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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전주마라톤대회는 도민 축제마당 - 라혁일

4월2일이면 전주마라톤대회가 봄 향기 그윽한 전주도심 속에서 화려하게 펼쳐지게 된다. 올해로 일곱 번째를 맞는 전주마라톤대회에 전국에서 9000명에 가까운 마라토너들이 참가 신청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풀코스에 1549명, 하프코스에 2073명, 5㎞ 건강달리기에 5290명이 참가해 힘찬 레이스를 펼치게 된다. 특히 올해 대회 역시 작년 우승자인 남자부 김이용을 비롯해 형재영, 제인모, 그리고 여자부 이은정, 최경희 등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엘리트 선수들도 대거 참가할 예정이다. 이 같은 참가 규모로 볼 때 전주마라톤대회는 짧은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국내 메이저 대회 가운데 하나로 손꼽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동아마라톤대회와 비교하면 전체 참가규모는 적지만 엘리트 참가 선수만을 놓고 볼 때는 사정이 다르다. 7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동아마라톤대회에 참가한 엘리트 선수가 20~30명인점에 비해 고작 7년의 전주 마라톤대회에는 90여명의 선수들이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 만큼 전주마라톤이 ‘한국 마라톤의 산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한 대목이기 때문이다. 사실 전주마라톤대회가 이 같이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기까지는 수 차례에 걸쳐 변화에 변화를 거듭해온 것이 한 몫을 톡톡히 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1만여명의 마니아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2000년 첫 대회(당시엔 전주~군산 벚꽃마라톤대회)가 대회의 조기정착을 위한 준비과정이었다면, 2001년 두번째 대회는 국제대회로 규모를 확대하는 과감한 실험을 시도한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대회인 지난 2002년 전주마라톤대회에서도 세계의 유수 선수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명실공히 국제마라톤대회로서의 모습을 서서히 갖춰가는 듯 했다. 하지만 전주마라톤대회는 대회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새로운 변화를 선택하게 된다. 바로 국내대회로의 전환이다. 엄청난 돈을 들여가면서 외국선수들을 초청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국내선수 육성발굴에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여론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전주마라톤대회의 변화는 이 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대회에는 새 옷으로 완전히 갈아입는 시도를 했다. 대회코스가 기존의 전주~군산 벚꽃 길 대신에 전주시내를 순회하고, 명칭도 ‘전주~군산마라톤대회’에서 ‘전주마라톤대회’로 바뀌게 된 것이다. 올해에도 전주마라톤대회는 코스를 변경하는 등 또 다시 변화를 선택했다. 이번에는 마라톤으로 인한 교통정체 등 시민들의 각종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다. 어쩌면 전주마라톤대회의 이런 모든 것들이 전국 최고의 마라톤대회로 우뚝 서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또 전주마라톤대회가 지역민과 함께 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이제 전주마라톤대회는 단순한 스포츠 행사가 아니다. 도민축제의 한마당이다. 전북 도민 한 명 한 명이 예외없이 이 축제의 주인공인 것이다.따라서 변화의 연속선상에 있는 전주마라톤대회의 성공 여부, 즉 국내 최고의 대회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주최측의 보다 적극적인 노력도 중요하지만 지역민들의 관심과 애정은 더욱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이제 또 다시 전주마라톤의 실험이 시작됐다. 그 실험의 성공여부는 도민들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참가선수들의 기량이 뛰어나고 대회운영이 매끄럽게 진행된다고해도 도민들의 협력과 참여가 없다면 그 성과는 반감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주인의식을 갖고 역대 최고의 축제가 될 수 있도록 다 함께 노력하는 모습이 필요한 때이다. /라혁일(전북도체육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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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06.03.31 23:02

