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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저편

▲ 편성희

멀리 있는 친구에게서 이곳의 소식을 묻는 전화가 오면 엉뚱하게도 내 대답은 지난날로 돌아간다. 친구는 일 년에 두 세 번은 끊어질 듯 이어지며 안부를 물어 오는데 그것은 지금의 근황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지난날이 보고 싶어서라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된다.

 

어릴 적 산 중턱에 살던 친구는 가끔 무상으로 나오던 옥수수 빵의 유혹에 넘어가 몇 개를 몰래 집어 그의 집으로 사라지고 배급의 차례를 기다리던 마지막 친구는 몹시 허탈해 하며 선생님을 부르곤 했다. 또래보다 성숙했던 그 친구는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었다.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던 절집 순임이는 하얀 블라우스에 받쳐 입은 주름치마 아래로 빨간 구두를 내보이며 자랑을 하고 점심시간에는 낭랑한 소리로 우리를 부르면서 도시락을 펼치면 가까운 친구가 아니 될 수 없었다. 가끔은 우리를 그의 집으로 불러 색색의 사탕을 주곤 했는데 그날은 무언가 큰일을 벌였다는 것을 드나들면서 저절로 알아졌다.

 

순임이를 다시 본 것은 재래시장에서 서로 엇갈리면서 지나칠 때였다. 그가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다시 볼 수 없었을 터인데 어릴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지나온 시간의 흐름을 빠른 영사기처럼 되돌리며 마치 꿈속으로 빠져들 듯 묘하게 들 뜬 표정으로 과거의 문을 열어 활짝 열어 보였다.

 

신작로를 잇는 골목에서 해가 지도록 지치게 놀았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고향을 떠나면서 이곳에 남아 있는 사람도 같이 외로워졌다. 그들은 지난 세월을 그 자리에 놓고 갔고 나는 마치 소멸의 시간을 지키고 있는 사람으로 남아 추억의 끈을 붙잡고 서로를 잇대놓고 있는 것만 같다.

 

이상하게 지워지지 않는 몇몇의 이름은 만날 용기도 없으면서 어느 날은 궁금해져 그 집의 녹슨 철문을 지나가 보기도 한다. 쇠락한 철문이 일없이 흔들리고 창살이 몇 개는 떨어져 나간 집, 떠나간 그들이 다시는 찾지 않을 것 같은 자리, 지금은 만나도 알아볼 수 없는 모습만큼 그들이 살았던 흔적들도 조용히 변해만 간다.

 

숨어있는 과거에 자리 잡고 있는 확실한 추억, 골목골목에 자리한 단편들, 그중에 사라진 어느 것이 지금의 시간을 흔들리게 한다. 그 골목을 거닐 때 낯선 복덕방에서 들은 친구 집의 매매소식에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얼굴과 추억의 단절에 대한 예감으로 나를 상념에 빠져들게 한다.

 

이름을 다 기억할 수 없는 친구들의 수만큼 그들이 안고 있는 제각각의 사연이 먼지처럼 떠다니다가 메워진 우물에 앉기도 하고 신작로만큼 벌어진 골목 끝에서 바람으로 길을 잃기도 하여 위태로울 때도 있다. 끝까지 지워지지 않고 있는 이름들과 먼 곳에서 오는 그들의 소식이 남겨진 나를 외롭게 하다가 어느 때는 따뜻하게 감싸주기도 한다.

 

얼마 전에 다녀간 친구가 어릴 적 명산동 중국 학교 위로 뜬 무수한 별들을 보며 빨리 이 시간이 지나게 해 달라고 빌었던 소원을 내게 말할 때 나도 갖고 있었던 추억에 울컥하며 놓고 온 시간을 돌아보고 잊고 있었던 상처를 다시 안았다.

 

떠나간 사람이 놓고 간 기억의 저편에는 무수히 흐르는 시간에도 지워지지 않는 그들만의 비밀이 살아있다. 계절이 바뀌거나 내 속에서 갑자기 무엇인가가 꿈틀거릴 때, 그냥 별일이 없을 때에도 가봐야 할 것처럼 마음이 일면 묵묵히 자리하고 있는 그 자리로 어느 날 불현듯 오고 싶어질지 모르겠다. 지금이 그런 때이다. 친구의 전화가 올 것만 같다.

 

△수필가 편성희 씨는 2001년 〈오늘의 문학〉 수필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수필집 〈꽃지는 오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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