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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백제] (65) 4장 풍운의 3국(三國) ③

“대인, 수고했다.” 영류왕이 연개소문에게 말했다. “천리장성 축성은 그대의 공이다. 들라.” 잔을 들어 한모금을 삼킨 영류왕은 연개소문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을 보았다. 청에 도열해 앉은 2백여 명의 고관, 장수들의 시선이 연개소문에게로 옮겨졌다. 연개소문 혼자서 일어선 것이다. 아직 손에 술잔을 쥐고 있다. 머리에는 옥이 박힌 은관을 썼고 갑옷은 벗고 비단 겉옷 차림이다. “대왕께 아뢰오.” 연개소문의 굵은 목청이 울리자 청 안이 조용해졌다. “대인, 무슨 일이냐?” 영류왕이 지그시 연개소문을 내려다보았다. 연개소문은 5부 대인의 수장(首長) 격이었지만 언제나 영류왕의 견제를 받아왔다. 지금도 좌석 배치가 5부대인의 3번째 서열이며 조정 고관의 아래쪽이다. 어깨를 편 연개소문이 2백여 쌍의 시선을 받고는 그들을 휘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영류왕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당한 태도다. “대왕께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말하라.” 영류왕의 대답이 냉랭해졌다. 그대 술잔을 든 채로 연개소문이 물었다. “대왕께서는 광개토대왕과 장수대왕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청 안에서는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2백여 쌍의 시선이 연개소문과 영류왕을 번갈아 훑어갈 뿐이다. 그때 영류왕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앗하하. 내가 그대가 묻는 의도를 알겠다. 그 두 분 대왕은 위대하신 왕이시다. 허나 이 건무는 그분들과는 다르다.” 영류왕의 얼굴에서 차츰 웃음기가 가시더니 곧 눈을 치켜뜨고 연개소문을 노려보았다. “나는 백성을 전란에 빠뜨리지 않는다. 그것이 백성과 땅을 지키는 일이다!” 어깨를 부풀린 영류왕이 꾸짖듯 말을 뱉었다. “보국안민이 내가 갈 길이다!” “그렇습니까?”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인 연개소문이 몸을 돌려 둘러앉은 2백여 명의 고관들을 다시 보았다. 영류왕의 기세에 질린 고관들은 모두 숨만 죽이고 있다. 연개소문이 입술의 한쪽 끝만 비틀고는 웃었다. 그리고는 어깨를 한껏 추켜올리더니 술잔을 추켜올리면서 소리쳤다. “고구려는 다시 일어난다!” 벽력같은 외침이 청을 울리자 모두 아연실색을 했다. 다음 순간 연개소문이 들고 있던 술잔을 청 바닥에 내던져 박살을 내었다. “다 죽여라!” 연개소문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이다. 청의 네곳 문으로 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앞장선 장수들은 모두 연개소문의 심복 무장들이다. “와앗!” 청 안이 무너질 것 같은 함성이 울리면서 당장 살육이 일어났다. 군사들은 닥치는 대로 다 죽인다. 사방의 문으로 끝없이 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청 안은 비명과 외침으로 가득 찼다. 연개소문은 달려온 심복 무장으로부터 장검 두 개를 넘겨받았다. 청에 들어오기 전에 모든 관리는 고하를 막론하고 무기를 맡겨 놓아야 했기 때문에 청 안의 고관들은 비무장이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은 칼을 받자마자 옆에서 허둥거리는 남부대인 고정태의 머리통을 내려쳐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연개소문이 소리쳤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서부대인 양수가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치고 있었기 때문에 달려가 등을 찍었다. 가슴으로 칼이 빠져나갔고 양수가 목청이 터질 것 같은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대인! 살려주시오!” 외치는 소리에 머리를 돌렸더니 북부대인 사반이 연개소문의 무장에게 목덜미를 잡힌 참이었다. 무장은 칼을 치켜들고 있다. 연개소문이 소리쳤다. “베어라!” 그리고는 상을 건너뛰어 영류왕에게로 달려갔다. 왕은 세 명의 무장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악을 쓰는 중이었다. 무장들은 칼을 치켜들었지만 베지 못하고 망설인다. 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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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4 19:02

[불멸의 백제] (64) 4장 풍운의 三國 ②

고구려에는 5개 대부족(大部 )이 있는데 연노부, 순노부, 개루부, 관노부, 절노부로 나뉘어졌다. 그 중 연노부(淵奴部)가 가장 강력한 부족이다. 연개소문은 연노부 출신으로 그의 증조부 연광(淵廣), 조부 연자유(淵子遊), 부친 연태조(淵太祚)는 대를 이어 서부대인(西部大人)에다 대대로(大對盧)를 지냈다. 서부대인은 연노부가 서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서쪽은 곧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그래서 618년에 즉위한 영류왕 건무와 온건파 대신들은 연개소문의 부친 연태조가 죽자 호전적 성격인 연개소문의 서부대인 세습을 반대했다. 연개소문은 을지문덕이 주장한 북진정책에 호응하는 강경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개소문은 각 호족들과 대신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온건파의 정책에 따를 것을 맹세하고 나서야 서부대인 세습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서부대인이 된 연개소문은 곧 군사들을 모으고 당에 대항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당과의 전쟁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자신의 영지가 전장(戰場)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맹세는 했지만 을지문덕이 주장한 북진정책은 버리지 않았다. 영류왕은 10여 년 전 고구려의 오랜 맹방인 돌궐의 힐리가한이 당의 이정(李靖)에게 잡히자 그것을 치하하는 사신을 보냈다. 돌궐은 수의 대군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고구려군의 선봉이 되어서 싸워준 맹방이다. 연개소문을 비롯한 강경파 장수들은 왕의 배신에 치를 떨었다. 왕은 스스로 당의 속국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왕은 당의 사신 진대덕이 오자 길 안내를 시키는 한편, 진대덕이 노골적으로 지형과 방비 상태를 염탐을 해도 막지 않았다. 포로로 잡혀있던 한인들에게 고향으로 곧 데려갈 것이라고 진대덕이 고구려를 무시한 언동을 했는데도 놔두었다. 영류왕 건무는 한때 무용을 날렸던 장군으로 선왕(先王) 영양왕을 도와 수나라 대군을 물리쳤으나 왕이 된 후로는 수비에만 치중했고 당에 저자세를 보인 것이다. 고구려는 5부(部), 3경(京)제로 되어 있었으니 동, 서, 남, 북, 내(內)의 5부에 평양성, 국내성, 한성의 3경(京)이었다. 전국의 성이 176개, 호구가 69만7천호여서 백제의 5부(部), 37군(郡), 200성, 76만호에 620만 인구에 비하면 면적에 비해서 인구가 적은편이다. 의자왕 2년 10월, 영류왕 25년, 평양성. 오늘은 평양성에 5부(部)의 수장들이 다 모였다. 부족의 이름을 따서 내부(內部)는 계루부로도 불렸고 서부(西部)는 연노부, 북부(北部)는 절노부, 동부(東部)는 순노부이며 남부(南部)는 관노부이다. 오늘 서부대인 연개소문이 감독했던 장성투입 병력의 열병식을 한 것이다. 천리장성은 대륙으로부터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세워졌다. 곧 영류왕의 북수남진(北守南進) 정책의 산물로써 16년간의 공사로 완공이 된 것이다. 천리장성은 서부(西部)로 뻗어있었기 때문에 서부대인 연개소문이 공사를 맡아야 했으니 인력과 물자의 손실이 대단했다. 5부대인은 모두가 부족의 장으로 대부분 대를 이어서 대인직을 물려받았다. 따라서 제각기 사병(私兵)을 길러 국경을 지켰는데 연개소문의 서부가 영토도 가장 큰데다 사병의 수도 많았으므로 대인(大人)중의 수장(首長) 노릇을 한다. 5부대인이 청에 좌정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영류왕이 들어섰다. 영류왕 건무는 26대 영양왕의 이복동생으로 6척 장신에 수염이 길었고 눈빛이 맑았다. 영양왕때 수의 대군을 을지문덕과 함께 몰사시킨 용장이었으나 왕이 되자 북수남진 정책을 펴왔다. 영류왕이 용상에 앉아 백관을 둘러보았다. 5부대인과 그들의 중신(重臣)들, 그리고 조정의 고관이 모두 모였으므로 대왕진에 모인 관리는 2백인이 넘는다. “모두 앉으라.” 영류왕이 말하자 모두 자리에 다시 앉는다. 각자의 앞에 술상이 차려져 있어서 왕이 먼저 술잔을 들었다. 시녀가 다가와 잔에 술을 채운다. “이제 북쪽 국경은 그것으로 되었어.” 잔을 들어 올리면서 영류왕이 말하자 대신들도 모두 잔을 들었다. 그 때 영류왕의 시선이 연개소문에게 옮겨졌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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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3 20:16