[발언대] 건강할 때 건강을 지키자

언제부터인지 우리에겐 웰빙 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게 들린다.많은 사람들이 걷고, 달리고, 오르고, 움직이면서 나름의 건강관리를 하기 위해 열중하는 모습을 많이 접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 중에서 보호자의 보호를 받거나 기구를 이요하여 걷기 등 운동하시는 분들을 종종 보게 된다.이분들의 사연은 보통 뇌졸중, 당뇨 등으로 신체 일부의 기능을 잃고 조금이라도 나아지거나 더 악화되지 않으려고 노력중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성인병 발병으로 고생하시는 주위사람들을 접하면서 느껴보지만, 발병 이전에 미리미리 건강을 챙겼더라면 저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가져보면서 50대 나이에 근접한 나로서도 남의 일이 아님을 자각케 한다.요즈음 각종 단체, 기관 등에서 걷기대회다 마라톤대회다 많은 건강행사를 실시하고 있고, 건강도 체크해 주는 등 주민의 건강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행사가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이벤트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는 우리에게 건강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어 스스로 건강을 챙기고 건강운동 실천을 장려하기 위한 캠페인인 것이다. 건강할 때 건강을 챙겨야 한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2년에 한번씩 내 건강 상태를 미리 알아보고 관리하도록 건강검진과 특정 암 검진을 실시하고 있다. 보통 만40세 이상 일반인이면 홀, 짝 출생년도 맞춰 건강검진을 받도록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건강검진표를 발송해 주고 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여러 차례 건강검진을 받아온 나로서는 이 건강검진의 고마움을 느낀다. 위 내시경 검사로 발견된 위염을 조기에 치료하였고 간장질환을 조기에 발견하여 나쁜 생활습관 자제와 운동을 실천하는 등으로 건강을 미리 챙길 수가 있었다.나의 몸 상태를 미리 알아 잘못된 것은 고치고, 잘못되지 않도록 노력하다보면 건강한 신체를 갖게되고 그래서 건강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면 이것이 곧 웰빙 일 것이다.한겨울 움츠렸던 몸, 이제는 움직입시다. 따스한 봄볕과 훈풍을 받으며 우리의 몸도 봄으로 가꿔봅시다./김옥환(익산시 영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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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06.03.31 23:02

[오목대] 사모님과 관용차

순창출신으로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은 공사(公私) 구분이 엄격했다. 그가 9년 4개월 동안 대법원장으로 있는 동안 가족들은 그의 관용차를 타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언젠가 추운 겨울 날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손자에게 대법원장 승용차를 태워준 운전기사는 “이 사람아! 이 차가 대법원장 차지 대법원장 손자 차인가?”라는 나무람을 들어야 했다. 또 한번은 가인의 며느리 부탁으로 중학교 입시를 치른 손자의 성적을 알아보기 위해 비서관이 잠시 학교에 다녀왔다. 그걸 안 가인은 “자네는 대법원장 비서관인가 내 며느리 비서관인가?”라는 호통을 들어야 했다. 그는 1950년 9·28 수복때 부인을 잃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부인을 친정인 전남 담양으로 보냈는데 그곳을 덮친 공비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된 것이다. 김갑수 전 대법관은 “가인은 대법원장이라는 공인으로서 난중(亂中)에 가족을 데리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부인을 희생시킨 것”이라고 회고했다. 나아가 냉혹한 그의 공인의식은 대법원장 재임중에 부인의 묘소를 찾는 일마저 억제시켰다. 대법원장이 부인의 묘소에 간다면 관계당국이나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다는 이유였다.또 사도법관으로 서울고등법원장을 역임한 김제출신 김홍섭 판사의 일화도 유명하다. 김 법원장은 병든 부인을 입원시키면서 자신은 관용차를 타고 가고 부인은 시내버스를 타고가게 했다. 부인은 민간인이니 관용차를 타서는 안되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 법원장은 항상 물들인 작업복에 운동화 차림으로 다닐만큼 청빈했다.요즘 부산시를 비롯 서울시와 광주시, 전남도 등에서 시도지사 사모님(부인)에게 기사가 달린 전용차를 1대씩 배치하고 공무원 1-2명을 비서로 두어 물의를 빚고 있다. 서울시의 경우 관사에 청경 3명도 배치했다. 이같은 행태에 비난이 일자 이들은 한결같이 ‘70년대 이후 계속된 관행’이라고 항변한다.물론 시도지사의 배우자가 공적활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시도지사와 함께, 또는 단독으로 참석해야 할 공식행사도 많을 것이다. 문제는 ‘공적인 행위’가 아닌데도 평소 특혜를 누리는 경우다. 세태가 달라졌다지만 가인이나 김홍섭 판사같은 공인의식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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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06.03.31 23:02

