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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죽(孝竹)기념비 세워야

▲ 고재흠 수필가
부안은 고래로부터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워 온 고장이다. 변산은 원래 능가산·영주산·봉래산·변산 등으로 명명됐다. 변산에서 두 번째로 높고 덕성스러운 산으로 불리어 온 삼예봉 줄기, 노적봉 아래 노적(露積)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노적봉은 변산반도 국립공원의 수많은 산봉우리 가운데 유독 독립된 산이다. 흡사 큰 노적가리를 쌓아 놓은 듯, 마음마저 든든하고 아름답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주산(主山)인 노적봉은 수호신처럼 마을을 감싸 안고 있어 마치 어머니 치마폭처럼 따뜻하고 의연하며, 위엄(威嚴)스럽게 보이기도 하다.

 

예부터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노적 마을 좌측에는 거석천(擧石川), 우측에는 청림천(靑林川) 등, 두 냇물이 모이는 양수 합(兩水 合) 이라, 큰 인물과 귀인이 난다고 했다. 명산은 인걸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듯이 이 마을에서 조선 시대 때 11명의 과거 급제자가 배출되었다. 문과 홍문관 교리 1명·무과 1명·진사 7명·중추원 의관 1명·금부도사 1명 (文科, 弘文館, 校理, 武科, 進士, 中樞院議官, 禁府都事) 등이다.

 

마을 앞 한가운데 효죽(孝竹)거리가 있다. 예로부터 과거급제하면 으레 나무로 용을 만들고, 파란 물감을 칠하여 높은 대나무 끝에 매달아 놓고, 과거급제자들의 영광을 축하하는 풍속이 있었다. 효죽을 세웠던 길거리를 ‘효죽거리’라 부른다. 본인과 가문의 영광은 물론, 부안군과 호남지방의 위상을 높인 쾌거였다. 그 효죽 대나무는 크고 곧고 높이 잘 자란 효죽대로 뽑혔으니 그 대나무 역시 큰 영광을 얻은 셈이다. 조선 시대부터 보전된 효죽거리의 효죽은 간데없고 지금은 옛 선현의 발자취만 남아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위 선인들의 높은 학덕을 오래도록 기리고 후세에 본보기가 되도록 하고자, 그 옛날 효죽을 세웠던 자리에 효죽기념비와 상징물을 세워 이를 기념하고자 하는 마음 간절하다.

 

요즘 도시학교 주변이나 학원이 밀집된 지역에서는 ‘등용문(登龍門)’이라는 간판이나 현수막을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서울대학교 부근 신림동 고시촌에는 거리마다 골목마다 걸려 있다. 등용문은 잉어가 급류를 타고 중국의 황허강 상류에 올라가서 용이 된다는 전설과 입신출세에 연결되는 어려운 관문이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험에 비유한다고 했다. 바로 고시에 응시하여 그 어려운 관문을 뚫고 합격을 기원하는 뜻이리라. 옛날 과거 시험이나 요즘 고등고시는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시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노적 마을은 변산반도 국립공원 내변산 지역에 위치해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아침 해가 늦게 뜨고 저녁 해는 일찍 넘어가는 환경이다.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그 어려운 과거 시험에 한 마을에서 11명이나 합격을 했을까! 후세인들이 그 숭고한 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본받았으면 싶다. 한 명의 과거 급제자도 없는 마을이 수없이 많을 텐데 한 마을에서 11명이나 배출되었다. 당시에는 부안 제1의 노적리라고 명성이 높고, 성균관과 유림단체를 비롯하여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그리운 효죽·옛날 효죽을 세웠던 자리에 효죽 기념비와 상징물을 세워 젊은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고 탐방객들에게는 알찬 관광의 기념은 물론 후세인의 본이 되고 존경과 추앙의 대상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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