[불멸의 백제] (63) 4장 풍운의 3국(三國) ①

내성 안으로 다시 한무리의 신라군이 몰려 들어왔다. 대야군주 김품석의 옷을 창끝에 매달아 성문 앞에 걸어 놓았지만 분을 참지 못하고 쳐들어오는 무리다. “막아라!” 이제는 진궁이 백제군 부대를 지휘한다. 앞장선 진궁이 칼을 휘두르며 마당으로 달려 나갔고 뒤를 군사 수십명이 함성을 지르며 따른다. “나솔! 한솔이 이곳으로 오시고 있소!” 전령한테서 보고를 받은 화청이 소리쳤다. 화청은 온 몸에 피칠을 해서 모습이 끔찍했다. 그러나 상처는 없다. “전령이 오면서 보았는데 신라군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답니다!” 주장(主將)을 잃은 군사는 흩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화청이 칼을 지팡이처럼 짚고 서서 웃었다. “3천 군사로 대야성을 함락시킨 것 같소. 모두 나솔의 공이요!” “내 공이 아니야! 나는 앞장만 섰을 뿐이다!” “대야군주 김품석을 벤 공이 1등 공이요!” 그때 청으로 군사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나솔! 대아찬이 살에 맞았소!” “무엇이!” 놀란 계백이 마당으로 뛰어 내렸을때 군사 셋이 진궁을 메고 들어왔다. 계백과 화청이 달려가자 군사들이 진궁을 마당에 내려 놓았다. 마당 구석에 피워놓은 모닥불에 진궁의 모습이 드러났다. 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지만 상대방의 피가 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궁의 가슴 깊숙하게 화살이 박혀져 있다. 본인이 화살을 부러뜨려 절반만 남아 있었어도 가슴 깊숙히 박혀져 있다. “대아찬!” 계백이 진궁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상반신을 부축했다. “대아찬! 살을 빼면 되겠습니다!” 소리쳤지만 전장을 많이 겪은 계백은 이것이 치명상인 것을 알았다. 진궁이 피가 뿌려진 얼굴을 펴고 웃었다. “나솔, 힘껏 싸우고 죽소.” “대아찬!” “나솔, 나를 다르게 불러줄 수 없소?” “장인어른.” 순간 화청이 숨을 들이켜더니 곧 머리를 끄덕였다. 화청도 진궁과의 사연을 아는 것이다. 계백이 진궁의 입가로 흘러나온 피를 손끝으로 닦으며 다시 불렀다. “장인어른, 이렇게 모시게 되어서 죄송하오.” “나솔, 내 딸을 부탁하네.” “염려하지 마시고 떠나시지요.” “사위, 자네를 믿네.” “아버님.” 계백이 진궁의 머리를 두팔로 감아안고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아버님, 극락으로 가시오.” “내가 안심하고 가네.” “고화를 아끼고 살겠습니다.” “고맙네.” 또렷하게 말한 진궁이 계백을 향해 웃어 보이고는 눈을 감았다. 그때 함성이 울리면서 외침 소리가 들렸다. “선봉군이 진입했다!” “들으셨소?” 계백이 소리치듯 진궁에게 묻더니 몸을 마당에 내려놓았다. “나솔! 어디 있는가?” 협반의 목소리가 울렸고 계백이 소리쳤다. “여기 있소!” “만세! 만세!” 함성이 울리면서 협반이 마당으로 뛰쳐 들어왔는데 온몸에서 활기가 넘치고 있다. “나솔! 신라군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어!” 협반이 소리치다가 땅바닥에 눕혀진 진궁을 보더니 주춤했다. “대아찬 아닌가?” “네, 내 장인어른이 가셨소.” 계백이 소리쳐 대답했다. 진궁이 들으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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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2 19:20

[불멸의 백제] (62) 3장 백제의 혼(魂) 21

“네, 이놈!” 시선이 마주친 순간 김품석이 먼저 외쳤다. 계백과의 거리는 겨우 세걸음, 칼을 내려치면 닿는 거리다. 계백이 가쁜숨을 고른다. 뒤쪽에서도 거친 숨소리가 났고 그 뒤쪽에서는 함성과 외침, 비명으로 가득찬 상황. 그러나 계백의 바로 뒤쪽 무장들은 입을 다물고 있다. 잠깐동안 마루방, 복도 사이의 좁은 공간에 짧은 정적이 덮여졌다. 그저 숨 두번쯤 마시고 뱉을 만큼의 정적,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계백의 외침이 정적을 깨뜨렸다. “백제 나솔 계백이 김품석을 친다!” “오!” 김품석이 맞받아 소리치면서 칼을 내질렀지만 이미 기세가 꺾였고 살기가 떨어졌으며 검법 또한 미숙했다. 계백이 김품석의 칼을 겨드랑이 사이로 보내면서 치켜든 칼을 후려쳤다. 맹렬한 살기, 노도와 같은 기세, 빈틈없는 검술이다. “으악!” 비명은 뒤쪽 시녀들한테서 터졌다. 왼쪽 어깨에서부터 오른쪽 허리까지를 비스듬히 잘린 김품석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기 때문이다. “우왓!” 계백의 뒤에서 함성이 일어났다. “김품석을 백제 나솔 계백이 베었다!” 화청의 외침이 복도를, 청을, 내성으로 울렸다. 뒤쪽 군사들이 따라 외친다. “김품석을 베었다!” “대야군주 김품석을 백제 나솔 계백이 베었다!” 군사들이 너도 나도 다투어서 외친다. 내성으로 따라 들어왔던 신라군이 외침을 듣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의(戰意)가 꺾인 것이다. 장수들이 독전했지만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대신 백제군의 외침은 더 커졌고 더 넓게 퍼졌다. 신라군은 머리를 잃은 용이 되었다. “무엇이? 김품석을?” 펄쩍 뛰듯이 놀란 한솔 협반이 벌떡 일어섰다. 이곳은 서문의 성루 위, 협반은 북문에서 서문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곳이 지휘하기도 용이했고 윤충의 본군이 진입하기에도 쉬웠기 때문이다. “이, 이런, 나솔이 대야성을 먹었다.” 협반이 반쯤 얼이 빠진 표정을 짓고 말했다. “내가 그 뒷수습을 해야겠다.” 어깨를 부풀린 협반을 보고 장덕 하나가 물었다. “한솔, 어쩌시렵니까?” “어쩌기는, 내가 곧장 내성으로 가서 나솔과 합류하는 것이지.” “성문은 어쩌시구요?” “이놈아, 내가 수문장이냐?” 협반이 버럭 화를 냈지만 지금은 전시(戰時)다. 조금전까지 죽고 죽이는 싸움을 끝낸 무장(武將)들이라 거칠어져 있다. “한솔, 우린 고작 2천3백이 남았소, 그 병력으로 1만이 넘는 신라군이 우글거리는 성안을 휘젓는단 말이요? 성문을 지켜서 방령이 오시기를 기다립시다.” “이놈아, 그래서 너는 장덕에서 솔(率)품계로 승진하지 못하는 것이야. 우리가 성안을 휘저으면 머리 잃은 용이 제대로 대항이나 할까?” “용 몸통이 꿈틀거리면 다 깔려죽소!”했지만 장덕의 목소리가 약해졌고 다른 장수들이 거들었다. “가십시다! 2천으로 성을 빼앗읍시다!” “신라군이 열린 서문, 북문으로 도망쳐 나갈 것이오!” 그때 협반에 대들었던 장덕을 손으로 가리켰다. “곽청, 네가 나솔이 될 기회다! 앞장서라!” 그러자 장수들이 ‘와’웃었고 분이 난 장덕이 눈을 부릅떴다. “좋소, 대공을 세워 한솔이 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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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1 19:09

[불멸의 백제] (61) 3장 백제의 혼(魂) 20

“이게 무슨 소리냐?” 김품석이 소리쳤다. 함성과 외침이 울린 것이다. 이어서 비명이 울렸다. “알아보고 오너라.” 이맛살을 찌푸린 김품석이 시녀에게 지시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부인인 소연을 만나러 왔던 것이다. 저녁도 먹지 못했지만 식욕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소음이 더 심해졌다. 이제는 칼날 부딪치는 소리에다 여자들의 비명도 날카롭게 울렸다. “나리, 백제군 일까요?” 소연이 다가와 물었는데 눈을 크게 뜨고 입이 조금 벌어졌다. 겁에 질린 표정이다. 소연의 일생에서 이런 일은 처음 당하는 것이다. “아니, 그럴리가…….” 했지만 김품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때 마룻바닥을 울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내의 외침이 울렸다. “군주(軍主)!, 백제군이 내성에 침입했습니다.” 위사장 김채순이다. “나리.” 놀란 소연이 김품석의 소매를 잡았고 뛰는 발소리는 문 앞에서 멈췄다. 이곳은 침실 옆의 마룻방이다. “군주! 어서 피하십시오!” 그때 마룻바닥을 울리는 무수한 발자국 소리와 함성, 비명이 한꺼번에 울렸다. “이런!” 소연에게 잡힌 소매를 뿌리친 김품석이 허리에 찬 칼을 빼들고는 문을 열었다. “으앗!” 함성이 더 크게 방으로 쏟아졌고 문 앞에 서 있던 김채순이 몸을 돌리면서 김품석을 가로막는 시늉을 했다. 그때 김품석은 복도를 달려오는 무리를 보았다. 신라군이다. 앞장선 신라군은 피 웅덩이에 빠진 것 같았는데 손에 칼을 치켜들고 있다. 그 순간 사내와 김품석의 시선이 마주쳤다. 복도의 기둥에 매달아놓은 등빛에 얼굴이 선명하다. 김품석이다. 계백은 방문 안에 선 사내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바로 알았다. 금박을 입힌 붉은색 겉옷, 흰 얼굴, 그리고 그 뒤에 숨듯이 선 여자, 김품석의 부인이며 김춘추의 딸 소연인가? “으앗!” 함성은 뒤를 따르는 진궁과 화청이 질렀다. 계백은 치켜든 칼을 고쳐쥐었다. 거리는 20보에서 어느덧 7, 8보로 줄어들었다. 이제 가로막는 신라군은 없다. 김품석 앞에 선 무장의 기세가 사납다. 위사장인 것 같다. 내성 안을 통과하면서 따라 들어온 위사, 신라군 대여섯명을 베어 죽였다. “이놈!” 그때 김품석 앞을 가로막고 서 있던 무장이 벽력같은 고함을 지르더니 달려왔다. 맹렬한 기세, 건장한 체격의 무장은 칼을 치켜들고 단숨에 덮쳐왔다. “이얏!” 그 순간에 계백과 부딪친 무장의 칼이 엄청난 기세로 내려쳐졌다. 계백은 무장에게 달려가면서 무장과는 반대로 치켜든 칼을 내렸다. 그래서 둘이 부딪쳤을 때는 칼이 어깨에 비스듬히 걸쳐진 자세, 수비 자세다. 상대가 내려칠 것을 예상하고 기다린 자세, 그 순간 무장의 칼이 벼락처럼 계백의 머리끝을 쳤다. 기다리고 있던 계백이 어깨를 틀면서 걸치고 있던 칼로 무장의 가슴을 찔렀다. “욱!” 가슴을 관통당한 무장과 몸이 부딪치면서 얼굴이 바로 옆에 놓여졌다. 무장은 숨을 들이켰다가 몸이 젖혀지더니 입으로 솟아오른 피를 계백의 얼굴에 뱉었다. 계백이 어깨로 무장을 밀어 젖히고는 칼을 뽑았다. 자, 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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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9 20:04

