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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400여 농민 의병

이달 초 종영된 TV드라마 ‘징비록’이 광복 70주년을 맞는 우리들에게 교훈과 자성과 많은 생각들을 남겨주었다. 징비록은 서애 유성룡이 7년간의 왜란을 돌아보면서 참회와 경계의 뜻으로 기록한 내용을 각색한 드라마다. 무능한 선조가 백성을 내팽개친 채 도망치는 모습, 이에 분노한 민초들이 궁을 불태우는 장면, 20일 만에 도성을 빼앗긴 조선 관군의 무기력함, 사리사욕과 당파 싸움에 나라와 백성을 도탄에 빠트린 조정 대신들, 왜군에 짓밟힌 강토와 무참히 도륙당하는 백성들의 참혹함. 화면을 통해 비쳐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실상에 분노와 한탄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그럼에도 전란의 참화 속에서 나라를 지켜냈던 것은 충무공 이순신이 지휘하는 수군과 전국 방방곡곡에서 분연히 일어난 의병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무엇보다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침탈하려던 왜군의 조총에 맞서 창과 낫 곡괭이 등으로 대적했던 1만2000여명에 달하는 전라도 농민 의병의 희생이 호남을 방어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파죽지세로 조선을 침략한 왜군이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선 호남평야를 반드시 선점해야했던 만큼 전라도에 병력을 집결하고 웅치(熊峙·곰치재)와 이치(梨峙), 두 곳에서 일대 결전을 치른다. 각각 2만명과 1만명에 달하는 주력부대를 투입한 왜군은 그러나 우리 의병과 관군의 항전으로 인해 패퇴하면서 전주성 공격을 포기하고 말았다. 특히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와 충남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를 잇는 이치고개 전투는 한산·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전투 가운데 한 곳이다. 당시 1만명의 왜군 주력부대는 금산성에서 조선 관군과 의병장 고경명 조헌이 이끄는 의병을 격퇴하고 이치(梨峙)를 거쳐 전주를 공략하려 했다. 이 소식을 접한 이보와 소행진이 익산에서 농민 의병 400여명을 일으켜 이치에서 죽창과 낫 등으로 왜군과 맞서 백병전을 펼쳤지만 모두 순국하고 만다. 왜군들도 농민 의병의 결사항전에 큰 타격을 입었고 얼마 뒤 권율 장군의 이치고개 지형을 이용한 복병전에 걸려들어 왜군은 육지전에서 첫 패배를 당하고 만다.

 

현재 이 곳 운주면과 진산면에는 권율 장군과 동복현감 황진의 전승을 기리는 이치 전적비와 이치 대첩비가 각각 세워져 있고 금산군에선 매년 기념행사를 개최해오고 있다. 하지만 400여명에 달하는 이름 없는 우리 농민 의병의 순국은 역사속으로 묻혀져 가고 있다. 남원 만인의총과 금산 7백의총과 같이 이 곳 400명의 농민 의병 순국현장도 하루빨리 역사공원으로 조성하고 기념비를 세워 그 충혼을 기려야 한다. 관군 뿐만 아니라 이름 없는 민초들의 순국정신도 기록해야할 책무가 우리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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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택 kwon@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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