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식은 전북 김제가 낳은 항일투사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한글운동에 대해서는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필자는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를 저술하면서, 장현식에 대해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하였다.
1929년 10월 31일 조선어사전편찬회가 결성되었을 때, 장현식도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순천 출신의 김양수를 통해 이극로를 알게 된 장현식은 조선어 표준어 제정의 사정위원(전라도 대표)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경 장현식은 조선어학회의 대표자인 이극로로부터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내용, 즉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더라도 모국어만 유지하고 있다면 감옥에서 나올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그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그는 조선어학회가 추진하고 있는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을 지원하기로 결심하였다.
장현식은 1936년에서 1939년 말까지 조선어사전 편찬 기금으로 3,000원을 제공하였다. 참고로 1920년대 후반 경성방직 여공의 한 달 임금이 21원이었다. 이와 비교해 보았을 때, 그의 후원은 사전 편찬 사업에 크게 보탬이 되었다. 아울러 1936년에서 1939년 11월까지 친척 민영욱, 친구 임혁규, 조병식에게 권유하여 합계 1,400원을 김양수를 통해 조선어학회에 제공하였다. 이 때문에 그도 1942년 12월 23일 서울에서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 뒤 함남 홍원경찰서에 구금되어 함흥형무소에 투옥되어 있다가, 1945년 1월 16일에 풀려났다.
홍원경찰서에서 장현식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일본 경찰은 장현식의 혀에 대못을 박기까지 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평생 말을 더듬어야 했다. 해방 후 제2대 전북도지사를 지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장현식은 유권자 앞에서 말을 더듬었다고 한다. 그가 말을 더듬게 된 사연을 유권자들이 알 턱이 없었다. 결국 선거에서 장현식은 낙선하였다.
6·25전쟁 기간 그는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1950년 10월 24일에 서거하였다. 현재 그의 묘소는 애국열사릉에 있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독립운동은 무장투쟁에 국한되지 않는다. 나라를 되찾는 일에 지식이 있으면 지식을 내고, 기술이 있으면 기술을 제공하며, 돈이 있으면 돈을 후원한 사람은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장현식 선생이 독립운동단체와 항일투사들에게 돈을 내고, 특히 우리 민족의 정체성으로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자산인 우리말과 한글을 지키기 위해 거금을 희사한 일은 길이 선양해야 한다.
전북 장수 출신의 정인승, 익산의 이병기 선생에 대해서는 다양한 선양이 이루어지고 있다. 앞으로 매년 맞이하는 한글날에 특히 김제에서 장현식 선생을 기리는 사업을 진행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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