[불멸의 백제] (60) 3장 백제의 혼(魂) 19

계백, 진궁, 화청이 앞장을 섰고 해준이 뒤를 맡았다. 깊은 밤, 이제 성 안은 전장이 되어서 군사들이 이리저리 몰려 다닐뿐 주민 통행은 그쳐졌다. 240여 명이 된 백제군이 내성을 향해 다가간다. 모두 신라군 복장이어서 지나는 신라군도 이상하게 보지는 않는다. “내성의 성문은 항상 열어 놓았는데 오늘은 어떤지 모르겠소.” 앞장선 진궁이 계백에게 말했다. “내성안 수비군은 정문 안쪽의 위사대 2백명이 전부요. 군주는 청 뒤쪽의 별궁에서 기거하고 있소.” 그때 앞에서 일대의 보군이 뛰어왔다. 앞장선 무장들도 뛴다. 어둠 속에서 군데군데 횃불이 켜져 있어서 군사들의 얼굴은 드러났다. “어디 가는 군사요!” 다가온 군사들에게 소리쳐 물은 사내가 진궁이다. 그때 앞장서 달려오던 무장이 가쁜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서문으로 갑니다! 서문으로 백제군이 왔답니다!” “저런!” 진궁이 놀란듯 소리치자 지나던 무장 하나가 진궁을 알아보았다. “대아찬은 어디 가시오?” “군주께 명을 받으러 가오!” 그러나 달려가는 바람에 대답은 듣지 못했다. 길 모퉁이를 돌자 내성 대문이 보였다. 내성 앞에는 군사들이 무더기로 모여 있었는데 무장들이 소리쳐 구분을 시키고 있다. 출전 준비중이다. 기마군사가 오갔고 전령이 달려오고 들어간다. 대문 앞마당에 모인 군사가 2백 여인이나 되었기 때문에 계백은 긴장했다. “내성으로 곧장 진입합시다.” 계백이 다가가며 말했다. 문이 열려있는 것이다. 성안이 어수선해서 지금까지 2리(1km) 가까운 거리를 오면서 검문을 받지 않은것만 해도 천행이다. 성 안은 군사들로 가득차 있다. 1만 5천 가까운 군사들이다. 이제 내성의 대문과 1백보 거리가 되었다. 그때 옆쪽에서 순찰대가 나타났다. “어디 가시오?” 순찰대장은 12품 대사 벼슬이지만 눈빛이 날카롭고 긴장했다. 뒤를 따르는 순찰대는 10여명, 내성 주둔군 소속이어서 병력 이동에 환하다. 진궁이 순찰대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뒤를 따르는 군사들은 멈추지 않는다. “삼현성에서 온 지원군을 데려오라는 군주의 명을 받고 가는 길이네.” “상현성주 아니시오?” 순찰대장이 진궁을 알아보더니 옆에 선 계백과 화청까지 둘러보았다. “가 보시지요.” “수고하게.” 순찰대장 앞을 지난 백제군이 서둘러 내성의 대문으로 다가갔다. 이제 대문의 정문이 20여보 남았다. 정문 좌우에 선 위병이 다가오는 군사들을 보더니 눈을 둥그렇게 뜨는 것도 보인다. 그때 계백이 뒤쪽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잠깐, 지금 어디로 가시오?” “곧장 갑시다.” 계백의 걸음이 빨라졌고 뒤쪽 순찰대장이 다시 불렀다. “내성으로 군사들을 데리고 오라고 하셨단 말이오?” “뛰어라!” 계백이 소리치자 진궁, 화청이 달렸고 대문 앞에 선 위사들이 창을 고쳐 쥐었다. 그러나 이미 서너걸음 앞으로 다가온 계백과 진궁이다. “으악!” 위병 하나의 비명이 밤하늘을 울렸다. 화청이 들고 있던 창을 던져 몸통을 꿴 것이다. 그때 진궁이 다른 위병의 몸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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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8 20:25

[불멸의 백제] (59) 3장 백제의 혼(魂) 18

“성문을 닫아라!” 계백이 소리쳤다. “서둘러라!” 서문 앞까지 밀어닥친 백제군에 밀린 신라군이 열려진 성문 밖으로 나간 것이다. 백제군을 앞뒤에서 협공한다는 말이 신라군에게 먹히기도 했다. 성문에 달라붙은 백제군이 성문을 닫았다. 요란한 소음이 울리면서 통나무 빗장까지 채워지자 그때서야 성문을 탈취한 실감이 났다. “빼앗았다!” 장덕 안준이 칼을 치켜들고 소리치자 백제군이 함성을 질렀다. “우왓!” 전장이 된 서문 안은 사상자가 즐비했고 아직도 이쪽저쪽에서는 칼 부딪치는 소리와 신음이 울렸다. 백제군 사상자도 수백명이 된다. “안쪽을 지켜라!” 안준이 소리치며 지휘했다. 그때 계백이 화살 끝에 기름을 먹인 헝겊을 매달고는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북문 쪽 하늘을 향해 시위를 한껏 당겼다가 놓았다. 협반에게 신호를 보낸 것이다. 그리고는 계백이 소리쳤다. “자, 가자!” 내성으로 잠입하려는 것이다. “북문은 백제군한테 빼앗겼습니다!” 부장 김용하가 소리쳐 보고했는데 머리칼과 옷자락이 불에 타 그을렸다. “백제군이 열린 성문으로 진입해와서 이미 진을 치고 있소!” “이, 이런.” 당황한 김품석이 벌떡 일어섰다. 내성의 청에서도 북문 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인다. 어둠에 덮인 청 안팎은 어수선했다. 북문으로 달려간 무장들이 뛰어 들어왔고 일부는 뛰어 나간다. 이미 군사 배치는 끝냈지만 상황은 수시로 변하고 있다. 그때 김품석이 소리쳤다. “북문을 빼앗아라! 보군 5천을 그쪽으로 보내고 대아찬 그대가 지휘하라!” “예, 군주. 일길찬 한천과 사찬 박기문이 거느리고 있는 2개 부대가 그쪽에서 가깝습니다!” “그대가 이끌고 가라!” 명을 받은 김용하가 한천과 박기문을 데리고 황급히 청을 나갔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성문을 빼앗겼단 말인가?” 분한 표정이 된 김품석이 어깨를 부풀리면서 소리쳤다. “성문 수비군은 자빠져 자고 있었단 말이냐!” 둘러선 무장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북문의 불길을 뚫고 온 수비군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제군이 안에서 친 것을 모른다. “군주, 백제 후속군이 있는지 정찰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장 하나가 묻자 김품석이 머리를 저으며 화를 내었다. “밤이 깊어가는데 성 밖으로 정찰대를 보내란 말이냐? 정찰대를 보내려면 성문을 열어야 하는데 성 밖에서 백제군이 기다리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구구절절 맞는 말이지만 김품석의 전장 경험이 없다는 증거가 드러났다. 둘러선 무장들은 대부분 전장을 겪은 터라 이런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대처해야만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때 김품석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나, 내실에 들어가 있을테니까 전령이 오면 연락을 해라.” 무장들이 허리를 굽혀 김품석을 배웅했다. 김품석이 청을 나가자 주위가 어수선해졌다. 무장들이 둘씩 셋씩 모여서 두런거렸는데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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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7 21:18

