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5-11-10 18:44 (Mon)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경제 chevron_right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일반기사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①곡창호남의 중심 전북

농도 꽃피운 문화중심지…조선시대때 수공업 급속발전

고대 삼한시대 이래 발달된 전북의 농업문화는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수공업으로 발전한 뒤 조선시대에는 공장제 수공업 형태를 띠게되었다. 사진은 김제 벽골제. (desk@jjan.kr)

<< 아쉽게도 현대적 의미의 기업이 등장한 시기는 일제시대다. 물론 일본인들이 전쟁 물자를 대기 위해 중화학공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기업을 이 땅에 설립, 운영했지만, 전북의 경우 정미업과 양조, 제지, 목재 등 경공업이 주류를 이뤘다. 물론 기업인도 일본인이 많았다.

당시 설립돼 최근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는 기업은 백화양조(군산 두산주조), 전북여객, 삼양사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자동차, 선박, 태양전지, 탄소산업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신재생에너지, 인쇄전자, 첨단 RFT산업, 자동차·기계·부품·소재 산업이 전북의 산업 중심을 차지하며 전북경제의 밝은 앞날을 예고하고 있다.

전북일보가 창간 60주년을 맞아 기획한 이번 시리즈는 오랜 세월 도민과 애환을 함께한 전북여객 등 전북의 토종기업들을 다룬다. 암울했던 시대를 헤쳐 온 기업의 역사를 통해 전북 경제의 단면을 들여다 보고, 현재 그리고 미래 전북 경제발전을 주도해 나아갈 기업상을 그려본다. >>

▲ 삼한시대부터 본격화된 곡창

'농도'로 대변되어 온 전북의 지형적 특색은 '비산비야(非山非野)'다. 동부지역은 산간이고 서부지역은 평야, 전체적으로 산과 평야와 바다를 두루 갖춰 농림수산물 생산에 제격이었고,'곡창 호남'의 중심지로서 손색이 없다.

전북지방에서는 먼 옛날부터 풍부한 산물을 바탕으로 크고 작은 부족 세력과 나라가 형성됐고, 역사적 흔적은 마한 등 삼한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이 고장 역사학자 전영래의 '한국청동기문화의 연구, 금강유역을 중심으로, 1983년'에 따르면 충남 논산을 중심으로 남북 각 100㎞, 동서 각 50㎞의 타원형 범위 안에 75개소의 출토지와 254건의 청동기가 보고됐다. 이른바 '금강유역 청동기문화권'이 북으로는 경기도 용인·화성, 동으로는 경북 김천, 남으로는 전북 전주·익산·장수·무주 지역까지 형성돼 있었던 것.

이 지역에서는 청동기 제품과 함께 석기, 옥 제품, 유리 제품, 철기 등도 함께 출토돼 고대시대부터 다양한 생산활동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곳 역사 문화는 중국 역사, 고조선 역사와 연결돼 있다. 4세기 무렵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고조선 준왕은 궁인 1000여명을 이끌고 바다를 따라 남하, 마한을 세웠다. 이 때문에 준왕이 전북 금마에 도읍했다는 설, 익산 쌍릉이 준왕의 무덤이라는 설 등이 있지만, 정설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마한과 관련한 나라 54개 가운데, 김제와 부안, 고부, 고창, 남원, 정읍, 전주, 익산에 해당하는 명칭이 보여 전북이 마한의 관할권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김제 벽골제와 익산 금마 미륵사지, 익산 왕궁터 등은 전북지역이 농업의 중심지였고, 또 화려한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청자가 꽃을 피운 고려시대에 전북지방에서는 부안 신작·유천리, 고창 용계리 등 수많은 가마가 세워져 1300여년까지 약190여연간 자기를 생산했다.

고려시대 개성 중앙정부로 올라간 삼남지방의 물품 가운데 대부분이 전라도 지방 농림수산물과 도자기 등이었다.

고려사 창화지(倉貨志)에 따르면 고려 왕실은 12조창(漕倉)을 두고 조운선이 출발하는 포구를 운영했다. 전북지방의 조창은 임피 진성창(진포)이 중심이었다. 최무선이 화포를 이용해 왜구를 크게 무찌른 진포대첩도 전북경제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 종이, 도자기, 부채 품질 최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전북지방의 풍부한 생산물품은 중앙정부로 보내졌다.

조선 영조 때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전부고(東國文獻備考 田賦考)'에 따르면 조선 정부가 거둬들인 전세미(田稅米:논밭의 조세로 바치던 쌀)는 총10만 3062석이었고, 이 중 전라도 지방에서 거둬들인 전세미는 4만 2253석으로 무려 41%에 달했다. 여기에 삼수미(三手米:훈련도감 소속의 삼수군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거둔 세금)까지 합하면 무려 5만8457석의 세금을 전라도에 의존했다. 전북을 비롯한 전라도 땅은 그야말로 곡창이었다.

그러나 전라도 지방은 곡물만 풍부했던 것이 아니다. 세종지리지에 따르면 전라도에서 조정에 바치는 공물은 마와 종이, 자기, 목기, 유기, 약재 등이었다. 전주에서 바치는 공물로서 가장 으뜸은 피지(皮紙)였고, 도자기 생산도 눈에 띈다. 특히 종이는 전주와 남원에서 생산된 제품의 품질이 뛰어났다. 전주 부채는 고려시대부터 유명한 생산품이었다.

고대 삼한시대 이래 토기, 견직물, 활과 화살, 창, 각종 장식품 등이 수공업 형태로 생산됐다.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수공업은 한층 발전했다.

고려시대의 경우 관영(官營)수공업, 사영(私營)수공업, 농민수공업의 생산조직을 갖췄다.

조선시대의 관영수공업은 중앙 관서에 소속돼 필요 물품을 담당하는 경공장(京工匠)과 지방 관서에 소속된 외공장(外工匠)으로 구분돼 운영됐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15세기 중엽 경공장의 종류는 129종이었고, 종사자는 2841명이었다. 외공장은 27종에 3656명이 종사했다. 1471년 117명이었던 전라도 외공장 종사자는 1785년 무렵 775명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겪은 16세기말부터 관영수공업은 차츰 무너져갔고, 이에따라 국가는 공업적 수요가 생기면 사영수공업에 의존했다. 조선 말기에 들어서면서 도자기공업과 유기공업, 제지공업은 근대적 생산양식의 초기형태인 공장제수공업 형태를 띄기도 했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재호 jhkim@jjan.kr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경제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