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무주산골영화제에 다녀왔다. 깊디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그 느낌이 좋아서 무주를 남몰래 애틋해 했고, 작은 영화관 하나 없는 곳에서 영화제를 연다는 그 무모함이 멋져서 매년 응원하는 마음으로 영화제 기간에 무주를 찾곤 했다. 덕유산에서 별 반짝이는 밤하늘을 처마 삼아 피크닉 매트에 앉거나 누운 사람들과 섞여 영화를 봤다. 상영작은 마지막까지 흥미로웠고, 숲을 통과하는 바람에선 서늘하고 알싸한 맛이 났다. “아까 별똥별 봤어?” 하는 웅성거림을 바람결에 들었다. 여행 가방을 끌고 어디론가 총총히 사라지는 사람들. 체력을 다 소진한 지인과 나는 이른 새벽, 굽은 길을 더듬어 집으로 돌아왔다.
조금 전까지 축제 한복판에 있었음에도 어쩐지 그 중심에서 비켜난 듯한 느낌이 선명해서 앤드루 포터의 <사라진 것들>이 떠올랐다. 이 책에는 서너 페이지 분량의 초단편을 포함해 소설 열다섯 편이 수록돼 있다. 각각 다른 인물들의 독립적인 이야기이지만, 마치 모든 작품이 연결된 연작소설처럼 읽히기도 한다. 화자가 모두 40대의 중년 남성이라는 점과 주인공이나 주변 사람이 예술계에 몸담고 있다는 공통점 때문일 수 있겠다.
“참 이상한 일이다. 마흔세 살이 되었는데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다니, 삶의 어느 시점에서 잘못된 기차에 올라타 정신을 차려보니 젊을 때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곳에 와버렸다는 걸 깨닫다니. - ‘라인벡’ 부분
<사라진 것들>은 ‘잃어버린 것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첼로 연주자가 희소 질환으로 한순간에 재능을 잃어버리고(‘첼로’), 부를 거머쥔 절친한 친구가 갑자기 실종된다거나(‘사라진 것들’), 한 소녀가 부부의 관계를 영영 바꿔놓고 무성한 소문들 속으로 자취를 감춰 버린다든가(‘히메나’) 하는 사건들 말고도 일상의 작은 틈새로 조금씩 빠져나간 것들도 있다. 부모가 되기 전과 후의 삶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에 대해 다루는 ‘담배’는 아이가 생겨남으로써 변한 일상을 그린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 그 모든 게 변한다는 것을. 그런 우리가 영원할 순 없다는 것을, 첫아이가 태어나면 담배가 영원히 사라지고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와인과 심야의 여유도 사라진다는 것을. 이제 우리가 함께하는 인생은 더욱 풍부해지고, 사랑과 선의는 두 배가 되고, 집안에는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웃음과 더 많은 재미가 있겠지만 결국 우리는 줄어들겠지.” - ‘담배’ 부분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것이 사라진다. ‘한때’라고 부르는 다정함에 속해 있던 것들이 흩어지고, 흘러가고, 흐릿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과 ‘존재함’ 사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 나는 ‘상실’을 감당해야 한다.
“밖에서는 가끔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 젊은이들이 허공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나는 그런 소리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된 것일까?” (‘오스틴’) 낭만이 넘쳐흐르는 무주를 떠나오면서 나는 정확히 이 문장과 하나가 됐다. 술 대신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거실의 1인 소파에 앉아 평안을 느꼈다. 때때로 “예전에 지녔던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혹은 버려두고 떠나왔다는 느낌”(오스틴)이 들고는 했지만, 그 서운함에서 한 발 비켜나면 새로운 발견이 더 많아진다는 사실. 밤의 잔디밭 위에서 얇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사랑을 속삭이는 젊은 연인과 셔틀버스 기사가 틀어놓은 트로트와 어둠의 종아리를 씻기는 계곡의 물소리 같은 것. 부재를 채우는 것 역시 시간이 우리 삶 속에 일찌감치 파종해 놓았음을 <사라진 것들>을 읽으며 깨닫게 된다.
김정경 시인은
201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 '검은 줄'로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 시집 <골목의 날씨>가 있다. 자칭 ‘산책중독자’. 오래된 골목을 유람하며 채집한 이야기로 시도 쓰고, 산문도 쓰며 살고 있다. 현재 전주문화재단 문예진흥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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