[불멸의 백제] (58) 3장 백제의 혼(魂) 17

서문 수문장 나마 여준은 앞쪽에서 외침과 신음 소리가 울렸을 때 그것이 백제군의 기습이라는 것을 알았다. 거리는 1백50보 정도. 어둠 속인데다 앞쪽이 장애물로 가려 보이지 않는다. “싸움이 일어났소!” 당황한 장교 하나가 소리쳤을 때 여준이 소리쳐 꾸짖었다. “동요하지 말라!” 여준은 서문 수문장으로 수문경비병 50여명을 지휘하고 있다. 전고(戰鼓)는 그쳤지만 이제 서문 앞쪽에는 이곳저곳에서 몰려온 군사 7,8백여명이 진을 쳤고 아직도 더 몰려오는 중이다. 그때 함성이 일어났다. 공격진의 함성이다. “수문장! 아군이 밀리고 있소!” 다시 다른 목소리도 울렸다. 이제 소란은 7,80보 정도로 가까워졌다. 밀리고 있다. 백제군이 이미 북문을 탈취했다는 것은 여준도 알고 있었다. 전령이 다녀갔기 때문이다. 그때 여준이 소리쳤다. “성문을 열어라!” 영문을 모르는 군사들이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준이 목소리를 높였다. “밖은 비었다. 밖에서 신라군을 넣어 적을 안팎에서 협공하려는 것이다!” 그때서야 군사들이 움직였고 여준이 다시 소리쳤다. “서둘러라! 곧 남문에서 군사들이 온다!” 거짓말이지만 누가 확인을 하겠는가? 성문을 열고 닫는 것은 수문장 권한이다. 성주 외에는 수문장에게 명령할 사람은 없다. 그때 함성이 더 가까워졌고 육중한 소음을 내면서 성문이 열렸다. 쏟아지는 것처럼 내려가던 백군의 전진 속도가 차츰 느려졌고 싸움은 그만큼 더 격렬해졌다. 그러나 밀고 내려가기는 한다. 성문과 50여보 거리가 되었을 때는 계백과 진궁, 그리고 안진까지 한발짝씩 떼면서 밀고 나가는 상황이다. “쳐라!” 계백이 소리쳤다. “다왔다!” 백제군이 함성으로 응답했다. “와아앗!” 아직 수적으로 우세인데다 이쪽은 격렬한 전의(戰意)를 품고 있는 공격군이다. 신라군은 수세인데다 소극적이어서 기(氣)에서도 밀린다. 그러나 차츰 결사적이 되어서 전투는 치열해졌다. “백제군이여! 이겼다!” 계백이 다시 소리쳤고 뒤를 따르는 백제군이 함성으로 응답했다. 그때다. 앞쪽 성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요란한 소음이 울린 것이다. “성문이 열린다.” 계백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밀고 나가라!” 그때 성루에 선 여준이 군사들에게 소리쳤다. “성문 밖으로 물러서라!” 군사들이 주춤거렸을 때 여준이 다시 외쳤다. “놈들을 밖으로 유인해내는 거다! 밖에서 신라군이 매복하고 있다!” 그말을 들은 성문 수비군이 일제히 몸을 돌려 성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우왓!” 앞장서서 밀던 계백과 진궁, 안진은 갑자기 앞쪽이 느슨해진 것을 깨닫는다. 막아섰던 신라군이 주춤대면서 물러서는 바람에 한번에 서너걸음을 전진했다. “놈들이 도망친다!” 칼을 휘두르며 안진이 소리쳤을 때 신라군이 등을 보이며 어둠 속에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와앗!” 뒤를 백제군이 달려가며 함성을 지른다. “여준이 성문을 열었소!” 가쁜 숨을 뱉으면서 진궁이 계백에게 말했다. “신라군이 모두 밖으로 나가고 있소!” 그때 성루 위에 서 있던 여준이 아래쪽을 내려다 보면서 소리쳤다. “나솔 계시오? 문을 어서 닫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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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6 20:03

[불멸의 백제] (57) 3장 백제의 혼(魂) 16

계백이 선봉 우군(右軍)이 다가왔을 때 협반에게 말했다. “한솔, 서문을 점령하면 서문 방어는 우군대장에게 맡기고 저는 제 수하 군사를 이끌고 내성으로 잠입하겠소.” “내성으로?” 놀란 협반의 목소리가 커졌다. “김품석이 있는 곳으로 말인가?” “그렇소.” 계백이 한걸음 다가섰다. “제 수하 군사가 모두 신라군 차림이니 성안이 혼란한 틈을 타서 잠입해 보겠소.” “으음.” 결단이 빠른 협반도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깐 망설이는 것이다. 무모한 작전이다. 그러나 3백 기마군으로 대야성까지 잠입했지 않은가? 처음부터 대야성 공략은 무모했다. 마침내 협반의 눈동자가 고정되었다. 결단을 내린 것이다. “나솔, 해 보겠는가?” “전장에서 군사를 끊임없이 운용해야 됩니다.” “과연.” 협반이 불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눈으로 계백을 보았다. “나솔, 조심하게. 내가 잊지 않겠네.” “서문을 빼앗으면 불화살로 신호를 드리지요. 동시에 저는 내성으로 갑니다.” 계백과 진궁이 몸을 돌렸다. 선봉 우군(右軍) 대장은 장덕 안준이다. 20대 후반으로 눈빛이 무거웠고 키는 작았지만 팔이 길다. 첫눈에도 노련한 무장이다. 1천 기마군이 이제는 보군이 되어서 동산을 넘어가고 있다. 동산은 이미 백제군 좌군이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침없이 나아간다. 신라군은 동산 아래쪽에 집결하고 있다. 백제군이 동산을 점령한 것을 아는 것이다. “장덕.” 계백이 부르자 뒤를 따르던 안준이 바로 옆에 붙었다. 이제 1천3백 가까운 백제군이 동산을 내려가고 있다. 2백보쯤 앞이 신라군 진용이지만 어수선하다. 이쪽저쪽에서 몰려온 부대로 아직 대오가 정비되지 않았다. 다가선 안준이 계백에게 물었다. “부르셨소?” “그대는 나하고 앞장을 서서 서문으로 돌진하세.” “당연한 말씀을 왜 하시오?” “내 수하 군사는 후위에 붙었다가 서문을 탈취하면 곧장 내성으로 갈 거네.” 그때 뒤에서 따르던 장덕 화청이 거들었다. “나솔, 부상자를 두고 와서 250여명이 남았소.” 계백은 숨만 들이켰다. 이제 내성으로 돌진하면 그 이상이, 또는 전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안준이 잇사이로 대답했다. 화청이 뒤로 물러갔고 곧 동산을 내려간 백제군 앞으로 신라군 대열이 펼쳐졌다.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창날, 쇠갑옷이 드러났다. 그때 계백과 안준이 쥐고 있던 칼을 치켜들더니 함성도 지르지 않고 앞으로 내달렸다. 거리는 30여보 정도, 웅성거리던 신라군은 처음에는 어둠 속에서 덮쳐오는 백제군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쪽저쪽에서 외침이 터졌다. “적이다!” “백제군이다!” 그때는 이미 선두에 선 계백과 안준의 첫 칼이 내려쳐진 후다. “으아악!” 비명이 살기를 솟구치게 한다. 더구나 백제군은 함성도 지르지 않고 덮쳐가는 터라 칼끝에 살기(殺氣)가 더 배었다. 마치 검은 파도처럼 백제군이 쏟아져 내려가면서 살육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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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5 19:58

[불멸의 백제] (56) 3장 백제의 혼(魂) ⑮

앞에서 내지른 신라군의 창날을 칼로 쳐 막으면서 계백이 와락 달려들었다. 화광이 충천해서 신라군사의 부릅뜬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으악!” 다음 순간 신라군사가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다. 계백이 몸을 틀면서 칼로 군사의 어깨를 내려친 것이다. 그때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 사이에서 외침이 울렸다. “나솔! 어디 계시오! 선봉장이 찾으시오!” “여기다!” 버럭 소리친 계백이 몸을 틀어 뒤를 보았다. 백제군이 지척으로 몰려왔다. 기마군이다. 계백을 본 기마군들이 달려와 둘러쌌고 일부는 앞으로 밀려가 신라군과 부딪친다. 잠시 후에 계백과 진궁이 한솔 협반과 마주보고 서 있다. 전장(戰場)이어서 아직도 앞쪽에서는 함성과 신음이 터지고 있었지만 많이 줄어들었다. 기마군 3천이 모두 들어온 것이다. 기마군은 기세를 몰아 불에 탄 민가를 뚫고 지나가 옆쪽 동산까지 점령한 상태다. “나솔, 이제 하루만 버티면 되네. 방령께서 내일 저녁에는 진입하실거네.” 협반이 계백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소리치듯 말했다. 협반의 시선이 옆에 선 진궁에게로 옮겨졌다. “대아찬도 수고하셨소.” “때맞춰 잘 오셨습니다.” 계백이 가쁜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곧 신라군이 전열을 정비하고 성문을 탈취하려고 할 것이오.” 진궁이 소리치듯 말했다. “앞뒤에서 협공을 하면 중과부적입니다!” 그렇다. 이제는 탈취한 성문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빼앗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 그때 협반의 부장(副將)이 다가와 소리쳤다. 불길을 뚫고 왔기 때문에 옷자락과 머리털이 그을렸다. “옆쪽 동산이 요지요! 그곳에 1천 군사를 배치해야 합니다.” “그럼 네가 가라!” 협반이 바로 지시했다. “좌군(佐軍)을 너한테 맡긴다!” 계백은 협반과는 처음 전쟁을 하지만 곧 전장에 익숙한 장수라는 것을 알았다. 전장에서 장수의 첫째 조건은 빠른 결단이다. 거기에다 냉정을 잃지 않아야 한다. 30대 초반의 협반은 백제 대성8족 중 하나인 협( )씨다. 부장이 서둘러 화랑 속으로 사라졌을 때 계백이 협반에게 말했다. “나솔, 저한테 1천 군사를 주시오! 내 군사와 함께 서문을 빼앗겠소.” “서문을?” 되물었던 협반의 눈이 곧 크게 떠졌다. “오오.” 탄성을 뱉은 협반이 소리치듯 말했다. “그렇지, 서문 수문장이 내통하고 있었지. 서문까지 탈취하기로 하자!” 머리를 든 협반이 소리쳤다. “우군(右軍) 대장을 불러라!” 불길을 뚫고 진입하려던 신라군은 거의 격퇴되어서 이제는 백제군만 보인다. 그 사이에 백제군 1진이 옆쪽 동산으로 진출하고 다시 1진이 서문을 탈취하려는 것이다. 백제군은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이것이 노련한 장수의 용병술이다. 전장에서 군사들을 멈추게 하면 안되는 것이다. “아직 연락이 없느냐!” 그 시간에 김품석이 내성의 청 안에서 소리쳐 물었다. 이제 밤 술시(8시)가 넘은 시간이다. 청 안에 모여선 장수들한테서 살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다. 그때 청 아래에서 무장 하나가 소리쳐 대답했다. “예, 아직 전령이 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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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2 20:00

