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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소리전당 기획 '백건우 피아노 리사이틀'] 전율로 다가온 거장의 선율

익숙하되 익숙하지 않은 변주로 클래식 문외한 음악세계로 초대

▲ 지난 6일 저녁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에서 열린 ‘백건우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피아니스트 백건우씨가 연주를 위해 무대에 등장하고 있다. 사진제공=유백영

먹빛 구름 짙게 머금은 하늘을 등지고 공연장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에는 조바심의 무게가 드리워있었다. 그것은 흡사, 예민한 감각에 시달리는 예술가의 신경증처럼 내 마음을 옥죄었다.

 

클래식 전공자도, 그렇다고 클래식 애호가도 아닌 내가, 과연 한 평생 하나의 악기에 헌신해 온 거장의 무게를 감당해 낼 수 있을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어색한 몸짓으로 들어선 객석은 아직 한산했다. 헐거운 자리들이 다 채워질 수 있을까, 라는 또 다른 조바심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객석의 불은 꺼졌다. 얕은 숨소리조차 허용하지 않을 듯한 정적. 그 고요함의 중심으로 한 사람의 발걸음이 묵묵히 진입해 들어왔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라는 상투적인 헌사와 ‘유명배우의 남편’이라는 케케묵은 시샘 정도에서 딱 멈추어버린 나의 교양 수준은, 피아노 앞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는 거장 앞에서 철저하게 발가벗겨지는 느낌이었다. 그 곳에서, 나는 백치였던 셈이다.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 부조니(F. Busoni)의 곡으로 백건우의 선율이 시작되었다. 생소한 이름만큼이나 생소한 음표들이 내 귓가 언저리에서 자꾸만 튕겨져 나갔다. 그것은 요지부동한 위세로, 부드럽고 달콤한 멜로디에 길들여진 나의 관성을 짓눌렀다. 공연장에 들어서기 전 목격했던 잿빛 구름이 다시 마음에 드리워지고, 불가해한 선율이 거대한 벽이 되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렇게 절망의 포로가 되어 무겁게 가라앉아갈 즈음이었을까.

 

어느 순간 익숙한 멜로디들이 내 의식의 심연 속 세포들을 하나하나 깨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 치의 방심도 허용치 않았다. 익숙하되, 결코 익숙하지 않은 변주의 방식으로, 거장의 손가락은 클래식에 문외한인 나의 마음자리를 자신의 음악 세계로 이끌고 있었다. 그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거대한 벽 앞에서의 막막함. 그 외로움의 끝자락에 무릎이 꺾일 때마다 어디선가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음표들. 그러면서도 벽 앞에 쉽사리 사다리를 내어주지 않는 단호함.

 

총 2부 중 1부의 구성에 모두 쏟아 부은 부조니의 음악이 끝나고, 정교한 기교로 무장한 라벨(Maurice Ravel)의 곡과 거친 파도처럼 휘몰아쳐 가는 현란한 쇼팽의 곡들이 마무리되자 호수처럼 잔잔하던 객석에 박수와 환호가 넘쳐났다. 그리고 거장의 수줍은 듯한 답례 인사.

 

내가 들었던 건 백건우의 연주였을까, 아니면 그의 인생이었을까. 문득, 몇 주 전 읽었던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 〈세상의 모든 아침〉이 떠올랐다. 한 평생 올곧게 음악에만 헌신해 온 누군가들의 발자국. 그 개별적인 삶에 파고드는 환희와 비애, 고통.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음표에 쏟아부어버리는 단순한 열정. 백치 상태로 경험한 거장의 선율은, 그렇게 전율이 되었다.

 

서둘러 나온 귀갓길. 우중충한 밤하늘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다시 목격하게 되는 그 잿빛은 더 이상 공연장에 들어서기 전의 그것과 같지 않았다.

▲ 이휘현(K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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