[나의 이력서] 국회의원 이광철 - 민통련 지역운동協 대표

85년 3월 새로운 민주화운동의 구심체인 민통련이 출범했다. 당시 주요 인사들로는 문익환, 김근태, 이부영, 이해찬, 장영달, 최규성, 임채정, 이창복, 장기표, 이호웅, 이미경, 이재오, 박계동, 방용석 등이 있었다.나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김구 선생님과 문 목사님을 꼽는다. 문 목사님은 어린아이처럼 한없이 맑고 고운, 민족의 얼을 지닌 ‘큰어른’이셨다. 그러나, 국회의원이 된 지금 당시의 몇몇 동지들과의 만남은 때로 씁쓸하거나 어색할 때가 있다. 문광위(위원장 이미경)회의장에서 내 앞쪽에 앉아있는 이재오 의원(한나라당 원내대표), 나와 같은 의원회관 8층에 집무실이 있는 박계동 의원(한나라당). 이들과 오가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서로 겸연쩍은 웃음을 띠며 지나치곤 한다. 한때 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동지들과의 어색한 조우란 참으로 말로 하기 힘든 소회를 불러일으키곤 한다.나는 86년 5.3사태로 민통련 지역운동협의회(지운협) 1기 대표였던 이호웅이 구속된 이후 2기 대표를 맡으면서 민통련의 핵심인물로 활동했다. 당시 지운협은 강력한 실천력을 지니고 조직의 의사결정을 좌우한 민통련의 핵심 축으로, ‘개헌현판투쟁’ 등 86~87년의 주요 투쟁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당시 나는 수배 상태였는데, 각 지역의 동지들 역시 대부분 나와 비슷한 처지였다. 나는 지역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수배 후에 오히려 활동영역을 더 확장하여 전국 지역조직을 총괄하면서 주도적인 활동을 했다. 부산, 광주, 대전, 서울 등지를 돌며 투쟁을 기획하고 독려했는데, 이 때문에 당시 내게는 ‘홍길동’이라는 별명이 붙었었다. 7년 가까운 수배생활 동안 유난히 수배를 잘 피해 다니다보니, 방금 서울에서 봤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느새 부산에 나타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나와 동지들은 수배 중임에도 이태원 나이트클럽 등지에서 치열하게 토론하면서 전국적인 투쟁을 준비하고 주도했다. 당시에는 여관 입구에 항상 수배전단이 붙어 있었고, 투숙객 검문이나 불심검문이 일상적으로 자행됐기 때문에 여러 명의 현상수배범(?)이 모두 함께 모일 수 있는 방법으로 미군 나이트클럽을 선택했던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나이트클럽에서 새벽까지 토론을 하며 투쟁을 준비하곤 했다. 그렇게 밤을 지새운 다음,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다시 헤어졌다. 언제 다시 볼지, 정말 다시 볼 수나 있을지 모두들 서로의 안부를 걱정하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다. 어떤 때는 만날 때마다 한 사람씩 얼굴이 보이지 않기도 했다. 그럴 때면 다음은 누구 차롈까 농담 아닌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또, 당시는 ‘현상수배’가 일반적인 관행이었는데, 수배전단에 붙어 있는 동지들의 현상금을 모두 합하면, 어떤 때는 2~3억씩이나 되기도 했다. 86년으로 접어들면서 ‘직선제 개헌투쟁’이 본격화되었다. 우리 전북지역에서도 전북민협을 중심으로 문정현 신부, 신삼석 목사 등의 종교인과 함께 ‘전북민주헌법쟁취위원회’를 결성(86.4)하여 투쟁에 돌입하였다.우리는 야당인 신민당(총재 이민우, 김영삼)과 함께 전국적 규모의 집회를 갖기로 하고, 부산에서 출발해서 광주, 청주, 인천, 전주로 이어지는 대규모 '국민대회'를 조직했다. 5.3인천사태 이후 살벌한 공안정국이었지만, 그 해 5월 31일 전주대회는 10만여명의 인파가 참여할 정도로 드높은 열기 속에서 진행됐다. 수배 중이었던 나는 박계동과 함께 3일 전부터 변두리의 어느 아파트에 미리 숨어들어가 있다가 겹겹이 둘러싼 포위망을 뚫고 집회에 참여한 후 유유히 사라지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 지역일반
  • 전북일보
  • 2006.03.30 23:02

