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금주(솔내고 기간제 교사)
연화야!
해마다 여름이 오면 네가 생각난다. 열여섯살 어린 여중생이었지만 내 젊었던 시절, 삶의 외양이 화려하게 치장되지 못한다는 괴로움에 눌려 있을 때 너는 나에게 작은 빛이 되었다.
처음 발령을 받았을 때 선생님이 된다는 설레임 보다는 시골중학교 선생이라는 초라한 모습으로 내 삶이 정착될까봐 전전긍긍했었단다.
너는 공부를 뛰어나게 잘 하지도, 그렇다고 말썽을 피우지도 않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존재였지만 맑은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네가 아무런 얘기도 없이 내리 닷새를 결석했었을 때 옆동네에 사는 정숙이와 네 집을 찾았었지. 뙤약볕이 내리쬐는 논둑길 사이로 한시간 이상 걸어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을 즈음 연잎이 가득한 방죽이 나타나자 정숙이가 말하더구나. “저쪽 외딴집이 연화네 집이예요. 연화엄마가 연꽃 필 때 이사와서 애를 낳아 이름을 연화라고 지었데요.”
너희 집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남루했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흙벽, 신문지로 바른 방바닥. 그 속에서 엄마가 퉁퉁 부은 모습으로 검은 광목 솜이불을 덮고 계시더구나. 10여년 병치레에 병원 한 번 가지 못했다니…. 네가 쉬는 날 옆동네에 나가 일해주고 받은 삯과 면사무소에서 나오는 보조금으로 근근이 살고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 수 있었다.
‘아! 사람이 이렇게도 살아가는구나’ 하는 안타까운생각에 나는 말문을 열지 못했다. 네가 설탕물을 타가지고 와서 했던 말 생각나니? “선생님, 결석해서 죄송해요. 엄마가 너무 아프셔서…. 제가 학교에 가는 동안 돌아가실 것 같아서요.” 꾸중을 듣지 않을까 걱정스레 쳐다보는 네 얼굴은 순간 연꽃으로 교차되었단다.
그래,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렇게 맑을 수가 있다니! 진흙탕 속에 핀 연꽃이구나! 살아가기도 버거운 환경에서 그렇게도 맑은 너를 보며 더 높은 곳에서 더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해 속상해 하는, 욕심 가득한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 후 반 친구들이 쌀이며 반찬, 생필품 등을 모아 너를 도왔고 엄마도 병원으로 모실 수 있었지만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병이라 결국 그 해 여름에 돌아가셨지. 상여가 나가던 날 네가 말하더구나. “연꽃 필 때 오셨다는데 연꽃 필 때 떠나시네요. 선생님이 곁에 계셔서 큰 힘이 되요. 선생님은 이런 사랑을 베푸실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세요?” 너의 이 한마디는 내가 교직에 계속 머무르게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시골선생으로도 충분히 보람되고 가치있는 삶을 엮을 수 있다는 확신이 그때 생겼단다.
학교측의 배려로 교무실 급사일을 하며 학교를 졸업하고 야간고등학교가 개설된 구로공단의 한 공장에 취직해 떠나면서 네가 그렇더구나.
“선생님이 제게 주신 사랑을 저도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어요.”
내가 대답했지. “맑은 너를 만나 나도 많은 사랑을 나누어 받았다. 내가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원천은 바로 너였어.”
연화야. 지금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면서 이런 저런 모습으로 어려운 이웃들과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너의 소식을 듣는다. 나도 덩달아 행복하구나. 그래. 너는 지금도 나를 밝히는 빛이란다.
2007년 5월 선생님이.
/이금주(솔내고 기간제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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