[불멸의 백제] (55) 3장 백제의 혼(魂) ⑭

“무엇이? 북문에 불이?” 김품석이 소리쳤다. “무슨 말이냐!” “네. 북문 근처의 민가에 화재가 나서 북문 수비군이 길을 막고 있습니다!” 보고한 전령은 북문 경비로 보낸 대나마 서창의 군사다. “아니, 그럼 북문은 지금 어떻게 되었단 말이냐?” “북문 근처의 민가랑 모두 불에 타고 있습니다! 대나마가 성문으로 가려다가 북문 수비군이 활을 쏘는 바람에 못가고 있습니다!” “북문 수비군이?” “네. 수백명입니다!” “네.” 그때 부장(副將) 김용하가 말했다. “수상합니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서둘러!” 소리친 김품석이 눈을 부릅떴다. “수문장 그놈이 미친 모양이다. 반항하면 베어 죽여라!” 그시간에 북문 성벽 위에 서 있던 계백이 말굽소리를 듣는다. “선봉군이오!” 옆에 서 있던 무장 하나가 소리쳤다. “이쪽으로 옵니다!” “오오.” 진궁이 탄성을 뱉었다. 어둠 속에서 두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때맞춰 오는구나!” “횃불은 들어서 신호를 해라!” 계백이 소리치자 군사들이 다투어 횃불을 집어들었다. 어둠속에서 나뭇가지에 붙은 불길이 좌우로 흔들린다. “왔다!” 이쪽저쪽에서 함성이 울렸다. “이겼다!” 계백이 머리를 돌려 진궁을 보았다. “이제 시작입니다.” “그렇소. 성안에만 신라군이 1만 5천 가깝게 있소.” 그때 아래쪽에서 화청이 소리쳤다. “나솔! 불길 속으로 신라군이 돌파해 오고 있소!” “선봉군이 곧 올거야!” 계백이 말했을 때 불길을 뚫고 신라군이 몰려왔다. “막아라!” 계백이 소리쳤다. “그리고 머리에 흰 띄를 매어라!” 이제 곧 선봉군과 합류하게 될 것이다. 말발굽 소리는 지진처럼 울렸다. 거리는 5백보 정도, 계백이 성벽 아래로 뛰어 내려가면서 다시 소리쳤다. “성문을 지켜라!” 앞쪽에서 다가온 신라군과 백제군 사이에 칼부림이 일어나고 있다. 화청이 앞장서서 분전을 한다. 계백이 칼을 치켜들고 달려가자 군사들이 뒤를 따른다. “옳지. 들어간다!” 기마군 중심에서 알리던 한솔 협반은 선두가 성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어서 수십기가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성 안으로 들어간다. “와앗!” 뒤를 따르던 기마군이 함성을 질렀다. “이겼다!” 성 안은 불길이 충천해서 하늘이 붉게 물이 들었다. 협반은 칼을 빼들고 소리쳤다. “멈추지 마라!” 기마군이 전장에서 멈추면 커다란 과녁이 되는 것이다. 이윽고 협반도 성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불길에 휩싸인 거리를 백제 기마군이 쏟아지듯 나아가고 있다. 협반의 앞을 가로막는 신라군은 없다. 협반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나솔! 나솔 계백은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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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1 18:31

[불멸의 백제] (54) 3장 백제의 혼(魂) ⑬

북문 수문장 박기세는 다가오는 진궁을 보더니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전고(戰鼓)는 계속해서 울리는 중이었다. 북문 수비군은 이리 뛰고 저리 달리면서 성벽위로 오르거나 돌덩이를 나른다. 성벽 위에서 적에게 내던질 돌덩이다. “웬일이시오?” 박기세는 12품 대사 직급으로 휘하에 50여명의 수비군을 거느리고 있다. 다가선 진궁에게 묻더니 뒷쪽 군사들을 훑어보았다. 그때는 이미 1백 군사가 성벽의 돌계단을 오르는 중이었고 일부는 성문 주위에 흩어져있는 수비군과 섞여 있는 상황이다. “북문 수비를 도우라는 명을 받았어.” “금방 보군대장의 전령이 다녀갔소.” 박기세가 군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북문 수비군으로 대나마 서창님이 5백 군사를 이끌고 온다고 했는데.” “내가 지휘를 맡기로 했네.” 어깨를 편 진궁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어둠에 덮여진 북문 주변에 횃불이 밝혀져 있다. “그렇습니까?” 박기세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군주(軍主)께서 대아찬님을 폐마장에서 끌어내 주셨다니 다행이긴 합니다.” “그까짓 군주.” 후려치듯 말한 진궁이 허리에 찬 칼을 뽑았을 때다. 박기세가 펄쩍 뛰어 물러났다. 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이다. 옆쪽에 서 있던 군사 하나가 쥐고 있던 창을 치켜들더니 그대로 던졌다. 10보쯤 떨어진 거리를 일직선으로 날아간 창이 박기세의 가슴을 관통하고 등판으로 한뼘이나 창날이 빠져나왔다. “으악!” 박기세의 비명을 신호로 삼은 것처럼 사방에서 살육이 일어났다. 한동안 북문 주변은 비명과 외침으로 뒤덮였다. 박기세의 가슴을 창으로 꿴 군사는 바로 계백이다. 기습을 당한 북문 수비군이 전멸을 당한 것과 맞춰서 안쪽 민가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화청의 제2대가 불을 지른 것이다. “성문을 열어라!” “계백이 소리치자 군사들이 성문으로 달려들었다. 그시간에 한솔 협반은 대야성에서 10리 거리까지 다가왔는데 산모퉁이만 지나면 성이 보인다. 이제 3천 기마군은 속보로 달려가고 있다. 아직 대야성 상황을 모르는 터라 먼저 정탐군을 내보낸 것이다. 협반 옆으로 부장이 다가왔다. “한솔, 산모퉁이만 돌면 대야성이 보입니다. 그때는 다 드러납니다.” “어쩔 수 없어.” 협반이 잇사이로 말했다. “나솔이 살아있다면 신호를 할 것이다.” 이곳까지 와서 숨어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때 앞에서 질주하는 말발굽 소리가 울리더니 기마군 2기가 달려왔다. 첨병으로 내보낸 기마군 전령이다. “장군! 북문 안에서 불길이 오릅니다!” 전령 하나가 소리쳤고 이어서 다른 전령이 말을 잇는다. “북문이 열렸습니다.!” “나솔이 해냈구나!” 소리친 협반이 몸을 돌려 뒤를 따르는 백제군을 보았다. “북문으로 진입한다!” 무장들이 다시 소리쳤고 곧 3천 기마군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한솔! 서문이 아닌 것이 걸립니다!” 부장이 소리쳤지만 협반이 머리를 저었다. “성문이 열린 데다 안에서 불을 지른 것은 안의 공격을 막자는 의도다! 가자!” 협반은 공성전(攻城戰)을 여러번 치른 경험이 있는 것이다. 함정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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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0 20:10