전주시 한의사회 김성배 신임 회장 취임

전주시 한의사회는 최근 전주시 평화동 갤러리아 웨딩홀에서 김성배 신임 회장(45·갑자한의원장)의 취임식을 가졌다.이날 취임식에는 이경옥 전주시장 권한대행, 송하진 송하진 전 행자부 지방분권지원단장, 금경수 원광대 한의대학장, 김강산 익산 원대한방병원장, 임규상 군산한방병원장 등 관계자 100여명이 참석했다.김 회장은 취임사에서 “산행, 애경사 등 만남의 장을 마련해 회원간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겠다”고 말했다.김 회장은 또 “좌담회, 질환별 토론회로 한방에서 생소하게 느껴졌던 이빈후과질환 등에 대해 실질적 교육을 진행하겠다”며 “환자들의 편의를 돕기 위해 한방의 치료 범위를 넓혀가겠다”고 밝혔다.지역사회에 봉사활동을 강화해 시민들에게 다가서는 전주시 한의사회가 되는 것 역시 김회장의 취임포부 중 하나였다.김 회장은 논란이 되는 침구사, 한약방 등에 대해서는 단호한 반대입장을 표하며 “의료사고 등으로 인한 시민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이에 대해 엄중대처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김 회장은 전라고를 졸업하고 원대한의대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원대한의대 겸임교수 및 전북도 한의사회 학술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 지역일반
  • 임상훈
  • 2006.03.30 23:02

조영황 인권위장 장수초등교 방문 간담회

조영황 국가인권위원장이 29일 장수초등학교를 방문 국제결혼 가정 자녀 및 학부모들과 간담회를 가졌다.이날 간담회에는 김호준·정강자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과 최규호 전라북도 교육감, 최남렬 장수교육장과 국제결혼 가정 학생 및 학부모들이 참여했다.조영황 위원장과 최규호 교육감은 학생들에게 선물을 전달하고 위로 격려했다.학부모들은 간담회를 통해 ▲ 자녀들과 학부모들을 위한 한글 교육 프로그램 운영과 ▲ 유아들의 한글교육을 위해 어린이집에 취학하고 있으나 경제적 부담이 크다며 지원을 요구하고 ▲ 가정문제 등 상담을 하고 싶어도 상담센터가 없다며 상담센터 개설을 요구했다.조영황 국가인권위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전라북도 교육청에서는 온누리안 국제결혼 가정 자녀들의 교육문제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감사한다” 며 “오늘 방문 목적은 국제결혼 가정 자녀와 부모들이 지역사회에서 받는 애로사항을 청취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했다”고 말했다.장수초등학교는 전교생 360명중 12세대에서 20명의 국제결혼 가정 자녀들이 재학하고 있어 토요휴업일에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다.뿐만 아니라 전교원 및 친구들과도 1:1결연을 통해 집단따돌림 예방과 한글쓰기 지도 등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 지역일반
  • 우연태
  • 2006.03.30 23:02

