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13일. 남북 7천만 국민이 환호하고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남북정상간의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졌다. 양체제간 대결 속에서 막대한 물자 낭비와 정신적 피로감에 시달려야 했던 지난 반세기의 세월들이 이 날만은 한낱 신기루와도 같이 느껴졌다. 대통령을 최근거리에서 보좌하면서 햇볕정책 입안에 참여했던 필자로서는 형언할 수 없는 감회와 함께 회담의 성공을 염원하고 또 염원하는 마음으로 정상회담 내내 가슴 벅찬 나날들을 보냈다.
남북정상은 6월 14일 회담에서도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양 통일방안의 공통성 인정, 8.15 친척방문단 교환, 경제협력을 통한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다방면 교류, 합의 실천을 위한 당국간 대화에 합의 서명하였다. 이는 양 체제의 현실적 입장을 십분 고려하면서도, 사실상 남북관계의 거의 모든 면에 걸쳐 상호대립과 분단의 55년사를 청산하는 단계에 돌입하였음을 알리는 신호라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성과는 그 동안 우리 정부가 대북 정책에서 보여준 냉철한 상황 판단과 이를 뒷받침하는 확고한 비전, 인내, 의지의 산물이었다. 서해교전사태 등 여러 번의 돌발적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결국 북한이 대화의 장으로 나올 수밖에 없게 한 우리 정부의 끈질긴 노력이 주효했던 것이다. 사실 북한이 남북간 대화에 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명확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북한이 겪고 있는 혹심한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측의 도움이 필연적이었다. 또 북한이 국제사회의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통미봉남(通美封南) 정책의 한계를 스스로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남북정상회담은 북한의 지도자 김정일에게도 중요한 이해관계가 걸린 것이었다. 즉 정상회담은 김정일에게 김일성 주석의 유훈(遺訓)과업을 완수했음을 대내에 과시함과 아울러 새로운 비전과 스타일의 리더십을 갖춘 '강성대국' 중흥의 유일 지도자임을 만방에 과시할 수 있는 기회이다. 바로 이 같은 요인들에 대한 우리 정부의 정확한 판단과 유연한 대처가 마침내 북한을 화해협력통일을 향한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번 회담의 성과를 실질적인 관계개선으로 이어가는 여정에는 수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북한의 내부구조는 급격한 변화를 수용하기에 너무 많은 제약요인들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 개혁을 주도할 세력이 미약하다. 당은 무기력과 타성에 젖어 있으며, 군부, 국가보위부 등 사회통제를 담당해 왔던 세력들은 그 속성상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내부의 힘은 그 사회의 모든 면에 걸쳐 막강한 카리스마를 구축하고 있는 김정일 자신에게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북한 사회의 변화는 가느다란 줄을 타고 발빠르게 움직여 나가는 식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이 같이 제약된 조건하에서 북한이 남북화해의 노선을 꾸준히 추구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 쪽의 현명한 대처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첫째, 이번 정상회담이 일회성 거품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북간에 신뢰를 더욱 확고히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래의 감정에 사로잡혀 모처럼 이끌어낸 대화의 장 밖으로 북한을 몰아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둘째, 정치권의 초당적 협력이 중요하다.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를 폄하하는 식의 정쟁이 우리 정치권 내에서 계속 재현되고, 남북정상회담의 당사자인 김대중 대통령의 정국장악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할 때 그들은 또 다시 머뭇거릴 것이다. 셋째, 남북 해빙의 길은 멀고도 험할 수밖에 없다. 예상치 못한 여러 가지 돌발 변수가 발생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연하고 확고한 태도이다. 지난 서해 교전 사태에서 경험한 바와 같이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하는 확고한 대처와 함께 포용력을 잃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넷째, 한미일 공조를 굳건하게 유지해야 한다. 한미일 공조는 남북간 화해 통일을 위해 국제사회의 이해와 협력을 구하는 매우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틀이다. 그런 만큼 우리는 그에 대한 북한의 오해를 불식하고 한미일 공조가 전체 민족의 이익과 합치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내는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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