[불멸의 백제] (53) 3장 백제의 혼(魂) ⑫

북이 울리고 있다. “전고(戰鼓)입니다. 선봉군이 지난 성에서 세 번째 전령이 왔습니다.” 진궁이 말했다. 방금 진궁은 내성에 들어가 분위기를 살펴보고 온 것이다. 유시(오후 6시) 무렵이다. 주위는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무장들은 출전 준비를 마쳤다. 머리를 끄덕인 계백이 둘러선 무장들에게 말했다. “죽으면 후생(後生)에서 만나세.” 그때 화청이 픽 웃었다. “나솔, 그런 출진 인사는 처음 듣소.” “이 사람아, 목숨을 바쳐서 싸우라는 인사는 너무 많이 써먹었어.” 그러자 해준이 말을 받는다. “저도 부하들한테 써먹지요. 후생이 있다니 든든해집니다.” 마구간 안 분위기가 가벼워졌고 신라 항장(降將) 격인 전택이 한마디 거들었다. “저는 후생에서 신라 성골 왕족으로 태어나 또 투항하지요.” “앗하하.” 한족 출신 화청이 소리내어 웃었다. “신라 뼈다귀에 한(恨)이 맺혔구려.” “출진.” 그때 계백이 말하자 모두 입을 다물더니 마구간을 나갔다. “나솔, 내가 앞장을 서겠소.” 마구간을 나온 진궁이 계백에게 말했다. 계백과 진궁은 1백명을 이끌고 북문을 먼저 점령하기로 한 것이다. 그 뒤로 화청이 이근 1백명이 근처 민가에 불을 지르고 해준과 전택은 뒤를 맡는다. 계백이 뒤를 따르는 군사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신라군 차림이었는데 굳어진 표정이다. “대야성을 빼앗으면 너희들이 1등 공을 세우는 것이다.” 계백의 목소리가 어둠 속을 울렸다. “생사(生死) 불문하고 너희들에게 포상이 따를 것이다! 1등 공 포상이다!” 백제땅 칠봉성에서부터 따라온 군사들이다. 지난번에 계백과 함께 신라땅을 무력정찰로 휘젓고 다닌 군사들인 것이다. 군사들의 눈빛이 강해졌다. 진궁을 앞세운 백제군은 폐마장을 벗어나 북문을 향해 다가갔다. 성 안에는 계속해서 북이 울렸고 주민들과 군사들이 어지럽게 섞여 이동하고 있다. 가끔 스쳐 지나는 무장(武將)들이 진궁을 보고는 건성으로 인사를 했다. 이쪽도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터라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다. 군사들을 배치하는 상황이어서 부대 이동이 많기 때문이다. “대아찬, 어디 가시오?” 이제는 어두워져서 가깝게 다가가야만 얼굴이 보였는데 불쑥 묻는 소리에 진궁과 함께 계백도 머리를 돌렸다. 무장 하나가 군사들을 이끌고 가다가 진궁을 바라보고 물었던 것이다. “오, 아찬 아니신가?” 안면이 있는 무장이다. “나는 예비병을 이끌고 북문 수비를 도우라는 명을 받았소.” “난 동문이오.” 손을 들어 보인 무장이 군사들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을 때 진궁이 계백에게 말했다. “저 자도 진골 왕족이오. 곧 배치가 되고 자리를 잡으면 내가 명을 받았는지 확인을 할 것이오.” 계백은 웃어 보이기만 했다. 그때는 이미 늦었을 것이다. 그들은 곧 북문이 보이는 낮은 동산에 올랐고 곧 내려가기 시작했다. 3백 백제군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앞장서서 걷던 진궁이 생각이 난 것처럼 머리를 돌려 계백에게 말했다. “나솔, 대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말보다 군사들에게 포상을 내건 것에 감동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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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19 21:16

[불멸의 백제] (52) 3장 백제의 혼(魂) ⑪

“잠한성입니다!” 옆을 달리던 부장(副將)이 소리쳤다. “곧장 전령을 보낼 것입니다!” “이미 전령이 두어 곳에서 도착했을 것이야!” 한솔 협반이 소리쳐 대답했다. 백제군 선봉 3천기가 땅을 울리며 달리고 있다. 예비마와 군량, 물자를 실은 후위대까지 4천여 필의 말이 달리는 것이다. “전령보다 빨리 달려라!” 협반이 말에 박차를 넣으며 다시 소리쳤다. 선봉군은 이미 신라 대야주 깊숙히 진입해 있다. 국경을 넘어 곧장 동진하다가 크게 우측으로 꺾어 남진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까지 신라의 성 9개를 스치듯 지나왔다. 일부 성에서는 기마군을 내어 쫓아왔지만 곧 성의 영역을 벗어나면 되돌아갔다. 모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는 봉화도 부수지 않고 지나간다. 오후 신시(4시)무렵, 앞을 달리던 정찰대에서 전령이 달려와 보고했다. “앞에 강이요!” “옳지, 대야성이 50여리 남았다!” 이미 지도를 모두 머릿속에 넣은 터라 부장 하나가 소리쳤다. 협반이 전령에게 지시했다. “강가에서 한식경쯤 쉬고 곧장 달려간다. 쉬는동안 밥을 먹는다!” 조금 이른 저녁이지만 때맞춰 요기를 할 수는 없다. 전령이 다시 나는 듯이 달려갔을 때 부장이 옆으로 붙더니 말했다. “한솔, 오늘 250리를 달렸습니다!” “나솔 계백이 제때에 성문을 열어줘야 하는데.” 협반이 땀과 먼지로 얼룩진 얼굴을 들고 앞쪽을 보았다. “제대로 성에 잠입했는지도 알 수가 없구나.” 나솔 계백만 의지하고 대군(大軍)이 움직인 셈이다. 그러나 전쟁에서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28세가 된 협반도 그동안 수십번 전장에 나간 역전의 용사다. 이번 대야성 진입은 그중에서도 가능성이 높은 경우에 든다. 그시간의 대야성. 김품석이 청에서 세번째 달려온 전령의 보고를 받는다. 모두 대야주의 성주가 보낸 전령이다. “기마군 5천기입니다!” 이번 전령은 현암성주가 보냈는데 대야성에서 1백리 거리다. 김품석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웅산성에서 직진하면 호곡성이 나오고 남진하면 현암성인 것이다. 현암성 다음에는 장한성, 그리고 그 다음이 대야성이다. 이제 백제군이 목표가 분명해졌다. 동경이 아니라 대야성인 것이다. 백제군이 동경을 목표로 했다면 호곡성의 전령이 달려왔어야 맞다. 청안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백제군이 대야성을 목표로 달려오는 중이다. 곧 장한성에서도 전령이 올 것이다. “준비하고 있었으니 걱정할 것 없다.” 김품석이 소리치듯 말하자 청 안이 조용해졌다. 그때 부장(副將) 김용하가 다가서며 말했다. “군주, 즉시 성문을 닫고 주민 출입도 금지시켜야 합니다.” “즉시 성문을 닫아라!” 김품석이 지시했다. “주위 성에 전령을 보내 대비하도록 하라!” “북을 쳐서 통금을 시키고 4개 성문에 병력을 파견해야 됩니다.” “즉시 시행하라!” 무장들이 서둘러 청을 나갔을 때 김품석이 다시 지시했다. “여왕께 전령을 보내도록! 그리고 이찬께도 연락을 해야겠다.” 이찬은 김춘추를 말한다. 김춘추에게 연락을 하면 김유신에게도 소식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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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18 20:20

[불멸의 백제] (51) 3장 백제의 혼(魂) ⑩

그러나 김품석도 위기감을 느끼고는 전군(全軍)에 동원령을 내렸다. 대야성 안에는 기마군 5천5백에 보군 8천여명이 주둔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성벽이 높고 단단해서 난공불락이다. 가야국의 왕성이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수백년간 수십번 공격을 받았지만 한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거성(巨城)이다. “성문을 모두 닫고 동문의 쪽문으로만 통행을 시켜라!” 김품석이 비상시에 대비한 명령을 내렸다. 전시(戰時) 체제로 운영을 하는 것이다. 무장과 관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고 청 안은 활기에 찼다. 김품석이 다시 전령장교를 불러 지시했다. “동경성의 이찬 대감께 갈 전령을 대기시켜라! 내가 편지를 쓰겠다!” 이찬 대감은 김춘추를 말한다. 이미 왕성의 여왕에게는 급보를 올렸지만 장인 김춘추에게도 상황을 전하려는 것이다. 그 시간에 폐마장의 마구간에서 계백이 무장들과 둘러앉아 회의를 하고 있다. 진궁과 전택까지 끼었고 모두 신라 무장 차림이다. 화청이 판자 틈 사이로 밖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미시(오후2시)쯤 되었으니 앞으로 두어 시진이 지나면 어두워질 것이오.” “그때까지 발각되면 안되오.” 전택이 거들었다. 3백명의 군사는 모두 훈련이 잘 된 정예다. 폐마장의 마구간이 부서졌지만 커서 모두 은신을 했고 둘씩 셋씩 요소에 숨어 경계를 했다. 날이 어두워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 계백이 입을 열었다. “선봉군이 어디쯤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술시가 되면 성문을 탈취한다.” 주위가 조용해졌고 계백의 말이 이어졌다. “목표는 북문, 먼저 선발대 1백명을 나와 대아찬이 이끌고 북문으로 다가가 수문장 이하 경비병을 베어 죽이고 점령한다.” 이미 선발대 병력도 구분시켜 놓은 것이다. “바로 뒤를 따라서 장덕 화청이 이끈 1백명이 근처 민가에 불을 지른다. 주민 피해는 될 수 있는 한 줄이도록.” 계백의 시선이 장덕 해준에게로 옮겨졌다. “그대는 급벌찬 전택과 함께 1백명을 이끌고 연락과 지원을 맡으라.” 위치는 맨 후방이 아니라 최전선이 된다. 불길을 보고 달려오는 신라군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계백이 좌우를 둘러보며 말을 맺었다. “불을 지르고 나면 모두 성문 주위에서 아군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성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화광이 충천한 북문에서 기다리는 것이다. 신라군은 불길을 피해 옆쪽 서문으로 나와 북문의 앞쪽에서도 공격해 올 것이었다. 그것도 막아야 한다. 무장들이 모두 떠났을 때 마구간에는 계백과 진궁 둘이 남았다. 그때 계백이 저고리 안에서 가죽으로 감싼 편지를 꺼내 진궁에게 내밀었다. “편지를 이제야 드립니다.” “고맙소.” 바로 받아든 진궁이 편지를 펴더니 마구간의 떼어진 기둥 틈으로 들어온 빛에 대고 읽었다. 이윽고 읽기를 마친 진궁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계백을 보았다. “받아들여 주셔서 고맙소.” “제가 죽어도 고화는 성주이며 나솔 부인의 대우를 받을 것입니다.” “이제 나는 여한이 없소.” “살아 남으셔서 가야인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는 것을 보셔야지요.” “이만하면 되었소.” 진궁이 손을 뻗쳐 계백의 손을 쥐었다. “내가 이제야 사위를 보게 되었구려.” “장인어른과 함께 사지(死地)로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둘이 마주보았고 동시에 허탈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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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15 18:22