"전통문화도시 시민들 지지가 큰 힘"

“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통문화중심도시 전주를 지켜가는 노둣돌의 역할을 다하겠습니다.”사단법인 천년전주사랑모임 초대이사장 김명곤 문화관광부 장관의 사임에 따라, 28일 열린 임시총회에서 김영배 신임이사장(53)이 제2대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그간 상임운영이사로 천년전주사랑모임에 적극적으로 활동해 온 그는 “전주 사랑을 실천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전주가 전통문화중심도시로 지정받는 데 있어 무엇보다 시민들의 동의와 지지가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시민들이 회원인 천년전주사랑모임은 민간에서 해야 할 당연할 일들을 해나가는 것이죠.” 그는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참여하고 있어 간혹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지만, 전주를 전통문화중심도시로 가꾸겠다는 큰 뜻은 하나”라며 “무엇보다 1000명 이상이 천년전주사랑모임 후원구좌를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초대이사장의 임기를 이어서 하는 만큼 기존 사업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올해는 재외한국인들을 전주로 초청해 그들이 우리 전통문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겠습니다.”재외국인 및 교포자녀 교육사업은 천년전주사랑모임의 주요사업이다. ‘무형문화재 모심의 날’ 행사와 한옥마을을 중심으로 한 소출력라디오 방송, 전국의 유명인사들이 필자로 참여하는 「전주의 추억」 발간, 웹진 제공 등도 올해 진행해야 할 핵심사업들이다. 김이사장은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팸투어를 실시해 왔지만, 누구보다 전주시민들이 더 감동받는 것 같다”며 “시민들부터 전주를 알고, 전주를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주 출신인 김이사장은 전주효문여중 교장을 역임하고 현재 열린문화 상임이사, 김제자활후견기관장, 김제가정봉사원 센터장, 전북독립영화협회 이사 등을 맡고있다.

  • 지역일반
  • 도휘정
  • 2006.03.30 23:02

[이치백의 一日一史] 헌병·경찰 식민지 통치 주축

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오직 헌병?경찰로 그 주축을 삼았다.1910년, 헌병경찰제의 기구를 보면 헌병사경관은 전 경찰을 장악하는데 우선 각도 경찰부장만 보더라도 헌병소좌(少佐?소령)를 임명했다.거기에 1918년 3월 30일에는 헌병경찰을 강화하는 기구개편을 단행했다. 예를 들면 헌병파견소를 주재소로 명칭을 고쳤고 그 책임자는 경찰관을 지휘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당시 헌병이 담당한 직무를 보면, 일반 경찰직무 외에도 첩보수집, 의병토벌, 장교 및 하사관(경시?경부)의 검사 직무대리, 범죄즉결, 민사소송 조정, 집달리 업무, 국경세관의 업무, 민적사무, 산림감시, 외국여권, 우편물 호송, 일본어 보급, 축우의 검역, 기상관칙, 도로보수, 부업장려 등으로 군사경찰뿐만이 아니었다.예산만 보더라도, 합병당시의 총독부 예산이 7천 7백 51만원이었는데 그 중 경찰?헌병보조비만 무려 5백10만원이었다. 1918년엔 8백3천6백97원이던 것이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1천7백73만4천 7백94원으로 늘었다.인원도 헌병대는 1910년에 653개소 2천19명이던 것이 1914년엔 1036개소에 8260명으로 늘어났다. 또 1917년 헌병 총수는 1만2천4백23명으로 부쩍 늘어났으며, 이 인원은 헌병 1명이 인구 1천100명을 담당하게 된 셈이다. 이밖에 경찰은 1914년에 7백31개소의 관서에 5천8백29명이었다.

  • 지역일반
  • 전북일보
  • 2006.03.3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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