므로 정겹게 화답하게 될 것입니다. 고향을 오가는 길가에, 그 재 너머에 있는 산까지 마음을 가로막는 띠풀이 자라나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늦은 저녁 사무실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거리에서 도심의 휘황한 불빛만큼이나 그리운 고향 길과 평생친구들의 정담과 웃음소리가 역력하게 보입니다. 옛 시인의 시를 입으로 읊는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손바닥을 앞뒤로 젖힘에 따라 구름이 일고 비가 오듯이 분분한 경박함을 어찌 일일이 헤아릴 수 있으랴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관중과 포숙의 가난했을 때의 사귐을 이 길을 지금 사람들은 먼지 털 듯 버리더라” /김석우 LKB&PARTNERS 대표 변호사 △김석우 변호사는 전주완산고와 전북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광주지검 목포지청장·서울중앙지검 외사부장검사·서울남부지검 형사5부장검사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