[불멸의 백제] (50) 3장 백제의 혼(魂) ⑨

“북문 수비군사는 50여명입니다.” 서문 수문장 여준이 병사 차림의 계백에게 말했다. 오전 사시(I0시) 무렵, 여준은 잠시 틈을 내어 계백과 화청을 북문 근처로 안내한 것이다. 북문은 서문보다 좁았고 북쪽 산간지대로 통하게 되어 있어서 길도 좁았다. 서문과 동문이 국도로 통하는 길이라 대로(大路)다. 북문이 보이는 길가의 돌담 옆에 서서 계백이 여준에게 말했다. “북문이 지키기가 쉽겠소.” “아, 그렇군요.” 탄성을 뱉은 여준이 머리를 끄덕였다. “지당하신 말씀이오. 일단 성문을 빼앗으면 선봉군이 올 때까지 지켜야 될 테니까요.” 그렇다. 성 밖에 백제군이 나타났을 때 성문을 빼앗기는 힘든 것이다. 그때는 성안의 전 병력이 성문 근처에 집결해오는 상황이다. 계백이 주위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성문이 통나무로 되어있고 근처에 민가가 밀집되어 있어서 불을 지르면 북문 근처가 불바다가 될 것이오. 그러면 신라군이 접근하기 힘들겠지.” “과연 그렇습니다.” 화청이 말했다. “선봉군이 불길을 목표로 달려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문을 놔두십니까?” 여준이 묻자 계백이 웃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수문장은 서문에서 기다리고 계시오.” “알겠습니다. 오늘 밤에 계획대로 선봉군이 닿았으면 좋겠군요.” 계획대로라면 한솔 협반이 이끄는 선봉 기마군 3천이 오늘밤 안으로 대야성에 닿아야 한다. 그리고 한나절쯤 후에 윤충이 이끄는 기마군 중군(中軍) 7천5백이, 그리고 내일 밤에는 후군 3천5백이 들이닥쳐야 한다. 그리고나서 그 다음날, 의자대왕이 친히 이끄는 친위군 2만이 도착하는 것이다. 오시(12시) 무렵 또 전령이 대야성으로 달려왔다. 이번에는 대야성에서 서쪽으로 150리쯤 떨어진 웅산성에서 보낸 전령이다. “군주! 백제 기마군 5천여기가 동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것이 오늘 오전 축시쯤 되었소!” 전령이 가쁜 숨을 뱉으며 소리쳤다. 이번에는 김품석이 청에서 전령을 맞았는데 보고 내용도 상세하다. 전령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기마군은 경장 차림으로 웅산성 앞 5리 지점을 통과하여 곧장 동쪽으로 달려갔습니다.” “또 동쪽이냐?” 김품석이 소리치듯 물었지만 전령이 대답할리는 없다. 웅산성에서 동쪽으로 직진하면 역시 신라국 왕성(王成)인 동경성이 나오는 것이다. 김품석이 물었다. “5천기가 맞느냐?” “예, 맞습니다!” “전쟁이군.” 혼잣소리로 말한 김품석이 지시했다. “다시 왕성에 전령을 보내라! 백제 기마군 5천이 오늘 오전 축시에 대야주의 웅산성을 통과, 동쪽으로 달려갔다고 해라! 그럼 거리와 위치가 나올 것이다!” 그때 대아찬 벼슬의 부장(副將) 김용하가 한걸음 나섰다. “군주, 오전 축시에 기마군이 웅산성을 통과했다면 거리상으로 오늘 저녁 술시 경에 대야성에 닿습니다.” “이곳, 대야성에?” 김품석이 손가락을 구부려 청 바닥을 가리켰다. “여기로 온다고?” “예, 어쨌든 이곳도 웅산성, 박천성에서 동쪽입니다.” “동남쪽이야!” 김품석이 짜증난 표정으로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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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14 20:20

[불멸의 백제] (49) 3장 백제의 혼(魂) ⑧

진입했다. 진궁을 따라 폐마장으로 들어온 계백의 결사대는 먼저 말부터 풀어놓았다. 마장 군사 하나가 물었다. “어디 군사요?” 폐마장 경비군사는 다섯, 모두 졸개였으니 대아찬이며 성주(城主)였던 진궁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때 장덕 화청이 군사에게 대답했다. “백제군이네.” “농담하지 마시오.” 그 순간 화청이 허리에 찬 칼을 빼자마자 군사의 허리를 잘랐다. 신음을 뱉은 군사가 넘어지는 것을 신호로 백제군이 달려들어 남은 군사를 순식간에 베어 죽였다. “마장 구석에 묻어줘라.” 어둠속에서 화청의 목소리가 울렸다. “다섯이 나와서 저놈들 대신 경비를 서도록 해라.” 화청의 목소리를 등 뒤로 들으면서 계백이 해준에게 말했다. “군사들은 푹 쉬게 하고 날이 밝으면 눈에 띄지 않도록 하게.” “폐마장이 한적한 곳에 위치해서 다행이오.” 해준이 말하자 진궁이 손으로 끝 쪽 마구간을 가리켰다. 긴 막사가 2동이나 세워져 있다. “저쪽 마구간이 은신하기가 적당하오. 밖으로 나오지만 않는다면 말과 사람이 숨을 수 있소.” 대야성은 넓어서 산비탈 밑으로 사방 10리 길이로 성벽이 둘러쳐졌다. 폐마장은 외진 곳이라 낮에도 인적이 드물다. 계백이 진궁에게 물었다. “서문에서 가까운 성문은 어디요?” “북문이 7백보 거리에 있습니다.” 진궁이 말을 이었다. “작은 동산 하나만 넘으면 바로 북문이요.” 그러자 계백이 머리를 끄덕였다. “내일 나하고 그곳에 가 보십시다.” 계백이 무장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서문으로 들어왔다고 꼭 서문을 열 필요는 없으니까.” 서문 수문장 여준이 협조를 한다고 해도 결국은 서문 수비군을 치고 성문을 열어야 될 것이다. 백제군이 밖에 있는데 수문장이 성문을 열라고 명령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진시(8시)쯤이 되었을 때 대야성주이며 대야군주인 김품석이 잠에서 깨어났다. 전령이 달려왔기 때문이다. 내성 안까지 들어올 수 있는 장수는 위사장 김채순 뿐이다. “군주, 박천성주가 보낸 전령이 왔습니다. 봉화까지 띄웠다는 데 봉화를 보지 못한 터라 데리고 왔습니다.” 긴장한 김품석이 측실의 손을 뿌리치고 옷을 건성으로 걸치고는 침실을 나왔다. 마루에 선 김품석이 마당에서 기다리는 김채순과 전령을 보았다. “무슨 일이냐?” 김품석이 거친 목소리로 묻자 14품 길사 벼슬의 전령이 무릎을 꿇은 채 소리치듯 보고했다. “기마군 수천기가 박천성 남쪽 20리 지점을 지나 동쪽으로 갔습니다. 성주께서 군주께 그것을 보고하라고 했습니다.” “동쪽으로? 수천기가?” 김품석이 묻더니 혀를 찼다. “백제군이 맞느냐?” “백제군이 맞는 것 같다고 합니다.” “이런, 등신같은 놈들.” 어깨를 부풀린 김품석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동쪽이면 어디냐?” 전령은 입을 다물었다. 박천성에서 이곳 대야성은 동남쪽이다. 동쪽으로 직진하면 신라국의 왕성인 동경성이 나온다. 이윽고 김품석이 김채순에게 지시했다. “순찰대를 사방으로 띄우고 이 보고를 동경성에도 전하도록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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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13 20:46

[불멸의 백제] (48) 3장 백제의 혼(魂) ⑦

유시(오후 6시) 무렵이 되었을 때 서문 수문장 여준에게 진궁이 찾아왔다. 진궁은 미복 차림으로 뒤에 장춘이 따르고 있다. 여준은 저녁을 먹으려고 마악 서문을 떠나려는 참이었다. 나마, 왔어. 대뜸 말한 진궁이 바짝 다가섰다. 긴장한 여준이 눈만 깜빡였고 진궁이 말을 이었다. 3백기네, 지금 성밖 건지산 기슭에 있네. 모두 신라 기마군 차림이야. 그럼 술시가 조금 넘어서 들어오라고 하지요. 여준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신라군 차림이라도 표시가 날지 모르니 어두울 때가 좋습니다. 그리고 삼현성의 교대 병력 행세를 하라고 이르십시오. 알겠네. 지금 장춘을 보내지. 그러고보니 장춘의 뒤에 사내 하나가 서있다. 진궁이 말을 이었다. 기마군 3백기를 내 폐마장에 넣고 내일 저녁까지 숨겨 두었다가 밤에 서문을 탈취하겠네. 하루를 기다려야겠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여준이 길게 숨을 뱉었다. 상황을 짐작한 것이다. 성안에 기마군만 5천기가 넘습니다. 그럼 내일 저녁에는 선봉군이 옵니까? 밤에 올거네. 진궁이 말하고는 장춘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장춘과 사내가 몸을 돌렸다. 밤 술시(8시)가 조금 지났을 때 서문 성루에 서있던 군사 둘이 소리쳤다. 기마군이 옵니다! 주위는 어두워서 성루에 드문드문 횃불을 켜놓았다. 성루 뒤쪽에 있던 수문장 여준이 다가가며 말했다. 삼현성에서 교대병력을 보낸다는 전통을 받았다. 3백기가 신시(오후 4시) 무렵에 도착한다더니 늦구나. 그때 선두의 기마군이 성벽 아래에서 멈춰서더니 성루를 올려다 보면서 소리쳤다. 우리는 삼현성에서 오는 교대병력이오! 주성(州城)에 전통이 갔을 것이오! 성루로 서문 수비군이 몰려와 성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성벽은 20자(6m) 높이로 돌로 쌓았고 두께는 10자(3m)다. 성벽 위에서 군사들이 석벽 사이로 난 틈으로 활을 쏘면 다 맞는다. 그때 여준이 소리쳤다. 전통에 삼현성 보군대장 급벌찬 전택님이 병력을 인솔하신다고 했다. 급벌찬이 오셨는가? 내가 전택이네. 기마군 사이로 무장이 나서더니 소리쳐 대답했다. 오다가 예비마가 몇마리 다치는 바람에 늦었네. 여기 증표 있으니 보시게! 무장이 품에서 증표를 꺼내 흔들었다. 성문을 열어라! 이만하면 철저히 검문을 한 셈이다. 다른 때 같으면 전통받은 것만으로도 묻지도 않고 성문을 열었을 것이다. 여준이 소리치자 곧 육중한 성문을 10여명의 군사가 달려들어 좌우로 벌렸다. 성문이 둔중한 소음을 내면서 열린다. 통나무에 철을 씌운 문이어서 두께가 2자(60cm)나 된다. 이윽고 성문이 열리자 기마군이 쏟아져 들어왔다. 여준이 성루 아래로 내려가자 전택이 다가왔다. 둘은 같은 가야족 호족으로 안면이 있다. 말에서 내린 전택에게 여준이 낮게 말했다. 저쪽 나무 밑에서 대아찬님이 기다리고 계시오. 고맙네. 나마. 내일 저녁에 다시 보십시다. 우리가 가야를 다시 찾는 것이야. 전택이 잇사이로 말하자 여준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이더니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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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12 20:07

[불멸의 백제] (47) 3장 백제의 혼(魂) ⑥

검문소 한곳의 군사를 몰사시켰으니 군주(軍主)에게 보고하는 것도 당연하다. 기마군은 이제 속보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대야성까지의 거리는 1백리, 신시(4시)까지는 닿게 될 것이다. 속보로 달리는 계백의 옆으로 장덕 화청이 다가왔다. “나솔, 강행군이니 대야성 근처에서 쉬었다가 진입해야 합니다.” 화청이 말을 이었다. “선봉군은 이틀 후에야 오지 않습니까?” 그렇다. 남방(南方) 방령 윤충이 이끄는 대군(大軍)에 앞서 한솔 협반이 선봉군 3천과 함께 이틀 후에 닿을 것이었다. 그래서 선봉군이 오기 전에 성문을 탈취해야만 한다. 그러나 빨리 탈취해도 다시 빼앗긴다. 신라군은 안팎에서 공격을 해올 테니 역부족이다. 계백이 화청에게 말했다. “전령보다 빨리 대야성에 닿아야 돼. 대야성 안으로 들어가서 말을 버리고 은신했다가 선봉군이 왔을 때 안에서 성문을 여는 것이야.” 본래의 계획은 하루 전에 진입하는 것이었지만 이틀전에 성 안으로 들어가 잠복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계백의 어깨에 3백 결사대뿐만 아니라 3천 선봉군이, 그 뒤를 따르는 윤충의 2만 기마군의 운명이 걸린 셈이다. 유천 검문소 군사가 몰사했다는 보고는 다음날 오전 오시(12시) 무렵이 되어서 정안성주 김길생에게 전해졌다. “무엇이?” 놀란 김길생이 눈을 치켜뜨고 되물었다. “몰사했다니? 백제군의 기습이란 말이냐?” “예, 지난번처럼 백제 유격군이 휩쓸고 지난 것 같습니다.” “다 죽었어?” “소장 이하 17명이 모두 죽었소.” 순찰조장의 목소리가 청을 울린 것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에 말발굽이 수백개 찍혀져 있었습니다. 백제군이 기습한 것이오.” “아니, 그렇다면….” 그때 관리 하나가 나섰다. “성주, 군주께 전령을 띄워야 할 것 같소. 이곳이 주성(州城)으로 가는 길목이니 서둘러 보고를 하시지요.” “아니, 그것보다도….” 이맛살을 찌푸린 성주가 꾸짖듯 말했다. “무조건 아이처럼 보고만 하는 것이 성주가 할 일이냐? 언제 무엇한테 어떻게 당했는가를 자세히 알아보고 보고를 해야 하지 않는가?” 백번 맞는 말이었지만 속셈은 보고를 들은 군주로부터 질책을 받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김길생이 건의한 관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네가 유천 검문소에 가서 더 자세한 내막을 알아오너라.” “예, 성주.” 성주의 본성을 아는 관리가 몸을 돌리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이것으로 대야성으로 떠날 전령이 한나절 늦어졌다. 그 시간에 선봉 기마군 3천기를 이끈 남방군 소속 한솔 협반이 박천성 남쪽 20리 지점을 통과하고 있다. 이곳은 산라 국경에서 안쪽으로 2백리나 들어온 곳이다. 3천 기마군이면 예비마까지 포함해서 4천필의 말떼가 달리는 것이니 땅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고 멀리서는 천둥이 우는 소리로 들린다. “기마군 수천기가 동쪽으로 뜁니다!” 나는 듯이 달린 순찰 기마군이 박천성주에게 보고를 했고 이쪽 성주는 기민했다. 주성(州城)으로 전령을 보내는 한편 봉화를 띄웠다. 그러나 봉화는 3번째에서 뚝 끊겼다. 봉화대의 군사는 많아야 10여명. 계백의 결사대가 도중의 봉화대 2곳을 드문드문 잘랐기 때문이다. 한 곳만 잘라도 그 뒤쪽은 장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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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11 20:48

[불멸의 백제] (46) 3장 백제의 혼(魂) ⑤

누구냐? 어둠속에서 외침이 울렸다. 밤, 축시(2시)경, 기마군은 삼현성에서 동쪽으로 1백리 정도 나아간 상태다. 이곳은 정안성에서 20리쯤 떨어진 강가, 흐린 날씨여서 별빛도 없는 천지는 먹물속 같다. 그때 선두에서 기마군을 안내하던 전택이 소리쳐 대답했다. 나는 삼현성 보군대장 급벌찬 전택이다! 너는 누구냐! 저는 정안성 유천 검문소 군사올시다! 앞쪽에서 사내가 외쳤다. 이 밤중에 어디로 가는 군사입니까? 세곡을 싣고 대야성으로 간다! 군주의 지시로 밤을 세워 가는 중이야! 그러는 사이에 기마군은 검문소로 더 접근했다. 어둠속이었지만 검문소가 드러났다. 앞장선 전택은 이제 검문소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검문소 윤곽이 드러났다. 통나무로 지은 2채의 막사, 이미 검문소 안에서 군사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10여인이다. 그때 군사들을 헤치고 무장 하나가 나섰다. 나는 검문소장 대사 유만성이오! 삼현성 급벌찬이라면 증표를 보이시오! 여기있네. 전택이 마상에서 나무를 깎아만든 증패를 내밀었다. 이제 검문소 군사들이 횃불을 켜서 주위가 환해졌다. 기마군 3백기가 검문소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되어서 군사들이 잔뜩 긴장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 신라군 차림이라 두리번거리기만 할 뿐이다. 그때 증표를 본 검문소장이 전택에게 돌려주면서 다시 물었다. 삼현성에 내 의형제가 있소. 수문장으로 있는 사지 안태상이를 아시오? 누구? 사지 벼슬의 안태상이오. 그때 계백이 군사들을 헤치고 앞쪽으로 나와 둘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제 기마군은 검문소를 사방으로 둘러쌓아서 물샐틈이 없다. 3백 기마군이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는 터라 둘의 문답이 뒷쪽에까지 들린다. 그때 전택이 물었다. 대사, 그대도 가야인인가? 그렇습니다. 올려다보는 대사 직급의 검문소장의 눈이 번들거렸다. 30대쯤의 건장한 체격이다. 시선을 받은 전택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를 믿지 못하고 있군. 무슨 말씀이오? 나도 가야인이야. 그렇습니까? 사지 벼슬의 안태상이란 수문장은 작년에 병으로 죽었네. 의형제가 그것도 모르고 있었나? 아. 수문장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져졌다. 잠깐 잊고 있었소. 그순간이다. 전택이 허리에 찬 칼을 후려치듯이 뽑으면서 수문장의 목을 쳤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수문장이 목에서 피를 품으며 쓰러지기도 전에 기마군이 덮쳤다.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명령을 하지도 않았다. 비명과 외침, 신음은 잠깐동안 이어지다가 뚝 그쳤다. 마상에서 공격한 기마군은 함성 한번 지르지 않고 검문소 군사들을 도륙한 것이다. 말에서 뛰어내린 기마군사 10여명이 막사 안까지 뛰어들어가더니 신음이 울렸다. 그때 피가 묻은 칼을 칼집에 넣으면서 전택이 계백을 보았다. 장군, 제가 동족을 쳤습니다. 살려둘 수가 없었어. 계백이 위로하듯 말하더니 말고삐를 당겼다. 검문소가 당한 것을 알면 전령이 김품석에게 보고를 할 거다. 이제는 낮에도 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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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08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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